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지 이야기>의 최초 원문 완역인 이미숙 번역본이 서울대출판부에서 1-2권만 간행되고 절판되어 아쉽더니만, 3-6권이 소명출판 한국연구재단 번역 총서로 속간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절판된 1-2권을 외면하고 3-4권부터 간행하며, 소명출판 번역 총서 디자인을 그대로 따르는 까닭에 판형과 표지도 싹 달라졌다는 점이다.


알라딘 포함 주요 서점에는 판형 정보도 잘못 기재된 것처럼 보인다. <겐지 이야기> 3-4권은 152x223cm라고 나오지만, 기존 총서 디자인을 따랐다면 152x232cm일 것이다. 소명출판 총서로 나온 <역주 악서 6>은 152x232cm, <알무타납비 시 선집>은 152x223cm라고 나오지만, 나귀님이 직접 재 보니 양쪽 모두 152x232cm였기 때문이다. 


서울대출판부의 <겐지 이야기> 1-2권이 152x223cm이니, 소명출판의 <겐지 이야기> 3-6권과 나란히 꽂으면 높이 차가 1센티미터나 되고, 디자인도 달라 상당히 볼품없어질 것이다. 예전의 학술진흥재단(한국연구재단의 전신) 번역 총서는 출판사가 달라도 판형과 표지를 통일시켜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출판사마다 제멋대로다.


이런 식의 일관성 없는 총서/전집 간행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예를 들어 지난번에 나귀님이 언급한 정암학당의 플라톤 전집을 보라) 이번 사례는 총서/전집도 아닌 작품 하나를 쪼개면서도 들쑥날쑥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판받을 만해 보인다. 더 큰 문제는 한국연구재단 번역 총서에서 이런 사례가 처음까지도 아니란 점이다.


예를 들어 에드먼드 스펜서의 <선녀 여왕> 전6권도 1-2권이 나남, 3-6권이 아카넷에서 나오면서 판형과 표지가 달라졌다. 세창출판사에서 나온 짓펜샤 잇쿠의 <동해도 도보 여행기> 1-2권도 실제로는 원저 3-8권만의 번역이고, 원저 1-2권은 해당 번역자가 소명출판에서 먼저 간행한 <짓펜샤 잇쿠 작품 선집>에 있어서 따로 사야 한다.


물론 번역자의 사정이며 출판사의 사정이며 기타 등등의 사정으로 인한 변경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관계자 누구도 독자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았다는 점은 꽤나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운동화 한 켤레를 주문했는데 제작사의 사정으로 사이즈와 디자인이 변경되었다며 짝짝이 물건이 도착하면 기분이 어떻겠나?


어떤 면에서는 한국연구재단 번역 총서가 이름 그대로 상업 출판이 아니라 세금 먹는 묻지마 출판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다. 즉 지원금을 받은 대가로 결과물을 내는 것이 우선이지, 번역이나 편집의 품질이라든지 나귀님 같은 하찮은 독자놈의 기분 따위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고 봐야 맞을 것도 같다는 거다.


그렇다면 나귀님으로선 책을 이따위로 망쳐 놓은 관계자들에게 부디 평생 쇼핑 망하라는 악담이나 남기고 싶다. 예를 들어 운동화 한 켤레건 양말 한 켤레건 간에, 사는 물건마다 항상 짝짝이로만 배달되길 기원하고 싶은 것이다. 기껏 책을 사고도 볼 때마다 짜증이 치미는 독자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면 그 정도는 겪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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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카프카 100주기라고 해서 번역이며 평론이며 심지어 만화까지 이것저것 많이 나오며 떠들썩했는데, 그 사이에 체홉 번역서도 몇 가지 더 나온 것을 보고 희한하다 싶어 무슨 영문인가 알아보니 마침 7월 15일이 체홉 120주기였다고 한다.


