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오 평전 | 옌리 에산, 구지엔구오 (2000) | 홍승직 역 | 돌베개 (2005)

이탁오 (1527~1602)

중국 명나라 학자. 호 탁오(卓吾). 이름은 지(贄). 저서로는 《분서()》, 《속분서()》, 《장서()》, 《속장서()》등이 있다.

저자들은 그를 '중국 제일의 사상범'이라고 평했다.  책 부제가 "유교의 전제에 맞선 중국 사상사 최대의 이단아"이다.

그의 나이 54세였던 1580년에 관직을 사퇴하고 가족과도 떨어져 지인들이 마련해준 거처를 전전하며 문을 닫아걸고 오로지 책을 읽고 저술작업에 몰두했다. 결벽증이 있었는지 하도 마당을 쓸어대는 통에 그를 모신 이는 비를 마련하는 데 애썼다고 한다. 그 결벽증의 일환이었는지 어느 날 나이들고 병든 몸에 머리마저 부시시 해 그날로 삭발을 해버렸다. 사대부들이 난리를 쳤다.

1602년 나이 76세에 탄핵을 받았을 때 이미 유서까지 써놓고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병든 이탁오는 떼낸 문짝 위에 실려 압송되어야 했다. 감옥에서 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을 했다. 칼로 목을 그었는데도 바로 죽지 않아 그는 이틀을 더 살았다.

오래 전에 그의 저서 《분서()》(홍승직 역 | 홍익출판사 |1998)를 읽었을 때 이탁오는 잘 다가오는 인물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주자학에 도전한 양명학을 받아들인 돌출적인 학자 정도로 이해했다. 이 평전은 이탁오 그의 일생과 행적, 그리고 그의 저술들을 통해 사상적 측면까지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해주어서 아주 흥미롭다.

1602년 언관(言官 ) 장문달이 올린 이탁오 탄핵소를 보면 이탁오가 얼마나 유가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적을 했으며 따라서 그가 사상범이 되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일부를 보면,

"중년에는 관직에 있다가 만년에는 삭발을 하더니, 최근엔 또 [장서] . [분서]. [탁오대덕] 등의 책을 출판하여 온 나라 안에 유포함으로써 심히 인심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여불위이원 같은 사람을 지모있다 하고, 이사를 재능이 뛰어나다 하며, 풍도를 사리사욕 없는 관리라 하고, 탁문군이 훌륭한 배우자를 잘 선택해다 하며, '상홍양이 무제를 속였다'고 사마광이 논한 것을 우습다 하고, 진시황이 천고의 유일한 황제라 하며, 공자의 시비 기준이 믿을 것이 못 된다 합니다. 허무맹랑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을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이고, 모든 것이 오류와 허점투성이라 이를 없애지 않으면 안됩니다."

'허무맹랑하고 이치에 닿지 않'으며 '오류와 허점투성'이라는 이 열거한 인물들에 대한 평은 이탁오의 저서 [장서]의 내용을 지적한 것이다. [장서]는 전국시대부터 원대에 이르는 중국 역사 인물 800명에 대해 정리하고 평을 한 책인 모양이다.

이 [장서]가 국내에 번역 출판된 것이 있는지 여러모로 찾아보았으나 없는 것 같다. 무척이나 보고 싶다.

평전은 전체적으로 재미있지만 특히 내 관심을 사로잡았던 것이 바로 이 [장서]에 관한 것이었다. 유교적 명분, 충절, 군신관계, 도덕 규범에 대해 깡그리 뒤집어가며 인물을 고르고 평했다. 명분 보다는 세상의 이익을, 도덕 보다는 지모를, 의니 불의니를 논하기 보다는 사회효과를 살폈고, 업적과 공과를 개인의 도덕과 분리해서 평했다.

'절의란 패망의 증거다', '정직,절의가 공적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물론 좋은 것이고, 단지 정직. 절의의 이름만 얻었을 뿐 세상에 이익이 없다면 그것은 한 푼의 가치도 없다.' '살신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가! 세상 사람들은 걸핏하면 살신성인으로 사람을 규율하는 데 심하도다!' 라고 단호히 말한다.

