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헵번의 옆모습      

 

    

 

  <유섭 카쉬(Yousuf Karsh) -  오드리 헵번 > 

 

 

 

  요즘 젊은 연예인들의 얼굴은 똑 같다. 갸름한 달걀형 라인에 이마는 봉긋하고 콧날은 오뚝하며 눈은 앞트임을 곁들인 쌍꺼풀이 대세이다. 눈썰미 젬병인 나 같은 이는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아 갑갑하기만 하다. 아이돌의 노래나 춤을 보면서 활력을 얻고 싶은데,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안 되니 재미가 반감 될 수밖에.

 

 

  개인적으로 나는 달걀형 얼굴에 대한 환상이 있다. 이목구비가 아무리 뚜렷해도 턱 선이 곱지 않으면 내 기준의 미인 목록에서 탈락시키곤 했다. 이마 좁고, 광대뼈 나오고, 턱 선이 발달한, 전형적인 몽골리안 계통의 내 얼굴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 그런 생각이 자리했는지도 모른다. 한데 무개성한 브이자 얼굴이 유령처럼 뒤덮는 세상을 보면서 조금 달라졌다.

 

 

  인물사진의 대가 유섭 카쉬(Yousuf Karsh)가 찍은 오드리 헵번의 옆모습을 오래 들여다 본 적이 있다. 흠잡을 수 없는 오드리 헵번이지만 예의 내 기준에 의하면 그녀가 미인일 리 없었다. 사각 턱에 가까운 얼굴형 때문이었다. 그녀가 현재 우리 연예계에 진출했다면 턱 선 교정은 피할 수 없는 강요가 되었을 것이다. 한데 들여다볼수록 무한 애정이 생긴다. 발랄한 듯 기품 서린 오드리 헵번의 숨은 ‘강단’이 그녀의 턱 선에서 보이는 것이다. 진주 품은 조가비처럼 어금니 꽉 깨문 외유내강이 그녀의 턱 선에서 읽히는 것이다.

 

 

  배우로 이룬 꿈을 유니세프 친선대사라는 사회적 가치로 환원한 그 행보가 각진 턱에서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명성을 개인적 목표보다는 사회적 이타심과 결합하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의 건전한 결정이 아무리 즉흥적이라도 해도 삶에 대한 깊은 사유가 전제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헵번식 사유의 출처를 나로서는 그녀의 강인한 턱 선에서 찾고 있었던 것. 그녀가 세상을 뜬 지 이십 년이나 지났지만 우아하고 결단력 있는 그녀의 옆모습은 누군가의 내면을 자극하는 강단 있는 매개물이 되어 줄 것이다.

 

 

                  <헵번의 다른 옆모습, 작가 몰라서 못 가져옴>

 

 

<마지막 크리스마스 때 오드리 헵번이 자녀들에게 읽어 준 시>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tm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네 자신이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며 걸어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고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샘 레벤슨 (Sam Levenson) : Time Tested Beauty Tips

 

 

 

 

 

 

 

 

 

 

 

 

 

 

 

 

 

2. 코트의 진실

 

  델포이 아폴론신전 진실의 벽엔 탈레스 혹은 킬론이 말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가 새겨져 있다. 이 금언이 대중성을 확보한데는 자신의 철학 근간으로 이 말을 애용한 소크라테스의 공이 크다. 어쨌든 탈레스에 의하면 남에게 충고하는 일은 쉽고,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들다고 했다.

 

 

  프로이트 역시 자신을 아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나보다 타인이 나를 잘 알고 있으며, 역으로 이웃보다 내가 이웃을 잘 아는 수가 있다고 했다. 대체로 인간은 나 자신보다 타인을 분석하는데 탁월한데 이는 반쪽짜리 분석일 뿐이라고 보았다. 나를 포함한 분석이어야 제대로 된 정신분석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마나 자신을 모르는가는 프로이트 자신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여름휴가 때 한 청년을 알게 된 프로이트는 그와 친해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청년은 곧 산책 가자는 프로이트의 제안을 거절했고, 아내가 오기로 했으니 저녁마저 먼저 먹으라며 피했다. 다음날 부부의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을 때 프로이트는 들뜬 맘으로 청년의 식탁으로 갔다. 부부 자리 맞은편에 의자 하나가 마련되었는데, 그곳엔 두툼한 코트가 걸쳐 있었다.

 

 

  분석의 대가인 프로이트의 결론은 이러했다. ‘나는 이제 당신이 필요 없고, 여긴 당신 자리가 없습니다.’ 프로이트의 이 사례는 ‘정당한 오해’에 대한 진실을 보여준다. 오해를 살 만한 행동에 그 어떤 의도가 없었음을 항변해도 당한 쪽에서는 상대방의 속을 다 읽어낼 수 있다. 이 경우 진실을 밝히기라도 한다면 청년은 모욕을 느끼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이를 ‘내적 부정직함’이라고 불렀다.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프로이트. 하지만 타인에 앞서 나를 알려면 이 정도의 따끔거림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 자신이 걸쳐 놓은 코트 때문에 상대를 아프게 하는 나는 상대가 눈치 채기 전, 가만 의자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 코트 걷은 그 자리엔 상처 받은 프로이트의 엉덩이를 데울 방석을 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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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2-26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팜님팜님팜님, 오랜만이어요, 오랜만!
저 2학기 미술시간에 첫 과제가 소묘였는데, 바로 저 사진을 그렸어요.
유섭 카쉬의 사진이요. 얼마전 EBS에서인가요, 세기의 여인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해주었는데 노년의 오드리 헵번이었어요. 그녀가 유니세프에서 활동한 것은 알았지만 그녀의 주름진 얼굴은 영상으로 처음보아 놀랐어요. 늙어서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요. 나이 들어서도 그렇게 예쁜 기품을 뿜어낼까요. 얼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그러니.

프로이트는 적잖이 당황했겠어요. 자신을 알다라... 오늘 두번째 단락은 꽤 어렵네요.
두고두고 생각해봐야 겠어요.

