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멀티플렉스가 없는 것도 아니건만 ... 영화는 보고 싶은데..밖으로 나가는 게 귀찮다. 
설 연휴 끝에 배앓이를 하면서 퍼질러 있다. 약 먹다. 에휴, 한번씩 몸이 아프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고통스럽다. 갈수록 고통을 참는 게 어려워진 듯하다. 해서 두통에도 약, 배앓이에도 약, 약, 약, 감기도 앓기 싫어서 종합감기약류를 미리 삼킨다. 고통이 싫다. 
 
사다 놓은 책들은 읽는 속도가 더딘데 사는 건 광속이다. 쓰바. 
하이스미스 소설을 읽고 싶은데 번역이 별로야? 고민된다. 
 

 
 
 
 
 
 
 
 
 
 
 
 
 
 
 
선착장이 사라져?
  

 
 
 
 
 
 
 
 
 
 
 
 
 
 
로쟈님이 모린 코리건의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를 읽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있는 '줄표― '가 우리 번역본에서 사라지고 대신 말줄임표 .....'로 표기된 것을 발견하고 문제 제기했다. 
과연 그러네. 난 김욱동과 김영하 번역본을 가지고 있는데 두 책 모두 말줄임표가 있다. 
기가 막힌 건, 학생 시절에 사두었던(물론, 읽지 않았다ㅜ)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영한대역문고판을 보니 원문에는 진짜 줄표가 있는 것이다. 왜 줄표를 그대로 넣지 않았을까.  
 
프랑코 모레티의 [근대의 서사시 :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까지 근대문학 속의 세계체제 읽기]를 보고 있는데, 19세기의 [파우스트] 이행단계의 [리벨룽겐의 반지], 그리고 20세기 [율리시즈], 에필로그로 [백년의 고독]을 다루는 이책을 대충대충 읽다가 [율리시즈] 부분에서 연신 감탄하며 읽고 있다. 
블룸의 '초현실주의적 소요(逍遙)'에 대하여 의식의 흐름과 언어의 큐비즘으로 향한 그 산문적 배회라는 말. 이런 말들이 나를 흥분시킨다. 
 
무심함. 
 
블룸은 아마 세계문학에서 가장 무심한 인물일 것이다.(216)
 
블룸의 의식의 여행은 미지의 땅으로 향하는 상상의 여행이 아니다. ... 모든 것이 익숙하며, 지상에 속해 있으며 한낮의 빛에 잠겨 있다. (221)
 
여기에서 사물들에 대한 장악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의식의 흐름을 묘사한 모든 문장, 거의 모든 단어는 자체가 하나의 완벽하고 독립적인 세계이다. 모든 단락이 세밀화로 그린 여담이다 ---- 이것은 우리가 바로 앞에서 읽었던 문장처럼 끊임없이 팽창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저지할 수 있는 '유기적인 ' 족쇄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계적 형식의 논리이다. 괴테, 플로베르, 크라우스, 파운드, 더스 패서스, 무질에게서 보이듯이 잠재적으로는 거의 무한대로 이어지는 추가 ...... . 실제로 조이스에게 [율리시즈]를 '작업한다(work)' 는 것은 [율리시즈]를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출판업자가 인내심을 잃고 교정쇄를, 그의 몇 번이고 더 휘갈겨 쓴 교정쇄를 되돌려보낼 때까지. (237)
 

하지만 일단 [율리시즈]가 멈춘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질문은 그대로 남는다. 전적으로 독립절로만 만들어진 이 우주, 즉 모든 것이 전경에 배치되어 있고 날마다 써대는 바람에 새로운 세목들이 계속 첨가되는 이 우주에서 각각의 페이지, 각각의 문장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도대체 의미를 가질 수 있기는 한 것일까? (238) 
 

 

 

 

 

 

 

 

 

 

 

 

 
 
 
 
 
 
 
 
 
 
 
 