내가 모르는 인물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여기에 언급된 '풍도馮道'를 다룬 책이 있음을 알았다. 마침 도서관에 있길래 냉큼 빌려다 읽었다. 금방 읽을 수 있는 책인데 이 산만한 10세기 중국의 5대 10국과 그 줄줄이 이어지는 천자들과 인물들을 정리하는데 다소 짜증이 났다. 책은 주가 틀린 부분도 많고, 다소 의심가는 번역도 있어서 불만족스러웠으나, 풍도, 이 인물의 지그재그적 삶이 하 기가 막히기도 해서  그 힘 하나로 버텼다.  

 

 

 

 

 

풍도의 길 : 나라가 임금보다 소중하니 | 도나미 마모루 지음 | 허부문.임대희 역 | 소나무 (2003)

 풍도馮道 (882~954)

 "재상으로서 다섯 왕조와 여덟 성姓을 섬겼다. ... 아침에는 서로 원수였는데 저녁엔 임금과 신하 사이로 변하자, 표정과 말을 바꾸면서도 부끄러워 한 적이 없다. 큰 절개가 이랬으니, 설사 그가 착한 일을 했다고 한들 어찌 괜찮다고 말하겠는가!" (사마광 [자치통감])

"(나라의) 사직이 중요하지, 임금은 중요하지 않다. .... 풍도가 비록 50년 동안 네 왕조를 거치면서 열 두명의 임금과 야율씨의 거란에 봉사했지만 , 백성들이 끝끝내 전란의 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던 까닭은 풍도가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고 먹여 살리려고 노력한 덕분이다." (이탁오 [장서])

풍도에 대한 평가다. 사마광은 11세기 송나라 사람이다.

907년 당이 멸망하고 이후 960년 송이 건국되기까지 약 50여 년 동안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가 나라 이름을 올렸다 망하기를 거듭했고, 요로 통일국가를 세운 거란이 중국에 들어와 통치하기도 했다. 풍도는 후당의 장종, 명종, 민제, 말제를, 후진의 고조,소제, 후한의 고조,은제, 후주의 태조, 세종 그리고 거란(야율덕광)때 관직을 지냈다.(아니, 정리가 필요하군)

그런데 풍도에 대한 많은 사료가 없다보니 풍도의 분명한 뜻을 알 수가 없다. 물 흐르듯,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었고 거절도 분명한 의사표시도 강하게 한 적이 없는 사람인 듯하다. 지방 절도사로 보내면 갔고, 재상으로 부르면 다시 왔고, 지방에 있다가 거란이 수도를 함락하자 자진하여 들어와 읍하며 현신했다.

저자는 E.H.Carr의 말을 언급했다.

"역사를 연구하기 전에 역사가를,  역사가를 연구하기 전에 역사가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환경을 연구하라. "

풍도에 대해 사가들이 평가한 것들은 그 사가들이 처한 학문적 지평과 관점의 배경,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풍도에 대해 '불사이군'을 하지 않은, 유교적 충절 개념을 헌신짝처럼 버린 파렴치한 인물이라는 평가는 모두 유교적 덕목이 학계는 물론 규범의 보도가 된 이후 덧씌워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유교 덕목의 잣대가 아니라면 이탁오처럼 백성을 구했다는 점에서 평가해야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의심이 갔다. 도대체 풍도의 처세가 백성의 존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탁오의 말처럼 어떤 사회적 효과가 있었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사회적 효과란 또 무얼 말함인지?

오히려 풍도만을 얘기하자면 그가 재상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고서도 백성과 당대 시대의 사회적 효과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 또는 사명을 어떻게 규정했고 그에 따라 실행했는지를 따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통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천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또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형이 동생을, 동생이 형을, 조카가 숙부를, 무인이 또 다른 무인을, 장수가 문인을 죽여가며 하루를 열고 닫는 세월 속에 풍도 자신은 '원래 글쟁이로 그저 임금께 말씀을 올릴 뿐' 이라고 나약한 문인을 자처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른바 태평성대 때는 어진 재상일 수 있지만 환란을 구제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당시 평가를 얻었을 것이다. 결국 시기를 잘못 만난 것이다. 단지 물 흐르듯 갔을 뿐이다. 파여진 곳, 새로 나는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시대를 흘렀을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나 물이 되지는 못한다.