카프카에 이 정도로 떠들썩했다면 체홉도 그에 버금갈 정도로는 떠들썩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막상 당일이 지나도록 체홉 평론이나 만화는 나오지 않은 듯하고, 심지어 알라딘의 알량한 창립 25주년 이벤트한테도 밀리고 만 듯하다.


나귀님이야 러시아 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그저 책 몇 권 읽은 것뿐이니 딱히 말할 자격이야 없겠으나, 나름대로 최근 수년 사이에 많이 관심이 갔던 저자가 바로 체홉이었던 관계로 아쉬운 마음에 그간 뒤적인 내용을 토대로 몇 가지 적어볼까 한다.


체홉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볼 결심을 한 것은 2020년의 코로나 대유행 시작 즈음이었다. 부득이하게 며칠 집에 박혀 있으면서 이번 기회에 못 읽은 책이나 읽어치우자 싶어 꺼낸 것이 오래 전에 사다 놓은 범우사의 다섯 권짜리 체홉 선집이었다.


체홉이라면 보통 단편부터 접하기 쉬울 터인데, 나귀님 역시 풍자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그의 초기 단편을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다. 생계를 위해 저술했기에 오늘날에는 문학적 가치가 덜하다는 박한 평을 받는 작품들이지만 재미만큼은 확실하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대략 "꽁트"에 해당하는 짧은 이야기들인데, 그중에는 인생과 인심의 여러 단면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것들이 있어서 각별히 오래 기억에 남았다. 나귀님이 특히 재미있게 읽은 것은 "뚱뚱이와 홀쭉이"와 "카멜레온"이란 작품이다.


"뚱뚱이와 홀쭉이"는 8급 공무원 홀쭉이가 옛 친구인 뚱뚱이를 우연히 만나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친근하게 너나들이를 하지만, 뚱뚱이가 무려 3급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홀쭉이가 갑자기 태세전환하며 비굴한 언행을 보인다는 내용이다.


"카멜레온"은 경찰서장이 거리에서 사람을 문 개를 발견하며 시작된다. 당장 개를 혼내라고 언성을 높이다가,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저건 모 장군님 댁 강아지 같다'고 말하자마자 역시나 태세전환하며 오히려 물린 사람을 나무란다는 내용이다.


범우사의 체홉 선집은 1-2권에 단편, 3-4권에 중편, 5권에 희곡을 모아 놓았는데, 해학적인 작품을 좋아하는 나귀님이다 보니 구입 이후에도 1-2권만 완독하고 나머지 작품은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가, 코로나 덕분에 나머지 책들도 읽게 되었다.


다만 범우사의 체홉 선집은 편집이 영 좋지 않다. 오타는 기본이고 오역도 있는데, 예를 들어 희곡에서 한 명이 하는 대사를 오독해 두 명이 하는 대사로 (즉 "이씨: 어이, 김씨, 이봐"를 "이씨: 어이"와 "김씨: 이봐"로) 나누어 버린 경우가 그렇다.


여하간 체홉은 가볍고 해학적인 경향의 꽁트를 쓰며 문단에 나왔으나 '아까운 재능을 썩히지 말고 좀 더 진지한 작품을 쓰라'는 선배 작가의 충고에 심기일전해서 본격적인 소설을 발표하는데, 그중 하나가 선집 3권에 수록된 중편 "초원"이다.


나귀님으로서도 처음 읽는 셈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중 몇 가지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이한 작품이었다. 정확한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취학 연령이 된 소년이 삼촌을 따라 초원을 가로질러 대도시까지 먼 길을 떠나면서 겪는 사건이다.


삼촌은 중도에 어딘가 다녀와야 한다며 소년을 초원에서 마주친 상인들의 무리에게 맡기고, 이후 상인들을 따라 여행하던 소년은 갑작스러운 폭우를 겪고, 일행 가운데 고참과 신참 상인의 주먹다짐을 목격하는 등 새로운 세상을 연이어 경험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괴롭힘을 참다 못한 신참이 고참에게 대들었을 때, 심지어 소년까지 분개해 주먹을 움켜쥐고 덤비자, 방금 전까지 악역이었던 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어디 때려 봐라' 하면서 여유를 부리는 대목이다.


