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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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읽는데 이야기가 쓸쓸했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침묵했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별어곡(別於谷).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뜻의 간이역이 이 애잔하고 고독한 소설의 배경이다. 아주 작은 기차역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시점까지 내가 '낭만'이라고 믿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혼자 훌쩍 기차를 타고 날이 저물어 가길래 아무데서나 내렸는데 그곳이 하필 하루에 기차가 두세 대 정도 들어오는 작은 역이었던 거다. 산골 작은 마을에서는 즐길 거리가 전무하기 때문에 나는 마을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다 오늘밤 여기 묵어야 하나 막차를 타고 떠나야 하나를 고민하며 간이역 한 모퉁이 의자에 앉아있다. 여전히 목적지는 없고, 역시 혼자다. 그 때 나처럼 그 마을에 우연히 오게 된 낯선 이가 말을 건네온다. "혼자세요?" 그리고 내가 대답한다. "혼자가 편할 것 같았거든요. 여기에 오려고 한 건 아닌데 우연히 오게 됐어요." 그러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믿는 우연같은 인연이. 

시인을 꿈꾸는 동수는 간이역에 배치된 이들 중 가장 막내 역무원이다. 소설은 가을, 여름, 겨울, 봄 순으로 역행하며 동수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이 곳에 오래 머물고 싶어하는 이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새롭고 크고 깨끗한 곳으로 옮겨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고 생각하기에 동수 또한 아무 것과도 아무 것에도 무언가를 건네주거나 건네받고 싶은 마음이 들 리 없다. 애정있게 다가오던 빨강머리 아가씨의 마지막 전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녀의 죽음을 대했을 때 그가 느낀 좌절과 절망은 단지 그의 것만이 아닌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가 된다. 쳇바퀴 같은 삶을 감내하는 간이역에도 비밀스런 규칙성이 있다. 그들을 이어주는 끈은 놀랍게도 한국전쟁의 상흔이다. 비극의 상처를 품고 있는 이들이 한데 모인 장소가 하필이면 별어곡(別於谷)이었던 것이다.  

동수는 얼굴 모르는 아버지를 평생 그리워하며 산다. 상대적으로 젊은 20대 청년이지만 강원도 산골 마을까지 흘러들어오게 한 힘 또한 가슴 한켠에 박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또, 평생을 철도 공무원으로 살았던 동수의 선배 신태묵은 과거 어느 날 자신의 실수로 철도에 선 사람 목숨을 빼앗는다. 병원에 가서 숨어서 보았던 죽은 이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고 그 딸을 자신의 딸로 삼지만, 사랑이 깊고 행복에 겨웠던 만큼 그는 쉽사리 과거의 실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어린 시절 피난길에서 가족을 잃어버린 그의 아내사랑은 지극했지만 자신의 일을 똑 부러지게 해내면서도 늘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이는 아내를 그는 견딜 수 없다. 마침내 손찌검하고 윽박지른다. 아내는 과거의 일을 알게 되면서 죄책감과 수치심에 자살을 선택하고 남겨진 그녀의 딸은, 그것을 오래도록 기억한다. 그를 원망하며 도망친 의붓딸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사위를 통해 보살펴온 그 역시 이젠 늙은 피해자다. 고독하고 상처입은 삶을 감내해내야 했던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이다. 

간이역에 날마다 순례 할머니가 찾아온다. 매일 어디론가 가겠다고 나와 오랫동안 앉아있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간다. 그 날 동수는 순례 할머니를 모셔다드리러 갔다가 할머니의 조카를 통해 삶을 듣게 된다. 그건 그냥 삶이 아니었다. 순례 할머니의 삶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자 그녀는 역사의 산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어렸을 때 위안부에 끌려간 피해자였다. 어쩌면 찢어지게 가난한 식구들 때문에 어머니 손에 팔아넘겨졌는지도 몰랐다. 취직을 시켜주고 먹고 자게 해주겠다는 말에 집을 나섰다. 스스로 나섰지만 그건 혼자의 선택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할머니는 그 예쁜 시절을 전부 희생당했다. 그건 희생 당했다는 표현으로는 설명 안되는 것이다. 삶을 송두리 채 저당잡히는 것, 늘 떠나고 싶었지만 혼자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몸과 마음을 모두 짓밟은 일본의 더러운 욕망을 여기서 말로 다하는 것은 너무 분하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비로소 할머니는 지옥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때도 한없이 예쁜 청춘의 나이였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다. 함께 있던 친구나 언니는 죽거나 죽어가거나 했다.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살아있었기에 살았다. 사랑해주는 누군가를 만나 살림을 차리기도 했지만 자식 하나 없이 남겨진 채 먼 훗날 조카를 만난 것이다. 끔찍한 세월이 지난 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었다. 모두 희생당했다. 그녀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늘 어디론가 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별어곡(別於谷) 역에 온다.  

