무려 반세기 만에 돌아온 비상 계엄 사태를 경험하고 보니, 그간 세상이 변화 발전한다는 느낌도 말짱 환상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다. 이건 단순히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미국과 러시아는 신냉전에 접어들었고, 우크라이나며 중동 전쟁에서는 핵 위협까지도 종종 거론된다.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핵 공포가 사라지고 세계 평화가 실현되나 싶더니만, 21세기 내내 전쟁과 테러가 여전하여 지상에는 여전히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민주주의건 자본주의건 끝없는 발전의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이고, 한때 그 대안으로 여겨지던 다른 이념과 체계 역시 매한가지다.


결국 앞으로 나아간다고 여겼던 반세기조차 실상은 제자리걸음에 불과했으니 참으로 허망한 느낌마저 든다. 이런 상황에서 의외로 위안이 되었던 책은 지난번 현직 대통령의 실책 가운데 하나인 사과 가격 파동을 계기로 다시 읽은 역사 에세이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였다.


역사가 레이 황은 중국사의 여러 가지 특수한 사건들을 거론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역사가 장기적으로 합리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격언처럼, 아무리 이상하고 이해불가능하게 보인 사건조차도 결국에는 이치에 맞는다는 걸까.


어쩐지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나, 결국에는 하늘이 사람을 이긴다"는 말도 떠오른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에세이에서 각별히 인상적이었던 인용문인데, 아버지와 형을 죽인 원수의 시체를 파내서 매질한 오자서를 향해서 복수가 지나치다며 자제와 포용을 당부하던 신포서의 말이었다. 


물론 하늘의 법도나 섭리라는 것이야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허구의 개념에 불과할 것이고, 레이 황이 지적한 역사의 장기적 합리성 역시 무제한의 낙관주의를 깔고 있는 순진한 발전 사관까지는 아닐 것이다. 다만 수명의 장단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인식의 상대성을 지적한 것은 아닐까.


최근 뒤적인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에서는 물질 세계와 문명 건설을 처음부터 분리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왕조와 전쟁 중심의 정치사에 머무른 기존의 역사보다 더 넓은 시야를 도모하려는 것이었을까. 산과 바다처럼 유구함이 특징인 불변의 조건도 실제로 있으니 일리가 있어 보인다.


비록 불변까지는 아니어도 비교적 변화가 적거나 느린 자연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단지 그 위에서 복작대며 흥망을 거듭하는 인간사의 허망함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군웅과 제국의 정치와 군사 활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화며 문명이며 하는 것 역시 찰나의 가치밖에는 없는 게 아니려나. 


이쯤 되면 레이 황이 언급한 역사의 합리성도 설득력 있게 보일 수 있다. 그가 예시하는 중국 역사의 여러 사례만 보아도 수십 년의 정체와 퇴보는 가능할지 몰라도, 수백 년의 단위로 보자면 그런 문제점조차도 결국 극복되고 일신되어 문명이 더욱 견고해졌다는 것이 핵심 논지이니 말이다.


참새의 날개짓이 대붕의 날개짓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물론 길어야 칠팔십인 인간의 수명으로 보자면 수백수천 년의 장기 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실수를 반복한다'는 인터넷 밈처럼, 순간의 착오로 수십 년간 이어질 차질을 빚는 것도 그래서일까.


