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숨그네를 탔어

 

  몽환적이며 비약적인 문체로, 직설적이고 사실적인 얘기를 쓸 수 있을까. 적어도 헤르타 뮐러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니 그녀가 쓴『숨그네』를 읽기 전까지는 그런 의문을 가졌다. 끝 간 데 없는 고통과 헤어날 수 없는 허기의 순간을 저토록 낯선 말들의 조합으로 완성해낸 작가는 흔치 않다.

 

 

  누군가 이 책이 재미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고, 누군가 이 책이 좋은 책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라고 얼버무릴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 책에 밑줄을 긋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라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 이 책을 소장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물론, 이라며 망설이지 않고 답하겠다. 불친절하고, 에두르고, 솟구치고, 앞서가는 문장들의 너울에 독자는 속수무책으로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다. 허공만큼 넓은 길에서 막다른 골목을 만나는 느낌이랄까.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수용소에 붙들려간 열일곱 살 독일 소년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취재기적 소설은 서늘한 산문시로 읽힌다. 사실적 경험담이 시적, 몽환적 기법의 옷을 빌려 입었기에 그 아우라가 제대로 발현되는지도 모르겠다. 아픔을 아프다고, 배고픔을 배고프다고 호소하는 건 진부하다. 아픔이 '숨그네'가 되고 허기가 ‘배고픈 천사’가 되는 메타포를 거치고서야 낯선 언어들이 펼치는 정직한 실존은 되살아난다.

 

 

  수용소 생활의 조각보 같은 일상이 구체적 이미지로 승화되었음에도 부분적으로 난해하게 읽히는 게 이 책의 약점이다. 그럼에도 그 책임을 작가에게만 지울 수도 없다. 극한의 생존 조건에서 굶주림과 수치심을 경험한 사람의 심리는 온전한 형태의 문장으로 비유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갇히고 길들여진 자의 통점이 확산되면 당연히 그 의식의 심연은 발작을 일으키고, 그 때의 글은 불친절한 수사나 애매한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그 수사나 덫이 낳은 언어유희가 쉼없이 독자들을 끌었다 놓았다 하는 데, 묘한 그 이끌림 덕에 ‘헤르타 뮐러’ 또는 ‘숨그네’는 오래 독서계에 남는 대명사가 될 것이다.

 

 

 

    

2. 다를 뿐 잘못은 아냐

 

 

  즐겨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안녕하세요’라는 토크 쇼가 있다. 전국의 고민남녀들이 출연해 자신의 고충을 방청객들에게 호소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내용이다. 때로는 코믹하게 더러는 진지하게 풀어놓는 사연들을 보면서 세상에 저토록 공감되는 고민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제의 출연자 한 명은 특별했다. 전형적인 한민족 핏줄이건만 선천적으로 파란눈으로 태어나 놀림 받은 기억이 있는 젊은 엄마가 나왔다. 그녀의 어린 딸도 파란 눈동자를 가졌는데 벌써부터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의 불쾌한 경험이 있는 출연자로서는 커가는 딸이 받을 상처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모녀가 뿜어내는 파란눈빛은 신비한 인형의 그것처럼 이국적이고 매력적이었지만 특이하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되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예의 출연자보다 더한 신체적 ‘다름’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희기만 했던 그녀의 눈동자는 파란색이 아니라 붉은색이었다. 선천적으로 멜라닌 색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알비노 유전 현상 때문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파란눈의 모녀와 마찬가지로 그건 질병도 전염병도 아니었다. 다만 남과 조금 다르게 태어난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짓궂은 애들에게 수모를 당해야만 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나와 다름에 대한 관용의 시선은 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다수가, 특수하고 특별한 소수를 홀대해도 괜찮은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서양인이 파란눈을 가졌으면 선망의 대상이 되고, 동양인이 파란눈으로 태어났으면 무시의 대상이어도 좋을 근거는 없다. 다수라는 강압의 눈이 소수라는 연약한 눈을 제압할 이유 역시 없다. 그 무모한 눈빛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깨쳐주는 것은 우리 어른이 할 일이다. 모르고 해악을 끼치는 어린 영혼의 모든 잘못은 우리 기성의 책임이다.

 

 

 

  

3. 교양의 목적

 

 

  톨스토이의『안나 카레니나』는 안나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주된 흐름이 안나의 외도와 파국이라 할지라도 그건 작가가 설계한 미끼일 뿐, 실제 봐야할 게 너무 많아 완벽하게 읽어내기엔 벅찬 소설이다. 백여 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당시 러시아의 역사적·사회적 분위기를 파악하고, 인간 군상의 다양한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다. 작가적 분신이 가장 많이 투영된 듯한 인물이 레빈인데 어떤 장면은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도 마치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도회적이고 자유주의자인 유부남 오블론스키와 시골풍에다 소심한 귀족 노총각인 레빈이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태생적 생각이 다른 둘은 행동 양식도 다르다. 레빈의 생각은 이렇다. 부르주아들의 시간 보내기용 먹거리에 지나지 않는 굴보다는 치즈 얹은 흰 빵이 일용할 양식으로는 낫다. 시골에서는 일 하기 위해서 빨리 배를 채우려 하는데, 이곳 식당에서는 최대한 더디게 배를 채우기 위해 애쓴다. 육체노동과는 거리가 먼 인간들이 손톱을 기르고, 소맷부리에 접시만한 단추를 달고 다니는 게 못마땅하기만 하다. 시골 사람들에게 옷소매는 걷어 부치기 위해 있고, 손톱도 일하기 편하기 위해서는 짧게 자르는 게 낫다. 식당의 온갖 장식품도 충만한 영혼을 더럽히는 것 같고, 머리로만 일하는 인간들이 레빈에게는 야만스럽게만 다가온다.

