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결국 사달이 난 대구동성로점 주문에서 1차 목표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었다. 피에르 루이스의 작품으로는 짐작컨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번역되는 셈일 것 같은데, 첫 번째로 번역된 작품과의 시차가 무려 한 세대 이상이나 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 첫 번째 번역서가 바로 저자의 대표작인 <빌리티스의 노래>(삐에르 루이 지음, 김명자 옮김, 종로서적, 1980)인데, 1895년 간행 당시 저자의 창작 시집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여성 시인 빌리티스의 작품을 발굴하여 번역한 것이라 주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중에 가서는 번역이 아니라 창작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애초부터 사기를 치려는 의도였다기보다는 더 이전에 있었던 오시안의 사례라든지, 이후의 여러 작가들이 시도한 익명/허구 저자의 작품처럼 창작의 연장에 속하는 행위였다고 보는 게 맞겠다.
<빌리티스의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1977년 영화 <빌리티스>는 알 수 있겠다. 또 이 영화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프란시스 레이가 담당한 테마곡만큼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 수 있다. 각종 광고와 프로그램에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빌리티스의 노래>는 고대 그리스 여성 시인 사포의 작품을 모범으로 삼은 것인 만큼, 동성애자로 짐작되는 여성 화자가 자신의 삶과 사랑에 대해 서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977년 영화 <빌리티스> 역시 현대를 배경으로 한 비슷한 소재의 작품으로 알고 있다.
이 시집과 영화의 직접적인 영향 때문인지, 1955년 미국에서 결성된 최초의 레즈비언 단체도 '빌리티스의 딸들'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고 하니, 오늘날 빌리티스는 사포나 레스보스 못지않게 여성 동성애자(레즈비언)의 상징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에서도 빌리티스라는 이름은 암암리에 퍼져 있는 듯도 하다. 2011년에는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이란 수상쩍은 제목의 KBS 단막극이 방영된 바 있고, 최근에는 엉뚱하게도 뉴진스의 "디토" 뮤직비디오가 영화 <빌리티스>를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나왔었다.
빌리티스의 원조(?)인 사포의 시집은 <에게해의 사랑>(사포 지음, 오자성 옮김, 한겨레, 1991)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바 있다. 같은 번역자가 훗날 <고대 그리스 서정시선>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는데, 원문 번역인 <고대 그리스 서정시>와도 목차가 비슷하다.
그나저나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피에르 루이스의 단편 네 편을 엮은 것인데, 생각만큼 특이하거나 흥미롭지는 않아서 살짝 실망했다. 특히 표제작은 화자의 말투가 오락가락하는 대목도 있고, 누군가를 "헤치지" 않겠다는 표현도 등장하는 등 편집 역시 별로였다.
해설에서도 살짝 언급되듯 피에르 루이스라면 오늘날에는 외설 작가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사실이다. <빌리티스의 노래>나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도 에로에로한 부분이 등장하지만, 사후 간행된 <세 자매와 그 엄마>라는 소설이 빼박캔트 포르노이기 때문이다.
한 남성이 사는 집에 30대 중반의 매춘부와 세 딸이 번갈아 찾아와서 각자의 기상천외한 이력이며 황당무계한 경험을 서술하고 살을 섞는다는 내용인데, 그 딸들의 나이가 각각 20세, 14세, 10세에 불과하다는 점이야말로 오늘날의 시각에서 가장 문제가 될 법하다.
이쯤 되면 요즘 분위기에서는 출판사부터 시작해서 알라딘(문제의 소설의 불어판과 영어판 모두를 판매 중이니까!)이며 나귀님까지 철컹철컹 쇠고랑을 차고도 남을 법한 내용 같은데, 오히려 해외 문화계에서는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두둔하는 것이 현실이다.
대표적인 두둔자가 미국의 문학평론가 수잔 손탁이다.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에 수록된 "포르노그래피적 상상력"에서 <세 자매와 그 엄마>를 폴린 레아주의 <O의 이야기>와 조르주 바타유의 <눈 이야기>와 함께 예술의 경지에 이른 외설물 가운데 하나로 거론한다.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놓고 논란이 되는 작품들의 공통점은 애매함이다. 세 작품 모두 실제로 읽어 보면 노골적인 묘사가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완전 극단적이고 뻔뻔한 수준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으니, 나귀님처럼 야한 것 좋아하는 독자가 보기에는 영 미진하다.
나귀님 같으면 <세 자매와 그 엄마>를 볼 시간에 차라리 <패니 힐>이나 <꼬마 돈 후안의 모험> 같은 진짜 외설물을 보겠다. 생각난 김에 검색해 보니 양쪽 모두 지금은 절판이어서 중고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올랐으니, 새삼 진정한 외설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