그렇게 보면 지난 반세기의 제자리걸음도 수백 수천 년의 견지에서는 결국 역사의 합리성에 희석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될 날이 오려나? 물론 지금의 현실에서는 '교통 사고가 있어야 합리적 교통 정책도 생기는 법'이라는 역사가의 현명한 조언도 아주 큰 위로까지는 되지 못할 법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마 전에 책더미를 뒤지다가 몇 년 전에 알라딘 건대점에서 구입한 로버트 펜 워런의 <악마의 형제들>이 보이기에 꺼내 놓았다. 그 당시에 어떤 책을 사면서 배송료 지우려고 다른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작품은 생소해도 작가는 너무 유명하다 보니 주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버트 펜 워런(1905-989)은 20세기 미국의 저명한 작가로, 소설과 시 양쪽에서 퓰리처상을 모두 세 번이나 수상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아울러 클리언스 브룩스와 공저한 <시의 이해>와 <소설의 이해> 등을 통해 이른바 신비평의 대표적인 비평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특히 <소설의 이해>는 과거 우리나라 여러 대학에서도 교재로 사용된 까닭인지, 한동안 헌책방에서 복사본 원서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속편 격인 책이 <소설의 분석>이라는 제목으로 현암사에서 번역된 적도 있었고, 단독 저서로는 소설 <천사의 무리>가 삼성출판사에서 번역된 바 있다.


사실 소설 중에서는 1947년 퓰리처상 수상작 <왕의 모든 부하(All the King's Men)>가 가장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이 소설은 훗날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번스타인과 우드워드의 저서 <대통령의 모든 부하(All the President's Men)>의 제목 유래로도 알려져 있다. 


흔히 "모두가 왕의 신하"나 "모두가 대통령의 부하"로 옮기는 제목이지만, 실제로는 마더 구스 동요집에 수록된 "험프티덤프티"의 한 대목에서 가져온 구절이기 때문에 ("왕의 모든 말들, 왕의 모든 부하조차, 험프티를 살리지 못했네") 문맥을 감안하면 "모든 신하"와 "모든 부하"가 맞다.


<악마의 형제들>은 시 분야에서 워런의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장편 극시이다. "시와 대화로 된 이야기"라는 부제 때문에 구입 당시에 얼핏 살펴본 느낌으로는 운문 희곡이 아닐까 지레짐작했는데, 이번에 읽으며 다시 살펴보니 비록 희곡 형식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시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번역서의 제목은 "악마의 형제들"이지만 원제는 "용의 형제들"(Brother to Dragons)이고, 구약성서 "욥기" 30장 29절의 흠정역 성서 번역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영어 번역에서는 해당 구절을 "재칼의 형제들"로 옮겼고, 한글 성서에서도 "이리/승냥이의 형제"로 옮겼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리"가 "용"으로 오인되었는지는 몰라도, 욥이 자신의 몰락을 한탄하는 ("나는 이제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친구가 되어 버렸다") 대목이니, 해당 구절도 "용"보다는 "이리"가 그럴싸해 보인다. 다만 성서에서 "용"이 "악마"의 별칭이니 "악마의 형제들"로 옮긴 게 아닐까.


물론 이 제목에서 가리키는 "형제"의 행적을 보면 "악마"라는 섬뜩한 표현도 아주 틀린 것까지는 아니다. 1811년 미국 켄터키 주의 한 농가에서 백인 릴번 루이스와 이셤 루이스 형제가 17세의 흑인 노예 소년 조지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심지어 그 시체를 토막내서 불에 태우기까지 했다.


강요에 못 이겨 소년의 살해와 시신의 훼손에 동참했던 다른 흑인 노예들이 입을 다물어 버림으로써 단순 실종, 또는 도주로 처리될 뻔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바로 다음날 벌어진 대형 지진 때문이었다. 난리 통에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시신 일부가 결국 이웃에게 발견된 것이다.


비록 온전한 사람 취급까지는 못 받던 흑인 노예였지만, 그렇다고 당시의 법률상 함부로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형제는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고, 교수형이 확실해 보이는 상황에서 유서를 쓰고 동반 자살을 감행했지만, 결국 형 릴번만 사망하고 동생 이셤은 살아남았다.


문제는 살인자인 이들 형제가 무려 미국 전직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조카라는 점이었다. 제퍼슨의 여동생 루시가 찰스 루이스와 결혼해서 낳은 두 아들이 릴번과 이셤 형제였기 때문이다. 그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형제는 제퍼슨의 최측근인 탐험가 메리웨더 루이스와도 친척 관계였다.


