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풍경처럼 오래 서 있었다  

    흔들림도 없었다   

    거부의 몸짓 

    풍경 너머에 있었음에도 

    당황한 풍경 속 바람이 전해주었다

    실존을 공격하기 위해 쓴 네 정치적 선전문처럼  

                                           너는 한동안 거짓 사랑의 추파를 던질 것이다   

                                           쉽게 용서해줄 신의 이름을 과신하지 마라 

                                           시린 뼈로 오래 아파해야 하는 이도 있으니  

                                           심장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악기를 어루만지는, 

                                           강해보이지만 약한 운명의 파블로  카잘스  

                                           오직 peace!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정치에 대해 말하고 

     나는 원칙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까요."  (132쪽) 

 

    "내가 항상 콘서트의 마지막에 연주하는 곡은  

     스페인의 민요 <새들의 노래>입니다. 

     나의 고향 카탈루냐의 하늘에서는 

     새들이 peace! peace!하고 노래합니다"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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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물 - 이성복 사진에세이
이성복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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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니 이름을 불러줘야 의미가 된다고  말한 시인이 있었다. 이성복 시인의 에세이 타오르는 물은 그렇게 말한 시인의 또 다른 버전이다. 사람 대신 형체, 즉 사진이 등장하는... 은유(의미)없는 형체는 숲 속에서 저 혼자 쓰러지는 나무 같단다. 사진 에세이, 라는 타이틀이 붙은 책은 사진 없어도 가능한 글들로 모였다. 굳이 이경홍 사진작가의 도움을 받은 건 모든 형체에서 은유를 찾는 시인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   

  엄지 손톱만한 사진, 형체 불분명해 온갖 주해를 갖다 붙여도 좋을 한 장의 사진을 왼쪽 모두에 배치한 채 시인의 에세이는 시작된다. 더러 손바닥만한 사진이 덤으로 붙어오긴 하지만 그건 여백을 메우기 위한 편집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독자로서는 작은 사진 만으로도 시인이 하고 싶은 얘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사진 작품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빌미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되새기려는 의도'로 에세이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  

  구상체가 아닌 추상체, 거기다 흑백인 작은 형체(사진) 안에서 시인은 존재들의 고독과 무력감을 읽어낸다. 긍정보다는 부정을, 행복보다는 불행의 은유를 자아낸다. 이런 시인은 허무주의자일까?  '진실을 구하는 것 또한 허위를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망상일 따름이다.' (16쪽)라는 시인의 중얼거림이 어떤 시적 변용을 가져올까? 구체성을 획득한 시어로 이런 아포리즘이 재현되는 시인의 시를 만난다면 침 질질흘리며 책을 핥아도 좋으리라.  

  따뜻함이나 위안을 얻기 위해 이 에세이를 집어드는 자는 그저 실수다. 늙은이의 코 고는 소리, 구더기가 끓는 다리의 화농을 핥는 사자, 한쪽 날개를 잃은 그 어떤 형상, 등 연민과 공포와 절망을 노래하고 싶거나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무의미한 세 개의 나무토막, 저 먼 우주 속으로 날아갈 것만 같은 그저 그래보이는 그림 한 점을 연상하면서 '종합은 이미 분석된 것을 결정적으로 통합하는 것이고, 분석은 이미 결정화된 것을 재분석하는 것으로서, <미적 쾌감을 해체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103쪽)라고 주석한다.  

  이를 테면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없는 것의 근원인 있는 것은 없는 것의 없는 것이며 어둠의 근원인 빛은 어둠의 어둠이라 할 만하다. 빛은 어둠 없이 있을 수 있지만 빛 없이 어둠은 있을 수 없다.' (106쪽) - 무와 유, 빛과 어둠의 유기적 관계를 이딴 식으로 꼬아놓는다. 어차리 시인의 역할은  어떤 현상을 은유의 말장난으로 불장난처럼 저지르는 족속들이다. 그러려니 하고 읽어내려갈 철학적 사유를 즐기는 자들에게는 권할 만한 책이다. 그런 사유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 같은 독자들에게도 희망은 있다. 고통, 연민, 어둠, 외설, 욕망 등등에 관한 코드를 시인은 어떻게 응대하고 있는가, 라는 호기심만으로도 건질 건 있는 에세이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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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무르익은 과실처럼 저절로 입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오토바이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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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 처마실 술을 내가 왜 사는데? (56쪽)  


