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나 아프고, 모두 다 상처 받고, 그렇게 홀로이나 그래도 추억하거나 살아내거나 살 만한 것에 관한 단편집, 으로 나는 읽었다.    

 

  김연수 -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은 읽은 지 오래 되기도 했지만 별로 남은 게 없다. 누구나 아프다. 사는 게 고통이다. 때로는 그 번민으로 불면의 밤을 보낸다. 뭐 그런 주인공이 산책으로 돌파구를 찾아나선다. 산책하면 다섯 가지 즐거움이 생길까? 글쎄다. 짧은 시간에 척척, 코끼리도 재울 수 있으며, 침대에서는 잠만 자고 섹스만 하고, 결국 혼자서 길을 걸어가게 도리 것이며, 거리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될 것이다. 이건 뭐 또 뻔하잖아. 김연수를 읽으면서 생각외로 여성적 코드가 보이는 게 흥미롭다. 사는 건 고통이자 아픔이다. 그러니 오래 고민하지 말고, 무거운 짐도 훌훌 털어내고, 단순해지고, 누구나 혼자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니, 거리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라. - 뭐 이렇게 정리한다. 작가가 뭐라고 의도했던 난 내 식대로 읽는다. 김연수는 재미있는 작가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생각하게 만든다. 소설가가 진지하면 독자 떨어지기 십상인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그의 자선작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  연애소설(아마도 첫사랑 쯤)을 표방한 세태소설이다. 1980년대 후반기를 주석한다는 것만으로도 김연수식 후일담 쯤 되겠다. 아무래도 젊었을 때 쓰거나 자료 수집을 한 것으로 재가공한 소설 같다. 김연수는 자료을 멋드러지게 가공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그 자료만으로도 소설 잘 쓰는 작가로 내게는 각인되어 있다. 마치 왕오천축국전을 주해하는 소설 속 나처럼, 김연수식 주해가 능한 작가이다. 재미라는 것은 별개로 하고라도. 

 

  이혜경 - 축제, 는 새롭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인척 뻘 남자에게 성폭행 당한 나의 상처 극복기 같은 거다. 상처를 극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끝내 옴 샨티 즉,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이라는 주문을 외는 것, 그 힘겨운 타협이 저마다의 상처 끌어안기 방식임을 알게 될 뿐이다. 발리라는 매개지가 등장하고 여러 명의 주변인들이 등장해도 그것 모두 상처와 치유의 상관 관계 속에서 배치된다. 기성이니 용서되는 소설이지 신예가 이런 소설 쓰면 일단 참신성에서 탈락이다. 아무래도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내레이션 방식에 점수를 주는 내 읽기 취향도 문제가 있다. 무뎌진 펜끝으로도 이상문학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이 기성의 특권이다. 억울하면 잘 써서 간택받으면 된다!  

 

  정지아 - 봄날 오후, 과부 셋. 금세 읽힌다. 잘 썼다. 이렇게 쓰고 싶다. 누구나 에이코가 되어 그 허한 마음을 다독이며 산다. 마음을 주고도 마음으로 받지 못하는 한 생의 씁쓸한 봄날 오후.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빚을 갚듯 하루코는 장을 담갔을 것이다. 아무것도 주지 않은 사다코가 얻어먹은 콩물은 빚이 아니라 마음이었다.'(130쪽) 마음 얻는다는 것이야말로 사람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가난한 친구 하루코에게 책방 차려주고 재기하도록 도와준 것은 에이코지만,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그 마음 가져간 이는 한 것 없는, 가진 것이라곤 새침한 입무거움과 은근히 잘난척인 전형적인 모범생 사다코이다. 노년의 삶을 빌려와 사람살이의 그 오묘한 관계를 그려내는 과정이 여간 아니다. 인품이란 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저마다의 성정대로 발현된다. 그 모순의 귓불이 붉어지는 상태를 우리는 '인간적'이라고 자위하는지도 모르겠다. 정지아가 말한다.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성품이다.'(130쪽)라고.   

정지아 소설답게 사상 얘기는 양념으로 곁들인다. '사상이고 뭐고, 살아보니 다 덧 없다. 죽으면 한 줌 재지뭐.' 그렇게 말하는 사다코의 곁에는 여전히 '통일광장'이라는 잡지가 놓여있다. 이런 장치들도 소설가로서의 정지아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이라 독자로선 용인되다 못해 반갑다.  

