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하스 소년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유리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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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꾸는 이의 즐거움

봄은 특히나 행성 가꾸기를 좋아하는 외계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계절이다. 잠들어 있던 행성들이 여기저기서 깨어나기 시작하고 아무 우주에나 던져놓아도 쑥쑥 자라는 재미를 즐길 수 있으니까, 동족들도 비슷한 생각인지 오늘따라 행성 단지는 평소보다 붐볐고 각양각색의 행성들 사이에서 신중하게 작고 밀도가 높은 고체형 행성을 파는 가게 앞에 촉수가 멈춰졌다. 조그맣고 귀여운 크기의 푸른얼음덩어리, 아직 볼품없게 생겼지만 이런 녀석들이 막상 키우다 보면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워진다는 걸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터라 둘러보는데 주인이 슬며시 내게 말을 걸어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촉수 외계인의 지구 키우기 편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까다롭지 않고 봄에 키우기 좋은 지구라니 얼마나 아기자기한가, 물을 잘 안 줘도 되고 빛 좋은데 두면 알아서 녹고 키우다 보면 작은 미생물이 생기는데 약도 자주 치지 말란다. 촉수 외계인은 집으로 돌아와 공전궤도랑 자전주기를 고려해서 씨앗 행성 성장하기 좋은 지점에 지구를 놓아줬다. 그래서 왠지 고마웠다. 왜 이 외계인에게 고마웠을까 어쨌든 이 지구 도감은 계속되는데 공룡부터 인간까지 삶이 지루하면 키워보길 권하는 행성 가꾸기 도감 어쩜 이런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지 시작부터 작가님이 귀엽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돌이키는 하루


처음 돌이키는 하루 설정 버튼을 누른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무심코 목뒤에 쏙 들어간 부분을 쓰다듬다가 그 속에 있는 버튼을 손톱으로 꼭 눌러버렸는데, " 오늘 하루를 평생 돌이키는 하루로 설정하시겠습니까? 설정 후에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라는 소리를 듣고도 버튼을 더 눌렀고 누르고 나서야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누구나 특별히 끝내주는 날을 돌이키는 하루로 설정하고 싶어 하지만 내가 설정한 하루는 어쩌다 보니 지극히 평범한 중학교 1학년 어느 하루였다. 등굣길에 중학교 3년 내내 절친한 친구와 등교하고 평소처럼 1교시는 영어 수업이 시작되며, 수업 시간에는 친구들과 끄적끄적 필담을 주고받고, 딴짓도 좀 해주고, 점심시간은 누구보다 빨리 뛰어나가는 아이들 사이에 내가 끼워져있다.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여유로운 점심시간, 해도 해도 끝없이 재미있던 친구들과의 수다가 왜 이렇게 소중하고 애틋한지, 반복돼서 지겨울 만도 한데 돌이켜질 때마다 더 소중한 느낌이 든다.


아주 특별한 순간보다, 아주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순간이 가장 소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나에게도 돌이키는 하루가 주어진다면 가장 평화롭고 따뜻한 하루를 주인공처럼 선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들지 않는 부모님과 끝없이 수다 떨 수 있는 친구들, 그리고 그리운 학교 수업 종소리들 흉내 낼 수 없는 급식을 실컷 맛보고 즐기는 하루를 갖고 싶어 욕심나던 이야기였다.


5분 동안


현재 지구에는 눈으로 침투하는 치명적 바이러스가 발생했다.
뉴스로 매번 대기오염 수치를 발표하여 바람의 방향과 오염 수치가 가장 낮은 5분을 추정하여 기준을 발표하고 안전 고글 사용자에 한 해 65분가량 고글을 착용하지 않을 경우 5분 정도 눈을 뜰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유미와 원은 한집에 살고 있지만 서로를 바라볼 수 없었다. 구호물품과 라디오에 의지하며 하루에 5분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바이러스로 눈을 잃고 집에 갇힌 사람들의 모습은 왠지 미래에 있을법한 일이라는 생각에 현실감이 느껴져서 한편으로는 소름 돋던 에피소드였다.


