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흐른다 범우 사르비아 총서 301
이미륵 지음, 전혜린 옮김 / 범우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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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포근하나 큰 이야기




  책에 대한 호불호는 사람마다 다르다. 심금을 울린다고 광고하는 책도 내겐 데면데면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고, 무슨 재미로 읽는지 모르겠다고 남들이 말하는 책도 내겐 흥미를 끄는 경우도 흔하다. 경험 다른 게 사람이니 공감의 진폭도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따라서 책 한 권에서 느끼는 감동 지수가 사람마다 다른 것은 ‘취향’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최근에 다시 꺼내든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범우사, 2000)도 딱 내 취향이다. 처음 읽었을 때처럼 주책없이 눈물 나진 않지만, 찔레 순을 씹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 나도 모르게 장면 장면을 곱씹게 된다. 

  간결한 문체와 소박한 이야기. 별 것 없는데 별 것으로 다가오는 것은 작가네 가족의 거짓 없는 인품 덕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시종 잔잔하고 포근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극동의 소년이 어떤 과정을 겪어 독일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잔물결 위의 나뭇잎이 되어 조곤조곤 이야기해준다.

  작가는 개화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 하에서 의학 공부를 하다 3.1운동에 연루돼 압록강을 건넌다. 만주와 중국을 거쳐 멀고도 낯선 독일 땅으로 망명하게 된 학자의 자전적 성장기는 드라마틱하다 못해 구구절절해야 소설적 기능을 다한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그런 기법을 쓰지 않는다. 그저 작가는 주변인을 섬세하게 챙기고 따뜻한 시선으로 품을 뿐이다. 마치 작가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사촌인 수암과 집안일을 거들어주는 구월이까지 개성을 불어넣어 포근히 보듬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도피성 외유를 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이 너무 담담하게 그려져 심심하게 느껴질 법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마도 강요된 휴머니즘이 아니라 책 속에서 절로 우러나는 인간 본연의 감흥 때문에 자꾸 책을 들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정갈한 내용에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내뿜는 자연발생적 휴머니즘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를 순간순간 깨치게 된다.    

  신식 공부를 하라고 배려하는 아버지와의 에피소드, 삼일 만세 운동에 연루되어 압록강을 건너야 하는 미륵에게 주는 어머니의 강단 있는 충고 등에서 절로 공감이 간다. 이토록 온화하고 정갈한 이들에게 시대적 정치적 격랑이라니!

  자전 소설인 이 책은 개인적이고 가족사적인 동시에 향토적이고 사회적이다. 독일식으로 봤을 때 이국적이고 낯선 이야기가 그들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라면 그 안의 정서는 시공간을 초월해 보편타당한 것이리라. 단순한 향수의 나열이 아니라 그것이 문학적 성과를 담보하였기에 감흥도 따라온 것일 게다. 완전한 정신적 성장을 거치기도 전에 어머니를, 조국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복잡했을 작가를 연민하는 것은 암울한 시대를 헤쳐 나갔던 작가에 대한 가장 큰 응원이다.  

  작품 발표 당시 유럽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폭풍전야 시기였다. 혼란한 이념을 넘어선 인간 본연의 순수성에 매료된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눈길을 끈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었다.  어려운 때일수록 단순해지고 소박해져야 답이 보인다는 것을 독일 사람들도 알아챘을 것이다.

  흔히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말한다. 향토적 서정은 물론이고, 자애 가득한 동양적 훈육관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미덕으로서는 손색이 없다. “네가 자주 말한 것처럼 시대가 변하였다. 과거는 새 문화에 앞서 갔다. 새 문화는 자주 분수를 모른다. 그러나 네가 그것에서 무엇을 배우려고 하든지 그것이 생소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야 하며, 또 언제나 온화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144쪽) - 포근하나 크게 이야기 하는 작가를 키운 것은 그의 부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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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21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륵, 지금까지 독일 내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작가였지요.

다크아이즈 2010-07-23 04:28   좋아요 0 | URL
미륵님이 그렇든말든 저야 주드님이 댓글 남긴 게 더 영광인걸요. 가끔씩 서재에 오면 주드님처럼 한결 같이 서재를 지키고 계시는 분들 땜에 친정에 오는 것 같은 이 기분~ 바다는 많이 컸겠지요? 여름 잘 견디시길.
 
허수아비의 여름 휴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오유리 옮김 / 양철북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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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타인의 감옥




   때론 피곤한 게 인간관계이다. 핸드폰이 수갑이나 족쇄처럼 보이고, 잡은 약속은 무거운 거름더미 지게가 되어 어깨를 짓누르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은 이러한 관계의 피로감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만만찮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비된다. 그것이 두려워 될 수 있으면 불필요한 만남을 미루고, 웬만하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소통에는 끼지 않으려 한다.