그나마 제퍼슨의 대통령 임기가 사건 발생 전인 1809년에 이미 끝난데다가, 마침 해당 지역에 닥친 지진의 여파로 인해 그리 큰 스캔들로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누구보다도 옹호했던 인물인 제퍼슨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충격과 체면 실추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악마의 형제들>은 이 사건의 당사자와 주변인 여러 명이 사후에 만나서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인 워런도 RPW라는 이니셜로 등장해서 이런저런 질문이며 감상을 내놓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인 노예 소년 조지만큼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듯이)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제퍼슨은 생전의 기록 어디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지만, 이 작품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다시피 한 조카들의 행동 때문에 사후에도 수치와 당혹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된다. 급기야 양아들이나 다름없던 메리웨더 루이스까지도 제퍼슨을 난처하게 만든다.


루이스는 제퍼슨의 비서로도 재직했던 최측근이었으며, 이 대통령의 대표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루이지애나 매입 직후에 해당 영토를 탐험하러 떠난 원정대를 지휘했을 정도로 크게 신뢰 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훗날에는 정적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좌절한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루이스가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아무리 좋은 이상도 냉혹한 현실 앞에서는 무기력하더라고 주장하자 제퍼슨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 여동생의 간청을 받아들여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조카들을 용서하기로 한다. 인간에게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함을 시인한 것이다.


사실은 제퍼슨 본인도 흑백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새뮤얼 존슨의 비아냥처럼, '본인부터가 노예주인 주제에 자유를 가장 크게 부르짖은 인물'이기도 했으며, 노예제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 이용했을 뿐더러, 노예 여자에게서 사생아까지 낳았으니까.


따라서 제퍼슨이야말로 인간의 양면, 또는 모순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또 애써 억누른 사람이었다고 치면, 못된 조카들의 범행은 그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현실로 불러낸 악몽 같은 사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수수께끼로 남은 제퍼슨의 침묵 역시 그 반증일지도 모를 일이다.


역자 해설을 보면 남부 출신임에도 흑인 문제에 대해 침묵했던 워런이 본격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 입을 열기 시작한 작품으로도 평가하는 모양이지만, 그보다는 이성과 격정, 또는 천사와 악마의 공존이야말로 인간의 원초적인 상태임을 드러내는 것이 저자의 목표는 아니었을까 싶다.


워런은 <악마의 형제들> 초판을 1953년에 간행했고, 무려 사반세기 뒤인 1979년에 내용이 대폭 수정된 개정판을 간행했는데, 우리말 번역본은 그중 개정판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 운문 번역의 어려움을 감안하면 비교적 무난한 편이지만, 일부 대목에서는 살짝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다.


특히 편집 면에서 아쉬운 부분을 여럿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고유명사(미노토/미노타우로스)와 주요 용어(준주/테리토리)가 통일되지 않은 것이 거슬리고, 권말의 미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본문에서는 해당 부분에 미주를 보라는 표시가 없는 것 역시 이해하기 힘든 실수이다.


역자 해설도 작품의 해석에 치중하다 보니, 일반 독자가 이 책을 읽기 위해서 필요한 사전 지식을 제공하지는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흑인 노예 조지 살인 사건의 개요는 물론이고, 제퍼슨과 메리웨더 루이스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배경 설명을 해 줬다면 어땠을까.


그나저나 <악마의 형제들>을 읽고 보니 워런의 다른 작품도 어떨지 궁금해진다. 내친 김에 오래 전에 사다가 묵혀 놓은 소설 <천사의 무리> 번역본도 읽어보려고 꺼냈는데, 함께 수록된 버드 슐버그의 크리스마스 단편을 읽다 보니 휴일이 지나가 버렸다. 과연 올해 안에 읽을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세기의 미국인에게 가장 충격적인 기억이라면 1963년에 있었던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꼽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은 그 소식을 접한 순간 자신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생생히 기억한다고 대답했으니, 대낮에 벌어진 현직 대통령 암살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나 짐작할 만하다.[*]

