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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ㅣ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평점 :
열여덟, 사소한 장난에도 까르르 웃던 단발머리 소녀시절부터 하루키를 읽었다. 뭘 알고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상실의 시대>부터 <어둠의 저편>까지 5년을 꼬박 읽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 시절, 저 모퉁이를 돌면 처음 보는 세계와 조우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나 거울 속의 내가 진짜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혼돈이고 방황이었다. 어떤 날은 읽을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워 일찌감치 책을 덮었고 어떤 날은 나의 실체와 만날 욕망에 몸서리치며 책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읽고자 하는 욕망을 멈출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세라쟈드의 유혹에 못 이기는 샤리아르 왕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엔 미흡한 표현력 때문에 하루키의 다른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얘기한다는 건 시도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금기처럼 여겨졌다. 흡인력은 대단하지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면 늘 막히고 마는 것이 내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루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가 창조한 세계 속에 나는 살았다. 5년 전 일이다. 이번엔 반드시 알고 싶었다. 표현하고도 싶었다. 목적은 단 하나. 그의 소설 속에 투입되는 쓸모없는 소품 말고 작품 바깥에서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똑똑한 말이 되고 싶었다. 바로 그거였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려는 욕망과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싶은 비평욕구가 충돌했다. 그를 처음 만난 후로 무려 열 살이나 더 자랐으니 못할 것도 없다. 어느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자신감 넘치는 독자가 되었다. 드디어 모든 페이지를 다 덮고 이 글을 쓴다.
굳이 고백하자면 <1Q84>를 읽는 긴 시간동안 내가 과연 어디에 존재했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아오마메와 덴고를 만난 시간이 진짜였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들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만나고 있으면서도 아직 만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실체와 관념이 뒤섞인 온갖 알레고리로 가득 찬 아이러니한 세계에 들어서는 일은 그저 신비롭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거기에 해석 같은 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것만으로도 하루키는 대단한 평가를 받아 마땅한 것이리라. 어쨌든 그의 새 소설은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의미에서 낯선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내가 자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는 세계와 존재하지 않는 모든 세계를 포함하는 우주 그 자체다. 비록 문학이지만 심리학, 사회학, 종교학, 철학, 역사학, 과학을 버물린 폭풍 같은 단 하나의 텍스트다. 초현실적 감각과 빨려들듯 선명한 이미지에 감탄했다.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펼칠 때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 모두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내 것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느낌만으로 충분하다. 어느새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긴장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는 나를 발견한다. 빠져들면 안 된다. 동화되어서도 안 된다. 나는 평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효과는 있었다. 적어도 나는, 아직은, 그 거대한 우주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신은 몇 개입니까? 도대체 수많은 당신 중에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입니까? 나는 스물일곱 개 존재합니다. 아니, 그건 년(年) 단위로 볼 때 얘기고, 만약 월(月) 단위로 본다면 나를 도대체 몇 개라고 해야 할지, 만약 일(日) 아니 시(時), 분(分), 초(秒)로 본다면 과연 내가 몇 개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나눈다면,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의 수로 나눈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머릿속 생각으로 나눈다면 과연 나는 몇 개가 될까요? 이것이 진실이다. 우린 아무도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타인을 만들어내고 교감하며 그 중 누군가를 통해 나를 정의하려 한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알았을까. 자신이 몇 개인지를, 어디까지가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를,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를. 세상에 그 사실을 아는 존재는 딱 하나다. 완벽한 존재, 초자연적 존재, 리틀 피플, 아니 신. 살아가는 동안은 절대로 진짜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아오마메와 덴고가 단 한 번이라도 같은 세상에 함께 존재했다고는 여길 수가 없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엾은 커플은 표면상으로만 보더라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데이트를 할 수도 없고, 껴안을 수도 없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다. 끊임없이 만나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만날 수 없다. 내가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각기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셀 수 없는 나들은 그저 각자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일을 할 뿐이다. 종교, 범죄, 성욕, 사랑, 고독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고 할 때 비로소 우린 알게 된다. 아무리 많은 것을 쥐고 있다한들, 우린 기본적으로 흔들리는 존재이지, 흔드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이동한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삶에서 죽음으로, 사랑에서 증오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선에서 악으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인간에서 신으로, 무엇에서 무엇이 아닌 것으로.
