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김장 마늘 찌났다.(찌어 놓았다). 필요하면 가져가고 안 그라만 이웃들 나나(나줘) 주께.”  



  엄마의 전화 목소리. 김장철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웬 김장 타령인가 싶지만 나는 엄마의 그 맘을 안다. 차례 지낸다는 핑계로 추석에 찾아 뵙지도 못한 딸년에게 엄마는 그렇게 미끼를 툭 던져 보는 것이다. 엄마 식 표현대로 살림에 ‘게실러빠진’ 나는 그 실용적인 미끼를 덥석 물 수밖에.  



  “알았어요, 엄마. 박서방 하고 오후에 잠깐 들를게요. 마늘 딴 사람 주지마.”  



  엄마식 자식 사랑법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 나는 짐짓 마늘이 아쉬운 척한다. 당신 손수 사서 까고 찧은 마늘이 엄마집 냉동실에서 기다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팔순 엄마에겐 아직도 손 가야할 막내딸년이 있는 것이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효녀는 못 된다. 아쉬운 게 없으니 먼저 전화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궁금한 엄마가 안부를 물어오면 그제야 내가 무심했구나, 하고 반성을 하는 정도이다. 오죽하면 엄마는 ‘니한테서는 전화 오는 기 더 걱정된다. 무슨 안 좋은 일 있나 싶어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하는 말은 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엄마에게 가는, 멀지도 않은 그 길을 선심 쓰듯 달려간다. ‘과부 할매들의 사랑방’이라고 내가 부르는 엄마집 마당에 들어서자 윷놀이를 즐기던 할머니들이 우르르 자리를 피하신다. 주인집 사위가 들어서니 배려한다고 괜히 어려워들 하는 것이다.  



  친정집엔 엄마처럼 남편을 먼저 보낸 할머니들이 하루걸러 진을 친다. 주로 십 원짜리 윷놀이를 하는데 할머니들만의 노하우로 만든 싸리나무 윷가락은 좀 과장하자면 던졌다 하면 모나 윷이다. 엄마의 성당 동료들이기도 한 할머니들은 연령대도 다양한데 질리지도 않는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엄마의 사랑방을 찾는다.  



  이웃을 맞이하는 것도 피곤할 때가 있단다. 그때 엄마는 이불집으로 피정하듯 떠난다.  그곳은 엄마만의 또 다른 사랑방이다. 자투리 천으로 베개와 쿠션과 조각보를 만들며 노동의 신성함을 즐기신다. 폐품 활용한 엄마만의 작품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오르면 원앙금침을 얻은 듯 충만해진단다. 살뜰한 엄마의 작품들은 자식들이나 이웃들에게 좋은 선물이 된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병원 입원은커녕 몸져누운 적조차 없었다. 언제나 강인했다. 약한 몫은 차라리 아버지 차지였다. 지병을 달고 살았던 아버지를 대신하자면 엄마는 더 강해지고 더 자식들을 챙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호미도 날이지만 낫과 같이 잘 들 까닭이 없고, 아버지도 어버이시지만 어머니 같이 사랑하실 이 없다’는 고려가요 사모곡은 딱 우리엄마를 두고 한 노래였다.   


  그런 엄마도 이제 몰라보게 쇠약해졌다. 그건 이번에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엄마와 집 앞 방죽에 올랐다. 출렁다리를 건너 건너편 유원지까지 가서 저녁을 먹고 올 참이었다. 사위와 손자의 호위를 받으며 딸과 손잡고 걷는 것에 엄마는 꽤 만족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숨이 차고 무릎이 시큰거린다고 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언제까지나 다부지고 강한 엄마일줄 알았는데 세월 이기는 장사 없었던 것이다. 팔순 노구의 엄마를 철없게도 나는 여전히 건강한 엄마, 강한 엄마로 생각했던 것이다.  



  유원지 나들이를 포기하는 대신 가까이 있는 중국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사한 식당에서 그럴듯한 요리를 앞에 두고도 엄마는 쉬이 젓가락을 입에 대지 못하신다. 물컹한 해물을 사위와 손자와 딸년 접시에 옮기느라 바쁘다. 엄마에게 가족과 함께 하는 식사는 ‘밥’ 이상의 그 무엇임이 전해지는 순간이다. 무심하고 딱딱하기만 한 내 속내도 뭔가 물컹한 것으로 차오른다.   
 