   
'중요하지 않은 몸짓들, 덧없는 태도들, 장황한 말들.....' (238) 이러한 블룸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두껍고 장황한 책을 읽는 동안 독자의 정신 또한 초현실주의적 소요를 떠나면서 책 따로 정신 따로의 세계를 맛볼 것이다. 그러나 모레티의 [율리시즈]에 대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율리시즈]를 읽는 것 같다. 
인용한 문장들은 과연 그런가를 확인하도록 유도하는 것보다는 그 자체로 그냥 읽을만하다. 그 자체로 좋지 않은가. 
이후 모레티가 [율리시즈]의 무의미한 의미를 어떻게 찾아나가는지 어떤 문학의 세계로 이끌지 궁금한 글이다. 
좋은 글을 읽는 건 늘 행복한 거다.
 
그나저나, 아 쓰바, 로쟈님 새 책은 언제 나오는거야?
그리고 저 [캐롤]의 번역은 정말 별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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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야당이 총선에서 완패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현재 야당은 사람이 바뀌어도 어째 별로 유능해 보이진 않는다는 데 고민이 있다.

보수화된 32명의 심층 인터뷰라는 이책이 궁금하다.

사람들은 강한 정치적 리더십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는 견해가 눈에 띈다.

진보가 선의를 가지고 있고 보수가 특권층을 옹호한다는 것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를 지지하는 이유들을 잘 들을 필요가 있는 듯하다.

'강한 정치적 리더십'.

이것이 무엇인가.

계속 지는 야당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선거는 결과에 불과하다. 평상시 대여 협상에서 판판이 내주고 건진 게 없는 걸 말한다. 야합이 횡횡한다. 싸우는 듯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다 내주는 거다.

싸울 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진정한 야당은 없다고 봐야한다. 원내교섭단체도 못되는 소수정당은 뭐 할말이 없다.

야당이 없으니 걍팍한 여당과 천박한 정치인들이 판을 친다. 정치 수준은 계속 떨어진다.

사람들은 다 보고 있다.

배수진을 치고 전력을 다해 싸우는 야당이 없는 한 기댈 게 없는 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번 총선 전에도 판판이 진다면 총선은 더 볼 것도 없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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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의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을 읽기 시작했다.
뚝 건너뛰어 2장 인물부터 읽는데, 문학사조에 따라 작가들은 무엇에 관심이 있었던가, 그래서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훑는데, 어렵지 않은 문장으로 쉽게쉽게 특징들을정리한다.
그냥 고수다는 느낌이 팍 온다. 마치 척사광의 마인참을보는듯하다 ㅋㅋㅋㅋ

읽을 맛이나는 책일듯하다. 이글턴 형님이야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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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2012)를 뒤늦게 읽고 있다. 아직 2부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미뤄두고 있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자극을 받게 된다. 읽기에 급급한(그것마저도 게을러서 더디기만 하지만) 처지에 있는 나로서는 한없이 감탄스럽고 부러울 뿐이다.

문학을 읽는다는 건 그 작품에 대한 빈틈없는 이해가 우선적인 듯싶다.

로쟈님의 경우, 기본적으로 작가에 대한 이해, 작품 탄생 전후의 사정에 대한 이해, 번역상태에 대한 이해, 등등 아주 폭넓고 깊이있는 독서들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단테의 [신곡]을 읽고 그에 관해 글을 쓰기 위한 기본 작업들은 이렇다.

 

한형곤 교수의 완역본 《신곡》박상진 교수가 산문으로 풀어쓴 《신곡》, 그리고 김운찬 교수의 해설서 《신곡》을 마련해 놓고, 거기에 덧붙여 도서관에서 영역본 《신곡》과 러시아본 《신곡》까지도 펼쳐놓았다. 그리고 읽을 줄 모르는 이탈리아어 《신곡》까지도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 띄어 놓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연후에 <지옥편>의 첫 아홉행을 읽는다. (147)

 

한 권의 작품을 읽고 고쳐쓸 수 있기 위해서 기울여야 할 기본 노력들에서 벌써 기가 죽는다.

