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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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의 페스트에는 목적이 없다. 과정만 있다. 페스트는 뻥하고 터지는 폭발이 아니고 폭죽처럼 파티의 시작을 알리지도 못하며 지리한 페스트가 언제쯤 사라지나를 기다리다가는 평생토록 카뮈를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 없이 카뮈를 말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니, 역시 고꾸라지거나 완주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몇 번을 읽어도 쓰레기더미로 떨어져 함께 구르는 듯한 기분이라니, 게다가 쥐, 이 쥐는 또 어쩔 셈인가. 구역질이 참아지지 않는다. 쥐를 박멸한다 해서 페스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될 뿐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고 해야만 하는 것이 도처에 널렸다. 진퇴양난과 좌불안석을 체험하는 이런 독서. 나는 카뮈를 적잖게 읽었고 한때 하고 싶은 얘기를 제법 많이 구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어렵기만 하다. 카뮈를 평생에 걸쳐 보잘 것 없는 리뷰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려 다짐한 적도 있지만 구태함을 벗어날 길 없는 이 글을 시작으로 그 또한 깨질 것 같다. 당최 일관성 없는 결심과 계획이란 것은 언제쯤 완전히 털어낼 수 있을까. 이 순간에도 머리는 계획표를 짠다. 이런 내가 내게는 페스트 같다. 페스트는 질병이자 전염병이고 재앙이지만 카뮈가 쓴 <페스트>가 단지 전염성 질병에 그쳤다면, 그렇게만 읽힌다면 그의 작품이 이토록 유명할 까닭이 없다. <페스트>가 부조리와 실존문학의 타당성을 높게 획득하는 이유는 그것이 반복되는 인간사 속에서 갑작스레 닥친 불안이나 불행이 아니라 늘 존재하고 있다가 특정 계기로 인해 일촉즉발하여, 무통에서 고통까지 경계없이 넘나드는 비극의 소용돌이를 몰고오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한 번 휩싸이면 웬만해선 제 힘으로 벗어날 자구(自救)가 없는 소용돌이.

 

지구 최후의 날을 그리는 '인류 대재앙과 종말(화산폭발과 지진 등의 자연재해나 핵폭발이나 전쟁으로 인한 징조)'을 소재로 하는 여러 영화가 떠오른다. [나는 전설이다]를 본 후 비슷한 종류의 영화들에 영 흥미를 잃었지만 지구상 누구도 종말을 체험해본 적 없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들이 빚어내는 상상력은 가히 칭송할 만한 것이다. 사실 그런 소재의 영화들과 <페스트>에는 그리 큰 공통점이 없다. 모든 것이 사라져 폐허로 변한 세상의 길을 따라 아버지와 아들이 걸으며 나누는 대화와 주변 상황의 묘사로 이루어진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의 끝. 그 끝은 가봐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멈춰서 기다리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겪어야 알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페스트>의 페스트에는 아무 것도 명징한 것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온 구석진 구멍에서 쥐가 들끓고, 쥐가 죽어 나자빠져서 세상으로 기어나오고, 학습효과로 인해 페스트가 의심되고, 쥐의 것인 줄 알던 것이 인간의 것이 되고, 증상이 나타나 누군가 쓰러지고 죽어가는데 산 자들이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한다. 인간이 넘나들 수 없는 재앙 앞에 짐작으로 내려야 하는 결단은 덧없다. 누군가 죽어나가야 그를 통해 사태를 짐작할 뿐인 일의 증거를 잡는 일은 범죄가 발생해 신고전화를 받아야만 출동하는 지구대와 다를 게 없어보인다. 여기는 카뮈가 만들어낸 가상의 도시이면서 실제 알제리 오랑주의 주도,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오랑이다.

 

재앙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은 위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난, 절망, 전쟁과 질병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는 인간의 처절한 사투를 맛보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이 위험에 대처하는 의연한 자세가 눈물겹도록 생생하게 그려진다. 놀랍다. 늘 놀랍지만 인간의 질긴 생명력과 가지각색의 반응, 집단 안에서 행해지는 위안에는 어쩔 수 없이 감탄하게 된다. 의사인 리유는 아픈 아내를 다른 도시의 요양원으로 보내놓고 노모와 함께 지내며 갑작스런 위험군에 대처하려 한다. 의사로서의 임무와 인간으로서의 온정, 책임 등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리유의 친구 타루는 앞장서서 페스트를 퇴치하려는 인물로 페스트 실태조사와 민간 봉사대를 결성하는 행동파, 옛 연인의 그림자 속에서 글을 쓰며 시청에서 근무하는 그랑과 가난과 고립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랑과 리유의 도움으로 살아난 코타르, 취재차 들어왔다가 페스트로 인해 시(마을)가 고립되자 나가려고 안간힘 쓰는 도피주의자 랑베르, 신이 모든 것을 돌봐줄 거란 기도로 이 상황을 타계하려는 회피주의자 파놀루 신부 등 다양한 인물군상을 주목해볼 수 있다. 행동대장인 타루의 제안으로 설립된 보건대는 위기 대처방안이었지 극복방안일 수 없었다. 세상에 온 순서, 가진 재산, 직업과 지위 등에 굴하지 않고 찾아오는 페스트가 소멸될 즈음 타루를 찾아온 것만 봐도 이 재앙은 공평한 동시에 공평하지 않다.

 

위험에 대처하는 다양한 자세를 통해 인간군상의 다사다난을 엿볼 수 있다. 역상황까지 생겨난다. 가난으로 고립되어 고통받던 코타르에게 페스트의 상황은 싫지 않다. 모두가 겁먹고 허둥대는 세상에서는 자신의 가난과 무능력이 창피하지 않게 느껴진 것이다. 죄가 있어도 없어도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다시 살아난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던 이들에게는 페스트를 타개하려는 의지를 갖는 일보다 페스트를 없애줄 힘이 강한 자를 기다리는 일이 더 쉽다. 타루와 리유를 비롯한 이들이 힘을 합쳐 혈청개발에 성공하고서야 겨우 몰아내지만 정작 페스트가 자취를 감추려할 즈음 타루에게 찾아온 병마가 그를 데려가 버린다. 행동주의자, 도피주의자, 회피주의자의 최후는 각각 달랐지만 처음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던 이들의 대처가 시간이 흐르며 한결같이 대항주의로 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페스트가 인간의 원죄 혹은 신의 섭리라 믿고 기도만 하던 파놀루 신부나 도시를 나갈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랑베르에게서 인간이 고통을 초월해 재앙에 대항하려는 자의 자세를 본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박제되지 않는 능동주의적 성향을 갖는다. 설령 타루처럼 죽을 지라도 죽기 직전까지는 대항한다. 왜 살아있는가를 묻지 않으며 왜 대항해야 하는가 또한 설교하지 않는다. 부질없는 희망을 재촉하지도 않는다.

 

도시의 그토록 평화스럽고 무심한 고요를 보고 있노라면 그 무서운 전염병의 해묵은 이미지들은 손쉽게 지워져 버리는 것이었다. 페스트에 휩쓸려 새 한 마리 볼 수 없게 된 아테네, 말없이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만 가득한 중국의 도시들,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체들을 구덩이에 처넣고 있는 마르세유의 도형수들, 페스트의 광란하는 바람을 막기 위해 프로방스에 건설한 거대한 성벽, 자파와 그 도시의 끔찍스러운 거지들, 콘스탄티노플 병원의 진흙 바닥에 납작하게 깔린 채 썩어 가는 축축한 침상들, 흑사병이 창궐하는 동안 갈고리에 찍혀서 끌려 나가는 환자들, 마스크를 쓴 의사들의 카니발, 밀라노의 공동묘지에서 벌어진 산 사람들의 성교, 공포에 질린 런던 시의 시체 운반 수레들, 그리고 도처에서 항시 끊이지 않는 인간들의 비명으로 넘쳐 나는 밤과 낮.