다크아이즈 2013-03-01 17:32   좋아요 0 | URL
이진님 새학기가 되어서 많이 바쁘지요?
새학기 새친구 잘 맞이하시고 공부와 글도 병행하려면 체력 보충도 하시고.(엄마 마음 ㅋ)
울 아들도 기숙사 들어갔어요. 엄마는 뒷전이고 새로운 룸메랑 인사 트느라 정신 없더군요. 그게 정상이니 웃으며(맘으론 울며) 돌아섰네요.
카쉬 사진은 자꾸 보게 되어요.

프로이트는 너무 빠지면 혼미해져요. 적당히 ㅋ


순오기 2013-02-2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이 말하는 EBS프로그램 나도 봤어요.^^
오드리는 늙어서도 아름다웠는데, 오드리의 행보를 증언하던 로져 무어는 예전의 그와 거리가 멀게 느껴저 안습이었어요.ㅜ
나보다 이웃이 나를 정확하게 안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어요. 나를 아는 것은 영원히 미해결의 과제일 듯해요.

다크아이즈 2013-03-01 17:36   좋아요 0 | URL
늙어서 아름다운 헵번은 정말 맞는 말이에요.
순오기 언냐도 나이들수록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될거라 확신해요.
나보다 더 나를 많이 알 수도 있는 타인이란 걸 생각하면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지 뭡니까. 프로이트는 불편하지만 극복해야할...

마태우스 2013-02-26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망여인님 과거엔 정말 달걀형 얼굴에 대한 로망이 있었지요. 요즘은 어떤 게 대세인지 잘 모르겠네요. 암튼.. 헵번을 보니까 턱선은 눈에 안들어오고, 그저 속눈썹이 참 길구나 싶네요. 속눈썹 길면 미녀가 많죠...

다크아이즈 2013-03-01 17:39   좋아요 0 | URL
여전히 달걀형이 좋긴 해요. 하지만 마카다(!)그러니 어리둥절하고 시큰둥해지지 뭡니까.
전 얼굴형에 집착하다 보니까 늘 헵번의 턱선이 맘에 걸렸거든요.
근데 그 강단있어 보임이 헵번의 이타성을 완성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속눈썹이 저리도 알흠다우니 턱 선은 양보할게요. ㅋ

프레이야 2013-02-27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드리 헵번, 나이 들어가면서 더 아름다운 여인으로 저도 기억하고 있어요.
자녀에게 들려준 저 시도 다시 보니 정말 붙여두고 매일 읽어라도 봐야할 글이라 싶어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진실을 말하면 서로 다치게 되는 경우도
있는지라 오늘도 저는 불편한 진실을 묻어두고 그냥 가라앉혀야 할 것 같아요.
좋은하루~~ 팜므님^^

다크아이즈 2013-03-01 17:44   좋아요 0 | URL
저도 헵번이 낭독한 시를 새겨요.
근데 정작 가까운 식구들에게는 실천이 잘 안 된다는...
하기야 타인을 대하듯 식구를 대하면 그것도 이상하겠지요? ㅋ

프레님 말씀대로 불편한 진실은 성찰의 거울로 삼을 일이지 타인에게 적용하면 안 된다, 그 말씀이지요? 맘에 새길게요.^^* 봄이 오고 있어요~~

드림모노로그 2013-02-27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드리헵번이 자녀들에게 들려 준 시 무척 좋아해요
사회적 이타심에 대한 사유를 오드리 헵번의 바로 옆선, 그 중에서도 턱선에서 ㅎㅎㅎ
매우 새롭습니다 ^^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ㅎㅎ
아름다움이란 몸과 마음에서 품어내는 강인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오드리 헵번을 보면서 생각해봅니다 ^^
사회적 이타심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너무 황홀한 조화인데요 ㅎㅎ
팜므,느와르처럼요 ㅎ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ㅎㅎ

다크아이즈 2013-03-01 17:46   좋아요 0 | URL
역시 드림님 비롯 이 시 좋아하는 분들 많군요.
저도 맘에 새기지만 실천하긴 넘흐 어렵습니다.
제가 좀 엉뚱한데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들지 뭐예요. ㅋ
이타심과 프로이트의 조합, 뜻하지 않게 낯설게 하기 기법이 되어버렸네요.
드림님도 봄 맞이 잘 하세요.^^*

세실 2013-02-27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제 얼굴이 왜 여기에? ㅎㅎ
참으로 닮고 싶은 여인이지요.
나이들수록 더 아름다운 헵번. 사각턱인거 지금 알았어요. ㅋ

다크아이즈 2013-03-01 17:48   좋아요 0 | URL
역시 센스쟁이 우리 세실님^^*
헵번보다 젊은데다 일단 헵번은 먼 길 떠났으니 세실님 윈!!!
전 얼굴형에 관심 많다 보니 헵번만 보면 그게 맘에 걸렸어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 늦게 그 턱 선의 매력이 보이지 않겠어요. ㅋ

꿈꾸는섬 2013-02-2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전 얼굴형만 달걀형이에요. 나머진 ㅜㅜ 오드리햅번의 아름다운 얼굴도 좋지만 시가 정말 좋아요.^^

다크아이즈 2013-03-01 17:50   좋아요 0 | URL
와, 꿈님 제가 바라던 이상형을 님에게서 찾다니...
실은 요 얼굴형 달걀형이면 얼마나 유리한데요.
부드러워보이고, 이목구비 조금 손해나도(?!) 얼굴형이 커버해준다니까요.
전 다시 태어나면 달걀이, 아니 달걀형 얼굴을 갖고 싶어요. ㅋ

2013-03-01 0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01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왼손잡이 로망

 

  

 

 

 

 

 

 

 

 

 

 

 

 

 

 