또 하나의 이름모를 여인은 어느 날 빵집을 열겠다며 마을에 흘러 들어왔다. 기차가 서는 역이라고는 하지만 내리고 타는 이가 다섯도 되지 않는, 누가 살고 죽는지 빤한 시골 동네에 서양식 빵집을 열겠다는 여자를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여겼다. 빵집에서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며 시를 쓰면서 그녀와 인연을 맺게 된 동수에게 그녀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사연은 동수가 알고 있는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야기다. 안경 쓴 말라깽이 빵집 여자는 자신의 어린시절 얘기를 한다. 장교 아버지를 따라 전방에 있는 마을에서 탈영한 아저씨를 만난 이야기를. 그가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부탁한 편지와 못 본 걸로 해달라는 말을. 온 부대가 산과 마을을 점령하여 이 잡듯 뒤지고 있었고 유일한 목격자였던 여자 아이는 겁에 질려 그의 행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을 떠뜨린다. 그는 잡혔고, 스스로 죽었다. 당시 그에게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는데 여자는 그 아들이 동수라고 확신한 것이다. 어머니를 묻고 돌아온 그에게 그녀가 읽어준 편지는 꿈결처럼 희미하게 남았지만 다음 날 그녀는 이미 마을을 떠나고 없다. 

여자 둘 남자 둘, 합이 넷. 우연이든 필연이든 각자의 사연을 들고 별어곡(別於谷)에 흘러든 이들의 사연은 마치 파노라마처럼 희미하고도 또렷한 생채기를 내며 끝맺는다. 그들의 삶이 앞으로 행복해질거라고도 불행해질거라고도 여전히 같을 거라고도 예상할 수 없다. 삶은 예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처를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를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스스로의 상처를 이 작은 간이역 마을 별어곡(別於谷)에 와서 토해내고 또 위안하고 또 견디고 있는 이들의 삶을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보여주며 인간의 고독과 애처로움을 말하고 있는 <이별하는 골짜기>는 특별하다. 순례 할머니가 겪은 한국전쟁의 상흔은 잊혀져가는 비극인 동시에 서글픈 역사라서 돌이키기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알게 된 것이 다행이다. 일본의 잔인한 만행이나 우리나라의 국가적 비극을 뒤로하고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잊어도 되는, 잊어야 하는, 용서해야 하는 뭐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더란 말이다. 동시에 이 소설은 별어곡(別於谷), 즉 사라져간 간이역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하루에 몇 번 기차가 서고 몇 명의 역무원이 근무하다 무인역이 되고 또 사라지기까지의 과정은 일제시대, 한국전쟁, 민주화를 거쳐오는 것 만큼이나 역사적이다.  

작가는 잊혀지는 것들을 되살리려 애썼다. 나름의 상처를 가진 주인공들을 한데 모이게 하면서 그들로부터 현대에선 찾기 드문 메시지를 읽어내도록 유도했다. 20대 청년 동수에게는 그리운 아버지가, 신태묵 아저씨에게는 빚을 진 양딸이, 순례 할머니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고향땅이, 빵집 여자에게는 어린 시절에 만났던 탈영군인의 아들이 인생에서 풀어야 할 숙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평생 그 숙제를 풀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살아있는 한 반드시 끝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작가는 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듯 자세히 하지만 무심하게 그려내면서 우리에게 묻는다. 삶이란 어떤 것이냐고. 이런 삶이 오히려 삶이라고. 동수는 나비를 본다. 동수의 시각으로 진행되는 소설이지만 그의 시선이 곧 우리 시선이기도 해서 지극히 개인사가 될 수도 있었던 이야기는 개연성과 정당성을 획득한다. 나비는 무엇을 상징하는 거였을까. 상처가 짊어짐이라면 짊어진 아픔을 내려놓고 사뿐히 날아가고 싶었던 주인공들의 소원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아팠으니까 보상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삶에는 통하지 않는다. 다소 상대적이기는 하나 모두가 나름의 아픔을 하나씩은 품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대를 타고난 것도, 그런 일이 생긴 것도, 그래야 했던 것도 자신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의외로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아니 살아있는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태어난 이유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극으로 얼룩진 상처가 빛이 되길 바라지만 순례 할머니나 신태묵 아저씨에게 어떻게 그렇게 되실 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듯,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당신들이 좀 더 희생해야 했던 것, 그런 것이 인생이 아닐까 하고 말할 수밖에. 애잔하고 서글프고 눅눅하고 아픈 이야기라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안에서 해결책을 구하거나 위로를 건네는 것이 나같이 미천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도 아닐 것이다. 타인의 아픔에도 조금 마음을 열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라진다 해서 잊혀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기억하라는 뜻으로도. 순례 할머니가 역사인 것처럼 별어곡(別於谷)의 사라짐 또한 역사일 것이다. 서울-부산 거리가 2시간 10분대로 좁혀지고 세상에 못갈 곳이 없는 것마냥 빠르고 편리한 세상인 듯 보이지만 그 사이에서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편리함에 눈멀어 정작 오래되고 소중한 가치들을 잃게 될까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그래서인지 속도는 빨라지고 가격은 치솟은 고속열차는 물론이고, 변해가는 것들에 쉽게 적응하는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점점 그리움이란 감정마저 소모되는 것 같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말했고 그 대사는 엄청난 화제가 되었었다. 