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그놀리아 - Magno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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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보다 상처         

              




  접시꽃이 진다. 떨어진 꽃잎들 켜켜이 익어간다. 순결하고 고고한 생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저 상처의 무덤. 오점 하나 없이, 소리 소문 없이 깨끗한 생을 마감할 것 같은  붉은 꽃들도 결국은 흉물스런 흔적을 남긴다. 꽃 떨어진 골목을 지나칠 때면 영화 매그놀리아가 떠오른다.

  매그놀리아(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 2000)는 목련꽃을 말한다. 하지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세상의 모든 상처 입은 꽃을 뜻하리라. 포스터 속 활짝 핀 꽃은 자세히 보면 누렇게 타들어 가고 있다. 수많은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로즈니, 릴리니 하는 꽃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많은 것도 이 상처의 키워드와 무관하지 않다. 아무리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도 지고 나면 흉물스런 상처를 남긴다. 생의 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곧 상처의 길을 보듬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렇다면 상처의 고향은 어디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는 그것이 우연이라는 메시지로 와 닿는다. 우리가 주고받는 상처의 대부분은 필연이 예견된 우연으로 생긴다. 생명력이 소진된 꽃은 어디선가 불어온 돌개바람에, 계절을 재촉하는 단비에 맞춤하게 떨어진다. 꽃이 지는 게 우주의 섭리라면 돌개바람과 단비는 상처를 가져올 우연이다. 필연으로 직조된 우주의 부산물인 그 상처는 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보듬어야 할 노력이다. 그런 눈으로 보면 꽃 지는 건 더 이상 서러움도 추함도 아니다. 본시 아름다움과 추함 둘 다 자연의 실체이다.

  우리 일상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꽃 핀 나무든, 꽃 진 무덤이든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눈을 키워 가는 것. 조금만 예민한 자라면 꽃 핀 나무만을 보고 감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꽃이 진 자리, 즉 생의 이면까지를 꿰뚫어 보는 눈이 없는 일상은 공허하다. 꽃이 진 땅까지 무심하게 내려다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키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누군가 소개해준 글에서 ‘모든 진실은 부뚜막에서 죽는다’라는 말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대부분은 가공된 것이란다. 부뚜막 도마 위에서 토막 나고, 절여지고, 튀겨진 채로 밥상에 오르기 십상이란다. 진정한 삶의 태도는 이런 가공된 상태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키우는 것이란다. 도마에 오르기 전 비리고, 꿈틀대고, 때론 썩어가는 이 모든 날것의 실체를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상처를 제대로 이해하고 보듬게 된다.

  비단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더라도 살다보면 사물이나 사람을 그릇 이해하고, 작은 오해로 타인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솔잎처럼 작고 뾰족한 우연들이 모여 상처가 된다. 그 상처가 풍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것을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고, 더러 글을 쓸 것이다.

  T.S 엘리엇이 말했다는 ‘좋은 작품은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라는 말은 적어도 내게 유효하다. 이해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전달될 수 있는 소통이야말로 날 것의 실체일 것이므로. 예를 들면 인간 내면에 감춰진 폭력성을 고발하는 것도 좋은 날것의 재료이다. 도처에 자리 잡은, 위선으로 충만한 인간의 폭력성 또한 상처를 낳는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상처는 떨어진 꽃을 볼 때처럼 사유의 확장을 보장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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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작은 그 여자 동학시인선 98
서숙희 지음 / 동학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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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일랑 시 한 편에




  후다닥, 할당된 영어 문항을 풀어 젖힌 아들 녀석, 문제집을 던지듯 밀쳐놓는다. 얼렁뚱땅 주어진 목표치를 해치우고 ‘개그 콘서트’를 쳐다보며 낄낄댄다. 세상 근심일랑 일찌감치 잊은 표정이다. 그래. 의무 방어전으로 해치우는 공부보다야 웃음 주는 개그 프로그램이 백 번 흥미 있지. 학원 도움 받지 않고 독학하려는 그 태도라도 높이 사야지, 하면서 풀어 놓은 문제집을 살펴본다. 어라차, 그럼 그렇지. 얼마 가지 않아 오답이 나온다. 살짝 문항지를 봤다. 녀석의 오답과 상관없이 제법 흥미 있는 내용이다. 행복해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가, 라고 묻고 있다. 수 년 간의 연구를 통한,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택해야 할 그 확실한 방법이 지문 안에 들어 있다. 

