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계 미국 수학자이자 지도와 해도 일반 의미론의 아버지 알프레드 코르집스키(Alfred Korzybski)는 '지도는 땅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덧붙여 '모든 지도는 추정이자, 일반화이자, 해석'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프로이트, 메스머, 코헛이 세계 각국의 과학자, 음악가, 정치가, 작가 들을 만나 나눈 대화를 기록한, 가상 심리 상담 방식으로 정신분석학의 역사를 쉽게 서술한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다>의 한 구절에서 접한 후 아이디어 수첩 한 귀퉁이에 적었다. 본래 많이 넓게 넣기만 좋아하지 깊이 파거나 되새김질하는 건 나중 일이라 알츠하이머 환자 마냥 메모 행위 자체를 잊는 초(超).반(反).기억력을 소유하고 있어 정작 제일 중요한 순서대로 잊기 시작하는데 리뷰는 적어도 읽은 책을 기억한다고 기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언제나 옳다. 리뷰는 해석일 뿐 공상은 아니다. 한 달 내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생각(idea)은 글(text)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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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자마자 서해바다로 떠나면 더없이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하고 글로 옮긴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순간 섬광이 일듯, 그 빠르고 정직한 흩어짐의 미학과 철학적 억측이라니 조금 아득하고 애탄다. 사실은 증발되고 기억은 왜곡된다. 시간은 덧입혀지고 장소는 희미하게 빛바랜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그때 내가 거기에 존재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물음 앞에 사진, 대화, 기억은 부질없다. 그래서 추억이라는 포장지와 고통과 상처를 숨길 마음의 서랍이 주어진 걸까. 중앙에 닿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의 황망함이란. 어쩌지 못해 허둥대다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의 허무함이란. 나만 보는 것도 위험하지만 아무도 못 보는 건 더 큰 문제가 된다. 읽는 동안만은 적어도 타인이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을 후각으로 전한다. 바다, 흙, 꽃과 나무, 병원, 문어와 대하, 숨겨진 절, 계부, 지하 룸살롱의 퀴퀴함, 비췻빛 도자기, 기러기 아빠, 불륜, 약속, 권태, 첫경험, 갈구, 열망, 절망, 고독.
더불어 충청도. 서해. 통영. 배 위. 바다 한가운데. 풍덩 빠져죽어도 좋을 것.
나는 내 삶에 있어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세계에서 멀어져 어딘가에 격리돼 있던 시간들을. 언제 어디서 나는 잃어버렸던 세계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만 까마득한 심정이 되어 나는 듯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중략)
애초부터 나는 그들과 만날 수 없는 지점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라는 새삼스런 의혹이 독사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도자기 박물관>, 문어와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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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법한 일이고 있었던 일이다. 삶과 독서를 부연하기 싫은 날들이 많았다. 비루하고 구차한 삶도 지면이나 스크린을 통하면 반짝인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난 그냥 책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관심있게 살피는 이야기는 결코 내것일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될 이야기들이지만, 편안한 자세로 이불 속에서 주억거리며 읽기에는 죄의식과 괴리감이 가득찰 수밖에 없는 사변적(思辨的)인 구석이 있다. 이야기가 재미나 흥미로 소비되는 시대. 픽션으로서의 사회문제는 처절함이 희석된다. 상황이 심각하면 할수록 가공한 이야기보다는 논픽션이 힘을 갖는다. 홀로 진실을 대할 용기도 잘못을 바로잡을 힘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가 소비형태로 전환되는 추세도 자극에 자극을 유도해온 것에 대한 부작용인 것 같다.