  혼자인 자유는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가.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고, 배달된 책을 순서 없이 읽거나, 베란다에 나가 풀죽은 로즈마리 화분에 물을 주는 것. 짧지만 짜릿한 쾌감을 보장하는 이런 순간은 사람 사이에서 부딪히는 소소한 상처를 충분히 위무하고도 남는다. 접대용 멘트도 필요 없고, 정돈되고 규격화된 언행으로 스스로를 검열하지 않아도 되니 이보다 더한 기꺼움이 어디 있으랴.

  그렇다고 관계없는 일상이 가당키나 한가? ‘타인이 곧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타인 없는 일상 또한 지옥이 아니던가. 시게마츠 기요시의 ‘허수아비의 여름휴가’(양철북, 2006)에 나오는 라이언 선생과 곤타 선생이 그걸 말해준다. 누구에게나 현실은 힘겹고, 일상은 따분하고, 관계는 피로하다. 그건 내 안의 감옥 못지않게 타인의 감옥 또한 작동하기 때문인데 어쩔까나, 그 감옥이야말로 삶의 진정성에 도달하는 과정이란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과도한 감정이입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모래와 안개의 집’ 비디오를 보면서 눈물을 훔쳤고, 뒤이어 ‘허수아비의 여름휴가’를 읽었는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화에서는 이란 출신 이민자 베라니 대령의 처연한 죽음 - 밀폐비닐 봉지를 덮어쓰는 자발적 죽음의 방식이 느꺼웠고, 예의 허수아비에서는 제 철 아닌 딸기를 사온 라이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아내 미치코의 마지막 향연에서 울컥했다. 전자가 타인이 주는 지옥의 극한점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타인 없는 지옥의 상실감에 대해 말해준다. 라이언 선생 같은 사람에겐 결코 타인이 지옥이 될 수 없다. 아니, 모를 일이다. 타인이 이미 지옥인 것을 일찍이 알아채고 그것을 넘어선, 타인 없는 경지에 이르는 방식을 설파하고 있는지도.

  슈지(라이언 선생님) 혹은 가즈(허수아비의 여름휴가)는 타인이 곧 지옥인 전형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 둘 다 그걸 넘어서, 각자의 대상에게 쏟는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돌이켜보건대 얼마나 학생 같지 않은 학생이 스승을 괴롭혀 왔고, 스승 같지 않은 스승이 우리들 곁을 스쳐갔던가. 애초에 그들은 인간적 고뇌조차 귀찮아한 부류였다. 하지만 라이언이나 허수아비 선생 같은 부류는 그 타인의 감옥들을 향해 최선을 다했다. 착한 사람에게 고통이 먼저 오고,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회한에 사무치는 게 삶이더라. 그리하여 너무 젊은 나이에 아내의 죽음이 기다리고, 예기치 않은 이른 탈모에 가발을 쓰게 되고, 스트레스로 두피 가려움증을 앓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가발을 벗어던질 수 있는 것도, 라이언 선생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거짓 없는 생일수록 불필요한 고뇌에서 빨리 자유로운 거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중년의 삶은 이러이러하다고 작가 시게마츠 기요시가 말할 때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책에서처럼 제 삼자의 말에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감정의 절제도 배울 때이고, 잡지에 실려 있지 않은 별자리 운세를 만나 광분하기도 하고, 타협과 굴종의 얼굴로 지리멸렬하게 살아있을 것을 주문당하기도 하고, 명퇴에 상처받아 소심한 뒷방 가장이 되어 자식에게조차 놀림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허수아비 신세가 되기도 하는 것이 중년이다.

  이 모든 것을 공감 가는 에피소드로 배치한 작가의 시선이 부럽다. 그렇다고 타인은 감옥이다, 라는 명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아직 더 많은 허수아비를 겪은 뒤에야   나는 천천히 타인의 감옥에서 걸어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라이언 선생처럼 타인 없는 세상이야말로 감옥이라는 진정성에 이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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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놀리아 - Magnoli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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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꽃 보다 상처         

              




  접시꽃이 진다. 떨어진 꽃잎들 켜켜이 익어간다. 순결하고 고고한 생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저 상처의 무덤. 오점 하나 없이, 소리 소문 없이 깨끗한 생을 마감할 것 같은  붉은 꽃들도 결국은 흉물스런 흔적을 남긴다. 꽃 떨어진 골목을 지나칠 때면 영화 매그놀리아가 떠오른다.