  어느 정치학자가 다국적 대학생들에게 각자 얼마나 행복한지 물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삶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데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 조사했다. 그가 알아낸 바로는 덜 행복한 사람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월급이 인상되어도 더 행복해질 수 없단다. 언제나 더 큰 욕심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만족하는 대신에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일 뿐이다. 고로 욕망을 버려야 행복해진다. 이 단순명료한 명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것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오지선다의 선택항에도 눈길이 간다. 이를 테면 건강을 유지하는 것, 좋은 직업을 갖는 것, 많은 친구를 갖는 것. 목표를 달성하는 것. 욕심을 줄이는 것 중에서 행복한 방법이 무엇인지 고르란다. 텍스트 안에서 답을 고르지 않고, 평소 생각으로 답을 고를 수만 있다면 개인의 인생관에 따라 각 항목 모두가 정답이 될 수 있다. 예상은 했지만 아들녀석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다 답 표시를 해 놨다. 이건 뭐 독해 따로, 자신의 인생관에 따른 정답 따로 택했다고 위안이라도 삼아야 할 판이다.

  열대야마저 겹쳐 잠 못 드는 이 여름밤, 원인은 무엇인가? 제 각기 다양한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위 영어 지문대로라면 욕망을 덜어내지 못한 때문이다. 자녀가 공부 해주기를 바라고, 가장의 월급이 오르기를 기대하는 욕구는 끝내 만족 없는 번민이 되어 평범한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니 위 지문 같은 학자는 역설하게 된다. 욕구를 버려야 행복이 온다고. 이럴 때 한 권의 시집이 위안이 될 수 있을까? 눈썰미 깊숙한 서숙희 시조시인의 ‘손이 작은 그 여자’(동학시인선, 2010)를 읽어 내린다. 내 안에 도사린 허욕의 실체를 점검하고, 조금씩이나마 그 무거운 덩어리를 덜어내려 애써본다.

  번민은 궁극적으로 욕망이 낳은 똥이다. 빨라지고 다양해지는 세상의 행보에 동떨어지고 싶지 않은 욕망은 똬리를 틀다 마침내 밤에 돋는 상처의 달맞이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상처 입은 영혼은 잠들지 않는다 / 새파란 칼날 위에 알몸의 생을 올려놓고 / 한 장씩 꽃잎을 피워 달빛을 베어 물'게 되는 것이다. 욕망의 거리에 내몰린 개별자는 그래도 곧추 직선을 꿈꾸며 스스로를 위무한다. ‘하루치의 밥을 위해 자존심도 유예’하고 ‘생존의 비린내 자욱하게 밴’ 하루를 ‘구부리고 굴’려 고단함을 잠재워 보는 것이다. 제상에 오른 꼬챙이 꿴 조기를 보면서 ‘길 아니면 가지 말고 곧은 것만 좇으라시던’ 말씀을 새겨보지만 그조차 ‘받잡아 따’르기가 어려운 건 내 안의 욕망덩이 때문이 아니던가.

  ‘무우에는 우-하고 고여드는 것이 있다 / 낡고 해진 것들을 둥글게 껴안아/ 따스한 즙으로 젖는 겨울밤의 아랫목’을 발견하고, ‘사람과 사람의 일이 단추를 풀고 채우듯이 / 그렇듯이, 서툴지도 완강하지도 않다면 / 그렇듯 담담하고도 사소한 일’임을 안다면, 그깟 내 안의 허영 한 덩이를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팽팽하게 둥글던 보름달 보내고 열이레 쯤 되는 달밤이 오면 ‘그대와 나 사이에 놓인 아득한 은유 같은’ ‘기우는 저 쓸쓸한 이치를’ 수긍하게 되리라. 행복을 갉아먹는 저 욕망 덩어리가 쉬 깨지지는 않겠지만 그럴수록 그 찌꺼기, 시 한 편에 곱게 씻어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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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7-2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
서툴지도, 완강하지도 않은
그렇듯 담담하고도 사소한 일이지만,
그 안에서 단추를 풀고 채울 때마다 번민하는 것이 인간이죠. ^^

저도 '무우'가 '무'로 표준어화된 것에 엄청난 불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하고 고여드는 것을 빼버린 나쁜 학자들에게 욕을 보냅니다. 더위 엄청 먹어라!!! ^^