  중학교 2학년 때 내 짝지는 왼손잡이였다. 상냥하고 눈치가 빨라 선생님들께 귀여움을 받았다. 그녀가 선생님들께 관심을 받은 또 다른 이유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왼손잡이에 대한 시선이 썩 호의적인 시절이 아니었다. 왼손잡이라도 글씨만은 오른손으로 썼다. 품위 있는 학문의 길에 흠집을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기성세대의 생각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짝지는 희소가치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짝지는 공책을 오른쪽으로 90도 각도로 돌려놓은 채 옛사람들처럼 위에서 아래로 글씨를 써내려갔다. 오른손잡이처럼 바르게 공책을 놓고 쓰면 왼손바닥에 연필 자국이 새까맣게 묻을 뿐만 아니라 노트에도 글씨 얼룩이 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들은 짝지 곁을 지나칠 때마다 지휘봉으로 꺾인 노트며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얌마, 오른손으로 바꿔 써!’ 한 마디씩 하는 선생님의 말씀은 시비나 훈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애정과 관심을 향한 것이었다. 짝지는 그 상황을 매번 즐겼고,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질투 어린 시선으로 그 상황을 바라보았다. 공부는 나보다  못한 짝지가 그토록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는 건 오직 왼손잡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이었으니 나남할 것 없이 젊고 패기 넘치는 남자선생님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한데 남선생님들의 관심은 왼손으로 글씨 쓰는 짝지에게만 가 있었으니 질투와 부러움은 당연했다. 게다가 눈치 빠른 짝지는 오후에 좋아하는 선생님의 수업이 있으면 교복 블라우스를 빨아 입을 정도로 유난을 떨었다. 내가 보기엔 그 교복이 그 교복인데 짝지에게는 안 빤 교복과 빤 교복은 달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노골적으로 그 상황을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짝지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다른 선생님을 좋아했고, 무엇보다 짝지와 무척 친했기 때문에 오직 짝지 같은 상황을 겪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이면 짝지 따라 노트를 비스듬히 놓은 채 왼손 글씨를 써보기까지 했다. 심하게 왼손에 어눌한 내 왼손 글 솜씨가 늘 리 없었다. 여전히 남선생님들의 관심은 짝지에게만 가 있었고, 내 왼손잡이 로망은 그렇게 한 계절 실습으로 끝나고 말았다.

 

 

  왼손잡이가 못 된 나는 아직도 그것에 대한 로망이 남아 있다. 해서 아들과 딸이 왼손잡이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알았을 때 은근히 서운하기까지 했다. 왼손잡이가 못 되어 선생님들께 관심 받지 못한 나를 아이들에게 투사하고 싶은 욕망이 은연 중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한때의 경험 한 자락이 평생 자기 인생관에 녹아날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아직도 나는 새로운 왼손잡이를 만나면 ‘글씨도 왼손으로 써요?’ 라고 묻는 버릇이 있다. 상대의 대답이 아니라고 하면 괜히 실망하게 된다. 왼손잡이는 나의 로망이었고, 여전한 로망이기도 하다.

 

 

  한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녀가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건 왼손잡이어서 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겠다. 예쁘고 상냥한데다 영민했던 짝지는 사람 마음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염세적이고 냉소적인데다 소심하고 어리바리한 모범생이었던 나에 비해 예쁘고 상큼하고 털털하고 눈치가 빨랐던 짝지를 좋아하지 않았을 선생님이 어디 있었겠는가. 아직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을 어린 나이였기에 나는 짝지의 ‘관심 받음’이 단지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제 밥 그릇 제가 챙기고, 제 사랑은 제가 얻는다. 짝지가 누린 사랑과 관심은 제가 가진 역량 때문이지 결코 왼손잡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제 역량을 발휘하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되지 극히 일부분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각설하고 그래도 왼손잡이에 대한 내 긍정의 로망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 고맙긴 하다. 아직도 나는 왼손잡이를 만나면 그들이 글씨마저 왼손으로 쓸까, 궁금해진다. 내게 진정한 왼손잡이란 글씨까지 왼손으로 쓰는 자여야만 한다. 거기다가 상냥하고 영민하기까지 하다면 왼손잡이에 대한 나의 로망은 완성되는 것이다.

 

 

 

 

2. 인사

 

<파울 클레 - 인사>

 

 

  술을 잘 못 마시더라도 술잔을 들어야 할 경우는 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작은 행동 때문에 더 좋아진 적이 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옆자리에 앉게 된 그분은 건배가 있을 때마다 내가 든 술잔 높이보다 낮은 높이로 자신의 술잔을 부딪는 것이었다.

 

 

  우리사회처럼 은연 중 위계질서가 몸에 밴 곳도 없는데 연배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분이 내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처음 한두 번은 재미로 그러나 싶었는데, 가만 보니 몸에 밴 자연스런 제스처였다. 조그만 데서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나는 세 번째 잔부터는 무조건 그분보다 낮게 들었다. 그분이 눈치 채지 않게 속으론 끙끙댔다. 한 편의 코미디 같은 그 상황이 싫지는 않았다.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의 동판화 중에「인사」라는 작품이 있다. 키가 크고 군살이라곤 없는 두 남자가 서로 낮게 인사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고개를 숙인다. 허리를 있는 힘껏 앞으로 꺾어 바닥과 친구가 될 정도다. 하지만 얼굴은 서로의 옆모습을 향해 치켜들고 있다. 서로 계급이 낮다고 생각해, 한껏 고개를 숙이긴 하는데 상대를 의식하고 눈치를 보느라 차마 얼굴까지는 숙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까지 낮아진 게 아니라 몸만 낮아지는 인사의 겉치레에 대한 풍자로 읽힌다.

 

 

  관계란 상대적이다. 상대 쪽에서 ‘적의 없음, 배려할 것임. 군림할 의향 없음, 낮아질 것임, 친구가 되고 싶음’ 이런 신호를 보내오면 내 쪽에서도 당연히 더한 우호와 존경으로 상대를 대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지나치면 클레의 그림처럼 형식적인 것이 되지만 맘이 원하는 대로의 배려는 무척 자연스럽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눈높이는 상대와 맞추고 술잔은 낮게 들어보자. 단, 고개를 지나치게 숙일 필요는 없다. 비굴을 감춘 게 들키거나, 과장된 마음이 드러나면 명징하던 술잔소리도, 맞춤한 눈높이도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리니. 술잔 낮게 들고, 눈높이를 상대에 맞추러 오는 세상의 모든 친구들과 건배를!