 

 

  그때 도회 남자 오블론스키가 나선다. 모든 교양의 목적은 쾌락에 있으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쾌락적 충만의 실용성을 충고하는 오블론스키에게 레빈은 조금 마음이 열린다. 레빈이 모스크바에 온 목적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이고 그것은 양심적 쾌락, 즉 충분한 교양의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온갖 자기혐오와 자기경멸을 넘어선 체험이어야 하지 고지식함이나 고상함에 머무는 망설임이어서는 안 된다. 레빈이 그 쾌락적 관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지를 상상하며 읽는 것도 협의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재미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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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3-18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빼어난 글을 쓰시다니... 기죽고 갑니다.(정말로요...)^^

다크아이즈 2013-03-22 18:05   좋아요 0 | URL
페크님 이 말을 믿고 싶지만 전 지금 그로키 상태예요^^*
글쓰기의 괴로움이 이다진데 왜 써야 하는지요?
즐겁지 않은 일은 하기 싫은데, 저도 어쩔 수 없이, 답 없는 이 짓을 해야만합니다. 페크 언닌 봄빛이 곱기만을 바랍니다.^^*

프레이야 2013-03-1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님 오랜만의 글 반가워요. 저도 뜸했었지요. 이제 봄기운 제대로 느껴지네요. 레빈이 사랑의 궁극적 목표인 쾌락을 어떻게 넘고넘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 상상해보는 일ᆢ재미있으면서도 작가가 던진 무엇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퍼뜩 드네요. 독서수업으로 벌써 다 읽으신 거에요? 소설 독법이 역시 다르다 느끼며 다시 한번 감탄과 윙크 보내요~~~ 숨그네는 찜만 해두고 미룬 책인데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드는 지름 페이퍼야요ㅎㅎ 봄날 해피하게 보내고 계신 거죠^^

다크아이즈 2013-03-22 18:08   좋아요 0 | URL
프레님, 벌써 다 읽었을 리가? 페이퍼 내용 대로 1권만 읽은 것 중 단상이에요. 어제 개봉했잖아요. 조조로 가서 봤어요. 우리 독서팀 외에는 별로 사람이 없더라는... 길어야 일주일 예정으로 상영한대요. 프레님도 안 보셨으면 얼른 보시어요. 거긴 대도시니 좀 더 오래 갈 수도 있겠네요.^^*
프레님 이쁜 모습 눈에 아른거리는데 제 맘은 여전히 겨울... 징징거려도 이해해주세요.^^*

프레이야 2013-03-26 08:02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개봉일에 가서 봤지요.
징징대면서 서로 토닥토닥해요^^

그렇게혜윰 2013-03-19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그네는 정말 아름다운 책이에요..!

다크아이즈 2013-03-22 18:10   좋아요 0 | URL
책만님 반갑습니다.
밑줄 긋고 싶은 말들 때문에 충분히 소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단 글쓰기 방식은 저랑 코드가 안 맞아서 닮고 싶지는 않았다는게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저도 님께 놀러 갈게요.^^*

Shining 2013-03-2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숨그네ㅠ 전 정말 어려웠어요 이 책, 그리고 헤르타 뮐러. 쉽게 읽히지도 즐겁지도 쉬이 좋지도 않았지만, 전 그녀처럼 글을 쓸 수 없고 사실 쓰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웃음)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탄하고 감사했던, 그런 책이었어요.

다크아이즈 2013-03-22 18:13   좋아요 0 | URL
앗, 고매한 샤이닝님이시다. 에헤라 디여~~ 로또 당첨 된 것만큼일리야(!)는 아니지만 귀한 나들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처럼 쓰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부분부분 밑줄 긋기 좋은 책이었고,
제 문법 스타일과는 안 맞아서 괜찮은 책인지는 의문이 든다는 페이퍼를 쓴 거지요.
닮고 싶진 않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는 글쓰기라고 할까요^^*

2013-03-20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2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산불 소묘

포항 산불... 다음 날     포항 용흥동서 산불…   포항 용흥동과 연일읍

       <이미지는 실시간 네이버 것으로>

 

 

  야속하게도 왜 산불은 동시다발적으로 오는지. 삼월 초의 날씨로서는 백여 년 만에 27도에 육박하는, 볕 좋고 바람 많은 날씨였다. 오후가 되자 도시는 멀리서부터 검회색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초여름 같은 수은주를 시샘하는 봄비가 오려나 싶었다. 그게 아니었다. 도시 남쪽과 북쪽에서 잇단 산불로 온 허공이 연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걱정과 우려와 공포가 뒤섞인 호기심 서린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삼십 오층 높이에서의 산불 현장은 한 눈에 잡혔다. 불꽃은 도심 가까운 산허리를 휘감았고, 오가지 못하는 차들은 비상 깜박이로 대로가 주차장화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대형 물바구니를 달거나, 물탱크를 장착한 헬리콥터들은 쉼 없이 강과 현장을 오갔다. 남쪽의 또 다른 산불 현장의 헬리콥터들은 강까지 오지 않고, 근처 저수지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하늘 길에서 혼선을 빚지 않기 위한 나름의 질서 같았다.

 

 

  헬리콥터는 강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해야만 물을 담을 수 있었는데, 강 표면에 이는 프로펠러 바람 동심원처럼 명치끝에 아찔한 파문이 일곤 했다. 호기심은 금세 사라지고 통증과 공포와 위기감만 온몸에 달라붙었다. 가파른 산과 주택 현장을 누빌 소방관들과 주민들, 관계자들의 수고와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집으로 들어오려는데, 현관문 돌리는 아귀힘도, 신발을 쉬 벗을 기운도 남아있지 않다.

 

 

  잠깐 봤음에도, 불과의 사투를 지켜보는 일은 맘만 무거운 그 무엇이었다. 모든 말들의 무용함으로서만 이 산불 현장을 말할 수 있었다. 하물며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겪는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입술을 건너 간 말들은 화근(禍根)이 되고, 손끝에서 날아간 불티 역시 화근(火根)이 된다. 이때의 모든 부주의는 유죄이다. 화근의 원인은 순간이나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으니. 길고 힘겨운 불꽃과의 사투는 말줄임표 말고는 제대로 설명할 길 없다.

