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맨 앞에 쓰는 짧은, 작가가 인용한 문구를 뭐라 하나? 권두문? 

타인의 고통, 에서 수잔 손태그는    

보들레르  --- "......정복당한 자들을!" 이란 문구와

테니슨의 말을 인용했다. -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 매혹적인 문구다.   

친절하게도 원문까지 소개해 놓았다. - 돼지라굽쇼?...... 소인도 잘 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가 저를 더럽혔을 뿐이죠.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야말로 인간 고통의 근원이 아닐까?  

손태그는 어떤 생각으로 이 문구를 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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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미 2010-05-19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붙잡고 싶은 것은 반대로 '생의 모든 고통은 생의 모든 아름다움이다. 체험이라는 모든 추잡한 보모까지도'네요. 이 모든 모순과 더러움과 고통 속에서도 인간 생의 아름다움을 붙들고 싶은 건 내가 너무 약하고 못나서인지... 잘 지내시지요?

다크아이즈 2010-07-2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운 꼼미님... 제 무심함을, 게으름을 용서하세요. 여차저차하다는 핑계만이...
 
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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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가 하나의 리뷰가 되어버리는 수잔 손태그

41 몇 개의 선택된 사진의 전쟁들 속에서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일 뿐이다. 그 의식은 금방 불타올랐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뒤, 곧장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져갈 것이다. 글로 씌어진 이야기와 대조적으로, 사진은 단 하나의 언어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잠재적으로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 피가 흐르면 앞쪽에 실어라 (39)

  65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 예술은 지옥의 묘사를 통해서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켰다.




110 이런 사진들이 보여주는 광경에는 이중의 메시지가 있다. 이 사진들은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122 피사체가 전혀 포즈를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찍었다는 이미지가 평범해 보이지 않을 경우, 보여져야 할 필요가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행위는(고통으로 가득 한 현실을 눈앞에 바짝 들이대는 식으로)보는 사람들을 괴롭혀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라고 강요하는 꼴이 되어버린다.~전쟁 사진을 통해서(동정심, 연민, 분개 등) 감정을 착취한다는 쟁점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50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음증적인 향락(그리고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167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오늘날에는 이렇듯 도덕적으로 모자란 상태에 남아 있기가 훨씬 더 어렵게 만드는 이미지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다. 잔혹하기 그지없는 이미지들이 늘 우리를 항상 따라붙는 것이다.


186 ‘로버트 카파의 쓰러지는 병사’라는 논문에서 리처드 휄런은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카파가 어느 공화군 병사의 사살 장면을 전선에서 우연히 찍게 된 과정의 세부 정황은 사실상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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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雨(곡우) 2010-04-29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이 이 책을 읽고 밤잠을 설쳤다는 그 유명한 책이네요..
저두 읽어 보고픈데 요즘은 어찌 이리도 바쁜지 시간이 나지를 않으네요..
나중에 느와르님의 멋진 리뷰로 대신하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12-01-16 18:28   좋아요 0 | URL
곡우님 잘 계시죠? 이 책, 교도소 독서클럽에서 토론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단, 불편한 장면들이 사진으로 나오니, 자신의 과거가 오버랩 되어 많이 힘들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있었어요. 미처 거기까지 생각 못한 제 맘이 짠하더군요. 곡우님 리뷰 좋아하는데 잘 안 올라오네요. 저처럼 바쁘신가 봐요.ㅎㅎ

2010-05-02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0-05-06 18:39   좋아요 0 | URL
님 좋은 정보 정말 감사해요. 요즘 하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고 있어요. 체력이라도 따라주면 좋겠지만, 그나마 남는 시간엔 잠 자요. 괴롭습니다. 서재에 자주 오지도 못해요. 답문 늦어서 죄송해요. ㅎㅎ
 

 

그가  달린다.  

곧장 달린다.

부러질지언정 마냥 달린다. 

나까지 달리자고 소매끝을 당긴다.  

달려야 하는 게 맞지만, 맞는 게 불편한 나는 망설인다.  

맞는 게 옳은 것도, 망설이는 게 그른 것도 아님을, 

맞는 게 그른 것도, 망설이는 게 맞는 것도 아님을,   

불가해한 오답일수록 삶에선 정답에 가까웠으므로  

(그것을 불혹 지난 한 시절에 알았다)  

나는 편리한 망설임을 택한다.

