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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이야기 성서 - 가장 오래된 사랑의 기록
오정희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그녀는 평생에 걸쳐 성경읽기와 베껴쓰기를 하기로 했다는데 나는 간혹 그녀의 소설을 필사하려 끙끙대다 말았다. 대학 전까진 펜을 들고 뭘 끄적이는 걸 좋아하는 편에 속했지만 이제 하루하루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메모하기도 벅차다. 나는 별로 꼼꼼하거나 치열한 편도 아니어서 게다가 심한 다혈질이고, 이러니까 성격파탄자 같다.(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지금도 필사를 생각하며 책상 앞으로 불러오는 책은 <무진기행>과 <중국인 거리> 아니면 <유년의 뜰> 같은 작품. 습관이 되어버린 당연함들. 화려한 낮과 외로운 밤이 번갈아 계속되던 날들, 오정희의 <완구점 여인>과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이 심장을 훑고 지나던 그 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 소설가의 꿈을 되려 앗아가던, 내 안의 찌꺼기 한 톨을 마저 데려가던 어떤 상징들. 그녀들이 나의 뿌리였다. 바로 그때 사주에도 없는 소설가의 꿈을 버렸다.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던가. 오해마시라, 재능없음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혼자 싸우는 치열한 고독의 그림자를 내 인생에서 몰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공동체 작업에 더 매력을 느껴서 한때 PD나 극작가의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창작희곡을 척척 써내고 제 이름으로 연극을 올리는 동기를 간혹 부러워했다. 거기까지였다. 뛰쳐나가고 싶었다. 수사지휘권을 휘두르는 뒷전의 검사보다 일선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경찰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어느 고시합격자의 경찰 지원 인터뷰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정적인 것들을 깨부수고 싶었다.
소설가가 되지 못하는 것보다 그늘진 生과 외로운 삶이 더 두렵다. 詩를 읽을 때면 느껴지는 밑바닥을 헤매는 감성과 꼿꼿한 이성이 맞닿는 지점이 아프다. 다행히도 여지껏 소설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순간이 거의 없었다. 남의 좋은 문장을, 소설을, 궁극적으로는 글을 조우할 때마다 불행히도 내 것은 자꾸 더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글솜씨가 아니라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이 필요한 게 소설가라면 예선에서 탈락이었다. 바보들에게 둘러싸여 천재가 되기는 쉽지만, 천재들에게 둘러싸여 바보가 되기는 더 쉽다. 절망의 윗 단계 체념. 어떤 단어를 온갖 자존감으로 배우기도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순간. 꿈에서도 그런 순간이 다시 올까 두려워 나는 인터넷 서점 한 귀퉁이 프로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에 글을 쓰며 자위하는 것일까. 고개만 돌려도 나락으로 떨어질 이유가 충분한 이곳에서. 한 순간도 이곳이 위안이 된 적이 없었음을 내 마음은 알고 있다. 징글징글하게 의욕적이지 못하다. 글이 생계가 되지 못한 순간, 여기에 자존심을 실을 수는 없다. 남의 책에 대한 글을 하나 더 올릴 때마다 한 계단씩 추락한다. 가끔은 비참했다. 그때마다 읽지 않고 못 배기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글읽기도 중단했다.
고민은 없었다. 나는 글로 벌어먹고 살 일이 없을 것이고, 없게 할 것이므로. 쓰러져 잠들 때까지 드라마를 봤다. 쉽게 살고 있었다. 가을은 미드 새 시즌기란 걸 잊은 여름이 있었던가. 의학드라마 앞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플 지경이 되자, 질주가 중단됐고 비로소 정신이 들었고 책을 몇 권 주문했다. 내 손에 도착했을 때, 당장 성경책을 가져와 비슷한 장을 폈다.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를 읽을 때, 사무엘하 13장을 함께 읽었다. 공교롭게도 그즈음 읽던 책들은 대부분 성경구절을 안고 있었다. 나는 쉽게 사는 법과 어렵게 사는 법을 너무나 잘 알았다. 성경책은 미니사이즈였고 속엣 것은 더 작았다. 깨알 같은 글씨 속에는 큰 울림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문학보다 더 문학적이라는 구약은 길을 잃을 때마다 샘물 같았다. 거기서 이야기를 퍼올리거나 길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원전(성경도 어차피 누군가의 번역)과 해석서(이 책)를 비교하며 읽는 작업은 시간 뿐 아니라 능력 면에서도 어려운 일이지만, 먼 이야기는 잊었던 시공간에 다시 불을 지핀다. 마침내 2000년도 훨씬 전의 성스럽고 다채로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간다. 살라딘과 십자군의 그 이스라엘은 어찌나 다채롭고 버라이어티한지.
1.