까망 여사님의 더위까지도 다 쫓아보내 드릴게요. ^^

다크아이즈 2010-07-23 18:28   좋아요 0 | URL
앗, 글샘님 제 별명이 한 때 까망여인, 이었다는 걸 어째 아시고? 팜므 느와르(제 전공이 불문학입니다.)라는 제 닉네임 보고 팜므 파탈이 떠오르는지 어떤 분은 무섭다고 하시던데, 온순한 제 닉네임은 까망여인(앗, 까망여사가 더 현실적이네요.)이라는 것. 글샘님 알아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

알라디너분들, 저 팜므 느와르이지, 팜므 파탈 아니랑께요~~

무우, 가 무가 된 것은 저도 심히 서운해요. 저 같은 갱상도 사람들은 무우, 할 때 뒷글자인 <우>자에 액센트를 주는데, 서울 사람들은 <무>에 강세를 주다보니 뒷글자 <우>를 있는 듯 없는 듯 무시하다 보니 그런 결과가~ 실제로 <무우>는 <무>보다는 <우>의 강세에 더 의미가 있는 말일 터인데... 정말 아쉬워요. <우~~>의 깊은 뜻을 놓친 그 학자들,글샘님 더위까정 몽땅 받아라, 우쒸!
 
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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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결에 뉴스가 들린다. 알람으로 맞춰놓은 텔레비전 아침 일곱 시 뉴스. 천안함 침몰 현장에서 수거한 알루미늄 조각이 너무 작아, 외부 공격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물로 단언할 수 없다는 국방장관의 말을 전해준다. 여기까지만 들었으면 좋으련만 해군참모총장이 보복의지를 밝혔고,이에 장관마저 ‘동의한다’고 말했단다. 물론 이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고 싶진 않다. 분노하는 국민들에 대한 심정적 대변쯤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원인 규명도 명확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이런 멘트는 불편하기만 하다.   

  그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 (이후, 2004)이 오버랩 된다. 우리는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에 대해 각자의 방식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하는 그 타인의 고통은 항상 연민이나 배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 고통은 유흥거리가 되어 우리 눈을 유혹하거나 이미지 조작의 실체가 되기도 한다. 전쟁 있는 곳의 육체적 고통이 그런 흥밋거리와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고, 우리가 그런 전쟁의 불필요성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이 책은 경고한다. 전쟁에 수반되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수잔 손택은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인류는 전쟁의 역사였고, 그것은 남성성의 욕망 속에 전쟁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손택은 보고 있다. 종군 기자들에 의해 유포되는 전쟁의 참사 현장은 사실성을 담보할지는 모르지만 진실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타인의 고통마저도 우리는 소비 지향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한 편의 자극적인 영화 같은 전쟁의 이미지들은 관음증적인 소비 주체자들의 구미를 끌어당긴다.

  전쟁 종군 기자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의 사진도 실제로는 이미지 조작을 한 것도 있다. 수잔 손택은 통찰한다.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쟁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 중 아군의 육체적 고통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강화에 한몫을 담당한다. 갈기갈기 찢긴 사체나, 팔다리가 잘린 병사들, 입 돌아가고 한 쪽 눈이 사라진 고통 받는 피사체가 그들이 아닌 내 쪽 사람이라면 우리는 동정보다 분노가 먼저 인다. 저런 죽일 놈들, 당장 나아가 더한 복수를 하리라. - 이런 인지상정의 정서를 이용하는 쪽은 다름 아닌 집권자들이다. 그들에게 국민들의 순수한 분노야말로 집권 이데올로기적 연대를 강화하는 데 더할 나위없는 보탬이 되는 것이다. 수잔 손택은 말한다. 이런 순수한 분노야말로 무지하고 천박한 것이라고. 