  단지, 자신을  배려하려고 술 자리에 앉히려는 한기철 일행에게 저렇게 쏘아 붙이는 아버지 엄시현. 융통성 없는 소갈머리의 소유자. 엄시헌에게  밥벌이의 비루함과 숭고함은 오직 가족의 무사를 위한 것이란다. 가부장적 책임감은 원만한 사회성에의 요청보다 앞서는 것일까?   


  엄시헌은 지나치게 내부적(가족지향주의적) 가부장 제도에 함몰되어 있다. 러셀 할배가 말했다.  '행복의 비결은 되도록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관심을 끄는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라고.  또 이런 말도 했다. '부모에게 사랑받은 것과 같은 특별한 종류의 행복은 만인이 당연히 누려야 할 타고난 권리다.' (버트란트 러셀, 행복의 정복) 엄시헌은 러셀 할배의 조언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안과 밖의 긍정적 환유가 없는 삶이란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가장의 역할 자체가 맹목적이라 해도 숨 돌려 가며 주변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적의 없는 동료에게(오히려 호의적인) 공격적인 언사로 자기 방어를 해대는 것이 가족을 위한 밥벌기의 온당한 변명은 되지 않을 것이다. 엄시헌이 실제 내 아버지라면? 글쎄 이런 적극적인 변명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시헌은 그 자신이 여러 가지 표정을 지어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미스 정이 지어야 하는 여러 가지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61쪽)  - 자신의 이해관계가 맞닿는 곳에서만 엄시헌의 이런 캐릭터가 적용된다. 씁쓸하지 않은가? 그 이유도 오직 아들 둘을 위한 것이었으니. 살아남아야 하는 자의 핍진한 삶의 방식에 내 공감대는 조금씩 무너진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읽는다.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 - 가족을 거두기 위한 가장의 지난한 일상의 숭고함 - 를 넘어서는 뭔가가 있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읽어내려 간다.   

 

  엄시헌은 살아생전 내 아버지의 삶과 달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구차할 정도로 검약했던, 그래서 언제나 내 삶의 괄호 밖이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타인에 대한 배려는 깊었다. 써야할 땐 썼다. 그것이 타인을 향하든, 가족을 위한 것이든.... 아버지 삶의 끄나풀에서 벗어나고자 그토록 원했으면서도 그런 면 때문에 내 아버지에겐 그 어떤 뚜렷한 잘못의 혐의가 없었다. 세상에 대한 도의와 가족에 대한 도리를 동시에 감내했던(엄시헌은 오직 후자에만 치중) 내 아버지 식 삶이 더 온당하다고 느껴지는 건 엄시헌이란 캐릭터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진 것보다 궁색함을 표방했던 내 아버지를 싫어했지만, 가족 제일주의인 엄시헌이 내 아버지라면 경멸했을지도 모르겠다.   


