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읽고 싶은 책은 『나누어진 하늘』인데 얇은데다 한번 읽다만 전력이 있기에 『몸앓이』를 읽게 됐다. 마음과 달리 한번에 읽히지 않아서 한숨 푹푹 나는 문체를 갖고 있고, 내용마저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그다지 읽고 싶지 않은 스타일로 전개된다. 개인적으로 독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하의 (히틀러에 의한) 홀로코스트나 강제수용소 관련 문학만을 요구하거나 관심둔 것 같다. 배경을 지우고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든 독일 작품이 선뜻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1929년생 볼프는 분단 독일의 동구권을 대표하는 작가이고, 그녀의 생을 관통한 국가와 문화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배경이 그녀의 문학과 삶을 떠받친다고 해도 맞다. 2002년 출간된 『몸앓이』는 몸을 앓는 주인공을 통해 사회구조의 모순과 병든 사회/국가를 은유한다. 몸과 국가를 유기체로 생각하고, 아픈 팔다리를 떼어내듯 사회의 환부를 도려낼 수 있는가를 묻는다. 바꿔 말하면 몸이 유기체인 것처럼 국가도 그래서 하나가 고장나거나 흔들리거나 잘못되면 다른 것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정신적 수준을 고양시키기 위해 문화(문학/예술)가 필요하다는 게 볼프의 문학적 주장이다. 응집된 문장과 압축된 시어는 진도를 막기도 하지만 독일 특유 진지한 향취를 느끼게 한다. 몸의 치유가 사회악의 사라짐이라는 무조건적인 희망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건 거짓이니까. 대신 아픈 몸을 고치듯 아픈 정신을 문학과 예술적 성취로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한다. 고도로 응축된 주제가 얇디얇은 한권의 책에서 빛을 발하는 중이다. 볼프의 작품세계를 그녀의 배경과 놓고 이해하면 1963년 쓰여진 『나누어진 하늘』도 얼마든지 추측가능하다. 몸은 앓고, 하늘은 나누어지고. 몸과 하늘은 두 개가 아닌데 이런 비극이 또 어디. 다만 분량이 길고 분단 현실의 사랑과 노동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시대에 처한 개인의 비극을 짙게 보여준다는 점에 의할 때. 이런 볼프가 환상(신화)소설을 썼다는 데 한번 더 놀라는 데서 fade out.

 

 

 

 

 

 

 

 

 

 

 

 

2. 찰스 디킨스는 1800년대를 살았다. 생몰연대가 1812년~1870년인 디킨스는 내가 태어나기 100년도 전에 이미 갔는데 그의 작품이 지금까지 이토록 생생하게 읽히며 우리를 울리는 건 세상이 200여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거나 똑같거나 사람의 삶이라는 게 비슷해서일 것이다. 디킨스는 역시 『올리버 트위스트』라고 생각하면서 여태껏 못 읽고 있다.  영문학사에서 굉장히 많이 언급되는 『황폐한 집』도 그렇고.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산업혁명기 밑바닥(노동자)의 삶을 가감없이 리얼하게 보여준다는 점일텐데 바로 그 이유로 디킨스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톨스토이의 사실주의를 그렇게까지 좋아한 적이 없는 것처럼, 스탕달을 또 그렇게까지 애정하지는 않는 것처럼. 뭘 또 그렇게 뒤집어서 탈탈 털어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디킨스 읽기 자세에 스스로 아쉬운 점이 있어서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더 진지하게 읽으려 했다. 예전엔 몰랐던 디킨스의 매력을 하나라도 발견하고 싶기 때문이다. 디킨스의 매력이 내게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를 찾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걸로 한탄하긴 싫지만 두껍긴 두껍다. 지금 이 작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3. 『나흘』을 좋아하고ㅡ 『등대』를 좋아한다. 인물들이 팔딱거리고 비극적 우리 역사가 획을 긋고 지나가면 이상하게 내 일처럼 가슴이 아리다. 누군가는 나빴고 누군가는 착했는데 나쁜 사람이 잘 살고 착한 사람이 화를 입는다. 기억나지 않는(모르는) 증조 할아버지/할머니 얘기인지도 모르고 옆집 할머니의 어머니 삶인지도 모르고. 두 소설은 애틋한 기억으로 마음안에 남아있고, 두번 세번 읽어 그 기억을 건드리지 않는 한 아마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검은 모래』, 『불타는 섬』, 『비밀정원』/ 『나라 없는 나라』,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 『목등일기』도 작든크든 멀게든가깝게든 우리 역사와 역사 속 개인들을 건드린다. 근래 몇 년간 내가 읽은 한국소설은 주로 이런 식이었다. 의도적으로 장치한 메타포가 난무하는 젊은 작가들의 기대작들은 멀리 하고, 문체의 서정성이 빛나거나 역사라는 아픈 비극이 중도에 놓이거나 차라리 아무런 선입견이 없는 중견작가들이 공모전을 통해 수상한 작품들을 읽었다. 어쩌면 취향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나는 이제 한국문학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취향은 변하는 법이고 나는 더 변덕스러우니 후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한국 문단은 오래도록 문체 중심주의였다. 문체는 능력이다.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는 글쓰기는 자꾸 읽고 쓰면 나아지지만 문체는 거의 타고난다. 스토리가 강한 작품이 문체까지 갖추기는 어렵다.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는 주위적-예비적 청구의 병합같은 거지만 늘 동시에 요구당한다. 둘다 만족시키면 가장 좋겠지만. 문체가 생각만큼 세련되지 못하다 해도 결국 공부와 연구를 토대로 스토리텔링이 강화된 이 소설들이 미래 한국 문단 한 축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문단 권력은 이렇게 등단한 작가들을 아직 좋아하지 않는 듯하지만, 독자가 읽어야 이들이 강해진다. 정치인이 뭘 해보여야 표를 주겠다는 사람들이 가끔은 어이없다. 유권자가 표를 줘야 그사람이 힘을 갖고 무언가를 해보일 수 있다는 걸 그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어쨌거나 문단 물줄기도 이제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스토리텔링/문체/장르 등으로 좀 세분화되어 발전했으면 좋겠다. 싹도 나기 전에 끊고 뭉개고 돌덩이같은 기준을 정해놓은 채 끼워맞춰 판단하는 버릇 좀 버리고. 책이란 건 상품으로 만드는 데 의의가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읽어줘야 의미가 되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세상에 존재하는 소설이 반드시 내게 백퍼센트일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읽는 사람의 경험과 사유와 고통과 노력으로 채워가도 된다.

 

 

 

 

 

 

 

 

 

 

 

 

 

4. 『우리가 고아였을 때』, 『파묻힌 거인』을 읽고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나를 보내지 마』를 다시 읽고 싶어졌는데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 내용이 많이 상쇄된 두 작품을 정리하면서 가즈오 이시구로를 정리해도 되겠다는 정리벽에서 나온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반응이었다. 이제 이시구로의 삼부작 옆줄에 당연하고 완벽하게 『우리가 고아였을 때』, 『파묻힌 거인』을 자신있게 놓는다. 여행과 회상의 형식을 통해 기막힌 모험/추리, 환상 소설을 탄생시킨 한결같음이 이 작가의 무기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라는 제목은 '우리는 모두 부모가 된다'로 바꿔서 부모라는 이름을 생각하게 만들고, 『파묻힌 거인』은 그게 뭐든 파내야 한다고 속삭인다. 몰라서 평온한 진실같은 것도 있겠지만 그것도 파봐야 안다는 게 내 생각. 파헤쳐서 파묻을 것만 정확하고 신속하게 파묻어야 한다,

 

이 작가를 완전히 안다는 생각이 들고나자, 오래 전 읽은 하루키의 소설들(양을 쫓는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감는 새- 이상 세 편)을 읽고 싶다. 연관이 없어보임에도 무의식이 그 관련을 자꾸 들먹인다. 그러나 다시 건드리는 게 독배일지 만찬일지 모르고 있다.