염장녀 하루코, 완벽녀 사다코, 오지랖녀이자 나레이터인 그녀(에이코) 중 단연 에이코에게 감정이입된다. 작가가 그리하라고 시켰으므로. 끝까지 그녀의 오리랖은 잦아들지 못한다. 생삼겹을 사러 자청하는 길 뒤에도 나머지 둘의 속닥임은 계속될 것이니. 그녀의 눈물겨운 오지랖이 그래도 봄날 오후 같은 건 '김 영감 팔베개를 베고 자다 죽는'(137쪽) 꿈이 있기 때문이다.   

 

  공선옥 - 보리밭에 부는 바람, 은 친근하다. 동년배가 그리는 시골 풍광 속으로 잠시 빠져 들게 하는 맛. 시골살이는 내게 너무 짧았던가? 물장구치고, 아이 들쳐업고 동네를 헤매던 70년대의 산골 풍경엔 반공 이데올로기 또한 제격이었다. 수요 발표회 속에서도 간첩 식별하는 법 등은 단골 메뉴였다. 어쩌면 빨갱이로 몰려 숨어지낸(월북했다 남파된 간첩일지도 모를) 작은 아버지의 급작스런 방문은 주인공 어린 나에게는 영원한 비밀이 되어야 할 시대였다. 그렇게 '보리밭이 젖고 망초꽃이 젖고 여우가 젖고 내가 젖'는 시절이 있었다. 눈을 뜨면 '지린내' 대신 '낯선 비린내'가 나고, 그렇게 기성에 한 발짝 다가서기 위한 전초전으로 '형이 세수를 하고 있는 우물가로 달려'(161쪽) 나갔던 것이다. 30년은 훌쩍 넘어간 풍광을 보듬는 작가의 시선 역시 공선옥답다, 이다. 

 

  전성태 - 두 번째 왈츠. 내용은 접고, 시집이 팔리지 않으나(인구가 워낙 적어서) 시낭송대회의 관람료가 비싼 나라가 몽골이란다. 낭만적이다. 몽골은 시의 나라였구나. 일찍이 김경욱이 천년의 왕국, 에서 조선은 시의 나라, 시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관료제의 전형인 과거 제도를 빗대어) 곳이라고 예찬한 이래, 그 맥을 잇는 나라가 몽골이구나. 하는 생각. 근데 그 시 낭송 문화는 '율격의 지나친 강세, 그리고 쉬운 표현을 요구하는 대중성으로 시를 죽이고 있'(171쪽)단다. 결국 몽골도 '듣는 시가 아니라 읽는 시가 자신들의 정신을, 현대의 몽골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171쪽)하단다. 읽는 시의 교조성보다 듣는 시의 낭만성이 더 좋은데, 정치색(혹은 국민성 개조)이나 신념 앞에서는 그 전통도 무색하길 바라나 보다. 

몽골에 사는 북한여자 취재기가 주인공 나의 가장 큰 목적이다. 하지만 체제 변화 이후에 감도는 몽골의 분위기와 특히, 안내여성 냐마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 연정을 두 번째 왈츠로 명명한 것일까? 찾던 여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냐마의 울음 속에서 두 여자에 대한 '주체할 수없는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것은 생의 한 시절 숨 트이고 싶은 강열한 열망 때문인지도... 

 

  조용호 - 신천옹. 소설로 읽히지 않고 담담한 고백록으로 읽힌다. 괜찮지 아니한가? 모든 소설이 소설적 기법과 그럴듯한 사기에 열을 올린다면 그 또한 낭패지. 진정성을 구현하는 이런 '남자로서 세상에 부대껴 보기' 같은 소설도 필요하다. 그런데 읽다 보니 두 남자 이야기이다. 나레이터도 두 친구가 번갈아 나,로 나온다. 굳이 독자에게 혼돈을 주는 이런 방식을 취한 이유는? 이야기가 담담체인데, 기법은 어설픈 포스트모더니즘인가? 막걸리에다 치즈 안주 들이미는 격이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작가라 판단유보. 정주를 꿈꾸는 여자와 유목을 허하라는 친구의 삶을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인 나의 갈팡질팡 중년기 쯤으로 읽힌다. 누구나 자신만의 앨버트로스를 꿈꾼다. 한데 소설 속에서 그 정체성은 모호하다. 여자에게는 떠나거나 정주하거나 간에 함께 하는 것으로(원래 평생 같이하는 금슬 좋은 새란다) , 남자에게는 떠나는 것으로(그래서 또 다른 이름이 나그네새인가), 주인공 나레이터에게는 그저 꿈꾸는 것으로.

