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잘 집중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입장에서 그런 면은 환영받을만한 건 못된다. 드라마는 삶의 표현 양식 중 하나이다.  갈등, 번민, 절망, 화해하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삶을 녹여내는 글쓰기와 그리 무관한 일은 아니다. 등장인물들이 내뿜는 촌철살인의 대사와 적재적소의 기발한 에피소드 같은 걸 눈썰미 있게 보면, 분명 글쓰기에도 도움이 될 터인데 쉽게 몰입하지 못한다. 이야기를 따라가거나 주인공에 감정이입 되기도 전에 비현실적인 상황이 전개되면 나는 그만 지겨워져 딴 짓을 하곤 한다.  





  불륜 설정, 대가족주의에 대한 환상, 신데렐라 만들기, 은근한 쇼비니즘 등이 드라마의 소재가 되어 온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시청률을 의식해야 하는 방송사 입장에서는 대중의 입맛을 자극하는 그런 소재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한데, 도가 지나쳐 리얼리티 부재를 넘어 막장으로 치닫는 드라마에서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욕하면서 본다는 그런 드라마에 쉽게 동참하지 못하는 내 성정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아직도 헛갈린다.   



  어제 우연히 케이블 방송에서 앙코르 단막극 한 편을 만났다.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라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내 오감은 화면에 맞춤하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장편 드라마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과는 다른 신선한 감흥이 절로 일었다. 단숨에 몰입한 이 작품이 여운이 남는 건 짧은 시간, 오직 작품성만으로 시청자와 공감하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경희 드라마작가의 ‘우리햄’(드라마 시티 단막극, 2004 방영)은 이제 내겐 매혹적인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노망 든 할아버지, 병석에서 매일 죽는다는 말을 달고 사는 할머니 그리고 주변 모든 이들이 포기한 문제아 우리햄(우리형님), 이 작품은 이렇게 아이보다 못한 어른 셋을 건사하는 아홉 살 철기의 고군분투 생활기를 담은 단막극이다. 



  <우리집에는 얼라보다도 몬한 어른이 서이나 된다. 첫 번째 얼라는 노망이 걸리가 손자가 되는 내보고 오빠야, 오빠야 하는 할배고, 두 번째 얼라는 지난겨울부터 방에만 꼼짝도 안하고 들눕어가 맨날 죽는다죽는다 꽁까는 할매고, 세 번째 얼라는 학집동포(학교, 집, 동네에서도 포기한 문제아) 우리햄이다.> 이렇게 방백하는 애어른 철기. 아홉 살이 감당해야할 삶의 비애와 의연함 앞에서 나는 서늘한 듯 다사로운 한줄기 바람이 지나는 걸 느꼈다.    



  어린애처럼 과자 한 봉지에 집착하는 할배, 똥오줌 기저귀를 자주 갈아줘야 하는 할매, 여전히 건달 신세를 면치 못한 우리햄. 햄(형)이라 부르지만 실은 자신의 아빠임을 진작에 철기는 알고 있다. 이 작품이 과장되지 않고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건 철기의 속 깊은 행동 이면에 동심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말썽만 피우는 우리햄을 떠나, 풍문으로만 듣던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기차역 장면. 딱히 희망적이랄 것도 없는 그 계획이 현실이 되기 전, 철기는 플랫폼에서 우리햄의 진심을 알아 버린다. 자신을 버린 사람은 망나니 아빠가 아니라, 돈 있는 남자를 따라 간 엄마였다는 사실. 플랫폼 수하물 뒤에서 배불뚝이가 된 엄마와, 떠난 엄마로부터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입씨름 하는 아빠를 훔쳐보던 철기는 풀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고 만다. 애어른을 버린 자리에 아홉 살 다친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앉은 것이다. 화면을 통해서 얻는 깊은 울림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절감한 장면이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았을 때도, 할배의 억지와 할매의 투정과 우리햄의 속썩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아홉 살의 의연함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웠던 가를 반증하는 것이기에 더한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진정한 부성애를 맛보게 된 철기는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 번째 얼라는 아홉 살이나 묵은 기, 즈그 아부지 무등 타는 거로 제일 좋아하는 나, 강철기다.> 오프닝을 살짝 비튼 피날레. 이런 수미쌍관의 맵시덕분에라도 이 작품은 오래토록 내게 여운을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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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08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님의 글로만 본 드라마지만 정말 괜찮은 드라마네요.
욕하면서 본다는 드라마 대열에서 이탈한지는 아주 오래 되었지만, 요즘 파스타에 꽂혀서 백만년만에 드라마를 보게 됐어요.ㅋㅋ 우리애들이 엄마도 보통 아줌마와 다르지 않구나!를 외쳐대지만 그래도 꿋꿋이 보고 있어요. 아~ 오늘은 월욜 파스타 하는 날이구나, 룰루랄라~ㅋㅋㅋ