변해서 겁나는 건 비단 사랑 뿐만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사라져가는 간이역에 가봐야겠다. 인연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간이역과 인연을 맺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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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31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1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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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매불망 기다렸던 대망의 3권 읽기는 이 글을 쓰기 직전 길고 긴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나는 다시금 하루키의 세계에 갇혀 오랜시간 가슴앓이를 해야겠지만 털끝만큼의 후회나 미련도 없다. 다음 권을 기다린다거나 나오지 않으면 배신이라는 말로 누구나 한 번쯤 뱉었을 뻔한 기대감을 말하진 않겠다. 늘 그랬듯 빨려들 듯한 특유의 문장력으로 작품세계에 대한 감탄과 의문을 차례로 물어다 주긴 했지만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감탄으로는 물론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되지 않을 덴고와 아오마메의 거룩한 만남 하나만으로 모든 걸 내려놓는다. 나는 더이상 하루키를 의심하지 않는다. 아오마메와 덴고의 사랑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지난해 1, 2권의 리뷰를 쓸 때 나는 <1Q84>가 단지 사랑 이야기는 아니라고 썼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 코드로 읽혔음은 두말 할 필요없지만 내게 아오마메와 덴고는 사랑하는 연인 그 이상으로 읽혔다. 하나가 존재해야 비로소 다른 하나가 존재하는 마더와 도터로도 읽혔고 함께 마더에게 잉태된 샴쌍둥이 도터로도 읽혔다. 그들은 10살에 초등학교 교실에서 '손을 잡았기' 때문에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에서부터 이미 하나였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니면 알 수 없는 일로 다른 세계에 분리되어 버린 육체와 영혼일 수도 있고 또 애초부터 하나였으나 '달이 두 개 뜨는 세상'에 우연히 오게 되면서 저주를 받아 분리된 걸 수도 있다. 1, 2권 즉 앞의 이야기가 많은 배경을 설명하는 추상과 관념이 짙은 환상과 신비로 읽혔다면 현재로는 마무리편이라 할 수 있는 3권은 오히려 한없이 투명하고 현실적이며 실체적이다. 비로소 무언가 잡히는 것 같다. 감히 지금껏 읽은 하루키의 작품 중 가장 깨끗한 마무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덴고는 '고양이 마을'이라 부르고 아오마메는 '1Q84년'이라 부르는, 두 개의 달이 보이는 세상에서 두 연인이 함께 손을 잡고 탈출하여 원래 세계인지 또 다른 세계인지 모를 둘만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 줄거리의 끝이다. 그들이 이동한 세계가 원래의 세계든 아니든 앞으로 그들의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다음 권을 기대한다고 말하는 것과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에 어떤 차이점도 없음을 느낀다. 사랑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하나가 되고 싶은 연인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 있는 것'이지 '언제, 어디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에 깨달은 사실은 길고 복잡하게 얽혀있긴 하지만 하루키는 분명히 소통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진행되었던 이야기의 줄기이자 배경인 이단 종교 '선구'의 실체나 목소리를 듣던 '선구'의 리더가 아오마메의 손에 살해된 본질적 이유, 덴고가 사귀던 연상 걸프렌드의 실종, 아버지의 병실에 나타난 공기 번데기 속에 아오마메가 들었던 것, 후카에리의 실체, 주인공으로 기능할 것 같던 우시카와의 느닷없고 갑작스런 죽음, '선구' 리더의 친구이자 후카에리의 보호자인 에비스노 선생의 역할, 세이프 하우스를 경영하는 아자부의 노부인 정체는 내 예상이 그랬듯 역시 꼬리를 감췄다. 모든 배경을 뒤로한 채 덴고와 아오마메의 운명적 인연과 엇갈림 그리고 비로소 만남에만 지나치게 신경을 썼다. 그래서 다음 권이 절실히 필요한 거겠지만 하루키 스스로도 과연 이 모든것을 명쾌하게 정리하려는 시도를 하긴 했을까 싶기도 하다. <1Q84>가 궁극적으로 사랑의 인연과 엇갈림의 미학, 소멸과 생성, 기억과 망각, 죽음과 재생, 폭력과 모순, 도덕과 부조리, 혈연과 가족 등의 소재를 형식적으로 취하고, 자아, 종교, 사랑, 인연의 힘을 통해 특유의 비현실성을 획득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소통으로 귀결된다고 본다. 그것은 사람들은 과연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나, 하는 것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과도 이어진다. 하루키의 세계는 모든 시공간이 자유자재다.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하나의 작은 연결고리를 두고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소통하게 한다. 예를 들어 덴고의 아버지가 계신 요양원이 있는 '고양이 마을'과 덴고가 일상을 영위하는 아파트처럼 공간을 뛰어넘기도 하고, 아오마메가 말하는 '1Q84년'과 '1984년'처럼 시간을 뛰어넘기도 한다. 그것은 심지어 죽음으로도 완전히 끊어낼 수 없는 것이다. 확연하지 않은 본연의 임무를 띤 채 '선구' 리더를 살해한 후 더이상 덴고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절망과 앞으로 감내해야 할 끝없는 고독을 피하기 위해 이 세계와 저 세계가 연결된 수도 고속도로의 지하계단 앞에서 권총자살을 하려던 아오마메가 돌연 자살을 멈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하루키가 그리는 소통은 이 세상과 저 세상, 이 세계와 저 세계, 심지어 우주 전체를 똑바로 관통한다. 단지 자살이라는 면죄부로 끊어낼 수 없는 것이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나고, 돌아갈 곳이라면 언제가 돌아가게 될 것이니 모든 것은 흐름에 달렸고 사실상 사람들은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 된다. '간절히 바람'의 에너지만으로도 사람은 무언가를 변화시키기에 적실한 생명체라고 말하는 듯 하다.