 

 

 

 

3. 용서의 시효

 

 

 

 

 

 

 

 

 

 

 

 

 

 

 

 

 

                                                                               

 

                                                           누구나 실수한다. 실수나 상처가 당사자들에게 큰 아픔이긴 해도 그 자체가 문제 되지는 않는다. 언제나 그 후가 더 중요하다. 사람이란 게 간사해서 받은 상처는 잦고 깊고, 준 상처는 드물고 얕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용서는 쉽게 받고 싶고, 용서 하기는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준 상처 중 가장 잊히지 않는 건 건 얌전한 모범생을 순간의 판단 잘못으로 자전거 도둑으로 몬 경우였다. 그 아이와 부모의 눈빛이 나를 용서하지 않았기에 그건 아직 미완의 사죄로 남아 있다. 그들의 분노와 응어리가 현재진행형이라면 당연히 내 사죄 또한 그러해야만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용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만 그 역시 내가 판단할 것은 못 된다.

 

 

  영화「밀양」에서는 신이 용서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는 피해자를 또 한 번 수렁으로 빠뜨리고,「내가 살인범이다」에서는 공소시효가 면죄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는 피해자와 관계자를 농락한다. 출옥한 범인이 ‘봐라, 법과 대중이 날 이렇게 용서하는데, 당사자인 너희들만 용서 못하고 있잖아.’ 라는 뻔뻔함으로 용서의 칼자루마저 자신이 가지려 한다.

 

 

  용서의 시효는 가해자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용서의 아버지는 시간이다. 정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하면 피해자가 필요한 시간만큼 기다려주는 게 양심 있는 자의 태도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잘못을 해놓고도 용서의 시효마저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경우도 있다. 자숙 기간이나 용서의 시효는 한 사흘쯤이면 충분한 것일까. 용서의 기간이 단축되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급기야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조차 몰라 반문하기까지 한다.

 

 

  법적용서는 공소시효가 정하고, 하늘나라에서는 신이 용서한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엔 시간이 용서한다. 그 시간을 정하는 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피해자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스스로를 성찰할 일이다. 그것마저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다른 피해자인척 하는 건 상처 입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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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2-24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왼손잡이는 흔하지 않아서 보면 정말 신기해요. 글씨까지 왼손으로 쓴다면 더 신기하구요.
상대를 배려해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정말 불편해서 관계의 개선이 어렵더라구요.
용서의 시효는 시간이 맞는 것 같아요. 상처가 아물고, 이해가 될 시간이 흘러야, 용서도 가능해지는것 같아요.^^

다크아이즈 2013-02-24 15:21   좋아요 1 | URL
꿈꾸는섬님 맞지요? 전 아직도 왼손잡이 로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내심 아이들이 왼손잡이로 태어나길 기대했다니깐요. ㅋ
왼손으로 글씨쓰던 이쁜 내 친구 생각이 나네요.
맞아요. 배려하면 군림하려는 자는 과감하게 끊어야 하고, 용서의 시효는 시간이란 것 동의해줘서 감사해요. 봄이 오고 있습니다. ^^*

프레이야 2013-02-25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저는 이 아침에 용서,라는 말을 곱씹어봐요.
영화 '밀양'의 소회는 저도 몇 년 전 영화리뷰로 길게 쓴 적이 있어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비슷한 테마구요. 용서, 과연 누구의 몫일까요.
시간이 해결해줄까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결정적으로 풀릴 수 있는
진심이 느껴져야 해결되는데 그게 또 쉽지 않으니.
사회적인 문제로 확장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구요.
어려운 문제네요. 개인적 문제로는 용서라는 말을 담는 것 자체가 안 맞는 것
같아요. 상대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는 문제이니.
며칠 바빴네요. 팜언니, 오늘도 행복하게요~~~

다크아이즈 2013-02-25 20:37   좋아요 0 | URL
프레님은 언제나 제가 생각치 못한 부분을 일깨워주시네요.
맞아요. 어쩜 시간 보다 더 필요한 게 진심이 아닐까 싶어요.
시간이 지나다보면 제 상황의 껄끄러움이 희석되고, 인간의 진심이란 게
원래 성선설에 가깝다면 자연스레 교감되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희망의 시간을 말하고 싶었어요. 그 진심을 얻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개별자끼리는 용서라는 것보다 상호 이해가 더 맞겠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되지요? ^^*

순오기 2013-02-26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주에서 말씀하신 왼손잡이의 로망이 멋진 글이 되었네요.
용서에 대한 것도 그렇고요.
건배할 때 아무 생각없이 잔을 들었는데 그렇게 배려하는 분도 있군요.
세상을 사는 일은 항상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걸 깨달으며 감사를... ^^

다크아이즈 2013-02-26 17:21   좋아요 0 | URL
순오기 언냐님, 멋진 글까진 아니고 정리하고픔 맘은 있었어요.
용서는 시간과 마음의 문제이니 역시 차분히 되돌아 볼 필요가 있겠네요.

세상엔 무척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타인은 언제나 내 스승이란 진리... 벅차거나 벅차오르거나 ^^* 크~

inhye6173 2013-03-07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왼손으로 글쓰고 밥먹고 다하는데..! 로망이시라니깐 뭔가 뿌듯해요 잘읽고가요!

