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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들의 메아리
바버라 데이비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퍼블리온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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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처음부터 사건으로 사람을 끌어당기지 않는다. 대신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시작한다. 낡은 종이를 손끝으로 넘기는 감각, 오래된 페이지에서 올라오는 냄새, 누군가의 시간이 얇게 눌어붙어 있는 것 같은 느낌. 오래된 책들의 메아리는 딱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야기가 빠르게 달리기 전에 먼저 분위기로 독자를 붙잡고, 그 분위기가 어느 순간 궁금증으로 변한다. 왜 이 책은 이렇게까지 ‘책’ 자체를 중요하게 다루는 걸까. 그리고 그 책들이 품고 있는 마음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주인공 애슐린은 희귀본 서점을 운영한다. 설정이 멋있어서가 아니라, 애슐린이 책을 대하는 태도가 꽤 진지하게 그려져서 좋았다. 책을 좋아한다는 말이 취미가 아니라 생활이고 감각처럼 느껴진다. 책의 손때, 종이의 무게, 누군가의 시간이 남아 있는 물성 같은 것들이 이야기 안에서 허투루 소비되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초반부터 자연스럽게 공감이 붙는다.

특히 아래 문장들을 만난 순간부터 이 소설이 더 궁금해졌다.


책이 감정이야. 책은 우리에게 감정을 느끼게 하려고 존재하지. 우리를 우리의 내면과 연결해주기 위해, 가끔은 우리가 자기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들과 연결하기 위해 존재해.


독자 없는 책은 백지와 같다. 어떤 숨결이나 맥박도 없는 단순한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세계에 일부가 되는 순간 생명을 얻게 돼서 그때부터 과거와 현재가 생긴다.


이 문장들이 예쁘기만 해서 남는 게 아니라, 소설이 실제로 그 감각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움직인다. 제목의 ‘메아리’도 그 연장선에 있다. 애슐린은 어떤 책을 손에 들었을 때, 그 책에 남아 있던 감정을 잔향처럼 고스란히 느낀다. 이게 과장된 장치처럼 튀기보다는, 우리가 책을 읽다가 문장 하나에 갑자기 마음이 건드려지는 순간—내 안에 있던 감정이 예상치 못하게 올라오는 순간—을 조금 더 선명하게 서사화한 느낌이라 설득력이 있었다. 읽지 않은 독자에게도 이 정도면 ‘메아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감이 올 것 같다. 소리가 아니라, 책 속에 남아 있던 마음이 현재로 되돌아오는 방식에 가깝다.


그리고 이 소설이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지는 건 『후회하는 벨』과 『영원히, 그리고 다른 거짓말들』이라는 두 권의 ‘책 속의 책’이 등장하면서다. 두 권은 같은 사랑과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결로 보여준다. 한 권을 읽을 때는 이게 진실이겠지 싶다가, 다른 한 권을 읽는 순간 방금 믿었던 감정이 흔들린다. 그래서 독자는 누가 맞는지 판정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사람은 왜 자기 이야기를 저런 방식으로 쓰는지,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강조하는지,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이 왜 더 큰지 같은 것들을 더 보게 된다. 액자식 구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부분에서 꽤 만족할 확률이 높다. 실제로 ‘책 속의 책’ 파트 자체가 흡입력이 강해서, 다음 장을 자꾸 넘기게 만드는 힘이 있다.


좋았던 건, 로맨스를 달달함으로만 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사랑이 끝나는 이유를 한 사건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오해와 침묵, 자존심과 타이밍 같은 것들이 어떻게 사람을 멀어지게 하는지 천천히 쌓아간다. 그래서 결말까지 다 읽고 나면 사건보다 감정의 형태가 더 오래 남는 편이다. 반대로 말하면, 중간중간 답답함을 느낄 독자도 있을 것 같다. 왜 지금 말을 안 해? 싶은 순간들이 있긴 한데, 나는 그 답답함 자체도 이 이야기의 정서와 맞물린다고 느꼈다. 말하지 못해서 더 커지는 마음, 늦게 도착해서 더 아픈 진실 같은 것들.