 

 

 

 

 

 

 

 

 

 

 

 

 

5. 『어떤 날들』, 『비밀의 계절』, 『사형수가 된 여자』, 『풀이 있는 여름 별장』은 모두 누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순문학 안에서 범죄가 다루어지는 경우로, 한 권 더, 앨런 에스킨스의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초반부를 더할 수도 있는데, 이 작품 후반부는 여느 범죄스릴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양상으로 가므로 주의깊게 비교해야 한다.

 

『스톤 다이어리』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 가계도이긴 하지만 분명 스톤이라는 여자의 한평생을 놀라운 장면전환으로 그려내며, 『돌의 연대기』와 『사랑, 판타지아』를 관통하는 건 알바니아 민중의 삶과 알제리 전투 하의 생활상이다. 따를 주인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 점과 이야기 구조가 퍼졌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관성을 가진 점이 조금 닮았다. 『비밀의 계절』에서 자기들만의 세상을 구축하기 위해 튀는(비밀을 지켜주지 않는) 친구를 배제하거나 따돌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고착되는 범죄, 이 범죄는 누군가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고 누군가를 내모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불안하고 뒤틀린 청춘을 표현했다기에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싶다. 그들이 한 일은 그저 나쁜 광기에 불과할 뿐 청춘이라는 이름으로만 할 수 있는 빛나는 추억의 단면이 아닌 것 같다.

 

『풀이 있는 여름 별장』은 사형제도 딜레마를 떠올리게 한다. 단순히 일면있는 여러 가족들이 별장에서 함께 여름을 보내다가 벌어진 어느 사건으로 서로가 서로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데, 사건 불해결로 인해 촉발된 다른 사건이 죄 없는 사형수를 사형집행해버린 상황이 된다. 누군가는 덮어주려 하고 진실은 수면 위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형수가 된 여자』는 그즈음 내가 읽던 『스톤 다이어리』와 함께 읽고 싶다는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기대에 부응하는 줄거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어떤 일로 사형수가 된 여자가 있는데 피해자 엄마가 사형시키면 안 된다는 민원을 끊임없이 넣으며 여자를 구출하려는 순간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순간의 벌 대신 살아있는 고통으로 갚으라는 피해자 가족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가장 최근 읽은 『파란 실타래』는 대가족의 연대기이자 가족간 애증의 에피소드로 똘똘 뭉쳐 한편의 이야기가 된다. 가족이 되기 전의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게 타인이었고, 아이가 없었을적의 부모는 이후 태어난 자녀가 모르는 모습이다. 단순한 가족 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도 몰랐거나 알 수 없었던 시절을 수채화처럼 차곡차곡 펼쳐놓는다. 앤 타일러는 처음인데 일상 속 작은 이야기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터뜨리는 듯 폭발하는 잔잔함이 매력적이다. 『황금방울새』 포함 (**)권(생각나는 책 추가중)은  리뷰를 남기고 싶은데, 언젠가 써야할텐데, 그날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6. 쓰다보니 에피소드도 아니고 11번까지는 아무래도 무리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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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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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4 2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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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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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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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2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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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18: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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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0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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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0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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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0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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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4 0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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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20-08-07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은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랍니다.
이번에 이 작품을 소개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만들면서,
BBC에서 공들여 만든 드라마의 일부 영상들을 봤는데,
전체 15부작을 한꺼번에 좌악~ 살펴볼 수 없었던 게 너무나 아쉽더군요.^^
https://youtu.be/WyMY83Qyzws

아이리시스 2020-08-28 22:13   좋아요 1 | URL
oren님 안녕하세요? 독서랑 조금 먼 일상중이지만 저도 한번 볼게요!^^
 
[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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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가, 결정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로레트? 얇디얇은 층이 쌓이고, 매달 원자 수천 개가 쌓이지. 차곡차곡. 천년이 흐르고 또 천년이 흐르지. 이야기가 부풀려지는 것도 마찬가지야. 오래된 돌들엔 하나같이 이야기가 쌓인단다. 네가 그렇게 궁금해하는 그 작은 돌멩이는 알라리크가 로마를 점령하는 걸 봤을지도 몰라. 그 돌멩이는 파라오의 눈 속에서 반짝였을지도 몰라. 스키타이의 여왕들이 그 돌멩이를 몸에 달고 밤새도록 춤을 췄는지도 모르지. 그 돌을 차지하려고 전쟁이 몇 번이나 일어났을지도 모르고." (1권, p86)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 전쟁은 배워야만 경험가능한 극한의 세계다. 겪지 않고도 알 수 있거나 안다고 말한다면 그건 어느 정도는 허영이라고 생각한다. 겪지 않고 전쟁에 대해 대체 뭘 알 수 있을까. 베르너와 마리로르는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딱 한번 만난다. 하지만 하루가 영원이 되었고 생을 다하는 날까지 내내 같이 있는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생각하는 일은 예상도 한계도 뛰어넘는다. 소설의 배경은 넓게 보면 2차대전 중이고 1930년대 중반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 다룬다. 공간은 사실 큰 의미없다. 어디에나 폭격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숨고 도망치기 때문이다. 뒤죽박죽인 챕터 연도가 혼란스럽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의미없는 이유도 전쟁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의 이유-원인과 결과를 넘어서는 장엄한 서사. 이후 1970년대 한번, 2014년이 한번 나온다. 작가로서 필연적인 선택이었을지도. 20세기 최대 전쟁을 고작 스물도 되기 전에 겪고 한 세기 가까이 고향이나 고향을 떠나 살아남은 이들의 지금을 조명하는 건 이야기를 만드는 입장에선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쟁을 사는 사람은 무엇이 되어야 하며 또 무엇이 될 수가 있나. 엄마를 잃고 아빠와 둘이 프랑스에 사는 마리는 유전병으로 여섯살부터 시력을 잃어가기 시작하다가 열여섯살 전쟁 즈음해서는 완전히 시력을 잃는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소녀의 아버지는 프랑스 파리 박물관에서 자물쇠 보관 담당으로 일하며 딸에게 점자책을 사주기 위해 착실히 돈을 모은다. 아무도 더 큰 것을 분에 넘치는 것을 바라지도 욕심내지도 않는다. 그러는 통에 전쟁은 소리 없이 그들 곁을 맴돌며 일상과 시간을 갉아먹고 파괴하기 시작한다. 일단 시작된 이상 누구도 멈출 수 없고 멈출 기미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공간. 앞을 보지 못하는 딸을 업고 이 시국을 견뎌나가야 하는 마리의 아버지는 전쟁이 심해지자 관장의 명령을 받고 네 개의 다이아몬드(진짜는 단 하나이며 누구에게 할당된지 모름) 중 하나를 들고 무작정 피난하지만 계획된 안전에 닿지 못한 채 작은 섬으로 이뤄진 성벽도시 생말로에 있는 마리의 작은 할아버지 에티엔의 집에 머물게 된다. 누가 알았을까. 이토록 긴 시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줄. 다시는 평범한 삶을 가질 수 없음을.