철썩같이 믿었던 사고(思考)의 비체계는 불특정다수에게 찾아오는 어떤 불합리로 증명된다. 가까스로 나를 피해간 불운이나 재앙을 통해 삶이 모두에게 공평하지는 않다고 인지한 순간 불운하면 불운할수록 이야기는 나와 멀어진다. 이란이 닥친 문제라는 점에서 제 위치를 상정할 수 있을 <나의 몫>에서 모든 잔인은 바깥으로 밀려나온다. 수도 테헤란과 지방 도시의 대비는 두드러지고, 공동체 사회 내에서조차도 서로가 가진 관습과 문물의 격차를 좁히지 못한다. 체제를 타도하고 의식을 전환시켜야 하는 혁명이 옅지만 붉게 한복판을 관통한다. 과도기이긴 해도 여전히 여성탄압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반복으로 익숙해진 불행은 더이상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보수적 사회, 무슬림 가정 하에서 어머니와 딸에게만 묵살된 자유의 의미는 남성의 그림자라는 뜻이다. 짐승이나 노예의 것과 다를 게 없다. 히잡과 차도르는 여성을 굴복시키고 더러 남자를 절대자(神)로 통용시킨다. 적은 사람들의 바꾸기 위한 절박함과 여러 사람들이 지키려는 굳건함과 또다른 무엇.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리 쉽게 달라지지도 유지되지도, 옳지도 그르지도 않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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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인생의 대부분 동안 엄마가 아니었다. 그전에는 '다이너'에 불과했다. 임신하고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 신분이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규정되지 않고, 얼마나 별 것 아닌지 몰랐다. (대디 러브, p.45)
쇼핑몰에서 순간적으로 아이 손을 놓는다. 순식간에 아이는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엄마는 필사적으로 차 꽁무니에 매달렸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다. 하지만 아들을 잃어버린다. <대디 러브>는 여느 범죄문학처럼 고통과 복수, 범인찾기에는 관심이 없다. 유괴가 두려운 건 아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이미 죽었으리란 절망의 무한반복 때문이다. 기대와 절망은 교차되고 그때마다 부모는 세상이 끝나버리는 고통을 겪지만 누구도 그 심정을 다 알지 못한다. 소중한 것을 잃어본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애닳는 심정이 생생하고 압도적이다. 몇몇 문장은 놀랍도록 인간 본성의 핵심을 찌른다. 다섯 살 꼬마가 잔인하게 학대당하며 느꼈을 공포가 전해진다. 어떤 공포는 죽음과 맞먹기도 한다. 다섯 살 남자아이는 엄마 아빠는 네가 미워서 새아빠에게 입양보냈다는 말에 세뇌당한다. 열한 살로 커가는 동안 남아있는 기억은 거의 없다. 왜곡되고 뒤틀리고 새로 쓰여진다. 같은 장면이 반복되지만 미묘하게 달라지는 처음의 몇 챕터는 시나리오처럼 상황을 펼쳐놓는다. 과정에 비하면 결말은 덜 중요하다. 애초 범인을 잡고 범죄이유를 캐는 게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오직 이 순간 뿐. 주제의식의 강렬함이 의문과 논란을 불식시킨다. 우리 모두 제대로 겪지 않은 일에 대해 얼만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 말은 결국 허공을 맴돌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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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을 겪어도 대처는 누구나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다. 타인이 내린 판단을 나의 기준으로 재단하거나 윽박질러서는 안된다. 프리모 레비에게서 여전히 아우슈비츠나 홀로코스트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건 이 독특하고도 대단한 영역을 구축한 작가를 전부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작품을 다 읽지 않았으면서 안다는 선입견을 가진 것도 사실상 그가 가진 이력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우슈비츠에서 나와 화학자로서 공장관리자로 일하며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만약 운명이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경이로운 순간들을 제외하면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은(불행히도 그건 소수의 특권이다) 지상의 행복에 구체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다가가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리이다. 그 무한한 영역, 직업의 영역, 간단히 말해 일상적인 일의 영역은 남극 대륙보다 덜 알려져 있다. 바로 그것에 가장 적게 가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더욱 많이 말하고 더욱 요란하게 말하는데, 슬프고도 신비로운 현상이다. 직업을 찬양하기 위해 공식적인 의례에서는 교활한 수사학이 동원되는데, 그것은 냉소적으로 칭찬이나 메달이 임금 이상보다 훨씬 비용이 적게 들고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고찰을 토대로 한다. (멍키스패너, pp.120-121)
이렇게 소설이 되다니 놀랍다. 나는 장비에도 공구에도 무지하지만 제 몸을 움직여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에게는 일에 관한 한, 직업(돈벌이) 이상의 어떤 철학이 있음을 믿는다. 조립공 파우소네는 한곳에 머무르는 걸 싫어해 다양한 작업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국경 넘는 건 다반사인데다 항구, 철탑, 다리, 석유 시추 작업장 등 현장을 누비며 책상에 앉아 종이서류와 씨름하는 직업군에서는 알지 못하는 기쁨을 맛본다.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한낱 노동으로 하찮게 취급하는 시대를 잔잔한 슬픔이 섞인 대항으로 애통해한다. 일의 특성상 공사가 끝나면 헤어져야 하지만 그래서 매순간이 소중하다는 걸 아는 그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몽상가이자 모험가다.