내가 아는 아오마메와 덴고는 분명히 다른 세계에 살았다.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서로 다르게 부르는 이름 만큼이나 명확히 구분되는 세계에 살았다. 바로 옆에 살면서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해도 다마루의 도움 없이는 서로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짐작은 있었으나 서로를 실체로 붙잡을 수는 없었다. 아오마메가 본 것은 덴고가 남긴 흔적이었고 덴고가 본 것은 정체를 알 수 없이 갑자기 나타난 공기 번데기 안에 든 작은 아오마메였다. 그것의 정체는 지금도 모르겠다. 짐작건대, 그것은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거였다. 둘을 연결하는 고리, 어쩌면 아오마메가 수태한 것을 알리는 비밀스런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루키 특유의 문법으로 암시되는 세계는 분명 두 연인이 만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만났다. 아직 둘의 만남이 그저 거짓말 같고 꿈결같은 내 이해는 필요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오마메와 덴고는 만나서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 훗날의 문제다. 3권은 거기까지 이야기의 무대를 옮기지는 않았다. 그러면 아오마메의 처녀수태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자. 덴고와 아오마메는 '수없이 천둥번개가 치던 9월의 어느 밤'이라고 했고 후카에리는 '리틀피플이 날뛰고 있다'고 했다. 그날 밤 아무 의미 없던 덴고와 후카에리의 감정없는 성교 끝에 아오마메는 뱃속에 '작은 것'을 갖게 됐다. 지극히 말이 안되고 비현실적인 수태지만 충분히 수용되는 이유는 <1Q84>의 세계가 모든 것과 소통이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평범한 시각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지만 어딘가에 정말로 '1Q84년'처럼 달이 두 개 보이는 세계가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어쩌면 달이 세 개, 네 개, 다섯 개 보이는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달이 하나든 둘이든 세계는 하나다. 거대한 우주다. 죽음과 삶도, 소멸과 생성도, 인연과 헤어짐도, 엇갈림과 사랑도 모두 하나다.  

문득 등장인물들은 모두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마쓰 또한 아내와 아이에게 보낼 생활비와 양육비를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는 평범한 샐러리맨, 다마루는 자신의 분신인 아이가 어디서 어떻게 자라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게이, 덴고는 아버지를 잃음으로서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비밀조차 풀 수 없는 가엾은 남자, 아오마메는 가족을 잃고 세속에서는 살인자에 불과한 여자, 아다치 구미를 비롯한 세 여간호사는 도전보다 안주를 선택하여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이들이다. 뿐만 아니다. 우시카와는 아내와 딸들보다 키우던 개를 더욱 또렷이 기억할 수 있는 외로운 사람이었지만 이젠 그조차 기억할 수 없게 살해당했고, 아자부의 노부인은 재산을 얻은 대신 남편과 딸을 잃었으며, 덴고의 아버지는 오랜 시간 어머니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은 채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다 결국 덴고의 곁을 떠나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하나같이 무언가를 잃어 상처입은 이들이다. 또한 비밀을 간직했거나 누군가의 비밀이 되고 있다. 나는 특히 덴고의 아버지에게 주목했다. 우시카와의 어이없는 죽음이 갑작스런 반전이라면 앞서 덴고의 아버지가 숨을 놓는 장면에서 나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그가 아무 것도 아니라면 오랜 시간 '고양이 마을'에서 살아있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덴고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덴고가 바라는 두 가지를 모두 보여주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공기 번데기 속에 든 아오마메'도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덴고가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출생의 비밀, 즉 어머니에 대한 정보도 주지 않고 떠났다. 하루키는 소설 속에서 말한다. 그는 떠났으나 피는 아마도 오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맞다. 덴고의 의심처럼 그가 생물학적 친아버지가 맞는지 어떤지는 중요치 않다. 피가 기억을 갖고 있는 한 누군가가 떠난다 해서 그는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다. 영원히 우리 곁에서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작품세계가 모든 시공간을 초월하는 소통을 말하고 있다는 앞의 내 해석과도 일치되는 부분이다.  

덴고와 아오마메가 만나 마지막으로 떠난 곳은 '한없이 고립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고독에 물들지 않는 장소'였다. 누구나 하나이면서도 혼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이 어디로 떠났든 그들은 의식을 가진 한 함께 있으려 할 것이고, 행여 또다시 떨어지게 되더라도 그들은 서로를 찾아 헤맬 것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 나아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은 비어있고 알 수 없게 설계된 하루키의 결말이 좋다. 그가 다음에 어떤 세계를 펼쳐놓든 또 어떤 결말을 가져오든 나는 호응할 것이다. 덴고는 '바늘로 찌르면 붉은 피가 나는 것이 현실세계'라고 말했다. 동의하면서도 동의할 수 없다.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것들의 개념을 빌려 말하자면 '의미없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의 반대는 '의미있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그것과 같다. 세상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덴고와 아오마메가 만났지만 그 반대가 헤어지는 것이 아니듯 사랑의 반대는 이별이 아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수히 많은 '사랑이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내가 해석한 하루키의 소통은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1Q84년'의 반대는 '1984년'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나아가는, 바라고 희망하는 모든 세상이 우리 곁에 올 것이다. 