 

독일에 사는 베르너는 유타라는 귀엽고 영특한 여동생과 고아원에 산다. 전쟁으로 고아가 됐는지 원래부터 고아였는지 중요하지 않지만 잘 모르겠다(나왔었나). 이 독일 소년의 취미이자 특기는 고장난 라디오 수리로, 나중에 이 재능 때문에 여러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베르너와 유타는 매일밤 우연히 갖은 허름한 라디오 속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숨죽인 세월을 견딘다. 둘은 둘만이 그런 게 아님을 알고,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옥탑방, 지하실, 2층 침대. 삶은 늘 가장 아래 아니면 맨 밑에서 이루어진다. 베르너가 히틀러 유겐트가 되어 국가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남매의 삶은 부모 없음만 빼놓고 다른 아이들과 비슷했다. 이즈음 연합군에게 밀리고 있던 독일은 타국 전파를 자국민이 듣지 못하게 강력단속하고 지레 겁먹은 베르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민한 유타는 지금 조국이 국민에게 알리는 소식과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다름을 안다. 몰래 듣는 프랑스 전파가 흘려준 목소리가 지금 독일이 일방적으로 프랑스를 침공중이라 전했기 때문이다. 베르너는 다른 남자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히틀러 유겐트로 차출된다. 고아라서 더 쉽기도 했을 것이다. 전쟁 중 국가의 부름을 받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자 성공의 가도를 희망할 수도 있는 일이라, 사랑스런 동생 유타와의 이별을 감수하면서 호기로운 마음으로 훈련에 임한다. 하지만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이를 먹는다. 마치 성실히 갖지 못하고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배불리 먹지도 못하는 아이처럼 그렇게. 

 

1권 내내 눈먼 프랑스 소녀와 독일 고아 소년은 단 한번도 만나지 않는다. 소녀와 소년의 일상과 전쟁을 숨가쁨을 급박하고도 아름답게 묘사함으로써 서서히 그리고 제대로 전쟁 안으로 끌어들인다. 전쟁을 사는 삶이 아니다, 삶 그자체가 바로 전쟁이다. 평상시에도 어려운 전시를 앞을 보지 못하는 채 보내야 하는 긴장 못지않게 고아로 살아가는 일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베르너와 마리로르여야 했을 것이다. 아직 여물지 못한 꿈꾸는 10대에 전쟁의 한복판에 서있는 일. 그때 소설은 정확하고 유려하게 소설의 의미와 가치만을 다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지식을 활용하거나 지루하게 늘어놓지도 않으며 프랑스-독일-영국 등 참가국에 대한 판단 역시 보류한다. 퓰리처라는 명망있는 문학상을 수상하지만 여전히 전쟁을 몸소 겪지는 못한 1970년대생 소설가인 앤서니 도어에게 중요한 건 전쟁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전쟁 속에 살던 한 소녀와 소년의 삶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다. 작은 소년 소녀에게도 가족과 친구, 꿈과 미래 등 잃으면 안될 것들이 많으니. 마리의 작은 할아버지 에티엔과  전부인 아버지와 유모같은 마네크 부인 또 이웃들, 베르너의 '아이들의 집' 친구들과 원장과 입대해서 만난 프레데리크, 막스와 폴크하이머 등의 친구들 그리고 동생 유타의 다양한 삶들도 엿보는 세계다. 누가 터널을 통과했는지 또 나오지 못했는지.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한껏 움츠려 인생의 한 시절을 통과했는지, 전쟁이란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어리석음인지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할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그때 그곳으로 인도하는 급행열차. 그리고 분명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빛.

 

베르너는 프레데리크가 보는 것을 보려고 애쓴다. 사진이, 쌍안경이 등장하기 전 시대를. 그리고 여기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찬 미개지 속으로 주저하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 그림을 그려 가지고 나온 사람이 있었다. 그 책은 새들로 가득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푸른 날개를 단 덧없는 신비로 가득하다. (2권, p15)

 

오히려 담담해서 더욱 서글픈 상황이 숨막히는 문장으로 여기저기서 팔딱거린다. 글로 읽는 피는 실제의 피보다 더욱 진하기도 더욱 묽기도 하다. 더 새빨갛기도 하고 덜 빨갛기도 하다. 전쟁은, 어떤 경우에 눈앞에 있다가 금세 저 바깥에 있다. 폭탄처럼 찢어발기는 희망 없고 변하지 않는 시간이 베르너와 마리로르를 통과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앗아간다. 소설은 한번도 극적인 순간이 없었다. 그러고보면 모든 순간이 극적이고 눈부시고 뜨거웠다. 하지만 아무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했다. 죽음이나 죄책감으로 시간을 통과하는 게 전부였다. 빛도 사람도 사랑도 시간도 송두리째 어떤 삶을 휩쓸었다. 통과한 사람들은 다시 통과하기 전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두사람이 만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진실 한 줄기를 손안에 꼬옥 쥐고 회상과 추억 속에 사는 두사람. 소중한 누군가를 잃게 하고 내 소중한 누군가의 마지막을 또다른 누군가 기억하고 다시 시간이 흐르고 후회하고 아프고 절망하고 다시 희망하고.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 올해 읽는 가장 대단한 문학작품은 아니다(내가 뭐라고). 정말이다, 이보다 나은 문학을 올해만 다섯 손가락 넘게 만났다. 올해를 한 달 남겨두고 이 리뷰여야 하는 까닭은 눈을 감아도 떠도 사라지지 않는 영롱하다못해 슬픈 어떤 빛 때문이다. 실패일지 몰라도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을 작가의 한 줄기 빛. 베르너와 마리가 만남으로써 만들어진 하나의 운명. 폐허 위에 다시 피어나는 한 송이 꽃. 그리고 살아있는(보는) 우리. 직선과 직선이, 면과 면이, 가로와 세로가 만나 비로소 생긴 점 하나 위 우리. 인간이라는 거룩하지만 종종 파묻히는 종족. 살리고 죽이고 살고 죽는, 그래야 백 년이 고작인 운명의 숨이 끝내 놓쳐지지 않아 읽기 시작한지 넉 달만에 그들을 소환한다. 지구상에는 얼마나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나 시간이 돌이 되어야 하는지, 소년과 소녀가 어른이 되지 못하면 저 세상에서는 무엇이 되는지, 이루어지지 못한 꿈과 소원과 만나지 못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있는 것과 보이는 것, 볼 수 없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사이에 뭐가 더 있는지 나는 알고 싶다. 보이는데 못 보는지, 보이지 않는데 보는 척 하는지. 모든 게 사람이었다, 그리고 숨이다. 살아있으니 뭐가 돼도 되었다. 살았으니 허락된 듯했다. 하나의 점이 되지 못한 채 사라진 사람들은 다이아몬드가 되기 전의 돌이었다. 그렇게 인생이 고달프고 이다지도 짧아서 아무도 아무도 그 누구도 끝내 다이아몬드가 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었다. 삶이자 시간이고, 하늘 아래 존재하는 우주의 법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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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8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8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5-11-28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을려고 무엇엔가 홀린것처럼 들어왔나봐요.
제가 올해 읽은 리뷰중에 가장 황홀하지만 영롱한 리뷰예요.
아~, 좋다. 좋아요~~~♡

아이리시스 2015-11-29 17:27   좋아요 0 | URL
책이 좋아야 하는데 간혹 책보다 리뷰가 더 좋은 건 책이 사람에게 말하고 싶게 하기 때문이에요.
양철나무꾼님이 잘 읽으셨다고 말씀하시니 정말 좋아요, 정말이에요. 우왕♥

주말이 가고 있어 슬프지만, 아까워하면서 흘려보내지 말고 맛있는 거 먹어야겠어요. 굳이브닝^^

stella.K 2015-11-29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거의 혹평을 하다시피 했는데...
저는 요즘 소설을 점점 못 따라가는 것 같아요.
솔직히 제가 아는 전쟁소설은 스펙타클한 서사의 복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에선 그런 게 거의 없고 감성만 있어서
별로였거든요. 이런 소설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생각 보다 너무 좋게 알려진 게 좀 화가나더라구요.
뭐 그냥 나 같은 재수없는 독자 만나 이 책이 고생한다 그럴 것 같아요.ㅋㅋ