투데이 이즈 무드

오전 7시 눈을 뜨자마자 현관문을 확인하는게 루틴이다.
그리고는 얌전히 놓인 분홍빛 상자를 집안으로 들여놓는다. 상자를 받는 시간은 마음대로 지정할 수 있지만 주로 아침 출근 시간 전 받아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투데이 이즈 무드는 작년에 론칭하여 벌써 국내 구독자가 500만 명이 넘는 '기분 구독 서비스'로 구독자라면 꼭 지켜야 하는 룰이 세 가지 있다. 매달 50만 원의 정기 구독료를 한 번이라도 연체하면 두 번 다시 구독 신청을 할 수 없는 것, 매일 받아보는 '기분 상자'는 긍정적인 기분이 들어있는 분홍 상자와 부정적 기분이 들어있는 파란 상자 중 무작위로 배송된다는 것, 받은 상자는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 열어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오늘 받은 상자를 체험하지 않으면 다음날 받은 상자를 열어도 아무 기분을 느끼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고 했다.
근데 박 대리님이 사흘 연속 파란 상자를 받았다고 한다. 연락두절인 박대리님이 종로 투데이 이즈 무드 본사에서 투신 소동을 벌였고 온 인터넷이 박 대리님 기사로 난리가 나버렸다.


이 서비스 왠지 마음에 들었다. 랜덤이긴 하지만 좋은 기분을 위해 나쁜 기분쯤이야 견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박 대리가 될 수 있겠지만 설마 사흘 연속 받는 불행은 피해 가지 않을까?


웨하스 소년

날개 달린 사람이 광역버스에 올랐다. 꽤 유명인으로 어릴 적 웨하스 소년으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여기저기서 아는체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담담해 보인다.
웨하스 소년의 시작은 5살 때 T 제과 웨하스 광고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곱슬곱슬한 파마머리 아기가 천사 분장을 하고 웨하스 한입을 먹고 눈이 동그래져 제자리에서 날아오르는 게 전부였으나 그에게는 날개가 있었고 그 덕에 광고 역사상 길이길이 남을 히트를 쳤다고 했다. 그 이후 웨하스 소년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고 꽤나 탄탄한 아역배우의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열 살 이후 더 이상 아기 때처럼 날 수 없게 되면서 와이어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고 15살이 되면서 땅에서 1센치도 날 수 없게 되면서 배역에 한계점이 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대형 체인점인 어머니 분식점에서조차 사람들의 요구도에 못 미치는 사람이 되어버리자 웨하스 소년은 드디어 날개를 없애기로 마음먹고 수술대에 오르기로 한다.


특별함은 어렵다. 웨하스 소년을 바라는 사람들과 그것을 충족시키는 삶을 살아온 웨하스 소년은 행복했을까? 왠지 날개를 없애기로 마음먹었지만 웨하스 소년으로 살아온 인생은 후회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나오는 CF 로고송과 입안에 퍼지는 웨하스의 맛처럼 날개를 없애도 언제나 사람들 머릿속에 그는 웨하스 소년으로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리 작가님의 이야기는 재미있다. 유해함 없는 유머가 담겨있어서 좋다. 찾아 읽고 싶어서 매번 신간을 기다리게 된다. 취향에 맞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걸 안다. 한두 개라도 이야기가 끌린다면 취향이라고 장담하니 어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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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독서노트
문재인 지음 / 평산책방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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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열심히 쓰고 공들여 만든 좋은 책들이 독자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시작한 책 추천이 100권이 넘었고 추천 글들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평산책방과 어울리는 일, 그게 이 책의 목적이라고 했다.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다니는지 궁금해하며 콘텐츠로 '왓츠인 마이 백'을 공개하곤 한다. 속 뜻을 알아보면 '항상 들고 다닐 만큼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데 나는 그 사람의 책장, 추천해 주는 책 리스트들인 '왓츠인 마이 북 케이스'를 궁금해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려 문재인 대통령이 추천하는 책 102권이라니 읽기 전부터 설렘에 한 장 한 장이 소중한 느낌이었다.