적어도 아이에게까지 야박하지는 않은 것을 보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봐야 하는 걸까? 여하간 소년은 다시 삼촌과 만나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초원에서 겪은 갖가지 경험의 후유증 때문인지 이후 며칠 동안 끙끙 앓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초원"을 읽고 나서 새삼스레 체홉의 진지한 면모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관심이 생겼고, 특히 그의 생애에서 또 한 번의 큰 전환점이었다던 사할린 여행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는데, 정작 그 기행문은 뒤늦게야 구입한 관계로 아직 읽지 못했다.


이러구러 단편과 중편을 섭렵하는 과정에서도 제5권에 수록된 대표 희곡만큼은 유난히 손이 가지 않았는데, 체홉이 소설가 못지않게 극작가로도 유명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귀님의 편향된 독서 습관은 상당히 부당한 처우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다 마침내 체홉의 희곡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단첸코의 회고록이었다. 그는 스타니슬랍스키("노력! 분발!")와 함께 모스크바 예술극단을 이끌며 <갈매기> 재공연에 성공하여 극작가로서 체홉의 명성을 굳혀준 은인이기도 하다.


단첸코의 회고록은 <모스크바 예술극단의 회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일어 중역본이다 보니 고유명사 표기부터 (예를 들어 "빌헬름"을 "비르헤르므"라고 쓰는 등) 완전 엉터리인데,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니 새 번역이 나오면 좋겠다.


이 회고록의 전반부는 체홉의 말년을 서술하는데, 기존의 유행과 다른 사실주의 희곡인 <갈매기> 초연이 관객의 몰이해로 대실패하며 크게 좌절했다가, 수년 뒤의 재공연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비로소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는 것으로 나온다.


일각의 증언에 따르면 <갈매기>에 나오는 저 유명한 '동물 이름 대기' 부분에서 관객이 웃음을 터트린 것이 초연 실패의 원인이라는데, 시공사에서 나온 <체호프 희곡 전집>에는 어째서인지 거기 나오는 동물 이름 가운데 하나가 빠져 있었다.


여하간 <갈매기> 재공연이 큰 호응을 얻으며 체홉은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 같은 대표 희곡을 계속해서 저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몰락이라는 소재를 담담하게 풀어 나가는 작품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법하다.


단첸코의 회고가 워낙 흥미진진한 까닭에 읽어보기는 했지만, 솔직히 나귀님의 구미에 딱 맞는 희곡들은 아니었다. 츠게 요시하루의 "리얼리즘 여관"에 나오는 대사처럼 '이 정도로까지 리얼리즘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는 느낌도 들었으니까.


체홉의 희곡이 높은 평가를 받는 까닭은 오늘날에는 흔해진 이런 일상적인 내용을 최초로 시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단첸코에 따르면 체홉은 연습 중인 배우들에게 사실적인 연기를 주문했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는 체홉 본인도 몰랐다 한다.


단첸코의 회고록에는 고리키와의 만남과 인연도 서술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요양 중이던 체홉을 만나러 갔다가 저만치서 오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어보았더니, 마침 그 사람이 방금 체홉을 만나고 나오던 고리키였다는 신기한 일화도 있다.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를 덩달아 읽은 것도 단첸코의 회고록 덕분인데, 이것저것 사다 놓고서 아직 읽지 않았던 각종 장편과 단편과 회고록과 전기까지를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훑어보려 작정하다가 코로나 대유행도 그만 끝나고 말았다.


원래의 계획 중에는 범우사의 체홉 선집과 다른 여러 출판사의 단편선에 나온 소설들만 모조리 읽고 나서 일종의 번역 작품 목록을 작성해 보는 것도 있었는데, 코로나 대유행 초기의 혼란이 지나며 시간이 없어지는 바람에 중도작파하게 되었다.


