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해본 사람들이 왜 부코우스키 부코우스키(부코스키?) 하는줄 이제야 알겠다.
첫책이다. 아직 백페이지도 못봤지만..쓰바..죽인다.
하, 이 작가 소설들 계속 읽게 될거같다.

맥주에 절은 내 영혼은 세상의 모든 죽은 크리스마스트리들보다 더 슬프다..
주인공 치나스키의 단편소설 제목이다.

몇번의 고배끝에 드디어 잡지에 채택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먼 멜빌의 [피에르, 혹은 그 모호함]이 1, 2권으로 출간됐다.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읽기](오이겐 드레버만)를 읽다가 소개된 것을 보고 궁금했던 소설이다.

2013년 4월에 쓴 페이퍼다.

음.. 꽤 시간이 흘렀군. 그때 생각이 난다. .. 뭘 하고자 했던지도.

 

"가시장미 공주의 왕자와 멜빌의 피에르"(http://blog.aladin.co.kr/trackback/mysty/6294678) 라는 제목으로 쓴 페이퍼다.

 

 

오이겐 드레버만의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 읽기]를 읽다가 허먼 멜빌의 소설 [Pierre: or, the  Ambiguities](1852)가 궁금해지다.

아들을 나르시시즘적으로 사랑하는 엄마. 약혼녀와 아버지의 실패한 사랑에서 태어난 여자와의 사이에서 오가는 아들.

'멜빌은 위대한 사실성과 빼어난 심리학적 직관으로' 실패하는 아들의 비극을 그린다고 하는데,

동화 [가시장미 공주]에 등장하는 왕자와 비교하며 이 동화가 '위대한 세계문학'의 비극에 대안을 보여준다고...미끼 마구 투척.

난 이런 심란하고 껄쩍지근하면서 끈적끈적한(멜빌의 '사실성'이 그럴 것 같지 않긴 하지만) 심리적 '모호'함에 끌린다.

물론, 지금부터 150여 년 전 소설이라, 그 이후 이런 심란한 모호함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생각해보면 제 아무리 멜빌이라도 보도듣도 못한 신세계를 보여줄 수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보고 싶다.

허나 당장, 그리고 앞으로도 어쩌면 ... 읽을 수 없는 책일 것 같다.

 

 

 

 

 

 

 

 

 

 

 

 

 

 

 

 

 

그때는 '당장 읽을 수 없는 책' 으로 묶어뒀는데... 이렇게 떡 나오니 마치 내가 소개라도 한 것 같이 기분이 묘하네.

표지가 인상적이다. 더 가까이 당겼지만 여전히 뒷모습.

150년 전의 이야기.

지금도 여전히 읽을만할까.

"완전 파괴의 비극적 비전"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V뉴스는 손석희 뉴스룸만 보는데, 지난 월요일 앵커브리핑 제목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였다.

국정원 불법해킹 프로그램 사용과 관련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인냥 대처하는 국정원과 정치권, 그리고 우리의 처지까지를 진단했다.

손석희는 A.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인용했다.

 

뉴스 보다말고 책을 찾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다.

황금가지판을 가지고 있는데, .... 읽었던 책이다. 

기억나는 거라곤 열명의 인디언 어쩌고 해서 차례차례 죽어나갔던 내용.. 정도 외엔 참으로 고맙게도 전혀 생각나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완전 새책, 안 읽은 책처럼 흥미진진하게 읽어 나갈 수 있었다.

기가막히게 재밌는 이야기다. 구성은 가히 천재적이다. 어쩜 이토록 놀랍도록 뛰어난 소설을, 읽어도 읽어도 언제나 새롭게 다시 읽을 수 있는 것인지 그 자체가 미스터리다.

 

이건 그야말로 상상력의 소산이다.

범행을 재연한다면, 범인은 들키지 않고 재연해 낼 수가 없다. 반드시 들킬 수밖에 없는 행위들일 것이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쓰바.

 

하나 예를 들면, 다섯번째 희생자로 에밀리 브렌트라는 65세의 독선적인 여성이 살해된다.