  미스 정과 함께 '인부들이 먹다가 남긴 반병쯤 되는 소주를 비우'(63쪽)려는 알뜰한 쩨쩨함 같은 걸 나는 못 견뎌 한다. 내 어릴 적 겪었던 아버지들의 그 비루한 일상이 내겐 치욕의 저장고나 마찬가지이다. 그 간접 고통이 주는 풍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골방에 앉아 글을 쓰거나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야 했다. 단절이나 침잠은 누가 뭐래도 경제적 고통이 주범이다. 그렇다고 내 안위를 위해 타인이 고통을 무시하거나 이용해도 될까? 내(가족)가 살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줘도 안 되고, 이타적이기 위해 그 고통이 가족을 향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오직 자식을 위해서란다. 저처럼 밑바닥 인생인 동료들을 상대로 도박장을 개설하고 운영하는 것이. 그게 인간의 비루함이라는 걸 깨치란다. 그 야만적 비루함은 언제나 맘에 걸리는 큰아들의 생계와 둘째놈의 공부를 위한 변명거리가 되어준다. 오매불망 내 새끼만 찾는 가족제일주의를 혐오하는(그 대표 격으로 김훈이 있다.) 사람들은 엄시헌을 덜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엄시헌은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기보다 그렇게 살도록 규정지어진 사람이다. 꼭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이 아니라도 세상엔 그런 기질 자체로 태어난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시종일관 담담하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엄시헌의 아내는 없다. 아버지 처세의 곤고함을 강조하다 보니 어머니의 부재는 당연한 것일까? 오랜 세월, 가족 먹여 살리기 위해 귀가하지 않는 아버지 집 문풍지는 한겨우내 몹시도 울었겠다. 감사할 생계비가 있으니 아버지 부재의 가계를 이끄는 고통은 사치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가족을 먹여 살린다, 는 명분이 있으나 내가 보기엔 가부장적 권위가 부여한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엄시헌의 가족  사랑은 일방통행이다. 방죽 정비에 나선 일개 노동자인데, 굳이 그 긴 시간 동안 가족과 헤어져 살 이유가 있을까? 일이 년 외곽에서 마련한 종자돈으로 당연히 가족이 있는 서울에 터전을 잡아야 했었다. 그래야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이 증명된다. 포장마차가 됐든, 작은 분식집이 됐든 지방에서 하는 천변 정비 사업이나 술집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다면 가족애가 남달랐을 터인데, 그 가족애는 아내가 아닌 자식들에게만 할당됐던 것일까? 어느 누가 정지용의 향수에 아내가 덜 부각된 게(누이보다 엄마보다!) 불가사의하다 했는데, 그런 심정이랄까?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멀리서 돈 붙이며, 편지 속에서나 존재하는 아버지여서는 안 되지 않나?  


  오로지 '가족 먹여 살리기 프로젝트'만이 목적이었다는 게 엄시헌의 한계다. 그것을 뛰어 넘지 못한 걸 보면 실재했던 우리 아버지들의 초상과 작가가 구현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이 약간은 엇박자를 낸 게 아닌가 싶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한 아버지의 노고는 위대했으나, 꼭 그것만이 엄시헌의 존재이유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엄시헌 자체의 부조리를 독자에게 이해시킬 때 큰아들을 태운 엄시헌의 오토바이는 좀 더 자유롭게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엄종세의 후배 김경한 또한 엄시헌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짧은 단문일수록 중언부언하지 않아야 하는데 확인 차 앞에 나온 내용을 뒤에 다시 설명하는 부분은 구성상 긴장감이 떨어진다. (김경한의 각서 요구 부분 같은 경우) 기왕 쓰는 것 김훈처럼 얄밉게 쓰면 안 되나? 

  감상문을 떠나 문장이나 문체 면에서는 건질 게 많은 작가이다.   

 

 

  질서와 훈육의 특성 속에는 그런 면이 있었다. 공허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치고 질서에 제대로 편입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마찬가지로 질서에 제대로 안착한 사람치고 좋은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래서 엄종세는 최고 우등생보다 여백이 있는 우등생이 팀원이 되기를 원했다. 입맛에 딱 맞는 직원은 없었다. 차선으로 택한 인물이 김경한이었다. (119~ 120쪽)

  남자에게 일이란 그랬다. 일이 없으니 동료가 없고, 동료가 없으니 초상집마저 썰렁했다. 일과 사람은 함께 왔고 함께 사라졌다. 하나씩 차례로 온다면 양쪽 모두에 충실할 수 있겠는데, 한꺼번에 왔다가 한꺼번에 사라지니 직장에 다니던 시절엔 가정에 소홀했고, 직장을 떠난 후에는 가정에 민망했다. (132쪽)  