 

  아, 새 아침이 왔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헬리콥터들의 공중 행렬은 계속 중이다.

 

 

 

 

2. 상추라는 푼크툼

 

  독서 모임이 좋은 이유는 책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람 이야기도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에 토론한 책이 무엇이었는가는 잘 생각나지 않아도 그날의 에피소드 하나 쯤은 나만의 사진 한 컷이 되어 심상을 맴돌 때가 있다. 이야기보따리를 푼 회원의 핵심 장면을 마음으로 찍고 마음으로 인화해 들여다보면서 짧은 생각 하나를 건져 올린다.

 

 

  볕 좋은 날, 전원주택 집들이에 친구들이 모였다. 근경으로 집이 보이고, 사진 중간의 야외 식탁엔 노란 앞치마를 입은 섬세한 안주인이 삼겹살을 굽는 중이다. 분주해진 안주인을 도와 누군가는 밥을 푸고, 다른 누군가는 소주잔을 챙기며, 또 다른 치는 수저를 놓고 있다. 오른쪽으론 수돗가가 있고, 왼쪽은 텃밭인데, 그곳에서 한 명은 풋고추를 다른 한 명은 상추를 따고 있다.

 

 

  바쁜 안주인의 손길과 달리 눈길은 텃밭의 상추녀에게 머물러 있다. 순진한 얼굴의 그녀는 상추의 연한 윗대궁만 톡톡 딴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의 안주인이 충고를 하기엔 거리도 멀고, 사소한 것 때문에 이 좋은 분위기를 망칠 수도 없다. 그 사진에서 상추 따는 친구는 밑대궁부터 따는 것이 상추나 주인 심지어 자신마저 배려하는 것임을 몰라야 하는 순진한 표정이어야 한다. 그래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주인의 표정에 악의가 없음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이 사진에서 ‘전원주택에서의 친구들과의 다정한 점심 한때’만 읽는다면 일반적 보편적 시각인, ‘스투디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상추 윗대궁을 따는 순진한 친구와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안주인의 섬세한 표정을 읽게 된다면 이는 ‘푼크툼’이 된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푼크툼은 하나의 ‘세부요소’이자 ‘나를 토로하는 것’이다.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는 보편타당한 미나 교양이 그 목표가 아니라, 나만의 ‘찌름’, 나만의 ‘영감’의 세계로 이탈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욕구의 표현 과정이다. 친구들과의 단란한 점심 식사 장면의 일반성보다 연한 꽃대궁을 무심히 꺾어버리는 순진청정한 친구의 특이성이야말로 예술의 모티프가 되는 것이다.

 

  푼크툼은 고상하고 도덕적인 것을 벗어나 엉뚱하며, 은밀한 개별성을 지닌다. 친구들이 한껏 웃으며 포도주잔을 기울일 때 어색한 미소로 여린 상추 윗대궁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안주인의 푼크툼 역시 너무나 비의지적인 ‘찌름’의 세계이다. 이 푼크툼의 구체적 사례들이야말로 예술의 출발점이다.

 

 

 

    

3. 사슴이 우네

 

  ‘녹명’(鹿鳴)이란 말은 고영민 시인의 시에서 처음 들었다. 그의 시집『사슴공원에서』의 표제시 덕에 그 말을 알게 되었다. 기실 나를 울린 것은 ‘사슴 울음 소리’가 아니라 ‘누가 벗어놓은 신발을 돌려 놓았다’라는 구절이었다. 돌고 도는 계절엔 경계가 없고, 나는 먼 곳에 있고, 내 앞의 당신은 침엽수처럼 무표정 하다. 그래도 언젠가 본 책 속의 사슴 공원처럼 우리는 사랑을 꿈꾸고 단비를 기원한다.

 

 

시는 내게 읽는 게 아니라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다. 시 속의 저 신발을 돌려놓은 이 누구였을까를 생각하는 충만한 엔돌핀의 시간만큼 독자로서 미소지을 수 있다. 내가 벗어 놓은 신발을 누군가 어여삐 돌려놓는 시간이든,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을 연민 서린 내가 돌려놓는 시간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상황을 포착하는 시인의 다사로운 눈썰미가 있었기에 사슴의 울음으로까지 확장되는 시구를 건질 수 있었으리라.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녹명 부분 시가 나온다. ‘사슴 울어 알리네 / 들에서 다북쑥을 뜯는다고 / 내 반가운 이 와서 / 거문고 타고 생황 부네 / 생황 불며 / 선물 광주리로 받드니 / 이 사람 나를 좋아해 / 내게 바른 도리 일러주네’. 사슴은 다른 짐승들과 달리 먹이를 찾으면 기쁜 울음으로 주변에 알린단다. 주변 친구들을 모아 함께 나누어 먹자고. 어진 임금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좋은 일이 있으면 백성들과 나누라는 뜻으로 지어진 시일 것이다.

 

 

  사슴 울음 소리를 내는 건 쉽고도 어렵다. 누구든 내 팔 안에 든 것들에겐 그 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배타적 울타리를 치는 자들에게까지 기쁜 울음을 내주기란 참으로 어렵다. 완고하고 고정된 타자의 세계관 앞에서 무한대로 뻗어가는 나의 실존이 울어주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더구나 완고한 세계관과 뻗어가는 실존은 가변적이라 상황에 따라 타자와 자아를 오간다. 따라서 사슴의 기쁜 울음은 온 우주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 만의 울음일 수도 있다. 강한 사자는 제외하더라도 여린 토끼나 비슷한 염소에게까지 할애하는 울음소리가 아니라는 것. 그저 그들만을 위한 울음소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

 

  그 배타성의 한계를 일찍이 시인은 목도하고 ‘사랑이 식기 전에, 밥이 식기 전에’ 사슴 울음 소리 듣자고 서둘러 당신에게 가야 한다고 노래하는지도 모르겠다. 약자라면 누구나 들어설 수 있는 풀밭의 나날을 꿈꾸는 것 그것이 착한 시인의 사명은 아닌지.

