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나 새누리보다 한길이나 철수가 더 밉더냐?

인간이라면, 제 정신박힌 사람이라면 그네나 새누리를 찍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길이나 철수, 아직도 동반퇴진 안했다고?

결과 나온 뒤 바로, 아니 결과 나오기 전에라도 퇴진했어야지. 그 것조차 안되는 새정치였다.

평소에 착착 하나씩 해결해가는 정도가 없는 국민이다.

나이들면서 별다른 기대나 희망을 가지지 않게 되었지만 ... 해도 너무한다.

끝까지 간다. 깊을대로 깊어져 파국이 올 때에야 비로소 오기를 부리는 국민.

그때엔 이미 골이 깊고 갈등도 깊어 더 많은 상채기를 안고서야 겨우 고비를 넘길 수 있다.

그 다음엔 또 마찬가지다.

언제나 옳다. 국민은 저마다 수준에 맞는 나라를 갖는다. 딱.

한번도 실망한 적 없고 언제나 기대를 만족시켜준다는 새누리와 갈 데까지 가 봐라.

아, 때가 되면 새누리는 또 이름 바꿀테지.

갈수록 화장술과 성형술만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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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저리 붙여놓으니 거창한데, 거창한 제목에 맞게 거창한 논리나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국회 계류중인 법안들 하나로 민간조사제도, 일명 탐정법이 있다.

민간조사원, 사설탐정을 허용한다는 건데, 검경과 변호사 등 법과 관련된 직업은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다. 공청회도 열고 세미나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다.

일부에서는 이 역시 법 혜택의 부익부 빈익빈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반대하기도 한다.

흔히 생각하는 사생활조사 뿐 아니라 어떤 이유로든 해결되지 않는 공적 영역의 문제까지 파헤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주장을 하는 측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수많은 탐정소설과 추리소설의 고전들을 읽어왔고 현재 사설탐정이 합법화된 국가들의 장르 소설도 읽었지만 정작 우리에게 사설탐정이 생긴다면 어떨까를 생각해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고전적인 탐정소설도 경찰소설에 자리를 많이 내준 걸 봐도 공권력으로서 검경조직에 대한 힘과 정의의 위탁, 책임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난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공적 영역의 책임이 강조되는 게 여전히 필요한 거 아닌가 생각하는 편이다.

세월호 참사를 봐도 해경이라는 조직이 민간과 결탁 또는 잠식 당하면서 벌어지는 무능과 책임회피, 뻔뻔함을 보지 않았나.

소방관도 일부를 제외하고 국가직이 아닌 채 지자체에 맡겨지면서 개별 소방관들이 기본적인 도구 조차 해외사이트 직구를 해서 장비를 장만하기도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보고 있는 마당에 공권력의 책임을 효율적으로 더 강화하는 쪽이 아닌 민간에 할당한다는 건 우리에겐 많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보수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공적 영역을 어떻게든 민간과 사익추구 집단에 넘기려는 세력이 강한 우리에게 사설탐정의 허용이란 ...글쎄..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개검개경을 벗어난 독립된 검찰경찰조직이 필요한 것이고, 콘트럴타워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며 7시간 여 동안 어디 있었는지 '말할 수 없는 비밀' 영화 찍고 앉았는 대통령과 정부를 가질 게 아니라 확실한 공감력과 장악력 책임감을 지닌 대통령과 정부가 필요하고 ...확실한 기자정신을 가진 기자들이 더 필요하고... 국민들이 나서서 안락의자 탐정 노릇하고 앉았는 시대 말고 앞뒤 맞는 믿을 수 있는 조사 결과 내놓을 수 있는 확실한 공권력이 필요하다. 돈에 대한 탐욕이 위험수위에 와 있는 우리에게는 이런 사설, 민간으로의 이전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제5회 네오픽션상 수상작 이재찬의 [안젤라 신드롬] 책소개를 보고 생각한 것이다.

유현산의 [살인자의 편지]를 첫 당선작으로 낸 이후 5회에 이르기까지 당선작이 없었다하니 뭔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만큼 일정 수준의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기대할만한 작품이라고 믿어봐야 하는 건데, 납치된 소녀를 찾아달라는 부모들은 '탐정에 가까운' 흥신소 직원 하철에 의뢰하는 데까지 이르는데 ....

'안젤라 신드롬'이란 "죽은 딸을 부모가 보았다고 착각하는 정신병적인 상태, 즉 딸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해 존재하지 않는 딸을 봤다고 믿는 정신병"이라고 한다. 유래가 된 사건이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찾아보고 ...