  매그놀리아(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 2000)는 목련꽃을 말한다. 하지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세상의 모든 상처 입은 꽃을 뜻하리라. 포스터 속 활짝 핀 꽃은 자세히 보면 누렇게 타들어 가고 있다. 수많은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로즈니, 릴리니 하는 꽃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많은 것도 이 상처의 키워드와 무관하지 않다. 아무리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도 지고 나면 흉물스런 상처를 남긴다. 생의 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곧 상처의 길을 보듬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렇다면 상처의 고향은 어디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는 그것이 우연이라는 메시지로 와 닿는다. 우리가 주고받는 상처의 대부분은 필연이 예견된 우연으로 생긴다. 생명력이 소진된 꽃은 어디선가 불어온 돌개바람에, 계절을 재촉하는 단비에 맞춤하게 떨어진다. 꽃이 지는 게 우주의 섭리라면 돌개바람과 단비는 상처를 가져올 우연이다. 필연으로 직조된 우주의 부산물인 그 상처는 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보듬어야 할 노력이다. 그런 눈으로 보면 꽃 지는 건 더 이상 서러움도 추함도 아니다. 본시 아름다움과 추함 둘 다 자연의 실체이다.

  우리 일상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꽃 핀 나무든, 꽃 진 무덤이든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눈을 키워 가는 것. 조금만 예민한 자라면 꽃 핀 나무만을 보고 감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꽃이 진 자리, 즉 생의 이면까지를 꿰뚫어 보는 눈이 없는 일상은 공허하다. 꽃이 진 땅까지 무심하게 내려다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키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누군가 소개해준 글에서 ‘모든 진실은 부뚜막에서 죽는다’라는 말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대부분은 가공된 것이란다. 부뚜막 도마 위에서 토막 나고, 절여지고, 튀겨진 채로 밥상에 오르기 십상이란다. 진정한 삶의 태도는 이런 가공된 상태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키우는 것이란다. 도마에 오르기 전 비리고, 꿈틀대고, 때론 썩어가는 이 모든 날것의 실체를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상처를 제대로 이해하고 보듬게 된다.

  비단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더라도 살다보면 사물이나 사람을 그릇 이해하고, 작은 오해로 타인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솔잎처럼 작고 뾰족한 우연들이 모여 상처가 된다. 그 상처가 풍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것을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고, 더러 글을 쓸 것이다.

  T.S 엘리엇이 말했다는 ‘좋은 작품은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라는 말은 적어도 내게 유효하다. 이해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전달될 수 있는 소통이야말로 날 것의 실체일 것이므로. 예를 들면 인간 내면에 감춰진 폭력성을 고발하는 것도 좋은 날것의 재료이다. 도처에 자리 잡은, 위선으로 충만한 인간의 폭력성 또한 상처를 낳는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상처는 떨어진 꽃을 볼 때처럼 사유의 확장을 보장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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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작은 그 여자 동학시인선 98
서숙희 지음 / 동학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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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일랑 시 한 편에




  후다닥, 할당된 영어 문항을 풀어 젖힌 아들 녀석, 문제집을 던지듯 밀쳐놓는다. 얼렁뚱땅 주어진 목표치를 해치우고 ‘개그 콘서트’를 쳐다보며 낄낄댄다. 세상 근심일랑 일찌감치 잊은 표정이다. 그래. 의무 방어전으로 해치우는 공부보다야 웃음 주는 개그 프로그램이 백 번 흥미 있지. 학원 도움 받지 않고 독학하려는 그 태도라도 높이 사야지, 하면서 풀어 놓은 문제집을 살펴본다. 어라차, 그럼 그렇지. 얼마 가지 않아 오답이 나온다. 살짝 문항지를 봤다. 녀석의 오답과 상관없이 제법 흥미 있는 내용이다. 행복해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가, 라고 묻고 있다. 수 년 간의 연구를 통한,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택해야 할 그 확실한 방법이 지문 안에 들어 있다. 

  어느 정치학자가 다국적 대학생들에게 각자 얼마나 행복한지 물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삶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데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 조사했다. 그가 알아낸 바로는 덜 행복한 사람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월급이 인상되어도 더 행복해질 수 없단다. 언제나 더 큰 욕심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만족하는 대신에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일 뿐이다. 고로 욕망을 버려야 행복해진다. 이 단순명료한 명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것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오지선다의 선택항에도 눈길이 간다. 이를 테면 건강을 유지하는 것, 좋은 직업을 갖는 것, 많은 친구를 갖는 것. 목표를 달성하는 것. 욕심을 줄이는 것 중에서 행복한 방법이 무엇인지 고르란다. 텍스트 안에서 답을 고르지 않고, 평소 생각으로 답을 고를 수만 있다면 개인의 인생관에 따라 각 항목 모두가 정답이 될 수 있다. 예상은 했지만 아들녀석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다 답 표시를 해 놨다. 이건 뭐 독해 따로, 자신의 인생관에 따른 정답 따로 택했다고 위안이라도 삼아야 할 판이다.