다크아이즈 2010-03-24 20:38   좋아요 0 | URL
아웅, 저도 드라마에 꽂히고 싶어요. 노력해도 조금만 보다 보면 엉뚱한 데로 빠져요. 관심 덜 한 곳에, 몰입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穀雨(곡우) 2010-03-08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능적이든 구조적이든 결손가정이라는 게 마음이 짠~해지는 법인가 봅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홉살이여서 그런 지 전 <아홉살 인생>이 떠오르네요.
다른 세상이지만 동심은 세상에 덜 패이고 덜 깍인 느낌입니다.
드라마, 전 광입니다.^^ 남들 안 보는 드라마만, 진부해 빠진 소재지만 가족 간의
사랑, 희망... 뭐 그런류의 드라마 좋아라합니다.^^

다크아이즈 2010-03-14 23:5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아홉살 인생의 이경희 식 버전이죠, 뭐.
드라마 광 되는 법 좀 가르쳐 주시와요. ㅋㅋ 도무지 몰입 단계까지 힘들어요.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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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웨이의 숲을 지날 때




  딸내미, 짐을 꾸린다. 기숙사 입사 준비물을 챙기는 딸아이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드라이기, 화장품, 머플러 심지어 손톱깎이까지 살뜰히 챙기는 딸아이의 손끝이 야문 듯 재바르다. 나는 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야문 손놀림이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라는 것을. ‘학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라는 핑계가 아니더라도, 열아홉 나이라면 대개 집 떠나 독립하고 싶어 하리라. 오직 설렘으로 짐을 챙기는 딸아이를 보면서 야릇한 서운함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내 본심이 아니고, 실은 노파심에서 오는 걱정 때문에 잔소리만 잦아진다.

  청춘을 건너는 통과의례가 얼마나 아름답고 동시에 잔인한 것인가는 그 시절을 다 보낸 뒤에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미 노르웨이의 숲을 휘돌아 넓고 깊은 강물을 먼저 건너온 기성의 부모로서, 그 청춘 불발의 시간들을 최대한 줄이도록 조언하고 싶은 것이다. 화려한 듯 남루하고 활짝 편 듯 오그라들기만 그 힘겨운 시간들을 건너는 법에 대해서.

  비전을 가져라. 시간 낭비하지 마라. 건실한 남자 사귀어라. 동아리 활동 열심히 해라. 몇 가지 강조하는 엄마로서의 얘기를 딸아이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내게 이런 충고를 일찍이 해줬더라면 더 나은 숲과 강을 건너는 법을 체득했을 것 같은데,  이 실속 있는(?) 충고를 딸아이는 엄마의 성가신 잔소리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하기야 부모로서의 이 모든 노파심은 무소용하다. 왜냐면 청춘은 타인의 충고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의 체험으로 완성해가는 것이므로. 어쭙잖은 엄마로서의 안내 역할보다는 차라리 한 권의 청춘 입문서가 딸아이에게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문학사상사, 2000)에서 우리는 다양한 청춘 군상을 만날 수 있다. 주인공 와타나베 역시 딸아이처럼 집을 떠나고 싶어 하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다.

  소심하지만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신뢰로 주변 인물들을 끌어안는 주인공 와타나베, 알 수 없는 트라우마로 예기치 못할 죽음으로 향하는 기즈키, 한 번쯤 누구나의 첫사랑이었을 나오코, 그 첫사랑을 극복할 만큼의 슬픔조차 승화한 재기발랄한 미도리, 모든 것을 갖춰 오만함마저 카리스마로 비춰지는 나가사와, 나쁜 남자임을 알면서도 순정한 마음 때문에 질척이는 하쓰미, 특별한 상처로 인해 타인을 이해할 줄 아는 인생 선배 레이코, 자신 만의 세계에 몰입하며 세상 물정에 어눌한 돌격대 등을 통해 간접 청춘을 경험할 수 있다. 시대적 상황을 떠나 등장인물 하나하나는 이십대의 현실에서 만남직한 캐릭터들이다.