 

 

 

     사슴 공원에서

                           고영민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어디까지가 여름이고 어디서부터가 가을일까

  누가 벗어 놓은 신발을 돌려 놓았다

  오늘 나는 아주 먼 곳에 있다

  그리고 당신의 얼굴은

  침엽수처럼 무표정하다

  젊은 어느날의 책 속처럼 지금도

  사슴 공원 어딘가에선

  사랑이 생기고 비가 내리고

  멀리 빈 들판엔 철새가 돌아온다

  누가 구름을 사라지게 하고

  비를 멈추게 할 수 있나

  투명 비닐 봉지에 금붕어를 담아 들고

  한 소년이 급히 어딘가로

  달려간다

  공원에 잇닿아 있는 장례식장 마당에서

  어느 가족이 늦은 상복을 갈아입고 있다

  사슴 울음소리*  들으며

  나도 서둘러 당신에게 가야 한다

  사랑이 식기 전에

  밥이 식기 전에 

 

*녹명(鹿鳴) :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배고픈 다른 사슴을 부르기 위해 내는 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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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3-11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같이 화낸다'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구나, 생각했어요.

다크아이즈 2013-03-18 18:27   좋아요 0 | URL
정말이지 불같이 화낸다는 말이 실감나더군요. 하기야 화내긴 쉬워도 주워담긴 어렵다는 것도 소방 헬기 날아다니는 것 보면서 느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3-2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영민 시인을 여기서 보네요..ㅎㅎ.
누가 푼크툼과 스투디움을 알기 쉽게 설명하라고 해서
스푸디움은 사건 현장을 조사하는 경찰관이 눈이고,
푼크툼은 사건 현장을 구경하는 범인의 눈이다, 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범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이 제일 먼저 보일 것 아닙니까... 개인만 아는 증거.. 그런 거 말이지요..ㅎㅎ

다크아이즈 2013-03-29 19:23   좋아요 0 | URL
앗, 곰발님 넘흐 늦게 댓글을 봤어요.
사실 고영민 시인님은 제 주변에 사신답니다.
아주 친하지는 않지만 서로 잘 아는 사이지요.
제가 맘으로 존경하는 시인이랍니다.
시인님은 그 사실을 알 리 없구요. ㅋ
혹, 곰발님도 고 시인을 잘 아시는? 크~~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개념을 처음 알게 됐을 때 하늘로 날고 싶었어요.
롤랑 바르트가 넘흐 멋지게 보이는 거예요. 감각적 철학자라고 할까.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정말로 생각하고픈 데로 이끄는 그 무엇의 개념이랄까, 푼크툼의 매력에 푹 빠져서 틈만 나면 푼크툼에 관한 페이퍼질이랍니다.^^*
 

 

 

 

  1.바넘 효과 - 질문지가 잘못 되었을까

 

 

 

  당신은 규율을 지키거나 제약이 따르는 상황을 불만스러워한다. 하지만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의 규칙과 통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지나친 망설임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당신은 만족할 만한 증거가 없으면 타인의 의견을 잘 수용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의견을 불편해하는 타인이 있을까 봐 조심하는 편이다.

 

 

  당신은 내향적이며 과묵한 편이다. 하지만 공감을 확신하는 상대에겐 외향성이 발휘되고, 과감해진다. 한마디로 기회가 오면 충분히 사교적인 사람으로 변모한다. 당신은 가끔 비현실적일 때도 있다. 숨어 있던 진짜 아버지가 나타나 수억 짜리 건물을 증여한다거나, 현빈 같은 남자가 우주여행을 하자고 프러포즈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의 당신은 알뜰하며, 현실에 만족하는 편이다.

 

 

  독서 지도 프로그램을 짜면서 내 식으로 만든 ‘바넘 효과’ 실험 문항의 일부이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성향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고유 특성으로 여기는 것이 바넘Barnum 효과이다. 혈액형별 성격 유형, 타로점, 철학관 사주 등을 믿는 현상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늘 첫 시간에 무작위의 수강생을 상대로 이것을 적용시켜보았다.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난 독서 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제시한 스무 개 항목 전부가 자신의 성격과 일치한다고 한 사람이 있을 만큼 대체로 바넘효과가 증명되었다. 하지만 겨우 여덟 개 항목에 체크한 이도 있었는데, 순간 번쩍하고 깨알 같은 깨침이 지나갔다.

 

 

철학관의 훈수나 타로점을 믿지 않고, 혈액형별 성격 분석에 시큰둥한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바넘 효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또 다른 편견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편타당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고 편견이나 선입견을 극복한 판단적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 바넘 효과의 진실 유무를 떠나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이 몇이나 될까.

 

 

 

 

2. 칸막이 학구파는 되지 마

 

 

  입학 시즌이다. 신입생인 아들도 자신의 시간표를 메일로 보내왔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긴밀한 연락에 참고가 될까 하는 작은 배려이리라. 단출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표는 영어를 빼면 온통 수식과 기호만이 가득한 과목들뿐이다. 저 딱딱하고 재미없는 학문에 청춘의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안쓰러워진다. 하지만 그건 이과적 특성을 갖추지 못한 나의 편견일 뿐, 어쩌면 아들은 인문학 책 읽고 독후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보다 실험 및 계산 결과를 도출하는 그 과정에 더 흥미를 느낄지도 모른다.

 

 

  대학 생활이라는 게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사고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간접 경험과 폭넓은 교양의 기초가 되는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하는 맘에 아들에게 보내줄 책을 책장에서 고른다. 남편이 읽던 자기계발서에도 눈길이 간다. 아들에게 도움 될 책인가 싶어 훑어보는데, 흔한 말로 ‘살아 있네’ 하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망설일 필요 없이 보낼 책의 목록에 끼운다.