키워드는 '벌'이고, 정작 살해수단은 청산가리 주사였다. 범인은 아침 식사시간 언젠가 틈을 봐서(범인을 제외하고 아직 4명이나 서로를 의심하며 신경을 집중해서 살피던 상황이었다) 일단 찻잔에 소량의 수면제를 타서 에밀리가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고, 그로 인해 혼자 식당에 남는 (혹은 그 무렵 언젠가) 어느 시점에 움직여 그녀의 목덜미에 주사기를 찔렀다.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에밀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응접실에 모여 있는 상황, 누군가의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는데 게다가 그 노래대로 집행하기 위해 '벌'까지 날려주시는, 센스 넘치나 고단하고 위험한 범행을 행하는 것이다.

그밖에 주사기를 감추고, 위장하기 위해 도구들을 훔치고, 감췄다, 사용하기까지 아, 아무리 'a red herring'(훈제청어)가 힌트라지만 ... 글쎄요, 이 번잡하고 고난도 살인 행위를 들키지 않고 의심받지 않으며 행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그야말로 크리스티의 재미난 착안과 탄탄한 구성력, 설득력 있는 인물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믿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약간만 삐딱하게 보면 ... 에이, 이게 어떻게 가능해... 하는 식이 된다.

들킬 수밖에 없다니까.

 

그럼에도 이번에 읽으면서는 단서가 눈에 띄었다. 주목한 점은 각 인물들이 지닌 과거 범죄 사연에서 드러난 '목격자' 혹은 '인지자' 의 존재다. 자신들은 완전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지만 그 범죄에 목격자가 있거나 그(혹은 그녀)가 범죄를 저질렀음을 인지하는 자들이 있었다.

난 이 점이 이번에 읽으며 크리스티가 정말 대단한 추리작가임을 인정하게 된 큰 발견이었다. 예전에 읽을 때도 그랬는지... 기억에 전혀 없다.

문제는 이 단서들을 종합하여 추론한 뒤 누가 범인이군, 같은 어떤 결론을 내릴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대개의 추리소설, 특히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아마 뛰어난 두뇌를 가졌더라도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실행에서는 걸릴 대목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에는 미스 마플이나, 포와로, 혹은 홈즈 같은 탐정이 나오지 않는다.  

 

 

 

 

 

 

 

 

 

 

 

 

 

 

 

열명이 한명씩 살해되고 자기들 안에 범인이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된 남은 사람들의 공포.

때문에 네 명이 남게 됐을 때부터 어떤 방식으로 그 공포를 더 조일 수 있을지, 미스터리의 긴장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독자를 사로잡을 플롯이 중요해지는데 크리스티는 이런 면에서도 과연 여왕답다.

크리스티 자신이 이 소설의 플롯을 '실현 불가능한 플롯'이라고 했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목이 낭만적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룬 소설이라는 건 낭만을 덧입혔다.

모스크바 외곽에 살면서 매일 '척추질환 및 바이러스성 뇌염 연구소'로 출근했던 레오니드 치프킨이 일정 시간을 바쳐가며 썼던 그의 마지막 소설이다.

문학청년이었고 영화를 좋아했던 그였지만 직업은 의사이자 연구자였다.

2차 세계대전과 스탈린 시기를 살면서 유대인으로서 불행한 개인사를 지녔다.

해외 출국이나 이민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시절, 먼저 아들내외가 이민을 갔고 그로 인해 치프킨 부부는 곤혹스러워진다.

한번 허용됐던 출국 때 소설 사본을 빼돌려 미국인 부부에게 맡긴다.

이것이 해외에서 그의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하는 길이 됐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치프킨은 해직되고 해외에서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한 후 일주일 째인 어느날 아침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한다.

 

이 소설은 화자인 나(치프킨)가 아내와 함께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면서부터, 1867년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바덴바덴으로 향하던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여정을 함께 떠올리며 시작한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채무에 허덕이고, 유형지에서 살아돌아온 후유증으로 우울증과 발작을 앓기도 하는 어쩌면 익히 알고 있는 상태였다. 안나의 헌신으로 겨우 버텨가던 중이었다.