종이달 2021-10-29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1. 돌아오지 않을 것들

 

 

일반적으로 여행의 끝은 ‘돌아옴’에 있다. 그 덕에 우리는 당장이라도 여장을 꾸려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 돌아 올 희망의 기미는 여행을 여행답게 하는 온전한 힘이다. 하지만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이라면? 맥없이 너털거리는 발자국이요, 오래 쌓인 무덤 속 먼지다. 그런 여행이라면 행선지도 궁금하지 않고, 행장 꾸리는 손끝은커녕 콧노래도 곁에 두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두고 돌아오지 않는 눈부심이라고 비에 젖은 꽃잎처럼 말하는 시인이 있다.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 첫 여자도 첫 키스도 첫 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 얼마나 눈부신가 / 안 돌아오는 것들’. 「여행」이란 편도 차표를 끊은 이진명 시인은 사그라지는 것들의 씁쓸한 찬란함에 주목한다. 차표 쥔 시인의 손끝에 매달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새벽을 맞는다.

 

 

모든 만남은 여행의 다른 이름이다. 반짝이는 모래알, 뭉툭한 자갈돌, 설레는 무지개, 번득이는 번개처럼 여로의 꽃은 피고 진다. 애초에 질 꽃이라면 씨앗 심지 않으면 좋으련만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순정한 영혼들은 만남이란 꽃을 피운다. 하지만 꽃의 길은 필연적으로 희거나 검은 상처를 드리운다. 돌아오지 않거나 돌아올 수 없는 그 흔적들이 뭉쳐 삶을 단련시킨다. 첫 슬픔이거나 첫 매혹이었을 그것들은 때가 오면 담담하게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여행이란 꼭 돌아와서 좋은 것이긴 하지만 가끔은 돌아오지 않아서 찬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의혹으로 흔들리는 누군가의 눈빛을 불편하게 읽는다거나, 닿을 수 없는 협곡 같은 절망이 그대 입술에 자주 밴다면 이제 당신은 여행을 끝낼 시점이다. 돌아오지 않을 그 꽃잎일랑 놓아주고, 새로운 씨앗을 틔우는 여행을 꿈꿔도 좋은 것. ‘첫’이라는, 안 돌아오는 것들의 묵직한 축복을 위해 시가 있고, 씁쓸함이 있고, 잠 못 드는 새벽이 있는 것이다.   

 

 

 

 

  2. 더는 연습

 

 

소학에 이르면 사람에게는 세 가지 불행이 있단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 하는 것이 그 첫 번째요, 부모형제의 권세를 빌어 좋은 벼슬을 하는 것이 두 번째 불행이며, 재능이 높아 문장을 잘하는 것이 세 번째 불행이다.

 

 

소학 말씀대로라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세 가지 불행의 이유에 하나도 가닿지 않으니. 하지만 불행할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고 그것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때론 불행해도 좋으니 저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해봤으면 하는 맘이 든다. 특히 세 번째 구절, 문장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이룰 수만 있다면 불행이 오기 전 자기 관리를 잘 해 불행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면 되지, 하는 싱겁고도 유치한 상상을 하게도 된다. 

 

 

하지만 옛말 그르지 않다고 전적으로 소학의 저 말씀을 신뢰한다. 어린 나이에 성공하면 편한 일상은 누릴지 몰라도 정신적 황폐를 곁에 두기 쉽다. 이른 성공을 이룬 예술가들이 요절하거나, 그 말로가 좋지 않은 경우가 하 얼마이던가. 집안 배경 덕에 이룬 표면적 성공 역시 본받을만한 건 못된다. 재벌가의 볼썽사나운 이권 싸움이 가십거리가 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문장 재주가 좋아도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내면에 소홀한 채 자신의 능력에만 기댈 경우 시샘의 상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존경의 대상은 될 수 없다.

 

 

이제껏 내 허영심 때문에 문장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되고픈 바람을 버리지 못하고 살았다. 결코 이룬 적 없는 그 욕심을 점차 내려놓도록 연습해야겠다. 맛 나는 요리엔 많은 재료가 필요치 않다.  훌륭한 맛을 내려고 이것저것 재료 욕심을 내다보면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좋은 재료를 쓰겠다는 욕심을 뺄수록, 잘 쓰겠다는 조바심을 버릴수록 원재료에 가까운 맛을 얻는다. 음식이든 글이든 더해서 얻어지는 것보다  덜어서 내는 맛이 더 원초적이고 담백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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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02-20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 님, 이 페이퍼 정말 좋네요. 닿을 수 없는 협곡 같은 절망, 햇살이 부서지는 소리가 덜컹이는 것 같은 표현이에요.

다크아이즈 2013-02-24 12:02   좋아요 0 | URL
샤이닝님의 글이 제게 주는 신선한 충격에 비할까요. 알라디너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건 잘 읽고 잘 쓰는 분들이 너무 많아 매일매일이 충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처럼 될 수는 없지만 자극을 얻기 위해 이렇게 뒷전이나마 서성입니다. 샤이닝님이 찾아주셔서 몸둘 바를^^*

세실 2013-02-21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핀 만남의 꽃 즐거우셨나요?
전 팜므님이 먼길 와주셔서 행복했습니다.
제게 여행은 설레임입니다^^
오늘은 저도 여행한 느낌 ㅋ

다크아이즈 2013-02-24 12:14   좋아요 0 | URL
세실님 즐겁다 마다요. 그 만남에 취하느라 이제 알라딘 문을 두드릴 여유가 생겼다는... 저질 체력이라 조금 앓느라 마구 잤답니다.
그날 넘 무리하신 세실 님 덕에 전 편한 여행했지만 몸살 나셨을 거예요. 그저 고맙다는 말 밖엔...
제게도 여행은 설렘입니다. 특히나 세실님처럼 미인이 친절할 경우엔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라로 2013-02-22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참 좋습니다. 이렇게 글을 잘 쓰시면서 너무 가혹하신 거 아니십니까??ㅠㅠ

다크아이즈 2013-02-24 12:18   좋아요 0 | URL
용기 주시는 말씀 고맙습니다. 하지만 나비님처럼 고수가 넘치는 이곳에서 쓰기는 어렵기만 합니다.

