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심 아홉 시 뉴스를 사랑한다. 어쩔 땐 뉴스 보며 욕하는 게 나한테 딱 맞는 스트레스 해소법인가 싶을 정도로 내가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이 세상이 비정상적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생각은 또렷해졌다. 며칠 전 저녁 뉴스에서 중국이 공개한 일제시대 일본군이 작성한 위안부 공금 구매 기록문서를 보았다. 처음에는 싸울거면 저네끼리 싸우지 왜 우리나라 위안부를 들먹이나 했는데 나중에 난징대학살(1937-1938) 때도 같은 일이 많아서 함께 공개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어쨌든 일본의 불리한 역사에 대한 안하무인격 부인은 우리 뿐만 아니라 중국한테도 분통터지는 일이다. 새로이 출간된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에는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중국계 미국인인 이민 2세 아이리스 장은 직접 겪진 않았지만 민족의 상흔으로 남은 난징대학살의 실상을 조부로부터 전해 듣고 왜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과 끈질긴 자료 조사 끝에 이 책을 펴냈다. 그녀는 당시 일본군이 벌인 난징대학살을 히틀러, 무솔리니, 크메르 루주(폴 포트)의 그것보다 훨씬 더 흉악하고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건이라고 한다. 난징대학살의 실상을 서방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하지만 그 성공은 내내 그녀를 위협과 협박 속에서 살게 한다. 마침내 자신의 차 안에서 권총자살한 채로 발견될 때까지. 진실을 알리는 대가치고는 너무 무섭고 소름 끼친다. 진실은 그런 거다. 그래야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다. 세상 어디에도 쉽고 편리하게 얻을 수 있는 진실은 없다.

 

 

 

 

 

 

 

 

 

 

 

 

 

 

미국인들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폭격기가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유럽인들은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독일 공군 루프트바레와 기갑 사단인 판처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인들은 이보다 좀 더 빠른 1935년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시아인들은 군대를 앞세운 일본이 만주 점령을 시작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침공을 개시한 193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한다.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라쇼몽> 같다. 하나의 사건이 하나의 원인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걸 보면, 어쩌면 진실이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시아 내집단이라 여기면 마지막 두 줄을 역사로 배우겠지만 만약 이 사건 바깥에 존재하는 외집단이라 여길 경우 균형 있는 시각을 위해선 다섯 줄의 역사를 모두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만큼 누군가의 어떤 입장이 되어보기가 어렵단 뜻이다. 역사에 A라는 사건이 존재한다 치면, B는 A를, C는 A,B를, D는 A,B,C를, E는 A,B,C,D를... 이렇게 우리는 많은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더 많은 정보의 혼란 속에서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배우고 선택한다. 이건 비극일까 희극일까, 아니면 그저 다행일까. 우린 점점 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알아야 할까. 우리가 애초에 없었다고 생각하고 시간을 되돌리고픈 이 순간도 언젠가 역사가 된다고 생각하면 한순간 한순간이 얼마나 소중하면서도 덧없는지.

 

 

 

아이리스 장의 이 저서는 2005년 옌거링의 <진링의 13소녀>로 이어진다. 진링은 난징의 옛지명이다. 장예모 감독은 이 판권을 사들여 동명의 영화를 만든다.

 

 

 

 

더 알아야 할 것은 난징대학살 혹은 식민지였던 한국에 저지른 일본인 혹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세세한 진실이지만 관심만 가지면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들을 쓰느라 백지를 남용하기는 싫어졌다. 공동기자회견 자리에서 마치 타국의 동의를 구하듯 오바마 대통령에게 일본군 위안부 만행에 대한 생각을 물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마치 나 쟤한테 맞았으니 더 힘센 네가 쟤한테 한 마디 해줘, 라는 것 같았다. 물론 제법 강경한 의견을 피력한 오바마의 태도가 의외이긴 했지만 그곳이 청와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하고, 그걸 대서특필하여 오바마 한 마디에 일본이 '쫄았다'는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은 웃긴다. 어쨌거나 우리 일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결하는 게 보기 좋다.

 

 

 

 

 

 

 

<도시와 나>에 실린 윤고은의 『콜럼버스의 뼈』는 세비야를 무대로 한다. 나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좋아해서 피렌체 두오모를 오르고 헤어진 연인을 그곳에서 다시 만나는 미래를 상상하고 부르넬레스키를 좋아하지만, 스페인이 그런 것처럼 가우디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스무살 건축학도였던 단짝친구가 빌려준 책에서 가우디를 처음 알게 되었다. 여행소설 외국편 <도시와 나>를 읽은 게 지난해 연말, [꽃보다 할배]-스페인 편이 세비야로 떠난 걸 방영한 건 올해 3월 말인가 4월 초. 나는 지난 연말에도 모르고 있던 콜럼버스의 삶과 세비야에 눈길이 멈췄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세비야 대성당의 보물이라는 '콜럼버스의 묘'와 후원자와 반대자, 응원과 무관심,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영광과 몰락이 가져다준 거대한 역사. 그걸 떠받친 여행의 힘이 조금 경이롭게 느껴진다.

 

여행의 부수단어가 설렘이라고만 생각했다. 갑자기 시작될 수도 있고, 큰맘 먹고 오랜만에 찾아가는 길도 있고, 누군가의 부고를 받고 떠나는 사연도 있다는 걸 잊지만 않으면 여행은 대체로 들뜬 상태에서 시작되고 또 끝난다. 그곳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버리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두 소설집에 실린 작품 대부분이 해당 도시만의 매력을 듬뿍 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일탈과 방랑은 적어도 누군가를 위로한다. 아닌 줄 알면서도 여전히 이곳만 아니면 행복하리란 생각에 잠못 이루는 날이 있고, 떠나고 싶어 안달하는 날이 있으면 머물 곳이 있어 다행이다 싶은 날도 있다. 하물며 떠난다는 계획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날이 있다. 여행이 주는 확신은 떠났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돌아와 만나게 되는 내가 이전의 나와는 절대적으로 다르리란 확신. 그게 전부다.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라도 읽는 사람이 얼만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배경지식과 가치관이 달라지면 몰입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멜로와 스릴러의 궁합이 절묘하지만 역시 서스펜스가 고도에 다다를 때 이 소설은 가장 빛난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솔직담백하게 써내려간다는 느낌을 주는 문체, 빠른 속도감과 순간 장악력, 드라마같은 장르적 스토리, 스토리텔러가 되어 정주행하는 작가의 용기와 고집이 보인다. 영국 아마존에서 개인출판으로 성공한 좋은 예. 신인작가에게 기존작가와 겨룰 수 있는 게이트웨이가 넓어졌단 건 기득권이 줄고 기회가 공평해졌다는 점에서 올바른 일인데, 전자책 루트가 종이책 시장을 위협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한편 아찔하고 공허해진다. 세상에 진정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 있긴 한 걸까. 어느 한 구석 숨쉴 공간 없는 촘촘한 구성을 보면서 케이트와 잭, 폴의 행보가 계속 궁금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잘 짜인 구성과 플롯만으로도 충분히 자리를 지킬 만하다. 바이러스, 재난, 모성, 집착, 광기, 첫사랑, 기억과 같은 장르문학 특유의 소재를 잘 버무린다. 중반을 훌쩍 넘어설 때까지도 계속 누굴 믿고 누굴 의심해야 하는지 몰라 그저 내달린다. 도망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데도 팔다리가 뻐근하고 어깨가 뭉친다.

 

 

 

<파계재판>이 놀라운 건 첫장 빼고는 모조리 재판으로만 진행하는 특이한 구성 때문이지 사건의 어마어마한 창작력이나 짜릿한 반전의 쾌감 때문은 아니다. 처음에 일본 고전소설 <파계>를 선뜻 떠올리지 못한 건 그 파계가 그 파계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읽고나니 <파계>를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 단숨에 <파계>를 연달아 읽었다. 우리도 조선시대 백정(소나 개, 돼지 따위를 잡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붉은 점을 찍거나 도한屠漢이라는 호칭을 써넣어 차별한 기억이 있고, <파계>에 의하면 일본도 메이지 유신으로 이미 신분제를 철폐했음에도 불구, 여전히 부락민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차별과 편견이 있었다. <파계재판>은 이 상처가 한 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 보여주는 문학적 상상의 끝에 서있다. 사람이 어떤 경우에 이성을 잃게 되는지, 편견이 만연한 사회가 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죄인으로 몰아가는지, 경계를 넘어서려는 노력과 금기를 깨트리려는 노력은 때때로 얼마나 부질없는지. 이 재판은 한 남자의 절절함을 끝까지 믿었던 위대한 변호사의 승리이자, 실체는 없어도 언제나 응원 받는 진실의 승리다.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아끼고 좋아한다. 인류가 그런 것처럼 천 년의 시간 동안 인간 곁에 머무른 물고기 대구의 일대기를 다양한 시각과 각도에서 서술하는데, 그 대부분의 역사가 미국, 유럽 등 서구에 머물러 있어 괴리감이 느껴지긴 한다. 동생은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는 생선 한 가지만 쓰라는 시험 답안지에 '고기'라고 쓴 적이 있고, 내 기억은 갈치와 고등어를 필두로 가자미, 오징어 외에는 거의 모든 생선을 분간하지 못한다. 물고기는 생선이고, 생선은 먹는 것. 가끔 찌개도 회도 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 이해 못하는 이 책 속 대구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대구 서식지, 생김새, 탄생비화, 좋아하는 먹이, 온도, 요리법. 자연은 위대하다. 쉽게 많이 얻으려는 탐욕이 대구라는 어종을 지구상에서 없앨 뻔 했다. 남획이 대구를 멸종시킬 수도 있었다. 대구는 이러한 비극과 불운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긴긴 세월, 인간의 어획력은 물론 무역의 판도와 역사를 바꾸거나 새로 쓴 위대한 물고기다. 

 

 

 

 

있어서는 안되는 장면을 버리고 없어서는 안되는 장면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스케치부터 세심한 손질까지 구석구석 손보다가 비로소 색을 입히고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둔다.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다시 읽을 날이 곧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전율한 장면이 실제로도 가능할 거라고, 배 안의 아무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또 믿으려 했다. 두꺼운 레깅스 위에 야상점퍼를 입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몸이 덜덜 떨려왔다. 세숫물은 차갑고 눈물은 뜨겁고 외침은 공허하고 기다림은 미온하다. 벌써 지치면 안된다. 아직 덜 슬퍼했다. 언젠가부터 머릿속을 맴도는 '빅토리아 메러디스호'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의로 떠났지만 타의로 돌아오지 못한 모르는 얼굴들을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문학의 기적을 현실의 이기주의가 덮어버릴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데려갈 높고 푸른 사다리 하나쯤 있으리라 믿고 싶었던 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지상같지 않은 지상에 머물러 있다.  

 

 

 

하늘의 기를 받아 현실에서 말하는 자들. 소리꾼과 무인은 아주 다르면서도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소리'꾼', 무'인'이라 발음할 때의 야무진 입모양과 피를 토해야만 살 수 있는 고독의 내음까지도. 불꽃같은 삶이 예상되었다. 시대가 고요해도 내면이 들끓으면 지옥과 다름 없는데 이 잔혹한 시대를 맨정신으로 건너는 이들의 삶이 다 그렇지 않던가. 한밤의 갈대숲에서 다리를 벌려 거친 사내의 숨소리를 받아들인 여인은 그날 밤이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수수께끼 같은 밤 버려진 여자에게로 흘러든 달의 정령으로 잉태된 아들은 어느새 매일 아침 어린 아내가 바치는 신선한 소의 피를 받아마실 정도로 쇠한 사내가 되었다. 그러니까 읽을 때 알아야 할 것은 쇠한 사내인가, 쇠한 사내를 만든 지독한 세상인가. 그것도 아니면 한구석도 보드라운 구석이 없는 세상의 단단함에 다칠 걸 알면서도 줄곧 들이박는 심정으로 걸어가는 자들인가. 이 소설은 국창 임방울(1904-1961)의 일대기를 그린다. 이 연약한 사랑의 기억을 무르익은 소리로 다시 만난다. 