 

  박민규 - 말 많을 절.(용용자 네 개 붙이면 이런 한자된단다. 우라질리아~) 정말이지 박민규 만은 피하고 싶다. 적응 안 된다. 박민규 답지 않게 고삽한 순우리말 들고 나와서 한물간 무림 천하를 융통한다. '윤슬 같고 는개 같아진'(221쪽), 해심, 해미까지는 용납하겠다. 운김, 드레 같은 낱말은 부러 찾아야 했다. 내 무지보다 소설 읽는데 사전까지 찾아가면서 수수께끼 풀어야 할 필요 있나, 부아가 치민다. 박민규는 옆에 순우리말 사전 끼고 이 소설 끼적였음에 틀림없다. 그건 박민규답지 않은 반칙이다. 슈룹은 우산이란다. 용린은 용비늘 하면 되지 이게 뭔 지랄을 떠는가 싶다. 지랄떠는 게 박민규식 소설의 강점이니 용서하자.  곤두박질치는 무림고수들 이야기니 고삽한 순우리말 고어 정도는 감내하자. 그러고 보니 가장 이상적인 이상문학상 후보가 아닌가 싶다.  

 

  윤이형 - 완전한 항해. 이건 뭐 소설 아바타 쯤 되겠다. 아바타 에디션이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자아로 형성되어 있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에디션은 상대의 모든 것을 흡수하여 새롭고 완전한 존재로 태어나는 과정이란다. 루족 창은 결국 에디션을 거부하고 창공을 향해 날아오른다, 파국의 의미는 역사상 달에 가장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라나. 가장 멀리, 가장 빠르게... 이런 소설에 적응 안 되는 것 보면 내가 기성세대라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다. 울어야 할지 자위해야할지 역시 판단보류.   

 

  다시는 단편집 같은 것 들고 리뷰 도전 안 할 것 같다. 필요에 의해서 읽은 거지만 리뷰는 간단치 않다. 점점 단편들이 재미없게 느껴진다. 늙는 징후이다. 어쩌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穀雨(곡우) 2010-01-2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흐름이 좋으네요. 전 매번 막히고 얽혀서 혼자 미로속을 걷는 기분인데...
다녀간 흔적 보고 잠깐 들른다는 것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전 김연수작가의 만물장수처럼 술술 뽑아져 나오는 이야기의 샘물이 좋더군요.
<밤은 노래한다>의 연변에 가 보기라도 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지요.
아, 그리고 좋은 이야기 많이 들쳐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다크아이즈 2010-01-21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잘 정돈된 리뷰보고 팬이 됐다는 것 아닙니까? 영광이에요. <술술 뽑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을 제가 질투한답니다. 그 중에 물론 김연수도 있지요.

곡우님 많은 것 배우길 원합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이 글, 리뷰에 올려야 할지 페이퍼에 올려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내 맘대로식 리뷰로 보기엔 객관적 정보가 너무 많고, 잡설 페이퍼로 보기엔 책에 관한 얘기가 많고... 내 서재니까 내 맘대로 할란다.  

 

이 리뷰는 내가 진행하는 방송의 스물여섯 번째 시간에 전파를 탄 로쟈의 '인문학 서재' 소개글이다. 시간이 좀 지났구나. 김훈은 일찍이 말했다. 책은 팔려야 그 효용을 다하는 거라고.내 깐에는 최선을 다해 소개했는데, 글쎄 내가 사는 이곳에서는 얼마나 먹혔는지 모르겠다. 인문학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심이 덜 해서 덜 읽힌다고 로쟈님이 말씀하던데, 솔직히 말해서 뭘 모르는 나 같은 이한테는 어렵다. 그래도 자꾸 접하다 보면 나아지지는 않겠나? 

  

이 책, 현재 대박행진 중인 걸로 안다.  그래도 김훈식으로 '알라디너들아, 책 좀 사가라' 

그리하여 책 쓰는 이들이 밥벌이의 비루함에서 조금은 보상받았으면 좋겠다.   

