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로지의 [소설의 기교]의 34장은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를 다룬다.

추리, 미스터리물에서 이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를 종종 보곤했다.

독자가 전적으로 서술자에 의지해 따라가지만 어느 순간 독자를 배신하는데 독자들은 이 배신에 아찔한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애거서 크리스티의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다.

 

데이비드 로지가 이 주제에 예로 든 소설은 두 권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과 이에 비교, 대조해 읽어볼 작품으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 Pale Fire]을 꼽았다.

[창백한 불꽃](1962년 출간, 이해에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롤리타>개봉)은 아직 국내 번역작이 없다. [롤리타] 이후 쓴 작품이라는데, 나보코프 대표작 중 하나로까지 꼽는 이들도 많은데 우리도 머잖아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다.

 

근데, 잉? [남아있는 나날]이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의 예로 읽어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를 사용하는 핵심은 외관과 실제 사이의 간격을 흥미롭게 드러내고, 등장인물들이 실제를

어떻게 왜곡하고 감추는가를 보여주는 데에 있다. (250)

 

이시구로 소설의 서술자[스티븐스]는 사악한 인물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실을 억압 혹은 회피하려는 인물이다. 그의 서술은 일종의 고백이지만 솔직하지 못한 자기 정당화와 특유의 항변으로 가득하며 오직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에 대한 어떤 이해에 도달하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그로부터 무언가를 얻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251)

 

완벽한 하인[집사]이고자 하는 신념 때문에 스티븐스는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이 보인 애정을 깨닫지 못했고 그에 반응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관한 강한 자기검열을 거친 기억이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서 점차 드러나게 된다. (252) 

 

나는 .... 자기 검열을 거친 스티븐스의 억압된 기억을 제대로 읽었나 싶은데....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창백한 불꽃]의 내용은, 가공의 미국 시인 존 셰이드의 시(詩)가 있고, 그 시에 상세한 주석을 다는 유럽의 망명학자인 찰스 킨보트의 이야기라는데, 셰이드는 원고를 킨보트의 손에 넘긴 직후에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뢰할만한 서술자'의 관점에서 읽어봐야 할 이야기라니까 더 소개하는 건 스포일러일 수도 있고 독서의 기쁨을 앗아갈 수도 있으니 그만하는 게 좋겠다.

나? 알고 있어도 아마 번역되어 나올 때쯤에는 까마득히 잊고 있을 게 분명하기에 걱정없다.

[창백한 불꽃]은 나보코프의 망명 이후 향수병을 치유하기 위한 소설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로쟈님의 나보코프와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연상할 수도 있겠다.

곧 보게되겠지.

 

[소설의 기교]를 읽다보면 우리에겐 대표작 외에 별로 소개되지 않은 일급 작가들의 작품이 많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토마스 하디도 그렇고.... 플로베르의 얘기가 생각난다. 사람들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플로베르를 그저 [보바리 부인]의 작가로만 여겼다.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 제목만 들어도 짜증난다고 했다. '마치 나한테 다른 작품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그래도 플로베르의 작품은 거의 번역된 듯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플로베르는 읽기만 하면 된다. 읽기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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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씨와 무재 씨는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사랑을 시작한 연인이다.

황정은의 소설 중 나는 세편을 읽었을 뿐이다. 오래 전에 [상행](2012 이효성문학상수상작품집)을 읽었고, 엊그제 [상류엔 맹금류](2014 젊은작가상 수상작)와 [백의 그림자]를 읽었다.

앞의 두 작품은 단편이고 [백의 그림자]는 경장편이다.

묘하게도 세 작품 모두 여자인 '나' 1인칭 시점을 택한 소설이다. 

내가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 [상류엔 맹금류]는 결혼까지 할 뻔 한 옛 애인 제희와 그 가족의 얘기, 특히 한여름에 그들과 함께 간 수목원 피크닉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전해주는 소설이고, [상행]은 남자친구인 것이 분명한 오제와 그의 어머니, 셋이서 함께 오제의 친척집에 가서 고추를 따러갔다 오는 이야기, [백의 그림자]는 ... 경장편이기에 나의 남자 무재 씨만이 아니라 도심의 40년 된 전자상가 내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지만 역시 무재 씨에 대한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젊은 여자인 '나'는 늘 관찰자이며 매우 정제된, 신춘문예를 거쳐 각종 문학지에 단편 게재로 무장한 작가들답게 우리의 일상 언어를 낯설게 하고, '일반화의 폭력'(신형철)과 한사코 싸워서 획득한 언어를 구사한다. 많은 이들이 저런 문장을 쓰고 싶다고 한다. 분명 황정은 작가의 글은 힘이 있다. 

 

[상류엔 맹금류]의 피크닉 장면은 영화를 많이 본 이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장면일 수도 있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의 막동이(한석규) 가족의 소풍이 떠오르기도 하고, 루이스 브뉘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유혹>에서 인물들이 한없이 걷던 어느 장면을 떠올리게도 했다. 조금씩 다 다르지만 죽을 둥 애를 쓰지만 어쩔 수 없이 절망적인 정서.

 

신형철은 [백의 그림자]를 '사려 깊은 상징들과 잊을 수 없는 문장들이 만들어 낸, 일곱 개의 절로 된 장시(長詩)'라고 한문장으로 정리하기도 했지만, 나는 어째 나와 무재의 사랑의 속삭임이 영혼의 내레이션 처럼 들렸다.

우습게도 첫 장면 '숲'에서의 두 사람의 대화는 Jean Francois Mourice의 <모나코>라는 음악에 흐르는 내레이션을 생각케했다. '모나코~'라고 시작하는 한 남자와 여자의 주고받는 내레이션만으로 이뤄진 노래말이다.