  이런 문장들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책을 놓기가 쉽지 않다. 글 자체를 잘 쓰는 작가이기 때문에  군더더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문장이 미덥다는 건 그 만큼 작가적 내공을 쌓았다는 증거다. 그가 신문기자라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훈을 빌렸으나(도모유키가 심했고, 능소화나 이번 작품은 극복하고자 했으나 잔재가 남아 있다.) 그 만큼 세련되지 않고, 김경욱만큼 지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먼지 훌훌 털어낸 뒤 잘 말린 홑이불(솜이불 말고) 같은 단정함이 있다. 그 정도로도 인정받기 충분하다. 성실한 작가는 부지런히 집필 중이다. 그것 또한 미덥다.   

 

  아버지 된 자의 손은 궂은일과 마른일을 가리지 않는다.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비의 손과 궂은일을 하는 손은 별개가 아니다. 너도 이제 아버지가 됐으니 네 손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가리지 마라. 그리고 네 손이 하는 수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마라. 아버지 된 자, 남편 된 자가 처자식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칭찬이나 상 받을 일이 아니다. 네 처자식이 네 평생의 상장임을 잊지 마라. (166쪽)  


  아들 엄종세가 첫 아이 낳았을 때 엄시헌이 보낸 편지글이다. 서글펐다. 왜곡된 가부장주의의 전형을 만나는 것 같아 맘이 편치 않다. 밥벌이를 위한 아버지의 노고가 숭고한 건 사실이지만 이런 생각이 전적으로 온당한 것일까? 이런 시각이라면 거꾸로 여자인 어머니에 대한 희생 또한 너무나 당연한 걸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부당한 대접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가족들 옆에서 충실하게 의무를 수행한 대가로 가족의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여성이 가족을 소홀히 여기고 쾌활하고 매력적인 생활을 유지했다면 아마 가족들은 이 여성을 사랑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러셀(행복의 정복 205쪽)의 충고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엄시헌도 결국 죽어서야 가족에게 이해받는 쪽 아니었나? 가부장적 책임의식이 자신의 비굴하고 야비한 삶을 변명해줄 순 있어도 그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개별자이다. 아버지 또한 그 개별자로서의 존재 증명이 되어야 한단 말이다. 시종일관 작가는 말한다. 시헌이 개차반 같은 일을 서슴지 않았던 건 오직 하나 가족(특히 아들 둘) 때문이라고. 아버지 친구 장기풍의 입을 빌려 이런 설교는 계속 리바이벌된다. 이건 뭐 예수님이 인간 대신 죽어줬으니 평생 그 죗값 하며 살아라, 하는 협박과 뭐가 다른가? 부도덕하고 치사하고 개차반 같은 행동을 해도 자식을 위한 것이었으니 입 닥치라고 훈수 두는 장기풍은 곧 작가의 다른 목소리이다.  


  비슷한 처지의 타인의 고통을 발판 삼아(외면한 게 아니라 이용했다) 가족애를 도모해야 하는 부정은 진정한 의미의 부성애는 아니지 않는가? 거창하게 인류애 어쩌고 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사람이니까 사람에 대한 연민이 가족애에만 한정된다면 그게 사람일까? 그런 아버지 때문에 먹고 살만해졌으니 입 닥치라고? 엄시헌처럼 살지 않아도 자식 교육 시키고, 사람 도의 지키며 사는 이들이 훨씬 많다. 밥 먹여준 아버지는 위대하나 꼭 엄시헌처럼 일 필요는 없다.   