덴고와 아오마메는 멀리 동떨어진 세계의 양 끝이다. 사랑을 찾기 위해 본래의 세상을 버릴 만큼 강렬한 힘으로 달이 두 개 보이는 세상으로 옮겨 갔다가 사랑을 만난 다음 다시 다른 세계로 이동한 것이다.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람과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모두 다른 것을 새로운 세계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내내 거대한 수수께끼였다. 많은 것을 암시하고 여러가지 것들을 누락되고 변형된 형태로 보여주면서 우리 스스로 다른 세상에 대해 깨닫게 했다. 세상에는 사랑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들이 결국은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난다, 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쪽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것만큼 신비롭고 고통스러우며 비현실적인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분노, 폭력, 부조리, 엇갈림, 고통, 고독, 고립 등의 단어를 모두 내려놓고 '사랑'도 아닌 '소통'이란 단어를 집어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소통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심지어 사랑도. 우린 리틀 피플에 의해 공기 번데기 속에 잉태되어 마더와 도터라는 실체로 세상과 만난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순서다. 마더없이 도터가 있을 수 없다. 내가 있으면 반드시 나를 보내준 사람도 있다는 진실을 여기서 배운다. 나아가 복잡해보이는 세계에도 질서와 정렬의 이미지가 존재함을 지각한다. 좀 더 나아가 이러한 진실은 사랑 없이 유전자를 통해 만들어내는 인공적 태생에 대해 질문한다. 여러 개의 세상이지만 결국 하나로 이어져있는 거대한 세계에서 고결하고 고귀한 '사랑'과 '소통'이라는 본연의 감정 없이 그것이 과연 사람일 수 있는가,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누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우주를 거쳐 세계와 세계를 여러 번 오가며 이뤄지는 불문의 거래같은 거다. 그럼으로서 알게 되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의 의미를. 세상과 사람과 인연과 사랑의 질기고도 깊은 관계를. 바로 옆에 두고도 서로를 찾아 헤맸던 아오마메와 덴고가 그랬듯, 간절한 바람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은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억지와 강요가 아니라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바람은 인연을 있어야 할 자리에 데려다 줄 것이다. 아오마메와 덴고에게 다마루가 그랬던 것처럼. 하다못해 보잘 것 없어보이는 어린이공원의 미끄럼틀에서도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제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 '희생'은 '사랑'을 '사랑'은 '소통'을 낳을 것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달이 두 개 떠 있는 '1Q84년'보다 더 멋진 세계를 살아갈 권리가 있다. 이젠 하루키의 작품세계 안에서 그가 보여주지 못한 틈새를 보려 애쓰거나 불평하기 보다는 이미 그가 창조한 세계를 딪고 일어나 스스로 또다른 세상을 창조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약간은 비현실적이고 조금은 은은한, 독특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오갈 수 있어 행복했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어딘가에 있을 덴고와 아오마메의 평범한 행복을 그저 빌어주는 것 외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연인에게 샘물처럼 깊고 아름다운 사랑이 지속되기를, 아직 인연을 맺지 못한 이들에게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와 행운이 오래도록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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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2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2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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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내가 아직 사랑을 알지 못했을 때, 곧 다가올 20대가 가져다 줄 찬란한 자유를 동경하며 읽었던 <깊은 슬픔>의 세 주인공 은서와 완과 세를 잊지 못하는 이들에게 작가 스스로 청춘소설이라 칭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웬만해선 거부하기 힘든 반가운 선물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출간되자마자 수많은 기사와 서평을 뱉어놓는 소위 ‘누구나 다 읽는’ 베스트셀러에 지레 거부감이 들만도 한데 마음과는 반대로 정신없이 읽어 내려간 지 사흘째,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창밖으로 동이 트고 있었다.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한참을 앉아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상에 뛰어들던 바로 그 날부터 누구도 몰랐겠지만 청춘이라는 실체 없는 이름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끝없는 고민들이 이어졌다. 책을 읽은 후 따라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심한 방황과 여름날의 열병이 혼자서만 좋았다.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절망스러웠지만 서로에게 아무렇지 않은 과거가 되어버린 윤과 명서의 현재보다 있는 힘껏 사랑하고 아파하다 스스로 소멸한 단이와 미루의 빛나는 현재가 더 부럽기까지 했다. 거기에 비하면 현재 내 청춘은 얼마나 보잘 것 없이 흘러가는가.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비겁한 나지만 그들처럼 예쁜 청춘으로 기억되고 싶은 소망까지 품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제야 겨우 이런 생각이 든다. 나도 훗날 나의 찬란한 청춘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다.  

