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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빅 ㅣ 필립 K. 딕 걸작선 11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10월
평점 :
없어야 하는데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게 범죄물(스릴러)이라면, 있을 법한데 없는 세계를 구축하는 건 SF다. science fiction(공상과학소설)으로 일컬어지는 SF의 시초는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오손 웰즈의 <타임머신>이며, 주로 인간이 닿을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존재할 법한) 세계를 상상과 기술에 기초하여 써내려간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인간의 예측, 기대, 추정이 이른 최초의 세계가 '바다'와 '우주'인 건 묘하지만 충분히 그럴 법하다. 둘 다 미지의 비밀을 다량보유한 세계이자 지구인이 제모습을 고수한 채 탐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후 SF는 줄곧 삶과 죽음에 열중하는데, 이러한 소재적 한계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가로질러 이야기가 출현하고 또 소멸하기 때문일까.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이 세계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는 기적의 계산법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우주공간과 사후세계에 골몰해온 SF는 어느 순간 배아기胚芽期 이전의 착상着床으로, 착상着床 이전의 무無로 회귀했다. 모든 인간은 있는 동시에 없고, 없는 동시에 있다. 너무나도 멀쩡해서 더이상 완전할 수 없는 상태로. 아마 '유빅'은 세속의 어그러진 속성을 부지불식간에 반전시키는 능력을 가진 '무언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의 지각에도 차이가 있는 거로군. 앨은 깨달았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SF를 단순히 있을 법한 세계에 천착한, 맹랑孟浪한 이야기로만 여겨서는 곤란하다. '저'기서 '어제'와 '내일'을 비틀고, 꼬집고, 기대함으로서 지금 이 자리에 붙박인 인간을 더욱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찬사는 필수적이다. 내가 이 생소한 장르에 대해, 겉핥기도 못했다는 걸, 언제 끝날지 모를 유영游泳을 이제야 시작했다는 걸, 혼자 힘으로 처음 떠난 여행이, 모든 스킨십을 처음으로 경험한 첫 연애가, 카뮈와 위고와 발자크가 어떤 작가인지 몰랐을 때의 첫 독서가 그랬던 것처럼 서투르고 두서없고 유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작품을 아는 게 작가를 아는 거라 할 수 없고, 작가를 모르고 작품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유빅>을 읽기 전 이 작가를 몰랐다.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룬 SF문학의 경계가 어디인지, 그는 왜 필사적으로 다른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애썼는지, 어째서 그가 만들어낸 기술적이고 창대한 미래는 아직 도달하지 않는지. 아슬아슬하게 작가 필립 K. 딕과의 동시대 조우를 피해간 내게도, 죽은지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할리우드의 핫한 원작자로 주목받는 필립 K. 딕에게도, 2013년 막바지에서 별달리 내세울 것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퇴화와 초월이라는 예측불가능한 현재와 확실하게 정의할 수 없어 더욱 유용하고 가치있게 쓰이는 '유빅'과 <유빅>은, 유례없는 행운의 물질(matter, substance, material)이 될 것이다.
기이하고 거대한 힘이 그들의 삶을 재단하고 있는 것일가. 그 힘이 작용하고 있는 곳은 산 자의 세계일까, 아니면 반생자의 세계일까. 아니. 갑작스러운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양쪽일지도 몰라. 어느 쪽이든 간에, 그 힘은 그들의 경험을, 아니면 적어도 그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마 쇠퇴와는 별도의 힘이리라.