 

 

  아이비리그 기숙사 학생감 생활을 오래한 저자는 그곳에서 만난 학생 둘을 비교한 일화를 소개한다. 활발한 성격인 단짝 여학생들은 시험 기간만 되면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진다나. 한 명은 칸막이 도서관에 둥지를 튼 채 일체 기숙사 모임과는 발을 끊는다. 다른 한 명은 시험 기간이 아닐 때와 마찬가지로 스터디를 조직하고, 자료를 공유한다. 모여도 공부 반 잡담 반일만큼 천하태평이다.

 

 

  누가 성적이 좋고, 나아가 누가 옳은가를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스트레스 지수만큼은 활발한 사교파에 비해 칸막이 학구파가 더 심할 것이다. 공부 자체가 매번 즐거울 리는 없지만, 다크서클 드리운 채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으면서까지 공부에 집착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 공부하겠다고 유폐를 자처하는 부류보다는 사회적 소통을 공부만큼이나 중요시 하는 학생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건강해 보인다. 보내준 책을 읽는 아들도 이런 마음을 알아챘으면 좋겠다.

 

 

 

    3. 한국식 교육

 

 

  ‘데모크라시 프렙차터 스쿨’은 뉴욕 빈민가의 자립형 공립학교이다. 고등반 졸업생 45명 전원이 평균 7개의 대학에 합격한 기적을 이뤘다. 이 학교가 우리나라에서 유명세를 타는 건 한국식 교육을 모토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일이년 전부터 우리의 보도 채널들은 이 학교 소식을 전해왔는데, 젊은 교장 세스 앤드류의 공이다. 그는 이번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 받아 참석했다나.

 

 

  저소득층에, 한 부모 자녀가 대다수인 이 학교는 2005년 설립한 이래 ‘열심히 공부하자, 대학에 가자,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교훈으로 한국식 교육을 실천해왔다. 앤드류의 교육 방침은 우리나라에서의 현장 경험이 계기가 되었다. 십여 년 전 원어민 교사로 우리나라에 왔을 때, 앤드류는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할렘 같은 지역의 공부 분위기 쇄신을 위해선 ‘한국식 오기와 열정’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공부만이 살 길이이다, 공부해서 남 주나’ 같은 현실적 가치와 사제지간의 돈독한 정 등 전통적 교육 가치가 합쳐져 한국식 교육 이념이 탄생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코리안 프로그램으로 프랩 스쿨은 최하위 학교에서 최우수 학교로 변모했다.

 

 

  이런 소식에 자부심이 일다가도 마음 한 쪽이 무거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세계제일의 교육 열풍을 자랑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리 장밋빛이 아니질 않던가. 왕따문제, 학교 폭력, 주입식 교육, 타율적 강제, 공부지상주의 등 숱한 문제들이 잠복해있다. 현명한 해결 방안 없이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지쳐가고, 학부모들 역시 제 교육 문제에 부담을 안고 있다. 우리 교육의 낭패한 이런 모습이 전이되었다는 소식은 없으니 다행인 것일까.

 

 

  어느 나라 교육이든지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우리 교육의 긍정적 측면을 도입해 그들 현장에 접목한 만큼 성과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우리 식의 공부에 대한 열정과 자율과 창의성으로 대표되는 그들식 교육이 조화를 이뤄 한국식 교육의 참 결실이 세계만방으로 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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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3-0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바넘효과. 흥미롭네요. 저도 은근히 혈액형별 사주, 철학관등에 관심있답니다. 뭬야? 카톨릭 신자가...ㅎㅎ
2. 고딩까지는 칸막이 학구파가 되었으면, 대학에 들어가면 공부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3. 세스 앤드류 교장의 기적이 대단한 성과를 가져왔군요. 고딩 야간 자율 학습만 아니라면, 1인 1악기, 1인 1운동을 의무로 한다면 훨씬 효과가 있을텐데요. 이 학교는 요것도 함께 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크아이즈 2013-03-07 10:42   좋아요 0 | URL
1.세실님 관심 있는 게 정상일거예요. 전 언제나 제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걸요. ㅋ
2.울 아들 난데없이 연극 동아리 가입하겠다길래 울 부부 급 우울 중입니다. 학업과 관련 있는 동아리였으면 하는데 너무 생뚱 맞아 어찌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넘 일 아니고 내 자식 일이면 객관적인 눈은 사라지고 맙니다.^^*
3.악기와 운동은 진짜 권장하고 싶어요.미쿡은 어련히 그런 학습 더불어 시키지 않겠어요.^^*


마녀고양이 2013-03-06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넘 효과... ㅋㅋ.
저는 웩슬러 지능검사라는 타당성과 신뢰성이 검증된 심리검사 도구를 사용하면서도, 인터넷에서 타당도와 신뢰도가 전혀 검증되지 않은 팔짱 끼기 검사로 우뇌 좌뇌 측정하는 것을 열심히 해보고, 결과가 맘에 들어서 그냥 믿기로 했답니다.... 아하하.