독일 바덴바덴의 여름은 그 한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치프킨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안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쏟아낸 이야기라고 보면 되겠다. 바덴바덴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심각한 도박증과 강박증, 열등의식, 의처증, 발작을 일으킨다.

그때마다 뒷수습을 하고 참아내며 생활을 이어가는 건 안나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막막하고 불행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날이었다.

바덴바덴을 떠날 수는 있을까, 지옥같은 곳에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공포를 느낄 정도까지 안나의 정신을 몰아가는 생활이었으니.

 

짧은 시간의 단 한번 출국 허가를 받아봤던 치프킨으로서는 바덴바덴, 바젤, 파리... 등으로 이어지는 도스토예프스키 부부의 여정을 따라가며 쓴 묘사는 순전히 상상과 몽상, 몽환이 섞이며, 안나의 일기를 토대로 한 사실과 허구가 공존한다.

안타까움과 절망과 그럼에도 느껴지는 두 사람의 사랑이라는 관계가 담담하게 묘사되고 서술된다. 무겁다.  

객관적인 묘사 위주의 문장을 구사하는 게 어찌보면 답답하고 참담한 일들, 감정의 연속으로 점철된 이 소설을 그나마 읽을 수 있게 했던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 전 작품에 대한 치프킨의 분석과 자신만의 관점을 갖지 않았다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게끔 자극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스위스 바젤에 있는 사원의 박물관에서 본 한스 홀바인의 젊은 시절 그림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그림과 관련된 장면은 이 소설에서 내겐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 부부는 마침내 바덴바덴을 떠나 바젤에 도착했고 그곳 박물관에서 이 그림을 보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그림에 깊은 인상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치프킨은 본다.

십자가에서 내려져 무덤에 안치된 그리스도의 모습. 앙상하게 마른 몸. 이미 검게 된 얼굴과 부패가 시작된 듯한 발.. 등

그야말로 시체다운 시체의 모습으로서 그리스도를 그린 것.

치프킨은 이 그림이 소설 [백치]의 모티프가 됐다고 쓴다.

 

이 그림은 신앙을 잃게 만든다. (203)

 

이것이 아마도 [백치]의 중심 생각이었을 것이다는 것.

실제로 [백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1869년에 출간한 소설인데 약 2년간 집필된 것으로 알려졌다.

바덴바덴으로의 여행과 맞물려 있다.

 

[백치]에 나오는 로고진의 집 문 바로 위에 걸려 있던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다.

 

이것이 고로호바야 거리에 있는 로고진의 집 문 바로 위에 수평으로 길게 걸려 있게 되는 그 그림이었다. 그렇다.

이 그림은 바로 그곳에 걸려 있어야만 했다. 미슈킨 공작도 스위스에서 이 그림을 보게 되는데, 이 인물은 지금 의자 위에 서서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도스토예프스키는 박물관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올라가 이 그림을 본다. 박물관 직원의 제제를 받지만 한동안 그렇게 서서 그림에 빠져있다]과 똑같은 생각, 즉 '이런 그림은 신앙까지 빼앗을 수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도스토예프스키가 로고진의 형상을 떠올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작고 타오르는 눈빛을 지닌 상인 로고진은 오만하되 이미 무너져가고 있는 한 여자에 대한 욕망으로 타오르는 인물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영원한 여주인공인 이 여자는 그의 감각을 병적으로 자극했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 욕망은 결코 만족되지 않았다. 미슈킨 공작이라는 인물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아직 떠오르지 않은 때였다. 절반은 그리스도이며 절반은 돈 키호테인 이 슬픈 모습의 기사는 지금 의자 위에 있는 사람처럼 간질병 때문에 고통받는다. (202)

 

 [백치]도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터라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치프킨은 죽음에 깊이 경도된 듯하다고 그의 아들은 말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 장면이다.

폐출혈로 계속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도스토예프스키.

그 옆을 지키는 안나.