전체적으로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특히 잘 맞는 소설이다. 책이라는 물성 자체에 애정을 갖고 있고, 오래된 책의 분위기나 희귀본 서점 같은 공간을 좋아한다면 시작부터 몰입하기 쉽다. 거기에 ‘책 속의 책’ 구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가 더 확실해지고, 한 번 흔들린 판단이 다시 흔들리는 식의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만족감이 크다. 읽고 나면 책이 사람에게 남기는 건 결국 감정이라는 말이, 그냥 문장이 아니라 경험처럼 남는다. 이런 타입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추천하고 싶다.


#2025문학나눔 #문학나눔 #한국출판산업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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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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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https://youtu.be/TInOFyy6u8Y



몇 해 전 유행처럼 읽었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최근 북토크를 계기로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재미있다는 인상과 몇 가지 충격적인 장면만 또렷했고, 나머지는 흐릿했다. 이번에는 노트를 옆에 두고 차분히 따라가 보았다. 왜 이 책이 많은 사람에게 오래 남았는지, 나도 왜 다시 읽고 싶었는지 이해가 됐다.

이 책이 여기까지 오게 된 출발점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어린 저자는 아버지에게서 “세상에는 혼돈만 있다, 의미는 없다”는 말을 듣고 큰 혼란을 겪는다. 이후 가족의 상처와 우울의 시간을 지나 한 인물—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집요하게 매달리며, 혼돈 속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인간의 의지와 욕망이 무엇인지 탐문한다. 조던의 이력은 드라마틱하다. 대지진으로 박물 표본과 이름표가 한순간에 뒤엉켜도, 그는 좌절 대신 다시 정렬하는 일을 택한다. 물고기에 이름을 붙이고, 깨진 표본에 새 표식을 달며,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체계를 만든다. 계속 밀어붙이는 힘이 어디서 나오나 따라가다 보면, 과한 자기확신과 자기기만이 드러난다. 이 책은 그 힘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보여준다. 덕분에 이야기가 ‘성공담’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과 태도를 자연스럽게 묻는다.

서술 방식은 직선으로 달리지 않는다. 저자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변의 이야기를 끌어와 맥락을 만들고, 곁가지로 보이는 서사가 어느 순간 주제의 핵심을 비춘다. 처음 읽을 때는 “왜 갑자기 이 이야기가 나오지?” 하고 흐름을 놓친 대목들이 있었다. 재독에서는 그 비틀림이 주제를 입체로 만드는 장치였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건을 좇는 대신, 각 장의 끝에서 “이 대목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록하며 읽었다. 혼돈/질서, 이름 붙이기, 집착, 윤리, 과정. 이러한 내용들을 정리하고 나니 책의 흐름이 훨씬 또렷해졌다.

조던에 대한 탐구는 영웅담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저자는 그의 놀라운 복원력과 조직 능력을 인정하는 한편, 그 힘이 맹목으로 굳어질 때 생기는 왜곡을 함께 보여준다.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은 가치중립적이며, 무엇을 위해 누구와 어떻게 쓰느냐가 사람을 가른다. 이 인식은 책을 단순한 ‘동기부여 서사’에서 꺼내,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의 윤리를 질문하는 성찰로 확장한다. 결국 저자가 도달하는 자리도 “성취가 전부다”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그 성취를 만들었는가”에 가깝다. 나 역시 읽는 동안 현실적 유용성과 윤리적 비용을 생각해 보았고, 그 균형이 이 책이 말하는 삶의 태도의 중요한 요소라고 느꼈다.

데이비드 조던이 표본에 이름을 부여하던 작업에 있어서, 우리는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만들고 세상을 통제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행위는 세상을 이해 가능하게 바꾸지만, 동시에 세계를 너무 단순화해 보게 만드는 위험도 낳는다. 조던은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질서을 만들고자 했고, 저자는 그 욕망을 해부하면서 그것이 우리가 전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 충동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책의 결은 비난이나 찬양으로 닫히지 않는다. 혼돈과 질서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는 태도, 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의심과 자기점검이 결론처럼 남는다.

저자의 이야기와 조던의 이야기가 조금은 두서없이 교차로 진행되는데 서사의 곁가지가 잦아 익숙하지 않으면 산만하게 느낄 수 있다. 다만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나가다 보면 산만함은 주제를 입체로 드러내는 방법으로 읽힌다. 첫번째 읽을 때 “재미있는데 어수선하다”로 남았다면, 이번에는 더 깊이있는 독서를 경험하며 다른 질감으로 다가온 것 같다.

