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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명의 성난 사람들 (1disc) - 할인행사
시드니 루멧 감독, 헨리 폰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시드니 루멧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헨리 폰다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흑백영화로 미국의 형사사건에서의 배심제도가 가지는 모순점과 더불어 동시에 한정된 공간안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들의 이면을 보여주는 영화로 단순한 법정드라마 이상의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이 영화는 CBS의 인기 드라마시리즈 중에서 레지날드 로즈가 각본을 맡았던 부분의 에피소드만을 영화로 재구성 한 것으로 18세 소년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12명의 배심원들이 유,무죄의 결정을 내리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사실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영화의 처음과 끝을 제외하고는 영화내내 배심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안에서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한 구조를 취한 영화의 형식은 아주 독특하였으며 그러한 상황을 긴박감있게 연출한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특별한 볼거리나 다양한 에피소드가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암시하는 날씨와 적절한 배경음악의 사용 그리고 무엇보다 각각의 배심원들이 가지는 캐릭터의 세밀한 묘사덕분이 아니었나 합니다.자신의 아픈 과거로 인하여 맹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소신없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사람,한 소년의 생명이 걸린 문제임에도 빨리 결정을 내리고 회피해버리려는 사람,뒤에서 조용히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사람 등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묘사한 감독의 치밀한 연출력은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11명의 배심원들이 유죄를 확신하지만 헨리 폰다만 증인들의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며 사건 당시의 정황을 조목조목 나열해가며 무죄를 주장해나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흑백논리와 군중심리,개인주의 등은 어떤면에서는 만장일치를 통해서만 유.무죄를 가리는 배심원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이 될 것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듯 합니다만 영화는 여기에서 머물고 더 이상은 나아가지 않습니다.(우리가 잘 아는 미식축구스타인 심슨 사건도 이러한 배심제도가 가지는 취약점을 반영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피고인인 소년은 아랍계의 슬럼가 소년으로 보이는 데 아무런 이유없이 맹목적으로 소년을 매도하면서 맹목적으로 유죄를 주장하는 부분이나 배심원단이 전부 백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미국이 가지는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적인 감독의 시각이 아닐까 합니다.
위에서 본 감독의 의도들은 오래된 영화이지만 지금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탄탄한 스토리구조와 캐릭터들에 대한 세심한 연출은 이 영화를 오래도록 보게만드는 힘이 되지 않나 합니다.마지막 부분에서 법원을 나서는 배심원들을 덤덤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배심원실에서의 치열한 공방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아주 태연하게 비춰줌으로써 영화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긴 여운을 남기게 합니다.
디비디타이틀의 화질이나 사운드,서플은 아무래도 영화가 발표된 지가 오래되어서 그렇게 크게 기대할바는 못됩니다만 영화의 내용은 그러한 디비디타이틀의 결함을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을 괜찮은 영화라고 봅니다.
<아래 글은 디비디 2.0에 수록된 최은영 칼럼니스트의 글입니다>
타는 듯한 여름날의 오후. 뉴욕 대법원의 법정에 앉아 있는 12명의 배심원들의 표정은 알쏭달쏭하다. 평결을 기다리는 피고인 소년의 얼굴은 절망감으로 뒤덮여 있지만 판사의 얼굴은 심드렁하게만 보인다. 결정된 사항은 아무것도 없지만, 소년의 얼굴과 법정의 분위기는 이들 간에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인 배심원실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시드니 루멧의 극영화 데뷔작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놀랍게도 대부분의 이야기가 오직 하나의 장소, 배심원실에서만 이루어지는 영화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이 영화에 단 한 명의 여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국식 민주주의에서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제도, 즉 일반인을 배심원으로 불러 만장일치로 유, 무죄를 확정 짓는 배심원 제도는 이 영화에서 아이로니컬한 방식으로 재조명된다. 가장 공평하다고 생각되는 민주주의식 법 제도 안에는 다종 다기한 편견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한 푸에르토리코계 소년이 아버지 살해 혐의로 기소되고, 그 재판을 위해 무작위로 추출된 12명의 배심원이 재판정에 자리한다. 사건 심리가 끝나고 배심원실에 자리 잡은 12명의 배심원들 가운데 11명은 소년의 유죄를 주장하지만, 단 한 명 8번 배심원(헨리 폰다)만이 이의를 제기한다. 만장일치로 평결을 내려야만 하는 제도의 특성상 배심원들의 논의는 계속된다. 노골적으로 불만을 피력하는 사람들 앞에서 8번 배심원은 조목조목 사건을 되짚어 나간다. 피고인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학대당해 온 빈민가 출신 소년이며, 그의 살해 장면을 본 두 명의 증인이 있다. 소년에게 불리해 보였던 확고한 정황들은 8번 배심원과 그를 지지하기 시작한 다른 배심원들에 의해 다시 논의된다. 논쟁이 진행될수록 명약관화해 보였던 사건에 대한 배심원들의 태도는 급물살을 타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에서 보여지듯 미국의 50년대 배심원 제도에서 배심원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또한 100% 백인이어야 했다. 물론 지금은 성비가 혼합돼 남녀 12명으로 배심원이 구성된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한계는 배심원의 구성에서부터 드러난다. 피고를 유색 인종 십대 소년으로 설정하면서 감독 시드니 루멧은 이러한 한계를 보다 명확하고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이끌어 나간다. 심판하는 백인과 심판당하는 유색 인종이라는 근본적인 모순을 간과하지 않는 루멧의 태도에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가 천착하는 미국 사회의 모순에 대한 좌파적 시선이 담겨져 있다.