이 계획은 수년 전에 알라딘 중고샵에서 영역본 체홉 단편 선집(THE TALES OF ANTON CHEKHOV, 13 vols., trans. by Constance Garnett. New York: Ecco, an imprint of HarperCollins Publishers, 2006) 박스세트를 구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제13권 권두의 해설에 따르면 체홉의 생전에 전집에 수록된 단편은 240편이며, 사후에 추가로 수집된 단편은 196편이었다. 가넷의 이 번역본은 앞의 240편 가운데 198편을 수록하고, 뒤의 196편 가운데 13편을 수록해서 모두 209편을 수록했다.


누락된 작품은 짧은 스케치, 또는 돈벌이용 글이어서 가치가 덜하다고 판단했다는 설명이니, 비록 편수로는 절반 미만이지만 대표적인 작품은 대부분 들어갔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법해서, 영역본 제목 기준으로 번역본 서지를 작성하려던 것이었다.


번역 작품 목록이 필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단편집에 중복된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겹치는 작품들을 살펴보고 나면 가장 적은 권수로 가장 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도출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다만 가넷 번역에 대해서는 나보코프가 톨스토이에 관한 글에서 혹평한 바 있어서 살짝 긴가민가 싶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저 러시아 출신 망명 작가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 아무러면 어떠겠나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나보코프는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체홉을 모파상에 비교하는 것을 거부하며 저 프랑스 작가를 폄하하지만, 단첸코의 증언에 따르면 체홉은 평소에 모파상을 무척 좋아하고 높이 평가했다니, 여기에서만큼은 나보코프가 틀린 셈이다.


우습게도 나보코프의 소설 <세바스찬 기사의 참인생>에는 이와 유사하게 제목에 나오는 망명 작가의 행적이며 성향에 대해서 함부로 넘겨짚는 돌팔이 비평가들에 대한 야유가 잔뜩 등장하고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제 얼굴에 침 뱉기가 아닐까. 


심지어 나보코프는 체홉을 추켜세우기 위해 고리키를 깎아내리는데, 아무리 그래봤자 체홉이 생전에 교우했던 사람은 나보코프가 아니라 고리키였으니 이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여하간 나보코프의 말은 제법 할인해 들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귀님도 고리키라면 볼셰비키 정권에 동조했으니 기회주의자이자 관변 작가가 아닌가 하는 인상도 없지 않았는데, 일각에서는 휴머니스트인 관계로 여차 하면 소련의 양심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만 좌절하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는 모양이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를 보면 스탈린의 백해 운하 건설 당시 강제 노동하던 죄수들이 고리키의 방문 소식에 '그라면 이곳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줄 것이다'라고 기대하고서, 그의 시선을 끌려고 일부러 신문을 거꾸로 들고 읽었다고 나온다.


역시나 그 모습을 본 고리키가 선뜻 다가와서 '이보시오, 왜 당신은 신문을 거꾸로 들고 읽는 거요?'라고 물었지만, 감독관인지 당국자인지가 동행한 까닭에 노동자는 가혹한 현실을 차마 제보하지 못했고, 의아해 하던 고리키도 떠났다 한다.


물론 이제 와서 스탈린의 폭정과 소련의 실패 모두를 고리키의 (또는 동시대의 사회주의 동조자들의) 탓으로 돌릴 수야 없겠지만, 독재 치하의 휴머니스트였던 그가 과연 어디까지 인식했고 어디부터 침묵했는지는 솔직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오랜 우상인 톨스토이를 직접 만나 감탄하면서도 어쩐지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고 느꼈다고 말한 것이라든지, 톨스토이보다는 오히려 악녀 취급 받는 부인에게 오히려 공감했던 것을 보면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니 말이다.