피곤끼는 좀 덜하신지요?
후기까지 올리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1.   사람이 지나갔다

 

 

책꽂이에서 시집 두어 권과 그 외 몇 권의 책을 골랐다. 시와 소설을 공부하는 이에게 보내려던 참이었다. 누군가 내게 책을 선물한데 대해서 릴레이로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책 선물을 즐기는 편이다. 책장에 넘쳐 방치되느니 친구들과 나눠서 좋은 게 책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책방에 꽂혀 있다 뿐, 내 책들은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지도 않다. 급하게 읽어야 할 책을 찾지 못해 다시 주문하거나 빌릴 때도 있다. 정리정돈을 제대로 못할 바에는 될 수 있으면 집안으로 물건을 들이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어찌된 건지 내 깜냥으로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책만은 다달이 사들인다. 책꽂이는 한정되어 있으니 주변 친구들과 책을 나누면 책방도 깔끔해지고 마음도 달달해지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박스 포장을 하기 전 책을 한 번씩 쓰다듬어 본다. 시집 한 권에 손길이 오래 머문다. 얼마 전, 처음 펼치던 순간 헐거웠던 심장이 조여지는 듯한 그 느낌이 다시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나갔는지 마당이 어지러웠다 -싸리비로는 어쩌지 못했다, 바닥이 잃어버린 부력을 그늘로 눌러놓은 이곳.’ 젊은 시인 신용목의『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는 이처럼 사람 사이의 여운이 감지된다. 비망록에 새겨둔 바람 같고 물풀 같던 마음결이, 머리가 아니라 손끝이나 가슴으로 읽힌다.

 

 

사람이 지나간 마음자리는 어지럽기 마련이다. 싸리비는커녕 손부채 한 번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부력 잃은 그 자리엔 그늘이 눌러 채운다. ‘걸음이 찍어 놓고 간 발자국마다 감잎이 앉아 있었다 어깨가 아팠다’라고 시인은 마치 독자의 마음 끝을 낚기라도 하듯 끝까지 눈썰미라는 낚싯대를 놓지 않는다. 사람이 지나가면 그 발자국마다 감잎이 앉아 어깨가 아프긴 하다. 그 감잎 줍기 위해 날개를 너무 꺾기 때문일까.

 

 

내 시집을 받을 순한 이는 마당이 어지럽지도, 부력을 잃지도, 어깨가 아프지도 않기만을. 그저 ‘사람이 지나갔다’에서 시인을 뛰어 넘는 무한 발산의 발랄한 상상력을 채워갔으면.

 

 

 

 

  

2. 아니 에르노식으로 쓰기는 어려워

 

 

수치심을 감추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가령 ‘열두 살 무렵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어요.’라고 누군가 진지하게 말한다면 듣는 이는 왠지 모를 부담감을 안게 된다. 누군가의 수치심은 곧 타인의 거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의 예는 작가 아니 에르노의 실제 경험에서 따왔다. 일반적으로 부끄러움 앞에서 글은 솔직할 수 없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식 글쓰기는 그걸 해낸다. 작가는 경험하지 않은 모든 글은 허구라고 단정 짓고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 경험의 최고 수위에 부끄러움으로 명명되는 그녀의 수치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부끄러움』이라는 작품의 첫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1952년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김탁환의 다른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이 문장 하나 만으로도 에르노식 글쓰기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작가는 정신적 외상이 된 일련의 체험들을 까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통스럽고 불편하지만 당돌하고 진솔한 글쓰기를 통해 인간 본연에 대해 성찰한다.

 

 

알고 보면 글이란 게 얼마나 기만적이고 허영덩어리인가. 내 부끄러움, 내 수치, 내 껄끄러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수치심이나 증오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들을 객관화시켜 글로 쓴다는 게 얼마나 힘들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 약점을 방어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진실한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충족감만큼이나 수치심을 경험하며 산다. 하지만 충족감은 발설하기 쉽고, 수치심은 감추기에 쉽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경험치가 많아서인지 그미가 쓴『부끄러움』을 제대로 읽고 싶어졌다. 바로 검색했더니 절판이다. 중고판매를 알아본다. 육천 원이던 책값이 적게는 이만 원에서 많게는 십만 원까지 불어났다. 남의 부끄러움엔 시쳇말로 돌 직구를 날리기 쉽지만 내 부끄러움을 글로 까발리는 건 그만큼 어렵다는 걸, 귀해진 중고책값이 가르쳐주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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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7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8 0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8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3-02-17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읽던 책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걸 좋아하는데 받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저어하게 되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새책을 받는 것 보다 읽던 책을 받는 게 부담도 안 되고 더 좋아요,,ㅎㅎㅎ 그렇다고 팜님께 달라는 얘기는 아니에요,,,ㅎㅎㅎㅎ

그런데 어떤 글은 너무 쉽게 자신의 부끄러움을 까발리는 걸 보면 외면하게 되더군요,,처음엔 동정을 하고 공감을 하다가 자주 되면,,,,아니에르노와 상관없는,,,어떤 분의 글을 읽고 느끼는,,,그런데 그렇게 까발(?)리니까 읽고 싶지 않아도 또 읽게 되는;;;이 관음증 환자의 헛소리였습니다. 사르륵(사라지는 소리)

다크아이즈 2013-02-18 07:11   좋아요 0 | URL
나비님 맞아요. 하지만 전 새책도 좋고, 누군가 읽은 책도 좋고 그래요. 둘 다 서로 생각하고 주고받는 맘만은 같을 것이기에^^*

완전히 스스로를 까발릴 자신은 없지만 꼭 드러내야 할 것마저 피하게 되면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 그게 글인 것 같습니다. 뭔 소린지 몰라 저는 스스륵 사라집니다. ㅋ

2013-02-17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8 0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2-17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를 아직 담아만 두고 있는 상태에요. 읽고싶은 작가가 넘 많군요. 진정한 글쓰기, 늘 고민하는 사람만이 좀더 가까이 갈 수 있겠지요. 팜님저럼요.^^

다크아이즈 2013-02-18 07:17   좋아요 0 | URL
고민은 하는데 몸과 맘 다 딸리는(!)게 문제지요.ㅋ
저도 에르노 것으론 칼 같은 글쓰기 밖에 없어서 이번 기회에 부끄러움 훔쳐 볼랬더니 무려 절판이네요. 전 에르노처럼 <스스로 까는 글>을 쓰지도 못 하지만, 그 형식미, 절제미, 거두절미하는 쓰기 방식은 배우고 싶습니다.^^*
프레님도 밝은 하루, 여긴 빗님 추적거리네요..