제가 이공계 출신인데,
제 친구들은 인문계의 두리뭉실함을 굉장히 힘들어한 기억이 있어요. 토론과 합의 이런거 아주 싫어하구요, 딱 떨어지는 답이 나오고 손에 잡히는 어떤 것을 만들 수 있는 분야를 훨씬 편안해하더라구요. 기질이 다르면, 다른 세계를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제 친구들은 인문계에 종사하면서 말 많은(?) 사람들을 거의 혐오하는 수준이었거든요.... ㅋㅋㅋ. 여하튼 아드님은 좋으시겠어요, 균형을 맞추어줄 어머님이 계셔서. ^^

다크아이즈 2013-03-07 10:50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께서 왜 바넘 효과 ㅋㅋ 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ㅋ
바넘 효과 설문지, 타당도와 신뢰도를 달여우님께 검증 받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공계 출신인데 상담 심리 공부하시니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적어도 두루뭉술 대충 넘어가시지는 않을 것 같다는 신뢰감이 드옵니다.
자식이란 건 부모 맘대로 안 되는 것 같아요.^^*
 

 

 

 

     1. 롤리타는 산문시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수록 좋은 소설일 때가 있다. 섣부른 작가의 입김이 책이란 유리창에 서리거나, 책갈피를 넘기는 독자의 손끝에 작가의 손길이 자꾸 부대낀다면 이는 독자를 배려한 소설은 못 된다.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기만 하면 되는 소설. 의도하는 바 없기에 변명할 필요 없고, 바라는 바 없기에 훈수 둘 일 없는 소설. 쓰는 작가는 단지 그것을 끝낼 궁리를 하고, 읽는 독자는 묵묵히 마지막 장을 덮기만을 바라는 그런 소설. 질문하지 않았으므로 답할 필요 없고, 설사 질문 하더라도 판단유보로서 독자의 권리를 곱씹을 수 있는 소설. 이런 소설은 나를 매혹시킨다. 『롤리타』가 내겐 그랬다.

 

 

  롤리타는 소설을 빙자한 산문시이고, 험버트를 가장한 작가 나보코프의 심미적 고백록이다. 흠잡을 데 없는 산문적 글쓰기는 시종일관 균질한 농도로 독자를 사로잡는데, 소설은 메시지가 아니라 문장으로 승부한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시대를 앞선 작가로서 부도덕한 작가 의식에 대한 세간의 혐의를 의식했을까. 전통적 액자 기법으로 그 혐의를 피해가려 한 것은 독자로서 썩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설계도가 필요 없을 만큼 첫 글이 다음 글을 몰고 가는 글 장단이 독자를 압도하는데 소심한 부채감, 이를테면 작품성에 대한 일말의 회의를 가질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작가 입장에서는 소설은 시작하면 끝내야 할 심리적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정신적 노동의 범주에 넣을 만한 그 작업을 통해 작가는 심연의 경계에서 폭발하는 무질서한 심상을 무한 발설하는 욕구에 휩싸인다. 그것이 단순한 욕구로 끝나지 않고 예술성을 확보하려면 독자보다 심리적·심미적 우위에 있어야 한다. 거기엔 독자를 가르치려는 위선도 자신을 과장하려는 위악도 필요 없다.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작가의식만 있으면 된다. 도덕과 교훈과 감동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입체적 인생의 질문지, 소설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롤리타는 썩 매혹적인 소설이다.

 

 

    

  

2. 공감과 동정

 

  공감과 동정은 우정이나 애정을 둘러싼 여러 환경에 등장하는 보편적 정서이다. 크게 보아 공감과 동정을 같은 범주에 놓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공감과 동정은 별개의 감정이다.

 

 

  심리학에서의 공감(empathy)은 객관성을 담보한 이해의 감정이다. 당사자의 감정을 함께 느끼고, 그 사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이해하되, 나의 입장과 관점을 버리지 않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동정(sympathy)은 주관적 심리 상태의 자기 반영이다. 나도 너와 다르지 않고, 같은 기분이라는 직접적 감정으로 상대에게 쉽게 동화되는 상태를 말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적절한 예가 될 지는 자신이 없다.) 직장 상사에게 서류철을 패대기 당하고 뺨까지 맞은 남자가 있다 치자. 공감하는 여자라면 남자의 서류철 정도를 챙기고, 남자가 자신의 억울한 얘기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남자의 하소연에 맞장구를 치되 객관성을 잃지 않고 가만히 들어준다. 반면 동정하는 여자라면 남자보다 자신이 더 흥분하고 감정이입 되는 바람에 울음을 터뜨리거나 상사에게 덤빌지도 모른다. 난처하고도 억울한 남자의 입장이 곧 나의 감정이 되어 중심을 잃고 동화되어 버린다. 남자는 자신의 감정에 앞서 여자의 태도에 더 당황하게 된다.

 

 

  수치심이나 열패감 또는 슬픔에 휩싸일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동정보다는 공감을 원한다. 동정은 나와 똑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공감은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하느냐 동정하느냐는 ‘감정의 객관화’에 달려 있다. 오늘밤 술 취한 친구가 슬픔이나 분노로 횡설수설할지도 모른다. 동정하고 싶다면 친구보다 더 취한 목소리로 친구 편을 들면 된다. 당황한 친구는 퍼뜩 술이 깬 나머지 다시는 당신에게 하소연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반면, 공감하고 싶다면 친구 얘기에 그저 옳다고 맞장구 쳐주며 들어주면 된다.  비록 취했지만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친구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공감하는 당신은 동정하는 당신보다 향기롭고 미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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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3-04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정의 객관화에 따라 공감과 동정이 갈리군요.
이런 책도 읽으시는 팜므님, 배우게 되네요.
태그의 마지막 문장에 화르륵~ ^^

다크아이즈 2013-03-06 03:53   좋아요 0 | URL
프레님, 저도 잘 몰라요^^*
공감과 동정 부분 읽는데 확 땡기대요.
특히 동정이 사랑이라 착각한 사람들의 결혼 실패기를 보아온 터라
이런 글은 젊은 아그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림모노로그 2013-03-04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정의 객관화라, 대부분 자기의 슬픔을 보이기 싫어하는 이유가 동정이 싫어서겠죠.
동정이 아닌 공감을 하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들어주기만 하기, 요거이 참 어렵더라구요.
롤리타는 정말, 그런 소설 같아요 그냥 듣기만 하면되는
읽으면 공감되는 소설이요.
팜므님의 말씀을 듣고 롤리타를 읽으면
매우, 공감하게 될 것 같아요. 나보코프의 고백을 듣는 것만으로도,
매혹적인 소설이라는 데에 강한 추천을 날립니다 ㅎㅎㅎ

다크아이즈 2013-03-06 03:54   좋아요 0 | URL
감정 객관화 - 이 말도 제가 지어냈어요. ㅋ
감정이 객관화 될 수 있는진 모르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건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잘 안 돼요. 그게 잘 되면 인간이 아니라 신일지도...^^*

Jeanne_Hebuterne 2013-03-04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리타, 발음할 때 마다 입천장을 에로틱하게 건드리는 혀끝.
역시 사람은 작명 센스가 있어야 합니다.