  

 

 

A. S  // 오프닝

A. 오늘 들고 오신 책은 제법 두꺼워 보이는데 어떤 종류의 책인가요?

S. 네, 산책자에서 발간한 로쟈의 인문학 서재라는 책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본명보다는 로쟈라는 닉네임으로 더 알려진 이현우 작가가 쓴 서평 모음집입니다. 인터넷 서점 상의 대중 지성이 오프라인 서재로 옮겨간 대표적인 경우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A. 인터넷 서평꾼이 오프라인으로 진출해 책을 낸 경우군요. 로쟈라는 닉네임의 작가에 대해서 소개해주실까요?

S. 네, 저도 인턴넷 서점을 애용하고, 거기에서 제공하는 블로그 형식의 개인 공간도 갖고 있는데요, 그 인터넷 서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용한 인문학적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 분이 서울대 노어노문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현우라는 노문학자이자 인문학자인데 로쟈라는 필명으로 활동을 합니다. 그가 써내려간 전천후 인문학 독서의 후기가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단시간에 독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 예술, 철학에 대한 진지한 에세이와 철학자 지젝 읽기, 그리고 번역비평에 관한 주요 글들을 망라해 놓았습니다.




A. 책이 나온지 몇 개월 되지 않는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S. 네, 책머리에 나오는 작가의식에서 살짝 그것을 엿볼 수 있는데요, <나는 하녀고 광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다만 읽고 쓰고 떠들겠다. 뭔가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면 지금보다는 조금 나은 세상이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보다 조금은 더 견딜 만한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당신에게 끼니가 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대단찮은 것이어도 ‘겸손한 식사’ 정도는 될 수 있다면 말이다.>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인문학적 갈증에 목말라 하는 일반 독자들에게 청량한 우물 같은 역할을 한 게 좋은 반응을 얻게 된 계기 같습니다.




A. 인문학 하면 철학과 더불어 학문적이고 딱딱한 느낌이 들어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엔 쉬운 영역이 아닌데 어떤 부분에서 독자들과 소통이 되었을까요? 

S. 인터넷 서점 상에서는 사실 ‘로쟈’라는 이름은 전설이자 유령입니다. ‘로쟈에게 물어보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터넷 상에서는 인문학 방면의 ‘가장 영향력 있는’ 멘토 역할을 충실히 해냈습니다. 그의 유명한 서재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 가면 인문학 책읽기에 관한 독자로서 궁금한 모든 것이 해결될 정도로 방대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춤꾼 니진스키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알게 된 경우입니다. 그의 전공은 노어노문학이지만 전공하지 않은 분야들까지도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그 정보들은 대중지성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정색하고 인문학이란 이런 것이라고 고리타분한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니라 제 멋대로 읽고, 삐딱하게 생각하는 인문주의자를 표방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광범위하고 삐딱한 인문학자의 시선에 사람들이 신선함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하루에 천 명 이상이 꾸준히 접속하여 인문학 관련 신간 소식을 접하고, 지적인 갈증을 해소하고 있는데요, 블로그를 슬쩍 훔쳐보면 특별한 사람이라는 찬사가 절로 나옵니다.

A.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나요?

S. 네 거의 모든 인문학적 책들에 대한 서평이 모여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만화와 리빙, 자기개발서 분야를 제외한 모든 지식 분야를 넘나들고 있는데, 예의 제가 말한 니진스키의 영혼의 절규, 를 비롯한 여러 서평들을 접할 수 있는데요, 특히 슬로베니아 출신 사상가 슬라보에 지젝에 관한 관심이 많은 작가로 보입니다. 이단적이고 독특한 지젝의 철학에 매료되어 그에 대한 오해를 푸는데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한국 독자들의 지젝 이해를 위한 징검돌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대한 독자들의 애정은 그가 번역 비평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간 번역서가 나올 때마다 독자들은 로쟈가 평하는 번역 비판에 귀를 쫑긋 세웁니다. 때론 울부짖고, 때론 무모하고, 더러 용감해 보이기도 하는 번역 오류에 대한 그의 비판의 눈은 독자들을 일깨우기에 충분합니다. 번역 비평에 과감하게 실명을 거론하며 번역 교정을 선보이는데요, 그의 고군분투 활약을 통해 번역의 소중함과 책 만드는 일의 윤리성에 대한 공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A. 인문학만으로 독자들을 책읽기의 장으로 이끄는 데는 한계가 있을 텐데요,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S. 네. 읽기와 쓰기에 대한 재미와 문체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며 즐거운 저항이니, 악착같이 즐겁게 책을 읽으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의 문체는 친절합니다. 밑줄과 부연설명과 다양한 눈요기 자료를 덧붙여줍니다. 광기에 가까운 활달함이 가득한 로쟈의 글쓰기는 딱딱함보다는 자유로움이 철학적 사유보다는 시적 환유를 앞세웁니다. 쉽고 경쾌한 문체로 어렵고 심오한 내용을 말하기 때문에 독자들로서는 충분한 배려를 받는 느낌이 듭니다. 지독한 성실성도 한몫합니다. 강의와 집필, 독서와 번역 그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서재에 새 글을 올리고 문답을 답니다. 이 불타는 사명감은 바로 대중지성에 대한 그의 열망을 말해줍니다. 사라져가는 인문 지성의 숲을 무성하게 일구고자 하는 힘이 느껴집니다.