   엄마의 마늘 보따리를 안고 귀갓길에 오른다. 사위가 마련한 용돈을 엄마는 손에 잡히는 만큼 뚝 떼서 ‘뚱가 과자값 해라’ 하시며 차안으로 던지신다. 그리곤 골목으로 물러나 꼼짝 않고 서 계신다. 딸년 탄 차가 멀어지도록 하염없이 그대로. 그 모습 돌아보기 힘들어 나는 창을 열고 냅다 소리를 지른다.  



  “엄마, 빨리 들어가. 그래야 내 맘이 편하다고!” 
 


  대답 대신 괜찮다는 엄마의 손사래만 차창 넘어 아롱진다. 매운 생을 돌아온 엄마 같은 마늘 냄새가 차안에 진동한다. 맵싸한 눈물이 자꾸 맺힌다. 어스름 속, 갈바람에 일렁이는 대추나무 아래서 엄마는 그렇게 한 점 소실점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10-10-03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멀어져 소실점으로 남는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네요.
엄마의 도움이 여전히 필요한 자녀를 보면서 당신들은 보람과 행복을 느끼시겠죠...
우리 친정엄마도 작년 다르고 올 다르고...이제 늙고 기운이 쇠하여지는 모습 보는 거 힘들어요.ㅜㅜ

다크아이즈 2010-10-05 21:15   좋아요 0 | URL
여전히 잘 계시는 님... 힘이 되는 바지런한 님.. 제 게으름을 이해해줄 것만 같은 순오기님.

글샘 2010-10-03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내 맘 편한대로... 그렇게 살고 있죠.

다크아이즈 2010-10-05 21:17   좋아요 0 | URL
글샘님은 효자시지요? 너무 효자라도 사모님이 곤란하겠지만... ㅎㅎ

꼼미 2010-10-15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셔도 그립고 안계셔도 그리운게 엄마인 것 같죠. 그래도 건강히 곁에 계신 어머니가 있으신 님이 부러워요...^^

다크아이즈 2010-10-15 19:37   좋아요 0 | URL
앗, 꼼미님 언제 들어도 정겨운 이름. 미시건에도 가을이 왔나요?

꼼미 2010-10-20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미시건에도 가을이 왔습니다. 주말에 짧은 여행 다녀왔는데 제 개인 블로그에 사진을 몇장 올려 놓았죠. 팜므님도 특별한 가을 만드시길...
 

 

책 맨 앞에 쓰는 짧은, 작가가 인용한 문구를 뭐라 하나? 권두문? 

타인의 고통, 에서 수잔 손태그는    

보들레르  --- "......정복당한 자들을!" 이란 문구와

테니슨의 말을 인용했다. -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 매혹적인 문구다.   

친절하게도 원문까지 소개해 놓았다. - 돼지라굽쇼?...... 소인도 잘 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가 저를 더럽혔을 뿐이죠. 

체험이라는 추잡한 보모야말로 인간 고통의 근원이 아닐까?  

손태그는 어떤 생각으로 이 문구를 택했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꼼미 2010-05-19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붙잡고 싶은 것은 반대로 '생의 모든 고통은 생의 모든 아름다움이다. 체험이라는 모든 추잡한 보모까지도'네요. 이 모든 모순과 더러움과 고통 속에서도 인간 생의 아름다움을 붙들고 싶은 건 내가 너무 약하고 못나서인지... 잘 지내시지요?

다크아이즈 2010-07-2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운 꼼미님... 제 무심함을, 게으름을 용서하세요. 여차저차하다는 핑계만이...
 

 

그가  달린다.  

곧장 달린다.

부러질지언정 마냥 달린다. 

나까지 달리자고 소매끝을 당긴다.  

달려야 하는 게 맞지만, 맞는 게 불편한 나는 망설인다.  

맞는 게 옳은 것도, 망설이는 게 그른 것도 아님을, 

맞는 게 그른 것도, 망설이는 게 맞는 것도 아님을,   

불가해한 오답일수록 삶에선 정답에 가까웠으므로  

(그것을 불혹 지난 한 시절에 알았다)  

나는 편리한 망설임을 택한다.