아이리시스 2015-11-30 13:39   좋아요 0 | URL
저는 스텔라님 리뷰를 못 읽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로는 못 볼 내용이죠, 만들면 제가 개인적으로 애정한 몇몇 인물 빼고는 지루하겠죠. 저는 그부분이 문학의 역할이라 여겼고 스텔라님은 전쟁 서사로 스펙타클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고. 그런데 저도 스텔라님 의견에 동의하거든요^^ 읽는 중에도 힘들고 진도 안나가는 건 서사의 힘이 부족해서라고. 이런 소설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정답인 것 같아요. :)

stella.K 2015-11-30 13:35   좋아요 0 | URL
제가 알고 있기론 영화로 만들고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또 이런 소설이 영화로 만들면 기가막히게 잘 만들기도 하잖아요.
감독이 꼭 원작을 살릴 필요없이 얼마든지 해석과 상상력이 가능하거든요.ㅋ

아이리시스 2015-11-30 13:45   좋아요 0 | URL
간만에 위에 댓글 오타를 고쳤는데 여전하네요, 시간이 바뀌어버리는..(히히)

오오, 영화로 만들어요? 이 마케팅하기 좋은 작품을 안 만드는 것도 이상하죠, 원작에 충실 안하면 되는데(큭큭). 제 영화 스타일이 스릴러라서 대부분의 영화를 시시해하고, 스릴러나 스펙타클이나 무협일 때 영화가 가장 빛나는 것 같아요.하하.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아직 [사도]입니다 흙흙(극장에 못갔어..)

루쉰P 2015-12-02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책보다 좋은 리뷰를 올리시는군요 ㅋ 리뷰보다가 이 책 읽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왔잖아요! 하지만 읽지 않을거에요 전 이 리뷰면 제 마음에 영롱하게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ㅋ 공부 잘 되시나요? 전 여전히 공부 중입니다 ㅋㅋㅋ

아이리시스 2015-12-03 18:23   좋아요 0 | URL
욕망이 올라오다니ㅎㅎ 날이 추워요, 잘 지내요? 저는 공부라기보다는 공부해야지 생각만..( ˝) 뭐 이것저것 하루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라서 일을 벌이기도 그렇고 아니기도 그렇고, 정말 하고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요, 루쉰님. 책보다 좋은 리뷰는 늘 책이 있어서 가능한 거니까 오래 생각을 곱씹을 만한 글을 쓰게 해주는 책은 좋든 나쁘든 다 좋은 거예요. 그쵸? 감기 조심하세요^^
 

 

 

 

읽는 책에 대해 말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라지만 그중 한 권.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존 프리먼의 소설가를 읽는 방법』을 읽고 있다. 일단 아는 작가 먼저, 아는 작가 중에서도 진짜 아는(작품을 읽어본 적 있는) 작가 먼저. 하지만 이름을 아는 작가, 이름과 작품을 아는 작가, 처음 들어보는 작가 가리지 않고 결국에는 전부 읽을 생각이다. 재미있고 유익하다. 가장 좋은 건 픽션을 다루는 창작자들의 목소리가 현실(정치)에 머무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당연하다. 그들도 이 세계 지구인이니까. 때로 문학적 미사여구 뒤에 숨는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반성과 회한 또는 따끔한 비판이나 충고로 제대로 기능할 때가 드물지 않다. 독재와 식민시절을 누구보다 잘 그려내는 동아프리카 최고이자 유일의 작가 시옹오에서 무덤까지 껴안고 가도 될 십대 시절의 나치 활동을 고백함으로써 문학에 대한 진정성뿐만 아니라 살아생전 냈던 모든 목소리까지 의심받은 그라스까지. 한때의 잘못된 신념과 선택을 사과하고 용서받기 위해 평생을 바쳐야 하는 생도 있는 법이다.

 

"독재의 진짜 끔찍함은 목소리를 빼앗아 간다는 거예요." 그가 말했다. 그는 영어가 가진 국제적 지배력이 토착민들의 성대를 겨눈 칼을 날카롭게 벼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모든 언어가 어떤 의미를 갖기 위해서 무조건 영어를 거쳐야 한다면 그건 제대로 된 방정식이 아니죠." -응구기 와 시옹오 (070)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작가 에이머스 엘론은 그라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어째서 60년이나 기다리고만 있었습니까?" 그의 질문은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그라스의 답변 역시 박수를 받았다. (중략)

"전 그 어린 소년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고자 이 책을 썼습니다." 그라스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죠. 하지만 그 애는 너무 방어적이었어요. 가끔은 거짓말도 했죠. 제가 소년이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책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두 명의 낯선 사람들처럼 여겨집니다. 언젠가는 만나겠죠." -귄터 그라스 (076)

 

 

세 편 이상 작품을 발표한 작가들 중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작가가 몇 명이나 될까. 알고 있는 수많은 소설가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대답하기 어렵다. 있다면 굉장한 일이지만 없어도 별 문제 없을 그냥 한번 해보는 질문.

 

이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나 혼자만 (그 진가를) 알고 또 좋아하는 작가 그것도 소설가를 간직하기란 두말할 것 없이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늘 우리 아빠가 하던 말씀. 내가 아는 건 항상 다른 사람도 알고 있다고 생각해야 해. 대체로 나한테 좋은 건 남한테도 좋은 법이고, 남이 좋아하는 걸 나 역시 좋아하게 되는 법이다. 우리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이게 그 반대보다 훨씬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누구나 사랑할 책, 예외는 없을 책, 『작가란 무엇인가』 시리즈와 『존 프리먼의 소설가를 읽는 방법』을 나란히 놓아본다. 그들은 고지에 도달했거나 이미 절반 이상 올라 손 흔드는데 또다시 그들에 대해 말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너무 특출나거나 필요이상으로 고집스런 (특이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위안이 된다. 작가가 태어나는 거라든가 온 우주가 만들어내는 거라든가 하면 어쩐지 좀 억울할 것 같아서.

 

어느 봄에 그 어떤 책보다 진지하게 이 책들을 읽었다. 귀를 기울이고 생각을 비우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의미들.

 

 

 

 

 

 

 

 

 

 

 

 

 

 

 

 

[파리 리뷰_인터뷰]를 편집한 『작가란 무엇인가』는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작가 중심으로 선별/번역되었으니 안 읽은 작가는 있어도 모르는 작가는 없지만, 『존 프리먼의 소설가를 읽는 방법』에는 정말 모르는 작가가 몇 있다. 작가 시리즈가 인터뷰 녹취 형식의 진짜 인터뷰 양식을 표방한다면, 존 프리먼은 자신이 만난 소설가의 목소리를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언어로 온 역량을 발휘해 길어야 네 장 꽉 채운 분량으로 핵심만 써낸다. 작가 시리즈의 축소판 같고 시작하자마자 끝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반면 귀에 쏙 들어온다. 해당 작가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경과 작품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읽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화권, 작품 내용, 특이한 아이덴티티, 에피소드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진 경우 존 프리먼의 글솜씨에 감탄이 나올 정도로 놀랍게 잘 읽힌다.

 

 

 

『보르헤스의 말』에 실린 인터뷰와 [파리 리뷰_인터뷰]에 실린 인터뷰의 시기와 장소는 같지 않을 것이다. 같다고 해도 그만인데, 사실 나는 잘 모른다. 출처를 확인해보지 않았다. 보르헤스는 (직업상) 강의하는 사람이 아니다. 인터뷰에 특정 주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같은 사람이 자신의 문학가로서의 항해와 인생을 말할 때 결국 하나의 지점을 가리키지 않겠는가. 내가 필요이상 보르헤스-정확히는 보르헤스의 작품들-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두 권 다 읽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감동이 덜한 건 벌써 알고 있는 그의 생각을 다시 듣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두 인터뷰가 각각 이뤄졌지만 보르헤스는 단 한사람이다. 한사람이 세상에 대고 자신과 자신의 작품과 자신의 관심사(호오好惡)에 대해 하는 말은 천재지변이나 역변에 의한 자기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달라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내가 네가 아니라는(본질적으로 될 수 없다는) 사실과 비슷하게. 보르헤스의 외부를 더 알기 위해 인터뷰를 읽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어렵지만 그의 작품으로 되돌아가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을 한다.