 

 

 

"약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사막 가장자리, 바스토(미국 캘리포니아 중남부의 도시 이름)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로 시작하는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는 감히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면 말하고 싶다. 그 순간 나를 견디게 했었다고. 겁이 많으면서도 환각과 일탈의 순간을 동경했다. 국세청에는 체납자들을 독촉하는 업무를 맡는 직원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지만 남에게 소리 지르는 걸로 스트레스 푸는 사람에게는 딱 맞는 보직이다. 우리는 아무도 누구를 재단할 수 없다. 나는 가장 힘들 때 정작 제일 무겁게 입을 다무는 사람이지만, 남의 불안을 잘 다독이는 편이고, 사항이 중대할수록 오히려 더 대담해진다. 낙관적인 천성과 예민한 본성이 서로를 완벽히 통제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끝도없이 이어지는 포트노이의 불평이 짜증난다는 리뷰를 많이 보았다. 미국은 여전히 술과 약, 섹스에 탐닉한다. 환상과 비행으로 불안을 표출하는 소년과 닮은 주인공들이 미국 소설에는 많이 나온다. 조니 뎁과 베니치오 델 토로의 연기 궁합에 전율하던 시절, 정신착란이 최고도에 달한 상태에서 라스베가스 거리를 걸어보고 싶어했던 철없던 욕망이 기억난다. 

 

 

 

드라마 [결혼의 여신]에서 지혜(남상미)와 현우(이상우)는 휴가차 제주로 가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 때문에 인연을 맺는데, 그 책은 지난해 한참 드라마 마케팅을 하던 그책이다. 정확히 말하면 비행기에 타자마자 책을 껴안고 잠든 지혜는 제주에 떨어질 때까지 현우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잠들었을 때 떨어진 책을 줍다 우연히 페이지 가득한 지혜의 메모를 읽으며 키득거리던 현우가 지혜를 알 뿐이다. 건축가였던 현우는 라디오 메인작가 지혜가 쓴 감성 충만한 메모에 반했고, 지혜가 제주에서 또 책을 흘리는데 그걸 현우가 주우면서 여행길 하루를 함께 하게 되고, 두 번째 만났을 때 역사가 이루어진다. 둘 다 즉흥적인 기분파가 전혀 아니었다는 점에서 사랑의 끌림은 역시, 이상하다.

 

 

이중섭의 삶을 재구성한 소설이 그때 내게 더 끌렸기 때문에 그 책 대신 이 책을 선택했는데 구성이 특이하다. 여느 일대기처럼 시간순 서술이 아니고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지도 않는다. 일본 유학시절의 어려움과 고독,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킨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화가의 남은 가족들이 화가의 기념관 행사에 초대되고 참석한 장면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가장 암울하고 불안했던 시대로 돌아간다. 불우한 천재화가 이중섭과 그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의 아름답고도 처연한 일상과 사랑을 극화시킨다. 가난과 우울로 가득찬 화가의 길은 전시라는 시대상과 맞물려 피난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이다. 일본, 부산, 제주를 오가며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그리움에 떨었던 한 화가의 삶은 고스란히 한 편의 시가 되었다.

 

 

봄이 더이상 봄같지 않게 지나가고, 예전처럼 간절하지 않아도 5월이 온다. 오래 글이 없어 서운했고, 겨우 이만큼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 페이퍼 제목은 권정일의 시, '마녀의 도서관'에서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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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4-04-3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즈음에는 뉴스를 못 보겠더라구요. 가슴이 아파서.
한마디 더 듣고나면 팔을 못 들어올릴 거 같아서요.

...지금 한지 인강 듣고 있는데 한지 너무 어려워요 ㅠㅠ
수능치는 사람들이 한지를 제일 많이 선택한다는데 나는 당최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 이게 뭐야 진짜!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

아이리시스 2014-04-30 23:47   좋아요 0 | URL
귀염이 소이진님 잘 지내고 있죠? 아프지 말고. 어제는 비오고 오늘은 추워요. 반팔 입었다가 다시 긴팔로 돌아가야 하나 그러는중인데.. 다시 조금씩 힘내고 책 한 권씩 읽기 시작했어요. 그렇지만 거의 최근에 읽은 책이 아니라서 아직도 책이 재미있을 정도로 눈에 안 들어와요.

한지=한국지리 맞죠? 뭔가 모르게 엄청 어려운 과목이었어요. 심지어 그런 과목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그게 제일 공부하기 쉬우니까 그런 거겠죠? 근데 이게 사회탐구 선택과목이에요? 우리때는 사회문화를 제일 많이 했었는데 나는 문과가 아니었으니까...................( '')

방금 검색 한번 해봤는데(나는 쓸데없이 이런거 잘해....) 이거 해요, 동아시아사.대박.

소리 질러요. 내가 들을 수 있어요. 소이진님 화이팅!!

2014-05-02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2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5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6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 이 책도 전체가 초고, 아니,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 오오,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를! (허먼 멜빌, <모비 딕>)

 

이 좋은 봄날! 세 권의 책을 읽느라 지난 주말을 몽땅 허비했다. 먹는거야 배만 채워도 좋다 싶을 때가 일 년에 반이지만 책은 그럴 수 없다. 주어진 삶도 시간도 너무 짧고 불행히도 나는 오지랖이 넓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게 아닌 한 누구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미뤄둔 드라마를 채울 시간은 날아갔고 어쩌다보니 계속 보는 [아빠 어디가]에서 안정환 vs 송종국 라이벌 매치만 제대로 보았다. 나는 축구보다 여행이 더 좋은데, 지난 주에 이어 여행을 안 갔다. 시청률 안 나온다고 기획의도를 바꾸시면 안됩니다, 소리쳤다.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하고, 국가 전반의 구조를 공부하고, 방랑자 이슈메일이 되어 신비로 뒤덮인 바다를 탐험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비극을 겪으니,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런 주말도 있고 이런 주말도 있는 것이다. 그런 주말도 의미있고 이런 주말도 의미있다. 비로소 <아프리카 방랑>과 <쇼에게 세상을 묻다>, <모비 딕>의 끝페이지와 조우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징조만도 대단한 것이었다. 자식 세대에는 이 나라에 미래가 있을 거라는 믿음은 확신의 기준이었고, 이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폴 서루, <아프리카 방랑>)

 

보르헤스는 '모든 지식은 기억에 불과하다'고 한 적이 있다. 실제로 관심사에 해당하는 많은 내용을 책으로 배우지만 정작 지식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독서가 단순히 재미나 흥미 이상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냐 물으면 내 대답은 '예스'다. 그걸 바라고 원한다. 이건 이십대 초반에 의견정리 끝냈으니 이젠 독서가 즐거움 이상의 것이 될 필요가 있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 맞다, 같은 책을 동시에 읽어도 각자 다른 것을 느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거기서 리뷰의 필요성이 나온다. 하지만 많은 리뷰가 다른 단어를 쓰는 동시에 같은 말을 하고 있을 때, 그 리뷰는 반드시 필요한가. 반복적인 패턴, 자기복제는 나와 상대 중 누구의 시간을 더 뺏는 일일까.

 

아무것도 못 얻었는데 얻은 척 무얼 쓸 필요가 있을까. 나쁜 책을 나쁘다고 쓰는 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경험상 내게는 별로 그렇지 않다.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 하기는 누워서 떡 먹는 것만큼 쉽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럴 만한 책이 아닌데도 유난히 별점이 후하다면 그건 내가 선택한 책에 대한 실패와 오용한 시간사용을 무마하기 위해 나온 무의식적 처량함이지, 소위 공짜로 받은 책에 대해 주례사 비평이 필요하기 때문은 아니다. 도대체 별점이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같은 책을 동시에 읽으면서 각자 얻어가는 지식이 다르다는 데 쿨할 자신이 없다. 책이 공짜로 내것이 되는 것보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공공도서관이 들어서기를 나는 더 바란다. 시간을 들여 내가 무언가를 했다면 그러지 않은 사람에 비해 알파가 컸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솔직한 것이다. 변하기 싫은 나조차도 무의식적으로 바뀔 수 있는 그런 책이기를. 책이 지식이라면 지식이 기억이 아닐 리 없고, 그 반대라고 해도 여전히 지식은 기억이다. 몇 번째 서랍을 열어 말을 꺼내볼까 하는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아프리카 방랑>을 읽기 전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터키 역사기행>을, 그전에는 <노예 12년>을, 그전에는 까먹었지만 기어이 찾아내 적어보는 <모사드>, 그전에는 <클레오파트라의 딸 1>, 그전에는 <북극여행자>, 그전에는.. 다섯 권을 연달아 떠올린 건 순서별 기억이 아니라 아프리카, 아랍, 종교분쟁, 인종차별, 노예, 흑인, 이집트 같은 키워드 때문이다.

 

중간중간 <친구 사이>, <침묵의 거리에서>, <길귀신의 노래>, <픽션들>, <눈먼 암살자>, <런어웨이>, <내 아내에 대하여>, <당신이 그만두라고 조를 때까지>, <열세 번째 배심원>, <파계 재판> 등 언뜻 떠올려도 여러 권의 문학을 읽었고, 이전으로 올라가면 서재의 글이 뜸해진 올해 시작점, <디어 라이프>와 <유빅>의 리뷰를 쓸 즈음부터는 <진저맨>, <검은 모래>, <여인의 초상>,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 <사형집행인의 딸>, <밤의 새가 말하다>, <도시와 나>, <중세의 가을>, <둔황>, <종착역 살인사건>, <블레이베르크 프로젝트>, <파리인간>, <에라스뮈스>, <니체 자서전> 등을 읽었다. 너무나 사소해서 생략되는 몇몇 에세이도 더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보이지 않는 도시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방인>을 다시 읽겠다는 다짐은 실현되지 않았다. 또다시 새로운 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토요일>, <초조한 마음>, <비행공포>, <책 읽는 소녀>, <미시시피 미시시피>, <불안한 남자>,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포트노이의 불평>, <지도와 영토>, <소리와 분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나무 위의 남작>, <어제의 세계>, <고양이 테이블>은 읽기 시작했거나 읽다만 상태에 있다.

 

 

 

 

 

 

 

 

 

 

 

 

 

 

 

 

불행의 첫 번째 주인공이 아닌 한, 때로는 그 첫 번째 주인공에게조차도, 자신을 찾아온 슬픔이나 절망보다 더 강한 건 현실이다.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내 아내에 대하여> 얘기다. 1달러로 하루를 살 수도 있는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남편이 불치병에 걸린 아내로 인해 오랜 꿈을 접지만, 안다, 누군가 꿈을 포기한다고 아내가 낫지는 않는다는 걸. 비용과 슬픔과 무기력을 태운 가정이 난파당한 배처럼 휘청대자 남편이 결단 내리는 부분에서,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곳에 대해 설명하다가 폴 서루의 <아프리카 방랑>이 언급되었던 것 같다. 기억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찾아보지는 않을 생각이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를 읽고, 우리나라 사람이 쓴 아프리카를 읽었으니 외국인이 쓴 아프리카도 읽어야 한다면서 <아프리카 방랑>을 구입했었다. 폴 서루가 세계적인 여행작가라는 사실이나 그의 이력은 몰랐다. 아프리카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식이 통하는 땅이 아닌 지 오래된 데다, 우리 삶의 반열로 끌어당기기에는 너무나도 멀다.