  작가의 말처럼 '아버지를 미화하거나 복고를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부성의 희생에다 점수를 주려고 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 희생이 온전히 가족을 위한 것이라 쳐도 그 방식에 대한 면죄부나 공감은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처럼 엄마를 부탁해, 같은 책에도 알러지가 있는 독자에게라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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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3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3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0-01-15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도서가 백만부 팔리는 날이면 진정 '대한민국 독서강국'이 되겠죠? ㅋㅋ

공 들인 건 아니고, 잘 쓰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은 걸려요. 그래서 잘 쓰는 여우님 같은 분을 존경해요. 먼 발치서 응원할게요. 화이팅~
 
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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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는 기쁨, 쓰는 고통

 


  오랜만에 흡인력 있는 소설 한 편을 만났다. 정유정의 ‘내 심장을 쏴라’ (은행나무, 2009)이다. 내 부러운 눈길은 이미 뒷면 출판 정보를 읊고 있었다. 내가 산 책이 14쇄이니 출간 날짜에 비해 잘 팔리는 편이다. 신예작가로선 날개를 단 셈이다.

  읽으면서, 좀 더 압축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300여 페이지를 훌쩍 넘기는데,  200 페이지 정도로 줄이는 게 나았을 것이다. 작가의 시선이 옹골차 한 장면에 너무 많은 사건을 담으려 하다 보니 가독성이 떨어질 수밖에. 이런 바람은 독자로서의 작은 불만일 뿐, 진실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소설적 재능이 빼어난 작가라는 것. 그 성과가 훈련의 산물이 아니라 태생적 요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절망 섞인 부러움이 인다.

   구성 상 ‘내면화된 단문’을 겨냥하는 단편과 달리 작가의 문체는 ‘행동체 단문’이다. 이야기 흐름을 따라 짧은 호흡으로 손끝을 놀릴 뿐인데, 그게 문장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끝내 독자의 심장을 향해 뭔가를 겨냥한다. 무엇을 보다는 어떻게 위주로 쓰는 단편을 읽을 때 느끼는 갑갑함이 없다. 생동감 있는 문장은 일정 시점을 지나면 술술 읽힌다. 예단컨대, 작가는 아포리즘을 남발하거나, 내면을 낭창하게 읊조리는 작가는 되지 못할(않을!) 것이다. 장편에서 독자를 효과적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아포리즘이란 칵테일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하지만 그미는 인간 존재의 근원 같은 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않아도 용서된다. 대신 블랙유머와 눙치는 눈썰미와 앙다문 입 속에 예리한 칼날을 숨기고 있으니까. 

  어지간한 작가다. 주인공들의 탈출기 한 장면, 특히 손목시계로 만든 흉기 장면을 그리면서 이십 여 페이지씩이나 녹여낸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독자로서의 불만은 접어두고라도, 그런 줄줄이 사탕식 연결이 현장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 세밀하고 자연스럽다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작가적 저력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손끝에 다음 문장이 스무고개처럼 물려 있고, 혀끝에 다음 대사가 칡넝쿨처럼 휘감겨 오는 것이다. 작가가 글을 짓는 게 아니라 글이 그저 이야기를 잣는다고나 할까? 이런 걸 작가적 재능이라는 말 대신 뭐라고 표현할 수 있나?

  그렇다면 재능 없는 자들은 쓰기를 그만 둬야 할까? 재능에 비견할 바는 아니지만 엉덩이 굳히기,라는 미련한 방법도 있으니 그리 절망할 일은 아니다. 재능 있는 자 쓰기를 즐기고, 딸리는 자 다만, 엉덩이 의자에 붙여라. 그리하여 최선을 다해 손끝 바지런히 놀릴지어다. - 이런 절망스런 감상문을 쓰게 만드는 작가이다. 

  적어도 어떻게 쓰냐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작가일 것이다. 그저 무엇을, 왜 쓸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는 작가로 보인다. 이건 독자로서 신진 작가에게 보내는 최대의 찬사이다. 그미의 성공 조짐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공의 문제라기보다 성향의 문제라고 본다.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작가가 아니라 예견된, 될 성 부른 떡잎이다. 복을 타고난, 천상 작가를 만난 기쁨은 내 절망을 재촉한다.

  읽는 잔재미도 쏠쏠하다. <다들 같은 이름을 쓰는 소식통을 정보 출처로 댔다. ‘정통한’ 소식통이라고.> (130쪽), <현선엄마는 현선이를 불렀고, 나는 애타게 잠을 불렀다.>(130쪽)  영화로도 제작된다니 작가의 의도와 잘 맞아떨어진 게 아닐까? 읽을수록 디테일한 장면들은 영화를 염두에 둔 혐의가 짙다.