일단 책의 순서는 취임 이전인 2012년도부터 재임 시기인 2017년도 그리고 퇴임 이후인 2022년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되어 있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그때그때의 저자의 독서 흐름에 따라 책들이 나열된 느낌이었다.

책의 장르는 다양했다. 상대 후보였던 안철수 후보의 책부터 경제, 역사, 웹툰, 시, SF 소설도 있었고 유명한 작가들의 책부터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 그리고 책과 관련된 짧고 긴 서평들은 저자의 독서에 대한 애정과 깊이를 담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행에서 낭송한 시에 대한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낭만적으로 느껴져 기억에 남아 책을 한 번 더 찾아보게 했고, 416단 원고를 다룬 책을 이야기하며 사회의 무책임과 무반성이 다시 한번 우리에게 다른 사고를 낳게 한다는 것에 대한 과제를 다루며 참사에 대한 반성과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특히나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굉장히 역작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세밀화 도감은 꼭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저자의 숨은 애정이 조금 더 느껴진 부분이었으며, 요리는 감이여란 책은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애정 하는 책이었는데 추천으로 만나니 뭔가 더 반갑고 신기했다. 이 밖에도 책 한 권 한 권에 모두 애정이 담긴 느낌이라 책방 지기에게 추천받는 느낌도 있었다.

책을 읽기만 하는 건 참 편하고 행복한 일이지만 누군가를 위해 추천하고 서평을 남기는 건 한 번 더 품이 드는 일인데, 그럼에도 꼭 필요한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좋은 책을 많이 추천받아서 좋았고, 여기서 추천받은 몇몇 책에 대한 리뷰를 다시 다뤄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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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헌책 - 책에 남은 흔적들의 우주 아무튼 시리즈 65
오경철 지음 / 제철소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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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는데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이유가 생겨버렸다. 소소하게 모으는 아무튼 시리즈였고, 무려 헌책에 대한 이야기라니 신간 코너의 등장에서부터 참을 수 없게 만들어서 장바구니에서 결제로 행동을 옮기는데 주저하지 않게 만들었던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많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일단 수집이란 행위는 애호하는 누군가와 도란도란 나누는 순수한 한담이자 정담이나 매한가지라는 이야기가 가슴을 치고 갔다. 나 역시도 이래저래 모으는 것이 참 많은데 일단 책이 바로 그중 하나였기 때문에 작가님의 책 수집에 무한 공감하며 읽어나갔던 것 같다.

나만 해도 왜 쓸모도 없는걸 그렇게 모으냐는 소리, 폐지 모으는 걸 벌써부터 하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는데 수집에서 발견하는 환희와 내가 찾지 못하는 물건과 만나지 못할 때의 좌절감,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대한 마음에 대한 설명이 마치 그려지듯 설명돼 있었다.

 

좋은 책을 발견하려면 좋은 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나, 안목이 높은 주인이 운영하는 헌 책방에 가면 그런 질서와 체계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은 작가님과 같은 고서 수집가는 아니지만 나만의 헌책 수준을 높이고 싶다는 욕심과 배우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고서들의 기준과 진귀한 고서들을 알아보는 눈에 대한 이야기, 현대의 고서들은 박물관이나 도서관의 수장고, 귀중본 보관실 개인 소장가의 서재들에 들어가 있다는 말도 굉장히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들이었다.