 

물론 기억이란 퇴색하게 마련이고 사람의 수명도 한계가 있는 만큼, 6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케네디 암살의 충격을 기억하는 미국인도 드물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21세기 벽두에는 이 사건조차 빛이 바랠 만큼 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바로 2001년의 9/11 테러였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퓨리서치센터에서 2011년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21세기의 미국인에게 가장 충격적인 기억을 남긴 역사적 사건은 9/11 테러였다. 그 다음 순위로는 케네디 암살, 빈 라덴 사살, 아폴로호 달 착륙, 챌린저호 폭발, 킹 목사 암살, 닉슨 하야 등이 꼽혔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8/15와 6/25부터 10/26과 12/12까지 그저 날짜로만 언급되는 각종 사건사고가 먼저 떠오르지만, 언론 통제가 남아 있던 시절이니 즉각적인 충격은 덜했을 수 있다. 반면 세월호 사건처럼 실시간 생중계로 전달된 비극은 충격도 더 크지 않았을까.


벌써부터 12/3으로 지칭되는 이번의 비상 계엄 사태 역시 우리에게는 과거의 여느 사건 못지않은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군사 정권 시대 이후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겠지만,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황당함이 더 지배적이지 않았을까.


나귀님은 그날 그때 마침 유튜브에서 순살감자탕 조리법을 검색하던 중이었다. 바깥양반이 며칠 전부터 감자탕 먹으러 가자고 노래를 부르는데, 얼마 전 유튜브에서 요리 동영상을 보니 뼈다귀 말고 순살로만 감자탕을 끓여도 저렴한 가격에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물론 동영상마다 조리법이 조금씩 다르다 보니 여러 가지 참고해서 가장 적절해 보이는 것을 찾아내야 했는데, 그렇게 이것저것 뒤지다 보니 갑자기 뉴스 속보라는 게 뜨는 거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서 침소봉대한 제목을 달고 있는 허위 영상인 줄 알았다.


워낙 옥석이 뒤섞인 유튜브이다 보니 한창 화제가 되는 내용을 악용하는 낚시성 조작 영상도 흔하다. 몇 번 당하고 보니 뭔가 놀라운 내용이다 싶으면 의심부터 하게 되어서, 이번 비상 계엄 발령 소식도 츠키처럼 긴가민가요 하다 뒤늦게 YTN을 틀어보고 나서야 진짜임을 알았다.


이처럼 믿기 힘든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렸으니, 이제는 국민 전체의 기억에 뚜렷한 상흔이 남게 되지 않았을까. 물론 심리적 상흔뿐만 아니라 실체적 상흔도 없지 않을 법한데, 섣부른 조치로 외교와 경제 등에서 큰 후유증이 불가피해 보인다는 관측이 벌써부터 있기 때문이다.


가장 비판 받을 사람은 대통령 본인이겠지만, 일각의 지적처럼 여러 측근 그룹으로 이루어진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큰 문제이다. 다행히 출동한 군인들이 태업한 덕분에 피해 확산을 막았다지만, 군대의 특성상 명령 불복종은 또 그것대로 큰 문제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독단과 망상으로 인해 온 국민이 충격과 부담을 감내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두 주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혼란한 상황이었으니, 앞으로 내년까지 이어질 탄핵과 대선을 거치면서 또 어떤 풍파가 밀어닥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한편으로는 12/3도 결국 시간이 흘러 지금의 충격을 경험 못한 세대가 등장하면 '비상 계엄은 필연적'이었다는 둥,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둥 갖가지 헛소리가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다. 이미 10/26이며 12/12며 심지어 5/18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왔으니까.


여하간 두 시간 반만에 끝나 버린, 따라서 대통령의 주장에 따르면 내란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비상 계엄에 비하자면, 그 절반의 시간 만에 완성된 순살감자탕은 그럭저럭 성공한 편이었다. 물론 바깥양반 말로는 국물이 너무 적었고, 우거지도 너무 적었고, 감자만 많았다지만...