  열대야마저 겹쳐 잠 못 드는 이 여름밤, 원인은 무엇인가? 제 각기 다양한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위 영어 지문대로라면 욕망을 덜어내지 못한 때문이다. 자녀가 공부 해주기를 바라고, 가장의 월급이 오르기를 기대하는 욕구는 끝내 만족 없는 번민이 되어 평범한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니 위 지문 같은 학자는 역설하게 된다. 욕구를 버려야 행복이 온다고. 이럴 때 한 권의 시집이 위안이 될 수 있을까? 눈썰미 깊숙한 서숙희 시조시인의 ‘손이 작은 그 여자’(동학시인선, 2010)를 읽어 내린다. 내 안에 도사린 허욕의 실체를 점검하고, 조금씩이나마 그 무거운 덩어리를 덜어내려 애써본다.

  번민은 궁극적으로 욕망이 낳은 똥이다. 빨라지고 다양해지는 세상의 행보에 동떨어지고 싶지 않은 욕망은 똬리를 틀다 마침내 밤에 돋는 상처의 달맞이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상처 입은 영혼은 잠들지 않는다 / 새파란 칼날 위에 알몸의 생을 올려놓고 / 한 장씩 꽃잎을 피워 달빛을 베어 물'게 되는 것이다. 욕망의 거리에 내몰린 개별자는 그래도 곧추 직선을 꿈꾸며 스스로를 위무한다. ‘하루치의 밥을 위해 자존심도 유예’하고 ‘생존의 비린내 자욱하게 밴’ 하루를 ‘구부리고 굴’려 고단함을 잠재워 보는 것이다. 제상에 오른 꼬챙이 꿴 조기를 보면서 ‘길 아니면 가지 말고 곧은 것만 좇으라시던’ 말씀을 새겨보지만 그조차 ‘받잡아 따’르기가 어려운 건 내 안의 욕망덩이 때문이 아니던가.

  ‘무우에는 우-하고 고여드는 것이 있다 / 낡고 해진 것들을 둥글게 껴안아/ 따스한 즙으로 젖는 겨울밤의 아랫목’을 발견하고, ‘사람과 사람의 일이 단추를 풀고 채우듯이 / 그렇듯이, 서툴지도 완강하지도 않다면 / 그렇듯 담담하고도 사소한 일’임을 안다면, 그깟 내 안의 허영 한 덩이를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팽팽하게 둥글던 보름달 보내고 열이레 쯤 되는 달밤이 오면 ‘그대와 나 사이에 놓인 아득한 은유 같은’ ‘기우는 저 쓸쓸한 이치를’ 수긍하게 되리라. 행복을 갉아먹는 저 욕망 덩어리가 쉬 깨지지는 않겠지만 그럴수록 그 찌꺼기, 시 한 편에 곱게 씻어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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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7-2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
서툴지도, 완강하지도 않은
그렇듯 담담하고도 사소한 일이지만,
그 안에서 단추를 풀고 채울 때마다 번민하는 것이 인간이죠. ^^

저도 '무우'가 '무'로 표준어화된 것에 엄청난 불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하고 고여드는 것을 빼버린 나쁜 학자들에게 욕을 보냅니다. 더위 엄청 먹어라!!! ^^

까망 여사님의 더위까지도 다 쫓아보내 드릴게요. ^^

다크아이즈 2010-07-23 18:28   좋아요 0 | URL
앗, 글샘님 제 별명이 한 때 까망여인, 이었다는 걸 어째 아시고? 팜므 느와르(제 전공이 불문학입니다.)라는 제 닉네임 보고 팜므 파탈이 떠오르는지 어떤 분은 무섭다고 하시던데, 온순한 제 닉네임은 까망여인(앗, 까망여사가 더 현실적이네요.)이라는 것. 글샘님 알아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

알라디너분들, 저 팜므 느와르이지, 팜므 파탈 아니랑께요~~

무우, 가 무가 된 것은 저도 심히 서운해요. 저 같은 갱상도 사람들은 무우, 할 때 뒷글자인 <우>자에 액센트를 주는데, 서울 사람들은 <무>에 강세를 주다보니 뒷글자 <우>를 있는 듯 없는 듯 무시하다 보니 그런 결과가~ 실제로 <무우>는 <무>보다는 <우>의 강세에 더 의미가 있는 말일 터인데... 정말 아쉬워요. <우~~>의 깊은 뜻을 놓친 그 학자들,글샘님 더위까정 몽땅 받아라, 우쒸!
 