결국 이 책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려는 인간의 욕망과 그 대가를 한 인물을 통해 끝까지 묻는다. 읽고 나면 성취의 속도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지, 인생에서의 중요한 것들을 먼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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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생활자의 요가 - 생각 많은 소설가의 생각 정리법
최정화 지음 / 창비교육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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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책상 앞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학생 때부터 책상 앞에 앉아서 교육을 받는데, 마치 인내력을 단련시키려는 듯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수업 시간은 점점 길어진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무직에 취업하면 하루의 대부분을 앉아서 보내는 생활이 계속 이어진다. 이 책은 또 한 명의 책상 생활자, 작가인 저자가 육체적 건강을 위해 요가를 시작했다가 심신 수련의 마지막 단계인 명상에 이르기까지, 지루하게만 여겼던 명상을 생활화하게 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담백하게 풀어낸 에세이다.

장편소설을 쓰기 위한 체력 단련으로 운동을 시작했다가 요가, 카포에라, 주짓수를 동시에 배우며 ‘운동 강박’이라는 진단까지 받았던 저자는 결국 요가를 수련하기로 결정했고, 요가 교육사 과정을 수료한 뒤 수업까지 진행했다고 한다.

매일 글을 쓰면서 요가 강사까지 될 수 있었던 건 과연 명상의 힘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명상은 지루하고 심심한 활동으로 여겨지지만, 최근 웰니스가 부상하면서 마음챙김의 일환으로 명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많아진 듯하다.

평소 명상을 접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일상이 바쁘고 할 일도 많고 재미있는 것들이 넘쳐나는 요즘, 눈을 감고 모든 것을 멈춘다는 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이 처음 명상을 했을 때 들었던 잡생각들을 솔직한 언어와 귀여운 그림으로 표현해 명상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친근하게 다가오게 한다. 저자가 실천하는 방법 중 인상 깊었던 것은 ‘명상은 양치질처럼’이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듯 ‘명상해야지’라는 마음을 크게 먹다 보면 한 번 할 때 제대로, 완벽한 환경을 조성하고 자리를 잡고 해야 할 것 같아 시작이 쉽지 않은데, 양치질하듯 가볍게 3분을 습관처럼 하는 방식은 부담을 줄여 주는 유용한 접근법이라고 느꼈다.

책이 작고 얇아 간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골랐는데, 읽다 보니 요가와 명상에 관한 친구의 수다를 듣는 기분이라 더 자세히 길게 읽고 싶은 마음이 들어 금방 끝나 버리는 게 아쉬웠다. 세상 무해한 표정으로 명상하는 사슴 캐릭터도 너무 귀여워 마음이 편안해지는 책이었다. 나도 종종 요가와 명상을 하는 편인데, 명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분이라면 이 책을 계기로 명상의 길로 입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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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달리기
강주원 지음 / 비로소(도서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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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달리기를 즐겨 하지는 않지만, 가끔 마음이 동하면 한번씩 나가서 뛰곤 한다. 힘들긴 하지만, 자연을 눈에 담고 바람을 맞으며 뛰다 보면 기분이 환기되고 몸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운동이다(마음을 잘 안먹는 게 문제긴 하지만).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서 신착도서 코너를 둘러보다가 가볍고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인 책이 있어 꺼내들었다. 담백한 표지와 제목이 마음에 들었고, 각 에피소드의 제목이 타자기 감성의 글씨체라 홀린 듯 책을 빌렸다.

요즘 러닝이 대세라고는 하지만 평소 달리기 속도나 기록에 별로 욕심이 없는 편이라 책은 빌려와놓고 선뜻 손은 안갔는데 읽기 시작하니 술술 잘 읽혔다. 달리기와 인생 그 사이 어디쯤 있는 에세이 같았다. 달리기를 통해 깨닫는 인생 철학이랄까.