헌책방에 대한 작가님의 코멘트들도 인덱스를 덕지덕지 붙여가며 읽었던 부분인데, 헌책방은 시간이 떠난 서점이라는 부분이 뭔가 헌책방의 장소를 연상하게 했던 것 같았다. 시간을 잊게 만드는 마법의 장소, 현재라는 시간을 무심하게 하는 책들의 공간에서 특별하게 나와 눈 마주침 당할 책을 만날 순간을 고대하는 모습이 떠올라 두근거림이 상상됐고 그런 따뜻함이 있는 순간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책 수집가가 왜 산 책을 또 사게 된 건지, 책을 사는 기준은 어떤 것인지, 그 집 책꽂이 상태는 어느 정도인지, 정리해도 계속 뱉어내는 책들과, 읽으려고 샀는데 읽은 책보다 쌓여가는 책이 많을 때 느끼는 감정들과 아직도 사야 할 리스트가 많을 때 느끼는 양가감정, 책 덕후들이 소개하는 비밀스러운 귀한 책 리스트들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번 아무튼 시리즈 역시 단숨에 읽어갈 수 있을 거라고 강력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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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십육일 -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 에세이
4·16재단 엮음, 임진아 그림 / 사계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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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기억하는 진심은 어떻게든 돌아오게 되어있다. 
-p15

어둠을 씻어내니 더 큰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편한 빛으로 비추는 곳엔 아직 꺼뜨리지 않은 많은 빛들이 모여 있었고, 그곳에 있으니 어둠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우리의 기억력으로, 우리가 느끼는 슬픔으로 진실 없는 어둠의 칭얼거림을 달래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P17

누군가는 쉽게 말한다.
"언제까지 이야기할 거예요?"
-P155

어쩌다 우연히 살아남은 우리가 목소리를 보태고 손을 잡아야만 한다.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만 또 다른 4.16을 막을 수 있다. 
-P246

세월호 10년은 내 인생의 10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실시간 생중계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배를 속절없이 바라보면서 화면 안으로 손을 뻗어 한 명이라도 구해내고 싶었던 그 수많은 시청자들 중 하나였다.
-P262

2014년 4월 16일 그날은 내가 나이트 근무였다. 병동 휴게실에서 긴급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고 뉴스 자막으로 전원 구조라는 문구를 보고 안도하며 돌아섰던 게 몇 분 되지도 않아 오보라며 정정된 문구에 '어떻게 어떻게..'만 되뇌이던 그 밤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언제나 돌아가면 그 기억이 떠오르고 실시간 상황들과  구체적인 이야기들에 상상을 더해갔지만 점점 낡아 가는 기억들이 슬픔에 슬픔이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스스로 4.16을 잊지 않으려고 카톡 프로필에도 노랑 리본을 떼지 않고 계속 달아놓고, 매년 4.16쯤엔 세월호 관련 기사를 찾아봐도 일 년 중에 며칠은 또 잊게 되는데 그때마다 참 미안하고 또 미안한 생각이 들곤 했다. 

이번 해에도 역시 그렇게 비슷한 일상을 보내다 며칠 전 세월호 10주기 소식을 듣고 4.16재단에서 책이 나왔단 소식에 이번에도 빠르게 책을 구입하고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에는 시인, 소설가, 에세이스트, 가수, 배우, 기자 등 49인의 목소리를 담은 기억 에세이로 각기 다른 개인적 방법으로 세월호를 추모하고 있었다. 

각자마다 그날의 기억을 담아내기도 했고, 다하지 못한  개인의 반성, 앞으로의 계획을 밝히며 10년 동안 혹은 앞으로 세월호를 기억하고 계속 이야기할지  담담히 털어놓는 이야기들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고의적인 혼란의 기억을 자들을 막아서는 방어선을 견고하게 해야 하고 누구도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오염시킬 수 없는 기억의 울타리가 돼줄 시민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정세랑 작가님의 이야기가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야 하고 우리가 모두 떠나도 변질되지 않을 기억으로 남아야 할 고유의 커다란 슬픔이 바로 세월호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그 얘기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지금도 부족한 이야기라고 맞받아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지게 한 많은 용기를 주는 이 책을 나처럼 용기가 필요하거나 4.16을 계속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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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레드카펫 네오픽션 ON시리즈 20
김청귤 지음 / 네오픽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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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유혈 사태