어쩔 것이냐, 로쟈님 같은 서평가, 비평가들이 해주면 나같은 건성건성 독자들이 읽고, 그렇구나, 이렇게 깊은 뜻이... 뭐 이러면 되는 거 아닌가? 아, 쓰바, 쉽게 생각하자. 어차피 가는 길이 달라. ㅎㅎ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면 작가와 작품간의 상호관계를, 새로운 정보를, 새롭게 접근해 볼 수 있는 이해의 한 길을 제공받는다.

나 나름대로 흥미롭고 인상적인 부분들을 꼽자면,  

괴테의 [파우스트]를 '파우스트의 개발주의 vs 메피스토의 허무주의'는 꽤나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다.

악은 허무를 부추기는 데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해석.

과문하다보니 그동안 집중된 면은 뫼르소의 살인의 이유가 뭐냐를 놓고 많은 설명과 해석이 있었던 걸로만 알고 있다.

'태양 때문'이라는 이 막막한 이유 앞에서 당혹스러워했던 독자들이 찾아 헤맸던 그 많은 이유들.

로쟈님은 '이방인'으로서 뫼르소의 '은밀한 갈망'에 주목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법'과 '아버지', '사형선고'이다.

 

살해장면에서 이에 대한 암시를 찾는다.

 

"나는 온몸이 긴장하여 손으로 피스톨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나는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를 만졌다. 그리고 짤막하면서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담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굳어진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틀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127)

 

 

'태양 때문'이라는 우발적 총격과 뒤이어진 '강한 의도성과 필연성'.

뫼르소가 남긴 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128)

 

이 말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그럴듯한 설명이라고 주억거려졌다.

로쟈님은 [이방인]을 "다시 읽어봄으로써,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신화'를 조금 걷어내 보기로 하자" (118)고 앞부분에 이미 밝혔다.

아, '신화'였던가.

이렇게 읽어도 되는지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주워들어야겠다.

그런데... 어디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방인] 출간 후 몇 개월 뒤에 나온 [시지프 신화]는 [이방인]의 주석서인지도 모른다니까 이 책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언뜻 생각하면 원문과 주석의 앞뒤가 잘 맞는 것 같지는 않는데, 어서 읽기를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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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린 코리건의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초반부를 읽고 있다.
생각보다 계속 붙들게 하는 힘이 있다. 피츠제럴드의 생애와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또 새롭다.
특히 이소설에대한 칭찬은 특급이다.
그리고 물. 피츠제럴드 생애도 물(넓은 범주)과 밀접하고 소설 또한 어디에나 물이 있다고.

이렇게해서 이 소설을 다시 읽어야할 이유가 생겼다.근데 지금으로선 이책이 어디에 있을까. 내놓지 않은 책이다.

대책없이 물에 뛰어든듯한 인생. 어떻게든 물밖으로 머리를 계속 내밀고있기위해 노력해야하는데, 그일의 고귀함이 피츠제럴드의 글쓰기와 그의 인생에 흐르는 주제라고 한다.
한계의 불가피함을 인정하는게 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것을 거는 것의 행위는 위대하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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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1-22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읽고 계시군요! 저는 읽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결제 직전에 뺐는데.. 어쩐지 포스트잇님이 부러워지네요. 아아.. 저는 피츠제럴드 정말 좋아하는데요. 위대한 개츠비 보다 그의 단편들을 훨씬 훠어어얼씬 좋아해요. 아 정말 궁금하네요..책 지른 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포스트잇 2016-01-22 14:33   좋아요 0 | URL
피츠제럴드를좋아하신다면, 읽어보셔야겠네요^^초반은 흥미롭네요. 개츠비만 수십번에 강의도 매년할정도면 꿰뚫고 있을뿐아니라 인상적인 관점도 줄거라고 기대합니다~뭣보다 저자가 작가와 작품의 덕후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