 

자신을 잘 알고 처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풍도는 자신을 잘 알았다. 자신이 물이란 것을. 난세에 물길을 뚫을 능력도 천성도 타고 나지 않았다. 뚫려지고 새롭게 나는 길을 따라 최선을 다해 공손히 따라가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에게 나라란 계속 관직과 식읍과 녹을 주는 지속성만 갖추면 그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유교적 충절, 충신에 대한 허명으로 논하기 전에 도가 아니면 나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도가 아니라고 판단하지 못하는 것(또는 판단하지 않는 것)도 죄다. 풍도는 한번도 사직을 청하거나 물러나기를 먼저 요구한 적이 없었다. 설혹  '태백'(太白若辱 [노자]에 나오는 말로 태백은 누가 써도 써야 하는 오욕의 자리에 서는 사람)의 치욕을 감당하면서 역할을 떠맡는다고 백번 양보하더라도 그건 그가 보이는 행위를 통해 판단할 문제다.

송 이후 사가들의 풍도에 대한 평가는 편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탁오의 풍도에 대한 평가의 근거를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웃다 죽는 줄 알았다,   꽤 오래전 김형곤의 "공자 가라사대"였던가  그런 개그프로야말로 이 논어의  패러디였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역자 조광수는 자신도 논어를 보다가  나처럼 웃었던 경험이 있어서 아마 이런 책을 내리라 맘 먹었으리라.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공자를 알고 싶어서 골랐던 책인데 [논어]에 나온 공자의 말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를 알게 해준다. 책세상문고의 [논어]를 보면서 포복절도했던 것들이 슬그머니 쑥스러워지는 대목이 많다. 아, 세상 알기의 어려움이여.

 post it :                                  

출판된 하고 많은 [논어] 책 중에서 하필 책세상 문고를 선택한 것은 우선 다른 해설 없이 오로지 논어 내용만을 죽 실었다는 점에서 중단없는 독서를 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알지 못하는 한문 원문까지 실어놓은 책들이 내게 지금으로서는 개발에 편자격이니. 해설 없이 주를 통한 짧은 지식만을 들춰보며 읽는다면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책세상 문고의 [논어]는 상당히 색다른 독서경험을 줬다고 하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떼구르르 굴렀다. 

저자(이 경우엔 엮음인데)가 '공자의 문도들'이다. 대개 [논어]의 저자를 공자로 표기하고 있거나 아예 저자를 쓰지 않고 옮긴 이(역자)만을 밝히거나 하는 책들이 대부분인데 책세상의 이 책은 '공자의 문도들'이다. 웃기지 않는가? 물론 처음에는 전혀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 새삼스럽게 쳐다보았을 때 난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역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미리 경고(?)를 했다.

"직역을 하면 도저히 뜻이 통하지 않는 구절에서는 나의 느낌을 섞어 풀어서 번역했다. 아마 이런 점이, 좀더 많은 독자가 고전을 접하기를 희망하는 '책세상 문고 . 고전의 세계'가 나에게 [논어]의 번역을 맡긴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공자를 존경하지만, 구절 하나하나에 매몰되지 않는, 단어 하나하나에 연연해 전체적인 뜻을 경직되게 만들지 않는 자연스러운 번역을 하고자 했다. 공자님 말씀을 바이블로 여기는 분들은 어쩌면 질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전은 늘 해석되고 또 재해석 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에게 역자의 '재해석'이 어째 김형곤의 '공자 가라사대' 의 대본으로 읽혀지고 말았으니.  아마도 나는 역자의 '느낌'을 잘 소화한 독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비록 공자님 말씀을 바이블로 여기지는 않지만 그러기에 더욱 이 책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논어]는 공자가 그의 제자들 및 당대 주변 인물들과 나눈 대화들을 후세 제자들이 정리해 만든 책이다. 그래서 공자왈(공자가 말했다)이 늘 앞에 붙곤 한다. 이렇다보니 이 대화가 어떤 배경에서 나온 말인지 알지 못하면 선문답처럼 느껴지기에 충분할 만큼 [논어]의 대화들은 경구이기도 하고 잠언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나는 [공자평전]을 보면서 [논어]의 대화 하나하나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공자평전]은 대개의 평전과는 다르다. 학술서에 가깝다.

[논어]의 말을 공자의 생애로 풀어놓는 제1부를 책세상의 [논어]와 함께 보기를 권하고 싶다. 물론 해설이 붙은 [논어]를 읽으면 간단하겠지만 말이다. 1부를 통해 공자의 생애를 일괄한다면 이후 책 내용은 공자학, 유가의 사상에 대한 해설과 사상적 배경, 그리고 중국 역사를 통해 공자학이 지닌 의미, 현대에서 이 중국 사상사 전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전유해야 하는지의 문제들을 아우르며 논하고 있다.