다시 체홉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의 생애나 작품을 자세히 소개하는 우리말 연구서가 없다는 점은 여전히 아쉽다. <체호프의 시대>라는 책이 있지만, 전공자만 독자로 상정했는지 "스쩬까"와 "스까즈"라는 용어가 설명 없이 등장해 황당했다.


구글링해 보니 "스쩬까"는 결국 스케치(sketch), 즉 단편보다도 짧은 글을 가리키고 "스카즈"는 구술 형식(oral form of narrative)으로서 레스코프의 작품에서처럼 등장인물의 구어체를 최대한 그럴싸하게 재현하는 것을 가리키는 모양이다.


내친 김에 <러시아 현대비평이론>에 수록된 보리스 에이헨바움의 "스까즈의 환상"이라는 짧은 글까지 찾아 읽고 나니, 이 용어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어렵다는 점까지는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짜고짜 음역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나 싶다.


여하간 의욕만 있었고 성과는 없었던 나귀님의 체홉 읽기였지만, 120주기를 무심히 보내기 아쉬워 몇 가지만 대강 적어 본다. 부디 130주기에는 좀 더 관심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도 들지만, 결국 카프카 110주기에 또 밀릴 건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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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전당 대회 첫날 트럼프가 붕대를 감은 채 깜짝 등장해서 갈채를 받았다는 뉴스가 나오는데, 그의 옆에 선 부통령 후보의 이름이 J. D. 밴스라고 한다. 뭔가 낯익은 이름이다 싶더니만, 바로 <힐빌리의 노래>의 저자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자서전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더니만, 이후 정계로 진출했던 모양이다.


다만 번역서 제목은 정확하지 않다. 원제의 Elegy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애가"(哀歌), 즉 슬픔의 노래이며 대개 애도하는 노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한때 이미자를 "엘레지의 여왕"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결국 힐빌리의 암울한 현실을 개탄하는, 또는 힐빌리에게 바치는 슬픔의 노래라고 할 만하다. 


<힐빌리의 노래>는 출간 직후에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사서 잠시 훑어보기만 했는데, 무엇보다도 근래에 나온 책 중에는 보기 드물게 교육의 가치를 역설하는 내용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제목 그대로 저자는 힐빌리, 즉 시골에 사는 가난한 백인 가정 출신인데, 그를 키운 할머니는 강인한 성격인 동시에 배움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결국 저자는 해병대와 주립 대학을 거쳐 그 동네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예일대 로스쿨까지 다니게 되었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대부분 특권층 출신이라는 사실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졸업 후에는 예일대라는 간판과 인맥을 이용함으로써 예전 같았으면 상상조차 못했던 기회의 문들이 열리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고도 회고한다. 


그의 회고를 보면 미국의 백인 빈곤층의 암울함과 박탈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공화당의 말마따나 '복지 여왕'으로 요약되는 복지 제도의 부작용에 대한 증언도 있다. 생활 보호 대상자인 이웃이 매달 식품 구매 쿠폰을 받으면 저자의 할머니를 찾아와 '현금 깡'을 하고는 마약을 사기 위해 달려 나갔다는 이야기다.


이런 사례를 보며 자란 까닭인지 밴스는 극단적 보수주의와 포퓰리스트라는 비판도 받는 모양이다. 트럼프하고도 처음에는 대립 관계였다가 최근에야 지지 관계로 바뀌었다는데, 사실상 당선이 따 놓은 당상인 상황에서 향후 부통령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가 궁금해진다. 댄 퀘일처럼 놀림거리만 되고 끝날지, 아니면 더 큰 꿈을 꿀지.


그나저나 트럼프는 이번 총격 사건 이후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관측도 있는데, 단지 일시적인 반응일지 지속적인 영향일지 궁금하다. 일각에서는 총알이 간발의 차로 빗나간 것 때문에 지금의 트럼프가 '덤으로 사는 인생'을 얻었다고도 말하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일종의 실존 체험인 셈이다.