A. 다재다능한 로쟈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S. 네, 우선 저부터 경계 없이 지적 유영을 즐기는 저자가  부럽기 짝이 없는데요, 매일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독자들에게 신선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부러움에서 그칠 뿐입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김훈의 소설 문체에 대해 분석한 것이 흥미를 끄는데요, 그에 의하면 김훈의 아름다운 문체와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은 소설 문법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질투어린 시선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는 저자의 견해가 왜 그리 신선하게 보이는지요? 산문적 일상을 묘사하는 소설가는 자신만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게 지당하게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아름다운 문체여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의견이 참 와 닿았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 생활 마찬가지로 산문적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통찰에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도구이자 형식인 문체가 내용을 압도해서는 안 된다는 거잖아요.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읽고 쓰고, 떠들고, 생각하고, 주저하고, 이 모든 것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좋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A, S // 마무리 


댓글(9)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1-20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0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1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1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1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0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1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0-01-21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야금야금 읽고 있습니다. 빨리 읽을 수 없는 책이잖아요. ^^
근데, 로쟈님이 '독서평설'에는 글을 되따 쉽게 쓰시는데, 이 책에선 좀 '세미나'티가 나요. ㅎㅎ
많이 팔리기엔 그런 한계가 좀 있을 듯...
김훈을 저렇게 말했군여. 저도 저렇게 생각했는데, 뭐라고 말을 못했지요. ^^
그저, 기자같은 말투라고 적고 말았는데...

다크아이즈 2010-01-21 00:27   좋아요 0 | URL
독서평설은 학생 상대니까 쉽게 써줘야 애들이 당황하지 않잖아요. 저도 밥벌이 하느라 애들 논술지도할 때 독서평설 가끔 부교재로 활용했는데, 로쟈님 것은 그래도 어렵달까봐 감히 시도도 안 했다는... 어쩌면 제가 이해 못해서 피했는지도... ㅋㅋ

그건 그렇고, 김훈, 고종석, 김규항 셋의 문체를 비교한 로쟈님의 에세이는 이미 명문이 되어 세상을 유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로쟈님 그런 식으로 써주면 저 같은 평범 독자들도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데... 읽고 읽어도 그 부분은 너무 와 닿아요.
 
고우영 삼국지 三國志 1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중2아들놈 잘 때 읽으라고 열권으로 된 전집을 샀다. 한데 웬 걸, 지 말로는 시시해서 못 읽겠단다. 만화로 된 건 도서관에서 신물나도록 여러 버전으로 읽었단다. 결국 요즘은 이문열 버전으로 잠자리 들기 전에 조금씩 읽는 것을 봤다. 이것도 놈이 6학년 때 샀는데, 책꽂이 너무 높이 있어서 못 읽었다는 핑계가 있지만 실은 지 아무리 똑똑한 녀석이라도 6학년이 읽기엔 무리일 것 같아 요즘 제 방 책상에 가져다 놓았더니 읽기 시작한다.  

나는 삼국지 그 어느 버전도 다 읽지 못했다. 무지를 면하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더 쉬울 고우영 것부터 야금야금 읽기 시작한다.  한 권에 한 개씩만 건져도 되겠다, 싶은 심정으로.  