유학이 한반도 역사와 정신에 끼친 영향의 중차대함을 십분 헤아리면서도 이에 대해 자세히 천착해 볼 욕구를 가지지 못했다가 이제사 막 눈 돌리기 시작한 나와 같은 사람은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책세상의 [논어]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니 만큼 반드시 다른 관련 서적을 함께 읽어야 한다. 공자의 제자들-문도들-에 대한 지식도 함께 아우르지 못하면 잘못 인식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싶다.

나의 경험으로 그 대표적 예가 자로에 대한 것이었다. 공자의 제자 자로는 책세상의 [논어]를 읽다보면 공자가 감당하지 못한 제자였거나 혹은 어지간히도 싫어했던 제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공야장>편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공자가 말했다. "도가 행해지지 않고 있어 뗏목을 만들어 타고 바다로 나갈까 하는데, 나를 따를 사람은 자로밖에 없을 것이다." 자로가 그 말을 듣고 기뻐했다. 공자가 말했다. "자로가 용기를 좋아하는 것은 나보다 낫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취할 것이 없다."

이대로 읽으면 자로의 캐릭터는 단순무식함으로 정리되는 사람이다. 공자의 제자들은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일정한 수업료만 내면 문하로 받아들여졌던 터라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몰려있었지만, 자로는 '공문십철孔門十哲'중의 한명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제자였다. 그런데 책세상의 [논어]에서 역자는 이 자로를 철저히 코믹한 배역으로 삼았다.

자로와 관련해서는 또 이런 예도 있다.

공자가 말했다. "자로가 어째서 [감히] 내 집에서 [잘 타지도 못하는] 비파를 타는건가?"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공자에게 야단맞는] 자로를 공경하지 않으니 공자가 말했다. "자로의 학문은 마루까지는 올라왔지만 아직 방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 (<선진> 편)

[ ] 안에 든 말은 역자의 '느낌'으로 첨가된 것이다. 이 대목을 읽자면 저 멀리서 자로가 엉터리로 비파를 타는 소리가 들린다, 악에도 밝은 공자에게는 몹시 거슬리는 엉터리 연주다, 평소에도 못마땅해 하던 자로를 공자가 여지없이 비하하며 혀를 차는 장면이 그려진다. 제자들은 또 어떤가, 서로 얼굴을 감추며 킥킥 거리는 철없는 제자들의 모습도 함께.

그런데 [공자평전]에 따르면,공자는 악 역시 예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예에 맞는 음악과 예에 맞지 않는 음악을 구분했다. 자로가 연주한 곡이 바로 공자가 예에 맞지 않는다고 평가한 음악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자로의 연주실력을 가지고 놀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한 모양이다. 책세상이 선택한 해석은 바로 위와 같은 것이었다.

<공야장>의 에피소드도 공자가 참으로 고통스러운 한탄을 한 것과 관련이 있다. 공자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펼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은 제후국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자는 주유천하를 하면서 제후들을 만나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을 뿐만 아니라 '상가의 개'처럼 쫓겨다니기도 하고 전쟁이 벌어진 제후국들 사이에 갇혀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곤란을 당했던 때도 있었다. 이 말을 했던 때가 정확히 어떤 시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자신의 주유가 결실을 얻지 못할 것임을 짐작한 때쯤이 아니었을까. 이제 더 이상의 주유가 무의미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내 뱉은 말이었을 것이다. 그 때 제자들마저 스승의 사상이 비현실적이라고 논하며 자신들을 부르는 제후들 곁으로 떠나버린 상황에서도 자신의 곁에 남아 있는 자로를 보며 한 말이었을 것이다.

자로는 성격이 불같은 자였다. 원래도 협객이었다 한다. 공자를 철저히 지켰고 그럼에도 그의 곧고 급한 성격 때문에 공자에게 조롱도 받았던 인물이었다. 공자 보다 9세 연하였고 말년에 위나라 대부의 가신을 지내다 정변에 휩쓸려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그의 시체는 토막이 나 소금에 절여졌다고 한다. 공자가 이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면서 집 안에 있는 젓갈 단지의 뚜껑을 모두 덮어버리라고 명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 자로가 책세상 [논어]에서는 등장할 때마다 공자와 자로의 대화는 거의 '공자 가라사대' 한 장면이 되곤 한다.

(글이 날아갔다....)