아마도 페미니즘에서 안나를 본다면 많은 얘기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이 향후 러시아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작가이고 사랑한다면 이렇게 살 수도 있는 모양이다.

 

러시아 문학의 깊이와 매혹을 경험하기 위해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수전 손택의 권유가 아주 허황된 말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특히 [백치]는 조만간 읽을 것이라는 목록에 집어 넣어뒀으니까.

열린책들 판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읽는다면 얼떨결에 읽었던 과거 어느 때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겠지.

이번엔 좀더 많은 걸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인물들에 대해서도.

두번 째 읽는 [백치]는 어떨까.

 

 

 

 

 

 

 

 

 

 

 

 

 

 

 

 

그리고 치프킨의 러시아의 시인 츠베타예바의 시를 좋아했다는데,

 

어디서든 떠나는다는 것은 곧 하나의 죽음과 같네 (198)

 

를 인용했다.

바덴바덴의 악다구니같은 짧은 체류를 드디어 벗어나 떠나는 때에 느끼는 회한을 치프킨은 츠베타예바의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살아왔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하나의 죽음과 같은 정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

평생 KGB와 소련 정부를 두려워해서 떠나고 싶어했던 치프킨이었지만 이민 허락은 끝내 내려지지 않고

고향이 아닌 곳에서 결국 삶을 마감했다.

절묘한 표현이다.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5-07-2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덴베단 좋죠 ? 저도 수전 손택에 이 소설을 극찬하는 것을 읽었습ㄴ디ㅏ. 하도 칭찬을 하길래 이 소설을 읽었는데 정말 칭찬할 만하더군요. 꽤 재미있게 읽었습ㄴ디ㅏ.

포스트잇 2015-07-27 14:48   좋아요 0 | URL
아주 재밌게 읽었다..고는 하기 어려워요ㅎㅎ 읽다가 딴데로 새기도 했으니까요.사실 수전 손택의 극찬이 쉽게 이해되는건 아닙니다. 안나라는 인물에 이입하게 되던데요..답답함의 연속이었습니다..작가가 굉장한 거리를 두고 썼구나, 생각했네요..그래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저 그림과 백치 때문인듯요ㅎㅎ

다락방 2015-07-2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나의 입장, 안나가 가진 생각이 궁금해서 이 책을 읽고 싶어지네요, 포스트잇님. 저도 꼭 읽어보도록 할게요. 불끈!

포스트잇 2015-07-27 15:52   좋아요 0 | URL
네,꼭 읽어보시고 재밌는 글 올려주세요^^다락방님 덕분에 내팽개쳐두지 않고 다시 꺼내 읽었네요ㅎㅎ
 

무한도전 가요제를 제대로 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 가요제를 통해 발표된 노래를 흘려듣기는 했겠지만 한번도 제대로 들어보기 위해 플레이를 눌러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엔 처음부터 보고 있다.

물론 가요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생긴 기획이다.

혁오와 자이언티는 이미 얼마전부터 알고 있고 음악도 들었던 터라 그들이 무한도전에 출연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을 봐야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들의 노래는 역주행이라는 트렌디한 말을 이끌며 주요 가요차트 순위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이런 일도 있는 것이다. 영향력 있는 인기 프로그램이 매니아들만 관심 가지고 있던 인디 음악인들과 음악을 끌어올리는 것.

갑자기 그들의 음악성이 각광받게 된 것이다.

진짜로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일까.

젊은이들에겐 더 쉬운 일이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서 그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다시 찾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거기까지 미리 생각하면서 뭐라 하고 싶지 않다.

남무성의 [Paint It Rock] 전편을 정말 재미있게 보고 나서 우리 가요에 대해서도 이런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 있었으면 나처럼 뭐든 책으로 먼저 접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들에겐 참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아쉬운 대로 몇 권의 책들을 찾아보니 이 책들을 대강 훑어보며 개별 음악들을 찾아볼 방법밖에 없겠다.

 

'음악성' 보다는 가수의 '가창력', 그것도 고음이 어디까지 올라가냐로 갑론을박하고 있는 보통의 한국 사람들에게 낯선 풍경들과 음악들을 들려주는 그들의 존재를 이참에 들여다보려 한다.