  청춘의 숲을 휘도는 동안, 내 딸을 비롯한 그들이 와타나베처럼 따뜻한 감성을 지니되 소극적이지 않았으면 좋겠고, 상처를 두려워하진 않되 그게 잦지 않기를 바라고, 누군가의 첫사랑이 되거나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바라지만 그 상처를 극복할 만큼의 의연함을 잃지 않기를 기도한다. 절대, 치기로라도 나쁜 남자 따위는 관심조차 갖지 않기를 바라고 그런 남자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하쓰미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모든 걱정이 부모로서의 쓸 데 없는 걱정거리가 되고 말리라. 언제나 충고보다는 경험이 앞서므로.   

  하루키 식 표현에 의하면 ‘고민하지 말아요.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요.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와타나베 군도 그런 인생살이를 슬슬 배워도 좋을 때라고 생각하세요.’

  인생 선배인 레이코 누님이 와타나베에게 하는 충고야 말로 청춘을 건너는 자들에게 가장 자명한 충고이다. 노르웨이의 숲을 지나 저 상실의 강을 건넌 뒤에야, 기어이 숭고한 삶의 의미를 되짚게 될 이 땅의 청춘들에게 특별한 봄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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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한 남자랑 십구 년째 살고 있다. 그럭저럭 그 많은 시간을 별탈없이 건너온 것은 전적으로 그 남자 덕분이다. 이런 밑지는 고백을 하는 건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시계바늘이 세 시를 향해 가고 있고, 아무래도 이 시간은  이성의 머리칼이 곧추 서기보다는 감성의 손끝이 예민해질 때니까. 이런 틈을 타 양심고백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비록 내일 한낮  멀쩡한 정신이 되었을 때, 이 글이 손발 오그라들게 한다며 지우게 될지라도.    

  천성이 게으르고,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공주과인 나는 그 남자 때문에 전업주부로서의 자생력을 점점 잃어 가고 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 볼품없는 살림솜씨는 십구 년째 자발적 퇴화 진행 중이시다. 번듯한 직장이 있어 시간에 쫓기는 것도, 쌈박한 재테크 솜씨로 큰 소리 칠만한 상황도 아니면서 어쩌자고 뻔뻔하게 주부로서의 직무유기를 행하고 있는지지 불가해하다. 하지만 그 답을 나는 정작에 알고 있다. 십구 년 산 남자의 이해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 대신 포기, 라는 말이 더 적확하겠지만 그 표현 쓰면 너무 서글퍼질 것 같다.) 

  오늘 저녁에도 변함없이 내 할 일(딱히 할 일이랄 것도 없지만, 여기서 <내 할 일>이란 가사노동을 제외한 내 개인적인 모든 활동을 말한다.)을 하고 있는데, 그 남자는  자신의 출근복과 와이셔츠를 한무더기 가져다 놓고 내 옆에서 묵묵히 다리기 시작한다. 괜히 계면쩍고 미안해진 나는 '히야, 언제봐도 당신은 뜬 구름보다 쉽게 바지주름을 잡네.'라고 딴에는 유머랍시고 한마디 했다. '괜히 미안한 척 말도 안 되는 멘트 안 날려도 된다. 속 보인다'라고 그 남자가 멋대가리 없게 받아친다. 지기 싫어 나도 모르게 또 다음 멘트를 날린다. '뭐,꼭 전업주부라고 옷 다리라는 법 있냐?' 그 말은 안 하는 게 나았을까? '어이구, 니가 전업주부면 내가 옷 다리겠냐?' 이런 비아냥을 들었으므로. (그 비아냥거림 속에 숨어 있는 그 남자의 속 깊은 신뢰를 발견하는 재미는 글로 표현하기엔 벅차다) 