망설임이 누는 묵은 똥이야말로 내 존재증명 

내가 눈, 똥덩이를 연민으로 되돌아 보는 것 

그가 본, 가래침을 외면하며 앞으로만 달리는 것   

그 둘 다 불가해하기만 한 생의 정답인 것을   

그가 상처 많은 영광을 골방에서 맛볼 때  

나는 군중 속에서 (기어이) 백전백패할 것이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서문 패러디)  

 

......   사람 가까이 하면서 나는 깨친다 

모든 사람은 다 다르고 

개별자 저마다가 옳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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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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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대녕은 윤대녕에서 한발자국도 넘어서지 않는다.  내게 처음 느낌 그대로인 지점에서 진척이 안 되는 작가는 윤대녕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감상의 걸음이 퇴보하거나 전진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지 않나? 실망하거나 혹하거나가 없는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딱히 누가 묻는다면? 나는 그(의 작품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해야 할 것 같다.   

  그의 레퍼토리 (순전히 내 느낌임) 

  1. 작가이거나 프리랜서이거나 (고급)백수인 남자는 여행을 떠난다. 

  2. 그곳에서 여자를 만난다. 미리 약속되었거나 우연이거나. 이번에는 약속된 만남이 많네. 

  3. 남자는 하나 같이 60년대 대화체를 애용한다. 설사 남자가 1990년대 말에, 스물 아홉이고, 만나는 여자가 스물 일곱일지라도  여자에게 ~하오, 체를 쓴다.   

  4. 남자와 나이 차이 별로 없는 여자 주인공은 항상 남자에게 경어를 쓴다. 그것도 모자라 항상 남자보다 적극적이다.  남자가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 알아서 약속 장소를 정하고, 알아서 방(호텔)을 구하고, 알아서 음식까지 척척 마련한다. 이런 우라질~ 대개 유부남, 유부녀 이거나 유부남에 미혼인 경우가 많은데, 저렇게 적극적일 때까지 남자는 그저 묵묵히 여자를 따를 뿐이다.  

  하오체를 쓰는 나이 차 나지 않는 남자에게 경어를 꼬박꼬박 써가며, 주체적으로 남자를 리드한다. 그런데도 어쩐지 별로 주체적인 것 같지 않아 기분 꿀꿀하다. 남자는 잘 나서, 혹은 소심해서, 아님 귀찮아서 그런 여자를 잘 따라 주는 걸까.  

  꿈에라도 윤대녕이 그리는 남자상은 만나고 싶지 않다. 현실에서 윤대녕이 그리는 여자가 있을까봐 짜증난다. 가만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데, 옛 여자가 전화해서 만나자니 한 번 만나 봐야지, 하는 남자 보다는, 옛 여자가 만나고 싶으면 쿨하게 전화하는 남자가 낫다. 물론, 안 하는 남자가 더 낫다!  

  참 쉽게 쓴다. 매우 빨리 읽힌다. 소설은 원래 이렇게 쉽게 써서, 대중에게 먹혀야 한다. 자고로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기능은 재미와 예술성이다. 재미도 있고, 예술성도 있으니 소설의 기능면에서는 만점이지만, 텍스트를 이루는 캐릭터들이 나는야 억지스럽게 보이누나. 내가 선호하는 캐릭터들이 아니라서 그런 걸 작가에게 원망해봤자 뭐 하랴. 보리의 수경도 내겐  와닿지 않는다. 왜 첫번째로 실었을까?  보리, 한 작품만 보고도 실망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여자를 소설 속에 가두어 두려는 걸까?  작가는 여자를 여자만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쓴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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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4-2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서 윤대녕 소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뭐랄까, 토요일 오후에 아무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한 사람, 그런 사람 같아요. 그 사람 소설은...
치열하지도 않고, 치열한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어 보이고... 그치만 끝없이 심심한... 욕망도 열정도 없는... 심심한 토요일... 그닥 피곤하지도 않은... 조금 피로한 중년의 남자의 심심한 토요일 오후...
술 한 잔 하기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운동도 별로인... 프로야구도 즐기지 않는 심심한 남자의... ㅋㅋ

다크아이즈 2010-04-25 13:37   좋아요 0 | URL
아, 소심하게 감상문 올렸는데(윤대녕을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글샘 같은 동지를 얻다니. 세상은 다양하고, 생각은 다 다르니 넘 소심해지지 않을랍니다. 맞아요. 싱겁거나 심심하거나 그의 작품이 왜 그런가 싶었더니 치열하지 않아서 라는 말이 정답이네요.

알로하 2010-05-07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윤대녕씨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제비를 기르다' 는 참 좋았습니다. 작가가 그리는 여성의 캐릭터는 감정을 주고받는 상대라기보다는 주인공 남자를 자극하는 추억이나 그리움? 같은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작가가 여자를 모른다, 라는 팜므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네요. 소설의 정조는 좋은데 여자든 남자든 너무 수동적이라는 거죠.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 자체가..

ugha 2010-12-17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콕 찍어서 쓰셨어요. 읽으면서 마죠마죠 하면서 손뼉을 쳤답니다.