 

페스트는 많은 것으로 대체 가능하다. 카뮈가 작품을 쓸 때 페스트의 상징은 프랑스를 전쟁의 광기로 몰아넣은 나치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다른 국가와는 달리 홀로 독립하지 못한 알제리는 '페스트로 인해 오랑시에 고립된 이들'의 신세와 같았다. 페스트는 13세기 말 유럽과 아시아 일부지역을 죽음의 소굴로 몰아넣은 전력을 가진 인류 종말의 상징이다. 그래서 전쟁과 가난과 광기와 병마 등 온갖 재해로 해석가능하며 '현상 자체'로 대치가능하다. 부딪치고 짓밟히면서도 피어나는 꽃처럼 역동적이되 달콤한 향기로 형상화하는 일종의 미화된 묘사는 단 한 군데도 없다. 다소 지루하게 반복되는 과정의 과정을 함께 겪어내야 한다. 오늘날처럼 발달한 시대에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전염병은 없다. 에이즈를 비롯한 유명한 전염병 몇을 막지 않는 건 못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이다. 그렇다면 가난과 반란, 폭동과 폭력, 전쟁은? 허무에 허우적대는 사람들과 절망에 빠져 희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페스트는 카뮈의 시대에도 저만큼이나 많은 끔찍함으로 세상을 농락했었다. 카뮈의 시대가 아닌 지금 현재, 페스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더 많은 종류의 페스트가 세상 이곳저곳에 골을 파고 들어앉았다. 쥐를 박멸하고 성벽을 쌓아올려 바람을 차단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시대가 되었고, 과학기술의 미흡으로 치부하려 했던 페스트의 존재는 더 강력하고 더 고약해졌다. 잔인함과 고통이 존재하는 한 카뮈 그리고 <페스트>는 또 읽힐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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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게 모든 것이 낯설다는 것을 고백할 것
    from 너의 의미 2013-08-14 16:17 
    열 개의 거울 뒤에 숨은 카뮈. 눈으로 읽고 이해함으로서 만나는 카뮈, 카뮈, 카뮈에 대한 모든 것들. 세계, 고통, 대지, 어머니, 사람들, 사막, 명예, 비참, 여름, 바다. 좋아하는 누군가를 알기 위한 방법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마흔 여섯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카뮈가 남긴 소설, 산문, 희곡, 철학적 에세이, 시평, 사적인 글 등 다양한 장르적 탐색은 김화영 선생님의 오랜 노고로 번역되어 있는 전집을 읽음으로서 가능할 수 있다. 그의
 
 
이진 2012-12-15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카톡에 이름도 없고 글도 안 쓰고 댓글도 그 어디에든 안 달고해서 걱정했잖아욧! 일단 너무 반갑다는 말부터~^^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아이리시스 2012-12-15 18:36   좋아요 0 | URL
절대 아무 일도 없어요. 지금 도토리묵에 새로 담근 김치 먹어요. 그냥 감기와 비염을 좀 달고 겨울잠을 잔 것 밖에는.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 몰랐어요(겨울곰이 하는 인터뷰)."

소이진님 저 카톡에는 원래 이름도 없고 글도 안 썼고 댓글도 안 달잖아요. 쳇쳇쳇. 관심이 없어진거예욧? 소이진님 누나한테 한 번 말 걸라고 했잖아요. 바보짓 해서 계정을 새로 등록하고부터 소이진님 없어서 심심해 죽겠어요. 얼른얼른 아이디 알려줘요^________________^

p.s. 사실은 카스토리도 없어져서 시루스님도 사라짐.(이런 누나라서 미안해요ㅠㅠ)

2012-12-15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6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12-16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은 카뮈의 팬이었죠? 전집을 읽고 싶었던 유일한 작가, 라고 언젠가 말했잖아요. 저는 이방인과 작가노트, 밖에 읽지 않았지만ㅠ 아이님이 언젠가 까뮈에 대해 써주시면 제가 열심히 읽을 마음은 충분히 있어요....라고 은근히 부담주고 싶어요ㅎㅎ

아이리시스 2012-12-17 23:36   좋아요 0 | URL
예를 들면, 하고 싶은 이야기, 추구하고 싶은 주제 같은 것들을 학생 때는 굉장히 많이 구한 것 같아요. 그때는 철학적 통찰 같은 것을 얻고 싶었거든요. 창작을 해야 하니까 빈곤한 독서력과 세계를 보는 눈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퇴폐와 소외, 불안의 이미지를 동경하기도 했던 것 같고요. 그걸 하려고 했던 작가나 사상가에게 끌렸던 것 같아요. 근데 샤이닝님은 그런 걸 기억하는 구나, 짱이야ㅋㄷㅋㄷ 저는 문학에 대한 탐구정신이 별로 없어서 아마 죽을 때까지 누구의 모든 것을 읽으려고 시도하는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읽기'가 목표라면 저보다 샤이닝님이 더 잘할 것 같고, 저는 그냥 <페스트> 읽었다고 자랑을ㅋㅋㅋ <열세 걸음>도 읽었는데 샤이닝님 페이퍼에 그 책 있었으니까 그 책 돼서 샤이닝님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추워서 다시 감기올 것 같아요, 흑흑.

맥거핀 2012-12-1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뮈의 페스트'라고 작가와 제목을 외우기만 하고 정작 작품을 읽지는 못했군요. 페스트라는 게 예전에는 정말 인류의 종말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위용이 거의 사라져버렸잖아요?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많은 것들도 언젠가는 별 것이 아닌 것이 되고, 인류도 또 그렇게 다음의 삶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뜬금없이 긍정적인 희망을 가져봅니다. 물론 또 동시에 부정적인 것은 그것을 극복하는 와중에서 전대의 역사가 되풀이한 어떤 끔찍한 일들 - 예를 들어 흑사병을 마녀들과 연관짓는 것과 같은 것들 - 을 우리가 또 우리 시대의 무엇인가를 극복하면서 분명히 되풀이할 것이라는 점이겠습니다만...

요즘같이 하 수상한 시대에 '쥐를 박멸'이라는 위험한 제목을 달면 안돼요..^^

아이리시스 2012-12-17 23:46   좋아요 0 | URL
저는 쥐를 박멸한다고 쓸 때에 한 번도 그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금 이게 뭐지 이런 기분이었다는. 마음에서 대통령님 갈아치운지 이미 오래ㅋㅋ 시국이 좋지 않았다면 제가 글을 엄청 잘 쓰면 쥐를 검색하면 카뮈가 튀어나올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음 제가 글을 그다지 잘 쓰지 못한 건 행운이랄까요. 의외로 되게되게 재밌고, 굉장히 지루한 설정에다 상황인데 절대 그렇지가 않거든요. 카뮈의 힘이죠. 그나저나 샤이닝님은 약속과 계획도 굉장히 잘 지키신다면서요? 저는 벌써 루소랑 프루스트였나, 묻지도 않으셨는데 혼자 말해놓고 뭐하는 짓. 맥거핀님 뵐 때마다 혼자 찌릿찌릿.

행여 내일 다시 끔찍해지더라도 지금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많은 것들이 언젠가는 별 것이 아니게 된다고 믿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요즘 희망을 말하면 뭔가 멍청하고 바보같고 얼간이 같은데도..
 
열세 걸음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0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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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피가 흐르는 날개를 끌며 일어섰다. 참새의 피가 너의 눈에 홍채를 한 겹 덧씌웠다. 햇빛은 핏빛으로 붉고, 참새는 황금 같았다. 피를 흘리고 금빛으로 반짝이고, 비둘기만큼이나 커다란 참새 한 마리가 너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오기 시작했다. 걸음마를 배우는 갓난아기처럼 걸음걸이가 휘청휘청 흔들렸다.

 

그것은 너를 향해 오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그리고 너희를 향해 오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이름이 귀에 도달했을 때 그가 모옌이고 중국작가라는 점에서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대항자가 하루키라서가 아니라 중국문학에 대해 뼛속 깊이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이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은 상태에서 간파할 수 있었다. 그동안 중국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작가(루쉰, 위화, 쑤퉁 등)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단 한 편의 작품을 읽었을 뿐이므로 모옌과 중국문학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섣부르고 어쭙잖은 오만에 불과한 허세라는 사실이 머지않아 들통날 게 뻔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모옌의 문장은 몽롱하고 아름다우며, 삶의 오욕을 곱디 고운 문장으로 바꾸어 토사물처럼 처절하게 내뱉을 줄 안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가 그런 것처럼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낯설고 새로운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체험을 한다. 석류꽃 향기와 알록달록한 색과 다양한 모양을 띤 분필들과 핏빛 성욕 그리고 망치로 정수리를 얻어 맞은 채 기절해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수많은 토끼들 아니, 구질구질한 악취를 풍기며 길바닥에 나뒹구는 피와 살점이 덜렁거리는 우리들. 깎아 도려내고 싶은 얼굴로 비열한 미소를 흘리며 간사한 언어로 바닥을 기는 세상의 모든 의욕들. 모옌이 그리는 <열세 걸음>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반죽음의 상태이다.

 