1권에서는 쪼다 한 명 발견한 걸로 만족이다. 유비 쪼다야 당근 패스. 유비가 쪼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니. 하기야 적벽대전 영화에서도 그렇게 보이더라, 누구나 유비 같은 쪼다 기질이 드러날 때가 많으니 차라리 인간적이다. 고우영이 오죽하면 책상 앞 펜대 든 쪼다인 자신이야말로 유비라고 동일시하겠는가! (고우영식 표기법은 유비 "쬬다"이다. 진정 매력적인 쪼다다) 

십상시 환관들 치맛자락(?)에 휘둘린 영제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쪼다였다. 십상시는 후한말 영제 때에 정권을 잡아 조정을 농락한 10여 명의 중상시, 즉 환관들을 말한다. 십상시들은 많은 봉토를 거느리고 그 위세가 대단하였단다. 특히 그들의 곁에서 훈육된 영제는 십상시의 수장인 장랑을 아버지, 부수장인 조충을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니 쪼다의 반열 중에 가히 황제급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영제 쪼다를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실은 십상시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나보다. 인간 속성은 자고로 권력(돈) 지향적이다. 특히 권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속성을 직접 체험한 십상시들은 거세된 남성성을 보상받기 위한 차선으로 그 권력을 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자 없는 설움에 돈과 권력보다 나은 위안은 없다. 비록 파국이 예견되더라도...

≪후한서(後漢書)≫권78 <환자열전(宦者列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풍 사람 맹타는 재산이 많았으며, 장양(張讓)의 종과 친구가 되어, 자주 찾아 선물을 하며 안부를 묻는데 아낌이 없었다. 종들은 모두 그가 덕이 있다고 여겨서 맹타에게 '그대는 무얼 원하시오? 힘써 처리해보리다'라고 물었다.

맹타가 '저는 당신들이 나를 위해 절을 한번 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빈객이 장양을 만나기를 원하는 수레가 항상 수천 대가 되었는데, 맹타는 그때 장양을 만나기 바랐지만 뒤에 왔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노비 감독관이 여러 노비를 이끌고 길에서 맹타에게 절을 하고, 마침내 모든 수레가 문안으로 들어갔다. 빈객이 모두 놀라, 맹타가 장양과 아주 친하다고 여겨서, 진귀한 물건을 그에게 선물하였다. 맹타는 이것을 나누어 장양에게 선물하니, 장양이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맹타를 양주자사로 삼았다."  

권력에 파생되는 이런 코메디적 에피소들이야말로 권력의 속성을 제대로 말해주고 있다. 주인이 왕이면 그 집 종도 왕이다. 처세에 능한 저마다의 '맹타'들은 어디를 공략해야 그 권력 가까이 갈 수 있는지를 제대로 안다. 권력(장양)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종과 친구하는 맹타가 되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루하나 현명하기(?) 그지없는 맹타들의 맹렬한 줄서기... 이게 현실이고, 정치이고 곧 삶이다.  

각자 버전의 삼국연의를 읽는 의의가 이런 데 있는 모양이다. 고전을 읽으면서 현재를 해석하라고 누군가 뻔한 충고를 하지 않아도 그렇게 자기해설을 하게 만드는 것. 읽는 권 수가 한 권씩 늘어날 때마다 한 개씩만 머리에 담아보자. 그렇게 도돌이표 하다 보면 얼추 무식함은 벗어나지 않겠는가?  아직 삼국지 제대로 안 읽은 나 같은 사람은 이처럼 만화로 된 것 먼저 읽고, 풀어 쓴 것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 모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게으름 때문에 책은 늘어간다. 인터넷 서점을 활용한 이래 굳이 안 사도 되는 책을, 클릭 한 방으로 해결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정리하지 않은 서가는 점점 책들의 무덤이 되어 간다. 언제 한 번 확 쓸어담아 내놓을 건 내놓아야 하는데, 쉽지 않다. 최근에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책꽂이에 꽂히지도 못한 채 마루와 책방을 떠다니고 있다. 잘 버려야 책에게도 미안한데 이게 뭔 짓인지.  

