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내내 알라딘에 들어올 때마다 검색창에 "지루한 건 유죄!"라는 광고 문구가 뜨기에 도대체 뭔가 싶어 눌러 보니 <지루하면 죽는다>라는 책이었다. 그런데 저자 이름이 좀 낯익은 듯해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거, 염소 야려 죽이기 책을 썼던 양반 강연에서 인터넷 조리돌림의 사례로 거론되었던 바로 그 사람 아닌가 싶었다.


검색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의 저자 존 론슨이 TED 강연 "트윗 하나가 당신의 삶을 망칠 수 있다"(How one tweet can ruin your life)에서 그 제목이 가리키는 현실의 실제 사례 가운데 하나로서 맨 처음에 들었던 것이 바로 조나 레러의 표절/위조 사건이었다.(유튜브에서 자막까지 곁들여 볼 수 있다).


조나 레러는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와 <탁월한 결정의 비밀>을 비롯해서 뇌과학에 대한 대중서를 여러 권 내놓아 명성을 얻은 저자/언론인이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자기 표절은 물론이고 인용문 날조도 여러 건 범했고, 이를 무마하려 거짓말까지 동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크게 망신과 비판을 당했다.


급기야 한 언론 재단의 행사에서 공식 사과문 발표 자리를 가졌는데, 이때 무대에 오른 그의 모습을 인터넷 생중계하고 트위터 반응을 무대 한쪽에 마련된 스크린에 띄워서 참석자 모두가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만든 것을 가지고 뒷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당연히 트위터에는 그를 철저히 조롱하고 비난하는 글이 무수하게 올라왔다.


존 론슨은 이 사건을 가리켜 "트위터의 아름다운 순진함이 소름끼치는 현실과 맞닥트린 순간"이었다고 지적하며,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을 걷어차는 격이 되었으니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었다고 비판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레러가 무려 강연료까지 받아서 작성해 내놓은 사과문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타당한 반박도 없진 않았다.


무려 10년이 지난 일이니 그의 신작에 대해 대뜸 야박한 평가부터 내놓을 필요까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때 잘못된 행동으로 인터넷 조리돌림의 사례로까지 거론될 만큼 "원치 않은 주목"을 받았던 그가 새로 내놓은 책의 주제가 블로그, SNS, 유튜브에서 "주목받는 법"이라는 점이 내겐 뭔가 아이러니해 보여서 해 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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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냥꾼의 도서관>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무려 앤드류 랭이 저자라기에 깜짝 놀랐다. 요정 이야기 편저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도서 수집과 서지학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까지는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판사가 출판사이다 보니 아무래도 불안해서 미리보기에 나온 부분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만 몇 가지 골라 원문(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 있다)과 비교해 보니 두꺼운 책도 아닌데 예상대로 오역이 없지 않았다. 책 고르는 눈썰미만 보면 참 나귀님 취향인데, 도대체 멀쩡하게 나오는 책이 없는 지경이니, 그래서 정말 더 꼴보기 싫은 것도 없지 않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지...


(그런데 알라딘 미리보기는 너무 흐려서 결국 Yes24 미리보기로 가서 봤다. 모바일 버전 기준으로 최적화된 해상도인지, PC에서 확대하면 글자가 다 깨지는 알라딘과 달리 Yes24는 PC에서도 미리보기가 큼직큼직하게 잘만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알라딘처럼 하면 PC 버전에 올려놓은 미리보기는 사실 무용지물이니, 굳이 그런 서비스를 만들어 유지하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는 거다. 결론은 Yes24가 잘한다기보다는 알라딘이 멍청하다는 뜻) 



20쪽, 5행,


스콧이 어린 시절 사들인 브로드시트판의 이야기시와 스크랩북 등의 수집품들은 시인과 마법사, 연금술사와 이야기꾼의 작품으로서 풍성한 스콧도서관의 중심이 되었다.


==> 어린 시절 사들인 발라드 브로드시트와 스크랩북을 중핵으로 삼아 구축된 스콧의 장서에는 시인과 마법사, 연금술사와 야담 작가의 작품이 풍부했다.