 

 

 

 

존 프리먼으로 돌아가서,

 

아직 많은 책을 읽지 않았을 때 단연 Top에 들던 하루키는 나날이 그 순위가 내려가지만 그는 아직도 이십대 초중반 내 문학 사전 한켠에 조각 같은 달빛을 비춰주는 작가임이 분명하다. (괜히 한번 고백해보자면 '청춘의 찬란함을 쾌활하고 섹시하게 그려내는' 『노르웨이의 숲』이나 『스푸트니크의 연인』보다 『양을 쫓는 모험』이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은 '초현실적 판타지'나 '두 가지 스타일을 모두 합한' 『태엽 감는 새』를 나는 더 좋아한다.)   

"그 방에 들어가서 문을 열지요. 방은 어둡습니다. 완전히 캄캄해요. 하지만 저는 무언가를 볼 수 있고, 그걸 만질 수도 있어요. 그런 다음 이 세계, 이쪽 편으로 돌아와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거지요."

"강해져야 합니다. 거칠어야 하고요. 그 어두운 방에 들어가고 싶다면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신뢰해야 하는 겁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053)

 

하루하루 매일매일이 내가 만들어가는 나의 이야기라는 걸 인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그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들인지 알지도 못하고 보내는 시간들 중 티끌만큼만 소설을 읽는 데 써도 좋을텐데. 내가 곧 나의 이야기. 당신이 가진 나는 각기 다른 나. 그것들 모두가 내가 생각하는 진짜 나는 아니다.

 

애트우드의 말처럼.

"크게 본다면 당신이 곧 당신의 이야기예요." 애트우드가 설명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당신의 모습은 각기 다를 것이고, 그것들 모두가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모습과는 다를 거예요." -마가렛 애트우드 (392)

 

벌써 한참 멀리 와버렸다. 가즈오 이시구로, 나딘 고디머, 도리스 레싱, 필립 로스, 모옌, 할레드 호세이니, 부부라서 2인1조로 묶인 시리 허스트베트와 폴 오스터, 사랑하는 살만 루시디와 오르한 파묵 그리고 빼먹은 여러 작가들. 다른 얘기는 아직 시작하지도 못했다. 그래, 여기가 끝이 아니겠지. 늘 그다음도 중요하다, 중요했다. 토니 모리슨의 말처럼.

 

 

그다음 독서가 더욱 기대된다. 그다음 문학이 무척 그립고 그다음 시간이 아주 소중하게 여겨진다.

 

3분의 1 정도 되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 읽지 못했고 알지 못하는 작가와는 또 언제 만나게 될지, 이름을 알지만 작품을 읽지 않았거나 한 작품 정도 겨우 읽어서 문체나 스타일, 주제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작가를 어떻게 평가할지. 그작품으로 내가 어떻게 변할지 또 당신과 만나게 될지 이야기하게 될지 우리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알아챌 수 있을지.

"그 상은 절 규정하지 못해요. 그저 노벨위원회가 제 작품을 대단히 뛰어나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죠. 그게 다예요. 해마다 또 다른 수상자가 나오잖아요. 수상은 중요하고, 상금은 기막히게 좋죠. 하지만 그다음도 중요하죠." -토니 모리슨 (042)

 

 

하지만 내가 다시 이 책에 대해 말할 다음이 있을까.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이제 나는 여기-이 책 옆에 지금 모습으로- 없다. 읽는 내내 원래도 남 못지 않은 독서력이 데시벨로 상승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펜을 드는데 모두 같은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게, 같으면서도 다른 얘기를 한다는 게 신기하다. 토니 모리슨에 의하면 미국 문학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는 이창래와 줌파 라히리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그들에겐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지만). 더이상 표현도 안 되는, 사랑해마지않는 카뮈와 제발트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그들은 좀 더 오래 살아야했어(그들의 목소리를 이제 영영 들을 수가 없다니).  

 

이 짧은 생에 좋아하는 소설가 몇 명쯤 품고 사는 건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거룩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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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11-09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풀로 아이님 글 읽는데 나름 좋은 것 같네요. 블로그에서 보면 폰트가 작아서 잘 못 보겠더라구요. 저도 작가란 무엇인가1권 읽고 반했는데 나머지는 여태 못 보고 있네요. 저 소설가를 읽는 방법 나온 거 보고 기뻤는데... 중. 마지막 구절이 참 의미심장하군요. 행복한 일이죠.^^

아이리시스 2015-11-09 19:47   좋아요 0 | URL
네, 긴 글은 더 길게 보이더라고요, 북플이. 이런저런 장단점이 있지만 길면 끊어 읽으면 되고 저는 좋아요. 한번에 잘 읽히지는 않잖아요, 아무리 대단한 작가라고 하더라도 우리 입장에선 타인 50-60명인데. 이렇게 소설가 인터뷰를 한번 볼 때마다 책 구매욕 돋아서 큰일이에요. 그것만 빼면 아주 행복한 일이죠^^

2015-11-09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9 1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9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9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9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9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리미 2015-11-10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서재글 잘 읽고 갑니다. 왜 이제서야 여기오게 되었을까요?ㅎㅎ 앞으론 자주 놀러올거예요^^
많이 읽고 많이 배울게요. 감사합니다!

아이리시스 2015-11-10 19: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오로라님. 오오 진작 오셨어야죠 히히히😄😄 제 서재가 뉴페이스님 댓글이 저조한데, 정말 반갑습니다. 자주 놀러오세요, 저도 많이 배울게요^-^

페크pek0501 2015-11-1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섯 권의 책 모두 제 보관함에 있는 책들인데... 그중 보르헤스의 말만 읽었어요. 좋았어요. 나머지 책은 구매 대기 중이에요.
아이 님의 글을 보니 더 사고 싶어집니다. 왜 그리 사고 싶은 책이 많은 걸까요? 읽는 속도는 느리면서 말이죠.

잘 지내시죠? ^^ 스텔라 님의 서재에서 보고 달려 왔답니다.


아이리시스 2015-11-11 13:28   좋아요 0 | URL
그럼요, 페크님도 잘 지내셨죠? 북플로 서재를 보니 한계가 명확하고 댓글도 뜸하고 순례도 어려워서 페크님 글 본지도 한참이고. 반가워요😄

책은 늘 모자라죠, 저 책들 사려면 또 한박스, 저 그제 주문한 책도 한박스, 오늘 또 살건데..😌😌😌 사지말까요? 누가 단호하게 저 좀 말렸으면ㅠㅠ
 

 

 

 

우리는 날아올랐다. 그날 우리가 본 건 무엇인가? 우리의 것이 아닌 나라,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별빛, 다시 돌아오지 않는 나날. 우리는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산산이 부서지기를, 한계라도 경험하기를, 무엇도 얻지 않고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우리는 차가운 불꽃, 타오르는 불의 중심에서 흔들리는 푸른 불꽃을 원했으나 결국 청춘이 지나고 우리 두 손에 남는 건 아버지의 유품뿐이었다. (「마지막 롤러코스터」p.70)

 

 

서너 살만 더 어렸어도 이 책의 리뷰는 스무 살 회상의 일색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니다. 물론 나도 스무 살이 그리울 만큼 나이를 먹은 것 같다(고 말해도 될까). 그렇게 치면 나는 스물다섯 살에도 스무 살이 그리웠다. 긴가민가 와중에 결론짓길 문창과 초년생일 때 이 책을 읽은 것 같다(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 소설집은 언제부터 절판이었나. 내가 읽었다고 생각한 건 문예지에서 읽은 표제작인가(라고 말하기에 두번째 작품도 읽은 것 같고). 중요치 않다. 아니, 좀 중요한 지도 모른다. 나는 죽지도 살지도 못할 때 온다던 서른을 넘긴 지 몇 해 안 됐고, 평균 수명에 빗대 인생의 절반을 살지 못했으니 재독은 의도하지 않는다. 기억의 소멸은 알츠하이머 환자 못지 않지만 아직은 질보다 양, 깊이보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관계로 재독을 철저한 계산 끝에 하고 싶은데(그러나 철저할 것까지는 없다), 기억하지 못해 공식을 깨다니.