 

 (내 머리를 대신 복구한다. 에구,에구)

자로 캐릭터의 결정판은 희대의 사건, 남자(南子)부인과 공자가 만나고 돌아온 장면에서 볼 수 있다.

공자가 남자를 만나러 갔더니 자로가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자가 맹세하며 말했다. "내가 만약 잘못했다면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 하늘이 나를 버리시리라!" (<옹야> 편)

스승이 제자들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고 문제의 남자부인을 만나고 돌아온 것이다. [논어]에는 나오지 않지만 뒷얘기가 있다. 공자는 돌아와 제자들에게 말했다. "난 원래 그녀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딱 한번 예의상 갔다온 것 뿐이다." 다른 제자들은 별말이 없는데 괄괄한 자로가 나서서 노발대발한 것이다. 아, 스승이 여자를 좀 만나고 왔기로서니 그걸 꼭 집어서 들춰내는 자로가 공자는 얼마나 얄미웠겠는가? 동양의 대스승이라는 공자가 하늘에 대고 내가 잘못했다면 하늘이 버리실 거라고 외려 큰소리를 치며 설레발을 떠는데 제자들이 더 이상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하늘을 우러르며 말한 뒤에 하늘에서 천둥치고 벼락이 치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런데 공자와 남자부인의 만남은 단순히 불륜 스캔들과 같은 사건이 아닌 것이다. 공자는 제후국들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자와 그 문도들의 처지는 무척 위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공자는 도가 없어진 세상에서 자신의 도를 펼치고 싶은 욕망을 결코 버릴 수 없었던 듯 하다. 공자와 문도들은 떠돌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왔는데, 남자 부인은 바로 위령공의 부인이었다. 남자부인은 정계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여자였다. 부인을 만나는 것은 곧 정계 진출의 끈을 잡을 수 있는 기회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남자부인이 공자를 초대한 것이다. 처음에 공자는 거절했으나 결국 그녀를 만나러 간 것이다. '벼슬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 [공자평전]의 저자는 말한다.

의심스러운 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진정 남자부인에 대한 공자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오로지 '벼슬', 순전히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무대를 마련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이었는지 나는 확언할 수 없다. 도가 아니면 나서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마저 저버리고 위령공이 아닌 그의 부인을 만났다는 것에 제자들은 아연했을 것이다. 뻣뻣한 자로가 폭발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자부인은 또 다시 공자에게 초청장을 보낸다. 이번에는 위령공과의 행차에 함께 해주길 바란다는 요청이었다. 공자는 이번에도 초대에 응한다. 공식행사 참석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이 행차에 함께 한 것에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자신이 놀림거리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위령공은 오로지 공자와 자신의 관계를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한 것일 뿐이었다. 공자는 위령공에게 "나는 당신처럼 여색을 탐하고 도덕을 가볍게 여기는 위인을 본 적이 없다"라고 일갈하며 결국 위나라를 떠난다.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가 [논어]에도 나온다. 공자와 남자부인의 스캔들은 공자에게 심한 열패감만 안겨준 채 쓸쓸하게 마무리된다.

차라리 인간적이다. 인간 공자의 모습을 [논어]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 아마도 책세상 [논어]의 역자는 이런 인간 공자를 좀더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웃을 수 있었으리라.

 공자와 남자부인, 위령공의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공자의 사상과 공자의 주장은 제후들에게 실천하기엔 너무나 우원한 길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자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공자는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권위와 세를 지닌 인물이었으니 제후들로서는 그를 위하는 척하면서 실제 정치에서는 소외시키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공자는 2000천년 이상 동아시아를 지배한 사상가이자, 스승으로서 영생의 길을 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jy 2009-03-2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논어와 공자를 읽고싶지만 그럴만한 역량이 안되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리뷰를 보고나니 게으른 제자신이 참으로 낮춰보입니다..

포스트잇 2009-03-22 12:26   좋아요 0 | URL
누추한 서재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님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이 글을 다시 읽었네요. 적잖은 나이에 방황할 때 썼던 겁니다. 그래도 그땐 시간적 여유가 있어 제법 길게 끄적거릴 수 있었는데 요즘은 나름 악전고투 중이라 집중이 쉽진 않네요. 관심가는 대로 읽자구요.안타까울 일이 뭐 있겠습니까?
 

견딜 수 없이 졸음이 쏟아져 소파에서 잠시 졸았다.

제대로 자려고 일어났더니만 그대로 잠들지 못하고 있다.

컴을 켜고 신문을 읽었다.

