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읽으면 안되는 책도 있는 법인데, 밤에 들어야 귀에 쏙 박히는 음악이 있는 것처럼 책도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이들이 있다. 어젯밤 잠들기 전 이병률 여행산문집을 읽었다. 중고샵 득템 3권으로 행운의 램프 응모티켓 두 장을 받아서 한 장은 꽝 되고, 한 장은 이 책, 당첨됐다. 당근 전자책. 하늘을 나는 파랑새 느낌으로. 글과 사진의 온도만큼이나 따사롭다. 평소 운으로 볼 때 두 장 다 꽝이어야 정상인데, 잠시 느끼되, 작든 크든 행운이든 행복이든 그런 건 계산하지 않아야 온다.
시인의 시를 모르는 상태에서 산문집만 두 권째, 첫 번째는 당연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독서하는 이, 안 하는 이 가리지 않고 모조리 읽었을, <끌림>이었다. 그 책을 개정판이 나오고 사서, 읽고는 아, 이런 책이었구나, 했었다. 나쁘지 않았지만, 별 느낌이 있지도 않았다. 마음을 뜨겁게 데워주는 책인 건 분명했지만, 전 대한민국 출판계가 들썩일, 끌림의 책은 아니었다. 아마, 처음이었기 때문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경향도 있었을테고, 뒤늦게 편입하면서 까고 싶은 묘한 심리의 기류가 흘렀을 게다.
그런데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깔끔하고, 찡하다. 전작보다 더 팔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듯한데, 인생의 대박은 단 한 번이다. 오는 행운을 잡기도 어렵지만, 유지는 더 힘들 것이다.
인도에서 라면 끓여먹기를 도와준 불가촉천민 가족들에게 찡했고, 아, 라면을 끓여먹어야 하나, 새벽 네 시에 심각하게 고민했고, 루마니아 택시기사는 고마웠으며, 절반 읽었을 뿐인데 여기저기서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을 받는다. 정신이 아찔해지고, 오던 잠이 달아나고, 여행을 더 많이 가지 못한 것보다 당신의 얘기를 더 깊이 들어주지 못한 게 미안해진다.
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좋다.
만나는 문장들을 마음에 새기고 간혹 꺼내보고 싶다. 남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아서, 아니면 경험이 없어서, 나는 글을 못쓰는 것일까. 시詩가 아니라 글을 쓰고싶은 것 뿐이잖아.
사람이 사람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건 사랑이 어디론가 숨어버려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걸 만지고 싶어서일 텐데. 그걸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만지고 싶을 걸 텐데. 갖자는 것도, 삼켜버리는 것도 아닌, 그냥 만지고 싶은 것.
몽마르뜨르 언덕에서 파리시내를 내려다보던 중, 시계視界를 가리던 어떤 커플. 여자의 키스에 절대 응답하지 않던 남자의 무표정. 먼저 등을 돌려 걸어가버리는 남자를 뒤따르는 여자의 쓸쓸함. 왜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는 거예요, 도대체. 나는 왜 발을 동동구르는 걸까.
단절이 찾아오고, 설령 마음을 거두어야겠다고, 헤어지기로 했다고 심장이 시켰을지라도 한쪽에서는 그 얼마나 갑자기 난데없을까.
이봐요, 남자님. 키스로 아침에 드신 빵맛이 좀 지워지면 안되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보다 누구를 사랑해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이 낫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불가능한 사랑이어서, 하면 안 되는 사랑일수록 그 사랑은 무서운 불꽃으로 연명하게 돼 있지 않은가.