어쨌든 이런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데 추리기법을 잘 사용하고 가독성이 좋다고 하니 기회되면 읽어보고 싶다.

시나리오를 쓴 작가라 지나치게 영화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요즘엔 이런 장르소설에서 어느 정도 감안하고 봐야 한다. 문학작품으로서의 완결성을 보여줬음 하는데...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국가도 엄청난 인력과 장비를 보유한 공공기관도 또는 그 누구도 보호해주거나 찾아줄 수 없는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지극하고도 애절한 부성을 작가 이재찬만의 독특한 사유로 풀어내고 있다."는 책소개를 보면 국가와 공공기관(경찰을 말하는 듯)이 외면한 끝에 다다른 흥신소라는 설정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예상케 하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늘 현실이 강력한 개입을 하는 측면이 있다.

국가와 공권력이 외면하고 의지할 수 없어 결국 사적영역에서 해결해야 하는 우리식의 풍경.

 

2010년에 1회 당선작 유현산의 [살인자의 편지]는 김훈의 영향을 받은 문장들과 정조로 기억된다. 

결말이 너무 닳고 닳은 방식으로 끝나서 실망스러웠지만 그 과정은 읽을만했다는 기억이 있다.

 

답답한 시대다. 정말 답답하고 화가나고 분통 터지고 ... 슬프고 ... 그렇다. 아 시발

 

아, 글고, 윗쪽의 책장 어디로 갔나? 없애기로 했나?

어제도 안보인 것 같았는데 오늘도 없네. 알라딘 정책이 바뀌었나?

 

 

 

 

 

 

 

 

 

 

 

 

 

 

 

작고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생전 인터뷰, 말 등을 모은 책이라고 한다. 이건 꼭 봐야해.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꿈의 노벨레]를 원작으로 한 <와이즈 와이드 샷>을 만들 때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만과 자주 만나 영화에 대해 논의하던 스탠리 큐브릭의 일종의 제작기를 내가 어디서 봤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필름컬쳐》였나?

톰과 니콜은 전용 헬기를 타고 큐브릭의 집에 가서 얘기를 나눴다는 기억이 난다. 큐브릭이 간단한 음식을 만들고 먹으면서 회의를 한다. 큐브릭의 작업 모습을 짐작케 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제작시 거의 도서관 분량의 관련분야 책과 자료를 미리 읽고 시나리오를 준비하던 모습을 원작자 아서 C. 클라크는 회고했다. 그만큼 철저했던 감독이었다.

그가 만든 영화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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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25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책장 안 보이죠? 전 제 서재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 글구 보니 다들 안 보이네요...
탐정법 생기면 저도 함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평소 탐정을 동경했습니다.

포스트잇 2014-07-25 21:42   좋아요 0 | URL
저거 통과되기어려울것이라는 의견이 많더군요. 막는자들의 세가 워낙 후덜덜하다는...
경찰이 이럴수 있잖아요, "수사나 조사, 추리쪽 실력은 곰곰발 탐정이 낫습니다..그래서 이번 사건을 맡길려구요, 그쪽이 장비도 많고..." ....
그땐 곰곰발님은 졸지에 언딘이 되는 거지요... ㅋㅋㅋㅋㅋ
웃자고 하는말인거 아시죠? ㅎㅎ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7-26 06:11   좋아요 0 | URL
아주 확 와닿습니다. 언딘이 되면 안 돼 !!!!!!!!!!! ㅎㅎㅎㅎㅎㅎ.

포스트잇 2014-07-26 09:06   좋아요 0 | URL
히히^^ 아무래도 제가 보수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같습니다....
서비스장애로 책장이 치워진 모양입니다. 알라딘에서 보상으로 적립금 쐈네요~~~~~~~~

현봉이 2014-08-17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은 항상 기대감을 준다.

포스트잇 2014-08-18 07:27   좋아요 0 | URL
기대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요..
 

프란츠 카프카의 [실종자]와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

별다른 기대하지 않고 손에 잡았는데 의외로 재밌다.

[실종자]는 이제 100여 페이지 읽고 있고, [소립자]는 절반쯤 읽었는데, [소립자]는 좀 묘한 소설이다. ........

[실종자]는 심지어 킬킬 웃음까지 흘리게 된다. 주인공 카알이 처한 상황과 그의 대처가 카프카 특유의 부조리를 생각나게 한다.

밀란 쿤데라식으로 하면 '소극'.([작가란 무엇인가], 밀란 쿤데라)

"소극이라는 문을 통해서 '초현실'적인 우주로, '꿈과 현실의 융합'의 길로 들어서게"(305)된다는 그말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다.