언젠가 계절이 겨울 뿐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했다. 저마다의 축축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거나 스스로를 가둬놓고 우울해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의 청춘은 온통 겨울 뿐인 것 같은데도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토록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을 보면. 나의 청춘은 그들과 많이 다르다. ‘나’를 고민하며 캠퍼스와 거리를 배회하지 않았고, 세상과의 소통에 특히 신경 쓰지도 않았다. 강의실이나 도서관은 학점과 토익에 열 올리는, 미래를 아주 잘 설계하고 있는 어디를 가든 비슷한 ‘나’들로만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의실 아니면 거리를 헤매야 할 만큼 갈 곳이 없지 않았고, 강의 첫날부터 크리스토프를 얘기하는 윤교수 같은 스승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하지 않을 정도의 자유는 언제나 주어졌었기 때문이다. 그걸 누리고 말고는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시대가 아니라 청춘이라면 윤과 단이 그리고 명서와 미루의 절망과 허무, 얼마 정도의 희망이 단지 그들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제자리를 찾지 못해 비틀거리고, 세상을 다 짊어진 것 마냥 우울을 가장하는 것은. 단지 과거에는 책과 음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했다면 지금은 술로 모든 고민을 그저 제쳐두는 것 뿐. 지금의 청춘과 과거의 청춘, 딱 그만큼의 차이가 아닐까. 신경숙의 소설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동시에 지나친 감상주의로 치부하고 마는 것도 어쩌면 자신의 내면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후회스런 시간들에 대한 후유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한 몸처럼 지냈지만 대학에 가게 되면서 떨어진 윤과 단이. 외동딸이면서 엄마를 잃은 윤은 낯선 도시에서 늘 외롭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한다. 사람은 어디서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알아보는 법일까. 윤교수의 강의에서 자신과 단이 같은 명서와 미루를 만나면서 질투, 시기가 뒤섞인 호기심을 품은 것이 인연의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이렇게 힘들었나 싶을 만큼 그들은 어렵게 서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함께하는 순간이 평생을 지탱하게 될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기억될 줄을 모른 채.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 자신보다 상대를 더 잘 알 것 같은 두 쌍의 커플. 사랑은 어렴풋하고 행복은 짧은 대신 이별은 아프고 길기만 하다. 윤을 향한 단이의 사랑은 옅게 그려졌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해서 단이의 죽음이 그저 에피소드일 수 없었다. 윤에게 단이는 자신의 전부이자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미루의 아픔은 또 어떤가. 언니를 향한 죄책감에 눌려 살아있는 내내 제대로 숨 한 번 쉬지 못했을 미루는 홀연히 사라진 끝에 끝내 세상과 이별을 고하지만 윤에게 있어 단이와 마찬가지로 명서에게 미루 또한 절대로 잊힐 수 없다. 남겨진 이는 사라진 이를 영원히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형벌이 주어지는 것일까. 이들의 청춘은 왜 이토록 아프기만 할까. 행복의 순간이 지나면 그 행복을 각인시키려는 듯 어느새 불행이 찾아온다. 둘의 농도가 같다면 어째서 행복의 순간보다 절망의 순간이 더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일까. 소설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절망을 치유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청춘의 찬란함이 반드시 절망에서만 오는 이유는. 한 가지 소망이 생겼다. 내가 소설로 며칠 밤을 새워가며 아파하는 것이, 갖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매일 밤 기도하는 것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 날아오르기를 시도하는 것이 청춘이었으면 좋겠다. 삶을 차곡차곡 살아낼 수 있는 날들이 줄어드는 만큼 내 청춘 또한 빛바래져가겠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추억할거리가 아주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희망이 됐든 절망이 됐든 추억의 농도가 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윤은 오랫동안 단이의 편지에 답장하지 못하다가 단이의 죽음 후 6개월 만에 예전의 편지들에 답장을 쓰기 시작한다. 미루가 식단을 기록하던 노트가 치열한 삶에 대한 미루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것처럼 단이에게는 윤이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미루의 상처보다 그녀를 바라보는 명서의 마음이 훨씬 더 아팠을 것이다. 면회 온 윤을 안으려다 거절당한 후 단이의 절망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네 사람의 찬란한 시절을 지켜봤던 윤교수는 그들의 청춘을 사진 찍듯 그려낼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을지도. 팔 년 만에 걸려온 명서의 전화, 용건 또한 윤교수였다. 윤교수는 그들 모두였다. 각각 반쪽을 잃고 남겨진 윤과 명서가 서로를 품지 못한 채 헤어져야 했던 날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함께 있으면서 상처를 아물게 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고작 팔 년이면 희미해질 시간들인데도 불구하고. 한 때 죽음을 생각할 만큼 전부였는데도 시간이 흐르면 흐릿해지는 것이 슬펐다. 살아가는 것은 물 흐르는 것처럼 순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은 억울하다. 치열한 이 순간도, 전부라 믿는 이 시간들도 언젠가 허깨비처럼 사라질 거라는 사실이 두렵다. 그래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읽히는 것이다. 하지만 아픔을 조금이나마 즐기는 법을 배우게 되면 청춘을 좀 더 경쾌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우선 누군가를 아주 잘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로 한다.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기로 한다. 때론 그저 견디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해보려고 한다. 인생에서 소중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비단 청춘만 소중한 것이 아닐 테니 청춘이라 해서 과시할 것도 없다. 자신에게 소중하게 기억되는 순간이 바로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는 에밀리였다. 읽는 내내 애정을 쏟았는데 책을 덮은 후에도 고양이 에밀리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주인공들의 상처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에밀리. 다른 인물들은 아쉬운 대로 그저 가만히 묻어둘 수 있겠는데 에밀리는 어디선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다. 하다못해 윤교수를 찾아가 왜 미루를 그대로 두었느냐고, 윤을 찾아가 단이를 왜 절망시켰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도 참겠는데, 에밀리를 보고 싶은 마음은 날이 지날수록 수그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커지기만 한다. 아마 모두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그 시절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에밀리라서 그런가 보다. 소리를 듣지 못해서 온 세상을 자기 것으로만 채웠을 에밀리의 눈 속에 사랑스러웠던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가 모두 들어있을 것 같아서 그런가 보다. 에밀리에게 그들이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다. 미루의 언니가 사랑했던 그 사람과 단이의 억울한 사연을 사랑스러운 에밀리는 알고 있을 것만 같다. 어깨에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을 하나 얹은 것처럼 몸이 무겁고 가슴이 아려온다. 늘 “내가 그쪽으로 갈까.”라는 말보다 “네가 와줬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더 많이 하며 지냈던 날들을 이제는 내려놓고 싶다. 무엇보다 “오늘을 잊지 말자.”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래서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가 함께 지냈던 며칠처럼 온전히 반짝이는 청춘을 지내고 싶다. 오래도록 잊혀질리 없겠지만 이제 그만 보내주려 한다. 결핍은 내 사전에 없다. 