아, 미안하다. 장난이 아니라 .... 작품, 정말 재미있게 봤고 좋았다.

신형철의 해설도 정말 좋았다. '현실 - 자명성의 해체', '환상 - 불행의 단독성' 같은 해설은 1급 평론가답다.

 

근데 나는 읽으면서 가끔 허방을 짚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자상가와 사람들, '자명성을 해체'하고 힘겹게 다가온 현실과 독자인 나 사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가 끼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 유리 저 너머에 있는 사람들. 

무재. 無在인가? '제희', '오제'가 아닌 '무재'.

 

무재와 나는 참으로 소박하면서도 애틋한 사랑을 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데, 마치 그들의 영혼 결혼식에서 틀어놓은 영상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인물들이 겪는 불행이 현실 안에서 현실적인 수단으로는 맞설 수조차 없는 종류의 것일 때'(신형철) 환상 속으로 이미 걸어들어가 버린 두 연인의 노래를 듣는 것 같았다.

 

[백의 그림자]의 맨 마지막이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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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치 않았던 하루에 위안을 준 것은 황정은의 [상류엔 맹금류]이다.
2014 제5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이다. 외에 다섯 작품이 실렸는데 바로 뒤에 붙은 해설을 비롯해 다음 작품을 읽기 어려울 정도로 독보적이다. 
다행이다. 끝이 좋으면 다좋다. 몸 컨디션도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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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더이상 못읽겠다.
그녀 ㄷ이 나온 다음부턴 참...저거하네.

"언니......저기 저,  무지개요. 왜...... 예쁜 건 ...... 금방 사라질까요...."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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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가 숨긴 '바람의 길'을 알고 있다.

 

 

 "바람의 길을 혹시 알아요?" 내가 묻고 형사가 이마를 와락 찌푸린다. "이 얼굴 가로 주름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컴퓨터로 복원한 그의 이마를 가리킨다.

"나를 더 이상 가지고 놀 생각은 말아요." 담당 형사는 기분이 크게 상한 눈치다. 나는 침묵한다.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유골은 그의 것이 틀림없겠지만 형사가 내민 얼굴에 대해선 여전히 "글쎄요."다.

 

              - 박범신, 소소한 풍경, 65~66

 

공사를 위해 터를 파는데 유골이 나왔다. 시멘트로 된 데드마스크가 생겼다. 그 얼굴을 복원해 프린트 해 온 형사가 참고인으로 불렀지만 거의 피의자가 된 여자에게 보여주며 "이사람 맞아요?"라고 묻자 여자가 저렇게 말한다.

 

나는 줄곧 형사와 같았을 것이다.

박범신의 [소소한 풍경]을 읽고 있는데 왜 이렇게 글을 써야 하지? 라는 물음을 계속 하면서 읽는다.

 

박범신은 1946년 생이고 줄리엔 반스와 같다. 비교도 아니고 단지 [소소한 풍경]을 읽기 시작했고 줄리엔 반스의 책도 요즘 읽고 있고 해서 생각이 머문 것 뿐이다.

박범신은 1973년 단편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많은 소설을 썼을 것이다.

줄리엔 반스는 사전 편찬 등 직장생활 하다가 1980년에 장편 [메트로랜드]로 등단했다.

 

갑자기 하일지가 궁금해서 또 찾아봤더니 그는 1955년 생이다.

최신작이 재작년에 나온 [손님]이었다. 읽어보지 못했다. 하일지의 작품으로 최근(아마 몇 년전)에 읽은 것이라곤 2000년도에 나온 [진술]이 다다. 멋진 작품이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살짝 못마땅하긴 하지만 여튼 후반 이전까지는 압도적이다.

 

 

 

 

 

 

 

 

 

 

 

 

 

 

 

 

 

복도훈은 해설 첫머리(아직 다 읽지도 않았다)를 '불가능한 가능한, 사랑'이란 '~한 ~한'을 겹친 소제 하에 '시라고 해야 할까,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로 시작한다.

나 역시 처음 들었던 생각이 그랬다. 이 책의 리뷰나 페이퍼들에는 유난히 문장 인용이 많다.

와 이런 문장들을 만들려면 얼마나 머리를 써야 하는 건가. 연륜과 경륜이 쌓이면 이런 사색이 가능해지는 건가. 

이 정도의 문장들과 각종 상징과 은유 등을 사용하여 엮어야 소설이 되는 건가.

소설가로서 위기를 느끼며, 원인과 결과로 짜맞춰지는 플롯에의 거부, 그것을 작가의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린 시와 같은 문장의 힘으로 돌파하려고 했던 것인가.

'노화가 정지되는 느낌'(작가의 말)으로 완성된 소설이라고 하니 끝까지 읽어보긴 할텐데 담백했으면 좋겠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좀더 많이 봐야 할 것 같다. 왜 좋아하지 않는지 나를 좀더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작가도 작품도 너무나 생소한 책들임에도 어김없이 올라와 있는 100자 평이나 리뷰, 페이퍼를 보면 와 진짜 열심히들 읽는구나, 감탄한다. 

하일지 소설이 보고 싶다.    

 

소설의 기교라든지 소설작법서 등을 몇 권 보면서 든 생각이 우리 나라 작가나 저자들이 쓴 소설작법서와의 비교도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작가들은 뭘 중요시 하는지 볼수도 있지 않을까. 작법서 말고 작가론이나 소설론 같은 소설에 대한 생각들을 좀 들여다보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고보니 우리 나라 작가들의 산문집도 전혀 읽지 않는구나. 

생각보다 편견과 편식이 심한 편이었다. 검은머리 외국인도 아니고... 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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