하느님의 목소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충성이 대견한 아브라함의 일가만을 도피시킨 후 불태워지는 소돔은 언제봐도 카타르시스. 소돔이 실제로도 가능하다면 좋을 것이다. 잡다한 모든 것을 청소기 돌리듯 쓸어버리고, 구겨진 내장을 탈탈 털어 따사로운 햇볕에 말려 심장 옆으로 재배열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 남을 자는 누구일까. 세상이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넌더리가 난다. 나는 본능적으로 진화론자는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앞선다면 신을 믿지 말아야 할텐데, 나는 종교는 없지만 철저한 무신론자라고 칭하기 어려울 만큼 신이 이 세상을 내다보고 있을 거라 믿는 쪽이고, 신이 인간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도 여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세상은 너무나 살아내기가 힘들다. 창세기는 희망이자 구원이요, 탄생이자 소멸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자본주의가 뱉어놓은 모든 허상을 언제든 재반죽시킬 수 있는 발효덩어리 카스테라로 만들어 냉장고에 처박았고, 나는 그곳에 없으려 했다. 똑바로 볼 수도 없었고, 다시는 냉장고 문을 열려고도 하지 않았다. 버리는 일, 새로 만드는 일 모두 가진 것 이상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느님은 인간의 오만과 태만과 욕심과 불행을 거두기 위해 바벨탑을 저지하거나 노아의 방주를 닫거나 소돔을 몰락시켰다. 본인이 만든 어떤 것도 도자기 장인의 그것마냥 한 치의 어긋남을 보기 싫어하였다. 하지만 아벨을 죽인 카인을 용서하였다. 철저하지만 야박한 분은 아니었다. 형인 척 연기해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낸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 중 하나로 이집트의 총리 대신이 된 요셉으로 인해 태평성대를 누린다.
야곱과 요셉과 그 형제들 그리고 자손들까지 대대손손 자기네들의 문화를 번성시키며 살던 히브리인들은 400년이 흐르는 동안 대도시로 흩어져 이집트인들과 섞여 동화된다. 히브리인 요셉이 자기네 선조들을 기근에서 구해준 사실을 잊은 이집트인들은 자기네들의 땅과 일자리를 뺏는 히브리인들을 쫓아내기로 결심하고 자유와 독립을 빼앗은 다음 노예로 전락시킨다. 히브리인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버려졌다 구해진 한 아이는 힘이 세고 의협심 강한 파라오 딸의 양자가 되어 화려한 왕궁에서 자란다. 그의 이름은 모세. 이후 모세는 하느님의 충실한 신하가 되어 파라오에게 히브리인들에 대한 억압을 풀 것을 명하는 협상을 제안하지만 다섯 번의 재앙이 지나고 나일의 물이 홍해로 변할 때까지 이들의 갈등은 계속된다. 마침내 홍해를 건넌 히브리인들에게 황량한 땅과 굶주림은 오히려 비참하다. 하느님은 다시 먹을 것을 내릴 터이니 그날 먹을 양만 거두어들이라고 명한다. 먹을 것을 얻었으나 광야에서는 다른 유목민족의 침입을 피할 수가 없어, 치열한 전투가 계속된다. 야곱의 형 에사우의 아들인 엘리바즈가 얻은 아말렉의 후손으로 아말렉족이란 이름을 가진 자들이었다. 비로소 아말렉족을 무찌른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날 시나이 광야에 이른 이들은 모세가 나팔로 하느님을 불러낼 때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하느님 나라의 헌법 십계명을 받는다. 이들은 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수송아지로 모세의 형상을 만들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 박살내 이스라엘인들에게 마시게 한다. 이제 이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맹세한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어 기다린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주는 신이다.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상이 거스르는 죄를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사대까지 벌한다." (p.219)
이후 40년 간 모세가 숨을 놓을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주님과 친구처럼 마주 대하여 사귀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다.
2.