뭐 이런 젓같은 상황이 있나.

별장 주인의 딸은 처음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집구경시켜준다고 잠깐 데리고 나오더니 유도같은 동작으로 목을 조르며 덮쳐오지 않나, 이놈의 집은 어둠탱탱에다 수많은 방, 끝없는 복도, 밖을 볼 수 없는 창으로 되어 있어 촛불 하나 들고 출구를 찾아야 하고, 집에 가겠다고 하니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난처해하는 주인에다, 명령에만 따르는 고지식한 하인에... 집에는 갈 수 있나?

게다가 다시 만난 그 아가씨는  이번엔 피아노를 쳐달라고 하네...

한밤중인데다 어떻게든 집(정확히는 외삼촌집)에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야하는지 방법도 길도 몰라 절절매고 있는 카알에게, ... 에.. 또 ...카알은 악보를 완전하게 읽을 줄도 모른다고 대답하면서 '이미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큭.

 

카프카의 꿈과 서사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책으로 배수아 역, '프란츠 카프카 꿈'은 사실 그냥 읽기엔 비몽사몽 헤맬 수 있다.

카프카가 메모나 단편적 기록 등으로 자신의 꿈을 기록해놓은 것들을 모아서 하나의 책으로 펴낸 것이기에 다른 이의 꿈 얘기를 보는 난감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틈나는 대로 들여다보는 독서가 좋을 듯하다.

 

[소립자]는 .... 이 작품의 무엇이 나를 흥미롭게 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이토록 재미있을지 예상하지 못했다.

68세대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 뜨악할만한 주장들?

주인공 미셸은 계속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남자와 여자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 있다.

미셸의 생각은 치우친 구분일 수도 있고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데, 남자와 여자의 차이보다는 개별적 인성의 차이도 있고 환경의 차이도 있어서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저렇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데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대관절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일까? (178)

이 무슨 섭섭한 말씀을 ....

 

그리하여 인류의 진화는 정연한 흐름 속에서 점진적으로 상승해 가는 양상을 보이기 보다는 무질서하고 불규칙하고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다. 그 모든 것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남자들에게 있다. 모험과 도박을 좋아하는 그들의 성향, 그들의 기괴한 허영심, 그들의 무책임, 그들의 폭력에 말이다. 여자들이 주도하는 세계는 모든 점에서 남자들이 주도하는 세계보다 나을 것이다. 비록 진보는 더딜지언정, 그 세계는 모두가 행복한 상태를 향해 규칙적으로 나아갈 것이다. 되돌아가는 일도 없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번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없이 말이다.

(179)

 

이런 생각을 하는 미셸은 자신만을 바라보던 아나벨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자를 만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읽은 대목까지는. 환상을 버려.

 

반면 미셸의 이부(異父) 형 브뤼노가 68세대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설립한 <변화의 장>이라는 캠프장에 가서 벌이는 일은 또 얼마나 웃기고도 슬픈지 모른다.

개콘의 <깐죽거리 잔혹사>의 성적 버전으로 바꿔 읽으면 웃음이 실실난다. ~빡, ~끝!

나는 소설을 이딴식으로 읽는다, 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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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나이에 혼자 살고 있는 나보다 어린 한 지인이 최근 삶의 허무감 같은 거에 시달리고 있다.

어찌어찌해서 그냥저냥 가게 하나 차리고 살아가는데 지난해 우울증을 앓는듯하더니 병원에 가서 상담...보다는 그냥 의사 만나는 정도였던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약도 처방받고 해서 겨울을 넘기는가 싶었다.

다시 가게도 열고 운동도 시작하고 다잡기 시작한듯 했는데 한밤 중에 메시지로 가슴이 턱 내려앉는 문자를 마구 보내기도 한다.

어떤 것도 재미가 없다고 한다. 게다가 하는 일이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인데 미치도록 힘들다는 것이다.

단순히 엄살같은 게 아니라 이 사람같은 경우 공허, 허무를 앓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릴 때 카뮈를 그토록 좋아해서 프랑스 유학까지 갔던 이의 중년이 이토록 힘들어질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세계 여러곳을 돌아다녔고 내가 넘보지 못할 자신의 세계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젊은 날을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생각이 많게 만드는 이다. .... 언젠가 썼던 지하실의 니체, 니체를 낭독해주던 그이다.

 

들어줄 뿐 달리 뭐라 할 말이 별로 없다. 게다가 우린 떨어져 살고 있기도 하고.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자는 말을 했다.