신체의 기능이 바닥이었던 저자는 어느 날 체력을 길러보고자, 코로나로 무료해진 일상을 달래보고자 달리기를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 바벨을 어깨에 얹고 사는 것만 같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이미 나는 빠져들었다. 맨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2km를 뛰고 죽을 듯이 힘들었던 그는 “오랜만에 느껴본 그 불쾌한 기분, 그 낯선 기분이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다.”고 말한다. 10km를 뛸 체력이 생기면서부터 달리면서 떠오른 생각을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고 서울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기까지의 기록이다.

나도 비록 러닝은 아니지만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는데 운동이라는 것이 결국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고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닮아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많은 부분이 공감됐다. 특히 러닝은 긴 호흡으로 하는 운동이다보니 자신의 체력을 잘 안배해서 본인의 페이스에 맞게 달리는 것이 중요한데 인생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든 달리기든 타인과 비교하기 보다는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책에서 저자가 말한 대로 매일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기승전운동을 다짐하게 되는 책이다.

이 책은 러닝의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손에 잡으면 부담없이 읽어볼 수 있는 이 가벼운 책처럼 누구든 가벼운 달리기에 도전해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달리기에 관심 없더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니 기회되면 한번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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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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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리뷰: https://youtu.be/Rw4_yFWMpY8


김기태 작가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출간 이후 자주 눈에 띄는 책이었다. 이동진 평론가가 ‘이달의 책’으로 소개한 뒤로는 더 많은 관심을 모았고, “신선하다”, “독특하다”, “묘하게 공감이 간다”는 반응도 종종 들려왔다. 나 역시 그 매력이 궁금해 책을 집어들었지만 막상 마주한 인상은 조금 달랐다.


가장 먼저 다가온 건 문장의 분위기였다. 유행어, 신조어, SNS 밈 같은 동시대의 언어를 거리낌 없이 끌어들인 서술 방식은 분명 실험적이었다. 문장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장면처럼 엮어냈고, 그 조각들이 모여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현실의 언어를 문학의 리듬으로 이식하려는 시도는 흥미롭고 도전적으로 느껴졌다.


반면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또 다른 결을 갖고 있다.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게 하기보다는 인물이 놓인 환경이나 사회적 배경이 이야기를 이끈다. 인물의 내면은 선명하게 그려지기보다는 암시되며, 성격은 구체화되기보다는 스쳐 지나간다. 독자는 그 빈틈을 스스로 채워야 한다. 누군가에겐 이런 열린 구성이 더 깊은 몰입을 가능하게 할지 모르지만 나에겐 오히려 그 여백이 거리감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작가가 의도한 미학일 것이다. 인물을 고정된 틀에 가두기보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 독자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물의 표정을 상상하고 마음을 그려보게 만드는 서술. 어떤 이에게는 이 모호함이 더 생생한 감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인물이 겪는 사건을 통해 감정의 궤적이 그려지고 그 과정에서 인물이 조금씩 변해가는 서사를 좋아하는 편이다. 같은 배경 속에서도 인물마다 다른 반응을 보이고 그 차이를 통해 이야기가 살아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처럼 내면의 변화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 그 인물에게 오래 머물기란 쉽지 않았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한 장면에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시간을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 더 즐겁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은 감정이나 사건을 길게 붙잡지 않고 빠르게 다음 장면으로 나아간다. 인물의 표정이나 말투, 감정의 미묘한 여운보다는 이야기의 흐름을 더 중시하는 방식이다. 담백하고 절제된 문장은 세련되지만 동시에 감정의 결도 함께 옅어지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인물들은 뚜렷한 얼굴을 남기기보다는 어딘가 낯익은 감촉만을 남긴 채 흐릿하게 스쳐간다. 각 인물의 성격이나 감정이 직접적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주변 상황이나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독자는 그 공백을 스스로 채워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개의 이야기를 지나온 뒤에도 결국 떠오르는 인물들은 모두 내 해석을 통과한 비슷한 형상으로 겹쳐지는 듯한 인상이 남는다.


모든 이야기가 모든 독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다가가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이 생략과 여백을 통해 더 자유롭게 상상하고 자신의 경험으로 서사를 완성해나갈 것이다. 나에게는 조금 낯선 감각의 소설이었지만 그 낯섦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감정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책이 가진 가장 ‘인터내셔널’한 면모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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