생(生)은 현실에 발을 딛고 옳다고 믿거나 여기는 가치를 고수하며 존재하되, 시간과 공간을 하염없이 옮겨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도 가능한 의지라는 특권을 갖고 났지만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정작 얼마없다. 대부분의 것이 사회 혹은 국가라는 틀 안에 갇히고 더 좁게는 가정이나 가족 안에 다시 한 번 갇힌다. 새장 안에 갇힌 존재.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 쇠창살 사이로 건네받는 분필(먹이)에 그저 감사해하며 살아가야 한다.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으로 치열한 사회주의 계급투쟁 아래 인민의 이득이 최고 목표이고, 국가의 이득이 곧 개인의 이득이라는 이념 아래 살아온 중국인민들의 삶도 다르지 않다. 체제와 이념이 어떻든 비단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반박할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당대(초고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수정은 2000년) 중국의 지식인은 제도적으로 국가체제에 의존하고 복종해야 했다. 교권이 완전히 무너진 사회에서 교사의 역할은 그저 국가대변인 아니면 새장에 갇힌 앵무새에 불과했다. 적은 봉급과 열악한 환경에 교육의 자유는 빼앗겼고 학생은 물론 교사 역시 대입의 압박에 시달렸다. 국가가 모든 것을 장악한 체제에서 개인의 혁명은 설 자리가 없었다. 스트레스와 과로로 교단에서 쓰러진 팡푸구이는 그간의 평판이나 그가 가졌던 생각과 생활에 전혀 구애받지 않은 채로 살아남은 이들의 입맛에 어울리도록 손질당한다. 그가 당국의 압박에 의한 과로와 스트레스로 죽었다고 발표함으로서 언론의 관심을 이끌어내 변화를 촉구하려는 관련자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누구에게도 진실을 캐낼 의무나 진심 따위는 없어도 된다. 얼마나 편리한 방식인가. 문제는 쓰러진 것이었을 뿐,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팡푸구이는 물리교사 장츠추가 되고, 장츠추는 교사를 그만두고 상인으로 내몰린다. 눈앞에서 빼앗긴 것을 복기할 여유조차 없는 이들의 화려한 몸부림은 그야말로 지옥에서의 발버둥과 다름없다. 양쪽 결과가 같단 걸 알면서 둘 중 하나를 강요하는 것을 선택권을 주는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죽은 줄 알았던 팡푸구이가 살아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는 현실과 환상의 전복은 <열세 걸음>의 정수라고 해도 좋다. 중국문학과 모옌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판이하게 뒤집는다. 이야기 안에 또다른 이야기가 여러 번 끼여들고, 화자와 청자가 뒤바뀌고, 시점이 들쭉날쭉한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죽은 자의 입으로 내는 소리는 흔적이 없어야 한다. 팡푸구이의 죽음 후 매일 밤 벽을 타고 들려오는 남편 잃은 투샤오잉의 절규는 죽은 자와 산 자 모두가 당하는 억압을 대변하는 속죄 드라마 한 편을 재연하는 것 같다. 사범대 러시아과의 예쁜 여대생이던 투샤오잉과 물리교사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이며 토끼고기통조림공장에서 토끼가죽을 벗기는 투샤오잉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팡푸구이가 죽어살 수밖에 없는 이유 아니 죽어살아야 하는 목적이 나온다. 인간은 고뇌를 통해 삶을 바로잡아가는 동물이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에 갇혀 던져주는 분필을 먹다가 내장과 뇌수가 흘러터져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짐승과 다름없이 그려진다. 아내와 아이들을 지척에 두고도 찾지 못하는 팡푸구이와 제 직업을 두고 장사를 해야 하는 장츠추 모두 불행하고, 투샤오잉과 리위찬 역시 그렇다. 순결한 욕망은 더러운 관음이 되어 흘러넘칠 때까지 질주한다. 비극은 반복되고 심해지며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망각의 강을 건넌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던 이들, 살 자유는 물론 죽을 자유도 없던 이들의 슬픈 모노드라마가 시작된다.

 

성적환희의 몽상은 비루한 상상의 나래가 되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더러운 것에 다가가고 싶고 만지고 싶게 하는 충동, 금지된 욕망 앞에서 자가당착적 모순에 시달리는 인물들의 고통 역시 모옌이 구사하는 특이한 서술형식과 민담과 전설을 적절하게 배치한 환상적 구성과 만나 또렷한 마력을 드러낸다. 만지기 싫은 현실을 눈으로 보고 싶은 이는 없다. 그건 참새의 열세 걸음 째를 굳이 보겠다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리석음과 무엇이 다른가. 바로 그것이 문학의 힘이다. 가혹하고 가차없는 현실의 비루함에 마술을 걸어 튀어나온 모습들로 궁극의 현재를 보여주는 모옌의 문체는 절망을 빛으로 바꾸고, 비극을 향해 역공을 퍼붓는다. 낯설고 신기한 기법이다. 이 마법은 속아넘기는 그런 같잖은 억지가 아니라 제자리에 놓인 것으로 재배열하여 재탄생시키는 또다른 황홀경의 재발견이다. 우린 굳이 마술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손뻗지 않고도 모든 환희와 쾌락, 고통을 체험함으로서 모옌의 문학적 세계로 깊숙이 들어간다. 걸어나오는 것은 자유이다. 살기 위해 했던 일이 곧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버린 과정을 읽는 일은 혹독하다. 파괴로서만 쾌락을 느끼고, 쾌락이 곧 살아있는 것이라 여겼던 두 부부. 팡푸구이와 투샤오잉, 장츠추와 리위찬의 엇갈리는 시선 속에서 탐하는 육체는 정신 속에서 더 탐스럽고 요물스러워진다. 약한 것은 밟고 강한 것에 따른다는 원칙 하에 진짜가 아닌 가짜로서의 삶을 강요당하는 이들의 끈적하고 질척한 과거의 성적유희는 주로 여자들의 것이다. 나란히 공산당 간부 왕 부시장에게 농락당했던 리위찬 모녀와 중국과 러시아 혼혈2세의 아맛빛 머리결을 가진 투샤오잉의 슬픈 미래는 연쇄적으로 부서져간다. 이들의 철로 끝에는 인민과 신성함의 대표 공장장의 향락에 바쳐진 재물이 되어 투신하는 투샤오잉이 있다.

 

혁명의 시대에는 눈물이 필요 없었다고 모옌은 서술하고 있다. 어차피 삶에서 죽음으로 걸어가는 인생이다. 사는 게 그럴 리 없듯 죽는 것 또한 뭐 그리 그토록 억울할 게 있을까. 그래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너무 오랫동안 서있는 일은 위험하다. 지옥문이 활짝 열려 두 팔을 벌린 채 빛과 그림자가 차례로 얼렁거리며 인도하는 몸짓은 인간다운 숨결로 싱그러운 꽃처럼 살고자 했던 이들에게 재앙이다. 누구도 들개들이 목을 물어뜯고 까마귀들이 오장육부를 끌어내고 개미떼가 백골로 만들어주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날짐승과 길짐승 사이 어디에도 몸을 놓지 못한 채 중간즈음에서 제 존재를 던져버리는 맹수 사육사만 해도 그렇다. 왜 불가능하겠는가. 살아서 제 거대함을 과시하던 시베리아 호랑이는 죽어서 뼈가 발려진 채 동물표본실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있는 '위안위안'과 '팡팡'은 맹수 사육사의 허울좋은 기세로 인육을 먹는다. 죽은 사람이 동물의 먹이가 되는 세상에 대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돈 앞에서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는 현실이 살아있는 자들을 내모는 방식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세상과 이 세상에 없는 이들의 영혼까지 비춘다. 살기 위해 제 존재를 없앤 팡푸구이 때문에 연쇄충돌로 불행해지는 투샤오잉과 그의 아이들, 장츠추와 리위찬 그리고 그의 아이들. 그들은 불행해도 괜찮은가. 사라지거나 지워버려도 좋은가. 소비에트 체제가 그랬듯 개인을 감싸줘야 할 유일한 조직체인 국가가 존속을 위해 개인의 자유의지와 행복을 억압하는 것. 그렇게 억압된 개인의 인격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마구 깨부수며 인민평등과 인민이득을 부르짖는 사회주의 체제는 단연 이념적 갈등에서만 오거나 비단 중국의 현재인 것만은 아니다. 가장 건드리기 싫은 구정물 속 비루함을 환상적인 마법으로 승화시켜 밑바닥까지 투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다가 울분처럼 내뱉어버리는 것. 모옌의 방식은 현실을 상키시키기에 충분하다.

 

추운 겨울 맨발로 내쫓긴 아이가 갈 곳은 어디일까. 동화라면 옷을 입히거나 돌아올 시간과 장소를 지정해주고 쫓는 게 미덕이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몰락하는 자에게 내미는 따스한 손은 없는 법이다. 한 번 추락한 순간 그들은 더 추운 곳, 더 더러운 곳, 더 비천한 곳, 더 질척이는 곳으로 내쫓기기만 한다. 마침내 혼란함과 황홀함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책을 덮으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망각의 강의 건넌 이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들이 선택한 순간 이미 끝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생생하게 확인하게 되어서이다. 희미한 기대나마 안고 있지 못하게 철저히 짓밟고 뭉개 더 멀리 보내버리는 게 미덕일까. 안일한 동정은 미덕보다 악덕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절뚝거리며 가버리는 절망을 보고 있어야 한다는 무력감 때문에 내내 괴롭다. 괴로움은 내 것이다. 문학은 위대하며 아름답다. 살아있는 자의 산 삶, 죽어있는 자의 죽은 삶은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산 자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죽은 자에게 산 자의 역할을 부담하게 하는 일은 비겁하다. 국가는 여전히 개인을 위해 존재하고,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 존재의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이념과 사상이 어떠하든, 개인 없는 국가란 무인도에서 왕 노릇하는 어리석은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엇이 다가오든 겁먹지 말자.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며, 각 개인의 의지와 주체성은 여전히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언젠가 쓰러질 걸 알면서도 기어코 달려가는 것이 인간. 모옌의 <열세 걸음>은 바로 그 지점에서 살아있음과 의지를 지닌 자존의 의미를 알려주는 동시에 멀리서 제 몸을 뽐내는 별처럼 걸어오는, 문학을 가장한 환호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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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3-01-1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이걸 왜 오픈으로 해두지 않았어요? 이 훌륭한 리뷰를.