마태복음 1장은 다윗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시작한다. 나열하면 밤샌다. 성경책 펴서 소리내 읽은 적도 있는데 쓸데 없었다. 마지막만 빼놓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14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14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14대이다. (p.228)
다윗의 자손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를 받아들이란 천사의 말씀이 내려와 그렇게 한다. 그때 동방에서 온 세 사람의 박사가 헤로데 왕을 찾아와 그 사실을 알렸더니, 왕이 이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없애라 한다. 요셉은 다시 꿈을 찾아온 주님의 천사의 말대로 아기와 아내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한다. 헤로데가 죽은 후 요셉의 가족은 이스라엘로 돌아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에 자리 잡고 살았다. 현재 중동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팔레스티나'는 성서 속 위대한 사건들이 일어난 땅이다.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통로인 탓에 오랜 고난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예수는 기원 전 37년부터 팔레스티나 전체를 통치하던 헤로데 왕의 집권 말년, 아우구스토(카이사르)가 로마의 황제였을 때 탄생했다. 아우구스토가 죽고 아들 티베리오가 즉위한 후 서기 27~28년경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특사가 되어 나타난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부탁하고 그는 그렇게 한다.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다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며 자기를 따르라 하고, 시몬에게 아람어로 '게파'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것은 바위라는 뜻이고, 바위는 그리스어로 '페트로스'이다. 시몬은 그렇게 게파, 페트로스를 거쳐 '베드로'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자기를 따르라 했고, 이 제자들은 훗날 항상 예수님과 함께 살고 전도 활동에 참여하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게 된다. 예수님의 활약상은 가르침, 선포, 치유였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즉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그대로 갚아주라는 법은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 대왕이 편찬한 법전의 기본법으로서 '동태복수법' 혹은 '대당명제'라 칭하기도 한다. 구약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는 유다교의 율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쟁과 보복이 아닌 용서와 완전한 사랑을 최고의 선으로 두셨다. (p.256)
1) 화해하여라.
2) 극기하여라.
3)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4) 정직하여라.
5) 폭력을 포기하여라.
6)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크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은 험하여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생명의 길이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즉 의로움을 이룩하는 것이다.) (p.270)
으아, 내가 사랑하는 지드의 <좁은 문>에 나오는 구절이잖아.
마태오복음서의 산상설교는 반석 위에 집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집 짓는 사람들의 비유로 끝맺는다. 이어지는 마태복음은 정말로 지루하지만 예수님 나라의 윤리와 생활규범이자 율법이니,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주를 짜내는 기분으로 끝까지 읽는다. 세상에, 진짜 지루하다. 아홉 살, 열다섯 살 이후 교회 가본 적도 없지만 그것조차도 신앙이란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냥 친구/오빠(실제로 목사님 아들이었던 아홉살 때의 옆집오빠는 내 첫사랑이었다) 따라가 재미있게 노는 걸로 알았던 시절의 설교시간에는 이런 얘기들을 들었을 터, 옳은 얘기, 듣기 좋은 얘기도 반복해 들으면 지겹듯이 딱 그런 기분.
구약시대부터 단식은 속죄와 회개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이를 마땅치 않게 보았고, 온갖 질병과 고통과 절망에 빠져 모여드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열두 제자를 모아 능력을 주셨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파견하였다.
심판자 메시아, 구세주 메시아, 613가지나 되는 유대교의 율법계율에 짓눌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것을 황금률과 사랑의 계명으로 단순화시킴으로서 자신의 짐과 명에는 가볍다고 하였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에게 놀란 제자들이 묻자,
"너희는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였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뱃속을 거쳐 배설하게끔 되어 있지 않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즉,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과 같은 악한 생각들로,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고 악하게 만들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p.330)
라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스승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대답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행복하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p.336)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 할 것이다'의 상황에 맞닥뜨린 자신의 배반에 베드로는 슬퍼한다. 한갓 죄인으로 묶여 뭇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끌려가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은 후회와 비탄과 두려움, 죄책감과 슬픔으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받은 은돈을 성전 안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어 죽었다. 그 돈으로 산 옹기장이의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하겔다하마)'이라 불린다. 예수님에게 씌인 죄는 신성모독죄였다. 빌라도는 유다인들의 한목소리에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예수는 온갖 조롱과 멸시 속에 '유다인들의 왕 예수'라는 죄명이 붙여진 십자가에 못박혔다. 무덤 안의 예수님의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부활을 일러준다. 사흘 만에 무덤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성서를 요약하면 이런 글이 된다. [1]은 구약이고, [2]는 신약이다. 첫부분 외에는 내 말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별로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고, 특히 복음은 정말 종교인 아닌 내게는 쥐약이기도 한데, 착한 사람이 되기는 별로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예루살렘. 지금 이곳이 정확히 어딘지 알아볼 생각을 하기에도 지쳐있지만, 어제의 뉴스 속 가자지구는 정말로 단테의 지옥과 다름없었다. 단테를 제대로 읽은 건 아니지만, 우리는 왜 평범하게 학교 다니면서 제대로 된 집에 살면 안되냐는 여자아이의 말이 가슴에 박혀서일까, 어제 밤새도록 폭격맞고 있는 건물에서 옆 건물로 뛰어다니며 동생 구하겠다고 전전긍긍했더니, 하루가 다 피곤하다. 적어도 한 달, 길면 두 달에 걸친 이야기 성서 읽기는 여기서 막을 내린다. 다시 읽으라면 차라리 예루살렘 여행을 가는 편을 택하겠다. 테러와 폭격은 이후에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