  불만이 있다면, 넘치는 현장감과 모자람 없는 묘사가 번뜩임에도 가끔씩 독해력이 딸리는 부분이 있더라는 것이다. 필시 독자의 자리를 자신과 동일시한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리라. 친절한 설명은 독자를 모독하는 것이라 해도 의도하지 않게 생략된 부분이 과도한 현장을 밀어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라면 가열찬 가독성을 보장하지 않았을까 하고 인상 한 번 써보는 것이다.   (전 리뷰 수정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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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雨(곡우) 2010-01-2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풀어 보고픈 이야기만 콕콕 짚어서 쓰셨네요.
작년 가을즈음에 읽고 대어를 만난 기분. 하도 맛깔나게 잘써서
이 작가의 약력이 문득 궁금하더라구요. 건강보험관리공단 심사평가원.
아마 전직 간호사지 싶더군요. 해서 경험없는 실체는 작위적일 수밖에
없기에 역시 몸으로 부딪힌 실체가 있어야 하겠지하고
혼자 생각과 위안을....ㅋㅋ(이것도 부러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0-01-21 16:27   좋아요 0 | URL
너무 많은 걸 담으려해서 그렇지 정말 잘 쓰는 작가는 맞더라구요. 남 잘 쓰는 것 부러워만 하면 진다는데 사실인 걸 어떡해요?ㅋㅋ

전직 간호사에 일주일간 정신병원 체험도 했으니 오죽하겠어요? 재능있는데다 탐구정신(?)까지 있으면 게임오버죠, 뭐.
 
깐깐한 독서본능 - 책 읽기 고수 '파란여우'의 종횡무진 독서기
윤미화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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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고수가 되는 건 아니다 




  종횡무진 리뷰판을 벌이는 파란여우의 꼬리를 잡으러 간다. 숨차고 머리 어질하다. 내 드문 리뷰에 가문 덧글은 당연하다. 그래도 그 덧글 중 가장 강열한 인상을 준 이가 ‘깐깐한 독서본능’을 쓴 파란여우였다. 장정일과 박정만(시인) 덕분이다. 그 둘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동년배라는 걸 눈치챘던 것이다. 그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혹, 자신의 숨은 동창 친구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물어온 적도 있다. 칠십 년대에 초등학교(국민학교란 말이다!)와 중학교를 다녔고, 팔십 년대에 고등학교와 대학을 누빈 자의 우연한 공통분모가 그런 착각을 불러 온 것이리라. 같은 시간을 건너온 자의 먼지 한 톨 같은 공유의식이 실제론 멀지만 가상공간에선 가까운 친구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내가 서재를 방치하는 동안 그녀가 책을 냈고, 다시 몇 글자씩 끼적이게 됐을 때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하고 있음을 현장 목도하고 있다. 스테디셀러가 되기를 조용히 응원한다. 그 응원의 한 갈래로 당장 책을 샀고,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느려터진 내 읽기 속도로 며칠 더 걸릴 것이다. 반 이상은 읽었으니 설사 더 늦어질지라도 조급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읽은 이는 알겠지만 이 책은 단숨에 읽어 내릴 책이 아니다. 자신의 책 무더기 주변,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읽는 자의 길잡이 노릇을 하게 해도 썩 괜찮다.  