아이리시스 2013-01-21 18:15   좋아요 0 | URL
땡큐땡큐(__) 한번 더.(__) 모옌이 새해 선물을 좀 크게 가져다줬죠. 모옌 만세! :D
 
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 - 시민 권력을 위한 불온한 정치사史 울도 담도 없는 세상 1
하워드 진 지음, 김민웅 옮김 / 일상이상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히친스에 이어 하워드 진도 이 세상에 없다. 안 계신다. 아이쿠. 하지만 이 글들을 모아볼 수 있을 유일한 근거는 하나 뿐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사망. 그런데 원서도 2012년 출간이다. 번역출간은 늦지 않았다. 마지막 글에서도 2년 이상 지난 셈인데 괜찮을까. 이런 책들은 왜 항상 아주 옛날 것까지 모아서 한꺼번에 출간되나. 30년 전 글이 여전히 힘을 가질 수 있나. 의문이 없던 건 아니나, 나올만 하니 나왔겠지 싶기도 하고, 지나간 일을 되짚어볼 근거도 충분해서 읽는다. 근 30년(1980-2010)에 걸쳐 한 잡지에 기고한 글을 이 분 살아생전 단 한 편도 읽지 않다가 작고 후 읽게 되는 무심함이라니, 이보다 더 아쉬울 수도, 이보다 더 수지타산 안나오는 일도 없을 것 같다. 가난한 조선소 노동자 출신이라는 프로필 속 한 줄이 다른 어떤 것보다 눈에 박힌다. 그도 주로 진보 지식인 입장에 있었기에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시민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촘스키와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정작 타계소식이나 접하고서 아, 그 사람, 하는 나는 역시 깨어있지 못한, 시사에 관심 제로인 젊은이였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는 게 있어야 하는데, 실천은커녕 이론적으로 제대로 알지 못하는 팩트의 정책들도 수없이 많다. 일단 1980년부터.

 

아, 이 정도면 이 책의 정체성을 잘 설명한 듯한데 덧붙이면, 왜 대통령들이 거짓말을 하는지 알려주는 책은 아니란 것이다. 나는 모르는 잡지 [The Progressive]

 

1980년대. 보스턴 대학의 학생들은 베트남 파병을 위한 모병에 반대하는 집회를 연다. 총장은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모병에는 눈을 감으면서 등록금이나 정규직 시위에는 학생과 교직원을 압박하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아무도 굴하지 않았고 탄압이 어마어마한 상황에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수없이 시도한 끝에 겨우 총장을 몰아낼 수 있었다. 모두 '평등'을 주장하고 '자유'를 주장하는 이가 한 사람 뿐이라도 그가 가진 권력의 파이가 더 크면 이미 굳어져버린 제도의 물살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옳고그름을 몰라서 바뀌지 않는 건 아니다. 한편 베트남 전쟁 때의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는 정부의 입맛에 맞게 변용되어 쓰였다. '소련이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행해지고 있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 합리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공산주의를 박멸해야 할 것으로 설정해 놓고 그걸 이유로 다른 나라에 폭탄을 투하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것'(p.40)에는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며, 베트남 전쟁 때와는 달리 니카라과 좌파 정부 때에는 여론몰이가 어렵게 된 국가의 입장을 예로 든다. 깨어있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시민 앞에 되먹지 않은 여론몰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명제를 보여줬다.

 

1990년대 민주화를 위한 연대는 신좌파 운동이란 이름으로 일어난다. 노조,농민,세입자,여성,인권 운동이란 이름으로 국제인권 문제에서 인종평등 문제까지 되짚는다. 올바른 말만 직설적으로 하는 편이어서 재밌다. 보스턴대 총장이었던 존 실버는 하워드 진이나 촘스키 같은 지식인을 두고 "학계의 우물에 독을 풀어넣는 자들"이라고도 했다. 우파들이 미국의 교육을 향해 내뱉는 비난 중에는 '토머스 하디의 문학작품과 함께 흑인 민권 운동가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읽기 전, 톨스토이와 루소의 글과 과테말라 원주민 리고베르타 멘추의 글을 읽기 전에 미국의 교육은 별 문제가 없었다'(p.61)라는 얘기가 있다. 하워드 진은 남부에서 일어난 흑인폭동의 과정에서 배우는 연대와 끈기의 결과에 빗대어 국제연대와 평등을 촉구한다. 이는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있는 내용이자 1948년 선포된 세계인권선언에도 포함된 내용이다.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을 묻어버리기 위해 토니 블레어와 함께 이라크를 폭격하고 있을 때 하워드 진에게 도착한 메일 한 통은 눈물겨웠다. 후세인 정권의 폭정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잃고 영국으로 피신했지만 바로 그 후세인을 저지하기 위해 가족들이 살고있는 땅에 폭격을 시작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지도자는 후세인과 다른 게 무엇이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대량살상무기에는 수많은 돈을 쓰면서 에이즈나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극을 아무렇지 않게 치부하는 것의 기만성은 하늘을 찌른지 오래되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는 분노하며 희생자들을 애도하면서 정작 군사비에 들어가는 돈을 쓰지 않기 위한 무기와 지뢰 금지, 제3세계 군사 정권 지도자 훈련에서 손을 떼는 일에는 무관심한 서방세계 지도자들을 비난한다. 코소보 분리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세르비아인들의 비인도적 처사를 묵인하는 미국의 입장을 체첸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을 때 벌인 러시아의 잔혹함을 묵인한 것과, 링컨 대통령이 남부 분리주의자들의 요구를 용납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으로 치부한 클린턴의 입장은 허용될 수 없는 수위였다. 현 코소보는 타국의 승인으로 독립한 상태이며, 여전히 세르비아와 러시아 등 몇몇 국가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코소보에 대한 무기 공급을 승인하며 제나라 이익만을 추구하는 미국의 행태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2000년대. '진퇴양난'을 의미하는 작전조항 <캐치-22>를 쓴 조지프 헬러의 작품 주인공 요사리안 대위는 폭격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보게들, 우리가 지금 폭격하려는 도시에는 그 어떤 군사목표물이나 철도, 산업도 없고 단지 사람들만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한가?"(p.108) 예술가들은 시,소설,노래,그림,연극으로 말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아버지들의 깃발], [진주만] 등 제2차 세계대전을 미화하는 전쟁영화와 책이 쏟아져 나온 시기는 대규모의 군사예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의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명분을 갖추어야 할 시점이었다. '전쟁의 대가들'이라는 밥 딜런의 노래가사, 마크 트웨인의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조지 버나드 쇼의 <바바라 소령>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애국주의가 만들어놓은 안개를 뚫고 진실을 볼 줄 아는 예술인이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디킨스, 톨스토이, 발자크, 스타인벡 등은 작품 속에서 가난한 자의 편을 든다. <컬러 퍼플>의 엘리스 워커, 마지 피어시, <작은 것들의 신>을 쓴 아룬다티 로이는 예술가로서 사회 운동가로 투쟁에 동참한 이들이다. 예술과 문화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떠들 필요가 없다. 이들의 목소리는 차라리 사회적 양심이다.

 

*

부시는 이란, 이라크,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고 있다고 지목했다. 미국은 안 그런가? 아프가니스탄 폭격에만 집중하고 무한정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에 파묻혀 지구적인 시장 체제의 희생자가 되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의 문제와 노동자들의 안전을 무시하는 주체가 바로 미국이다. 자국에 쏟아지는 비난-이윤을 앞세우는 기업 지배 시스템에 대한 주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기 때문에, 명목상 안전을 핑계로 군사비를 합리화하는 것도 미국이다. 베트남전과 걸프전, 대테러, 칠면조 사냥하듯 죽였던 이라크의 무고한 병사들과 민간인들, 착한 편이 나쁜 편에게 했던 더 나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한 원폭 투하. 전쟁은 언제나 무고한 이들을 죽인다. 여자와 아이들, 가난한 징집병들을.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인류의 생명이 평등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권의 세계화가 먼저다. 적의 죽음은 그저 숫자나 추상적인 표현으로 둔갑시키고 자기 쪽 피해만 이야기화 하는 것. 미라이 학살의 진상은 잔혹한 학살에 직접 가담한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기에 세상에 알려졌다. 이라크는 3류군사국에 중동에서도 높은 군사력을 가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반복된 전쟁과 긴 경제봉쇄로 이미 전락해버린 국가를 향해 아비규환격의 포탄을 퍼붓는 미국에서도 반전 운동과 정치적 반대자로서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정부의 권력은 결국 시민, 공무원, 군인, 언론인, 교사들이 복종해야만 유지된다. 터져나오는 각성과 반대의 목소리는 이미 권력이 붕괴되고 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미국의 부를 채워주는 핵잠수함이나 항공모함 보다는 의료혜택, 일자리, 교육, 육아, 쾌적한 주택, 깨끗한 환경 등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환경에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쓰이기를 원한다. 전쟁이 자기들을 안전하게 해줄 거라는 맹목적 믿음이 미국 시민들에게서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우리나라 사설/칼럼/주간지마저 거의 못 챙겨보는 나도 하워드 진이 기고하는 글을 제때 읽었다면 그에게 열광했을 것이다. 어렵지 않고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이고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 할 말을 전달하는 그의 칼럼이 흥미롭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해서 좋고, 특히 미국이 관여한 1980-2010년의 국제적 활약상들-전쟁과 테러에 대처하는 자세, 빈곤이나 인권문제를 대하는 방법 등-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 좋다.