 

어떤 의미로든 새 작품이 수록되었으니 아예 헛수고는 아니지만 나는 분명 당시 지금보다 더 젊은 작가군에 속하던 김연수의 작품이 지금보다 훨씬 수가 적을 때, 창작연도 별로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독서를 계획하며 읽었다. 15년 만의 개정판이니 2000년판 책이 도서관에 있었을 것이다. 표제작 「스무 살」의 첫문장이 유명해서 느끼는 기시감인줄 알았는데 확실히 다니던 대학 중앙 도서관 긴 나무 테이블에 앉아서, 공강 시간이던가 수업 후던가 수업 땡땡이 중이던가 하여튼 읽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캠퍼스가 세 개였다. 그중 한곳에서, 어쩌면 모두 수업중인 고요한 캠퍼스 안 벤치 하나에 혼자 앉아있었을지도 모른다(그런 청승과는 아니었는데).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해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새삼, 있지도 않은 캠퍼스 거니는 낭만을 얘기하려는 건 아니고, 이 책이 그 기억 속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는 얘기다. 스스로가 신기하게도, 학과특성상 나와있는 국내작가의 단편을 섭렵하던 시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개정판을 새 책 보듯 펼쳐버리고 말았지만 아무렴 어때, 소설집 『스무 살』은 정확하게 그(작가)의 스무 살과 나의 스무 살을 반추하니까.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엄마 등에 업혀 거리를 지날 때 나던 인근 대학가 희미한 최루탄 냄새가 기억난다 해서 그와 나의 스무 살이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같을 수가 있냐면, 딱 이만큼 살아보니 그렇다. 스무 살은 어차피 스무 살이고, 놀랍게도 스무 살은 모두 비슷하다.

 

 

이제 스무살에 찾던 미지의 세계를 떠올리는 것보다 당장 오늘내일이 더 시급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가슴이 약간 저릿해 온다. 거창한 미지의 무엇보다는 저녁 메뉴, 퇴근 후의 삶, 내일 반납해야 하는 책 해결, 시도때도 없는 졸음, 은근한 추위, 바다를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별 것도 아니고 남는 것도 없는 사소한 선택이 더 중요해져버렸다. 빈곤한 추억은 분명 가난함의 반증이지만 근거도 맥락도 없이 갑자기 과거를 불러오는 사람이 사치덩어리처럼 보이고, 오지 못할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 잉여 돋는 어리석음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나이 육십에도 남자(남편)와 손 잡고 다니는 여자로, 꿈꾸는 소녀로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는데. 하지만 많은 것을 모르는 줄 알았고 또 실제로 몰랐던 스무 살에도 온 삶이 별처럼 찬란하지 않다는 걸 알았으면서, 가장 평범한 삶이 제일 행복하다는 걸 이제는 알면서. 내려놓는다. 또다시 『스무 살』을 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스무 살은 그런 거니까. 원할 때 오지 않고 원하지 않을 때 와서 어느덧 홀연히 가버리는 어젯밤 꿈 같은 시간.

 

 

 

 

 

 

 

 

 

 

 

 

 

 

 

 

 

내가 기억하는 김연수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라서(물론 소설집 네 권과 장편 두 권을 더 읽은 전력이 있긴 하지만), 요즘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애인(에게) 읽히기' 프로젝트 중이라서 빌렸는데 일주일째 우리 집에 있어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하고 다시 읽어본다. 비슷한 크기로 『원더보이』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성장소설이 별로인 나는 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치고는 거의 유일하게 꼽는다. 묘하게도 <상속자들>에 인용될 때 『원더보이』를 읽었고, <남자가 사랑할 때>에 인용될 때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었다. 어쩌다 보니, 『꾿바이, 이상』이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읽던 대학 시절에 기대만치 이 작가를 못 읽어낸 경험이 저려서 멀리하다 기회가 되었던 것뿐. 작가의 팬덤이 짙어서 한국문학의 현재 범주는 김연수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만약 이 현상이 (오래된) 감성을 소중히 하는 사람과 오글거려 하는 사람으로 나누는 데 성공한다면, 그때는 이미 이쪽과 저쪽의 거리는 너무 멀어 만날 수 없어져버릴지도.

 

속도를 더 올리자, 당장 터질 것처럼 엔진은 굉음을 내기 시작했고 핸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두 손에 힘을 줬다. 나는 몸의 중심을 잡았다. 일단 속도에 익숙해지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머물러 있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지나쳐갔다. 아버지도, 집도, 좌절도, 슬픔도, 시간도, 공간도. 지상에는 그런 곳이 없었다. 거긴 시속 백오십 킬로미터로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어야만 찾을 수 있었다. 그게 어떤 것이든 다 지나가는 곳. 때로는 검은 뼈의 형상으로, 어두운 구름의 움직임이나, 가끔은 한꺼번에 흩날리는 푸른 꽃잎처럼, 모든 것은 지나갔다. (「뒈져버린 도플갱어」 pp.165-166)

 

스무 살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어른이었고, 또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유치했다. 무엇을 생각하든 항상 그이상이었다. 누군가 스무 살이 이러저러했다고 말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스무 살일 것이다. 불확실성, 불투명성, 막막함, 고독, 때론 희망까지도 괴로웠으니까. 그리고 분명한 사실 한 가지. 소설집 『스무 살』은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 수록 재미있다. 십대에 꿈꾼 것처럼 진짜 스무 살은 매혹적이지도 황홀하지도 않았고, 스무 살에 꿈꾼 서른이 또 그것과 다른 것처럼, 모든 것들이 뒤로 갈 수록 반드시 더 좋지만은 않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실 하나 더.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던 스무 살 그리고 서른이 눈깜짝할 새 와서 지나가듯, 지금 이 시간도 언제든지 간다, 가고 있다. 스무 살이 지나면 스물 한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는 걸 이십대에 알았던 작가처럼, 지나가는 그리고 다가오는 모든 내가 나라는 것을 나도 안다. 스무 살과 함께 걷는 사람이 있고 스무 살을 죽이고 걷는 사람이 있으며, 스무 살을 잊지 못하는 사람과 스무 살을 지나와서 다행이라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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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5-11-04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아주 좋게 잘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나저나 여담인데, 저는 김연수 하면 항상 이응준이 떠올라요.

이응준의 소설이 김연수의 소설보다 대중들에게 더 읽혔다면? 그런 생각을 괜히 해 보았던 거죠.^^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다 부질없었던 생각 같네요 후후


아이리시스 2015-11-06 01:29   좋아요 0 | URL
비슷한 군에 있는 작가 같긴 한데..라고 말하면서 저도 이응준을 한두 편밖에 읽지 않았네요.
저는 한국소설을 주로 수상작 위주로 읽어온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데, 기존 작가보다는 새로운 스토리텔러들이 나타날 때 좋아요. 제주 4.3문학상 작품들을 좋아하고 또..