협소하기 그지없는 민주주의 안에서 배심원들은 다양한 사회적 계층으로 나뉘어 있다. 최하층인 노동자 계급에서 중산층 시계 수리공, 상류층의 증권 브로커나 건축가에 이르기까지 배심원들의 출신 성분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다양해지는 의견의 스펙트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90여 분 동안 우리는 그들이 내보이는 인간적 면모와 정치적 태도를 지켜보게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지만, 그들은 결코 섞일 수 없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대표한다. 소외 계층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는 10번 배심원, 그 자신이 사형 집행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3번 배심원은 아들과의 오랜 불화에 대한 분노를 아버지를 죽인 십대 소년에 대한 분노로 치환시켜 버린다. 빈민가에서 자라난 5번 배심원은 피고에 대한 계급 차별적 발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사건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저녁에 보러 갈 야구 게임에만 관심을 기울이거나 혹은 자신의 직업을 떠벌리는 일에만 열중하는 배심원들 또한 존재한다.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이런 풍경은 좁은 배심원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민주주의 사회’라는 커다란 외연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나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단순히 사회적 정의와 책임감의 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재미는 결국 모든 제도와 사회적 규약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바라보게 만드는 데 있다. 루멧은 전적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는 12명의 인물들의 독특한 개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그 안에서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감독은 에어컨도 선풍기도 돌아가지 않는 찌는 듯한 오후의 좁은 배심원실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딥 포커스와 극단적인 얼굴 클로즈업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폐소공포증을 극대화시키는가 하면 인물의 행동이 아닌 감정의 추이만으로 사건의 긴장감을 더한다. 실제로 영화를 연출할 때 루멧은 드라마가 전개됨에 따라 배심원실 세트의 벽을 점점 좁히면서 밀실공포의 효과를 배가시켰다. 러시아 ‘키노 프라우다’의 창설자인 전설적인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의 동생이자 장 비고의 <라탈랑트>와 <품행제로>, 엘리아 카잔의 <워터프론트>를 촬영했던 보리스 카우프만의 카메라는 강력한 감정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흑백 촬영의 대가답게 카우프만은 사소한 디테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오로지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이야기의 묘미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했다.
배심원들은 때때로 어떤 특정한 사회적 계층이나 혹은 편견을 대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결코 상징적인 권력으로 귀속되지는 않는다. 주인공 격인 8번 배심원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배심원들이 결국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소년의 무죄를 주장하기보다는 유죄를 단정 짓기엔 뭔가 석연치 않는 구석이 있다는 말로 사람들을 설득시킨다. 그는 말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그 소년이 실제로 아버지를 죽였을 수도 있죠. 하지만 우리가 내린 유죄의 결정이 만약 틀렸다면, 그건 한 생명을 앗아가는 결과를 가져올 거요.” 루멧이 지닌 좌파적인 관점 속에는 결코 삶의 모순을 비껴갈 수 없는 불완전한 인간의 선택에 대한 심오한 이해가 자리 잡고 있다.
1954년 <스튜디오 원>이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작품을 영화로 옮긴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이후 루멧의 영화 세계를 예감할 수 있는 전조와 같은 작품이다. 데뷔작인 이 영화로 베를린영화제에서 금곰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되면서 그는 너무 빨리 유명해졌다. 이후 루멧은 독특한 개성을 지닌 ‘작가’라기보다는 이야기에 능통한 ‘장인’으로 알려졌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를 가리켜 감독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매끈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 칭했다. 하지만 루멧의 영화들에는 인간에 대한 어떤 공통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좌파 자유주의적 관점에 입각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기 모순에 시달리는 인간의 나약한 심성에 대해 더없이 따뜻한 시선을 보여 주고 있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의 마지막에서 자신과 가장 극렬하게 대립했던 배심원이 잔뜩 풀이 죽어 있을 때, 주인공 헨리 폰다는 그의 어깨에(!) 웃옷을 걸쳐 준다. 루멧은 그가 싸워야 할 적이 결코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파시즘으로 몰아가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는 사람들이 만장일치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서로를 비방하고 강요하며 협박할 때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시스템과 개인의 관계라는 주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 불멸토록 반복되는 이야깃거리가 아니던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정의는 승리한다는 식의 지극히 할리우드적인 이야기가 아니냐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결론은 어쩌면 이상적 자유주의자들의 백일몽일지도 모른다. 온갖 종류의 편견을 넘어서 실현되는 정의란 대부분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꿈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에는 다수의 시선에 맞서는 외로운 투쟁 끝에 사회로부터 유배당하는 주인공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개인’이거나 혹은 개인을 지탱해 주는 공동체로서의 ‘가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수라는 이름의 파시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는 소박한 한 자유주의자가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져 주는 간절한 충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