 

폴 서루는 30년 전 평화봉사단으로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그는 당시 아프리카는 서구열강의 오랜 식민주의로 비문명적이고 질서가 없긴 했지만, 지금처럼 전쟁의 땅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훨씬 더 평온하고 따뜻했다고 회상한다. 열띤 청춘 시절을 잊지 못해 다시 아프리카 대륙으로 들어간 건 2000년대 초반, 이 책의 번역출간은 2011년, 오늘은 2014년 춘삼월. 시간이 흘러도 아프리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부정적으로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머무르는 동안 남쪽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이 아프리카의 위험을 경고했다. 여행 떠나오기 전 만난 지인들은 거의 마지막 인사하듯 했다. 30년 전 폴 서루가 가르친 십대 소년은 어느덧 사십대가, 대여섯살에 불과하던 꼬마는 훌쩍 키가 자라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는 청년이 되어 있다. 시간이 그들을 외적으로 성장시켰지만 아프리카의 비극은 더 심화되었다.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던 사람들이 이제는 정치, 인종, 종교와도 싸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랭보가 이곳에서 그처럼 행복하게 지냈던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랭보가 아프리카를 좋아한 이유는, 아프리카가 유럽과 달랐고 서구 세계와도 달랐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이유에서 아프리카가 좋았다. 아프리카는 때로는 반항적이고 때로는 나태한 땅이었다. 아프리카는 내 고향과 완전히 달랐다. 아프리카에 있다는 것은 암흑성에 있는 것과 같았다. (폴 서루, <아프리카 방랑>)

 

<아프리카 방랑>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널리고 널린, 흔하디 흔한 일회용의 여행기록이 아니다. 사실적이고 우아한 문체, 사람과 풍경의 생생한 묘사, 이성과 감성을 절묘히 오가는 온도는 아프리카를 아꼈고 아끼는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다. 풍경에 집착하거나 이방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기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생각과 의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말라위, 모잠비크,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거치며 어젯밤 생생하게 머리속에 떠오른 장면은 한줄기 빛이었다. 빙하기가 시작되며 필연적으로 찾아온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의 과정은 역사학적 보편성을 띤다. 인간이 머리를 쓰고 도구라는 걸 사용할 줄 알게 되면서 당연히 그에 따른 부수적 가치들이 동반성장한다. 아프리카도 그래야 옳았다.

 

아프리카에는 장수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에 누구도 나이 많은 걸 자랑하지 않았다. 누구도 오래 살지 못했다. 따라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나이는 시간을 측정하는 우연한 방법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에서는 중대한 일을 성취하거나 가치 있는 일을 끝내기에 충분한 시간을 사는 사람이 드물다. 서구 세계의 두 세대가 아프리카에서는 세 세대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은 일찍 결혼해서 일찍 자식을 낳고 일찍 죽는 삶으로 요약된다. (폴 서루, <아프리카 방랑>)

 

폴 서루가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감회에 젖은 채 하얗게 센 머리로 되돌아가는 건 발전의 싹을 어떻게 틔웠는가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본 아프리카는 도리어 예전에는 없던 국제 원조와 간섭에 신음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독재자들은 부자 나라의 원조로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국가의 가난을 유지하려 하고, 그러려면 무지한 국민이 교육을 받아 똑똑해져서는 안된다. 아프리카의 절망과 신음 그리고 눈물은 그것을 원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폴 서루는 누구보다 강력하게 예전과 지금의 차이를 느낀다. 정작 제대로 된 길이 놓이지 않은 아프리카는 세계로 통하는 길이다. 온갖 이해관계가 먹이사슬처럼 얽힌 이곳에서 지구의 반전이 시작되어야 한다. 인종과 노예 문제, 식량 전쟁, 기후와 환경 전쟁, 사회 제반시설의 부족이라는 단어가 아까울 정도의 결핍, 종교적 충돌과 끊임없는 내전과 전쟁까지, 세계를 관통하는 모든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토록 외로워 슬픈 아프리카, 폴 서루는 오히려 무덤덤한데 나는 이 대륙의 모든 가능성들이 아쉽고 아프고 안타깝다.

 

 

 

 

 

 

 

 

 

 

 

 

 

 

 

 

맹세컨대, 이런 생각 해본 적 없다면 거짓말이다. 버나드 쇼는 행여 이런 생각을 했더라도 표면에 드러나는 이상의 뜻에서 한 말이지만, 그건 그가 불우한 어린시절을 딛고 끝내 성공했다고 여겨지니 그럴 뿐이다. 열두 살에 사업실패로 광기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자살한 일은 버나드 쇼에게 자신에게도 숨겨져 있을지 모를 광기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한다. 내가 대부분의 작가가 (큰)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는 이상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들만을 작가의 범주에 넣고 꿈을 꾸었다. 어떤 식으로도 구체화되지 못한 꿈이었고, 반드시 작가여야 하는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슈퍼마켓 주인이 갖다놓은 물건을 일 년이 지나도록 사는 사람이 없는 것과 책이 잘 팔리지 않아 그럭저럭 원고료를 받고 사는 이가 다를 게 없다. 물론 많은 의미에서 다르지만.

 

사실 내 경우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걱정된다. 나는 섬에 고립되더라도 글을 쓸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와 같은 작가들은 본인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잘 모이지를 않는다. 글만 보면 작가들이 모든 덕목의 표본 같지만, 그들은 상습적인 무정부주의자이며, 논쟁을 좋아하고, 감상적이고, 잘 흥분하고, 누군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말하면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언론을 통해 활동하는 작가들은 그나마 사회성이 있다. 하지만 소설가들은 홀로 앉아서 세상만사를 머리로만 해결하려 들고 작품에 딴죽 거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탁월한 유머 감각이 없으면 정치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소설가들을 외계인 취급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경제적 압박에서 자유로워지면 개인주의적 성향이 지나치게 강해진다. 심지어 군인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훈련받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작가들은 경제적 압박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금전적인 이해를 신경스는 사람이면 작가를 직업으로 택하지도 않는다. (G.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경제는 재미있고 정치는 복잡하다. 나는 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종교는 그와 생각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세상은 한 세대 전이지만 우리는 같은 바탕에서 성장한 세상에서 살았고 또 살아간다. 버나드 쇼는 서른 개가 넘는 챕터를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수많은 얘기는 핵심으로 다룰 수 있는 단편적 의견이 아니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우주의 지도로 보면 우리가 사는 지금이라는 시점은 너무나 작아서 점 하나로도 표현이 안된다고 했다. 일생에서 처음과 끝은 굉장히 길지만 정작 우리는 다 합쳐서 하나의 점도 안된다.

 

우리의 외무부장관 파머스턴은 이렇게 얘기했다. "어떤 나라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얻고 싶으면 그 나라에 30년 동안 살면서 그 나라말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하지만 어떤 일을 포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일을 해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이상주의적인 발상이다. (중략) 세상일의 상당 부분은 자기가 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해도 '할 수는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최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있기 마련이다. 그 일들은 어떤 식으로든 하는 것이 전혀 안 하는 것보다 낫다. (중략)

확실히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그러나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반면 사상가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아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른다.  (G.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우리의 어제, 오늘, 내일을 찾아가는 과정이 삶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삶은 결국 정치다. 버나드 쇼가 들려준 것처럼 한사람 한사람에게로 와서 어떤 삶이 되는, 그런 삶.

 

 

 

 

 

 

 

 

 

 

 

 

 

 

 

 

<모비 딕>은 과학적이고 문학적이며 예술적인,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고래 보고서! 이 유쾌한 고역, 혼돈, 경악은 시종일관 영혼을 빼놓는다. 멜빌이 하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그 순간조차도 좋다. 영혼이다가 사물이다가, 어제였다가 오늘이다가, 일상이다가 일탈이다가 한다. 끝인가 싶으면 어김없이 다시 시작한다. 죄없는 고래는 이유없이 불려나와 모질게 당한다. 인간에게서, 인간을 위하여 모든것을 내어주고 또 빼앗아 간다. 거대한 몸집을 처절하게 뒤집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뿜어내고 죽는, 피흘리는 고래는 얼마 전 인상깊게 읽은 <북극여행자>를 떠올리게 한다. 낯선 그린란드 어느 외딴 마을에서 볼 수 있는 북극곰과 배타고 나가 기다림과 씨름하다 기어이 마주치게 되는, 한시점의 향유고래. 향유고래의 배가 갈리고 내장이 터져나오고 바닥이 피로 흥건해지자 비로소 탐욕을 접는 인간. 자연과 인간의 거대한 싸움에서 나는 경악과 몽환을 동시에 경험했다.

 

처음에 '물보라 여인숙'이라는 기이한 이름의 여관은 마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느낌을 주었다. 소설의 계보에서 <모비 딕>은 분명 탐험소설에 속하지만 읽기 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철학적이고 탐구적이다. 바다 앞의 인간, 인간 앞의 바다, 그리고 고래. 크게 잡아도 세 가지로 요약되지만 그 과정이 단순하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빠르지 않고 만만하지도 않다. 바다든 갑판 위든 고래든, 열 길 물 속이든 한 길 사람 속이든 아무것도 모른다. 바다는 아무것도, 첫날밤 새색시처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하, 고래는 대체, 무슨 연유로 끌려나와 쓰러져 피토하고 아낌없이 다 내주고 돌아가는가. 어디로.

 

나는 누가 어떤 종교를 믿든, 그 사람이 자기와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남을 죽이거나 모욕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종교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종교가 정말로 광신적이 되어 그 사람에게 명백한 고통이 되면, 그리하다 결국 우리의 이 지구를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어버리면, 그 개인을 구석으로 데려가서 문제점을 따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허먼 멜빌, <모비 딕>)

 

탐험이나 모험에서 볼 수 있는 속도감보다는 사색적이거나 철학적인 여백의 공간이 더 넓다. 단순히 고래잡는 얘긴 줄 알고 덤볐다가 내 주말이 사색으로 가득 찼다. <암흑의 핵심><어둠의 심연>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맞닿는다. 문체는 반짝이고, 시도는 새롭고, 스며드는 시선은 따스하다. 고래의 계보와 특성은 부수적이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알 수 없는 바다와 기약할 수 없는 긴 항해, 죽음을 무릅쓴 40년 간의 필사적인 사투에서 미지의 공간을 찾을 수 있다. 필요한 건 예비 보트, 예비 돛대용 목재, 예비 밧줄과 작살, 쇠고기와 빵, 물, 연료, 쇠테와 통널 등의 항해 도중 잠깐씩 정박하는 항구에서는 구하지 못할 귀한 물건들이고, 이 미지에 참여한 이들은 기이한 식인종 퀴퀘그, 이슈메일, 빌대드 선장, 펠레그 선장, 에이해브 선장, 채리티 아줌마, 일등항해사 스타벅, 스틸킬트, 래드니, 그들은 바다 위에서 차례로 죽어나간다. 그게 운명이라는 듯, 만약을 영원히 반복하는 벌이 주어졌다.

 

군함의 닻을 계류용 밧줄을 매는 기둥으로 삼고 작살 다발을 박차로 삼아 저 고래에 올라타고 가장 높은 하늘로 뛰어 올라가서, 무수한 천막이 늘어선 가상의 하늘이 정말로 내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 진을 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먼 멜빌, <모비 딕>)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는 바다를 만나고 포경선은 포경선을, 인간은 하늘과 만난다. 멜빌과 <모비 딕>에 쏟아지는 공식적 찬사가 아니라도, 19세기 상상력은 확실히 지금보다 멀고 높고 뜨거웠다. 싸움이 고독한 이유는, 망망대해 배 위에서 후퇴할 공간이 한평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힘과 힘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하고 절망하고 실패하는 이야기이기에 성스러운 경지에 있다. 증오는 복수가 되고, 복수는 위험을 무릅쓴다. 에이헤브 선장이 자신을 물어뜯은 고래에게 집착하는 동안 배에 탄 사람들은 목숨을 위협받는다.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먹힌 에이헤브가 40년간 바다를 떠나지 못한 이유는 결국 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하늘 아래 두 존재가 동시에 평화로울 수 없다는 상황은 자연에게 지배당할 것인가, 자연을 지배할 것인가와 상통한다.  