[*] 나귀님에게도 '대통령'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박정희 피살 사건이다. 물론 10/26 당시의 구체적인 사회 분위기까지 생각나지 않지만, 어째서인지 오후 6시가 되어도 만화영화는 안 나오고 TV에서 향불 사진과 함께 우울한 음악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오제의 죽음"이었다) 흘러나오기에 의아했던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뉴스를 보니 최근 연이은 정권 퇴진 시위와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보도가 나온다. 시위 참가자들이 소녀시대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를 떼창하는 바람에, 무려 17년 전인 2007년에 발매된 노래가 다시 화제가 되면서 새삼 인기를 얻고 있다는 거다.


나귀님이 이 현상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수년 전 이화여대에서 벌어진 점거 농성 사태 때였다. 대학에서 운동권 문화가 사라진 지 오래이다 보니 시위 참가 학생들도 대부분 민중 가요를 몰랐고, 대안으로 모두 아는 노래를 찾다 보니 그게 나왔다던가.


처음 들었을 때에는 시위판에 무슨 아이돌 노래냐 싶어 황당하게 생각했었는데, 뉴스에서도 지적했듯이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워낙 유명한 노래라서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고, 한글로만 이루어진 가사가 희망적인 내용이라서 더욱 공감을 얻는 모양이다.


하긴 옛날 민중 가요 중에 가장 유명한 "아침 이슬"도 원래는 일반 가요였다. 누군가가 시위 도중에 부르면서 유행하게 되었고, 김민기와 양희은의 증언처럼 결국에는 작곡가며 가수와도 완전히 동떨어진 노래가 되었다. 소녀시대의 노래도 그렇게 되는 걸까.


그런데 수년 만의 정권 퇴진 시위에서 나타난 변화는 아이돌 노래만이 아닌 듯하다. 급기야 아이돌 응원봉이며, 각종 서브컬처를 상징하는 깃발도 등장했다니, 양지뿐만 아니라 음지의 각종 세력마저 합세하는 상황에서 이 정권의 종말도 머지않아 보인다.


급기야 어제는 친구들 따라서 여의도 국회 앞에 다녀왔다는 바깥양반까지도 다음번 시위에 갖고 나갈 아이돌 응원봉을 사야겠다 말한다. 하지만 막상 검색해 보니 가장 싼 것이 수만 원, 인기 있는 것은 십수만 원을 호가하기에 선뜻 주문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냥 몸만 나가거나, 양초와 종이컵만 지참하거나, 심지어 시위 물품을 공짜로 나눠주기까지 했던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상황이니, 이쯤 되면 이제는 정권 퇴진 시위에서도 일종의 빈부격차나 서열화나 선행학습이 있는 것인가 싶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학부형도 아닌 나귀님 입장에서야 노스페이스나 하츄핑 같은 등골브레이커가 그저 남의 일이려니 생각했는데, 갑자기 아이돌 응원봉 타령이니 이걸 사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여하간 이놈의 정권이 하루빨리 없어져야만 돈도 아낄 수 있을 듯한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강이 참석한 노벨상 시상식에 관한 신문 보도를 읽다 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각 부문 수상자의 시상에 앞서 주최측이 선정 이유를 설명하는데, 보통은 말미에 주최측 발표자가 해당 수상자의 모국어로 한 마디를 곁들이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의 선정 이유에도 말미에 한국어 문장을 한 마디 곁들이기 위해서 주최측 발표자가 현지의 한국어 번역가에게 의뢰해서 해당 문장의 녹음까지 따갔던 모양인데, 결국에는 발표자가 자연스레 발음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빼버린 모양이다.


표면상으로는 어색한 발음 때문에 수상자나 그 고국 모두에 누를 끼칠까봐 그랬다지만, 제아무리 어색한 발음이라도 외국인이 우리말을 구사하려 애썼다는 사실 자체에 기꺼이 감동하는 우리 정서를 감안해 보면, 설령 '물, 물코기'가 되더라도 그냥 읽는 게 낫지 않았을까.