  이데올로기의 강화 못지않게 전쟁의 이미지가 주는 또 다른 왜곡은 유흥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사진이란 텍스트가 이미지 조작에 쓰인 것은 아니었다. 각종 전쟁 사진이나 다큐멘터리의 출발은 당연 인류에게 말 걸기, 라는 순수성에 있었다. 전쟁의 참상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이었을 게다. 그리하여 인류 공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라도 전쟁이란 괴물을 찬미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 전쟁 사진의 용도는 변질되었다. 타인의 고통은 나와 무관한 오락거리가 되어 버렸다. 구경꾼으로 전락한 나는 타인의 시련과 고통을 즐기기에도 벅찬 것이다. 왜냐면 다양한 미디어가 전하는 그 고통들은 나와 먼 동네의, 한 편의 영화 같은 볼거리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과 전쟁에 대한 고통은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무지가 영혼을 잠식하는 동안, 우리는 전쟁 참상의 심각성을 놓쳐버리게 되었다. 보복을 꿈꾸는 전쟁이야말로 또 다른 고통을 양산할 뿐이다. 세상 갈등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소통을 모색해나가려는 모든 시도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다. 전쟁의 본성에서 인간 연민의 한계를 채찍질하는 이 책이야말로 전쟁의 불필요성을 낮은 목소리로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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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미 2010-06-09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이 근처 미술관에 있는 작은 도서관 방에서 어떤 사진가가 수잔 손택을 찍은 사진들이 가득 담긴 책을 봤어요. 그 사진들을 통해 수잔 손택이란 여자를 맘껏 봤죠. 흰머리를 너덜 너덜하게 두고도 멋져 보이는 여자라고 생각했죠.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신가봐요...

다크아이즈 2010-07-23 04:50   좋아요 0 | URL
맞아요. '흰머리 너덜너덜'이 손태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보인다는 것. 갑자기 그 미술관이 궁금해진다는...
 
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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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가 하나의 리뷰가 되어버리는 수잔 손태그

41 몇 개의 선택된 사진의 전쟁들 속에서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일 뿐이다. 그 의식은 금방 불타올랐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뒤, 곧장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져갈 것이다. 글로 씌어진 이야기와 대조적으로, 사진은 단 하나의 언어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잠재적으로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 피가 흐르면 앞쪽에 실어라 (39)

  65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 예술은 지옥의 묘사를 통해서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켰다.




110 이런 사진들이 보여주는 광경에는 이중의 메시지가 있다. 이 사진들은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122 피사체가 전혀 포즈를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찍었다는 이미지가 평범해 보이지 않을 경우, 보여져야 할 필요가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행위는(고통으로 가득 한 현실을 눈앞에 바짝 들이대는 식으로)보는 사람들을 괴롭혀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라고 강요하는 꼴이 되어버린다.~전쟁 사진을 통해서(동정심, 연민, 분개 등) 감정을 착취한다는 쟁점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50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음증적인 향락(그리고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167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오늘날에는 이렇듯 도덕적으로 모자란 상태에 남아 있기가 훨씬 더 어렵게 만드는 이미지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다. 잔혹하기 그지없는 이미지들이 늘 우리를 항상 따라붙는 것이다.


186 ‘로버트 카파의 쓰러지는 병사’라는 논문에서 리처드 휄런은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카파가 어느 공화군 병사의 사살 장면을 전선에서 우연히 찍게 된 과정의 세부 정황은 사실상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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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雨(곡우) 2010-04-29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이 이 책을 읽고 밤잠을 설쳤다는 그 유명한 책이네요..
저두 읽어 보고픈데 요즘은 어찌 이리도 바쁜지 시간이 나지를 않으네요..
나중에 느와르님의 멋진 리뷰로 대신하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12-01-16 18:28   좋아요 0 | URL
곡우님 잘 계시죠? 이 책, 교도소 독서클럽에서 토론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단, 불편한 장면들이 사진으로 나오니, 자신의 과거가 오버랩 되어 많이 힘들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있었어요. 미처 거기까지 생각 못한 제 맘이 짠하더군요. 곡우님 리뷰 좋아하는데 잘 안 올라오네요. 저처럼 바쁘신가 봐요.ㅎㅎ

2010-05-02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0-05-06 18:39   좋아요 0 | URL
님 좋은 정보 정말 감사해요. 요즘 하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고 있어요. 체력이라도 따라주면 좋겠지만, 그나마 남는 시간엔 잠 자요. 괴롭습니다. 서재에 자주 오지도 못해요. 답문 늦어서 죄송해요. ㅎㅎ
 
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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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대녕은 윤대녕에서 한발자국도 넘어서지 않는다.  내게 처음 느낌 그대로인 지점에서 진척이 안 되는 작가는 윤대녕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감상의 걸음이 퇴보하거나 전진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지 않나? 실망하거나 혹하거나가 없는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딱히 누가 묻는다면? 나는 그(의 작품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해야 할 것 같다.   