* 여기서의 library는 "도서관"이 아니라 "(개인) 장서"를 말한다고 봐야 맞겠다. anecdotists는 "이야기꾼"이라기보다는 오브리의 <약전>처럼 짧은 야담/일화 선집을 저술한 "야담 작가"를 가리킨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20쪽, 8행,


연극 속 인물들이 등장하는 채색 동화책을 좋아하는 어린아이다운 취향으로부터 두스, 멀론, 쿠쟁의 작품을 수집한 희곡 장서가 탄생하기도 한다.


==> 극중 인물들을 묘사한 채색 판화를 좋아하는 어린아이다운 취향으로부터 두스, 멀론, 쿠쟁의 수집품 같은 무대 예술 컬렉션(수집품)이 탄생하기도 한다.


* "두스, 멀론, 쿠쟁"은 작가가 아니라 수집가이다. 즉 두스와 멀론은 현재 옥스퍼드 보들리 도서관에 소장된 무대 예술 컬렉션의 원래 소장자이다.("두스"가 아니라 "다우스"가 정확한 발음 같다. 쿠쟁[커즌?]은 누군지 나귀님도 모르겠다). 쉽게 말해서 어린 시절 아이돌 포토카드 수집하던 취미가 발전해서 훗날 방대한 예술 관련 장서 수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28쪽, 4행,


많은 초보 수집가는 1635년판 <카이사르>에 큰돈을 치르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은 쪽 매김에 실수가 '없는' 판본이므로 큰돈을 낼 가치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 엘제비어판 <카이사르 저작집> 1635년 초판본은 명품으로 칭송되지만 쪽수 가운데 일부가 잘못 매겨져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같은 엘제비어판이라도 쪽수가 제대로 수정된 책, 즉 저자의 말마따나 "쪽 매김에 실수가 없는 판본"은 초판(1쇄)본이 아니라 재판(2쇄)본이므로 내용은 오히려 좋아졌어도 가치는 거꾸로 떨어지게 된다. 즉 본문에서 언급된 "초보 수집가"는 재판본을 초판본으로 착각하고 비싸게 구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좀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어야 독자도 이해할 만하지 않을까.



28쪽, 9행 & 13행,


책 수집은 다른 스포츠 분야와 비슷하다. (...) 나는 종종 책 수집의 즐거움과 스포츠의 즐거움이 서로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책 수집은 "책 사냥"이라 불리기도 하며


==> 책 수집은 다른 수렵 분야와 비슷하다. (...) 나는 종종 책 수집의 즐거움과 수렵의 즐거움이 서로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책 수집은 "책 사냥"이라 불리기도 하며


* 원문은 sport 인데 전체적인 맥락을 감안하면 "sport = hunting"이므로 "스포츠"가 아니라 "사냥; 포획; 수렵"의 뜻인데, hunt를 이미 "사냥"으로 썼으니 "수렵"으로 바꿔 표기해서 구분하는 게 나을 듯하다. 예를 들어 투르게네프의 유명한 연작 단편집 <사냥꾼의 수기>의 영어 제목은  A Sportsman's Sketches 이라는 것도 그 근거로 삼을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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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설거지 하면서 틀어놓은 뉴스에 하버드 대학 총장이 최근 있었던 학생들의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 때문에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와 난타를 당했다고 나온다. 일부 학생들이 이스라엘/유대인을 비난하는 수위 높은 발언을 내놓은 것이야말로 반유대주의가 아니냐며 한 의원이 유도 질문을 던지자, 이에 총장이 "문맥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슬쩍 빠져나가려다가 '당신, 완전히 반유대주의자 아니냐' 하는 식으로 트집을 잡혀 몰매를 맞는 모양이다.


귀로 듣기만 할 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화면을 보니 문제의 하버드 총장은 무려 흑인에 심지어 여자다.(그 학교 역사 368년 만에 흑인으로는 최초이고,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총장이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름조차 클로딘 게이라서 진짜 동성애자라면 묘하겠다 싶었는데, 록산 게이의 사촌이라지만 그쪽 성향까진 아닌 모양이다.(나중에 SNL의 패러디에서도 하원의장이 "본인 이름 갖고 농담 하시려면 지금 하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니 다들 비슷한 생각인 듯하다).