망설임이 누는 묵은 똥이야말로 내 존재증명 

내가 눈, 똥덩이를 연민으로 되돌아 보는 것 

그가 본, 가래침을 외면하며 앞으로만 달리는 것   

그 둘 다 불가해하기만 한 생의 정답인 것을   

그가 상처 많은 영광을 골방에서 맛볼 때  

나는 군중 속에서 (기어이) 백전백패할 것이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서문 패러디)  

 

......   사람 가까이 하면서 나는 깨친다 

모든 사람은 다 다르고 

개별자 저마다가 옳다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잘 집중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입장에서 그런 면은 환영받을만한 건 못된다. 드라마는 삶의 표현 양식 중 하나이다.  갈등, 번민, 절망, 화해하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삶을 녹여내는 글쓰기와 그리 무관한 일은 아니다. 등장인물들이 내뿜는 촌철살인의 대사와 적재적소의 기발한 에피소드 같은 걸 눈썰미 있게 보면, 분명 글쓰기에도 도움이 될 터인데 쉽게 몰입하지 못한다. 이야기를 따라가거나 주인공에 감정이입 되기도 전에 비현실적인 상황이 전개되면 나는 그만 지겨워져 딴 짓을 하곤 한다.  





  불륜 설정, 대가족주의에 대한 환상, 신데렐라 만들기, 은근한 쇼비니즘 등이 드라마의 소재가 되어 온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시청률을 의식해야 하는 방송사 입장에서는 대중의 입맛을 자극하는 그런 소재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한데, 도가 지나쳐 리얼리티 부재를 넘어 막장으로 치닫는 드라마에서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욕하면서 본다는 그런 드라마에 쉽게 동참하지 못하는 내 성정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아직도 헛갈린다.   



  어제 우연히 케이블 방송에서 앙코르 단막극 한 편을 만났다.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라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내 오감은 화면에 맞춤하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장편 드라마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과는 다른 신선한 감흥이 절로 일었다. 단숨에 몰입한 이 작품이 여운이 남는 건 짧은 시간, 오직 작품성만으로 시청자와 공감하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경희 드라마작가의 ‘우리햄’(드라마 시티 단막극, 2004 방영)은 이제 내겐 매혹적인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노망 든 할아버지, 병석에서 매일 죽는다는 말을 달고 사는 할머니 그리고 주변 모든 이들이 포기한 문제아 우리햄(우리형님), 이 작품은 이렇게 아이보다 못한 어른 셋을 건사하는 아홉 살 철기의 고군분투 생활기를 담은 단막극이다. 



  <우리집에는 얼라보다도 몬한 어른이 서이나 된다. 첫 번째 얼라는 노망이 걸리가 손자가 되는 내보고 오빠야, 오빠야 하는 할배고, 두 번째 얼라는 지난겨울부터 방에만 꼼짝도 안하고 들눕어가 맨날 죽는다죽는다 꽁까는 할매고, 세 번째 얼라는 학집동포(학교, 집, 동네에서도 포기한 문제아) 우리햄이다.> 이렇게 방백하는 애어른 철기. 아홉 살이 감당해야할 삶의 비애와 의연함 앞에서 나는 서늘한 듯 다사로운 한줄기 바람이 지나는 걸 느꼈다.    



  어린애처럼 과자 한 봉지에 집착하는 할배, 똥오줌 기저귀를 자주 갈아줘야 하는 할매, 여전히 건달 신세를 면치 못한 우리햄. 햄(형)이라 부르지만 실은 자신의 아빠임을 진작에 철기는 알고 있다. 이 작품이 과장되지 않고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건 철기의 속 깊은 행동 이면에 동심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말썽만 피우는 우리햄을 떠나, 풍문으로만 듣던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기차역 장면. 딱히 희망적이랄 것도 없는 그 계획이 현실이 되기 전, 철기는 플랫폼에서 우리햄의 진심을 알아 버린다. 자신을 버린 사람은 망나니 아빠가 아니라, 돈 있는 남자를 따라 간 엄마였다는 사실. 플랫폼 수하물 뒤에서 배불뚝이가 된 엄마와, 떠난 엄마로부터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입씨름 하는 아빠를 훔쳐보던 철기는 풀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고 만다. 애어른을 버린 자리에 아홉 살 다친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앉은 것이다. 화면을 통해서 얻는 깊은 울림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절감한 장면이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았을 때도, 할배의 억지와 할매의 투정과 우리햄의 속썩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아홉 살의 의연함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웠던 가를 반증하는 것이기에 더한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진정한 부성애를 맛보게 된 철기는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 번째 얼라는 아홉 살이나 묵은 기, 즈그 아부지 무등 타는 거로 제일 좋아하는 나, 강철기다.> 오프닝을 살짝 비튼 피날레. 이런 수미쌍관의 맵시덕분에라도 이 작품은 오래토록 내게 여운을 남길 것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10-03-08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님의 글로만 본 드라마지만 정말 괜찮은 드라마네요.
욕하면서 본다는 드라마 대열에서 이탈한지는 아주 오래 되었지만, 요즘 파스타에 꽂혀서 백만년만에 드라마를 보게 됐어요.ㅋㅋ 우리애들이 엄마도 보통 아줌마와 다르지 않구나!를 외쳐대지만 그래도 꿋꿋이 보고 있어요. 아~ 오늘은 월욜 파스타 하는 날이구나, 룰루랄라~ㅋㅋㅋ