제아무리 안하무인 트럼프라도 인간인 한에는 죽음 앞에서 움찔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니, 뒤늦게 혼자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오싹하지 않았을까. 물론 사건 발생으로부터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니 지나친 기대일 수 있지만, 결국 또 트럼프인가 싶어 한숨이 앞서는 상황에선 조금은 바뀌었으면 하는 것이 모두의 마음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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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 자다 점심 때쯤 일어났더니만 트럼프 총격 사건으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 선거 유세 중에 연단에 있던 그를 누군가 총으로 쏘았는데, 마침 천운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는 바람에 총알이 빗나가서 귀에만 스치고 아슬아슬 목숨을 건진 모양이다.


심지어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연단에서 내려가는 과정에서도 한손을 주먹 쥐고 번쩍 치켜들며 건재를 과시해서 청중을 열광시켰는데, 어떤 인위적 연출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사실상 이번 대선은 트럼프가 승기를 잡은 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트럼프를 좋아할 리 없는 나귀님으로서도 이쯤 되면 '저건 하늘이 돕는 사람인가' 하는 탄식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사업도 몇 번 말아먹었다가 운 좋게 재기했었고, 대통령도 한 번 거하게 말아먹었다가 재도전해서 당선이 눈앞이니 말이다.


특히 암살을 모면한 행동을 보면 조선 초에 태종이 태조의 암살 시도를 운 좋게 피했다는 야사가 생각난다. 골육상쟁 끝에 왕위를 차지한 아들이 미워서 죽이려고 활도 쏘고 철퇴도 들었지만 연이어 실패하자 '이건 천명이다!' 하며 승복했다던가.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소설 <자칼의 날>에서 드골 대통령이 암살을 모면한 것도 생각난다. 행사장 연단에서 훈장 수여자에게 입을 맞추려 고개를 살짝 숙이는 바람에 총알이 빗나갔는데, 영국인 킬러가 프랑스인의 습관을 몰랐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연단 위의 대통령 암살 시도라면 물론 육영수 저격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가 잽싸게 연단 뒤에 몸을 숨긴 것 때문에 지금도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번 트럼프의 반응 역시 총격임을 깨닫자마자 앉으면서 연단 뒤에 몸을 숨긴 것이었다.


누군가가 자기를 노리고 총을 쏘는 상황에서 몸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인데, 거꾸로 피해자를 겁쟁이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 박정희도 잘못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이걸 가지고 비난할 것은 아닌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육영수 저격 사건에 책임을 지고 경호실장 자리에서 물러난 박종규가 그보다 몇 년 전에 <암살사 연구>라는 책을 썼다는 것이다. 예전에 헌책방에 있기에 나귀님도 사다 놓았는데, 이번 기회에 '암살' 책장에서 다시 꺼내봐야 되겠다.


로널드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도 떠오르는데, 고령에다 심각한 총상에도 의연한 태도를 보여 지지율이 급상승했었다. 조디 포스터를 연모한 까닭에 범행을 저질렀다던 범인 존 힝클리는 34년간 복역하고 2016년에 석방되어 지금은 자유의 몸이라 한다.


고령이며 치매 논란에 시달리는 바이든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번 암살 시도가 자신을 겨냥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을 법하다. 트럼프처럼 가벼운 부상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동정표는 물론이고 의연함까지 드러내 건강 문제를 불식시켰을 테니까.


물론 일각에서는 트럼프 자체가 워낙 막장이니 이번 사건으로도 지지율이 크게 오를 것 같지는 않다고 예측하는 모양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바이든으로서는 '어찌하여 바이든을 낳으시고 트럼프를 낳으셨나이까!'라고 하늘을 원망하진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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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매장에 나온 독일 타셴의 화집 시리즈 보급판 가운데 록 음악 앨범 표지를 모은 것이 있어서 구입해 보았다. 이전에도 음반 표지 1000종을 모아 소개한 비슷한 내용의 화집을 산 적이 있었는데, 저자명을 비교해 보니 아예 다르기에 안심하고 구입했다.