 

"계속 태양 쪽으로 몸을 돌리는구나. 죽음을 앞둔 마지막 동작으로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이마를 돌려 태양에 경의를 표하고 기원하는구나. 고래도 역시 불을 경배하는구나. 태양의 가장 충실하고 광대하고 당당한 신하여! 아아, 지나칠 만큼 많은 은총을 받은 내 눈이 지나칠 만큼 많은 은총을 받은 이 광경들을 보는구나. 보라! 물로 에워싸인 이 광대한 바다를 보라. 더없이 공정하고 공평한 이 바다에서는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을 표현하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허먼 멜빌, <모비 딕>)

 

에이헤브 선장이 모비 딕에게 복수를 한다 해도 인간의 발을 뜯어먹을 고래는 없어지지 않는다. 종이 번식하는 한 영원히 존재한다. 인간이 없애버리면 그러지 않겠지. 그렇다고 인간이 고래 위에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인간이 고래에게 도전하는 한, 고래에게 먹힐 위험은 여전히 존재한다. 신기한 건 멜빌이 의도한 이 위대한 모험소설 안에 인간 군상은 물론 세계를 둘러싼 모든 의도가 압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신, 사랑과 증오, 일상과 일탈, 종교와 광기, 위대한 주제로 꼽히는 인간과 자연의 문제까지. 마지막으로 고래포획은 금기시되지만 여전히 불법수탈로 이뤄지고 있다. 달리 먹고살 일이 없는 북극에서는 고래를 못잡게 하거나 북극곰 개체가 줄어들자 도시 번화가로 떠나 약탈당한 마을마냥 변두리가 텅 비었고, 여러 생명체의 포획은 금지법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도 큰돈이 된다고 들었다. 예전에 푸른 제주바다로 돌아간 제돌이 생각이 난다. 뭔가 짠해서 일부러 다큐까지 보고 그랬는데 돌고래조차도 이렇게 감격스러운데 흰 고래라니, 모비 딕이라니, 한동안 북극사진은 쳐다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세계가 지구촌이 아니라는 걸 믿으면서도 세계 어디로든 맘만 먹으면 내 발로 밟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북극은 아직도 하늘과 땅의 중간 어디쯤 존재하는 미지의 장소처럼 여겨진다.

 

이렇게 주말이 황홀했다는 것은 동시에 대충봐도 2000페이지는 넘는 문자를 소화하느라 진이 빠졌다는 소리다. 다음 소설 한 권을 집어드는데 페이지가 얇아지니 중무장하고 행군하다가 무거운 거 다 벗어버린 그런 느낌이었다. 독서의 무게는 페이지수에서 나오는 게 아니지만 지난 주말에는 분명 그랬다. 팔과 머리가 동시에 무거웠으니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시간을 팔아 책을 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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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3-25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써로... 폴 서루...
왜 다른 책은 번역이 안되나 했더니, 아프리카 기행문이 있었군요. @@

아이리시스 2014-03-30 07:49   좋아요 0 | URL
이름이 낯익긴 한데 이상하게 다른 데서도 들어본 듯한 이름이에요. <아프리카 방랑>에 보면 자기책 인용 되게 많이 하는데 정작 번역된 건 하나도 없었어요. dreamout님은 벌써 알고 계셨군요!

막 버라이어티한 여행기 기대하시면 드라이하고 딱딱할 수도 있는데 그냥 무난해요^-^b

2014-03-26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30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4-03-2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래서 아이리시스님이 좋아요 ㅋ 불 타는 주말을 보내셨네요. ㅎㅎㅎ
글 속에 쓰고 쓰고 또 쓴 집념의 아이리시스님이 참으로 좋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전 왜이리 숨어지내는지. ㅋ
전 독서가 어렵네요. 글도 못 읽고 쓰지도 못하고 있어요. 푸하

아이리시스 2014-03-30 07:47   좋아요 0 | URL
불 타는 주말, 앗싸라비야, 하고 싶었는데. 사실 좋다고 생각해요. 아무 방해도 안 받고 일주일에 하루쯤 책만 읽는 거. 그치만 그러기에 제가 너무 젊죠. 건강하고. 예쁘죠. 푸핫.
루쉰님 기다리다 지쳐갑니다. 교도들과 신자들도 모두 파업했어요, 반성하세요!
돌아오세요, 언제든지^-^

Shining 2014-03-29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걸 주말에 다 읽었어요....? 대단하다, 진짜 대단해요........(털썩) 저는 모비딕도 아직 안 읽은 독자...ㅋㅋㅋ
저는 이번 주말에 영화 세 편을 보기러 했는데 벌써부터 다 못 볼 것 같은 느낌이.....
왜 읽지도 못할 책은 만날 보관함에 담고, 당장 보지도 않을 영화를 결제하는거죠? 왜, 왜그러죠. 나만 그런가.......

이번 주말엔 뭐 읽어요? :)

아이리시스 2014-03-30 08:13   좋아요 0 | URL
그런데 주말이 참 짧아요. 후딱 지나가요. 책이 참 별거 아닌데 대단한 게, 세 권 읽느라 지난 주말엔 정말 한 게 없어요. 잠을 많이 자긴 했지만 거의 책만, 진짜 책만 읽어야 이틀(정확히는 하루 반나절이지만)만에 끝납니다..(흐억)

금요일부터 비가 와서 날씨가 되게 별로예요. 어젠 하루종일 비왔고 오늘도 흐려요. 주말 날씨 뭐 이래.. 그렇지만 영화 보러 가기로 했으면 봐야죠! 어떤 영화 보러가는지 궁금해요...

제말이요... 맨날 담아요. 이런 말 하기 싫지만 보관함 터져나가요. 오천권은 있을 거예요. 정리할 엄두도 안나요. 어느날 싹 지우고 다시 담기 시작해요. 이게 뭐하는 거죠? 왜그러죠? 두 달 동안 책 안샀어요. 돈 없어요, 흙흙. 집 여기저기 책이 쌓여있으니 엄마 눈치가 좋지 않아요.-_- 이렇게 4월까지 참을까 싶어요. 히히히^-^

이번 주말엔 서평도서를 해치우겠어요. 음음, <책 읽는 소녀>, <미시시피 미시시피>, <포트노이의 불평>, <대구>가 있어요! 근데 어제부터는 <윈터스 테일>을 읽는 중 :)

일요일이 밝았어요! 영화 재미있게 잘 보고 와요 ^______________^

맥거핀 2014-03-3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허...이걸 책지옥이라고 해야하나요, 책천국이라고 해야하나요? 그야말로 책들을 씹어먹으면서 날들을 보내고 있군요. 가끔 보면 저는 알라딘 오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책도 안 읽는데, 왜 여기와서 기웃거리고 있는지...근데 진짜 저 같으면 책 읽다가 지쳐서 포기할 것 같은데...대단해요!

<모비딕>은 아주 예전에 읽었는데...읽고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내용을 쓸 생각을 했지,였어요. 어떤 이야기나 책들은 아주 가끔 다른 무엇인가가 인간의 손을 빌어서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아이리시스 2014-03-31 11:14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안녕, 오랜만. 제가 좀 극단의 끝장판이라 중간이 없어요. 다 읽겠다고 작정하고 덤빈 거였으니 목표달성한 셈이죠. 재미로 읽었음 진작에 포기했겠죠. 제 의지도 뭐 그리 굳건한 편 아닌데다, 취미생활에 그럴 필요가.. 책도 안 읽는데 왜 여기와서 기웃거린다니요... 큰일날 소리. 그러다 안오시면 저는 어쩌라구요.........

<모비딕>이 재미있을거란 생각은 들었어요. <해저 2만리>도 재밌게 읽었고, 요즘은 바닷속 세계와 생명체에 관심이 가요. 여튼 대단해요. 눈앞에서 고래가 뒤집는 광경을 보고싶을 만큼. 멜빌이 19세기 사람이라는 걸 전제해도 그렇고 안해도 그렇고요. 그 어떤 현대작가보다도 세련된 문장으로 써요. 맥거핀님은 은근 문학 많이 읽으신 독서가 느낌....
 

 

 

페이퍼 제목의 문장은 카프카가 한 말이다. 나는 애초부터 내가 나 이상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가름나진 않았지만 여튼 카프카는 좋은 뜻에서 한 말이겠지, '휘어진 그림자를 원망하면 안된다. 휘어진 내 몸을 펴야만 한다'고도 했으니까. 어느덧 올해 첫달도 다 지나간다. 말일에 명절 연휴가 있으니 그전에 뭘 더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첫문장을 못 쓰는 슬럼프에 빠졌다. 시간의 텀으로 나는 점점 가라앉는다. 더 깊이 가라앉으면 떠오르는 시간도 더 길어질 걸 알면서도 뭍으로 올라와야 한다는 걸 자주 잊는다. 귀찮아졌고 지루해졌고 동기부여가 사라졌고 책과 TV는 재미있다. 굳이 적자면 책 몇 권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영상으로 옮긴 다큐를 보았다. 생전 처음으로 스크립터가 되어보았다. 읽어야 할 책을 못 읽어 써야할 리뷰 기한을 넘긴 걸 까먹을 만큼 하얀 여백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얼른 검은 글씨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늘 말하지 못해 안달하고 쓰지 못해 애태우는 애였는데. 간혹 극장과 집을 오가며 텔레비전과 씨름하면서도 나는 잘 살아갈 것이다. 책과 그림, 술과 사람으로 더 풍성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걸 아는 것과는 별개로. 이럴 땐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라 열정에 바친 예술가들이 부러워진다. 

 

'내 영화, 그림, 표면만 봐라.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던 워홀은 돈을 버는 것, 일하는 것, 사업을 잘하는 것 모두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림은 돈이 되기 어렵지만 건축은 곧 돈이고, 책은 팔려야만 돈이 되고, 영화는 티켓을 파는 걸로, 방송은 광고를 통한 소비욕 자극으로 돈을 번다. 워홀은 상업 예술가, 나아가 사업 예술가를 꿈꿨다. 슬로바키아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 부모 밑에서 유일하게 대학 교육을 받은 그가 뉴욕으로 건너간 건 1949년이었다. 그곳에서 스물 다섯의 동성애 작가인 트루먼 카포티에게 반한다(사랑으로서인지 우정으로서인지 팬으로서인지는 몰라도). 큰 틀에서 보면 예술사에 획을 긋거나 혁신한 건 없지만 그는 24시간 파티장, 히피문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예술패턴이 확연하게 달라지던 역사적 순간에 서 있었다. 워홀의 도전정신은 약간의 발상 전환만으로도 누구나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준다. 고흐 생전 유일하게 400프랑(당시 우유 한 잔이 1프랑)에 팔린 <아를의 붉은 포도밭 [Red Vineyards at Arles, 1888]>은 파리의 안개에서 벗어나 프로방스를 거쳐 빛을 향해 남쪽으로 향하던 고흐가 아를의 론 강 근처 작은 마을에서 고갱과 함께 생활하던 중 그린 그림이다. 고흐는 평생 꿈꿨고 가난에 시달렸다. 산만한 사색가였던 그는 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하지 않는다. 본인이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의 짧은 생애에는 불행의 요소가 많았다. 반면 워홀은 나중보다 현재의 명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가 돈을 벌 수밖에 없던 이유다.

 

 

* "일단 유명해져라.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줄 것이다." -앤디 워홀

 

* "내가 지금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나는 나중에도 가치가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사람들이 나에게서 어떤 가치를 찾는다면 나는 지금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이름 모르는 풀잎으로 여겨질지 몰라도 밀은 밀인 것이다."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보다 더 많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가슴이 시키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죽음이 두려우세요?

"외로움보다는 덜 무서워."

기도를 하세요?

"그럼, 난 사랑을 믿거든."

일을 하시면서 가장 좋았던 기억은요?

"매번 무대 커튼이 올라갈 때마다."

여자로서 가장 좋은 기억은요?

"첫 키스."

밤을 좋아하세요?

"그래, 많은 불빛과 함께라면."

새벽은요?

"피아노와 친구들이 있으면 좋지."

저녁은요?

"그건 우리에겐 새벽이거든."

여성들에게 조언을 주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어요?

"사랑."

젊은 여성들에게는요?

"사랑."

어린이들에게는요?

"사랑."

누구 옷을 뜨시는 거죠?

"내 스웨터를 입을 사람."