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번번이 잘못 발음되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농담을 해서 큰 웃음을 자아냈듯이,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시상식에 한국어가 곁들여졌다면 제아무리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더라도 일종의 밈이 되어 두고두고 회자되었을 법하다.


그렇다면 서양인 기준으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로 손꼽히는 중국어의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궁금한 김에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모옌의 시상식을 유튜브로 검색해 보니, 이때에도 역시 선정 이유 말미에는 중국어 문장이 포함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어찌 보자면 노벨상 주최측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같은 서양 언어와 달리 한국어와 중국어를 어렵게 여겼음을 근거 삼아, 마치 세계 문학의 기준인양 자처하는 노벨문학상 역시 서양과 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꼬집을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시상식 이후 개최된 연회에서는 사회자인 스웨덴 대학생이 예상 밖의 한국어로 한강을 소개했다고도 전하니, 잘만 하면 '한글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과시할 기회를 놓친 우리 정서로는 아무래도 주최측의 '정성 부족'과 '노력 부족'을 탓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한 번은 수상자가 탁월한 어학 능력으로 주최측을 놀래킨 경우도 있었다. 196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머리 겔만이 그 주인공인데, 영어로 시작한 기념 강연을 중간부터 유창한 스웨덴어로 바꿔 말하는 바람에 객석에서 졸던 국왕도 놀라 깨어났다고 한다.


겔만은 15세에 예일 대학에 입학하고 21세에 MIT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을 만큼 신동으로 유명했는데, 전공인 물리학 말고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까닭에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에서 가져온 '쿼크'와 불교에서 가져온 '팔정도' 같은 명칭을 소립자에 도입하기도 했다.


이런 겔만의 행동을 현학적이라고 조롱한 과학자들도 없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절친이자 직장 동료인 리처드 파인만이었다. 파인만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면 겔만이 곧바로 박학다식을 자랑하고, 파인만이 짜증나서 약을 올리면 겔만이 '긁힌' 일화가 여럿 전해진다.


그래도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면 그 파괴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함께 교수로 재직하던 칼텍에서 열린 학술 세미나마다 맨 앞줄에 두 명이 나란히 앉아서 까다로운 질문을 번갈아 가면서 던지는 바람에, 발표자의 입장에서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파인만의 탁월함에 반해 '나는 그를 형제처럼 사랑했다'고 회고한 프리먼 다이슨과 달리, 겔만은 항상 저 유명한 동료에게 츤츤대며 경쟁 의식을 불태웠던 듯하다. 어쩌면 쾌활하고 소탈한 성격의 파인만이 열한 살이나 어린 겔만을 항상 동생 취급한 것이 억울했던 것일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비트겐슈타인과 포퍼, 이 나오미와 저 나오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제아무리 이쪽이 저쪽을 평생의 경쟁자로 여기고 누르기 위해 애를 쓰더라도, 막상 저쪽이 이쪽을 '아웃 오브 안중'으로 대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파인만과 겔만도 그랬다.


어떤 면에서는 '남이야 뭐라 하건'이란 좌우명으로 살아가는 파인만과는 정반대인 겔만의 완벽주의적 성격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다고도 볼 수도 있겠다. 문제의 스웨덴어 강연도 거의 완벽하게 마무리했지만, 정작 본인은 발음 한두 개 틀린 것을 두고두고 자책했다 하니까...




[*] 위에서도 언급한 노벨상 수상자 선정 이유만 엮어서 내놓은 책도 있는데, 바다출판사에서 간행한 <당신에게 노벨상을 수상합니다> 시리즈이다. 아직까지는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분야의 선정 이유(번역서에서는 '시상 연설'이라고 했다)를 엮은 책만 나왔는데, 한강의 수상을 계기로 조만간 문학상 분야의 책도 나오게 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