하버드 총장의 답변도 물론 그 자체로 틀린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보다는 더 멋진 답변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백인/여성 의원을 향해 '반유대주의가 아니다. 당신이 내게 무리한 유도 질문을 던진 것이 인종차별이 아니듯이!' 라고 응수했어도 따끔한 일침이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과거 베트남전 반대 시위 논란에서 '아이고, 정말! 애들이 한 일 가지고!'라며 일갈했다던 한나 아렌트의 말도 괜찮았겠고.(물론 자칫 엉뚱한 데로 또 불똥이 튈 수 있지만).


하지만 청문회 영상을 찾아 보니 현장 분위기가 꽤 살벌해서 방어적인 답변도 불가피했던 것 같다. 문제의 백인/여성 의원은 우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대학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가?'라고 질문하고, 곧이어 '인티파다, 즉 유대인 제거 선동은 반유대주의 아닌가?'라고 질문했다. 즉 애초부터 하버드 총장이 흑인임을 감안하고 인종차별에서 반유대주의로 넘어가게 유도했던 셈인데, 결국 '김일성 개새끼 해봐!' 식으로 예/아니오 답변을 강요했으니 무례한 행동이다.


여하간 적절한 일침으로 뭐가 있나 궁리하다가,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것이라는 인용문이 떠올랐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유대인이다.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인에게 유대인이다." 최근의 무력 충돌 사태에 적용할 만한 레비의 이스라엘 관련 발언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심지어 이 인용문에도 진실/거짓이 혼재된 기묘한 역사가 있다고 해서 흥미가 생겼다. 나도 <뉴요커>에 게재된 어느 기사를 통해서 알게 된 내용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2002년에 <뉴요커>의 한 필자가 프리모 레비의 전기에 대한 서평을 기고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유대인이다.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인에게 유대인이다"라고 그 책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인용문은 레비의 발언에 타인의 발언이 뒤섞인 형태로 와전된 것이었다. 즉 나중에 이탈리아 학자들이 추적해서 밝혀냈듯이, 레비의 실제 발언은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유대인이다"까지만이었다.


그렇다면 바로 뒤에 나오는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인에게 유대인이다"는 무엇일까? 이는 당시에 레비와 인터뷰를 행한 이탈리아 매체의 기자가 덧붙인 일종의 부연, 또는 논평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지만, 그 의견을 발언할 당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는 볼테르의 유명한 인용문이 실제로는 그의 발언이 아니라 그의 전기 작가가 창작한 요약에 불과했다는 것과도 유사한 와전 사례인 셈이다.


여하간 잘못 인용되었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지만, 레비의 말과 타인의 말이 뒤섞인 해당 인용문이야말로 오늘날의 상황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한 마디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선 하마스의 기습 공격과 무차별 살상 자체도 전쟁 범죄인 것은 맞지만, 그 근본 원인이 이스라엘 측에 있음을 감안해 보면 이후의 가자 지구 전투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전쟁 범죄를 정당화하기에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어느 한쪽이 전적인 피해자 행세를 할 수는 없어 보인다는 뜻이다.


이번 미국 대학의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를 둘러싼 논란은 보수 진영에서 극소수의 주장을 대다수의 주장인 듯 실제보다 과장한 면도 충분히 있어 보이지만, 여러 대학 총장의 입장/거취에 대해서까지도 압박이 나왔다는 점에서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정치적 공정성이니 문화적 다양성 같은 자칭 진보적 가치의 오/남용으로 온갖 불편러가 늘어나면서 눈치보기가 만연한 것은 한국 공교육에서나 미국 고등교육에서나 큰 문제인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이 80년 가까이 누린 억울한 희생양/소수자의 특권적 지위도 이스라엘의 거듭된 실책으로 조만간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물론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이스라엘 국민은 별개라는 것이 유명한 "홀로코스트 산업" 비판의 핵심이지만). 자기 민족에게는 공감과 배려를 바라면서도 다른 민족에게는 억압과 외면을 일삼은 까닭에 새로운 반유대주의의 대두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닦는 셈이 되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닌가...