다크아이즈 2010-03-24 20:38   좋아요 0 | URL
아웅, 저도 드라마에 꽂히고 싶어요. 노력해도 조금만 보다 보면 엉뚱한 데로 빠져요. 관심 덜 한 곳에, 몰입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穀雨(곡우) 2010-03-08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능적이든 구조적이든 결손가정이라는 게 마음이 짠~해지는 법인가 봅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홉살이여서 그런 지 전 <아홉살 인생>이 떠오르네요.
다른 세상이지만 동심은 세상에 덜 패이고 덜 깍인 느낌입니다.
드라마, 전 광입니다.^^ 남들 안 보는 드라마만, 진부해 빠진 소재지만 가족 간의
사랑, 희망... 뭐 그런류의 드라마 좋아라합니다.^^

다크아이즈 2010-03-14 23:5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아홉살 인생의 이경희 식 버전이죠, 뭐.
드라마 광 되는 법 좀 가르쳐 주시와요. ㅋㅋ 도무지 몰입 단계까지 힘들어요.
 

  나는 한 남자랑 십구 년째 살고 있다. 그럭저럭 그 많은 시간을 별탈없이 건너온 것은 전적으로 그 남자 덕분이다. 이런 밑지는 고백을 하는 건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시계바늘이 세 시를 향해 가고 있고, 아무래도 이 시간은  이성의 머리칼이 곧추 서기보다는 감성의 손끝이 예민해질 때니까. 이런 틈을 타 양심고백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비록 내일 한낮  멀쩡한 정신이 되었을 때, 이 글이 손발 오그라들게 한다며 지우게 될지라도.    

  천성이 게으르고,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공주과인 나는 그 남자 때문에 전업주부로서의 자생력을 점점 잃어 가고 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 볼품없는 살림솜씨는 십구 년째 자발적 퇴화 진행 중이시다. 번듯한 직장이 있어 시간에 쫓기는 것도, 쌈박한 재테크 솜씨로 큰 소리 칠만한 상황도 아니면서 어쩌자고 뻔뻔하게 주부로서의 직무유기를 행하고 있는지지 불가해하다. 하지만 그 답을 나는 정작에 알고 있다. 십구 년 산 남자의 이해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 대신 포기, 라는 말이 더 적확하겠지만 그 표현 쓰면 너무 서글퍼질 것 같다.) 

  오늘 저녁에도 변함없이 내 할 일(딱히 할 일이랄 것도 없지만, 여기서 <내 할 일>이란 가사노동을 제외한 내 개인적인 모든 활동을 말한다.)을 하고 있는데, 그 남자는  자신의 출근복과 와이셔츠를 한무더기 가져다 놓고 내 옆에서 묵묵히 다리기 시작한다. 괜히 계면쩍고 미안해진 나는 '히야, 언제봐도 당신은 뜬 구름보다 쉽게 바지주름을 잡네.'라고 딴에는 유머랍시고 한마디 했다. '괜히 미안한 척 말도 안 되는 멘트 안 날려도 된다. 속 보인다'라고 그 남자가 멋대가리 없게 받아친다. 지기 싫어 나도 모르게 또 다음 멘트를 날린다. '뭐,꼭 전업주부라고 옷 다리라는 법 있냐?' 그 말은 안 하는 게 나았을까? '어이구, 니가 전업주부면 내가 옷 다리겠냐?' 이런 비아냥을 들었으므로. (그 비아냥거림 속에 숨어 있는 그 남자의 속 깊은 신뢰를 발견하는 재미는 글로 표현하기엔 벅차다) 