하필이면 오늘 생리가 터졌고, 마침 생리대가 없었으며, 없으려면 한꺼번에 없다고 생리통을 진정시킬 약도 초콜릿도, 과일주스도 한꺼번에 떨어졌다. 그래서 다급하게 얼마 전에 아르바이트를 잘린 편의점에 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친구를 스토킹 한 범죄자가 후임으로 알바를 하는걸 보게 되었고, 우연히 그 알바놈과 어깨빵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살짝 쳤는데 그 파동에 진열대가 휘청거리더니 술병이 아르바이트생 머리 위로 깨졌고 술병에 다쳤는지 줄줄 흘러내리는 피에 놀라서 도움을 청하려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밖에 노상방뇨하다 들어온 아저씨랑 한번 더 부딪히면서 아저씨와 편의점 유리문에 부딪히면서 어쩌다보니 남자 두 명이 한꺼번에 사고사 하게 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모든 게 우연이 계속 겹친 사고였을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주인공,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스토킹하는 여자 집을 쫓아가다가 주인공 친구를 죽게 한 스토커가 벌인 짓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이 계속 되었다. 그리고 생리 때문에 심신미약이라는 근거 있는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글 자체가 날것 자체라 조금 많이 과격하지만 생리 기간이라면 충분히 공감이 되는 글이었는데 미러링이라고 볼 수 있을만큼 모든 범죄 사건에 심신 미약을 주장하는 남성들의 패턴이 생각나게 했다. 성범죄 사건들에 분노에 마지않던 사람이라면 우연한 사고에 대처하는 우리의 주장도 마땅히 받아들여져야 하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작가님의 마성의 글발이 고개를 절로 끄덕여지게 하는 부분이 있는 속시원한 이야기였다.


마법 소녀 투쟁

어느 날 지구에 괴물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법 소녀도 나타났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팔다리로 유치한 장식이 달린 마법 봉을 휘두르는 모습에 반했다.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마법 소녀는 결국 정부의 관리 대상이 되었고 어느 누가 마법 소녀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예비 마법 소녀라는 이름 아래 모든 여자아이들은 각종 체력 단련을 비롯해 유연성 민첩성 등 무술을 어릴 때부터 배웠고 국어 영어 수학은 배우지 못했다. 하고 싶은 직업을 선택할 수 없었고 마법 소녀가 된다 해도 23살이 되면 은퇴해야 하며 은퇴 후에는 또 다른 마법 소녀를 잉태하기 위해 꼭 결혼해야 했다.

마법 소녀의 복장은 언제나 화려했고 노출이 있었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괴물을 물리치는 행위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이런 마법 소녀의 행동을 불순한 의도로 찍어서 파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수민 역시 그런 카메라의 집요한 렌즈 때문에 움직임이 소극적이고 있었다. 괴물은 그런 소극적인 움직임을 단번에 파악했고 그날 역시 집요한 찍사의 플래시 때문에 수민은 최후를 맞이했고 이 사건으로 유리는 마법 소녀로서의 활동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유리는 조금 있으면 은퇴를 하게 되었고 평범한 주부가 되어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지금부터 마법 소녀로만 살지 않고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투쟁을 시작하기 위해 1인 시위를 시작하기로 하며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미세먼지 청정구역 서대전 네거리 역

미세먼지가 뿌옇게 자리한 세계,
갑자기 미세먼지 인간이 나타났다.
전기가 들지 않는 성능 좋은 인간 공기청정기였다.
존재 자체가 환경을 위하는 것이었다.
워낙 성능이 좋고 만인에게 도움이 되다 보니 죄가 있어도 미세먼지 인간이 되면 죄를 없애주고, 웬만한 공무원보다 좋은 직업으로 추대했으며 돈도 명예도 한꺼번에 가질 수 있었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 미세먼지 인간이 되고 싶은 주인공은 현재 카페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대학 복학을 앞둔 같은 과 선배 윤기혁이 자꾸 선을 넘으려고 하고 있었고, 오늘도 퇴근길에 마음대로 기다렸다 강제로 끌고 가려는 걸 낯선 사람이 도와주는 일까지 겪게 되는데 그 사건 이후 윤기혁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잘리게 되었지만, 운 좋게(?) 미세먼지 인간으로 변이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평소 평판도 좋지 않고 행실도 좋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미세먼지 인간이 되었다는 이유로 점점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는 모습을 보며 주인공은 조건을 보고 윤기혁을 선택했어야 했나 고민을 하지만 마음속으론 미세먼지 인간이 되어 자신을 찾아올 윤기혁을 없앨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구입할 계획까지 하게 된다.