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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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결에 뉴스가 들린다. 알람으로 맞춰놓은 텔레비전 아침 일곱 시 뉴스. 천안함 침몰 현장에서 수거한 알루미늄 조각이 너무 작아, 외부 공격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물로 단언할 수 없다는 국방장관의 말을 전해준다. 여기까지만 들었으면 좋으련만 해군참모총장이 보복의지를 밝혔고,이에 장관마저 ‘동의한다’고 말했단다. 물론 이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고 싶진 않다. 분노하는 국민들에 대한 심정적 대변쯤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원인 규명도 명확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이런 멘트는 불편하기만 하다.   

  그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 (이후, 2004)이 오버랩 된다. 우리는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에 대해 각자의 방식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하는 그 타인의 고통은 항상 연민이나 배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 고통은 유흥거리가 되어 우리 눈을 유혹하거나 이미지 조작의 실체가 되기도 한다. 전쟁 있는 곳의 육체적 고통이 그런 흥밋거리와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고, 우리가 그런 전쟁의 불필요성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이 책은 경고한다. 전쟁에 수반되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수잔 손택은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인류는 전쟁의 역사였고, 그것은 남성성의 욕망 속에 전쟁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손택은 보고 있다. 종군 기자들에 의해 유포되는 전쟁의 참사 현장은 사실성을 담보할지는 모르지만 진실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타인의 고통마저도 우리는 소비 지향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한 편의 자극적인 영화 같은 전쟁의 이미지들은 관음증적인 소비 주체자들의 구미를 끌어당긴다.

  전쟁 종군 기자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의 사진도 실제로는 이미지 조작을 한 것도 있다. 수잔 손택은 통찰한다.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쟁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 중 아군의 육체적 고통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강화에 한몫을 담당한다. 갈기갈기 찢긴 사체나, 팔다리가 잘린 병사들, 입 돌아가고 한 쪽 눈이 사라진 고통 받는 피사체가 그들이 아닌 내 쪽 사람이라면 우리는 동정보다 분노가 먼저 인다. 저런 죽일 놈들, 당장 나아가 더한 복수를 하리라. - 이런 인지상정의 정서를 이용하는 쪽은 다름 아닌 집권자들이다. 그들에게 국민들의 순수한 분노야말로 집권 이데올로기적 연대를 강화하는 데 더할 나위없는 보탬이 되는 것이다. 수잔 손택은 말한다. 이런 순수한 분노야말로 무지하고 천박한 것이라고. 

  이데올로기의 강화 못지않게 전쟁의 이미지가 주는 또 다른 왜곡은 유흥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사진이란 텍스트가 이미지 조작에 쓰인 것은 아니었다. 각종 전쟁 사진이나 다큐멘터리의 출발은 당연 인류에게 말 걸기, 라는 순수성에 있었다. 전쟁의 참상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이었을 게다. 그리하여 인류 공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라도 전쟁이란 괴물을 찬미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 전쟁 사진의 용도는 변질되었다. 타인의 고통은 나와 무관한 오락거리가 되어 버렸다. 구경꾼으로 전락한 나는 타인의 시련과 고통을 즐기기에도 벅찬 것이다. 왜냐면 다양한 미디어가 전하는 그 고통들은 나와 먼 동네의, 한 편의 영화 같은 볼거리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과 전쟁에 대한 고통은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무지가 영혼을 잠식하는 동안, 우리는 전쟁 참상의 심각성을 놓쳐버리게 되었다. 보복을 꿈꾸는 전쟁이야말로 또 다른 고통을 양산할 뿐이다. 세상 갈등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소통을 모색해나가려는 모든 시도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다. 전쟁의 본성에서 인간 연민의 한계를 채찍질하는 이 책이야말로 전쟁의 불필요성을 낮은 목소리로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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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미 2010-06-09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이 근처 미술관에 있는 작은 도서관 방에서 어떤 사진가가 수잔 손택을 찍은 사진들이 가득 담긴 책을 봤어요. 그 사진들을 통해 수잔 손택이란 여자를 맘껏 봤죠. 흰머리를 너덜 너덜하게 두고도 멋져 보이는 여자라고 생각했죠.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신가봐요...

다크아이즈 2010-07-23 04:50   좋아요 0 | URL
맞아요. '흰머리 너덜너덜'이 손태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보인다는 것. 갑자기 그 미술관이 궁금해진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