이응준의 소설이 김연수의 소설보다 더 읽혔다면? 하는 생각도 소중하고, 실제로 그렇지 않은 이유도 궁금하고, 한수철님도 저 소설을 좋게 잘 읽었다고 하시니 좋네요. 이응준도 한 권 더 읽어보고 싶고^^

stella.K 2015-11-05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창과를 전공하셨군요.
저는 김연수가 쫌 어렵더라구요.
그러다 소설가의 일에서 아, 김연수가 이런 작가구나 다시 생각하게 됐는데
지금은 읽을 기회가 없어 다시 멀어진 느낌입니다.

요즘 TV에서 응답하라 1994 다시 해 주던데
보니까 좋더군요. 그동안 볼 생각을 안하고 있었는데
요즘에야 꽂혔습니다. 저의 스무 살도 생각나고.
보고 있으려니 몸은 20대, 정신은 30대로 살아보고 싶더군요.ㅎㅎ

아이리시스 2015-11-06 01:28   좋아요 0 | URL
어떤 예술군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듣는 음악, 읽는 책, 보는 영화에 대해 말해주면 좋은데, <소설가의 일>에서 그게 좋았구요, 아, 저는 단행본 나온 거 다시 한번 읽어야 하는데..(정말 열심히 연재글 읽었었어요)

[응답하라 1994]는 못봤는데 잘 봐지지도 않더라고요, 얼마전에 한 서인국이 나온 드라마 엄청 좋아서 그때도 그 드라마 생각이 났고 또, 스무 살 하면 늘 생각이 나는 것 같아요. 무언가에 꽂히는 거, 그게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20대면 정신도 20대로 살아야 좋은 거 아닌가요 히히^^

stella.K 2015-11-06 11:4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아뇨. 20대 때 하도 실수를 많이하고 살아서
실수를 줄일려면 정신은 30대가 좋을 것 같아요.
그때 또 나는 나이 보다 성숙하다고 착각하고 살았어요.
유치의 극치였죠.ㅠㅠㅠㅠ

아이리시스 2015-11-06 12:06   좋아요 0 | URL
아....그래서 그렇구나^^ 그런데 30대도 나잇값 못하는 사람이 사실상 많을텐데..

지금의 자신을 가장 사랑해야겠지만 더 어릴 때가 좋았다고 생각하죠. 특히 눈앞의 예쁜 사촌동생볼 때. 아, 걔는 정말 예뻐요. 자기도 아는 지 모르겠지만 아마 잘 모를 거예요. 과거에는 남을 부러워하면서 살았는데 그래도 저는 1%쯤 더 현실주의자라서 지금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요. 좋았을 때 떠올리고 미래를 두려워 하고 현재를 불평하면서 정작 움직이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앉아서 울면 일이 해결되냐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면서요.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다시 댓글 보니까 제가 안본 건 <응칠>인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요, 마음 가득 담아 본 것도 늘 안본 것처럼 사는 걸요.+_+ 오늘부터는 <응팔>한대요!(어쩐지 기대되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요즘은 <그녀는 예뻤다>, <풍선껌> 좋아해요! 그게 딱 내 또래 얘기니까. 시대가 잘못 가고 거기 제 잘못이 있다고해도 일단 연애는 하고 살기도 해야 하니까^^

stella.K 2015-11-06 12:50   좋아요 0 | URL
그녀는 예뻤다가 정말 인기가 많은가 봐요.
저도 30대를 살았다면 로맨스를 나름 좋아했을 텐데
이젠 그런 게 눈에 잘 안 들어와요.
대신 우연찮게 문근영 나오는 <마을>을 보게 됐는데
의외로 괜찮은 거 같더라구요. 미스터리에 약간의 연극적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서 관심이 가더라구요.

<응사>는 이번에 다 본 건 아니고 띄엄띄엄 봤어요.
아침 시간에 해 주는 거라 진득하니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재밌고 나름 진지하기도 하고. 유연석이 좀 아쉽게 됐긴 했지만
그의 풋풋함이 좋더군요. 성동일은 정말 연기를 잘 하는 것 같아요.
오늘부터 한다는 <응팔>도 본방사수할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짬짬이 보려구요.

일케 아이님과 댓글 나누니까 좋으네요.
요즘엔 영화 보다 드라마를 많이 보는데 통하는 사람이 많지가 않아서리...ㅋ^^


아이리시스 2015-11-11 00:37   좋아요 0 | URL
댓글을 제가 빼먹었네요, 답글 달 일도 별로 없는데, 늦어서 미안해요. <응팔>봤어요, 1회. 웃기더라고요. 손에 손잡고~ 호돌이도 귀엽고. 딱 하나, 언니랑 맨날 치고박고하는 게 짜증났는데.. <마을> 추리하는 재미로 보다가 진지하게 해석하면서 보면 더 섬뜩하고 무서워요. 아무것도 밝혀지는 게 없어 점점 답답하고.

지난주에 제일 충격적으로 무서웠던 건 <그것이 알고싶다>의 몽키하우스. 한번도 몰랐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끔찍한데, 사실 그시절 생각하면 꼭 그런것도 아니죠. 이 프로는 나날이 정점을 찍는 것 같아요. 뭘보든 항상 재미있게, 행복하세요. 그럼 좋죠, 그게 좋아요^^

2015-11-05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6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5-11-15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는 사실 원더보이 읽다가 포기했어요. 아이님이었나, 누군가 제게 선물로 주신 책이었는데 다 읽어내지 못해 그 분께 죄송하다고 전해드렸던 기억이 나요. 문장도 어렵고 내용도 어렵고 어린 제게는 좀 벅찬 소설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러다보니, 또 어쩌다보니 김연수의 소설을 단 한 편도 읽지 않은 것 같은데(국문학도라고 말할 가치도 없죠.), 책 좀 읽어야겠다 싶어요. 요즘엔 책보다 영화보기에 심취해서 소설을 읽지 않았더니... 스스로에게 죄책감도 좀 들고.

아이리시스 2015-11-24 12:43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안녕? 맞아요, 소년을 위로해줘, 랑 같이. 이것만 읽었다고 그때 그랬었어..그랬었지.. 국문학도라고 무조건 책을 많이 읽게 되는 건 아니죠(그걸 말해줬어야 했어), 그러니 죄책감이나 자괴감 갖지 말고, 좋아하는 시간을 보내면 되죠, 그러면 돼요. 그리고 한 권 읽으면 그때 어떤 책인지 말해줘요. 음, 겪지 않은 이야기, 라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읽은 애인이 말했어요. 그렇다면 그전에 읽은 지상의 노래, 도 마찬가지인데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거든요. 그말을 들은 내가 소설을 읽는 일은 (몸을 부딪쳐) 겪지 않은 일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았던 건 아마도 그사람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아마 그때, 소이진님도 그래서 어려웠을까요? 원더보이는, 아이의 시선으로 어른의 세계를 봐야 하는 거였으니까. 그렇지만 김연수 못 읽으면 어떻고 안 읽으면 또 어때요, 그래도 소이진님은 예쁘고 대견하고 또, 잘 하고 있어요. :)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순은 『창백한 언덕 풍경 1982』,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1986』, 『남아있는 나날 1989』이고, 내가 읽은 순은 1,3,2이다. 1을 읽을 때만 해도 3은 진작에 나와 있고 유명한데 2가 곧 나올 줄은 몰랐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순을 들춰보지도 않았고 작품연도도 눈여겨 보지 않았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995』, 『우리가 고아였을 때 2000』, 『나를 보내지 마 2005』, 『파묻힌 거인 2015』도 나와 있지만 3부작에 대해 기록하는 페이지다. 나는 나와있는 그의 작품을 모조리 읽었다. 아니다, 『녹턴 2009』이 남았구나. 도무지 못 넘는 단편의 장벽.. 옆에 뒹구는 김연수의 『스무살』..