찌찌 레이저

여자라면 누구나 성인이 되는 해에 원활한 모유 수유를 위해 가슴 수술을 받아야 한다. 유교의 망령들은 아기를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은 모조리 막았는데 동성 결혼과 생활 동반자 법도 막았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관계를 모두 차단한 것이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무조건 아기를 키우는 행복을 누려야 한다. 순수 혈통인 아기를 품고 낳을 귀한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한다 등 인공장기로 모든 걸 교체할 수 있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순수 혈통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이유하에 여자는 아파도 신체의 고통에 상관 없이 병원 치료만을 받아야 했다.

내 신체 내 몸을 내 맘대로 쓸 수 없다는 것에 불만을 가진 주인공 친구 세희는 도망가다 붙잡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감시를 받다 스무 살이 되는 해 1월 1일 0시에 가장 먼저 인공 가슴이식 수술을 받았고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유로 생일이 되는 오늘 아침 8시 수술을 받게 된다.

수술을 하고 너무너무 아팠고 고통조차 약물 의존하면 아이를 낳을 때 힘들다며 버티라는 국가 때문에 삼일을 기절할 듯 누워있다 샤워를 하고 가슴을 닦는데 가슴에서 레이저가 나왔다. 집에 여성들을 감시하려 설치한 컴퓨터까지 레이저로 박살을 내고 도망을 가다 요원들을 처치하게 되고 레이저로 각성을 하게 되며 찌찌 레이저의 활용도를 파악하게 된다.


첫 작품부터 박장대소는 아니지만 피식피식 웃을 수 있었다.
특히 한밤의 유혈사태를 읽으면서 그날을 겪어본 여자들이라면 날것의 단어들에 공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감정 표현함에 거침없는 작가님의 평소 다른 작품을 즐겨본지라 상상이 안되었지만 이것도 작가님 모습이라니 신선했고 후련했다.

우린 생리를 마법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왜 빨간색을 누구 좋으라고 티브이에서 파란색으로 보여주고 그들 머릿속에 그렇게 상상하게 했을까? 코피 흘리고 손가락에 조금만 피가 나도 걱정하면서 하물며 생식기에 피가 줄줄 흐르는데 우리는 일상생활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기 때문에 심신미약이 참작되지 못하는 것인가 생각하게 했다.

마법 소녀 투쟁은 아이돌 문화가 생각나기도 했고
여성에 대한 우리의 시선에 대해 다시 한번 반성해 봐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게했다.

마르고 예뻐야 하는 아이돌,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가 있어야 그들이 외적인 부분에 갇혀 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과 여자이자 엄마로서 미래가 정해진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여성성에 대한 인식에 대한 변화가 있어야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분명 작가님이 하는 이야기는 다른 부분이겠지만 여러 부분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라서 마법 소녀 이야기도 굉장히 좋았다.

여성의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인 이야기를 이야기로 다양한 소재로 풀어내는 작가님의 소설 스타일이 개인적으로 너무 취향 저격이다.

있을법하지만 현실에 없는 이야기들로 현실 속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고민할 만한 이야기들을 공감할 수 있게 한 번 더 풀어서 설명하는 게 참 속 시원하다고 느껴졌다.

다른 개인적인 부분으로는 대전인으로 대전 이야기를 읽는 게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김청귤 작가님 글로 알게 되었던 부분이 있는데, 서대전네거리역이나 은행동 스카이로드, 대전역, 대흥동 일대 이야기 등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익숙한 지역들을 상상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해서 앞으로도 대전 이야기를 계속 써주셨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도 살짝 남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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