 

커트 보니거트는 사람들에게 왜 힘들게 계속해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당신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당신이 관심 갖고 있는 것에 나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너무도 듣고 싶어 한다. 왜 그렇겠는가? 그런 생각과 느낌, 관심을 혼자서만 고독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증을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사실, 바로 이런 말을 전하기 위해 나는 글을 쓴다." 그러니까 커트 보니거트의 글을 읽는 전 세계의 무수한 이들은 '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만은 아니로구나.' 생각하게 된다. 작가로서 이 이상 중요한 성취가 어디 있겠는가? (p.256)

 

시민들의 저항과 요구가 없다면 정부는 진보적 조처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평화로운 세상,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주리라 기대한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1년도 채 되기 전 한 일이, 이전 대통령보다 더 많은 액수의 국방비를 허용하는 싸인을 한 것인 이상, 파키스탄을 미사일로 공격하는 일인 이상, 확인절차도 없이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무조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으로만 봐도 세계 도처에 널린 수많은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할 생각이 없음이 명백해보인다. 군사주의 강경파로 돌아선 힐러리 클린턴이나 금융자본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로렌스 섬머스를 골라 쓰는 이상, 오바마의 색다른 자유와 평화, 인권에 대해 기대하기란 어렵다. 비록 미국역사 속 수많은 희생과 시위 속에서 진보가 이루어짐으로서 노예 제도를 부인하는 수정 헌법 14조와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이 미국 시민임을 밝히는 14조,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15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제5도살장>의 커트 보니거트가 항상 인용하곤 했던 미국 사회주의자이자 유진 뎁스의 말을 쓰고 싶다.

 

"누군가가 착취당하는 하층계급이 있는 한, 나 자신도 그런 현실에 무관할 수 없다. 이 사회에 범죄가 있는 한, 나 자신 역시 그 범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양심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다면 나는 아무리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 해도 사실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p.109)

 

미국은 최초 흑인 대통령 재임을 선택하며 새로운 시대를 쓰고 있고, 우리도 곧 있을 대선을 위해 달려가고 있지만, 시대의 미래가 보여줄 희망적인 상징들이 상실되고 있는 것 같다. 라다크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오래된 미래라도 기대해야 할 판. 하워드 진의 유작이 된 이 책은 그야말로 진보적 입장-다 함께 잘 살자-에서 보는 미국 역사 자체였다. 주로 평화, 평등을 얘기하는, 아주 오래됐지만 여전히 답보중인 지구상의 오래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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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23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나 왔어요.
학예회를 고등학교 오니까 1박 2일로 하데요. 어제는 교내에서 먹거리 마당하고 강당에서 축제하고, 오늘은 전교생이 운동장에 우르르 모여서 놀이마당했어요. 둥글게 돌다가 부르는 수에 맞춰 짝 짓는 게임도 하고, OX 퀴즈도 했어요. 어제 쭈그려 앉아 카메라를 들고 동영상을 찍다가 망가지기 일보직전까지 가버린 팔과 다리가 욱신거려서 죽는 줄 알았지요. 허헛.
어쨌든, 가스펠 뭐가 궁금해요?... 나 모르는 거면 답 안해줄래요 ㅎㅎ

아이리시스 2012-11-23 19:42   좋아요 0 | URL
우왓, 학예회.. 우리때는 그런 거 안했는데요. 우린 그냥 학예전. 저는 사진부였어요. 그거 클럽활동으로 사진찍은 거 전시하는 거. 그런데 놀이마당은 진정한 축제잖아요. 뭐 세대는 흘러가고 학교도 변해가니까 소이진님은 좋겠다ㅋㅋㅋ

이렇게 공개적으로 묻지는 않을 거예요! 히히히

댈러웨이 2012-11-24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넋 놓고 읽어나가다가 토마스 하디에서 한번 깜짝 놀라서 넘어졌고, 커트 보니거트에서 한번 더 넘어졌어요. 일전에 소개해줬던 히친스에 대한 책도 매큐언때문에라도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워드 진, 이 책도 흥미롭겠어요. 뭐 어떻게 댓글을 달 수가 있는 페이퍼가 아닌데, 저는 꿋꿋하게. 하하하. 정말 잘 읽었어요. '모든 것을 시도해보다가'라는 아이님의 의견을 100프로 지지하면서. ^^

아이리시스 2012-11-24 17:44   좋아요 0 | URL
댓글 못보셨겠지만 앞엣것 지우고 다시. 그저께 새로 배송온 새이불 통돌이 세탁기에 빨다가 찢어져서 솜이 튀어나왔어요. 으히히. 히친스는 매큐언이랑, 하워드 진은 커트 보니거트, 아이리시스는 댈러웨이님이랑 친구가 맞고 평화와 평등은 우주의 진리예요. 이분이 미국비판을 다 하고나니까 저는 할 일이 없어서 토욜인데 그저 뒹굴거리는데 하필 화장실 들어간 시점에 택배가 와서 문을 디따 크게 두드려서 소리도 못지르고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없는 척했어요--;; 그책 제목이 말예요, <죽음이란 무엇인가>(그건 분명 책일테니까!)이거든요, 없는 척한 거 들켰을까요? 뮤직뱅크가 디따 큰 볼륨으로 티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거든요-_-;;

댈러웨이 2012-11-24 19:09   좋아요 0 | URL
어우 대체 몬 소리에요? --;

아이리시스 2012-11-24 19:21   좋아요 0 | URL
응? 새이불은 찢어지고 택배는 경비실로 갔고 저는 너무 졸려요ㅠ.ㅠ
댈러웨이님 뭐해요? 저는요, 장윤주 새앨범 듣고 있어요. 밥도 먹었어요. 토요일이 뭐 이래--;

2012-11-24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7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0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11-26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거 보면 사실 미국대통령 선거 같은 것은 '나쁜넘'과 '더나쁜넘' 사이에 누구를 선택하는 것인가, 같은 거라고 생각되기도 해요(무한도전에서 못생긴팀과 더못생긴팀으로 나누는 것처럼). 우리의 대통령 선거는 그렇지 않았으면 싶은데 돌아가는 양상을 보니 우리도 그닥 다를 건 없을 것 같고..아무튼 그래도 그로 인해 냉소에 빠지면 안되겠죠. 이분들이 죽기 직전까지 글을 쓰신 이유도 그렇게 되라고 쓰신 것도 아닐테고.

주말 내내 몸이 안좋았는데, 회복이 잘 안되네요. 건강 잘 챙기세요.^^

아이리시스 2012-11-27 01:04   좋아요 0 | URL
그렇잖아도 주말동안 제가 본 뉴스며 트윗멘션이며 때문에 삶이 피폐해졌어요. <터치>도 봤어요. 방금전 토론은 뭡니까. 자기편만 나와서 정해진대로 주고받는 것도 요즘은 토론이라 부릅니까. 무한도전은 백만년만에 지난주부터 다운로드를 해놨는데요. 어제는 티비 나른다고 하루종일 짐옮기고 청소한다고 시간이 없었어요ㅠ.ㅠ

아팠어요? 으아ㅠ.ㅠ 얼른 나으세요. 아프면 안돼요!!!

맥거핀 2012-11-27 23:45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서 이제 박도 문도 안도 왠지 지겨워요. 요즘 TV보면서 느끼는 건 정치평론가가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았나, 이 생각이 들어요.

걱정 감사, 몸은 상당히 좋아졌어요. (근데 TV는 잘 나오죠?)

아이리시스 2012-11-28 16:39   좋아요 0 | URL
어휴. 질렸어요, 아주! 4000만명이 정치평론가가 된 것 같던데. 그저 내 지지가 확고하니 반대편의 얘기도 귀담아들을 나이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해서 좀 알고 싶었어요. 근데 이건 뭐ㅠ.ㅠ

날이 추워서 정신줄 놓고 있으면 금방 병날 것 같아요. TV는 아직 소식을 못 들었는데요. 사실은 제가 든 것도 아니지만. 차에 실려갔으니 곧 운명이 결정될 것 같아요(TV의 운명이란!).

2012-12-04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9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1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4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쿠코츠키의 경우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7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이수연.이득재 옮김 / 들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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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볼셰비키-멘셰비키는 물론 러시아혁명사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 아예 없기 때문에 러시아 작품은 늘 멀리했다. 학교 때 착실하게 다른 과 문학수업을 듣지도 못한 결과이다. 내가 애살이 있었다면 철학과 문학수업들을 욕심내거나 그때 이미 웬만한 인문학 고전에 도달해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남달리 게으르고 미친 것마냥 신경이 딴 데로 가 있어서 그러지 못한 게 후회로 남는다. 그래서 러시아 소설 한 권에 이런 힘든 과정을 겪는다. 푸슈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체호프, 솔제니친과 파스테르나크 이후의 계보에나 낄 울리츠카야는 <소네치카>(1992)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세 편의 장편 중 2001년 러시아 부커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24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1990년 고르바초프의 냉전종식 정책으로 1991년 소련 해체. 1943년 태생인 그녀는 2차대전의 진행 중에 유년기를 보내면서 소비에트 체제하를 살았다.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의 고통이나 억압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강도높게 풍자되기도 하고,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소련 수용소 안 강제노동의 가혹함이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시대상황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작가 울리츠카야의 작품에서 소비에트 체제 하의 가족이 살아가는 법이 등장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가정의 일상이나 행복 보다는 국가의 이념에 충성해야 하는 소비에트 시대에 자유와 도덕 불감증에 시달리며 자기들만의 이성적 논리와 감성적 도덕으로 이 사회를 살아나가는 이들의 눈물겹고 따뜻한 이야기이다.