아오마메는 어린 시절 ‘증인회’에서 고립되었던 기억이, 덴고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냉랭한 대우가 오래도록 상처가 되어 남았다. 적어도 진짜라 믿는 세상에서 진짜의 모습을 한 그들은 남들과 같이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아오마메는 살인자, 덴고는 남의 작품을 리라이팅해 문학상을 조작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오마메와 덴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이 두 개인 세계에 있다. 달은 왜 두 개가 되었는가. 상처가 치유되는 지점이 열 살의 교실이라는 점에서 또는 리틀 피플이 택한 필연적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둘은 동일 기억을 공유하는 동일 인물일 수 있다. 그렇다면 리틀 피플은 뭐고 공기 번데기는 또 뭘까. 실체를 알 수 없으므로 끝없는 고민이 필요하다. 우린 누군가와 어떤 기억을 얼마나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방금 전의 현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거대한 저장고에 든 기억이 작가 박민규가 만든 냉장고에서 터져 나오기 전에는 카스테라의 모습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엉클어진 기억들의 존재와 부재를 누구도 제대로 생산해낼 수 없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악과 선, 현실과 환상, 실체와 관념, 죽음과 삶처럼 상반된 것들은 절대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간단한 공식이 파괴되는 순간 비극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나는 저 세계의 나와는 분명 다르다. 나의 본질은 그대로지만 새로운 세계에서의 실체 또한 그대로일 리 없다. 본질은 그대로인데 실체는 매번 달라진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본질 또한 흔들리게 된다. 내가 변한 것인지 세계가 변한 것인지 알 수 없어진다. 바로 그 때, 1Q84 시대가 도래 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가장 소중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후회의 상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중하지만 상처가 된 기억. 예를 들면 아오마메와 덴고가 서로에게 이끌렸으나 끝내 말할 수 없었던 사랑 같은 것. 덴고에게 연상의 걸프렌드와 후카에리가 아오마메에게 가는 길이었듯, 아오마메에게 있어 낯선 남자들과의 잠자리는 덴고를 향한 사랑이자 자신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때, 그는 과연 어느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까? 내가 너를 부를 때, 너는 무엇을 듣고 있을까? 전화를 하고, 목소리를 듣고, 보고 싶다는 말에 달려온다 해서 달려온 너를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그 때의 너라고 완전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하루키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서 늘 욕망의 밑바닥을 보여주었다. 욕망이 있으면 변형도 있다. 욕망은 속한 세상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뒤틀린다. 내 부모가 재벌이 아닌데 내가 재벌 2세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바로 지금 내가 안은 모든 욕망의 근원이 오로지 나에게만 있으란 법도 없다. 리틀 피플이 만들어낸 덴고의 공기번데기에 열 살의 아오마메가 들었듯 나의 공기번데기를 열면 나만 아는 나의 욕망이 들었음을 그 누구도 아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어느 누구와도 이어져 있으며 또한 누구와도 이어져 있지 않다. 나를 여러 개로 나눠야 하는 자체가 이미 부조리한 세상에 속해있는 증거다. 그것은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아는 세계와 모르는 세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우주 곳곳에 뿌려져 있는 모든 세상의 것들이 이미 나다. 그건 굳이 공기번데기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미 안다. 아오마메와 덴고에게서는 그저 존재의 본질을 배울 뿐이다.
나의 공기번데기와 그의 공기번데기에 같은 것이 든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모두를 존재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욕망, 기억, 추억 등이 모두 그렇다. <1Q84>는 사랑이야기가 아니지만 내가 알게 된 유일한 사실은 나의 눈, 코, 입, 팔, 다리, 가슴 같은 실체가 매순간의 시간과 보이지 않는 모든 공간에서 관념의 기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속에 이미 사랑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덴고는 아오마메를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하루키가 이대로 소설을 끝맺지는 않을 거라는 소식이 일단은 희망적이다. 대부분의 소설이 뒤로 갈수록 의문이 풀리는데 반해 <1Q84>는 불확실성과 비판을 감내해야 할 부분만 잔뜩 남겨두고 영 찝찝하게 끝났기 때문이다. 고마쓰와 연상의 걸프렌드의 부재, 아오마메와 덴고의 재회, 끊임없는 달 타령을 허용한다고 해도 평화를 지향하던 농업 코뮌 단체였던 ‘선구’가 종교단체로 변모한 과정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뜬금없다. 경험상 하루키가 다음 권을 쓴다고 해도 알레고리로 둘러싸인 모든 것들의 실체는 여전히 관념에 휩싸여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3권을 보고 싶은 마음은 그저 기대일지도 모르겠다. 읽는 내내 누가 툭 치면 금방이라도 이 세계의 내가 아닌 다른 세계의 내가 튀어나올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야 했다. 불바다가, 폭탄이 나를 삼켜버리지 않기를, 2009년에 사는 내가 200Q년으로 이동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이기를,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기를, 나의 모든 것은 언제나 내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막연한 느낌은 원래 하루키의 작품이 주는 선물이니 이번에도 고스란히 안고 가려 한다.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현재, 나와 또 다른 내가 또는 당신과 또 다른 당신이 서로 만나 이야기하고, 밥 먹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기를, 죽음이 아니라 삶이기를,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기를, 그래서 행복하기를. 성교로 인한 교접. 비록 짧았지만 어쩐지 그 초월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비약적인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