아련하고 예쁘게 기억되는 청춘을 보내고 싶지만 나는 다만 사랑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세상에만 살고 싶다. 그렇게만 마음을 주고받으며 이 혼란한 시간들을 걸어 나가고 싶다. 남자와 여자, 친구와 가족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지만 아끼고 사랑한다는 의미만은 명확한 아날로그식 청춘의 사랑법을 닮고 싶은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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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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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사는 것과 왕의 아들로 사는 것 중 어느 삶이 더 고달프다 말할까. 하필이면 나라의 형세나 시국이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을만큼 위험천만한 때라면? 누구라도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권한을 갖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어느 쪽이든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왕으로 살든 왕의 아들로 살든 그것은 짐이었을 것이다. 원하지도 않는 주인공이 되어야 마땅한 소외된 삶, 이라고 표현하면 그 의미가 전달될까. 그 중에 명과 청의 싸움에 적의 볼모로 끌려가 8년이란 세월을 보내며 나라의 패배와 굴욕, 비루함과 고독을 모두 끌어안고 살았던 소현이 있다. 어쩌면 소현은 왕의 아들 중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죄, 아비를 잘못 둔 죄. 그것이 과연 그의 죄라 할까. 그는 조선 16대 왕 인조의 첫째 아들이었다. 일찍이 세자로 책봉되었던 그는 시국이 평안했다면 당연히 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되지 못했고 그의 자식과 후손들 또한 줄줄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일이라지만 인조의 소현세자 독살설은 어떤 의미에서 영조와 사도세자보다 더 비극적이라 할 수 있다. 

인조반정을 기억하는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니 인조와 소현세자를 다룬 이야기를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왕실을 다루는 정통사극이 아닌 드라마 <최강칠우>나 <추노>에서도 인조와 소현세자가 등장한다. 열심히 보지 못해 알 수 없지만 TV 속에서 한동안 인조시대가 펼쳐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요즘은 정통사극 <동이>가 우세하고 있으니 숙종의 시대가 열릴 것인가. 아무튼 중립외교를 지향하는 똑똑한 광해군을 몰아내고 광해군과는 다른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며 서인들의 압도적 지지로 왕의 자리에 오른 인조의 정책들을 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서인들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허수아비 왕으로 인조를 선택했으니 그것만 봐도 시대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인숙의 소설 <소현>이 인조시대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상당부분 청에 잡혀간 소현에게 초점이 맞춰져 여기서는 역사적 사실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현이란 이름을 가졌던 자. 태어나자마자 당연히 세자의 자리에 올라갔던 이름. 인조의 아들이란 이유로 8년의 타국살이와 뼛속까지 시린 고독을 감내해야 했던 삶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이 소설이 바로 소현세자가 타국에서 보낸 마지막 2년을 밀도있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과 청, 그리고 명. 조선 중기 역사에서 세 나라의 관계는 인조시대를 정확히 설명한다. 전쟁의 패배 때문에 오랑캐의 왕 앞에 피를 철철 흘릴 때까지 땅바닥에 이마를 찧었다는 인조에게 비극은 자신의 굴복이 다가 아니었다. 명과 청의 전쟁에 대한 명목으로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의 볼모로 보내야 했다. 철저하고 처절한 패배.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무엇이 정의인지 아닌지를 아는 나이었기에 소현의 볼모살이는 봉림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굴복의 의미로 적국에게 바쳐진 입장에서 소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적의 패배와 굴욕을 그다지도 바랐건만 적은 오랫동안 승리와 영광만을 보여주었다. 언젠가 조선이 우뚝 서는 날, 나 또한 우뚝 섰을 때 모든 것을 돌려주리라는 계산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조선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등지면서 영원히 소현세자로 남는다. 청에 있는 소현세자의 모반을 의심하게 되는 인조, 소현이 마침내 조선에 돌아와 청의 문물을 수용할 것을 제안한 것에 분노한 인조가 그를 독살했다는 설, 소현의 조용하고 드러내지 않는 성격과 청에서의 오랜 볼모생활 탓에 고독과 스트레스가 병이 되어 죽었다는 설도 있는 것으로 안다. 진실이 어떤 것이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소설의 좋은 점은 철저히 소현이 되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가 소현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왕의 아들이 할 수 있었던 일과 해야 했을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는 아들이 되려는 것과 적어도 겉으로는 내 나라 아닌 적의 승리를 기원해야 했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을 것이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책을 덮는데 모두의 삶이 각자 서글펐다. 적국인 청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구도와 청의 수장인 도르곤의 인간적 고뇌가 언뜻 비치기도 해서 마음은 더 심란해졌다. 도르곤과 소현세자는 각자의 나라를 대표하는 수장이고 세자이지만 그들 또한 인간이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던 건 마찬가지였다. 세상과 시대의 어쩔 수 없음이 너무 헛헛해서 슬펐고, 떠날 때까지 울음 한 번 제대로 울지 못했을, 마음에 담긴 작은 생각조차 들킬까 염려돼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을 소현세자의 수많은 망설임과 침묵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비극적 삶을 살다 간 역사 속 인물 앞에 오늘의 우리는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하며, 어떤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까를 수없이 되묻는다. 울 수 없다. 우린 이 역사를 떠받치는 후손이며, 여전히 이 땅을 지키며 살아야 할 주인이기 때문이다.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내가 선 바로 이 땅, 여기. 내 나라를 사랑하는 법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르겠다. 소현세자가 낯선 땅에서 느꼈을 소외와 고독과 아픔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나라에 대한 소중한 마음과 고민들이 필요한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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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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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와 같은 고민을 언제부터 하게 됐는지 생각해봤다. 아마 나무랄 데라곤 전혀 없는 천재적인 음악성을 타고났으면서도 자신의 피부색과 뿌리가 한계가 된다고 믿은 나머지,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강도의 성형수술과 피부이식을 서른 번이나 했다는 마이클 잭슨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중학교 국어시간 이후가 아니었을까. 흑과 백 같은 이분법적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치라는 걸 전혀 몰랐던 나의 열여섯. 그러고 보니 필립 로스가 그리는 <휴먼 스테인>의 배경이 바로 내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중학교 시절의 무렵이다.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자신의 집무실과 백악관 주차장 등지에서 스무 살을 갓 넘긴 여비서와 사랑을 나누며 세계가 떠들썩할 정도로 강도 높은 스캔들을 선물했던 바로 그 해는 주인공 콜먼이 일흔 하나의 나이에 서른넷의 포니아와 사랑을 나누던 때와 일치한다. 버크셔 산악지대의 오두막에서 세상과 결별한 채 글을 쓰는 네이선은 콜먼을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한 사람, 콜먼의 친구이자 대변인 그리고 작가로 등장한다. 우린 네이선을 통해 콜먼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느낀다. 