 

반소비에트적 성향을 가진 아버지 파벨을 중심으로 아내 엘레나와 그녀의 어머니뻘 바실리사, 딸 타냐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대표격인 청소부의 딸이자 타냐의 친구인 토마가 한집에 산다. 파벨과 엘레나의 만남, 파벨의 이념 혹은 신념, 톨스토이주의자였던 아버지와 함께 살던 시절에 대한 엘레나의 회상, 바실리사의 이야기나 토마의 사연 등 한 지붕 아래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각자의 시각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훑는다. 멀티카메라기법의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사회심리학적으로 인물을 고찰하는 생생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국가의 낙태금지법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사 파벨인데, 자칫 생명경시로 이어질 법한 일인데도 불구, 파벨의 주장을 경청한다면 이내 생각이 바뀌다가 곧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노동자로 남편 없이 아이 셋을 키우다가 바로 그 임신 때문에 피흘리며 죽어간 토마의 엄마는, 국가의 부주의와 무책임을 대변하는 훌륭한 예다. 최소한의 비용과 책임으로 최대한의 불행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엄마를 잃음으로서 남은 아이 셋은 오갈곳 없는 고아신세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낙태금지법은 계급이 낮은 여성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며 법을 고치기 위해 애쓴 파벨의 행동이 차츰 이해가 되었다. 엘레나는 남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결코 찬반론으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다. 낙태금지법에 인생이 저당잡히는 여자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누구나 윤리적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낙태를 권하거나 도우면 끌려가 고문 당하거나 죽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는 언제나 여자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다.

 

소설을 관통하는 두 가지의 윤리적 문제 중 다른 하나가 바로 자신의 딸이 아닌 타냐를 누구보다 예뻐하는 파벨의 부성이다. 타냐는 두 살 때 만난 아버지를 친아버지로 안다. 친구 토마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게 한 것도 이런 아버지의 풍부한 사랑 덕에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엄마처럼 되지 않으려 악착같이 타냐의 가정에 순응하려는 토마를 보면 안쓰럽다. 어린시절의 가난했던 기억과 임신 중 죽은 엄마로 때문에 사랑과 출산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식물에만 애정과 관심을 쏟는 토마는 꿈보다는 현실안주형의 인물일 수밖에 없다. 소비에트 체제에 순응해야만 하는 힘없는 계급의 표본이다. 의식주를 획득하는 일은 타냐의 집에 머물러야만 해결할 수 있는 그녀에게는 가장 어렵고 힘겨운 일이었을 테니까. 수용과 잔류를 향한 악착같은 발버둥은 이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연구실에 들어오는 조교나 조수를 대상으로 반복되어 오던 간소프스키의 만행은 이 사회의 실루엣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심지어 타냐의 처녀성마저 위협하는 걸로 끝장판에 도달한다. 이후부터는 파벨과 엘레나, 타냐와 골드베르그 형제, 바실리사, 토마, 연주자 세르게이의 삶을 향해 질주하는 독서가 시작된다. 죽지 않으면 살아야 한다. 생명이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는 순간까지. 가족의 진혼곡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죽은 자의 흔적과 산 자의 추억으로 가족의 연대는 계속된다.

 

억압과 불통으로 시대를 이어가던 소비에트 체제의 한 가족을 통해 울라츠카야는 가족이라는 의미를 새로 정립시키려 한다. 핏줄로 얽히지 않아도, 아픈 가족을 돌보면서도 끝내 지키려 했던 가치. 가족이라는 이름. 가족애. 사랑과 보호를 통해 세상 어디보다 따뜻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곳. 잃지 말아야 할, 잊혀지지 않아야 할 가치를 굳건하게 품을 수 있도록 돕는 곳. 생명윤리와 낙태찬반론, 유전학에 대한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묘사는 놀랄 만큼 정연하다. 실험동물들을 죄책감 없이 죽이며 거기서 원하는 것을 얻는 연구과정에서 충격받은 타냐가 학위와 연구 활동을 그만두고 방황하는 장면에는 공감한다. 우성유전과 열성유전에 관한 이론은 나중에 알아봐야겠다. 면역이 약해진 타나가 임신 중 감염으로 목숨을 잃은 후 파벨은 타냐의 딸 줴냐를 키운다. 파벨이 죽자 엘레나만 남는다. 줴냐가 아이를 낳는다. 세상은 묻지마 범죄가 성행하는 흉악한 도시가 된다.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다. 모든 것이 운에 달린 사회는 불안하다. 자유와 도덕은 모든 시대 모든 세대에 통용되는 가치이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넓고 복잡한 소설이 아니라 좁고 깊은 소설인 듯하다. 가족 개개인의 삶을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그중에는 파벨의 내면투시나 엘레나의 꿈 속 세상 같은 이상적인 세계관도 보인다. 이들은 소비에트 시대를 벗어나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영유하는 자유로운 가족으로 탈바꿈해나간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켜가야 할 가치는 여전히 죽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억압과 불통으로 인해 자유와 도덕이 부재하는 사회에서 가족이 가져야 할 의미에 대해 이토록 열정적으로 그려내는 작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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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이야기 성서 - 가장 오래된 사랑의 기록
오정희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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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평생에 걸쳐 성경읽기와 베껴쓰기를 하기로 했다는데 나는 간혹 그녀의 소설을 필사하려 끙끙대다 말았다. 대학 전까진 펜을 들고 뭘 끄적이는 걸 좋아하는 편에 속했지만 이제 하루하루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메모하기도 벅차다. 나는 별로 꼼꼼하거나 치열한 편도 아니어서 게다가 심한 다혈질이고, 이러니까 성격파탄자 같다.(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지금도 필사를 생각하며 책상 앞으로 불러오는 책은 <무진기행>과 <중국인 거리> 아니면 <유년의 뜰> 같은 작품. 습관이 되어버린 당연함들. 화려한 낮과 외로운 밤이 번갈아 계속되던 날들, 오정희의 <완구점 여인>과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이 심장을 훑고 지나던 그 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 소설가의 꿈을 되려 앗아가던, 내 안의 찌꺼기 한 톨을 마저 데려가던 어떤 상징들. 그녀들이 나의 뿌리였다. 바로 그때 사주에도 없는 소설가의 꿈을 버렸다.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던가. 오해마시라, 재능없음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혼자 싸우는 치열한 고독의 그림자를 내 인생에서 몰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공동체 작업에 더 매력을 느껴서 한때 PD나 극작가의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창작희곡을 척척 써내고 제 이름으로 연극을 올리는 동기를 간혹 부러워했다. 거기까지였다. 뛰쳐나가고 싶었다. 수사지휘권을 휘두르는 뒷전의 검사보다 일선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경찰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어느 고시합격자의 경찰 지원 인터뷰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정적인 것들을 깨부수고 싶었다.

 

소설가가 되지 못하는 것보다 그늘진 生과 외로운 삶이 더 두렵다. 詩를 읽을 때면 느껴지는 밑바닥을 헤매는 감성과 꼿꼿한 이성이 맞닿는 지점이 아프다. 다행히도 여지껏 소설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순간이 거의 없었다. 남의 좋은 문장을, 소설을, 궁극적으로는 글을 조우할 때마다 불행히도 내 것은 자꾸 더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글솜씨가 아니라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이 필요한 게 소설가라면 예선에서 탈락이었다. 바보들에게 둘러싸여 천재가 되기는 쉽지만, 천재들에게 둘러싸여 바보가 되기는 더 쉽다. 절망의 윗 단계 체념. 어떤 단어를 온갖 자존감으로 배우기도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순간. 꿈에서도 그런 순간이 다시 올까 두려워 나는 인터넷 서점 한 귀퉁이 프로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에 글을 쓰며 자위하는 것일까. 고개만 돌려도 나락으로 떨어질 이유가 충분한 이곳에서. 한 순간도 이곳이 위안이 된 적이 없었음을 내 마음은 알고 있다. 징글징글하게 의욕적이지 못하다. 글이 생계가 되지 못한 순간, 여기에 자존심을 실을 수는 없다. 남의 책에 대한 글을 하나 더 올릴 때마다 한 계단씩 추락한다. 가끔은 비참했다. 그때마다 읽지 않고 못 배기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글읽기도 중단했다.