꿈꾸는섬 2013-02-17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용목, 김탁환, 아니 에르노를 찜해요.^^

다크아이즈 2013-02-18 07:20   좋아요 0 | URL
이런이런, 꿈꾸는섬님 취향에도 맞아야 할텐데... ㅋ

페크pek0501 2013-02-1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국문과 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글을 쓰려면 자신의 항문까지 보여 줄 각오로 써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야 좋은 글이 나온대요. 감추며 글을 쓰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항문까지 보여 주나? 였지요.
저도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영역을 어디까지 보여 줘야 하나, 로 고민이 될 때가 있어요.
어려운 문제예요.^^

다크아이즈 2013-02-19 08:31   좋아요 0 | URL
페크언니님,맞아요. 항문까지 보이고, 까질대로 까져야(다 드러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했어요. 하지만 제 수치를, 제 아픔을 어디까지 까발릴 수 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에르노가 대단한 거지요. 에르노처럼 될 필요는 없지만 과장된 미화나 지나친 비하만을 극복해도 좋은 글 근처에는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지금 놀러 갈게요.

Jeanne_Hebuterne 2013-02-1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영역을 확장해 나가시는 팜므 느와르님 :)
서재를 둘러보다가 반가운 이름에 잠시 들어왔답니다.
덧붙이지도 덜어내지 않고 어느새 주체가 사라지고 주변의 풍경이 고화질 화면이 된 듯 속속들이 들어오는 그런 글이 좋았어요. 그런데 그러기가 어디 쉽습니까!

다크아이즈 2013-02-19 08:36   좋아요 0 | URL
에르노야 에뷔테른님 전용이지요. 그 옛날(?!) 님이 에르노를 얘기하던 시절에는 받아들이기 싫었는데, 요즘은 좀더 좋아졌어요. 아마, 늙고 있는 중인가 봅니다. 세상과 시간에 타협하고, 쓸쓸함과 적막이 좋아지고, 눈비 흩날리는 풍광에 눈길이 가고... 뭐 그런 아침입니다.^^*

굿바이 2013-02-18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는 제게도 좀 특별한 작가였습니다.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부끄러움. 종종 어깨까지 붉게 물들였던 단어였어요.

다크아이즈 2013-02-19 08:38   좋아요 0 | URL
앗, 굿바이님. 전 님을 생각하면 격조 높은 색체 그림이 자꾸 떠오르지 뭡니까.
저 짧은 댓글 좀 보시어요. <부끄러움, 종종 어깨까지 붉게 물들였>다니요!!!
 

 

 

 

 

 1. 졸업 축사

 

 

 

 

 

 

 

 

 

 

 

 

 

 

  졸업 시즌이다. 마침 아들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지라 오랜 만에 학교에 가게 되었다. 우리가 다닐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화기애애한 졸업식 분위기였다.

 

  하 수상한 시절 탓인지 그때의 식 절차는 얼마나 까다롭고, 방식은 얼마나 딱딱했으며, 시간은 또 얼마나 지루했던가. 별 의미도 없는 사전 연습을 몇 번에 걸쳐 해야만 했다. 연단에 올라 졸업장과 상장을 받아 옆구리에 끼는 팔의 각도까지 담당 선생님이 정해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리허설을 되풀이하곤 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는 창의적이지도 않았고 운치도 없었다. 초대 손님의 축하 인사말은 겉도는데다 그 대상도 불분명하기 일쑤였다. 강당도 없는 운동장에서 그 길고 지루한 시간을 당연히 견뎌야 하는 것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한데 요즘 졸업식 풍경은 그때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우선 주인공인 졸업생을 충분히 배려하는 점이 맘에 들었다. 졸업장을 받은 학생들 한 명마다 선생님들은 어깨를 보듬고 덕담을 건네신다. 교장 선생님 훈화는 딱딱하지도 틀에 박히지도 않았다. 축하 인사를 건네는 손님도 교육계 인사라 현장성이 있었다.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담임선생님들의 격려 말씀 또한 현실적이고 유머가 깃들어 있다.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진다.

 

 

  여러 말씀 중 귀담아 들을 만한 것들이 많았다. 백두산에 오르는 가장 빠른 방법을 아느냐고 한 선생님이 운을 떼신다. 비행기로 가는 것도, 헬리콥터를 타는 것도, 남다르게 보폭을 빨리 하는 것도 아니란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는 것이 가장 빨리 백두산에 오르는 비법이란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하면 한 시간이 일분처럼 느껴져, 지루할 틈이 없다나. 교장선생님은 사회에 나가면 꼭 존경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사람 셋은 만들란다. 물론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잊지 말란다. 두 분 다 사람이야말로 중요한 자산이란 말씀이렷다. 졸업 축사로 이보다 더한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도 없다 싶다.

 

 

  시대 흐름에 따라 유연해진 졸업식 풍경에 훈훈해진 하루였다.