 

콜먼은 은퇴한 대학교수다. 유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학장을 지낼 만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고, 학장으로서의 콜먼이 이룩한 업적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우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일로 자존감을 찾고 싶었던 콜먼이 자신의 강의 시간에 오래도록 출석하지 않는 학생들을 두고 유령들(spooks)이란 표현을 썼다가 하필 그 단어에 검둥이들이란 뜻이 있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려 온갖 비난을 당하고 쫓겨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아무리 호소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울함 때문에 항상 씩씩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내 아이리스를 잃게 되자 콜먼의 슬픔과 절망은 극에 달한다. 그를 절망의 수렁에서 구해준 이가 바로 서른넷의 포니아다. 그녀 또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계부에게 성희롱을 당한 상처로 집을 떠났다. 훗날 결혼하지만 남편 역시 베트남 전쟁의 상흔으로 끊임없이 포니아를 괴롭히는 등 녹록치 않은 삶을 산다. 그래서인지 콜먼과 포니아는 만남과 동시에 서로의 결핍과 상처를 알아본다. 성공한 유태인인 줄 알았던 콜먼이 사실은 마이클 잭슨과 같은 인종 정체성을 앓아온 점이나 똑똑한 포니아가 스스로 문맹인을 자처해 살아가는 점은 비록 충격이긴 하나 20세기 끝자락의 비극을 잘 나타내준다. 
 

그들의 사랑은 포니아 남편의 끈질긴 방해로 결국 파멸을 맞는다. 그것이 모두가 진정 원한 삶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원한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과거를 숨기거나 버려야만 나아갈 수 있었던 콜먼과 포니아가 사랑에 빠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콜먼과 포니아를 둘러싼 세상은 호락하지 않았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괄시는 흑인으로서 받는 멸시보다 오히려 나았고, 어린 딸이 당한 희롱을 친엄마조차 믿어주지 않는 현실을 견디려면 아는 것을 모른 체하며 살아가는 게 편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립되었다. 콜먼과 포니아는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만든 건 세상이지만 세상은 그들을 상처 속에 살게 했다. 피부색을 바꾸고, 생김새를 고치고, 아는 것을 모른 체 한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세상은 아니건만, 마이클 잭슨이 그랬듯 콜먼과 포니아 또한 뾰족한 대안이 없던 탓이다. 화가 난다. 철이 든 순간부터 나는 나를 무시하는 사람보다 나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불편했다. 누가 어떻게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흑과 백, 로맨스와 불륜, 아름다움과 추함, 행복과 불행. 그런 것들만 인생인가. 성별, 나이, 학력, 통장잔고. 그런 것들만 나인가. 도대체 나를 나답게 하는 기준과 삶을 삶답게 하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이며, 기준이 있다한들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꾸만 세상이 어렵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나다. 또한 콜먼과 포니아처럼 살고 싶지 않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야 살 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해도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결심의 첫 번째 증거로 감히 콜먼과 포니아의 영원함을 옹호한다. 비록 비아그라를 복용해야 하고, 육체의 탐닉이라는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그들을 응원할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분노이므로. 우린 누구나 어떤 것에 속해있는 동시에 어떤 것에도 속해있지 않다. 흑백논리나 편견, 선입견 같은 것들은 결국 오점으로 작용할뿐더러 아무데도 도움 되지 않는다. 일흔 한 살의 남자가 서른 네 살의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규정은 어디서,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와 타인이 다르다고 둘 중에 하나가 틀렸다는 억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마 그런 억측들이 이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나를 나답지 못하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것. 나는 필립 로스의 모든 문장들을 버리고 내가 만들어낸 단 하나의 문장만을 가슴에 담는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미국적인 문제들은 21세가 10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는 아직도 성형수술을 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사랑 앞에 망설인다. 또 누군가에게는 정의에 눈감고 불의에 동조하는 것이 삶의 전부다. 결국 필립 로스가 말하는 <휴먼 스테인>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내일의 문제이고 미래의 문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가 공통으로 고민해야 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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