 

고민은 없었다. 나는 글로 벌어먹고 살 일이 없을 것이고, 없게 할 것이므로. 쓰러져 잠들 때까지 드라마를 봤다. 쉽게 살고 있었다. 가을은 미드 새 시즌기란 걸 잊은 여름이 있었던가. 의학드라마 앞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플 지경이 되자, 질주가 중단됐고 비로소 정신이 들었고 책을 몇 권 주문했다. 내 손에 도착했을 때, 당장 성경책을 가져와 비슷한 장을 폈다.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를 읽을 때, 사무엘하 13장을 함께 읽었다. 공교롭게도 그즈음 읽던 책들은 대부분 성경구절을 안고 있었다. 나는 쉽게 사는 법과 어렵게 사는 법을 너무나 잘 알았다. 성경책은 미니사이즈였고 속엣 것은 더 작았다. 깨알 같은 글씨 속에는 큰 울림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문학보다 더 문학적이라는 구약은 길을 잃을 때마다 샘물 같았다. 거기서 이야기를 퍼올리거나 길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원전(성경도 어차피 누군가의 번역)과 해석서(이 책)를 비교하며 읽는 작업은 시간 뿐 아니라 능력 면에서도 어려운 일이지만, 먼 이야기는 잊었던 시공간에 다시 불을 지핀다. 마침내 2000년도 훨씬 전의 성스럽고 다채로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간다. 살라딘과 십자군의 그 이스라엘은 어찌나 다채롭고 버라이어티한지.

 

1.

하느님의 목소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충성이 대견한 아브라함의 일가만을 도피시킨 후 불태워지는 소돔은 언제봐도 카타르시스. 소돔이 실제로도 가능하다면 좋을 것이다. 잡다한 모든 것을 청소기 돌리듯 쓸어버리고, 구겨진 내장을 탈탈 털어 따사로운 햇볕에 말려 심장 옆으로 재배열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 남을 자는 누구일까. 세상이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넌더리가 난다. 나는 본능적으로 진화론자는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앞선다면 신을 믿지 말아야 할텐데, 나는 종교는 없지만 철저한 무신론자라고 칭하기 어려울 만큼 신이 이 세상을 내다보고 있을 거라 믿는 쪽이고, 신이 인간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도 여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세상은 너무나 살아내기가 힘들다. 창세기는 희망이자 구원이요, 탄생이자 소멸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자본주의가 뱉어놓은 모든 허상을 언제든 재반죽시킬 수 있는 발효덩어리 카스테라로 만들어 냉장고에 처박았고, 나는 그곳에 없으려 했다. 똑바로 볼 수도 없었고, 다시는 냉장고 문을 열려고도 하지 않았다. 버리는 일, 새로 만드는 일 모두 가진 것 이상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느님은 인간의 오만과 태만과 욕심과 불행을 거두기 위해 바벨탑을 저지하거나 노아의 방주를 닫거나 소돔을 몰락시켰다. 본인이 만든 어떤 것도 도자기 장인의 그것마냥 한 치의 어긋남을 보기 싫어하였다. 하지만 아벨을 죽인 카인을 용서하였다. 철저하지만 야박한 분은 아니었다. 형인 척 연기해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낸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 중 하나로 이집트의 총리 대신이 된 요셉으로 인해 태평성대를 누린다.

 

야곱과 요셉과 그 형제들 그리고 자손들까지 대대손손 자기네들의 문화를 번성시키며 살던 히브리인들은 400년이 흐르는 동안 대도시로 흩어져 이집트인들과 섞여 동화된다. 히브리인 요셉이 자기네 선조들을 기근에서 구해준 사실을 잊은 이집트인들은 자기네들의 땅과 일자리를 뺏는 히브리인들을 쫓아내기로 결심하고 자유와 독립을 빼앗은 다음 노예로 전락시킨다. 히브리인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버려졌다 구해진 한 아이는 힘이 세고 의협심 강한 파라오 딸의 양자가 되어 화려한 왕궁에서 자란다. 그의 이름은 모세. 이후 모세는 하느님의 충실한 신하가 되어 파라오에게 히브리인들에 대한 억압을 풀 것을 명하는 협상을 제안하지만 다섯 번의 재앙이 지나고 나일의 물이 홍해로 변할 때까지 이들의 갈등은 계속된다. 마침내 홍해를 건넌 히브리인들에게 황량한 땅과 굶주림은 오히려 비참하다. 하느님은 다시 먹을 것을 내릴 터이니 그날 먹을 양만 거두어들이라고 명한다. 먹을 것을 얻었으나 광야에서는 다른 유목민족의 침입을 피할 수가 없어, 치열한 전투가 계속된다. 야곱의 형 에사우의 아들인 엘리바즈가 얻은 아말렉의 후손으로 아말렉족이란 이름을 가진 자들이었다. 비로소 아말렉족을 무찌른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날 시나이 광야에 이른 이들은 모세가 나팔로 하느님을 불러낼 때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하느님 나라의 헌법 십계명을 받는다. 이들은 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수송아지로 모세의 형상을 만들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 박살내 이스라엘인들에게 마시게 한다. 이제 이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맹세한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어 기다린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주는 신이다.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상이 거스르는 죄를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사대까지 벌한다." (p.219)

 

이후 40년 간 모세가 숨을 놓을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주님과 친구처럼 마주 대하여 사귀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다.

 

2.

마태복음 1장은 다윗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시작한다. 나열하면 밤샌다. 성경책 펴서 소리내 읽은 적도 있는데 쓸데 없었다. 마지막만 빼놓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14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14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14대이다. (p.228)

 

다윗의 자손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를 받아들이란 천사의 말씀이 내려와 그렇게 한다. 그때 동방에서 온 세 사람의 박사가 헤로데 왕을 찾아와 그 사실을 알렸더니, 왕이 이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없애라 한다. 요셉은 다시 꿈을 찾아온 주님의 천사의 말대로 아기와 아내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한다. 헤로데가 죽은 후 요셉의 가족은 이스라엘로 돌아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에 자리 잡고 살았다. 현재 중동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팔레스티나'는 성서 속 위대한 사건들이 일어난 땅이다.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통로인 탓에 오랜 고난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예수는 기원 전 37년부터 팔레스티나 전체를 통치하던 헤로데 왕의 집권 말년, 아우구스토(카이사르)가 로마의 황제였을 때 탄생했다. 아우구스토가 죽고 아들 티베리오가 즉위한 후 서기 27~28년경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특사가 되어 나타난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부탁하고 그는 그렇게 한다.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다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며 자기를 따르라 하고, 시몬에게 아람어로 '게파'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것은 바위라는 뜻이고, 바위는 그리스어로 '페트로스'이다. 시몬은 그렇게 게파, 페트로스를 거쳐 '베드로'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자기를 따르라 했고, 이 제자들은 훗날 항상 예수님과 함께 살고 전도 활동에 참여하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게 된다. 예수님의 활약상은 가르침, 선포, 치유였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즉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그대로 갚아주라는 법은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 대왕이 편찬한 법전의 기본법으로서 '동태복수법' 혹은 '대당명제'라 칭하기도 한다. 구약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는 유다교의 율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쟁과 보복이 아닌 용서와 완전한 사랑을 최고의 선으로 두셨다. (p.256)

 

1) 화해하여라.

2) 극기하여라.

3)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4) 정직하여라.

5) 폭력을 포기하여라.

6)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크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은 험하여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생명의 길이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즉 의로움을 이룩하는 것이다.) (p.270)

 

으아, 내가 사랑하는 지드의 <좁은 문>에 나오는 구절이잖아.

 

마태오복음서의 산상설교는 반석 위에 집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집 짓는 사람들의 비유로 끝맺는다. 이어지는 마태복음은 정말로 지루하지만 예수님 나라의 윤리와 생활규범이자 율법이니,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주를 짜내는 기분으로 끝까지 읽는다. 세상에, 진짜 지루하다. 아홉 살, 열다섯 살 이후 교회 가본 적도 없지만 그것조차도 신앙이란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냥 친구/오빠(실제로 목사님 아들이었던 아홉살 때의 옆집오빠는 내 첫사랑이었다) 따라가 재미있게 노는 걸로 알았던 시절의 설교시간에는 이런 얘기들을 들었을 터, 옳은 얘기, 듣기 좋은 얘기도 반복해 들으면 지겹듯이 딱 그런 기분.

 

구약시대부터 단식은 속죄와 회개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이를 마땅치 않게 보았고, 온갖 질병과 고통과 절망에 빠져 모여드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열두 제자를 모아 능력을 주셨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파견하였다.

