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편가르기'의 끝장판을 보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드라마 <패션왕> 얘기다. 웹툰은 못봤다. 스맛폰이 없고 아이팟은 이제 충전기가 생겨서 이제부터는 볼 수 있겠다. 아, 노트북으로는 하는 게 많아서 웹툰읽기까지는 안.. 생각해보니까 나는 그림을 못 그려서 글을 쓰나 보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 음악도 글로, 소설도 글로, 그림도 글로.. 아.. 진짜 비극이다. 하루아침에 서해번쩍 동해번쩍 하며 두 남자(두 회사)를 오가는 신세경(가영)이 무의식으로는 얼마나 자신과 싸우고 있을지,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이건 아닌가;;),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 '무엇' 위에 '무엇'을 둬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재밌기만 한 줄 알았는데(나는 사각관계 매니아;; <여인의 향기>도 김선아 아니었음 그래서 봤을 듯;;) 나도 모르게 심하게 감정이입해서 내 마음 속 깊은 바닥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불완전한 인격, 자존심, 자아성찰, 자아비판까지 뻗어나갈 생각은 없고 그저 나(우리)는 얼마나 쉽게 손바닥 뒤집으며 죄책감 없이 살아가나, 내 선택의 영원성은 어디까지인가 싶어서 내면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닥치지 않고서야 눈앞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중시하는 가치관에 더 다가갈 수는 있을 듯해서.
1. 신세경(가영)은 능력이 출중한(전문가에게 타고난 천재 디자이너란 평을 받는) 아마추어 패션 디자이너
2. 천애고아, 부모 원수 부띠끄에서 핍박 속 성장, 쫓겨난 후 숙식제공하는 동대문 봉제공장(유아인)에 디자이너 겸 잡부로 취직
3. 살던 부띠끄에서 간혹 마주치던 패션 대기업 이사(이제훈)와 가느다란 친분
4. 유아인은 가진 것 없이 갓 들어온 여직원 신세경에게 4년 미국유학 비행기표를 선뜻 내밀 만큼 따뜻한 남자
5. 우연한 친분을 가장해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부탁하러 갔던 이제훈은 짜증 내면서 도와줄 건 다 도와주는 고마운 남자
6. 뜻하지 않은 동거에 情 나누기까지, 밑바닥 인생은 밑바닥 인생을 알아보며 차곡차곡 서로의 신뢰를 쌓아감(신세경과 유아인)
7. 전 애인(유리)과 다시 시작했지만 능력 출중하고 의사표현 정확하면서도 순수한 신세경에게 끌리는 대기업 이사(이제훈)
+ 7번까지 쓰다가 내가 뭐하고 있나 싶었음
사랑의 작대기를 그어보려했지만 크게 의미는 없고,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신세경과 유아인에게서 사랑이 싹트는 중, 이제훈이 신세경을 좋아하는 중, 유리의 마음이 유아인에게 있어 보이고 신분상승욕구 때문에 이제훈을 포기 못하는 중 정도로 정리되는데 전형적인 청춘멜로가 맞구나. 말하다 보니까 이걸 왜 쓰나 싶어진다, 진짜. 표현도 못하고 포기도 못하는, 몸은 달았는데 마음은 못 헤아리는 사랑 앞의 아마추어들. 이들이 주인공이다. 두 남자는 한 여자를 서로 자기 곁에 두고 싶어 일을 빙자한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여자는 능력이 있으니 어딜 가더라도 성공은 보장되어 있는 셈인데, 두 남자는 여자가 자기 곁에 있어야 행복할 거라며 서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벌인다. 대기업 이사와 영세업 사장이라니 결과는 뻔해 보이는데도 늘 여자 때문에 번번이 한 쪽이 한 쪽을 끝장내지도 못한다. 인생은 내 것은 물론, 네 것 또한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어서(재물 가진 자가 재물 없는 자의 생계를 찍어누를 수도 있지만 이런 치사한 짓까지는 안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종종 한다, 여자를 얻어야 하니까, 남자에게 여자는 자존심일 뿐인가..) 네 명의 청춘의 꿈과 사랑은 시종일관 휘청거린다. 흔들흔들 언제 무너져내릴 지 모르는 건물 같아서 불안이 극에 치닫는다. 오늘 하나되면 내일 분열한다.