  그 남자 아니라면 '직장없는 취업주부' 행세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까탈스런 남편 만나 몸과 맘을 다친 친구가 있다. 하루 다섯 건씩 과외하면서, 삼수하는 아들 뒷바라지 하는 것도 모자라 배려없는 남편 때문에 힘들어 하는 친구와 통화할 때, 실수라도 그 남자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는다. 그저 언제나 그렇듯, 미뤄둔 <남편 흉보기>대회에 참가한 것처럼 과장해서 그 남자의 단점을 읊어댄다. 어쩌면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그 남자이지만 입장 바꾸면 내 단점은 그보다 훨씬 더하다. 따라서 이만하면 감사한 일이라고 오늘 같은 감상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컴맹인 마누라를 위해 엑셀 수식을 만들고, 깔끔하게 자료를 재배치하느라 잠자리에 늦게 든 그 남자, 지금 옆에서 열심히 코 골고 있다. (자료 만들어 주면서도 어찌나 잘난척을 해주시는지 당장 컴퓨터 배우러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꾹 참았다. 삐지면 회복하는데 일주일 이상 걸린다. 이런 우라질리아~) 늦게까지 잠 못 들고, 서재질이나 하고 있는 마누라의 무서운 밤을 위해 불 끄지 않고서도 마누라 곁에서 잠드는 습관을 들인 그 남자. 잠들기엔 너무 밝다고, 다른 방으로 결코 피신하지 않는 그 의리야말로 십구 년이 낳은 미운 정 고운 정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그 남자 앞에서 숱하게, 오묘하게 변덕스런 내 본심은 더도 덜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의 상태가 아닐까 싶다. 코 고는 그 남자의 콧머리를 한 번 비틀어주고  곧장  베개 끌어 안고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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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21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손발 오그라드는(정말?^^) 염장 페이퍼네요.^^
나는 남편 셔츠 안 다려준지 오래됐고(아니 다림질이 필요없는 옷을 주로 입으니까^^)
아들 교복은 열심히 다려준답니다. 남편보다 애인이 더 좋잖아요.ㅋㅋ
사실 다림질은 남자들이 더 잘한대요. 군대에서 주름 칼처럼 잡았던 전적이 있는지라...
함께 한 세월이 19년이라니 님도 연차가 꽤 높으시군요.^^

다크아이즈 2010-02-23 12:1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은 자식 농사 잘 짓고 있는 걸로다가 제대로 염장인걸요. ㅋㅋ 저도 울 아들 교복은 다려줘요. 혹시라도 여학생들이 찜 해줄까 싶어서요. 맞아요, 울아저씨도 칼주름 잡아요. 것 갖고도 얼마나 잘난척인지...

비로그인 2010-02-22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얼마 전 `내 꿈은 현모양처'라고 미용실 언니에게 이야기했더랬지요. 그랬더니 미용실 언니 왈, `전 그냥 모처 하고 싶어요'

엥? 말인즉슨 `현, 양' 이 글자는 제겐 해당사항이 없어요' 라는 것이었지요.

아, 나도 그냥 모처구나. 현진건의 빈 처 패러디도 아니고 이건 뭐람.

다크아이즈 2010-02-23 12:10   좋아요 0 | URL
어멋, 제가 존경하는 주드님 납시었다. 우아한 포스에 감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 주드님은 모처로만 있어도 현양의 포스가 느껴지니 그걸 즐기시기만 해도 돼요. ㅎㅎ

2010-02-23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3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3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0-02-26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옛날엔 두어 달에 한번쯤 옷도 다리고 했는데요...
요즘 안했더니 직장 다니는 아내가 세탁소에 가져다 맡기더라구요.
편하기도 하고... 싸고 하니깐...
다리미는 잊고 삽니다. ㅎㅎ

다크아이즈 2010-02-28 03:26   좋아요 0 | URL
직장 있는 여성의 (가사노동) 직무유기야 백만 번 이해되지요. 그런 여성들을 위하여 마을마다 밥공장이나 세탁소가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임돠~ 글샘님처럼 되어야 정상이라는...ㅋㅋ
 
연을 쫓는 아이 (개정판)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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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레드 호세이니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먼저 만났다. 의무적으로 책 소개를 해야 하는 것 때문에 만난 책이지만 쉽게 쓴 책이지만 괜찮네, 정도였다. 역시 필요에 의해 (독서토론 모임 때문에) 읽은 '연을 쫓는 아이'는 그 이상이었다. 처음 누군가가 이 책을 토론 도서로 추천했을 때 하마터면 나는 이 책 대신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선정할 뻔했다. 같은 작가라면 이미 읽은 책이 다루기가 쉬울 것 같았다. 한데 알라딘 검색 도중 반값 세일하는 것을 알고 이 참에 욕심 좀 내자 싶어 덜컥 사버렸고, 결국 토론도서로 정했다. 결론은 참 잘했어요, 이다.   