일에 대한 철학과 위트, 성실의 의미는 돈의 기계가 되어버린 일벌레들에게 매혹과 감동을 주며, 효율과 합리에 매몰된 편리와 속도에 반기를 든다. 당연하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일은 종요롭다. 노동자는 도구가 아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이 제일 아름답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은 그 다음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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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저 최고가 되려는 게 아니다. 가장 높이 올라가서 아무도 나에게 닿을 수 없게 만들고 싶다. 나는 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도달해야 할 곳에 가고 싶을 뿐이다. 당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면 당신의 모든 것은 곧 유일한 것이 된다." (세상을 버리기로 한 날 밤)
영화라면 잔잔하고 가슴 찡한 작품이 됐겠다. 짧지만 난데없이 쏟아지는 벼락같은 이야기는 또렷하게 손에 잡히지 않아도 감동이 차오르는 판타지다. 영원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영원하리라 믿는 것들에 대한 간절함으로 가득차 있다. 다른 사람의 전 생애를 파노라마처럼 보는 능력을 가진 남자는 공항, 기차역, 여행가방, 호텔, 공연 음악, 신뢰, 영혼, 열망, 긴장, 그리움, 호기심, 목욕물, 베이비 파우더에서 풍기는 엄마의 미소를 연상(聯想)시킨다. 누군가의 처음과 마지막을 볼 수 있는 묘한 불공평 앞에 불행과 행운이 번갈아 감지되고, 그 강렬한 가능성이 현실과 비현실, 꿈과 열망을 오가며 그를 지구라는 행성의 중심으로 옮겨놓기 위해 애쓴다. SF나 판타지 장르에 가두지 말고 바깥 행성으로 밀려난 남자를 다시 행성 안으로 들이기까지의 소동들을 기록한 일지로 읽으면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마침내 삶의 중심으로 되돌아온다. 그에게는 여전히 잃어버린 것보다 앞으로 잃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 다음 행성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 행성에서 태어난 이유가 반드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난다. 만나지 않아야 사람은 결코 만나지 않는다. 가장 소중한 것은 버린다고 버려지는 게 아니다. 긴 인생에서 단 한 번이면 괜찮을 소중한 하룻밤. 안녕.
그는 당신이 얼마나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 몇 개의 눈빛과 호흡, 몸짓, 혹은 미소를 지니고 있는지, 심지어 그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알아챌 수 있는 재주를 타고났다. 또 다른 능력 중 하나는 주변 사람들을 비롯해 좋아하는 사람들과 겸손, 행복, 성실, 사랑, 그리고 삶을 나눌 줄 안다는 것이다. 그는 매 순간 적절한 언어를 구사하고 알맞은 표정을 지을 줄 안다. 한마디로 매혹적이고 놀라운 사람이다. (세상을 버리기로 한 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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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강아지는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었다. 까만 어미의 새끼도 아닌데 아주 까맣고 보드라운 털과 반짝이는 눈을 가져서 오가는 사람들마다 감탄사를 숨기지 못한 채 쓰다듬었다. 잘 보이는 곳에 데려다놔도 자꾸 구석으로 숨어들던 수줍음 많고 어둠을 사랑하는 몽상가였다. 태어나자마자 형제들에게 밀려 젖을 먹지 못하자 몸집이 작고 약해서 어디로도 보내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어미곁에 남겨두었던 아가였다. 처음 어미를 따라 바깥구경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꼭 닫아도 하루종일 손님이 드나드는 곳이라 어쩔 수 없었다. 며칠간 동네를 훑었지만 아무데도 없었다. 사고를 당한 흔적도 소식도. 잃어버렸다. 시간이 훌쩍 지나고 뒷길을 지나다가 어떤 아주머니가 빨래를 널며 개를 쓰다듬고 있는 걸 보게 됐다. 집 마당을 들여다보니 까만 개가 캉캉 짖으며 애교를 떠는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 그토록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까만 강아지였다. 사랑받고 있었다. 마침 대문이 열려있고 오다가다 안면도 있는 편이라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개가 있네요. 우리도 키우거든요."
"아, 어릴 때 길을 잃어버려서 여기까지 왔기에 주인도 못 찾고 해서 데려와서 키웠어요."
그는 돌아섰다. 예전에 잃어버린 강아지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할 필요도 없었다. 개는 무척 사랑받으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어느 집 대문일까, 한 동네긴 해도 우리 집에서는 꽤 떨어진 곳이다. 한번 보고 싶었는데, 그 후로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 생의 절반은 살았을텐데. 물론 이것도, 아빠 얘기다. 세상에는 기적같은 일도 뿌듯한 일도 친절한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그 사실이 항상 위로가 되진 않더라도 아주 가끔은 바깥에서 기쁨을 찾을 수도 있는 게 인생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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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을 닷새로 자가축소시켜 사는 것 같다. 달이 바뀌기 전 마지막 이틀 바뀐 후 첫 이틀 그리고 앞뒤로 반나절씩. 나머지는 온데간데 없다. 11월은 하루 늘려 엿새 정도는 정신차리고 살아야겠다. 생각만 하지 말고 글도 좀 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