 

삼부작이 한 권이라고 작가가 말했는데(『파리 리뷰』에서), 말하지 않았어도 아마 문학팬들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전쟁-신념-행동-패전-회고-부끄러움-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 어떤 의미에서는 2세대 혹은 3세대, 부모-자식, 스승-제자 의 갈등과 화합이기도 할 것이다. 다음 세대는 늘 이전 세대를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하고, 잇는 동시에 단절하며, 연결하면서 능가하기를 원한다. 1은 자살한 딸과 떠나온 고향(나가사키) 친구(모녀)를 회상하는 엄마의 회상, 2는 노老화가의 회상, 3은 옥스퍼드 대저택 집사의 회상. 세 권의 공통점은 전쟁과 제국주의, 2,3의 공통점은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입으로 이야기를 진행한 것. 1은 예외인데, 읽는 중에도 세 권 모두 읽은 지금도 제일 아련하고 정교하며 우아하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라서인지 회상과 묘사가 가장 아름답다. 삼부작을 읽고나니 얼마 전 읽은-귄터 그라스가 십 대에 자원입대한 나치 친위대 활동을 고백하기 위해 쓴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와 상통한다. 이 자서전은 귄터 그라스가 젊은 시절-10대부터 30대까지-의 회고록을 집필한 것이지만, 흑역사를 고백하는 바람에 형식상 결론은 그렇게 되어버린 면이 있다. 엄마, 화가, 집사, 귄터 그라스는 한때 신념을 가지고 행동했지만 이제 달라진 세상에 지난날의 흑역사를 고백하고 솔직히 사과(화해)하는 방법을 택한다.

 

물론 그 저녁의 몇몇 순간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던 척하지는 않겠다. 또한 상황에 밀려 신중함을 발휘해 그렇게 해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 해도, 내가 그렇게 자진해서 지난날에 대해 그런 종류의 발언을 했을 거라고 주장하지도 않겠다. 그렇긴 해도 자존심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과거에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오랫동안 회피하고 싶어 한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닐 테지만, 한 인간이 삶의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끗하게 인정함으로써 얻어지는 만족감과 권위가 틀림없이 있다. 어쨌든 신념에 차서 저지른 실수는 그렇게 부끄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수치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p.171)

 

 

 

 

 

 

 

 

 

 

 

 

 

 

 

 

 

"기사부로는 불행한 사내일세. 그의 삶은 서글펐지. 그의 재능은 점점 스러지고 있어. 그가 한때 사랑했던 것들은 오래전에 죽거나 그의 곁을 떠났지. 우리가 젊었을 때에도 그는 이미 외롭고 슬픈 인물이었네." 모리 선생은 잠시 말을 멈춘 다음 다시 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술을 마시고 환락가의 여인들과 즐길 때면, 기사부로는 행복해했지. 그 여자들은 그에게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고, 어쨌든 그날 밤 동안은 그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었어. 아침이 밝으면, 물론 그는 똑똑한 사람이어서 그런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하지만 기사부로는 그런 밤들을 아침만큼이나 가치있게 여겼어.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지. 가장 좋은 건 밤과 일체가 되었다가 아침과 함께 사라지는 거라고 말일세. 사람들이 부유하는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 말일세, 오노, 기사부로는 그걸 제대로 평가할 줄 알았다네."

(중략)

"이제 그는 더 늙고 더 서글퍼졌네. 하지만 많은 점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어. 오늘 밤 그는 행복하네. 그 옛날 환락의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는 마치 담배 연기를 내뱉듯이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화가가 포착하고자 하는 가장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아름다움이 해가 진 뒤 환락의 집 안에 떠돈다네. 그리고 이런 밤들이면 말일세, 오노, 그 아름다움 중 어떤 것이 이곳 우리의 거처로 은연중에 스며든다네. 하지만 저기 있는 저 그림들은 그런 덧없고 꺼지기 쉬운 꿈 같은 그 무엇을 암시조차 못하지. 저 그림들에는 지독한 결점이 있다네, 오노."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p.201)

 

주인공들 모두 직간접적으로 전쟁과 연관이 있고,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전쟁의 시절을 겪으며 가진-혹은 고수한-신념에 기반해 행동한 전력들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패전하면서 그들은 나빴지만 성취에 젖었던 시절을 수치와 신념이 뒤섞인 복합적 감정으로 떠올린다. 집사의 경우, 자신의 직업적 신념 때문에. 화가의 경우, 나이 찬 둘째딸을 괜찮은 집과 혼인 맺어주기 위해. 옮긴 문장들은 회상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들. 삼부작이 밑줄 그어 하고자 하는 주제와 가장 가깝다. 과거에 했던 일과 선택이 틀렸다고 해도 시간을 되돌려 다시 다른 결정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정하고 고백하고 사과할 수는 있다. 용기와 정의는 어떤 점에서는 닮은 단어인지도 모른다. 해가 밝으면 별빛이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당연하다. 

 

 

#밤과 일체되었던 모든 것들은 아침이 되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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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11-0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언제나 책을 에너지 넘치게 읽으시는 아이님을 보면...
국내 국외 할 것 없이 여행도 다니시고.
제가 원하던 삶이었는데...ㅠㅋㅋㅋ
그래서 그렇게 지난 여름 뵐 수가 없었나 봅니다.
요즘엔 자주 보게 되네요.^^
그런데 제목 앞에 Ep. 1, 2...는 뭘 의미하는 건가요?

아이리시스 2015-11-03 11:31   좋아요 0 | URL
별 걸 다 부럽다고 하시고.. 좋아하는 일이고, 특별히 매여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기름 많이 먹는 차라서 기름만 몇 십만원어치를 썼으니까요.. 담번엔 기차타기로 꼭.. 그래도 6월쯤인가 정동진 갈 때는 기차 탔습니다.. 비 오고 춥고, 15년 전 갔던 것보다 많이 변한 정동진 풍경이 낯설었어요. 바다는 여전했지만.. 뜸했던 건 맥북이 사망해서.. 완전 사망은 아닌데 켜면 승질이 나서 그냥 안 켜는 방법으로..

Ep. 는 에피소드인데, 리뷰/페이퍼가 저는 좀 긴 편이니까 생각날 때마다 까먹지 말고 짧게 남기려고(아무 주제나 막 하루에 하나씩 쓰는 느낌?) 했는데 점점 길어지고.. 이거 스텔라님 예전에 하루에 한 편씩 글 남기던 때 생각나요. 아마 그러진 못할 거지만..

좋은 하루! :)

stella.K 2015-11-03 12:20   좋아요 0 | URL
ㅎㅎ 그때를 기억해 주시다닛! 황송하여라...ㅠㅋㅋㅋ
아, Ep가 그런 뜻이었군요.;;

정동진이 그렇게 달라졌던가요? 저도 생각해 보니 가 본지가 20년쯤 되오나 봅니다.
올해 시작하면서 여행을 해 보리라던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는데
역시 이루지도 못하고 한 해가 가려나 봅니다.ㅠㅠ

아이리시스 2015-11-03 13:39   좋아요 0 | URL
그때 언젠가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
특별한 건 아니고 열여덟살인가에는 가족들과 차 갖고 갔거든요. 역을 아예 안 통해서 잘 몰랐을 수도 있고 기억이 왜곡됐을 수도 있는데, 예전엔 정말 한가로운 느낌이었는데 이제 수많은 게스트하우스들이.. 엄청 저렴하고 예쁜 게스트하우스들이 그 좁은 도시 기차역 앞에 오밀조밀하게 있는 게 신기했어요. 바다는 여기나 거기나 별 차이가 없었어요. 어릴 때는 강원도 바다가 정말 운치있고 드넓고 아름답게 느껴졌었는데..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가까운 곳이라도 꼭 가시면 좋겠어요. 한번 가면 또 자꾸 가게 되니까..

2015-11-03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3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3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3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5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6 0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3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3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