 

초등학교 중퇴, 키 142센티미터, 부랑의 미혼모, 파리의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이브 몽탕, 장 콕토,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 테오 사라포. 가난 속에서 외롭고 고독하게 자란 그녀는 남자(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건네는 모든 조언이 '사랑'에 치중될만큼. 그녀는 <장미빛 인생(원제:프랑스어: La môme, 영어: La Vie en rose)>의 주인공 에디트 피아프이다. 노래와 사랑에 모든 영혼을 바친 여자. 장 콕토는 에디트 피아프에 대해 '나는 피아프보다 영혼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 "사랑은 경이롭고 신비한 거야. 사랑은 나에게 있어 노래를 부르게 해주는 힘이지. 노래 없는 사랑과 사랑 없는 노래는 존재하지 않아." -에디트 피아프

 

 

또다른 여성작가 한 명을 보자. 버지니아 울프는 아버지가 다른 큰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마치 야수와 함께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고 표현한다. 신경쇠약에 걸리고 전염병으로 어머니를 잃은 뒤 정신질환 증세마저 더해져 자살을 시도한다. 나중에 언니의 권유로 아버지가 같은 남매 넷이 따로 나와 살다가 블룸즈버리 그룹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여기서 포스트, 케인스, 러셀, 헉슬리, 엘리엇, 미술가 프라이 등과 만나고, 역시 블룸즈버리 그룹에 속해 있던 남편과 결혼한다. 그녀가 결혼 후 1차대전이 일어나기 한해 전 <출항>을 탈고한 후 자살을 재시도한 것이나 전쟁의 도가니 속에 미쳐가던 59세에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서 주머니에 돌을 넣고 물속으로 걸어들어가 끝내 자살에 성공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늘 정신이상이 도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강박증에 시달린 울프가 남긴 유서에는 '저는 생명을 잉태해본 적이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로서의 역할을 여기서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라고 쓰여있었고, 그녀의 시신은 3주 후 강물 위로 떠올랐다.

 

 

 

"당신은 왜 눈동자를 그려넣지 않나요?"

"내가 그의 영혼을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리게 될 거야."

 

반면 가톨릭의 보수적인 부르주아 가정에서 자란 19세 여인. 이탈리아 출신으로 리보르노, 피렌체, 베네치아를 거쳐 파리로 터전을 옮긴 이후 장 콕토, 피카소, 마티스를 만나지만 아방가르드 미술은 물론 어느 화풍에도 가담하지 않고 고독 속에서 독특한 예술실험을 해나간 남성. 그가 결핵성 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림 <자살>을 남기고 9개월의 둘째 아이를 간직한 채 5층 아파트에서 몸을 날린 여자는 베개 밑에 면도칼을 품고 자던, 사랑밖에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22세의 여자였다. 남자와 여자는 20세기 파리 데카당스 청춘들의 한중심에 있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이다. 생전 연인이 나눈 대화는 눈동자를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창문이라고 여긴 모딜리아니와 사랑에 모든것을 걸었던 에뷔테른의 잔잔한 행복과 슬픈 아름다움을 그대로 그려놓은 듯하다. 가난한 유대인 화가와 딸의 결혼을 끈질기게 반대한 여자 부모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파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합장된 그들의 묘비명은 이러하다.

 

-이제 막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모든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반려

 

 

대가는 도와주고 믿어주는 이가 적지 않은 걸로 이미 대가가 된다. <살인자의 기억법> 말미에 덧붙여진 '작가의 말'에서 김영하 작가는 백수 작가지망생 아들의 책상 위에 놓인 재떨이를 매일 비워준 아버지 덕분에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썼다. 물론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더 좋은 작가가 되겠다고도 썼다. 그렇다면 프로이트 역시 아버지께 자신의 모든 업적과 영광을 돌려야 할 듯하다. 프로이트의 아버지는 '아들의 발가락이 내 머리보다 영리하다'고 했다. 사람들을 이를 두고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표현한다. 다윈의 진화론과 괴테의 자연론에 영향을 받아 의학을 선택한 프로이트는 '이 작품은 내가 운 좋게 발견한 것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보물들을 담게 될 것이다'라고 자신했던 <꿈의 해석>을 2년간 351부밖에 팔지 못했다. 제1차대전 즈음 독일군을 대상으로 정신병학을 연구했다는 명목으로 나치정권은 그의 서적을 불태웠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면서 게슈타포의 위협을 받게 되자 루즈벨트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82세에 영국으로 망명한다. 프로이트의 생도 알고있던 것보다는 훨씬 파란만장한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깊숙이 마음을 뚫고 들어온 말은 피카소의 입을 통해서 왔다. 다이어리에 뭔가를 한줄 끄적였다. 그리고 비로소 첫문장을 시작한다. 나쁘지 않게, 더 늦지 않게, 최선을 다하여. 대가들의 짧은 문장 안에서 인생을 대표하는 삶의 자세와 표정을 본다. 나는 자주 어떤 문장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희망을 발견하고 열망을 키운다.

 

* "착상은 출발점일 뿐이다.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파블로 피카소

 

* "세상이 지나치게 좁든지, 아니면 우리들이 엄청나게 크든지, 어쨌든 우리는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어요." -프란츠 카프카

 

* "가장 참기 힘든 것은 못참을 게 없다는 것이다." -아르튀르 랭보

 

 

하루종일 비맞은 대지가 축축한 물기를 머금었다. 날이 어두웠고, 하늘이 가라앉았고, 나는 무기력했다. 최소한의 말귀가 통하지 않는 어떤 사람 때문에 뜻하지 않게 욕설이 오고가는 싸움을 해야 했다. 집안일이다. 동생이 자진해서 갔지만 동생의 급하고 독한 성격을 알기에 싸움터에 보낸 기분은 편치 않다. 욕은 하되, 손은 대지 마, 말했지만 흥분에 들뜬 동생은 금방 내 말과 내가 말했다는 사실마저 잊을 게 뻔하다. 돌아와서 내가 저사람을 때릴까봐 경찰을 불렀다고 말했으니까. 이제 우리가족은 내가 지킨다며 두주먹 불끈쥐고 나서는 저애가 어릴때부터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며 식구들을 불안에 빠뜨리던 그애가 맞나. 지구대를 거쳐 경찰서까지 갔다 돌아와서도 의기양양하다. 그래, 저애는 웬만해선 기죽는 법이 없지, 그게 자주 나를 미치게 했고, 가끔은 든든했지만. 낮엔 피자를 시켜줬고, 늦게 일어난 내게 피자 데워먹고 있으라고는 싸움터에 갔다. 불안의 오후가 지나고, 장녀인 나보다 더 장남같은 동생의 비행담을 줄줄이 생각해보면서 피식거린다. 저애는 온 삶이 반짝이는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이 불합리한 세상을 온몸으로 헤쳐나가는 뜨거운 자만의 흔적이랄까. 불안하고 초조하고 우려스러울 때가 많지만 그래도, 역시 든든하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悲歌를 읽는다. 비가 그쳤는지 밖에 나가볼 생각이다.

 

...

다만 많은 것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삶 속에 있는

모든 것. 사라져 가는 것이 우리에겐 필요하며

이상하게도 우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쉽사리 사라지는 우리와,

한 번, 모든 것은 단 한 번 존재할 뿐, 한 번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

우리도 한 번 존재하노니 결코 다시 시작되는 법이 없다, 하지만

한 번 이렇게 존재했다는 사실은 되물릴 수 없으리라.

...

대지여, 사랑하는 그대여, 내 바라노라, 오오 믿어라, 이제

그대의 많은 봄 필요치 않으리, 나를 그대에게 이끌기 위해 - 하나의 봄,

아아, 한 번의 봄만으로도 내 피엔 너무 많노니,

이름도 없이 나 그대에게 가려하노라, 오래 전부터,

그대는 늘 옳았노라, 그대의 성스러운 착상은

허물없는 죽임이니.

...

 

-릴케, <두이노의 비가> 제9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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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6 0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4-01-26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디 워홀의 말이 재미있어요. 일단 유명해지라는 말도 그렇고, 내 영화, 그림, 표면만 보라는 말도 그렇고요. 그렇다고 사람들 박수 받으면서 똥을 싸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아무것도 없다던 그 '뒤'에 보이는 속셈은 한 번 뒤집어보고 싶기도..

그나저나 님에겐 참 든든한 문장들, 아니, 동생이 있군요. 부럽습니다.

아이리시스 2014-01-27 20:22   좋아요 0 | URL
포핀스님, 저는 확실히 워홀 스타일 쪽은 아닌것 같아요. 유명해지면 돈을 많이 벌고 명성도 얻겠지만 일단 유명해지라는 말에 동조할만큼 제가 성공지향형 인간은 아닌 듯해요, 슬프지만. 아닌건 아닌거죠, 저는 저니까요^^

따로살더니 엄마밥 못먹어서 덩치가 커진, '자주' 짜증나게 하지만 '가끔' 든든한, 피자,자장면,탕수육,순대국 이런거 같이 먹는 아직 같이 사는 동생이 있습니다.. 그제,오늘은 좀 든든합니다. 일년에 이틀 정도만..

2014-01-26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문장도 아이님 글 맥락에 놓이니 다르게 읽히네요. (더 의미 있어져요.)
근데 "세상이 너무 좁거나 우리가 너무 크다. 세상은 자신으로 꽉 차 있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사실 오늘 전 그 정반대를 느꼈어요. 세상은 아주 큰데 우리는 너무 작죠. 작은 몸에 걸맞게 좁은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답니다. 아무래도 저 너른 산맥과는 달리... 오늘 남부에서 로마 오는 기차에서 느낀 거예요. 근데 첫문장이 안 써진다는 건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건데요.?! 아마 소설 아닐까요? 맞죠? :)

아이리시스 2014-01-27 20:17   좋아요 0 | URL
거기 좋아요, 섬님? ^-^bb

친구신청 받아줘서 고마워요. 사진 틈틈이 잘 볼게요!
맞아요, 서글프기도 하지만 세상은 아주 큰데 우리는 너무 작죠. 커지려고 애쓸 뿐이죠. 음, 생각해봤는데요, 첫문장이 안 써진다는 건, 저걸 쓰던 시점부터 지금까지는 '계획한 일과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하기가 싫어' 의 뜻이었던 것 같아요. 징징댄 거죠. 그래서 사실은 그날 다이어리에 초딩계획표 닮은 몇 개월 계획표 짰어요. (소설을 쓰는 건, 소설을 써서 유명한 작가가 되어 (책이든 글이든)잘 팔리고 돈을 많이 버는, 그래서 그돈으로 진짜 마음속에 가득찬 꿈을 이루는 것보다는 아주 쉬운 일이에요, 섬님^^)

남부 어디일까 막 궁금해요, 소렌토,나폴리,아말피,카프리,포지타노,베네치아,피렌체,하하, 마지막 두개는 남부도시에 속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제기억에 의하면 로마보다는 남쪽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이제 로마에 계세요? :)

안그래도 소식 기다리고 있었는데, 반가웠어요! 남은 시간 즐겁게, 안좋은 일은 당하지 마시고 행운만 가득하시길! (진심-빨리와요, 배아파,부러워,나도가고싶어,어서와요,빨리오세요,빨리)

아이리시스 2014-01-28 01:54   좋아요 0 | URL
으하하, 뭔가 촉이 와서 제가 지금 막 이탈리아 지도 검색했더니 저 도시들중에 로마가 제일 남쪽.. 이걸로 제 방향감각이 제로인 건 증명되고...( '')
그러니까 저는 제가 이동한 순서가 남에서 북으로, 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우리나라에서도 남쪽에서 사니까. 어쨌거나 섬님이 로마에 계신건 안변하니까 으하하하

사진들 좀 보고 잘게요!