  그의 레퍼토리 (순전히 내 느낌임) 

  1. 작가이거나 프리랜서이거나 (고급)백수인 남자는 여행을 떠난다. 

  2. 그곳에서 여자를 만난다. 미리 약속되었거나 우연이거나. 이번에는 약속된 만남이 많네. 

  3. 남자는 하나 같이 60년대 대화체를 애용한다. 설사 남자가 1990년대 말에, 스물 아홉이고, 만나는 여자가 스물 일곱일지라도  여자에게 ~하오, 체를 쓴다.   

  4. 남자와 나이 차이 별로 없는 여자 주인공은 항상 남자에게 경어를 쓴다. 그것도 모자라 항상 남자보다 적극적이다.  남자가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 알아서 약속 장소를 정하고, 알아서 방(호텔)을 구하고, 알아서 음식까지 척척 마련한다. 이런 우라질~ 대개 유부남, 유부녀 이거나 유부남에 미혼인 경우가 많은데, 저렇게 적극적일 때까지 남자는 그저 묵묵히 여자를 따를 뿐이다.  

  하오체를 쓰는 나이 차 나지 않는 남자에게 경어를 꼬박꼬박 써가며, 주체적으로 남자를 리드한다. 그런데도 어쩐지 별로 주체적인 것 같지 않아 기분 꿀꿀하다. 남자는 잘 나서, 혹은 소심해서, 아님 귀찮아서 그런 여자를 잘 따라 주는 걸까.  

  꿈에라도 윤대녕이 그리는 남자상은 만나고 싶지 않다. 현실에서 윤대녕이 그리는 여자가 있을까봐 짜증난다. 가만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데, 옛 여자가 전화해서 만나자니 한 번 만나 봐야지, 하는 남자 보다는, 옛 여자가 만나고 싶으면 쿨하게 전화하는 남자가 낫다. 물론, 안 하는 남자가 더 낫다!  

  참 쉽게 쓴다. 매우 빨리 읽힌다. 소설은 원래 이렇게 쉽게 써서, 대중에게 먹혀야 한다. 자고로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기능은 재미와 예술성이다. 재미도 있고, 예술성도 있으니 소설의 기능면에서는 만점이지만, 텍스트를 이루는 캐릭터들이 나는야 억지스럽게 보이누나. 내가 선호하는 캐릭터들이 아니라서 그런 걸 작가에게 원망해봤자 뭐 하랴. 보리의 수경도 내겐  와닿지 않는다. 왜 첫번째로 실었을까?  보리, 한 작품만 보고도 실망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여자를 소설 속에 가두어 두려는 걸까?  작가는 여자를 여자만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쓴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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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4-2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서 윤대녕 소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뭐랄까, 토요일 오후에 아무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한 사람, 그런 사람 같아요. 그 사람 소설은...
치열하지도 않고, 치열한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어 보이고... 그치만 끝없이 심심한... 욕망도 열정도 없는... 심심한 토요일... 그닥 피곤하지도 않은... 조금 피로한 중년의 남자의 심심한 토요일 오후...
술 한 잔 하기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운동도 별로인... 프로야구도 즐기지 않는 심심한 남자의... ㅋㅋ

다크아이즈 2010-04-25 13:37   좋아요 0 | URL
아, 소심하게 감상문 올렸는데(윤대녕을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글샘 같은 동지를 얻다니. 세상은 다양하고, 생각은 다 다르니 넘 소심해지지 않을랍니다. 맞아요. 싱겁거나 심심하거나 그의 작품이 왜 그런가 싶었더니 치열하지 않아서 라는 말이 정답이네요.

알로하 2010-05-07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윤대녕씨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제비를 기르다' 는 참 좋았습니다. 작가가 그리는 여성의 캐릭터는 감정을 주고받는 상대라기보다는 주인공 남자를 자극하는 추억이나 그리움? 같은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작가가 여자를 모른다, 라는 팜므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네요. 소설의 정조는 좋은데 여자든 남자든 너무 수동적이라는 거죠.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 자체가..

ugha 2010-12-17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콕 찍어서 쓰셨어요. 읽으면서 마죠마죠 하면서 손뼉을 쳤답니다.

다크아이즈 2010-12-18 12:09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요즘 <천지간> 다시 빼들고 있는데, 잘 쓴 느낌보다 윤대녕 차례가 되었으니 이상 문학상을 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