그녀와 헤어지고 양파를 볶다가 짐을 쌌다는 한 사내의 고백은 그녀가 되고 싶어지도록 만드는 요술 같은 힘을 가진다. 불꽃.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순간이, 사랑하는 순간의 내밀한 공기가 좋다. 달콤함이 넘치는 과육의 과일마냥 싱그런 공기가 연인들의 주위를 감쌀 때, 세상이 환해지고 꽃이 만개하고 마침내 겨울이 봄으로 탈바꿈한다. 어제도 봤다. 만남과 이별 사이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어떤 커플을. 어떤 경우, 나는 사과를 깎아야 하나, 양파를 볶아야 하나, 마늘을 벗겨야 하나, 김치를 썰어야 하나, 나도 뭐 하나쯤 발명 아니 계발해두고 싶어졌다. 나만의 방법. 술 사랑하는 친구들이 청승맞다고 했던 것, 소주 병나발 같은 것. 나는 말했다. 병나발은 청승이고, 잔에 따르거나 섞어 소맥하면 청승이 아닌 거야? 그날은 소주가 달아서 홀짝홀짝 치킨과도, 파인애플 통조림과도, 즉석 김치찌개와도, 잘 어울렸다. 장을 봐온 것 외에도, 음식을 잘 하는 친구집에는 늘 맛있는 게 많다. 요리사인 아버님이 해놓으신 만찬, 요리해서 초대하길 좋아하는 친구가 만들어놓은 이것저것. 그리고 먼지도 많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혼자 술을 마시는 작업'은 내 색깔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색깔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너무 많은 색깔을 이해하려 했으므로, 고로 나는 시끄러웠으므로 나를 이루고 있는 색들을 쫓아내고보자는 셈인 것이다.
고민은 글로 발화한다. 계기도 있고 경험도 있고 주장도 있는데 아무도 모른다. 바람이 불어 당신이 좋다는 책의 절반을 더이상 글 없이 읽기로 했다. 생각만, 느낌만, 사유만, 정서만, 감동만 그리고 시간의 영롱함만. 그밖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들만을 곁에 둔 채로.
자신이 채워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공항에 가보면 된다. 공항에 앉아 미소 지을 일들이 떠오르거나 괜히 힘이 차오르는 사람이 있고, 한없이 자신이 초라해 보이거나 마음이 어두워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공항에 가지 않는 나에게 세상은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다. 세상의 경계에 서보지 않은 나에게, 세상은 아무것도 가져다줄 게 없다.
이런 말도 좋다. 특별히 사랑에 관련된 얘기들을 좋아하지 않아도, 사랑에 관한 메모에 늘 사로잡힌다.
그렇더라도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믿으려는 것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걸 못 견뎌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했다, 고 믿는 건 익숙함조차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는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이며 결국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그렇다고 사랑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사랑은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 사랑할 때의 행복을 밖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사람을 키운다. 애써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넘치는 상태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인용을 많이 하려고 이 페이퍼를 시작한 게 아닌데, 긁적긁적.
생각보다 얇아서 깜짝 놀랐다. 다섯권으로 굳이, 페이지도 적구만, 소장용으로는 짱이지만, 이라면서 마냥 좋아하기엔 야금야금 읽어도 너무 빨리 읽혀서 짜증난다. 곱씹어야 하나 생각해봤는데 시대도 한참 지났는데, 세상에 곱씹어야 할 책이 얼마나 많은데 싶어 또 짜증난다. 근데 책은 예뻐. 왜 계속 네거티브로 시작해서 반전놀이하지, 요즘.