텔레파스와 프리코그(예지능력자)가 활기치는 미래, 지금부터 소개할 세계는 작아서 보이지 않는 내가 완전히 내려다볼 수도, 완벽히 구축할 수도 없다. 죽은 자는 산 자를 위해 모라토리엄 기관에 의해 냉동보존되고, 육신은 사라져도 영혼은 남는다는 미명 아래, 관 속에서 말(목소리)로만 산 자와 접촉한다. 하지만 반생자의 상태라 불리는 이 냉동보존 상태의 사람에게도 수명이 있으며 영원히 같은 상태로 존재할 수는 없다. 텔레파스와 프리코그를 막아내기 위한 반反초능력자(불활성자) 회사 대표 런시터는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스웨덴의 모라토리엄으로 가서 아내 엘라를 호출한다. 어느 날, 뒤쫓던 초능력자들이 차례로 사라지는 어려움으로 경영난에 봉착한 런시터는 거액의 의뢰를 받고 최정예 11명의 불활성자들을 이끌고 달로 간다. 무슨 일인지, 누가 배후인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시작한 작업은 달에 도착해 함정이자 계략이라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알 수 없는 자로부터 대테러를 당한다. 그때 런시터가 사망한다. 그의 시신을 냉동보관해 태양계로 돌아온 일행은 반초능력 테스트 기술자이자 런시터 어소시에이츠의 공식 후계자이자 대행인인 조 칩과 반초능력자 발굴자인 애시우드, 반프리코그로서 특별한 능력을 보유한 팻이다. 곧 이들을 중심으로 야릇하고도 오묘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사실 죽은 자와 산 자가 대화하고 텔레파스와 프리코그의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한' 반텔레파스와 반프리코그의 활동은, 이미 사후세계가 구축된 듯 보이고, 영웅주의 스토리가 판치는 세상이라면 하등 놀라울 게 없다. 기이한 세계는 조 칩과 애시우드가 현실에서, 과거와 조우하면서부터다. 달 멤버 중 하나인 웬디가 방사능에 노출된 것처럼 폭발 후 쪼그라든 사체死體로 발견되자, 이상징후를 감지한 그들이 원인찾기에 나선다. 달에서 이미 냉동보관 상태로 운반된 런시터가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말(글자)로 메시지를 보내오자, 조 칩, 애시우드, 팻이 이를 알아채면서 달 멤버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시간, 물질, 장소, 기억마저 역행시키는 불가사의한 일이 순차적으로 일어나면서 1992년 지구를 둘러싼 세계가 차츰 1939년까지 가속 퇴행한다. 조 칩이 사는 아파트의 현관문, 커피포트, 크림과 설탕, 라디오, 녹음기를 비롯한 유빅까지 모두. 모든 것이 언제든 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빅>의 세계가 지키는 두 가지 룰은, 미래를 보는 프리코그가 직접 시간을 이동하여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과 어느 세계든 공평한 무게, 질량, 온도, 중력을 위해 균형, 비례, 조화를 유지하려는 일련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는 내가 틀린 경우 상대방은 반드시 옳다. 상대가 내려간 만큼 나는 올라가고, 내가 뜨거워진 만큼 상대는 반드시 식는, 대칭법이 통용된다. 혼란에 휩싸인 상황을 이해할 키(key)를 쥔 사람은, 죽어서도 계속해서 산 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런시터'와 다른 프리코그들과는 달리 미래를 본 다음 과거로 이동해 미래상황을 바꿀 능력을 가진 '팻'이다. 조 칩과 애시우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카메라는 계속해서 허우적대는 조 칩의 뒤를 쫓고, 우리는 눈앞에 있는 모든 등장인물의 정체를 의심해야 한다, 자기자신까지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잠들기 전까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가 어떤 식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면서 완벽하게 달라져있다면 어쩔 것인가. 슈퍼마켓이나 약국에서 내가 가진 돈이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계속해서 단계별로 시간과 물질이 퇴행한다면 말이다. 오늘 만지작거린 최신식 디지털 기기가 갑자기 반세기 이전의 구식품으로 바뀌어 있다면 말이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려 노력하겠지만 머지않아 다다른 세계에 적응(순응)하게 될 것이다. 그게 인간의 힘이 미치는 작용범위이자, 경험(인식)의 가능성의 한계니까.
"그게 쇠퇴와 함께 진행 중인 두 번째 작용이야. 동전 일부는 폐지되어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돈이 되어버렸지만, 다른 돈은 런시터의 초상화나 상반신이 인쇄된 걸로 바뀌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얘기해줄까? 난 이 두 작용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해. 하나는 멀어져가는 작용이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과정이랄까. 그게 첫 번째 작용이지. 두 번째 작용은 그와는 반대로 존재하게 되는 과정이지. 단 예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바뀌긴 하지만."