다크아이즈 2013-03-06 04:02   좋아요 0 | URL
네, 이 부분 번역은 권택영 번역 손을 들어주고 싶어요. 의역 되었다쳐도 경쾌하고 리듬감도 느껴지고... 근데 님처럼 '에로틱'하게 감각할 수 있는 그 감각이 전 또 부럽고.^^*
이 드라이한 감각을 일깨워줘 - 전혜린식 발광? ㅋ
 

 

 

 

 

 

 

 

 

 

 

 두 번역본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내 취향으로는 우선은 김진준의 손을 들겠다. 이제 겨우 시작이라 중간에 바뀔 수는 있겠다. 부분 번역 순서는 전자는 문학동네, 후자는 민음사.

 

 

 

 

 

 

 

 

9 <롤리타: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 이것은 내가 받은 기묘한 원고의 제목과 부제이며, 이 글은 그 원고에 붙이는 머리말이다. 원고의 저자 ‘험버트 험버트’는 ~

7 <롤리타, 혹은 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 이것은 필자가 받은 좀 이상한 원고에 붙은 두 개의 제목이었다. 필자의 이 글이 서문이 된 그 이상한 원고의 저자인 ‘험버트 험버트’는 ~

 

 

 

9 현재 컬럼비아 특별구 변호사협회 소속인 그는 내 사촌이자 절친한 벗으로, <롤리타> 출간에 대한 모든 권한을 저명한 내 사촌에게 위임한다고 밝힌 의뢰인의 유언장 내용을 근거로 나에게 이 일을 맡겼다. 클라크가 나를 편집자로 선택한 이유는 내가 모종의 병증과 도착증을 다룬 졸저(<정신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한가?>)로 최근에 폴링 상을 수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7 클라크 씨는 현재 워싱턴 D.C.변호사 협회에 속해 있는데 험버트가 <롤리타>의 출간에 관한 모든 권한을 나의 저명한 사촌에게 위임한다는 유언장의 한 조항을 조건으로 원고를 받았다. 그의 결정은 아마 자신이 선정한 편집자가 방금 폴링 상을 탄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수상작은 <감각들이 의미를 만드는가?>라는 수수한 책이었는데 괴상한 정신 상태와 성도착을 논의한 것이다.

 

 

 

10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정표나 묘비처럼 그의 글 속에 끈질기게 살아남은 몇몇 세부사항(즉 인품과 동정심을 겸비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감춰주고 덮어줄 만한 인명과 지명)을 꼼꼼히 고쳤을 뿐, 나머지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이 놀라운 회고록을 그대로 선보인다.

8 그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 비석이나 이정표(취향상으로나 동정심으로 사람들이 감추려 했을 인명이나 지명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로 줄기차게 나타나는 몇몇 고집스런 내용들을 조심스레 억누르는 것 외에 이 굉장한 수기는 여기 그대로 선보인다.

 

 

 

17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15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머리글 부분을 빼면 실제 본문의 제일 첫 문장은 각 17쪽과 15쪽으로 인용된 바로 윗 부분이다. 이 첫 부분만은 뭔가 자꾸 할 말이 떠오른다. 앞 문장은 완벽한 문학동네의 승리, 뒤 문장은 민음사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원문을 모르는 상태에서 내 멋대로 생각한 것이라 지극히 주관적이긴 하다.) 문학동네 김진준의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설사 원문에서는 대구를 이루지 않았더라도 번역할 때는 섬세한 대구 구조까지 신경 쓴 것 같다. 짧은 문장에서도 문체 미학을 완성하려는 노고가 보인다.

 

 

  민음사 권택영의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시적인 문장이었을 첫 원문이 번역으로 바뀌면서 약간 풀어지고 삐걱대는 느낌이다.

 

  나보코프에게도 아쉬운 점을 느낀다. 기왕 신경 쓸 첫 문장인데 ‘롤리타, 내 몸의 불, 내 삶의 빛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이런 순서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쓸 데 없는 생각도 해본다. 협의에서 광의의 대구, 점층적 기법 등을 제대로 활용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하기야 대가 쯤 되면 좁쌀 영감, 먼지할망구가 되지 않기 위해 잘잘한 데 신경을 덜 쓰기는 하겠다.) 하지만 문장에 치중하는 작가들(우리나라로 치면 김훈, 이승우, 김경욱, 천운영, 기타 여러 작가들)이라면 디테일한 면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런 섬세한 부분에도 조용히 열광하고 숨어서 희열을 느끼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정원 가꿀 때, 안정감과 통일감을 위해 장미 뒤의 수국, 배롱 뒤의 느티를 배열하지 그들을 마구 뒤섞지는 않는다. 그림에 구도가 있고, 음악에도 대위법이 있듯이 글에도 미시적, 거시적 구성을 신경 쓴다면 예술미를 좀 더 살릴 수 있을 것이다.(뭐, 문학이 예술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뒤로 하고.)

 

 

  이번엔 뒷문장. 역시 원문을 안 봐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민음사의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알파벳과 한글 체계가 다른 이상, 역자가 윤문을 했더라도 용서할 만한, 독자를 배려한, 충분히 매혹적인 번역이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원문과 함께 두 번역서를 옆에 두고 부분마다 내 취향에 맞는 쪽으로 골라가며 읽는 재미도 있을 텐데. 한없이 게을러 원 없이 뮝기적(!)댈 망정 언제나 시간은 그런 여유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

 

 

  정말로 하고 싶었던 얘기는 한 마디. 겨우 읽기 시작했지만 나보코프의 문장은 (내게) 넘사벽이다! 방금 아무 페이지나 펼쳐봤다. 가령 이런 문장들의 연속이다.