[*] 글을 써놓고 프리모 레비의 인용문 번역이 있나 궁금해서 서경식 책을 찾느라 며칠 묵히다 보니, 마침 다른 책에 가려 못 보고 넘어갔던 그 책을 바로 그 날에 저자 타계 소식이 들려오기에 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시에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라 했건만 이제는 '세월도 가고 나도 따라간다'는 느낌이 더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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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 홍매의 <이견지>에 이어서 청 원매의 <자불어>를 읽기 시작했다.(번역서 제목은 무려 <청나라 귀신요괴전>인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자불어>로 적는다. <삼국전투기>도 아니고, 원...) <이견지>보다는 <요재지이>에 가까운 느낌이라서 재미있기는 한데, 막상 책을 펼쳐 서문을 읽자마자 첫 페이지에서부터 황당한 오류가 등장한다.


"괴, 역, 난, 신에 대해 공자는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용혈(龍血), 귀거(鬼車) 등에 대해선 <주역> "계사"에서 언급한 바 있다."(23쪽) 그러면서 "귀거"를 각주에 네 줄로 장황하게 설명한다. "호랑나빗과에 속한 나비의 한 가지. 날개는 옅은 녹황색 또는 어두운 황색으로 검은 줄무늬와 얼룩얼룩한 무늬가 있다 (...) 학명은 Papilio xunthus."


그런데 문맥을 보면 "용혈"과 "귀거" 모두 앞 문장에서 말한 "괴력난신"의 사례라고 봐야 할 것 같으니, 각주에서 "용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라고 설명한 전자와 달리 후자만 실존하는 곤충의 일종이라고 무려 "학명"까지 들먹이면서 설명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아 보이지 않는 거다. 즉 "귀거"도 "용혈"처럼 상상의 물체라고 봐야 맞지 않을까?


구글링해 보니 "귀거"(鬼車)는 "귀조(鬼鳥), "구두조"(九頭鳥), "구봉"(九鳳)이라는 상상의 새, 즉 봉황의 일종을 가리킨다는 검색 결과가 줄줄이 나온다. 즉 <산해경>에서는 "구두조"로 나오고 <본초>에서는 "귀거"로 나온다니, 위의 문장에 나온 "귀거"도 이것이라고 해야 "용"과 "봉"을 나란히 언급하는 셈이어서 문맥에 어울리겠다 싶었다.


검색해 보니 출간 당시 <한국경제>에 게재된 서평에서는 의외로 이 대목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서언에서부터 '괴력난신에 대해 공자는 말한 적이 없지만 용혈(龍血: 용의 피)과 귀차(鬼車: 상상 속의 괴물 새) 등에 대해선 《주역》의 '계사(繫辭)'에서 언급한 바 있다' 고 당당하게 밝힌다." 즉 "귀거"를 "귀차"로 바꾸어 인용한 것이다. 


어째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맨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책이 출간되고 나서 보도자료를 작성할 때에 "귀거/귀차"의 오류가 뒤늦게나마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책은 못 고쳐도 기사는 정확하게 내려고 시도했던 것일까? 하지만 보도자료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 해도, 알라딘의 미리보기에는 여전히 "귀거"로 남아 있다는 점은 의아하다.


또 다른 가능성은 <한국경제> 서평을 작성한 기자가 "귀거"의 오류를 용케 파악하고 스스로 "귀차"라고 바꿔 적으면서 "상상 속의 괴물 새"라는 설명까지 알아서 덧붙였다는 것인데, 이전에도 다른 신문에서 고전 번역의 오류를 지적한 서평으로 인해 번역가와 기자 간에 한동안 설전이 벌어졌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것도 충분히 있음직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주역> "계사"의 해당 부분을 살펴보았더니, 결국에는 나비 "귀거"와 봉황 "귀차" 모두 잘못된 설명이었다. 즉 38괘 "화택규"(火澤睽)를 보면 "견시부도, 재귀일거(見豕負涂, 載鬼一車)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내가 가진 김인환 역본 <주역>에서는 이 부분을 "진흙을 뒤집어 쓴 돼지와 귀신을 실은 수레"라고 옮겼기 때문이다.