그래도 뜻하지 않게 장식용, 보관용 기능을 하는 책을 만날 때도 있다. 어제 배달되어 온 책 중 몇 권이 그렇다. 반값 세일이라길래 주워담았는데, 그것들의 실체(?)를 보니 이건 뭐 읽기만을 위한 책 같지는 않다.  '장식만 해도 뽀대난다.'는 걸 강조하는 책 같다. 하기야 책이란 게 후다닥 읽어 치우라고만 있는 것도 아닌데다, 가끔씩은 소장하는 것만으로 그 기능을 다 할 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 사지 않은 분들께 강추! -   

율리시스는 그야말로 율리시스 사전으로 활용하면 좋겠다. 평생을 두고 관심 생길 때마다 들춰보면, 뭘 몰라도 손끝이 저릿해질 듯. 권위자 김종건 교수의 번역인데 그 분도 평생 숙업이니 허영으로 들춰보는 나 같은 이들은 이 정도만 해도 행운이렷다. 칭찬할만한 일은 그 많은 각주를 텍스트 바로 밑에다 친절하게 배치하고 있다는 것. 아무리 좋은 주해도 성의없이 뒷면에 찌익~ 일렬로 붙여놓은 것 보면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빈센트 반 고흐는 앨범 장정이다. 배달되어 온 것 보고 놀라실 분 많을 것이다. 테오를 비롯한 가족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더불어 적재적소에 배치된 고흐의 작업을 통해 인간의 고독한 운명에 대해 성찰할 기회가 된다.  일반 독자로서 이런 책 갖는 것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단 번에 보는 책이 아니라 입술 부르트고, 위 갉아올 때 한 웅큼 약 털어넣고  누워서 뒤적이기에 좋은 책.  

세일할 때 좋은 사람들을 위한 선물로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출판사가 생각의 나무네. 눈여겨 봐야겠다.

 

 

 

 나머지 한 권 나의 정원(타샤 튜더)인데 반값 세일하던 것이 내가 살 때는 그 폭이 많이 줄어들었다. 잘 팔린다는 것일까? 생각보다 별로였지만, 영혼의 슴슴한 객토를 열망하는 자들에게 위안을 줄 것 같다. 변화를 원하지만, 만 가지 그놈의 환경 탓에 아무 것도 변하지 못하는 범인들의 한 쪽 가슴을 콩닥이게 하는 책. 절망마라. 잊지마라. 타샤 할매는  56세 때부터 이 정원을 다시 가꾸기 시작했음을... 정원이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임을 이 책을 뒤적이는 동안 강하게 와닿을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0-01-20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저 빈센트 반 고흐책은 누워서 보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책일텐데요. 엄청 무겁잖아요. 저는 위에 올려 놓으신 책 율리시스, 빈센트 반 고흐, 다 반값으로 이미 구매해 놓았답니다. 그런데 이토록 무게가 나갈줄은 짐작도 못하고 사무실로 주문해 놓은터라, 집으로 가져가는데 아주 애를 먹었어요. 휴..

율리시스의 경우, 완독을 할 수나 있을까요?

다크아이즈 2010-01-20 18:3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천장 보고 말고 아랫배 바닥에 깔고(옥매트 위라면 더 좋겠지요?)베개 턱밑에 넣어주고 그 무거운 고흐는 절대 고정으로다가 해놓고 몇 장 뒤적이다 자는 거죠, 뭐.

율리시스는 위에도 적었듯이 <율리시스 사전>으로 활용해야지 저걸 완독한다고 고집부리면 손끝 아리고, 목 부러질 것 같아요. 율리시스 학회에서도 십 년 동안 공부해도 다 이해 못한다잖아요. ㅋㅋ

또다른세상 2010-01-20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스가 인터공원에서 8,740원에 팔아욧!!!!! 이렇게 팔아 뭐가 남을까 심히 궁금해지면서 어제부터 살까말까 고민하다 필시 안 읽을꺼 뻔한데 책장만 차지할꺼란 생각에 참자 하다가도 이건 거저야 가격 오르면 배아프지 않겠어라고 결제창을 왔다갔다. 거참 미치겠네요. 올핸 밀린 책들 다 읽을꺼라고 결심했는데...

다크아이즈 2010-01-20 23:02   좋아요 0 | URL
진작에 다른 곳에선 좀 더 싸다는 것 알고 있었어요. 이 정도만 해도 됐다, 하고 사야 맘이 편해요. 좋은 기획 해놓고도 책 덜 팔리니 덤핑하는 거겠지요. 맘이 좀 그래요. 율리시스 단칼에 읽다가는 목 삐걱거리는 수 있으니 사전식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싶어요. 책 없으면 아쉽잖아요.

또다른님 첨 뵙는 분인데, 반갑네요. 강쥐 구경하러 가야겠어요.
 