 

 

 

109(문학동네) 나는 그들이 출발 준비를 하면서 내는 잡다한 소음을 듣고 침대에서 나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포플러나무 밑에 서 있는 자동차가 벌써 부릉부릉 떨었다. 보도에 서 있는 루이즈는 마치 꼬마 여행자가 벌써 저 멀리 나지막한 아침해를 향해 달려가기라도 하는 듯이 한 손으로 눈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동작을 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헤이즈가 소리쳤다. “서둘러!” 그러자 차 안에 엉거주춤 올라탄 나의 롤리타가 막 문을 닫으려다가, 바야흐로 차창을 내리고(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루이즈와 포플러나무들에게 손을 흔들기 직전에 문득 운명의 흐름을 중단시켰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더니 도로 집 안으로 달려들어왔다(헤이즈가 노발대발 소리쳤다). 뒤이어 나의 연인이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내 몸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기세로 부풀었다. 나는 허둥지둥 파자마 바지를 끌어올리면서 방문을 열어젖혔고, 그와 동시에 롤리타가 들이닥쳤다. 제일 아끼는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쿵쾅쿵쾅 헐떡거리며 달려와서 다짜고짜 내 품으로 뛰어들었고 그녀의 순결한 입술은 남자의 시꺼먼 턱 아래 난폭하게 짓눌려 순식간에 녹아들었다. 심장이 팔딱거리는 나의 연인! 다은 순간 나는 그녀가 -살아 숨 쉬는 그녀가, 농락당하지 않은 그녀가 -콩닥콩닥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운명의 흐름이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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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3-01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렇게 비교할 수 있게 문장을 올려주신 팜님, 매력적인 밤의 여인께 감사해요!
페이퍼 마지막 문단은 나도 덩달아 쿵쾅쿵쾅, 콩닥콩닥하게 만들었어요!
나는 연인 때문이 아니긴 하지만요.ㅋㅋ

다크아이즈 2013-03-02 10:44   좋아요 0 | URL
오기 언니, 이제 보니 무작위로 옮긴 아무쪽보다 더 짜릿한 문장들이 천지빼까리예요. 큰일났어요. 섬세한 묘사, 불편한 통찰, 시니컬한 풍자와 무심한 듯한 해학 - 미쵸요~~
안 잘 생겨도 좋으니 차인표 같은 사람이랑은 연애해도 나보코프와는 연애하기 싫어요. ㅋ. 이를 테면 다이아를 사주면서도 '넌 나에게 읽혔어.' 뭐 이런 여유를 부릴 사람... 나보코프는 애인일 때보다 소설가일 때 제격이네요.

프레이야 2013-03-02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이렇게 비교해서보니 확연히 다름이 느껴지네요. 전 민음사 것으로 예전에 읽었는데 문동 것으로 다시 읽고싶어져요. 영화도 보셨나요? 전 옛날 필름도 좋지만 제레미 아이언스가 나온 게 좀더 좋더라구요.ㅎㅎ 롤.리.타. 그나저나 두 권을 비교해서 동시에 읽으시다니 진짜루 대단하세요.

다크아이즈 2013-03-02 10:49   좋아요 0 | URL
(프레님께만 비밀글 ㅋ) 김진준 번역이 더 와닿아요. 번역에도 트렌드가 있을까요.좀 더 젊고, 좀 더 입체적이고, 덜 비문을 생산하고, 더 독자를 배려한다는 느낌...
근데 재미와 불편함과 냉정함 등이 골고루 섞여 있어 내 나름 분석하며 읽느라 진도가 안 나가요.하룻만엔 어림도 없네요. ㅠ

프레이야 2013-03-02 19:59   좋아요 1 | URL
ㅎㅎ 그니까요. 딱 봐도 문동 게 나아요.
문동 게 요즘 번역이 훨 좋더라구요.^^

드림모노로그 2013-03-0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팜므님의 롤리타 , 어떻게 이런 비교가 가능하신지 . ㅎㄸㄸ ~
전 문동의 롤리타를 잠깐 맛배기로만 읽어보았습니다 ㅎㅎ
넘사벽의 문장이라는 말씀에 빵 ~!! 터졌습니다 ㅎㅎ
영화로 보았을때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를 너무너무 잘했던 것 같아요
두 책을 비교하시다니 ~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습니다 ㅎㅎ
해피 주말 보내세요 ~

다크아이즈 2013-03-03 23:29   좋아요 0 | URL
드림님, 꼬박 하루가 걸렸어요. ㅠ
중간에 민음사는 포기하고 꼭 비교할 부분이 필요했을 때 찾가가면서 대조했네요. 두 번역가의 노고가 다 느껴졌지만 문학동네는 편집진까지 발벗고 나서서 한 문구, 한 문장에 최선을 다했다는 게 느껴지네요.
역자 후기를 읽으니 더 그런 느낌이 ^^*

꿈꾸는섬 2013-03-02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권을 동시에 읽다니, 전 생각도 못해봤어요.
팜님 서재는 바탕까지 밤을 상징하는 것 같아요. 밤의 여인, 넘 멋져요.
읽고 싶은 책이 만날 늘어요.^^

다크아이즈 2013-03-03 23:31   좋아요 0 | URL
동시까지는 아니고, 어느 정도 취향이 결정되니 꼭 찾아 봐야 할 부분만 대조하게 되었어요.

바탕은 제가 꾸민 게 아니고, 컴맹이라 귀찮아서 설정 안 했더니 알라딘에서 주는대로 출렁일 뿐이랍니다.ㅠ
개성 강한 이곳에서 이 또한 개성이려니 하고 방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