출판사 의도가 막강한데다 디자인과 편집에도 공을 들였다는 걸 알겠다. 과연 팔릴까, 보다는 이번엔 얼마나 나갈까, 하는 기대로 집 한 채 올릴 각오하고 있을 하루키. 아, 이렇게 모아서 '다시' 찍는 책은 인세 안 벌어들입니까(일본한테 돈 주기 싫..), 그건 모르죠, 나는 작가가 아니라서. 한 권만 봐도 느낌이 왔다. 제목별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몰라도 비슷비슷하겠지. 그다지 푹 빠져서는 못 읽었다. 하루키 에세이는 스물 세 살 이전에 다 뗐다. 소설도 몇 권 남은 것 같아서 채우고 있는데 그래도 여전히 볼 게 남은 건 좋다. 문화개방으로 일본영화를 막 들여오던 때(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였던 걸로 기억한다)부터, 일본의 순수함을 무기로 내세운 히라이켄의 곡이 극장 가득 울려퍼지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심야로 보던 시절에 말이다. 십칠 세부터 이십 삼 세 사이랄까. 감수성이 말랑말랑해서 조금 이국적인 따스함만 보여줘도 혹했던 그때 이후, 나는 쭉, 하루키의 소설이 더 좋았다. 안 읽고, 덜 읽은 꼭지가 모였다고 해도, 소장용으로 짱이라고 해도 그런 거 안 통한다.
동네 맥주체인점이 막 들어서던 시절, 집에서 맥주 마시고 안주 만들고 하던 일반적 시절이 아니던 때에, 동거인 혹은 애인 혹은 배우자와 가까운 단골맥주집에서 바싹한 튀김과 한 잔, 간혹 재즈가 넘실대는 분위기 좋은 bar에서 또 한 잔, 어쩔 땐 진한 커피 한 잔, 돌아오는 길에 살짝 취기 도는 어두운 밤 길목에서 우연인 듯한 필연으로 갈 곳 잃어 헤매는 외로운 검은 고양이 한 마리 만나는 것. 애인에 의하면 그게 내가 한창 하루키에 미쳐있던 스물 몇 살 때 자주 재잘거리던 꿈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소박하게, 행복하게 살자고 했단다. 그애가 말했다. 맥주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왜 고양이를 만나야 하는데? 그냥 만나야 하니까 만나는 거지. 고양이도 외롭고 맥주 마신 나도 외롭고 골목길은 어둡고 마주잡은 손은 따스하니까. 그래서 눈물겨우니까.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말은 그애 더이상 하지 않았다. 이해했을 리가 없는데, 더 물을 게 있을텐데 말이 없어서 다음 말을 꽤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더 말이 없었다.
오래 전에 나온 책 개정판으로 사려면 좋으면서도 어쩐지 손해보는 느낌. 인플레이션에 비하면 가격은 저렴하지만, 이자 붙여 사는 기분이라 선호하진 않지만 오랜만에 중고샵 득템. 솔직히 중고샵에서 신간 건져도 막상 1000-2000원 차인데,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당최 알짜배기만 모아서 사게 두질 않으니까, 발견하자마자 결제를 서둘러야 하는데, 그게 싫다. 하지만 상태가 새 책만큼이나 좋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세네 번 정도 샀나, 중고라도 특별히 더 사진 않았다. 개인에게는 팔아봤지만 사보진 않았다. 책정리를 하다보니 새 책이 바랜 것 보다는 헌 책이나 중고책으로 샀던 때 묻은 책에서 책벌레가 많이 발생했다. 도서관에 가서 오래된 책을 빼들고 먼지 탁탁 털고 집에 가져오면 시커먼 종이 사이로 누런 책벌레 한 마리가 기어다니는데, 워낙 벌레에 예민해서 그게 잘 보여서 더 싫었다. 그러면 그 책을 이불이나 식탁이나 하는 데서는 들고 못 읽는다. 책벌레 떨어질까봐. 자연스럽게 헌책과는 멀어진다. 책에 중고 스티커가 붙어서 오는데, 이거 뗄 수 있으면(혹은 붙어 있으면) 다시 중고샵 넘겨도 됩니까! 왜 안됩니까! 책은 돌고돌아야 하는 법인데, 딱 한 번 사고 팔아야 한다는 법도 없잖아요. 스티커 있으면 안될 것 같은데 왜 스티커 붙여서 오는 겁니까!