  그 남자 아니라면 '직장없는 취업주부' 행세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까탈스런 남편 만나 몸과 맘을 다친 친구가 있다. 하루 다섯 건씩 과외하면서, 삼수하는 아들 뒷바라지 하는 것도 모자라 배려없는 남편 때문에 힘들어 하는 친구와 통화할 때, 실수라도 그 남자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는다. 그저 언제나 그렇듯, 미뤄둔 <남편 흉보기>대회에 참가한 것처럼 과장해서 그 남자의 단점을 읊어댄다. 어쩌면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그 남자이지만 입장 바꾸면 내 단점은 그보다 훨씬 더하다. 따라서 이만하면 감사한 일이라고 오늘 같은 감상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컴맹인 마누라를 위해 엑셀 수식을 만들고, 깔끔하게 자료를 재배치하느라 잠자리에 늦게 든 그 남자, 지금 옆에서 열심히 코 골고 있다. (자료 만들어 주면서도 어찌나 잘난척을 해주시는지 당장 컴퓨터 배우러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꾹 참았다. 삐지면 회복하는데 일주일 이상 걸린다. 이런 우라질리아~) 늦게까지 잠 못 들고, 서재질이나 하고 있는 마누라의 무서운 밤을 위해 불 끄지 않고서도 마누라 곁에서 잠드는 습관을 들인 그 남자. 잠들기엔 너무 밝다고, 다른 방으로 결코 피신하지 않는 그 의리야말로 십구 년이 낳은 미운 정 고운 정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그 남자 앞에서 숱하게, 오묘하게 변덕스런 내 본심은 더도 덜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의 상태가 아닐까 싶다. 코 고는 그 남자의 콧머리를 한 번 비틀어주고  곧장  베개 끌어 안고 잠이나 자야겠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10-02-21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손발 오그라드는(정말?^^) 염장 페이퍼네요.^^
나는 남편 셔츠 안 다려준지 오래됐고(아니 다림질이 필요없는 옷을 주로 입으니까^^)
아들 교복은 열심히 다려준답니다. 남편보다 애인이 더 좋잖아요.ㅋㅋ
사실 다림질은 남자들이 더 잘한대요. 군대에서 주름 칼처럼 잡았던 전적이 있는지라...
함께 한 세월이 19년이라니 님도 연차가 꽤 높으시군요.^^

다크아이즈 2010-02-23 12:1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은 자식 농사 잘 짓고 있는 걸로다가 제대로 염장인걸요. ㅋㅋ 저도 울 아들 교복은 다려줘요. 혹시라도 여학생들이 찜 해줄까 싶어서요. 맞아요, 울아저씨도 칼주름 잡아요. 것 갖고도 얼마나 잘난척인지...

비로그인 2010-02-22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얼마 전 `내 꿈은 현모양처'라고 미용실 언니에게 이야기했더랬지요. 그랬더니 미용실 언니 왈, `전 그냥 모처 하고 싶어요'

엥? 말인즉슨 `현, 양' 이 글자는 제겐 해당사항이 없어요' 라는 것이었지요.

아, 나도 그냥 모처구나. 현진건의 빈 처 패러디도 아니고 이건 뭐람.

다크아이즈 2010-02-23 12:10   좋아요 0 | URL
어멋, 제가 존경하는 주드님 납시었다. 우아한 포스에 감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 주드님은 모처로만 있어도 현양의 포스가 느껴지니 그걸 즐기시기만 해도 돼요. ㅎㅎ

2010-02-23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3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3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0-02-26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옛날엔 두어 달에 한번쯤 옷도 다리고 했는데요...
요즘 안했더니 직장 다니는 아내가 세탁소에 가져다 맡기더라구요.
편하기도 하고... 싸고 하니깐...
다리미는 잊고 삽니다. ㅎㅎ

다크아이즈 2010-02-28 03:26   좋아요 0 | URL
직장 있는 여성의 (가사노동) 직무유기야 백만 번 이해되지요. 그런 여성들을 위하여 마을마다 밥공장이나 세탁소가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임돠~ 글샘님처럼 되어야 정상이라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