서울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최인호의 [유림]도 어느 새 오늘분이 올라와 있었고,

어제 늦게 올라온 기사들도 있어서 훑었다.

본 프레레 감독은 아마도 경질이 거의 확실한 모양이다. 언제였을까, 오래 전에 더 이상 이 감독으론 안된다는 결론을 나는 내렸다. 도대체가 비전이 없는, 전략전술은 말할 것 없고, 국민을 상대하는 인터뷰에서 보여주는 그의 '생각없음'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기본이 안된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계 축구 흐름과 동떨어진 그를 한국이 껴안고 갈 수는 결단코 없는 것이다.

'대안이 없다'고? 부지런히 최선의 현명한 대안을 찾아야 할 몫이 축협, 기술위 아닌가? 그런 임무를 방기하고 변명하는 그들 역시 시효만료된 자들 아닌가?

축구 얘기하다보니 이 밤중에 열이 오르네.

본 감독에게 누구못지 않게 분개하는 나였지만, 막상 더위에 비질비질 땀을 흘리며 닦는 그를 보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약한 모습이 보이는 자에게 나는 한없이 약하다. 일순간에 감정이 무너진다. 개별적인 아픔에 지게 되면 일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욕심에 차지 않은 직원을 잘라야 한다고 마음 먹기까지 수없이 망설였던 적이 있었다. 일은 계속 지지부진했고 한번 마음에 깃든 불만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주저했다. 그렇게 오래 끌었었다.

...............

책, 요즘 거의 못 읽고 있다. 읽은 것들 정리할 생각도 못하고 있다.

[맹자]에 손대고 있지만 하루에 한장 읽는 정도, 며칠 전부터 [주역]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데, 결국 좀더 두고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겨레신문 홍세화 기획위원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개혁을 집어던진 노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칼럼의 마지막은 이렇다.

"대통령 되기 전과 후의 변화무쌍함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따를 집권자가 또 있을까. 미국 앞에서 옷을 벗고 재벌 앞에서 옷을 벗더니, 마침내 영남의 지역주의 앞에서 옷을 벗고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를 뽑은 국민이 초라할 따름인데, 더 벗을 옷이 남아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는 자신이 벌거벗은 모습이 백성들에게 보이는 줄 모르고 당당하게 행진하는 임금을 보고 백성들이 대놓고 웃는 장면으로 끝난다고 기억하고 있다.

임금이야 백성들이 어쩔 수 없는 존재였기에 대놓고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백성들의 손으로 뽑는 임금이 아니기에 그리 멍청한 짓을 하는 걸 보며 왕정을 맘껏 조롱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번 임금은 허세만 가득하다고 뒷담화를 나누고 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노무 대통령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많은 국민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무참해지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IV~V]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최근에 읽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가 로마제국 역사에서 한 역할을, 낡은 공화정을 새로운 시대에 맞는 통치형태인 제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연 개혁가로 규정하고 있다. 시대 인식과 그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한다고 믿는 역할을 과감하게 실행해 나가는 카이사르의 모습은 시오노 나나미의 중언부언하지 않는 문장들 속에서 아주 명쾌하게 드러나고 있다.

역사를 중요한 전환점에서 그 역할을 떠맡은(또는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개인과 시대상황, 미래를 보는 관점, 실행력 간의 관계를 분석하고 평가해보는 재미가 쏠쏠한데, 그 개인은 어떻게 길러지며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나타내는 과정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게 한다.

매우 복잡하고 첨예한 지금 한국에서 국민은 정치체제와 의미 있는 개인을 선택할 수 있는 토대를 고민해야 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아침에 그런 번다한 생각들을 해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지막으로 나의 서재를 들렀던 때가 작년 9월이었으니 거의 1년만에 다시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앗, 나의 실수! 작년에 써두었던 몇 가지 글들을 없애고 말았다.

아쉬울 것은 없다.

그 동안 읽었던 책들로 마이리스트를 꾸미고 있는 중이다.

짧은 코멘트 위주로 책에 대한 예의를 표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리뷰를 쓰기엔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그리 넉넉치 않다. 언젠가 리뷰도 차곡차곡 늘어가겠지.

리스트를 만들면서 내가 얼마나 중구난방으로 책을 읽고 있는지를 새삼 인지한다.

아직도 나의 주제를 찾지 못했음이리라. 평생의 나의 주제, 천착해 들어가야 할 나의 연구 주제를 찾는 것이 과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