  가끔씩 리뷰를 쓰면서 별을 클릭하라고 알라딘에서 앙탈을 부릴 때 웬만해선 그 다섯을 다 칠해주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야박한 건 아니다. 쓰는 행위가 내 안의 악마와 힘겹게 싸운 결과물임을 알기에 웬만하면 별 넷을 준다. 악마를 몰아낸 힘겨움만으로도 별 넷은 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오만했을 땐 별 셋도 준 적 있는데 그건 쓴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쓴다는 것의 찬란함에 대해 별 시덥잖게 생각했을 때의 내 흔적이라고 봐도 좋다. 뭐, 말이 길어지긴 하지만 결론은 이렇다. 쓰는 이들 모두 위대하지만 정말로 내 취향에 맞는 글에는 별 다섯을 아낌없이 준다. 오랜만에 연을 쫓는 하산에게 별 다섯 개를 줘본다. 전혀 아깝지 않다. 오히려 모자라는 감이다.  

  별 다섯인 이유는 스토리텔러로서 완벽한 기능을 하는 호세이니 때문이다. 이야기 자체가 재밌고 감동적이어서 소설에 이끌리는 경우는 내게 있어서 굉장히 드문 편이다. 나는 이야기에 연연하는 독자가 아니라 언제나 방식에 목말라하는 쪽이었다. 해서 아무리 좋은 얘기도 내가 원하는 방식이나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가 아니면 맘이 가지 않는다. 굳이 밝히자면 그의 문체만큼 평범하다 못해 무색무취한 경우도 드물다. 폴 오스터처럼 도회적 세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헤밍웨이처럼 깔끔한 문체의 소유자도 아니다.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방식의 이 작가가 내게 눈물을 자아내는 건 이야기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고백하건대, 나는 할레드 호세이니를 벤치마킹할 것이다. 편안한 스토리텔러로서의 그 재능은 문체와 방식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산을 찾아 간 라힘 칸의 장면에선 기어이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남들 다 울었다는 신파를 자랑하는 엄마 부탁하는 모 소설 같은 경우에도 절대 눈물 따위 흐르지 않았다. 압록강은 흐른다, 를 읽을 때 이후 소설 읽으면서 처음 눈물 지었다. 그걸로도 호세이니는 내게 충분하다. 바바를 모시듯 그의 미더운 친구인 라힘 칸에게 하룻 밤 묵어가라고 권하는 하산을 마주할 때 마구 눈물이 흘렀다. 저한테 두 번째 아버지라고 말하는 순정한 하산을 보면서 비겁함과 죄의식에 시달리는 아미르는 진작에 가장 공감가는 캐릭터로 다가왔다. 살면서 우리는 누구나 아미르이기 쉽고, 숱하게 크고 작은 하산들을 배신한다.   

  호세이니의 등장인물도를 정리하면서 장편은 이렇게 쓰는구나, 벤치마킹한다. 적재적소의 바바와 알리와 아미르와 하산이라니! 심지어 악역인 아세프까지 끝까지 책임지는 그 소설적 안배에 머리가 서늘해진다. 극한 상황, 비겁한 침묵, 양심의 소리, 배반의 괴로움, 오랜 죄책감, 행동하는 양심에 이르기까지 소설이 주는 감동과 재미를 이토록 쉽게 보장하는 작가라니. 덕분에 아프간 내전을 둘런 싼 제 상황과 아프간인의 생활 상도 좀 더 알 수 있게 됐으니 일석이조라고나 할까. 그렇게 따지면 911테러가 없었다면 이 작품이 기획자의 눈에 덜 띄었을 수도 있으니 이래저래 잘 팔리는 소설은 우선 잘 써야하겠지만 기획력의 승리라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다. 요즘도 여전히 베스트셀러 손가락 안에 든다고 오늘자 신문에서 봤다. 장하다, 호세이니. 그의 책 두 권을 샀으니 난민들을 돕기 위한 단체에서 활동하는 그를 위한 작은 응원이 되었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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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15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영화도 책도 못 봤어요. 중학교도서실에서 빌려와 아이들만 보고 반납했는데...
읽어야 될, 읽고 싶은 책은 너무 많은데... 알라딘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여야 될 듯.^^