하지만 필립 K. 딕이 <유빅>의 세계를 통해 보려주는 것은 이 경험(인식)치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다. 시공간의 무너짐 속에서도 굳건하게 존재하는 단 하나에 대한 자각같은 것 말이다. 한순간에 주인공들이 닥친 상황(환경)을 반전시키고, 실재와 환상을 뒤섞어 어느 쪽이 진짜(현실)인지를 독자가 가늠하지 못하게 만들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안을 [엔트로피 법칙]에 적용시킨다. 불안, 소비, 일회적 욕구를 만들어내는 세력과 이에 대항하는 세력의 치열한 다툼이 결국 이 세계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아니냐고. 맙소사, 나는 엔트로피 법칙이나 열역학 법칙에 대해서는 아무리 살펴도 잘 모르겠다. 한편, 작가는 우리가 딛고 선 땅이 과거나 미래,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를 묻는다. 당신이 누군가의 상상 속, 과거나 미래 혹은 태양계나 우주계 바깥, 무無의 상태,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다는 사실을 인증할 방법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또 여긴 어딘가 말고는 나라는 존재(being)를 설명할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안심한 순간 불현듯 뒤집히는 메카(Mecca:지금 내가 서있는 현재/지구)는 나를 비롯한 주변환경 모두를 의심하게 하고, 불안마저 증대시킨다. 관능적인 수 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엔트로피(entropy), 즉 불안과 연계시키고, 삶과 죽음, 물질과 비물질, 형태와 비형태, 과거와 미래, 현실과 환상, 육체와 영혼, 볼수있는것과 볼수없는것의 경계에서 존재자체와 어떻게 존재하는가(존재상태)를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유빅'은 말한다. 자신이 이름은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언제나 존재하는 '말'이라고. 모든 것을 새롭게 생각하고 그 생각 주위에 모든 것을 다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전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이 세상을 겨우 다시 보고 듣고 느낀다. 현재는 살아있는 과거. 무한하며, 평범한 이해를 능가한다. 이것은 과거가 현재를 결정지으며, 현재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이해 안에서는 불가능한 세계다. '유빅'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존재할 것이므로.
나는 유빅이다. 이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나는 존재했다. 나는 여러 태양을 만들고, 여러 행성을 만들었다. 나는 생물과 그들이 살아갈 장소를 창조했다. 나는 그들을 이곳으로 움직이고, 저곳에 가져다 놓았다. 그들은 내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고, 내가 명하는 대로 행동한다. 나는 '말'이다. 내 이름은 결코 입에 오르지 않으며 내 이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유빅이라고 불리지만, 그것은 내 이름이 아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앞으로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역사학자 E.H. 카는 대표작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띤다고 해서 산이 객관적으로 어떤 형태도 띠지 않는다거나 무한한 형태를 띤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쓰고 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존재자체, '이름'이 아니라 '대상對象'이어야 하지 않을까. 시인 김춘수의 시구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에서의 '꽃'이 하나가 아니라 개별의 제각각을 뜻하는 것처럼, 유빅은 언제나 '유빅'이지만 때때로 그 '유빅'이 아닐 때가 있듯. 언젠가부터 내 곁을 지킨 달콤한 목소리와 설레는 노래, 눈에 보이는 엘리베이터와 스마트폰, 아침에 마신 뜨거운 커피는 더이상 내것이 아니게 될 날이 온다. 커피는 재물, 지위, 세력, 명예로도 대체가능하다. 여기 걸어가는 나와 저기 잠든 나, 지금 흘러나온 나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창조는 때로 너무 높고 아찔할 정도로 깊지는 않은가. 인간의 생각, 사상, 감정, 기분, 반응까지 창조하려는 이들의 콧대높은 오만은 옳을까, 단 한번이라도 그런 적이 있을까. 초능력자가 판치는 세상에 왜 반초능력자(불활성자)가 필요한가. 관습과 제도 안에 갇혀 세상을 바꾸자 외치는 자들을 엔트로피가 덜 소비되는 방향으로, 좀 더 천천히 줄어드는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제각각 갈고닦은 특유의 균형과 은밀한 방식의 제안이 필요한 시대에 섰다. 당신이 어떤 세계에 있든 얼마나 대단하든, 주어진 모든 것들은 우리가 있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세상에 널리 퍼진 싸한 냉기와 지독한 반감은 결합, 공존, 화합이라는 따뜻한 단어를 가르칠 수 있을까. 내가 걷는 길과 반대 방향에서 오고 있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를 돌려세우기 위해 악다구니와 회유, 공모의 방식으로만 대응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러면 세상이 너무 아프다.
싸워야 하면, 그것밖에 길이 없다면 역시 최선을 다하긴 해야겠지만, 조금만 돌아볼 순 없었나. 춥고 차고 기적을 잃은 시대의 크리스마스, 그후로 엿새, 남은 연말, 한 번 뿐일 올해의 기쁘고 벅차고 아프지만 무사한 순간을. 조금은 안이하고 평탄한 정착을 기대한 내가 사악했었나. 둘러보자. 나라는 존재가, 주위가, 나라가, 세상이, 여전히 얼마나 아름다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발광發光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공존, 화합, 균형의 찰나를 보았다. 지켜질 것은 지켜지고 보존될 것은 보존되는, 디스토피아를 품은 유토피아가 멀리서 빛난다. 적어도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는 한, 아무도, 누구도, 늦지 않다. 그래서 '유빅'과 <유빅>은 너무나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