그렇지, 나 작년에는 <섬>도 읽었고, <알제리 기행>을 반값에 샀지만, 다 못 읽고 어딘가에 방치된 상태로 또 1년. 잃어버린 1년. 날아간 1년. 책이 어딨는 지도 모르는 1년. 그런 책이 있었는지, 그런 책을 샀었다고? 할 1년. 내 1년. 나이 먹은 1년.
비밀인데, 나도 개척하고 싶은 곳 있었다. 내가 어른이 돼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만큼 컸을 때는 이미 미개척된 땅이라고는 없었다. 온 사방팔방 천지에 한국인이 있었고, 한국인이라는 이름의 발자국이, 도장이, 추억이 곳곳에 존재했다. 개척되어야 할 여행지라고는, 장소라고는, 무주지 아니면 무인도 말고는 없었다. 프로방스의 낯선 꽃마을, 루마니아 어느 시골마을, 네덜란드 코코아마을, 예멘의 구석구석, 지중해 한가운데, 모로코 항구, 인도와 네팔의 국경지대, 학교에 가기 위해 열흘 여정을 떠나야 하는 중국의 고산지대 아이들 등등등 누군가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알려지지 않은 곳이 없고, 상품화 되지 않은 곳이 없다. 텔레비전만 켜면 온갖 채널에서 알려진 곳, 덜 알려진 곳 할 것 없이 여행, 관광, 생활, 문화, 음식을 플롯으로 다룬다. 차라리 지겨울 지경이다. 그래도 걸어서 세계 속으로처럼 촌스런 플롯이 제일 좋지만. 최근에는 EBS 다큐 프라임이 좋아졌다. 어제도 몇 개 다운했는데 볼 시간이 없다. 이렇게 엉뚱한 짓 할 시간은 있어도 진득히 앉아 다큐 볼 시간은 없..없.. 만들어보겠다! 없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지중해와 카뮈 1호. 장 그르니에, 미셸 투르니에, 플로베르, 스탕달, 발자크 등 프랑스 문학 번역가이자 해설가 1호. 우린 그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 대상이 뭐가 됐든, 선각자가 되는 건, 처음이라는 건, 멋지고 황홀한 일. 그가 길을 낸 곳으로 따라걸을 환한 빛. 무대 위에 그가 있다. 한국문학사에 김윤식 교수가 있다면, 불문학사에 김현 교수와 김화영 교수가 있다. 이 책을 따라걷는 여정은, 지중해 기행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젊고 반짝이는 어느 한 시절을, 한 순간을 따라 걷는 길이다. 그의 영혼이 숨쉬는 과거로 돌아가, 내 젊음과 열망을 엿보는 일이다. 불살라야 하는 열정과 충격을 확인하는 일이다. 행복이 충격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당연한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행복은 하루키의 백일몽이 아니다. 노력과 열정과 행운이 한 지점에서 만나 발화하는 것이기도 할 터, 운이 좋았다. 그의 젊음을 불사른 지중해를 마주할 수 있어서.
얼마 전, 오래 앓던 지인이 지중해로 치유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크루즈를 타고 그리스와 터키를 한 달 넘게 순회하던 기간 중, 그녀는 인생을 바꿀 만한 일을 겪었고, 공부한 것이나 해오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렇게 꿈도 변했다. 그 와중에 함께할 짝도 만났고, 치유여행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았다면, 결코 스쳐지나고 말았을 인연이었다. 행복은, 충격이 맞는 것 같다.
여름이 가고 있고, 나는 또다른 책을 읽는 중, 이 페이퍼는 주절거림일 따름이다. 다시 보니, 책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 발췌조차 내게 맞춰진 맞춤페이퍼,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채택된 문장들, 다시 말해, 책에 대한 느낌 말고 정보는 맹세컨대, 하나도 없다. 책을 읽기를, 책정보는 책 속 어딘가 있겠지. 길을 잃지 말기를, 돌아나와야 다른 책으로 들어갈 수 있을테니.
그러니까, 늘, 매번, 항상, 언제나 그렇긴 하지만
나는 내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전혀 감도 안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