다크아이즈 2010-12-18 12:09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요즘 <천지간> 다시 빼들고 있는데, 잘 쓴 느낌보다 윤대녕 차례가 되었으니 이상 문학상을 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 쫄리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
이태석 지음 / 생활성서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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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석 신부를 알게 된 건 방송을 통해서였다. ‘KBS 스페셜’에서 부활절 특집으로 신부님의 짧았던 생애를 조명해주었다. 한마디로 신부님은 수단의 슈바이처였다. 20세기 초, 가봉의 람바레네에 슈바이처 박사가 있었다면, 21세기 초, 수단의 톤즈에는 이태석 신부가 있었다.

  지구상, 가장 키 큰 종족 딩카족이 사는 마을 톤즈에 이태석 신부가 나타났다. 스쳐 지나는 만남이 아니라 그곳의 정착민이 되기 위해. 의과대학을 마치고 군의관으로 제대한 신부님은 물질적 풍요와 보장된 미래를 미련없이 버렸다. 그리고 사제가 되었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였다. 아랍계 북수단과 원주민 남수단은 내전 중이고, 1980년대 이래 이백 만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톤즈는 그 중 피해가 가장 심한 곳이다. 그런 마을에 웃음꽃을 피운 당사자가 이태석 신부였다.

  한센병을 앓는 그들은 손발가락이 뭉툭했고, 더러 눈마저 먼 이도 있었다. 변변한 신발 하나 없고, 마땅한 옷가지조차 걸치지 못할 정도인 톤즈 사람들이었다. 보기 흉한 발모양을 손수 본떠 가죽 슬리퍼를 주문해 신기고, 지구촌 독지가들에게 도움을 청해 옷을 구해 입힌 것은 신부님이었다. 골절 입은 환자를 치료해주고, 눈먼 할아버지의 말 상대가 되어주는 것도 의사인 신부님이었다. 아이들과 힘을 합해 톤즈 강의 모래를 날라 마을 학교를 세웠다. 오염된 물 때문에 생긴 콜레라를 막고자 우물 또한 여러 곳에 팠다. 겨우 하루 한 끼로 연명하는 식량난을 극복하고자 사람들을 다독여 농경지를 일구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음악을 통한 교화였다. 웃음이 사라진 아이들에게 정감을 일깨우기 위해 35인조 브라스 밴드까지 결성했다. 학생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신부님은 손수 아이들에게 악기 연주법을 가르쳤다. 리코더와 기타를 배우는 학동들의 눈망울은 순수하고 진지했다. 유니폼을 멋들어지게 갖춰 입은 밴드 대열이 마을 중심가를 지날 때, 사람들은 믿기 어려운 환호성을 내질렀다. 꽃이 펴도 절망의 열매를 기약했고, 빛살 내리쬐어도 우기만을 예견했던 그들로선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 직접 보고 듣지 않아도 신부님의 기도는 이 한마디로 족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기도가 너무 빨리 하늘에 닿았을까. 신부님은 끝내 톤즈 마을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휴가차 한국에서 받은 건강 검진 결과는 말기 대장암이었다. 마흔 여덟이란 젊은 나이였다. 투병 끝에 신부님은 지난겨울 하늘로 떠나셨다. 웃음 가득한 얼굴로 봉사 활동 무대에 오른 신부님의 마지막 노래는 ‘꿈의 대화’였다. 

  방송사 취재진은 신부님 사진 몇 장과 투병 당시의 화면을 들고 톤즈로 날아갔다. 여전히 수단은 내전 중이고, 부족민들은 희생되고 있었다. 이태석 신부의 죽음을 전해들은 그들은 하나 같이 눈물을 흘렸다. 신부님 없는 톤즈는 희망 잃은 브라스 밴드 같았다. 한없이 낮아지고, 끝 간 데 없이 나누기만 했던 신부님 사진을 그들은 고이 받들었다. 누추한 집,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신부님 활짝 웃는 사진을 걸었다. 눈멀어 앞 보이지 않는 노인이 사진을 어루만지며 기도했다. 하염없는 눈물이 그 얼굴을 뒤덮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일한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다’라고 슈바이처 박사는 고백했다. 이태석 신부 역시 그런 행복한 길을 걸었다. 너도 나도 행복해지기를 꿈꾼다. 하지만 세속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범부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일 하기는 힘들다. 당장에 슈바이처박사처럼, 이태석 신부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 울컥한 감응이 제 영혼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신부님을 조명하는 의미가 되리라.

  이태석 신부에 대해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생활성서사, 2009) - 신부님이 쓴 아프리카 이야기이다. 너무 늦게 발견한 이 책, 서점마다 묻혀만 있다. 베스트셀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장바구니에 책을 담는 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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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셋 2010-06-07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마도 생전에 그렇게 사랑하셨던 톤즈 마을에서

바람이 되어 사람들의 땀을 식혀 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