그렇게 사는 게 의미없고 꾸역꾸역 살게 되는 자신을 참을 수 없다면 좋다, 죽는 걸 구체적으로 생각하자.

자, 재미도 없고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삶, 그만 끝내려한다. 어떻게 죽으려는가?

 

벌써 몸 때문에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때가 되어 버렸다.

의사의 권유도 있고 자구책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아직 죽을 순 없고 버텨야하기에.

아주 운좋은 사람 빼고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게 되는가 보다. 운동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 시바.

고작 운동이라니.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깊이의 상실>에서 정작 깊이 빠져들 수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 아내 펫을 보내고 나서 자신의 상실감, 비탄에 대해 진단해가는 부분에서 아, 그렇구나, 이렇게 되기도 하는구나 정도의 느낌이 들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성격에 맞게 비탄에 빠진다." (114)

상실감, 잃어버렸다는 것에 대해서도 정작 상실하고 잃어버린 건 죽은 사람, 아내 펫이지 자신이 아니라는 것.

"이제 인생은 더이상 그녀의 빛나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129)

지인에게 이 말이 자극이 될까? '빛나는 호기심의 대상'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지금 지인은 바로 이 '빛나는 호기심의 대상'인 인생에서 호기심을 놓아버린 혹은 놓아져버린 상태인데.

줄리언 반스는 현대를 사는 우리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시대처럼 죽은 이를 찾아 지하로 깊이 내려간다는 은유조차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은유를 잃어버린 시대의 우리.  

 

 

 

 

 

 

 

 

 

 

 

 

 

 

 

밀란 쿤데라의 어쩌면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신작, [무의미의 축제]가 곧 번역출간된다. 예약판매를 시작했다.

아, 번역본으로 152페이지. 아, 인심 좀 더 쓰시지. 뭐 길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152페이지는 감질나잖아요.

더 많이, 오래 보고 싶은데, 152페이지가 뭡니까, 쿤데라 옹.

 

책소개를 통해서 보자면, 여든이 넘은 소설가 쿤데라는 이 시대의 비극성에 마주하는 태도로서 '무의미'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그러니까 무의미함에 시달리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무의미해. 그래서 그렇게 느끼는 걸 뿐인데 그렇게 느낀다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니까. 이건가?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중략)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다. 그것은 심지어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심지어 그걸 '인정'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삶의 무의미함, 존재의 하찮고 의미없음의 본질을 느낄 수 있을, 시달린 뒤에 깨달을 기회를 온전히 주어야 한다. 팔레스타인.

아침에 알라딘 서재에 오른 페이퍼들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과 관련한 글들을 보고 새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뉴스로만 접했지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는데 사태가 심각한 듯하다.

내가 이스라엘, 유대인 이야기에 그토록 혐오를 느끼는 건 물론 단편적인 지식에 기대서이기도 하지만, 거의 본능적이라할 정도로 즉각적인 면이 있었다. 홀로코스트 이야기도 내가 잘 읽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다. 나의 편견도 쉽지는 않은 것이지만.

[미국의 목가]를 읽으면서 시모어 레보브의 비탄과 혼돈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필립로스의 다른 작품들도 더 보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와 나의 공통점 하나는 눈이 약하다는 점이다.

그이는 나보다 어림에도 오래전에 이미 눈이 약해져 책을 읽기 어려울 지경까지 왔다.

나도 얼마전부터 그랬고, 한차례 앓고 나서 당분간 '책같은 거' 멀리하라는 얘기를 또 들어야했다.

인생, 뭐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안되고 있다.

무의미와 무가치를 인정하면 뭐, 어떻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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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는 딸 메리를 '스위드'가 데리고 오는지 어떠는지, 어떻게 되는지 이 얘기가 자꾸만 지연되는데도 불구하고 손에서 책을 놓기 쉽지 않을만큼 재미있다.

 

작가인 '나' 네이선 주커먼은 60대로 어느 파티에서 유력인사로 온 시모어 레보브와 재회한다. 어린 시절 친구 제리의 형이자 온 동네 사람들의 자랑이었으며 선망의 눈으로 바라봤던 멋진 형 시모어. '스위드(스웨덴 사람)'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온순하고 모든 것을 매끈하게 다듬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보였던 그 형과 조우한 뒤 그 형은 편지를 보내온다.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일들 때문에 고통을 당했던 일"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다는. 그러나 정작 만났을 때 그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궁금해서 참석한 동창회에서 스위드의 동생 제리로부터 형 스위드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제리는 형의 장례식 참석차 고향에 왔다가 동창회에 참석한 것이다.