 

심판자 메시아, 구세주 메시아, 613가지나 되는 유대교의 율법계율에 짓눌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것을 황금률과 사랑의 계명으로 단순화시킴으로서 자신의 짐과 명에는 가볍다고 하였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에게 놀란 제자들이 묻자,

 

"너희는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였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뱃속을 거쳐 배설하게끔 되어 있지 않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즉,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과 같은 악한 생각들로,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고 악하게 만들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p.330)

 

라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스승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대답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행복하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p.336)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 할 것이다'의 상황에 맞닥뜨린 자신의 배반에 베드로는 슬퍼한다. 한갓 죄인으로 묶여 뭇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끌려가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은 후회와 비탄과 두려움, 죄책감과 슬픔으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받은 은돈을 성전 안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어 죽었다. 그 돈으로 산 옹기장이의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하겔다하마)'이라 불린다. 예수님에게 씌인 죄는 신성모독죄였다. 빌라도는 유다인들의 한목소리에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예수는 온갖 조롱과 멸시 속에 '유다인들의 왕 예수'라는 죄명이 붙여진 십자가에 못박혔다. 무덤 안의 예수님의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부활을 일러준다. 사흘 만에 무덤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성서를 요약하면 이런 글이 된다. [1]은 구약이고, [2]는 신약이다. 첫부분 외에는 내 말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별로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고, 특히 복음은 정말 종교인 아닌 내게는 쥐약이기도 한데, 착한 사람이 되기는 별로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예루살렘. 지금 이곳이 정확히 어딘지 알아볼 생각을 하기에도 지쳐있지만, 어제의 뉴스 속 가자지구는 정말로 단테의 지옥과 다름없었다. 단테를 제대로 읽은 건 아니지만, 우리는 왜 평범하게 학교 다니면서 제대로 된 집에 살면 안되냐는 여자아이의 말이 가슴에 박혀서일까, 어제 밤새도록 폭격맞고 있는 건물에서 옆 건물로 뛰어다니며 동생 구하겠다고 전전긍긍했더니, 하루가 다 피곤하다. 적어도 한 달, 길면 두 달에 걸친 이야기 성서 읽기는 여기서 막을 내린다. 다시 읽으라면 차라리 예루살렘 여행을 가는 편을 택하겠다. 테러와 폭격은 이후에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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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0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2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1 0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1 0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2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2-11-2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정희 작가님께서 평생을 걸쳐 성경읽기와 필사를 하셨군요. 몰랐었는데, 알고나니 오정희 작가님이 더욱 좋아져요. 이 글 정말정말 좋아요. 정말. 지금 영화 보는 중에 잠깐 들른 거라 영화 다 끝나면 더 자세히 읽고 더 자세히 평 남겨야 겠어요. 영화 끝나자마자 북어처럼 퀭하게 침대로 직행할 지는 미지수이지만요. 나는, 드림걸즈 봅니다~

아이리시스 2012-11-22 19:34   좋아요 0 | URL
드림걸즈는 명작이죠! 좋아하는 영화예요. 소이진님은 벌써 오정희 작가님도 좋아하고 김영애 배우님도 좋아하고 이런 이런 조숙한 문학소년이 내 곁에 있다니!!!

얼른 와요, 리쓰은~~~~~~~~~~~~~ 아엠얼론애러크롯로드~~~~~~~~~~~~~~~ 불러줘요!!!

2012-11-21 0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2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11-21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차리고 읽어보려다가 아무래도 상태가 좋을 때 읽어봐야 할 글인듯 해서 인사만 전하고 가요. 잘 타이밍을 놓쳐서 이러고 있는데, 이제 자기는 해야겠죠?

맥거핀 2012-11-21 15:55   좋아요 0 | URL
정신이 그다지 맑지는 않았지만, 읽었어요. 구약과 신약을 이렇게 간단하게 줄이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죠. 저는 성경을 볼 때마다(뭐 거의 보지 않지만), 어떤 질문들이 떠올라서 읽기가 힘들어요. 읽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게 무슨 의미일까를 되묻고는 하지요. 성경을 죽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보면 여러가지로 대단하다 싶어요(빈정대는 게 아니라).

그래도 글쓰기를 멈추지 마세요.^^

아이리시스 2012-11-22 19:46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은 잘 타이밍을 놓치고 저 시간에 주무심 대체로 몇 시까지 주무십니까?(궁금)

쓴 저보다 남이 쓴 글을, 이렇게 긴 글을 읽는 분이 더 대단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시간도 좀 남고 여유도 좀 있고 저든 책이든 이야기에든 관심이 있어야 읽힐 거라고 생각을 해보니까요.. 구약까지만 쓰고 올리려고 했는데 뒷부분도 써야겠다는 이상한 오기로 썼더니 이렇게 되었고 요즘은 다시 핵심리뷰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게 될까요? 이 글들은 타인보다는 나를 먼저 만족시켜야 하는데 저는 책을 통해(뒤에 숨어) 저를 쓰고 있어서, 제게 무슨 핵심이 있을까 싶어요.

이 글들이 훗날 제 영감의 원천이 되어줄 거예요! (작가로서가 아니라도)

루쉰P 2012-11-2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아이리시스님 제대로 된 성경 읽으시는데요. 후후후 어려워요. 어려워. 저 같은 무신론자에게는 ㅋㅋ 근데 전 아인슈타인의 말은 참 좋아해요. 신은 믿지 않으나 인간이 모르는 우주의 법칙은 있다.고 물론 여기서 신은 인격신이겠죠. ^^ 저도 신은 믿지 않으나 뭐랄까 우연도 그렇고 뭔가 내가 모르는 법칙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전 그래서 항상 중력을 거스른다는 마음으로 역주행을 노리고 있죠. ㅋㅋ
근데요 아이리시스님 글을 이렇게 잘 쓰시고 하시는데 소설가에 대한 꿈을 멈추셨다는 거, 물론 거기에 본인의 이유가 있으시겠지만 지금처럼 쓰시면서 나아가시면 좋지 않을까요? 본격적으로 쓰겠다고 하니까, 더 못 쓰는 것이 소설인 것 같아요. 힘 내세요. 아이리시스님.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구요!!

아이리시스 2012-11-22 19:50   좋아요 0 | URL
루쉰님 이 글에 오시니까 정말로 교주님 같아요. 그나저나 아인슈타인의 말은 제 맘과 같아요. 저는 신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당신을 믿습니다..이런 건 아니지만 이렇게 생겨먹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삭막해서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어요..정도는 투정하며 살아야겠어요. 중력을 거스른다는 마음이 멋져요. 제가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뭐든 되려고 애써볼게요!!!

2012-11-21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2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2-11-2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정희 작가라는 분을 소이진님 방에서 처음 접했었는데, <중국인 거리> 저도 읽어볼 거에요. 저도 필사할 거에요. (응?) 성서 얘기는 머리 아파서 안 읽었어요. 우리 식구들이 들려주는 얘기만으로도 충분해요 그건. --; 아, 1번 시작되기 전의 글은 잘 읽었어요, 아이님.

아이리시스 2012-11-22 20:01   좋아요 0 | URL
1번까지는 최선을 다해 썼고 2번은 이해를 잘 못했어요. 쓰긴 했는데 읽힐 거란 생각도 못했어요. 로마제국으로 다시 되돌아가 독서를 해야겠다 그 정도의 생각만 하고 덮었는데 진짜 두 달이나 읽었네요(씨익). 저는 주위에 독실한 신자분이 없는데 윗집 아주머니는 여호와의 증인이세요!! 필사는 원래 문체를 닮고 싶어서 하는 거라 그랬는데요, 저는 문체를 남의 문체로 바꿀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학교다닐 때 문체를 오롯이 공부하고 싶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베껴쓰라고 배웠는데요. 일단은 오정희 작가님이 단편치고는 현대적인 문체에다 이상가는 여류작가가 드물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누가 추천해줬어요.

댈러웨이님은 몇 시에 주무세요? (시차를 깨닫고나서 생긴 궁금증;;)

댈러웨이 2012-11-23 10:36   좋아요 0 | URL
열두 시, 한 시, 두 시, 세 시. 대중 없어요. 컨디션이나 다음 날 상황에 따라. 성향은 새벽형을 지향하는 야행성. ^^

아이리시스 2012-11-23 19:5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구나. 그러면 얼른 와요!! 와요!!

Shining 2012-11-22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어머. 제가 매번 놀랍다고만 하고 좋다고는 안 했죠, 아이님(그렇다고 여지껏 다른 글이 좋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아이님의 글은 대단하군_-b 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는 말입니다!). 이 글 정말 좋네요.

사실 댈러웨이님과 비슷합니다만ㅎㅎ 성서 얘기는 속독한 편이고 1번, 시작되기 전 프롤로그 글이 참 좋아요. 적확하면서도 영민한 느낌. 좋습니다그려d-_-b (원숭이 아니고! 투 썸즈 업, 입니다ㅋ)

2012-11-2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11-22 20:09   좋아요 0 | URL
저는 계속 좋다고 말한 게 진짜 좋아서 한 건데 듣는 샤이닝님이 이런 기분인지 몰랐어요(으쓱). 요즘은 정말 좋은 글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리뷰로서, 문학으로서, 인문서로서, 칼럼으로서. 한동안 숲을 보는 리뷰를 쓰고 싶었던 것 같은데 다시 보니까 '나 이거 다 안다' 느낌이라서 재수없어요(응?). 모든 것을 시도해보다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한 번 보고 싶은데 그걸 다 참아주려면 이웃분들이 고생스럽겠다..그런 생각을 했어요(요즘 심심해서;;).

Have a good time!!!

댈러웨이 2012-11-23 10:33   좋아요 0 | URL
쫌 고생스럽긴 해요. --; 뭐 그치만 예쁘게 봐주고 있는 거에요. =333==3333333333

아이리시스 2012-11-23 19:59   좋아요 0 | URL
원래 한 번씩 자발적 주관평가를 해줘야 하거든요. 지금은 평가중-_-;
예쁘게 봐주세요(꾸벅). ㅎ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