  솔직하자면 내 빈약한 독서 이력에는 걸맞지 않는 책이다. 하지만 그건 내 지성의 ‘빈약함’ 때문이지 내 독서취향과는 별개의 문제다. 어쭙잖게 독자로서 작가에게 빌붙는 변명을 하자면 나도 장정일과 김훈과 수전 손택 이야기엔 흥분한다. 장정일의 형형하고도 순정한 눈빛과 작가정신을 미더워하고, 우수수 잎 떨어진 겨울나무 같은 김훈의 스트레이트 미문을 죽도록 흠모하며, 수전 손택의 개별자의 고통과 아픔을 살피는 그 눅눅한 통찰과 인심을 존경한다. 그러니 앞서가고 달려가는 그미의 독서법이 다소 벅찬 독자라도 충분히 그녀식 읽기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  



  궁금한 자, 호기심 어린 자, 다 ‘깐깐한 독서본능’에 모여라. 나 잡아봐라, 폭설 맞은 꼬리를 털어내며 저만치 내달리는 파란여우 잡으로 가자.

  불만이 없다면 주례사 비평으로 몰릴까 두려우니 억지로라도 찾아보자.  

  저자, 출판사 이름 정도는 책 사진 밑이나, 리뷰 내용 중에 삽입했어야 했다. 편집 상 세련미를 고집한 때문일까? 편집자의 눈썰미가 아쉽다. 책 안내자 역할을 하는 리뷰성 글인데, 불편한 편집 때문에 독자의 읽는 수고를 더욱 짐지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읽으면서 저자와 출판사를 확인하느라 저 앞면의 ‘소개되는 책’으로 끊임없이 되돌이표를 해야만 했다. 작가 이름이 내용에 언급되나 싶으면, 출판사 이름이 빠져 있으니 덜 꿰맨 이름표를 달고 책상 앞에 앉은 꼴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편지’ 같은 경우 끝까지 읽어도 그 책의 겉표지 정보를 꿰차지 않은 상태에서는 책의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결국, ‘정민, 박동욱 엮음’, ‘김영사’라는 정보를 얻기 위해 앞 부분 ‘소개되는 책’란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책 읽기 고수들에게는 그런 수고가 별 것 아니겠지만, 일반 독자들에겐 짜증을 불러낼만한 편집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도서목록을 한쪽에 몰아두는(감춰두는) 것이, 이번 목록에 끼지 못한 다른 책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 것일까? 제법 두꺼운 책이라 읽을 때 조금만 부주의해도 지면이 자꾸만 엎어진다. 거기다 양 손으로 지탱해가며 확인 차 앞뒤로 왔다 갔다 하려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이래저래 재바르지 못한 사람, 인내심 테스트 하는 것 같아 살짝 서운하다.    

 

 

 

  만연체를 구사하다 보니 더러 비문이 보이는 것도 옥에 티다. (흔한 건 아니고 몇 군데 보인다. 잘 살펴 다시 흔적 남길 수 있어야 할텐데...) 김훈의 문체를 이해하는 작가의 세심한 눈길이 털털한 문체 - 제목에서 ‘깐깐한’이라는 관형사를 사용했는데, 이건 내용상 그렇다는 뜻일 것이다. 저자의 문체는 확실히 털털한 편이다. - 와 조화를 이룬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글쓰기가 될 것이다. <6년 전, 황야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놀던 무식한 나에게 책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책의 문을 열면서 나는 내 황폐한 영혼의 ‘빵꾸’를 수리하고 시력을 교체했다>(59쪽) 같은 표현이야말로 작가의 털털함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앞으로 책 안내자의 역할을 넘는 글쓰기가 작가에게 요청될 것 같다. 충분한 자격이 있는 작가의 앞날에 또 한 번 박수를 보낸다. 좋든 싫든 이제 작가는 글 써서 염소 먹이 파는 밥벌이의 비루함(위대함!) 대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부디 다음 책도 건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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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10-01-12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님,김정만 시인이 아니라, 박정만 시인입니다.ㅎㅎ
진정성 베인 리뷰 잘 읽었습니다.편집의 아쉬움과 더불어 제 글의 빈약함까지 고언을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다크아이즈 2010-01-1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고, 이런 실수를... 고칠게요. 세월 가니 박정만 시인도 가물가물~ 재혼부인 염미혜 씨 이름이 더 기억남으니 아무래도 '미세스 염'을 질투했나 봅니다. ㅋㅋ 그리고 감히 누가 여우님 글의 빈약함을 운운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