도대체 스위드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왜 나를 만나자고 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일들'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작가인 나, 주커먼은 스위드의 생을 쫓아가 본다.

처음부터 흥미를 잡아끌더니 얘기는 전진하려고 하다가 과거로 돌아가거나 인물들의 얘기로 빠져들기도 하는 등 지체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아주 재밌게 전개된다. 시모어 레보브라는 인물 자체가 흥미롭다. 시모어는 왜 나를 만나고 싶어했겠는가? 만나서 하고 싶었던 얘기가 무엇이었겠는가? 그럼에도 끝까지 얘기하지 못했던 건 왜 였겠는가? 이건 시모어라는 인물 자체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시모어는 '왜 자기였을까? 왜 돈(시모어의 부인)이었을까? 왜 메리였을까? 왜 메리는 그렇게 됐을까?"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했을 것이고 주커먼은 시모어의 그 질문을 따라가는 것이다. 마지막에 "그런데 그들의 삶이 뭐가 문제인가? 도대체 레보브 가족의 삶만큼 욕먹을 것 없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란 질문을 하는 이는 누구인가? 시모어 자신인가? 주커먼인가?

대화로만 이뤄진 장면이 있다. 소설 속에서는 더 뒤에 나오지만 더 이전의 과거의 일을 다룬 장면 하나.

장차 시아버지가 될 루 레보브와 돈이 처음 만나 이른바 '협상 또는 타협'하는 장면의 대화.

레보브 집안은 유대인이며 돈은 가톨릭 집안이다.

또 다른 장면은 문제의 날, 시모어가 딸 메리를 만나고 돌아온 날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한 저녁 파티.

딸 메리의 언어치료사였던 실라 샐츠먼과의 '으르렁거리는' 언쟁. 시모어는 이때 처음으로 타인에게 폭발하는 모습을 보인다. 늘 타협하고 늘 참고 늘 자족하고 늘 상황의 밝은 면만 찾으려고 했던 예의바른 사람이.

그러나 언쟁의 끝은 "자신이 속해있던 황량함으로부터 저녁파티의 견고하고 질서잡힌 우스꽝스러움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견디고 억누르는 것은 결국 시모어의 망상이 되기도 한다. 시모어에게 딸 메리의 귀환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이고, 지친다. .............................

 

아주 우연히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를 겹쳐 읽었는데, 이 책 역시 처음부터 흥미롭다.

'나'는 해외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암으로 사망한 형의 유품을 정리하다 형이 남긴 여행기와 사진들을 보게 된다.

천산수도원이라는 곳의 지하 벽에 필서된 성경 구절들.

누가 벽에 그 글들을 썼으며 천산수도원의 내력은 어떠한가? 수도원은 어떤 연유로 그렇게 흔적도 없이 폐사지처럼 남게 된 것인가?

이 얘기에 '후'라는 인물의 얘기가 병치된다.

천산수도원과 그곳 벽에 정성스럽게 쓰여진 글은 누가 무엇 때문에 쓴 것인가?

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불교탄압, '법란'을 모티브로 해서 연재된 소설이라는데 .......... 이승우의 글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생의 이면]으로 처음 만날 때보다 좋아졌다.

이야기는 중층되고 성경이 성경 구절보다 들여다보는 그 사람을 오히려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모티프는 문장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 같다. 문장 때문에 이야기가 지체되기도 한다 .

정작 뒤로 갈수록 이야기는 급해지고 요약되듯이 정리된다.

이승우의 소설은 [생의 이면]과 [지상의 노래] 두 편을 본 거지만, 인물의 올드함은 못마땅하다.

죄의식에 몸부림치는 인물들. 죄의식에 대한 고찰이든 뭐든, 여자 때문에 사무치는 죄의식으로 자학하는 인물들이 작가에게는 그렇게도 사무치는 것인가? 인물에 흥미를 느끼든가 아니든가, 그건 곧 취향의 차이인가?

 

[미국의 목가]는 1997년, [지상의 노래]는 2012년 작품이다.

 

아이고... 지친다.

 

 

 

 

 

 

 

 

 

 

 

 

 

 

 

 

[지상의 노래]에는 구약의 '압살롬' 이야기가 '후'의 이야기에 중첩되어 있다. 소설에 직접 나오는데, 다윗왕의 장자 암논과 이복동생 압살롬, 그리고 누이 다말의 얘기. 압살롬은 뒤에 아버지 다윗왕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참살된다.

역시 구약은 흥미진진한 이야기 덩어리다.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압살롬!]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책더미 속에 압살된 채 있다. 어.. 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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