 

 

 

 

2.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우리사회에서 고위 공직자 후보들의 본인 및 자녀 군필 문제는 그들의 국가관 및 도덕성 유무를 판단하는 가장 큰 잣대 중의 하나이다. 지금까지의 보도에 따르면 일반 국민들에 비해 그들의 군 면제비율이 월등하게 앞선다. 합당한 사유가 있고, 우연한 결과일 뿐이라고 누군가 대변해준다고 해도 그조차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한 가지 더. 암 투병 중이던 유명 엔터테이너가 끝내 사망했다. 안타까운 사실 앞에 각종 커뮤니티마다 추모의 물결이 파도를 이룬다. (악플러들이야 원래 악플을 다니 별도로 하고.)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잠재적 악플러였던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 너무나 진지한 애도자로 돌변한다. 악성 댓글을 부추기거나 동조했다는 것을 잊은 채, 현상적 악성 댓글을 달았던 치들을 향해 보란 듯 정의의 투사로 자리를 바꿔 앉는다. 자명한 죽음 앞에서 살아남은 자로서의 관대한 보시를 연출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이때껏 구설에 오른 고위 공직자 후보 아들은 합리적이든 불법이든 스스로는 군 면제를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변의 강권이나 환경적 습득에 의해 군대 가는 것보다는 가지 않는 것에 길들여졌을 수도 있다. 또한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간 당사자를 기만했던 사람들일수록 ‘애도라는 무한한 연민’의 탑승권을 얻으려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무죄함을 위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악플러요’ 하고 대놓고 내지르는 사람들이 일관된 악역을 자처한다면, 악플러가 아닌 척 위장한 악플러들은 이율배반적 자세를 취하고 만다. 그리하여 저 관대하고 무한 발산하는 애도의 행렬조차 그 순수성에 불온한 혐의가 덧씌워지는 것이다. 아프고 힘들 때 적었던 친구들은 명백한 죽음 앞에서는 어째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가. 누군가의 죽음 앞에 친구 아니었던 사람 없는 우리의 값싼 애도에게 애도를!

 

 

  내 욕망은 순수한 내 욕망이 아니다. 내 내면의 의지가 바라는 모든 욕망은 실제론 타자가 욕망하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의 타자성에 대해서 라캉은 ‘주체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제일 먼저 느끼는 곳은 타자 속에서이다.’라고 말했다. 군대를 면제 받고 판검사가 되거나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곳에 취직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내가 원해서가 아니다. 사회가 원하는 타자의 욕망 일순위에 그것이 있으니 따를 뿐이다. 마치 처음부터 그것을 원했던 것처럼 길들여진 개별자는 착각할 뿐이다.

 

 

  잠재적 또는 교묘한 악플러들이 선플러로 둔갑하는 것 역시 내 마음이 움직여서가 아니다. 죽음 앞에서는 애도자의 눈길을 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타자의 욕망이 길을 터줬다. 그 길 덕에 잠시나마 선플러로 위장을 해서 자신의 죄사함이란 숨구멍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개별자의 자아는 스스로 형성되는 게 아니라 타자를 매개로 다듬어지거나 만들어진다. 타자의 욕망을 넘어서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회복하는 길은 쉽지 않다. 쉽기는커녕 우리 스스로 그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타인의 욕망, 즉 부모의 욕망, 사회의 욕망이 정해놓은 길을 추구하다 보면 자아와 충돌하는 경우가 생긴다.

 

 

  타자의 욕망은 안정된 길일 수는 있어도 진정성이 담보된 길은 아니다. 그 둘 간의 대립 과정을 조율하는 것이 일상성의 조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면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대부분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타자의 욕망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라캉의 말대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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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3-02-15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드님의 졸업을 멀리서나마 축하드립니다.^^ 아드님이 게임만 한다고 해서 너무 걱정하실 건 아닐듯하옵니다. ㅋㅋ 언제 또 그렇게 놀아보겠어요!!! ㅎㅎㅎ

타자의 욕망에 길들어 오늘 하루도 마감한 것 같아요. 타자의 욕망이란 어쩌면 인간의 간사함일까요??? 오늘도 화두를 던져주시는 팜님~~~ 깊은 밤 평안한 잠드시길 바랍니다.^^

2013-02-15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2-15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롭고 멋진 출발! 축하드려요^^
목욜 학수고대하며~~~ ㅎㅎ

다크아이즈 2013-02-15 18:20   좋아요 0 | URL
축하는 이등이고 ㅋ
넹 당근 일등은 목욜 기다리면서 열심히 사는 것. 프레님도 뭔진 모르지만 상큼하게 털어내시고 밝고 환하게요, 우리^^*~~~ 크~

이진 2013-02-16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쿠, 이걸 왜 못 보았으며 그러고보니 졸업이라는 걸 왜 까먹었던 걸까요.
일단 아드님의 졸업을 축하드려요! (그런데 문득 생각하는데, 제가 아들분을 아드님이라 불러도 될는지 모르겠답니다. 형이라 부르기도 애매하고, 아드님, 하면 어른 같고... ^_^)
엊그제가 저희 학교 졸업이었는데 오랜만에 학교에 모인 선배들은 머리가 온갖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있었어요. 개중에는 형광빛이 나는 빨간색도 있었고, 연예인들이나 한다는 보라색 머리도 있었고. 그렇다구요. 저도 친구에게 졸업 시즌이 되면 하얀 색으로 염색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생각해도 안 어울릴 거 같아요.

한 번 더 축하,

다크아이즈 2013-02-16 23:25   좋아요 0 | URL
이진님, 당근 아들과 이진님은 친구지요.^^*
머리 염색 전 강추요. 근데 이진님께 흰색이 어울릴까?
생기발랄한 색으로 변화를 주는 건 대환영이에요.
자고로 범생이 틀에서 약간은 벗어나줘야 글도 잘 되어요. ㅋ

순오기 2013-02-17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세 많으신 선생님들의 틀에 박힌 훈화도 이젠 바뀌어야 아이들에게 먹힐 듯해요.
아드님 졸업 축하합니다~~~~~~ 대학은 원하는 곳으로 진학햇겠죠?^^
어제 막내한테 들은 고3 담임샘 말씀~ 아직은 조심스런 접근이라 배려하는 듯한 언어표현에 아이는 마뜩찮아 하길래 한달만 지나면 서로 본성이 드러날거라 얘기하며 웃었어요.

다크아이즈 2013-02-19 09:13   좋아요 0 | URL
원하는 곳에 갔을 리가!
그냥 타협하는 거지요. 뭐.
순오기 언냐 님은 꼭 잘 다독여 막내 원하는 곳에 진학 시키시어요.^^*
본성을 드러내야 고3 선생님으론 적격일 테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