결국 <주역>에서는 한 단어 "귀거"(鬼車)가 아니라 "귀 + 거"(鬼 + 車)를 뜻하므로, 봉황도 아니고, 괴물 새도 아니고, 나비는 더더욱 아니며, 문자 그대로 "귀신 + 수레"라고 해석해야 맞다. 애초에 번역/편집/기사 작성 과정에서 저자가 말한 <주역>의 해당 내용이 무엇인지만 확인해 보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오류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물론 전체 내용을 좌우할 중대한 오류까지는 아니고, 각주 하나 틀렸다고 해서 <청나라 귀신요괴전>이 <청나라 나비채집기>로 바뀌는 것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제목부터 굳이 "귀신요괴전"이라고 대놓고 선전하는 책이 막상 서문 첫 쪽부터 "귀신 + 수레"를 Papilio xunthus 나비로 오해했다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번역자/편집자가 작업 중에 귀신요괴에게 씌어 생긴 오류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가겠다만... 결과적으로는 글항아리 출판사에 대한 불신만 한 겹 더 늘어난 셈이다. 책 내놓는 것만 보면 딱 내 취향인데, 무지 두꺼운 책을 무지 비싼 값에 팔면서도 편집은 순 엉터리라 오류가 속출하는 것을 보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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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의 <이견지>를 완독했다. 원저의 5분의 1 분량인 "갑지"와 "을지"만 번역하고 주석한 것인데도 450페이지 내외로 네 권 분량이니 상당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학진 총서 중에서도 세창출판사 발간분은 유독 글자가 크고 행간이 넓으며 가격이 비싸서 전반적으로 분량 뻥튀기의 혐의가 짙다.(학고방 발간분도 마찬가지인데, 예전 소명출판 발간분으로 환산했다면 훨씬 더 짜임새 있는 편집이라서 쪽수가 훨씬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세간의 여러 이야기를 한데 모았다는 점에서는 필기문학에 해당하고, 내용 중 상당수는 귀신이나 요괴나 저승에 관한 일화이므로 지괴문학이라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청대의 <요재지이>나 <자불어>처럼 단편소설의 형태를 완전히 취하기보다는, 북송대의 <태평광기>에 총정리된 더 이전 시대의 지괴문학처럼 분량과 서술 모두에서 뭔가 이야기를 하다 만 것처럼 살짝 미진한 느낌을 주는 일화가 대부분이어서, 딱히 아주 재미있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이 번역본의 의의는 역주자의 말마따나 중국에서도 아직 백화로 완역되지 않은 책을 옮겼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문장이 어색하거나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이 가끔 있다는 점은 아쉽다.(예를 들어 권4의 "호극기의 꿈"에서는 "미처 들어올 틈도 없이 나 혼자 들어가"를 "미처 들어올[進] 틈도 없이 나 혼자 먼저[先] 들어가"로 수정해야만, 바로 뒤에 나오는 <논어>의 "선진(先進)" 편명과 어울려서 뜻이 통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일화를 한 편 고르라면 "갑지" 권6에 수록된 "교활한 서리의 간계"를 들고 싶다.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공부를 많이 해도,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까지는 아님을 사실을 최근 들어 여러 가지로 절감하는 까닭인지, 어쩐지 유독 기억에 남은 일화가 되고 말았다:


복주의 늙은 서리인 하화라는 자는 치평연간(1064-1067)부터 서리로 일했고, 정화연간(1111-1118)에는 나이와 공로가 많다고 하여 관원이 되었으니, 시작부터 따지자면 무려 48년이나 일하였다. 한 번은 자신이 복주의 여러 무관을 모셨는데, 우리 서리들에게 휘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속일 수 없는 사람이라곤 오직 두 사람뿐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정사맹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나기(羅畸)였다.


나기는 매우 주도면밀해서 처음에 누구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후에는 역시 파고들 만한 틈이 있었다. 나기는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그 의의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진정 소득이 있으면 아주 기뻐하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반면 뜻을 깨닫지 못하면 머리를 긁으며 머뭇거렸다. 서리들은 그가 길게 휘파람을 불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문서를 들고 들어가곤 했는데, [그럴 때면] 비록 교묘한 속임수가 숨겨져 있더라도 대충 보고 묻지 않아 통과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엔 조그만 거짓이나 사기라도 적발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기를 속일 수 있었다. 그래서 하화가 말하길,


"저 사람은 독서를 좋아하는데도 우리에게 당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이견지 갑지> 1권, 28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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