  밥, 제대로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뒹굴거렸다. 회식 뒤끝에 울아저씨 사들고온 물회를  아점(?)으로, 두마리 치킨을 늦은 점심으로, 좀 있으면 김치 볶음밥에 라면이 저녁상에 오를 것이다.  턱도 없는 나 같은 주부를 위해 마을마다 밥공장 생겼으면 하는 게 내가 줄곧 주창하는 바이다. 아니면 한 알만 먹어도 배부르는 영양 알약이라도 나오든지... 하도 세뇌되어서 나머지 세 식구들은 그러려니 한다.  

뒹굴거리는 동안 세 편의 밀린 원고를 써서 넘겼다. 그래도 시간이 아까워 빵굽는 타자기와 2009 이상 문학상을 옆에 두고 짬짬이 쳐다 본다.  폴 오스터를 잠시 생각하면서 아래와 같은 단상을 얻는다. 굳이 책과의 연관성이 절절한 것도 아닌데, 밑도 끝도 없는 잡념이 배꼽 저 밑에서부터 올라온다. 먹는 게 부실하니 허기가 빨리 찾아오는 건가?  

- 소비의  미덕을 아랫대에게 우아하게(안 되면 현명하게라도) 실천하는 노년을 꿈꾼다. 이 얘기는 내 친구가 즐겨하는 말인데, 나도 동의한다. 아랫대를 얌전한 모범생으로 앉혀놓고 진부하게 왈가왈부하는 노년의 풍경만은 피하고 싶다, 는 막연한 생각, 우아한 노년은 역시 머니가 보장한다는 부담감. 아무렴, 부지런히 타자기 놀려 빵을 마련해야겠구나.

- 이야기 사기꾼은 못 돼더라도 수완꾼은 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역시 독서를 통한다는 사실. 특히 폴 오스터 같은 편안한 능수능란은 욕심 저 밖의 차원에서 노닌다는 것을 감지한다. 

- 아무래도 무절제와 떠들썩함과 활기가 함께 하는 부류들이 자기기만이 없다는 확신. 그들은 덜 정치적이고, 덜 계산적이며, 쉽게 공감한다는 것. 점잖은 주연보다 익살스런 조연들이 주는 매혹, 침묵을 무기로 사용하는 자의 위선보다 수다를 장난감으로 사용하는 자의 위악을 높이 산다는 것. 거기서 나아가 좀 전엔 급기야 이런 발언까지 식구들 앞에 했다.  

쉰 김치의 우수성보다 난 식빵 피자(내가 가장 자신 있게 만드는 간식)위, 모짜렐라 치즈의 유혹에 더 약해. - 이 말에 울아저씨가 핀잔했다. 그렇게 국수주의를 경계한다고 네 잘난 (인문학적) 소양이 높아지는 건 아냐. 조금 웃겼다. 거기에 웬 국수주의? 나 비록 잔칫국수 좋아해서 자주 말아 먹으나 그런 뜻은 아닐세~  김치볶음밥에 치즈나 듬뿍 올려 먹어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꼼미 2010-01-2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에 대한 확실한 공감이네요. 동거녀와 의붓엄마처럼 산지가 근 십년도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이놈의 끼니마다 밥해먹는 일이 익숙해지지가 않아 괴로워 하는 중이죠. 똑같은 생각. 훌륭한 밥공장이 있었으면 좋겠다.^^ 할일없이 책 읽다 보면 밥때는 또 다가 오는데 냉장고는 텅텅. 장정으로 변해가는 아이들은 그 와중에도 먹을 것을 스스로 찾아내고 동거남은 직접 장을 봐오는데 저는 아직도 밥하는 엄마 노릇을 잘 못하네요. 너무 공감해서, 좀 흥분하고 갑니다.^^

다크아이즈 2010-01-21 00:38   좋아요 0 | URL
오뫗, 꼼미님 그대는 이유 불문하고 지금부터 나의 동지여요. <동거녀와 의붓엄마>이렇게 빼어난 표현이 있었군요. 근데 동거녀는 잘 보이고 싶어서라도 동거남 밥 잘 해 줄 것 같은데, 전 뭐 겁나는 게 없네요. 냉장고 뒤져서 스스로 삼겹삽 데쳐 먹는(굽지는 못하고) 아들놈 보면 뜨끔할 때 많습니다.

반가워요. 놀러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