ROCK COVERS: 750 ALBUM COVERS THAT MADE HISTORY by Robbie Busch & Jonathan Kirby. Ed. by Julius Wiedemann (Koln: Taschen, 2014; 2022)


"록 음반 표지: 역사를 만든 음반 750종"이라는 제목처럼 다양한 음반 표지를 소개하는데,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 같은 고전도 있고, 신선하다 못해 위악적인 펑크 음반은 물론이고, 조니 미첼이나 제임스 테일러 같은 의외의 가수들의 음반도 포함되었다.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 음반도 하나 들어 있더라는 것인데, 바로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라는 가사로 유명한 노래 "또 만나요"를 부른 밴드 딕 훼밀리의 1집(작별 / 또 만나요)이다. 가수명은 DICK FAMILY, 발행년도는 1976년, 음반사는 JIGU로 나온다.


비스듬하게 뻗어 있는 건물 기둥 사이에 밴드 멤버 일곱 명이 나란히 선 모습이 절묘한 구도를 형성한 까닭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흥미로운 점은 이 음반의 제목이 DICK FAMILY / QUEST'S FAMILY 라고 적혀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밴드명인데 후자는 도대체 뭘까?


구글링해 보니 그 당시 정부의 외국어 금지 조치 때문에 "딕 훼밀리" 대신 "서생원 가족"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는데, 멤버 중 한 명인 "서성원"의 이름을 활용한 말장난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1집 표지에는 "서생원"이 아니라 "서생의" 가족이라고 나온다.


결국 QUEST'S FAMILY라는 영어명은 "서생의 가족"의 번역으로 추정되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QUEST와 "서생" 사이의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는 거다. 혹시나 하고 "QUEST + 서생"으로 구글링해 보니 영화 <음란서생>의 영어명이 FORBIDDEN QUEST 라고 나온다.


이 영화가 2006년작이고 타셴 화집의 초판이 2014년에 간행되었으니, 어쩌면 "서생의 가족"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음란 서생 = FORBIDDEN QUEST"이므로 결국 "서생 = QUEST"라는 잘못된 추론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서생의 가족 = QUEST'S FAMILY"가 된 것이 아닐까?


물론 확증까지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이 정도가 가장 그럴듯한 해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나저나 구글링해 보니 딕 훼밀리는 "나는 못난이"가 수록된 2집을 내놓은 이후 해체했고, 38년 만인 2014년에 컴백했지만 그룹 이름을 둘러싼 분쟁도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즉 엣 멤버들이 재결합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 활동을 전개하면서 "딕 훼밀리"라는 이름을 가져다 쓰는 바람에 서로 '내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급기야 "서생의 가족"인지 "서생원 가족"인지의 유래인 서성원이 나서 밴드 이름의 속뜻을 설명했다.



>>> "딕 훼밀리의 딕(Dig)은 '파다' '연구하다'는 뜻이죠. 즉 '음악을 공부하는 가족'이란 뜻으로 제가 지었어요. 근데 제가 활동을 안 할 적에 다른 '딕 훼밀리'들이 마구 만들어졌는데 딕(Dig)을 딕(Dick)으로 쓰고 있더군요. 낯 뜨거웠지요. 외국인이 보면 깜짝 놀랄 겁니다."(출처 : 천지일보, 2014. 08. 22) <<<



왜냐하면 DICK은 영어에서 음경을 가리키는 속어이기 때문이다. 직역하면 "자지 가족"이니 황당하고, 심지어 사진에 나왔듯 멤버 가운데 한 명은 여자이기 때문에 더욱 황당할 수밖에. 하지만 "딕 훼밀리"라는 이름을 듣고 DICK 대신 DIG을 떠올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좋은 의도였더라도 DIG FAMILY라는 영어명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니, 훗날 DICK FAMILY로 와전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바로 그렇게 와전되어 희한해진 이름 때문에 타셴 화집의 저자들도 이 음반에 주목했을지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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