2014-01-28 0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30 0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29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30 0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30 0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7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3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3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4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6 0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빅 필립 K. 딕 걸작선 11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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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야 하는데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게 범죄물(스릴러)이라면, 있을 법한데 없는 세계를 구축하는 건 SF다. science fiction(공상과학소설)으로 일컬어지는 SF의 시초는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오손 웰즈의 <타임머신>이며, 주로 인간이 닿을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존재할 법한) 세계를 상상과 기술에 기초하여 써내려간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인간의 예측, 기대, 추정이 이른 최초의 세계가 '바다'와 '우주'인 건 묘하지만 충분히 그럴 법하다. 둘 다 미지의 비밀을 다량보유한 세계이자 지구인이 제모습을 고수한 채 탐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후 SF는 줄곧 삶과 죽음에 열중하는데, 이러한 소재적 한계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가로질러 이야기가 출현하고 또 소멸하기 때문일까.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이 세계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는 기적의 계산법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우주공간과 사후세계에 골몰해온 SF는 어느 순간 배아기胚芽期 이전의 착상着床으로, 착상着床 이전의 無로 회귀했다. 모든 인간은 있는 동시에 없고, 없는 동시에 있다. 너무나도 멀쩡해서 더이상 완전할 수 없는 상태로. 아마 '유빅'은 세속의 어그러진 속성을 부지불식간에 반전시키는 능력을 가진 '무언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의 지각에도 차이가 있는 거로군. 앨은 깨달았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SF를 단순히 있을 법한 세계에 천착한, 맹랑孟浪한 이야기로만 여겨서는 곤란하다. '저'기서 '어제'와 '내일'을 비틀고, 꼬집고, 기대함으로서 지금 이 자리에 붙박인 인간을 더욱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찬사는 필수적이다. 내가 이 생소한 장르에 대해, 겉핥기도 못했다는 걸, 언제 끝날지 모를 유영游泳을 이제야 시작했다는 걸, 혼자 힘으로 처음 떠난 여행이, 모든 스킨십을 처음으로 경험한 첫 연애가, 카뮈와 위고와 발자크가 어떤 작가인지 몰랐을 때의 첫 독서가 그랬던 것처럼 서투르고 두서없고 유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작품을 아는 게 작가를 아는 거라 할 수 없고, 작가를 모르고 작품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유빅>을 읽기 전 이 작가를 몰랐다.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룬 SF문학의 경계가 어디인지, 그는 왜 필사적으로 다른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애썼는지, 어째서 그가 만들어낸 기술적이고 창대한 미래는 아직 도달하지 않는지. 아슬아슬하게 작가 필립 K. 딕과의 동시대 조우를 피해간 내게도, 죽은지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할리우드의 핫한 원작자로 주목받는 필립 K. 딕에게도, 2013년 막바지에서 별달리 내세울 것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퇴화와 초월이라는 예측불가능한 현재와 확실하게 정의할 수 없어 더욱 유용하고 가치있게 쓰이는 '유빅'과 <유빅>은, 유례없는 행운의 물질(matter, substance, material)이 될 것이다.

 

기이하고 거대한 힘이 그들의 삶을 재단하고 있는 것일가. 그 힘이 작용하고 있는 곳은 산 자의 세계일까, 아니면 반생자의 세계일까. 아니. 갑작스러운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양쪽일지도 몰라. 어느 쪽이든 간에, 그 힘은 그들의 경험을, 아니면 적어도 그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마 쇠퇴와는 별도의 힘이리라. 


텔레파스와 프리코그(예지능력자)가 활기치는 미래, 지금부터 소개할 세계는 작아서 보이지 않는 내가 완전히 내려다볼 수도, 완벽히 구축할 수도 없다. 죽은 자는 산 자를 위해 모라토리엄 기관에 의해 냉동보존되고, 육신은 사라져도 영혼은 남는다는 미명 아래, 관 속에서 말(목소리)로만 산 자와 접촉한다. 하지만 반생자의 상태라 불리는 이 냉동보존 상태의 사람에게도 수명이 있으며 영원히 같은 상태로 존재할 수는 없다. 텔레파스와 프리코그를 막아내기 위한 반反초능력자(불활성자) 회사 대표 런시터는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스웨덴의 모라토리엄으로 가서 아내 엘라를 호출한다. 어느 날, 뒤쫓던 초능력자들이 차례로 사라지는 어려움으로 경영난에 봉착한 런시터는 거액의 의뢰를 받고 최정예 11명의 불활성자들을 이끌고 달로 간다. 무슨 일인지, 누가 배후인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시작한 작업은 달에 도착해 함정이자 계략이라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알 수 없는 자로부터 대테러를 당한다. 그때 런시터가 사망한다. 그의 시신을 냉동보관해 태양계로 돌아온 일행은 반초능력 테스트 기술자이자 런시터 어소시에이츠의 공식 후계자이자 대행인인 조 칩과 반초능력자 발굴자인 애시우드, 반프리코그로서 특별한 능력을 보유한 팻이다. 곧 이들을 중심으로 야릇하고도 오묘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사실 죽은 자와 산 자가 대화하고 텔레파스와 프리코그의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한' 반텔레파스와 반프리코그의 활동은, 이미 사후세계가 구축된 듯 보이고, 영웅주의 스토리가 판치는 세상이라면 하등 놀라울 게 없다. 기이한 세계는 조 칩과 애시우드가 현실에서, 과거와 조우하면서부터다. 달 멤버 중 하나인 웬디가 방사능에 노출된 것처럼 폭발 후 쪼그라든 사체死體로 발견되자, 이상징후를 감지한 그들이 원인찾기에 나선다. 달에서 이미 냉동보관 상태로 운반된 런시터가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말(글자)로 메시지를 보내오자, 조 칩, 애시우드, 팻이 이를 알아채면서 달 멤버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시간, 물질, 장소, 기억마저 역행시키는 불가사의한 일이 순차적으로 일어나면서 1992년 지구를 둘러싼 세계가 차츰 1939년까지 가속 퇴행한다. 조 칩이 사는 아파트의 현관문, 커피포트, 크림과 설탕, 라디오, 녹음기를 비롯한 유빅까지 모두. 모든 것이 언제든 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빅>의 세계가 지키는 두 가지 룰은, 미래를 보는 프리코그가 직접 시간을 이동하여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과 어느 세계든 공평한 무게, 질량, 온도, 중력을 위해 균형, 비례, 조화를 유지하려는 일련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는 내가 틀린 경우 상대방은 반드시 옳다. 상대가 내려간 만큼 나는 올라가고, 내가 뜨거워진 만큼 상대는 반드시 식는, 대칭법이 통용된다. 혼란에 휩싸인 상황을 이해할 키(key)를 쥔 사람은, 죽어서도 계속해서 산 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런시터'와 다른 프리코그들과는 달리 미래를 본 다음 과거로 이동해 미래상황을 바꿀 능력을 가진 '팻'이다. 조 칩과 애시우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카메라는 계속해서 허우적대는 조 칩의 뒤를 쫓고, 우리는 눈앞에 있는 모든 등장인물의 정체를 의심해야 한다, 자기자신까지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잠들기 전까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가 어떤 식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면서 완벽하게 달라져있다면 어쩔 것인가. 슈퍼마켓이나 약국에서 내가 가진 돈이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계속해서 단계별로 시간과 물질이 퇴행한다면 말이다. 오늘 만지작거린 최신식 디지털 기기가 갑자기 반세기 이전의 구식품으로 바뀌어 있다면 말이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려 노력하겠지만 머지않아 다다른 세계에 적응(순응)하게 될 것이다. 그게 인간의 힘이 미치는 작용범위이자, 경험(인식)의 가능성의 한계니까.  


"그게 쇠퇴와 함께 진행 중인 두 번째 작용이야. 동전 일부는 폐지되어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돈이 되어버렸지만, 다른 돈은 런시터의 초상화나 상반신이 인쇄된 걸로 바뀌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얘기해줄까? 난 이 두 작용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해. 하나는 멀어져가는 작용이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과정이랄까. 그게 첫 번째 작용이지. 두 번째 작용은 그와는 반대로 존재하게 되는 과정이지. 단 예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바뀌긴 하지만."


하지만 필립 K. 딕이 <유빅>의 세계를 통해 보려주는 것은 이 경험(인식)치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다. 시공간의 무너짐 속에서도 굳건하게 존재하는 단 하나에 대한 자각같은 것 말이다. 한순간에 주인공들이 닥친 상황(환경)을 반전시키고, 실재와 환상을 뒤섞어 어느 쪽이 진짜(현실)인지를 독자가 가늠하지 못하게 만들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안을 [엔트로피 법칙]에 적용시킨다. 불안, 소비, 일회적 욕구를 만들어내는 세력과 이에 대항하는 세력의 치열한 다툼이 결국 이 세계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아니냐고. 맙소사, 나는 엔트로피 법칙이나 열역학 법칙에 대해서는 아무리 살펴도 잘 모르겠다. 한편, 작가는 우리가 딛고 선 땅이 과거나 미래,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를 묻는다. 당신이 누군가의 상상 속, 과거나 미래 혹은 태양계나 우주계 바깥, 無의 상태,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다는 사실을 인증할 방법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또 여긴 어딘가 말고는 나라는 존재(being)를 설명할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안심한 순간 불현듯 뒤집히는 메카(Mecca:지금 내가 서있는 현재/지구)는 나를 비롯한 주변환경 모두를 의심하게 하고, 불안마저 증대시킨다. 관능적인 수 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엔트로피(entropy), 즉 불안과 연계시키고, 삶과 죽음, 물질과 비물질, 형태와 비형태, 과거와 미래, 현실과 환상, 육체와 영혼, 볼수있는것과 볼수없는것의 경계에서 존재자체와 어떻게 존재하는가(존재상태)를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유빅'은 말한다. 자신이 이름은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언제나 존재하는 '말'이라고. 모든 것을 새롭게 생각하고 그 생각 주위에 모든 것을 다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전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이 세상을 겨우 다시 보고 듣고 느낀다. 현재는 살아있는 과거. 무한하며, 평범한 이해를 능가한다. 이것은 과거가 현재를 결정지으며, 현재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이해 안에서는 불가능한 세계다. '유빅'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존재할 것이므로.


나는 유빅이다. 이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나는 존재했다. 나는 여러 태양을 만들고, 여러 행성을 만들었다. 나는 생물과 그들이 살아갈 장소를 창조했다. 나는 그들을 이곳으로 움직이고, 저곳에 가져다 놓았다. 그들은 내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고, 내가 명하는 대로 행동한다. 나는 '말'이다. 내 이름은 결코 입에 오르지 않으며 내 이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유빅이라고 불리지만, 그것은 내 이름이 아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앞으로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역사학자 E.H. 카는 대표작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띤다고 해서 산이 객관적으로 어떤 형태도 띠지 않는다거나 무한한 형태를 띤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쓰고 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존재자체, '이름'이 아니라 '대상對象'이어야 하지 않을까. 시인 김춘수의 시구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에서의 '꽃'이 하나가 아니라 개별의 제각각을 뜻하는 것처럼, 유빅은 언제나 '유빅'이지만 때때로 그 '유빅'이 아닐 때가 있듯. 언젠가부터 내 곁을 지킨 달콤한 목소리와 설레는 노래, 눈에 보이는 엘리베이터와 스마트폰, 아침에 마신 뜨거운 커피는 더이상 내것이 아니게 될 날이 온다. 커피는 재물, 지위, 세력, 명예로도 대체가능하다. 여기 걸어가는 나와 저기 잠든 나, 지금 흘러나온 나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창조는 때로 너무 높고 아찔할 정도로 깊지는 않은가. 인간의 생각, 사상, 감정, 기분, 반응까지 창조하려는 이들의 콧대높은 오만은 옳을까, 단 한번이라도 그런 적이 있을까. 초능력자가 판치는 세상에 왜 반초능력자(불활성자)가 필요한가. 관습과 제도 안에 갇혀 세상을 바꾸자 외치는 자들을 엔트로피가 덜 소비되는 방향으로, 좀 더 천천히 줄어드는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제각각 갈고닦은 특유의 균형과 은밀한 방식의 제안이 필요한 시대에 섰다. 당신이 어떤 세계에 있든 얼마나 대단하든, 주어진 모든 것들은 우리가 있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세상에 널리 퍼진 싸한 냉기와 지독한 반감은 결합, 공존, 화합이라는 따뜻한 단어를 가르칠 수 있을까. 내가 걷는 길과 반대 방향에서 오고 있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를 돌려세우기 위해 악다구니와 회유, 공모의 방식으로만 대응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러면 세상이 너무 아프다.