 

 

 

 

 

 

 

 

 

 

 

 

 

 

 

문화기획그룹이자 문화매체 편집자인 박준흠이 엮은 [대중음악 SOUND VOL.7 - 한국인디음악 명곡 100선].

잡지인 모양인데 한권도 본적이 없어서 어떤 수준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인디음악명곡 100선을 선정한 이 호를 구해봐야겠다.

일단 소개된 명곡 탑10곡 중에는 이미 알고 있는 곡도 있고 뮤지션들도 있지만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곡들도 있어서 찾아 들어본 결과... 이게 명곡 탑10곡에 왜 드는 거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곡도 있다.

취향상 내가 싫어하는 목소리 가창법도 있다. 이건 어쩔 수 없다. 또 가창력을 따지냐고 하겠지만 가창도 중요하다, 쓰바.

여튼 100곡 부지런히 들어보고 왜 선정하게 되었는지도 읽어보겠다. 

 

더불어 한국의 인디레이블을 정리한, [한국의 인디레이블 : 가슴네트워크 기획.선정, 한국대중음악의 현재 시리즈 VOL. 3]도 읽어보고 싶다.

 

 

 

 

 

 

 

 

 

 

 

 

 

 

인디음악명곡 100선이 2013년, 한국의 인디레이블이 2009년에 출간됐다. 

적어도 2년, 많게는 6년의 공백이 있다.

무지막지하게 빨리 변하는 한국이니만큼 인디음악도 그만큼 변화가 무쌍하다.

명곡 100선에 이름을 올린 국카스텐이 그때의 국카스텐이지 아니지 않나.

그때의 홍대가 지금의 홍대와 같지 않지 않나.

그래도 역사를 훑는다는 점에서 읽어볼만할 것 같다.

 

 

 

 

 

 

 

 

 

 

 

 

 

 

 

역시 무한도전에 출연하면서 급 인지도가 올라간 양평이형, 하세가와 요헤이의 한국 록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1995년부터 한국에 와서 산울림과 협연하고 장기하와 얼굴들의 멤버가 되기까지 한국에 적응하면서 하필이면 인디뮤지션들과 록을 하게 된 이야기들이 일본인의 관점에서 한국과 한국록을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웃음이 나오는 대목도 있다.

양평이형에게 한국은 '대륙의 기질'을 가진 나라다. 하하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그런 면도 보이는 모양이다. 이 대목 읽다 한참 웃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신기하다.

일본의 음악인이 한국의 록, 특히 산울림의 음악이 세계 팝과 록을 마스터한 자에게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처럼 다가와 마침내 현해탄을 건너 한국에 '와 봐야'했던 사연을 읽고 있자면 그런 숙명과 같은 일에 이끌리는 일이란 위대하고 거룩하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한국에 와서 한국가요의 LP판을 사모으는 이야기가 재밌다. 버려지는 음반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구해낸다. 90년대와 지금은 너무나 달라져 음반은 이제 재테크 수단으로도 생각되어지는 모양이니...

화보처럼 그가 구해낸 귀한 한국가요와 그룹들의 명반 소개를 보고 있자면 한국 사람이면서도 알지 못하는 음악과 음악인들의 존재를 역사 속에서 다시 돌아볼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록에 빠져 있다. 록이 좋다. 그러다 이런 생각도 한다. 록을 좋아하는 게 아무래도 단순하다는 걸 말해주는 건가?

인디음악명곡 탑10에서 아무래도 두번 이상 듣게 되는 건, 국가스텐의 <거울>과 허클베리핀의 <사막>이다.

물론 <차우차우>도 좋고, 언니네이발관도 좋다. 가리온의 <영순위(Feat.넋없산)> 도 좋다.

그리고 41, 42번 째에 있는 MOT(못)이라는 뮤지션의 <날개>도 정말 좋다. 예전에 알고 있었는데 100곡에 선정되었다.

이곡 말고도 MOT의 곡들은 대개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