갈등이 극명하다. 가진 자/못 가진 자, 능력자/능력 미달자, 사랑하는 자/사랑받는 자, <힐링캠프>에 나와서 이효리가 자기에게는 '금'이 있는데 '쌀'을 가진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다던 그 마음. '쌀'도 없이 스물 한 살이 된 그녀에게는 아직 '금'은 보이지 않는 걸까. 매슬로의 '욕구단계설'도 아닌데 이건 좀 비약적 평가인가. 신세경은 재벌 2세 이사님(이제훈)이 아무리 구애해도 꿋꿋이 모르는 척 일관하면서(관심 자체가 없음) 가족 같은 사장님(유아인) 곁을 지킨다. 스카웃 제의도, 유학 제의도, 퍼스트 클래스도 모두 단박에 거절하는 용기가 가상할 만큼 사장님을 향한 의리(사랑)가 극명한데, 그럼에도 불안하고 두 남자는 괴롭다. 몸이 머무는 곳에 마음이 없고, 마음이 머무는 곳에 몸이 없으니 남자들은 내내 애닳아한다. 그녀가 떠날까봐, 데려오지 못할까봐. 흔들리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는 그녀에게 화내고 밀어내고 닦달하니 그녀 또한 '쌀'보다 '금'이 탐나는 순간이 없을까. 나가겠다는 마지막 말 앞에 사장님은 폭풍같은 눈물을 그제서야 흘리며 얘기한다. 우리는 끝까지 같이 가야하는 거 아니냐고. 그렇구나, 금과 쌀. 하물며 사장님은 한 번도 따뜻한 적 없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전기장판 깔린 이부자리를 내어주었고, 화장품 세트를 사서 내밀고, 태어나서 처음 미역국 생일만찬 아침을 만들어준다(위 사진). 신세경에게 유아인은 사장님이자 오빠고 가족이고 사랑이 되어버린 남자다. 먼저 입맞춤도 했고, 이불도 덮어주고, 사장님이 나 오해하는 거 제일 슬퍼요, 나 사장님 좋아하는데 사장님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술주정도 했다. 사장님이 다른 여자를 보고 웃으면 뒤에서 운다.
나는 '금'과 '쌀' 중에 무엇을 택해도 신세경의 선택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들은 자기가 보고/겪고/존재해온 한에서는 최대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주는 법이 틀렸다고 주는 마음을 탓할 수 없고(재벌남자 만날 일도 없지만 나는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된다거나 가정교육을 못 받아서 내 말에 꼬박꼬박 토다냐는 일상적 대사에 기절할 뻔;;), '쌀'을 선물한 사람(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에게 '금'을 주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 없다. 사랑이 확실했기 때문에 지금껏 그녀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늘 그(유아인)를 지키기 위해 뛰어다녔는데 그에게 오해 당하고 비난 당한다. 속상하다. 큰 욕심도 없다. 그런 그녀가 이제 떠나겠다고 선언하니 변한 것일까. 마음에서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났을까. 나는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바닥에서 위로 올라가야겠다는 욕구는 그야말로 본능 아닌가. 점점 헷갈리고 있었다. 비난하고 싶어졌다. 사랑은 의리가 아닌데, 사랑이 왜 의리로 지켜지면 안되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그게 그런 게 아니라는 대답만이 귓가를 맴돌고 있다.
'금'을 가진 남자는 능력을 타고난 여자를 가장 높은 곳까지 올려줄지 모른다. 내밀어진 두 손 앞에서 누구의 손을 잡고 뛸 것인지는 그녀의 선택이다. 그녀가 비난 당한다면 남자의 낙하산이 된 것, 능력을 시기하는 자들에게 받는 질투, 가진 것 없는 여자가 대기업 이사님을 욕심냈다는 정도. 사장님과 끝까지 함께 간다면 비극은 길어지겠지만 사랑도, 양심도, 인간성도 모두 보장받아 희망과 청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권력에의 욕구가 있다는 주장은 권력에 욕심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묵살하는 발언이다. '쌀'이 채워지면 '금'사냥에 나서는 것은 욕구의 본능이지만 신세경(가영)이 본능을 눌렀으면, 본능을 누르고 스스로 '금'을 얻었으면 하는 것은 청춘에 기대하는 마지막 희망이자 응원이다. '쌀'과 '쌀'이 만나도 언젠가 '금'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은 갖고 살고 싶다. 앞으로도 내가 펼치는 날개 안에서만 어떤 남자를 만나 사랑할 수 있다는 점을 (최근 미혼여자들 설문조사에서 자기 연봉 두 배 이상의 남자를 배우자로 맞이하고 싶다고 답한 비율이 절반이라는 점을 비판하며) 믿어의심치 않는다. 나도 여잔데 그런 조사는 대체 누굴 대상으로 하는지.
김치찌개백반 대신 날마다 스테이크를 썰게 해주는 남자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쌀'은 '쌀'을 만나고 '금'은 '금'을 만나지 않으면 인생이 꼬일 텐데. 적어도 '쌀'과 '쌀을 만나러 내려온 금'이어야 말이 통하지 않을까, 섞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금'(재물, 능력)이라고는 갖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세경(가영)은 나보다 못하게 살지만 능력 하나는 출중한데 나는 뭐, 이것도 저것도 없으니까 가만 보니까 이걸 쓰고있을만 한 위치가 못 되는군,하면서 급 꼬리내림.
그래도 생애 처음으로 그가 아침 일찍 일어나 만들어준 생일상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든 절대로 못 잊지 않을까. 드문드문 희미한 기억 속에서라도 가장 곧은 '양심'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스카이라운지에서 손쉽게 랍스타 사주는 남자보다 손수 미역국, 계란말이, 고기볶음 해주는 남자를 여자는 더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금수저 물고 태어난 어떤 남자보다 자기 손으로 금수저를 놓을 줄 아는 남자가 더 멋지다는 걸 요즈음 <패션왕>은 자꾸 깨닫게 해준다. 나는 금수저 물고 태어난 남자가 나 좋다고 죽어라 따라다니면서 구애하지 않으니(할 리도 없고) 한 '봄' 밤의 꿈일 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