싸워야 하면, 그것밖에 길이 없다면 역시 최선을 다하긴 해야겠지만, 조금만 돌아볼 순 없었나. 춥고 차고 기적을 잃은 시대의 크리스마스, 그후로 엿새, 남은 연말, 한 번 뿐일 올해의 기쁘고 벅차고 아프지만 무사한 순간을. 조금은 안이하고 평탄한 정착을 기대한 내가 사악했었나. 둘러보자. 나라는 존재가, 주위가, 나라가, 세상이, 여전히 얼마나 아름다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발광發光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공존, 화합, 균형의 찰나를 보았다. 지켜질 것은 지켜지고 보존될 것은 보존되는, 디스토피아를 품은 유토피아가 멀리서 빛난다. 적어도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는 한, 아무도, 누구도, 늦지 않다. 그래서 '유빅'과 <유빅>은 너무나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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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7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7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9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31 0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3-12-27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보고 보관함에 담아놓고만 있지요. 연초의 구매 때문에 자금압박도 심하고 살짝 무절제한 지출에 대한 반성과 함께 말입니다. 알고보니 이 양반의 소설이 영화화된 것이 꽤 있더라구요. SF는 사실 과학소설인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공상'을 붙여서 번역을 했지요. 인문학자들의 고루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부터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디서 보기를 SF는 비전을 주고 과학자는 이 비전을 현실화시킨다고 했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위대한 SF작가들은 깊은 창작속에서 어쩌면 유전자 깊숙히 각인되었을지도 모르는 고대의 과학을 다시 끄집어내어 미래의 예언으로 만든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만큼, 대단한 분들이 있지요.

아이리시스 2013-12-31 01:35   좋아요 0 | URL
tran님 댓글 보니까 아무 생각없이 '공상'을 써붙인 제가 뭘 몰라서 용감했구나 싶어요, 일깨워준 거 고마워요. 저는 어쩌면 SF는 절반쯤 '말안되는 공상'이라고 생각해온 것 같거든요. 제가 지나치게 잘하는 것들 중 하나가 '지르기'라서요, 책도 사고 티(tea)도 종류별로 사고 옷도 사고 빽도 사고 삔도 사고 팔찌도 반지도 화장품도 펜도 노트도 다이어리도 등등등 저는 문구류도 좋아하고 가끔 화분도 사거든요, 장식용으로. 자금은 언제나 부족하죠, 제가 그, 말로만 듣던, <파운데이션> 낱개로 구입한 사람입니다, 이 작가도 전집박스고 뭐고 한권만 우선 골라서, 이제 <유빅> 읽었으니 다음권 사자, 하고.. 박스같은 건 울집 와봐야 남아나지 않거든요. 보관욕심은 별로 없어서..( '')

'유빅'이 뭔진 모르겠지만 <유빅>은 여전히 대단한 작품이 맞습니다. 뭔가 딱 글로는 못쓰겠는 그런 지점이 있는데, 제가 열역학 법칙을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다들 이 작가를 놀라워하시니 꼭 그런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남은 올해의 하루 잘 보내세요.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고요^^

transient-guest 2013-12-31 10:16   좋아요 0 | URL
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박스는 따로 알라딘에서 준다고 하니 한번 문의해보심이..ㅎㅎ 저는 예전에 아발론 연대기를 살 때 박스를 버렸거든요. 그런데 팟캐스트를 들어보니 이 '박스'가 사실 상당한 정성과 비용이 들어가는 제품이더라구요. 아깝기 그지 없습니다.ㅎㅎ '지르기'는 저도 잘 합니디만, 조심하는 거죠. 예전에 한창 영화에 미쳐있을때에도 DVD와 비디오를 모으느라 적지않은 자금이 날아간 적도 있구요.ㅎㅎ

카스피 2014-01-10 20:43   좋아요 0 | URL
SF소설에 국내에서 번역된것은 아무래도 일본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겁니다.20~30년대 미국에서 발행한 펄프픽션잡지들의 경우 보통 잡지 제목들을 판타스틱&SF가 함께 있는 제목들을 많이 사용했는데 일본이 이를 번역하면서 판타스틱을 공상으로 번역해서 SF소설을 공상과학소설로 번역했고 일제 시대 이를 접한 우리 번역계도 현재까지 SF소설을 공상과학소설로 번역하고 있는 형편이죠.

아이리시스 2014-01-12 00:37   좋아요 0 | URL
아..그렇구나. 저는 왜 '공상'을 붙였는지에 대해선 생각조차 안해봤거든요. 당연히 공상에 기반한 거라고 생각해왔고요.. 요즘 새삼 과학의 발전과 신비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학책은 무리가 있으니 SF라도 많이.. 카스피님이 종종 도움주세요!

가연 2014-01-03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SF쪽은 적당히 알고 있을 뿐이지만 유빅, 이라는 이름은 정말 친숙하네요. 옛날 알라딘 이벤트가 유빅 컵 증정아니었던가요, 하하하. 지금 솔직히 정말 아쉬운게 그때 컵 증정할 때 이벤트 참여를 했어야 했는데ㅠㅠㅠ

사실 리뷰가 좀 어려운 느낌이 들어 ㅎㅎㅎ 댓글을 봤더니 뭔가 딱 글로는 못쓰는 그런 지점이 있는 거군요! 제가 잘 이해를 못하고 있는게 아니군요, 하하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이리시스 2014-01-08 01:39   좋아요 0 | URL
가연님 안녕? 바빠서 안오시는 거라 생각하고 오시면 인사할랬는데 한발 늦었네요, 연말연초에는 어쩐지 꼭 아프거나 뻗거나 해서.. 부모님 결혼기념일이 있고요!(이게 왜 나옴..) 유빅 컵에 생과일 주스를 꼭 부어먹어보고 싶었지만 저도 없습니다.. 이벤트에 혹해서 책 사고 그런 적은 거의 없는데..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이벤트 할 때 돈이 없었;;(흙흙)

리뷰는 어려운 게 아니라 길 뿐입니다..주절주절.. 이상하게 읽었는데도 유빅이 뭔지 설명을 못하겠는데 원래 그런지 제 이해력에 문제가 있는지 가연님에게도 추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떤 작가가 그런 글을 쓴 걸 보았어.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대. 어느 날 밤 문득 그 사람의 손을 꼭 붙들고 도망치고 싶어 한 사람과 그런 생각 같은 거 해보지 않은 사람. 손을 꼭 붙들고 말이야." (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

지구별에서의 뜨거운 마지막 밤, 손을 꼭 붙들고. 뜨겁고도 황홀한 사랑을 반추한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어 우리말로 된 소설을 읽을 수 있다면 갖은 구멍 사이로 감성이 뚝뚝 흐를 듯한 이런 제목들이어야 할 것. 굴업도와 소이작도와 소청도의 별이 사라지면, 도시 한복판에서, 사람들 한가운데서, 혼자만 너무 꼿꼿이 섰다가 비로소 조금 지칠 때, 순박한 짠내와 비릿한 그리움이 겹칠 때, 그래서 어서 훌쩍 나이를 먹고 싶을 때 다시 찾기로 나는 종종 약속하곤 한다. 최근, 책장을 뒤엎으면서 한곳에서 우르르 쏟아지기에 다시, 그렇게, 어쩌다가. 모든 것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 그리고 새로 읽기 시작한 소설은 기대했던 것보다 좋다. 그리고 줄줄이 엮인 어떤 책들에서 내가 공통적으로 맡았던 크고 강한 침묵과 함께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조금 쓰고 싶어졌다. <사람을 위한 경제학>을 올해 만난 가장 소중한 책으로 꼽으며 두 주먹 불끈 쥐고 덤벼든 순간과 감성이 폭발해 예전에 끝난 줄 알았던 책들과의 인연을 다시 맺으려 전전긍긍하는 순간, 그러니까 인생의 두 가지 순간 못지 않은 책과의 두 가지 상반된 순간을.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나는 자꾸 물과 멀어졌으며
  매우 다른 침묵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끝까지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저 너머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들을.

 

  그것은 꽉 쥔 주먹이라든가  
  텅 빈 손바닥 같은 것일까?
  길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지상을 겨누거나
  폭설처럼 모든 걸 덮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위 바위 보는 아니다. 
  굳은 표정도 아니다.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밤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



이장욱, '얼음처럼'


















그날 밤의 고백은 이제껏 K가 해온 사랑에 비하면 약간 더 놀랄 정도였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K의 연애는 늘 특별했다. 우리 중 가장 간절하게 현모양처를 꿈꾸고, 누구보다 착실하고 다정한 여자가 될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K의 인생에서 사랑은, 아마도 망망대해 홀로 떠있는 섬처럼 매번 서글펐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놀라지 않은 이유는, 꽤 오래 전 마지막일 줄 알았던 사랑을 끝낸 K라면 더이상 상상력을 발휘해도 남는 게 그 경우 뿐이었기 때문이다. K는 늘 제 외로움을 달래지 못해 사랑을 앓았고, 그에 대해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아는 유일한 사람이 우리였다. 천성이 쾌활하고 맑고 부지런해서 나는 종종 '지는 게 이기는' 당연한 진리를 K로부터 배웠다. 

열일곱, 곱고 아련한 시절부터 함께라는 이유로 나는 K가 제 사랑 앞에 놓인 돌을 얼마나 야무지게 치우곤 했는지, 끊어진 실을 부여잡고 얼마나 많은 밤을 아파했는지, 미련하리만큼 최선을 다하고 온 마음 다해 착실했는지 아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본인들에겐 더없이 애절한 마음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남는 사랑의 잔인한 전설을 모른 건 아니다. 당장 끝내란 말을 삼키며 겨우 내뱉은 말은 믿을게, 라는 작은 응원이었다. 우리 '사랑과 전쟁' 주인공은 되지 말자면서. 불륜은 나쁘지만 사람은 나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합리화가 마음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밤마다 서글프게 울리는 K의 전화벨 소리에 즉각 답하는 다정한 친구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우정이 압사당하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동시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여웠다. 행복은, 책임만으로 지켜지는 게 아닌 것 같다고 또 한번 생각했다. 우정이, 우정으로 할 수 있는 올바른 선택이 뭘까 싶은 내밀한 곳까지 밀고 들어왔다. 

글을 잘 쓰고 싶다고 말할 때의 글이 '리뷰'가 아님에도 진짜 고민과 방황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한 채 자주 오해받곤 했던 것처럼, 어쩌면 적당한 아는 척과 모르는 척이 뒤섞인 이곳에서만 겨우 말함으로서 혼자서는 견디기 어려웠던 침묵과 인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순간에 절망이 밀려왔던 것을 잊지 못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해도 그 밤을 결국 견디지 못했을 어떤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깨달았다. K에게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존재가 되어야 했다. 결국 전해지지 않을 어떤 걱정을 행여 K가 읽을 수도 있는 곳에 남기며, 언젠가 약속한 그날의 치기어린 꿈처럼 무겁게, 세상의 잔혹한 이치에 절망하는, 별이 지는 밤. 별이 뜨고 지는 게 그렇듯 K의 선택은 내 몫이 아닐 것이다.