다크아이즈 2010-02-21 01:43   좋아요 0 | URL
서재 들어올 시간조차 쉽지 않은 나날이네요. 순오기님알라딘에서 보내는 시간 줄이지 마세요. 전 개인적으로 여기 오는 시간이 엄청 좋은데 것도 맘대로 안 되네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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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수는 이십대 때 한 여자를 사랑했지. 청춘을 지나온, 하자 없는 대부분의 독자가 그러했듯이. 연수의 사랑은 언제나 파국을 예견하곤 했지. 사랑이 온전하지 않은 것임을 미처 몰랐던 누구나의 이십대가 그러했듯이. 잘 뻗은 메타세쿼이아, 그 적막한 그늘 벤치에 함께 앉았을지라도 그 사랑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그런 시절을 건너는 것이 삶의 톱니바퀴이기도 하지. 그럴 때 연수는 노래했지. "사랑은 저처럼 뒤늦게 닿기만 하면, 닿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자욱도 없이 삼월의 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    

  소설을 쓰기 전 연수는 시를 (오래) 쓴 적이 있었지. 그때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등장하는 시 한 편을 쓴 적이 있지. 그 시의 제목이 꼭 세계의 끝 여자친구일 필요는 없었어. 중요한 건 그날의 데이트 여정 중에 메타세쿼이아의 이미지가 연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거지. 실제로  그 나무 아래 벤치를 서성였는지, 그 올곧은 나무를 연상케 하는 여자의 잘 다려진 스커트 때문에 그 나무를 떠올렸는지는 역시 중요하지 않아. 메타세쿼이아 한그루를 가슴에서 뿌리칠 수 없었던 연수는 급기야 도서관에서 '메카세쿼이아, 살아 있는 화석'이란 책까지 빌리게 되지. 시상은 떠오르고 그 시적 완성미를 위해 책을 활용해야 했던 거지.  

  딱히 연애랄 것도 없는, 지리멸렬하기만 한 연수의 만남에 위안을 주는 것은 이를테면 이런 거야. '이따금 그 메타세쿼이아 쪽을 바라보면서 호수 주위를 달렸으며, 생각날 때마다 매번은 아니고 세 번에 한 번꼴로 <나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미니책자 27쪽)내는 거지. 그리하여 '나의 미래는 여전히 전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같은 책 27쪽)지는 거지. 애인이든, 대타 여성이든 모든 만남은 여전히 전혀 내 것이 아니어야 스물다섯 시절이라 할 수 있지. 그걸 아는 연수는 결국 시 한 편을 건너 뛰어 단편 하나를 완성하기로 하지. 이름하여 세계의 끝 여자친구, 라는 제목이 탄생되는 순간이지. 연수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시를 쓴 시인으로 분하고, 시집 두 권을 낸 경력이 있는 그 시인은 암 투병 중 죽게 되는 거지.  

  마침 그를 아끼고 사랑한 스승이 있어 그 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작중 화자는 그것을 알린 사람에 대한 막연한 흑심으로 시 읽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 사람이 시인의 국어선생이지 늙어버린 김희선씨라는 걸 알게 되지. 김희선 할머니(아니 김희선씨)는 죽은 제자 시인이 화자와 닮은 것에 놀라고, 화자는 자신의 애인과 할머니가 이름이 김희선으로 같다는 것을 알게 되지. 비록 탈렌트 김희선 만큼 아름답진 않지만 작중화자에겐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었던... 이제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껴안을 것인가는 자명해졌어. 김희선씨와 작중 화자는 서로를 이해하게 될 거야. 유방암을 앓는 김희선씨(굳이 할머니는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지)와 사랑 앓이에 혼란스러웠던 화자는 한 그루의 메타세쿼이어를 향해 걸어가는 거지. 그 거리에 관념적 사랑은 영원히 남고,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같은책자 31쪽)른다는 자기확신을 되새기며.  

  사랑이란, 집 근처 공원, 그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메타세쿼이어 나무 한 그루까지 온전하게 함께 닿는 길을 말하지. 하지만 삼십 분도 걸리지 않는 그 길이 실은 세상의 끝에 다다르는 것 만큼 힘겹기만 하지. 그래서 사랑은 모호하고, 불길하며 흔적이 없을 수도 있는 게야. 정작 사랑은 어디에도 없는데. 다만 우리의 환상이 저 메타세쿼이어 우듬지 어디에 그것이 있고, 그것이 곧 세계의 끝이라 우기고 싶은 거지.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 모두는 헛똑똑이가 되는 것이지. '모두 헛똑똑이들이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아는 것들이다.' (같은책 24쪽) 사랑이 버거운 건  '내 쪽에서 아는 것'에서 메타세쿼이어 끝을 꿈꾸기 때문인 거지. 삼월의 눈발처럼 사라지는 그 몹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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