견고하게 남아 있기 위하여.
나는 그 문장을 생각했다. 영우 오빠의 가슴에 남은 그녀의 모습엔 결코 군살 따위가 없을 것이다. 초점 흐린 눈빛도 없을 것이고, 눈가의 잔주름도 없겠지. 청정한 댓잎과도 같은 이마와 맑은 물 같은 눈빛과, 사랑의 확신으로 단단히 다물린 더운 입술의 그녀가 남아 있을 터였다. 만일 1972년 그해, 그녀가 노상규를 버리고 영우 오빠 곁에 남았다면 그들의 인생은 어떠했을까. 행복했을까. 끝없는 가난, 잔인한 압제, 겹치는 불운으로 그들은 하루하루 서로가 어떻게 망가지고 부식하는지 오히려 똑똑히 보았을 게 틀림없었다. 사랑만으로 행복해지는 세상은 전설 속에 있을 뿐이었다.
잔인해.
잠든 혜주 언니의 머리맡에서 나는 말했다.
사랑은 잔인한 형벌이야.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주 오래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궤변이 지금 다른 진실로 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후회의 사슬을 온몸에 감고, 급기야 서로에게 서로가 가해자로 둔갑한 삶을 상상하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혜주 언니와 영우 오빠가 함께 살았다면 그랬을 터였다. 사랑은 증오가 되고 삶은 감옥이 되었을 그 잔인한 하늘에 어찌 줄 끊어진 연일망정 떠서 흘러갈 수 있겠는가.
(박범신, <외등>)


<외등>에는 위 장면을 넘어서는, 훨씬 더 강렬하고 사악하고 위험하고 격정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정작 본인들에게는 오래 전에 끊어진 연, 그 연을 필두로, 이제서야 그와 그녀를 이어보려는 혹은 끊으려는, 재희의 눈으로 세월의 끈끈함을 각인시킨다.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을 울었던 제3자, 구조로 보면 재희는 등장인물 중 가장 쓸쓸하고도 아득한 세월을 감싸쥔 화자다. 지구별에서의 마지막 밤과 멀어져간 우주를 맞대어 붙이려는 시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함께 있지 못하는 사랑은 전설이 되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다 몰랐고, 그녀는 그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재희는 그들을 연결하는 동시에 존재가능한 모든 비밀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단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그녀도 몰랐겠지만. 왜 한 사람만을 믿으려 하는지, 어째서 한 사람에게만 속는지, 어쩌면 놓치는 게 가지는 건지, 어떻게 끊어진 연이 '행복'한 마지막일 수 있는지. 마음이 허할 땐 목적지 없이 그저 걷는 게 좋다. 내가 나를 못보도록 작고 가치없게 걷는 길. 노래는 한 곡 뿐이었다.




사랑과 증오의 관계는 너무도 내밀한 것이어서 그들 사이에 오간 말들을 모조리 채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의 전부일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박범신, <외등>)



10년 전, 수애를 스타덤에 올렸던 미니시리즈 [러브레터]는 사제가 되려는(혹은, 된) 한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을 성당에서 함께 보낸 둘이 대학에 가면서 각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생활의 반경이 넓어지면서 생겨나는 잦은 오해와 끈질긴 마음과 애틋한 그리움 같은 것들을 담아낸. 사랑과 신성의 갈등에 초점이 맞춰진 드라마에 비하면 지향하는 지점이 다를 뿐더러 메시지조차도 상반되지만 <높고 푸른 사다리>는 성직자의 꿈을 안고 속세를 버린 채 베네딕도 수도원에 모인 이들의 삶에 얽힌 사연을 담아내는 동시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수사(修士)의 하늘(신)에 닿기 위한 노력과 고통을 수반한 사랑(욕망)의 갈등을 통해 자신과 둘러싼 세상에의 궁극적 탐구 여정을 따라간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오직 한 인간으로서 신성한 사제가 되기 위한 믿음과 인내를 시험받는 남자의 번뇌에 집중하면 책 소개글에 쓰인 것처럼 하늘에 닿기 위해 제일 깊은 밑바닥까지 내려간 한 영혼의 성장소설로도 읽힌다. 그보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제시하는 조심스럽고도 단호한 방향잡이와도 같지만 말이다. 

"말하기로 했어. 내가 세운 규칙이 부질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나는 내 부족함을 울기로 했어. 나는 내가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슬픈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


틀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더 강하긴 하지만 행여 기억이 맞다면 내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뺑뺑이로 배당된 졸업작품(소설) 담당교수라는 이유로 그녀가 무척 궁금해진 나머지(수업도 들었지만), 방 구경을 위해 사보았던, 서해문집에서 나온 <작가의 방>에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 쌤이 아니라 공지영 작가의 말이다. 궁금증이 생기면 제일 먼저 서점으로 달려간다고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생경해서였다. 나도 대체로 그러했기 때문이고, 온 천지 묻기만 하면 누구든 알려줄 지인이 넘쳐날 듯한 사람이 궁금증이 생기면 가장 먼저 책을 펼치고 또 믿는다는 말이 신기해서였던 것 같다. 


자녀들의 도시락을 싸거나 요리를 해야 할 때는 요리책을, 힘들거나 위로받고 싶을 때는 종교서를 읽으며 달랜다는 말이 작가로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면서도 새삼스러웠다. 이 얘길 하는 이유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믿는 종교(물론 가톨릭이겠지만)가 무엇이든 <높고 푸른 사다리> 같은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자아 혹은 정체성 찾아 삼만리 소설이 낯설지 않다는 뜻에서다. 소설로서의 잠언집 느낌이 물씬하니 계속 한 달 전쯤 읽은 코엘료의 <아크라 문서>를 떠올리고 있다. 그쪽보단 이 소설이 훨씬 재미있을 뿐더러 더 마음에 든다. 


오래 전 <수도원 기행>을 퍼낸 적도 있으니 그다지 새로운 정보도 아니건만, 나는 어째서 새삼 요한의 번민과 고뇌 속으로 깊이 몰입하게 되는지. 어딘가 닿고 싶은 지상의 모든 이들 앞에 높고 푸른 사다리 하나쯤 놓아주고 싶은지. 나, 그 사다리 타고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로 훌쩍 사라지고 싶은지. '수도원'이 배경인 문학으로는 퍼뜩 떠오르는 이승우 작가의 <지상의 노래>가 있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높고 푸른 사다리>는 <에리직톤의 초상>과 더 많이 닮았다. 

 

 

"냉철한 머리, 뜨거운 가슴"

-알프레드 마셜 (Alfred Marshall, 1842~1924)

 


한 조각의 빵이 없어서 우는 사람이 있고 100조각의 빵이 지루해서 우는 사람이 있어. 둘 다 지옥 속에서 사는 거지. 어쩌면 빵이 없는 형벌은 빵 한 조각이 주어짐으로써 단순하게 벗어날 수 있지만, 100조각의 빵이 지루해서 우는 사람을 구원할 길은 참으로...... 참으로 없어." (같은 책)


작가는 '요한'을 주인공으로서 삼았으면서, 정작 진짜로 하고 싶은 메시지들은 거의 다 '미카엘'의 손에 들려준다. 놓여나지도 사로잡히지도 못해 괴로워하는 요한을 보자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본능에 충실한 페스티벌을 즐기는 것 뿐인 듯하다. 귀퉁이 접힌, 다 읽지 못한 혀의 감촉을 포함하여 헤맬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까지.



  책을 읽을 시간이야 

  너는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네가 조용히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나는 이혼은 했는데 결혼한 기억이 없어

  이혼보다 결혼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키스할 때

  서로의 혀를 접으려고 애쓴다

 

  무언가

  그 무언가를 표시하기 위해

  영원히 

 

  키스하고 싶다

  이별하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나는 천성 바깥에서 너와 함께 일생을 헤맬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

  떠나가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어디론가

  그 어디론가 



심보선, '독서의 시간'



한 사람으로 인해 온 우주가 기우뚱했고 그리고 다른 우주가 생겨나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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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12-10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이켜보면 거의 매년 문학상 수상집 같은 걸 최소 1권은 읽었었는데, 올해는 생각해보니 한 권도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늦게 올해나온 수상작품집 하나를 읽고 있어요. 근데 (상당히 건방진 얘기겠지만) 이름들은 거의다 익숙한 이름들인데, 어째 이상하게 감흥이 오는 게 별로 없어요. 분명히 소재들도 새로운 면이 있고, 기존에 못봤던 스타일도 있지만, 왜 그런지..소설 읽는 감각이 많이 없어졌나봐요. 그래서 장편을 몇 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올해 나온 한국문학 장편 중에 괜찮은 게 뭐가 있을까요? <높고 푸른 사다리> 저 소설 괜찮을까요?

참 이상한게 예전에 막 바쁘고 그럴 때는 이것도 봐야하고, 저것도 해야하고 그랬는데, 막상 시간이 생기면 할 게 없거나, 하고 싶은 의욕이 안 생겨요. 아무래도 인간의 의지란 내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시퍼요. 킁.

아이리시스 2013-12-11 01:20   좋아요 0 | URL
(상당히 건방진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다 잊혀지기 전까지 말을 안 걸려고 했어..( '')

어느 정도는 그 느낌을 알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책소개만 딱 봐도, 제가 좋아할 것 같은 것, 그 반대인 것, 그럭저럭할 것. 감을 잘 잡는 편이고, 대체로 맞아요. 맥거핀님 감각이 옅어졌다기보다 소설이 전반적으로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거나 '과잉'인 것 같아요. 맥거핀님은 그래도 소설 꽤 읽는 편이신 것 같은데, 아니었나요?^^

저는 <높고 푸른 사다리> 좋았어요. <도가니> 보다 좋았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보다도 좋았고. 저는 저 소설들도 거의 좋았거든요. 개인적으로 어떤 기대치의 문제도 있고, 작가 자체의 네임밸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 좋아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문학적 마인드 차원에서 보면, 독서, 특히 문학읽기는 어느 정도의 마음의 의욕을 동반해요. 예전에 진짜 힘든 적 있었는데, 마음이 힘들 때는 책이고 뭐고..영화고 뭐고.. 시간이 많아서 잘하게 되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시간만 많아가지고선 그다지 쓸데가 없죠. 돈도 필요하고, 애인도 필요하고, 의지도 필요하고, 친구도.. 맥거핀님도...( '')

올해 나온 소설 떠올려 보지만 딱 꽂힐 만큼 좋아한 게 있었는지 생각이 안납니다.. <지상의 노래> 좋아요!! 해외것도 골라야 하나요?

맥거핀 2013-12-12 00:28   좋아요 0 | URL
그럼 <높고 푸른 사다리>와 <지상의 노래>를 읽어볼까요? 장편은 아니지만, 오늘 서점에서 김연수 작가의 신간을 사기는 했습니다만..^^; 나는 그래도 우리나라 소설들이 여전히 좋고, 나름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리시스 2013-12-12 12:05   좋아요 0 | URL
안 읽었지만 추천할까 했는데(뭔짓이냐!) 샀다는 댓글 보니까 딱 제 맘 들킨 것 같네요. 저도 사긴 했는데 어제 표제작 펼쳤다가 가만히 다시 닫은.. 단편은 학교때부터 늘 빌려오고 사고 그런데도 제대로 읽은 기억이 없어요.

지상의 노래, 는 작년에 나왔는데 그걸 막 올해 거라 추천하질 않나.. 가만보면, 제가 진짜 산만한가 보오(갑자기 사극톤), 고상하고 침착하고 차분하고 싶지만 도통..원체.. 그래서 오늘 굳게 결심한 건데, 말이라도 적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루쉰P 2013-12-16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라는 친구는 유뷰남을 좋아했나봐요;;;; 전 왜 딴 내용은 안 들어오고 이런 것만 눈에 들어오죠..
"사랑은 잔인한 형벌이야"
이게 왜이리 마음을 찌르고 들어오죠..
눈은 쌓이고, 아이리시스님의 리뷰는 좋고, 문장은 저를 찌르고..
에잇, 담배나 펴야 겠어요!

아이리시스 2013-12-18 23:18   좋아요 0 | URL
사랑은 여전히 진행중인 것 같아요, 괜히 안좋은 소리 나갈까 겁나서 물어보진 않았는데.
마음 찔렸다고 "사랑은 잔인한 형벌이야" 이러고 돌아다니지 마요, 루쉰님ㅋㅋ

루쉰님 진짜 웃겨요, ㅋㅋ 많이 하고 싶은데, 큰소리로 웃고 싶은데 저 참는 거예요. 또 눈이 온다는데, 저는 내일부터 겨울잠 잘겁니다.. 너무 피곤해요.. 루쉰님은 리뷰대회 참가하도록 해요, 12월에 리뷰대회는 너무 잔혹하다..놀아야 하는데..겨울잠도 자야하고.. 에잇, 술이나..

이제 떡볶이 먹으러 갈거예요!

2013-12-18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8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