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계 미국 수학자이자 지도와 해도 일반 의미론의 아버지 알프레드 코르집스키(Alfred Korzybski)는 '지도는 땅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덧붙여 '모든 지도는 추정이자, 일반화이자, 해석'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프로이트, 메스머, 코헛이 세계 각국의 과학자, 음악가, 정치가, 작가 들을 만나 나눈 대화를 기록한, 가상 심리 상담 방식으로 정신분석학의 역사를 쉽게 서술한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다>의 한 구절에서 접한 후 아이디어 수첩 한 귀퉁이에 적었다. 본래 많이 넓게 넣기만 좋아하지 깊이 파거나 되새김질하는 건 나중 일이라 알츠하이머 환자 마냥 메모 행위 자체를 잊는 초(超).반(反).기억력을 소유하고 있어 정작 제일 중요한 순서대로 잊기 시작하는데 리뷰는 적어도 읽은 책을 기억한다고 기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언제나 옳다. 리뷰는 해석일 뿐 공상은 아니다. 한 달 내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생각(idea)은 글(text)이 아니다. 



*



책을 덮자마자 서해바다로 떠나면 더없이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하고 글로 옮긴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순간 섬광이 일듯, 그 빠르고 정직한 흩어짐의 미학과 철학적 억측이라니 조금 아득하고 애탄다. 사실은 증발되고 기억은 왜곡된다. 시간은 덧입혀지고 장소는 희미하게 빛바랜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그때 내가 거기에 존재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물음 앞에 사진, 대화, 기억은 부질없다. 그래서 추억이라는 포장지와 고통과 상처를 숨길 마음의 서랍이 주어진 걸까. 중앙에 닿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의 황망함이란. 어쩌지 못해 허둥대다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의 허무함이란. 나만 보는 것도 위험하지만 아무도 못 보는 건 더 큰 문제가 된다. 읽는 동안만은 적어도 타인이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을 후각으로 전한다. 바다, 흙, 꽃과 나무, 병원, 문어와 대하, 숨겨진 절, 계부, 지하 룸살롱의 퀴퀴함, 비췻빛 도자기, 기러기 아빠, 불륜, 약속, 권태, 첫경험, 갈구, 열망, 절망, 고독.


더불어 충청도. 서해. 통영. 배 위. 바다 한가운데. 풍덩 빠져죽어도 좋을 것. 



나는 내 삶에 있어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세계에서 멀어져 어딘가에 격리돼 있던 시간들을. 언제 어디서 나는 잃어버렸던 세계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만 까마득한 심정이 되어 나는 듯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중략)


애초부터 나는 그들과 만날 수 없는 지점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라는 새삼스런 의혹이 독사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도자기 박물관>, 문어와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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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법한 일이고 있었던 일이다. 삶과 독서를 부연하기 싫은 날들이 많았다. 비루하고 구차한 삶도 지면이나 스크린을 통하면 반짝인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난 그냥 책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관심있게 살피는 이야기는 결코 내것일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될 이야기들이지만, 편안한 자세로 이불 속에서 주억거리며 읽기에는 죄의식과 괴리감이 가득찰 수밖에 없는 사변적(思辨的)인 구석이 있다. 이야기가 재미나 흥미로 소비되는 시대. 픽션으로서의 사회문제는 처절함이 희석된다. 상황이 심각하면 할수록 가공한 이야기보다는 논픽션이 힘을 갖는다. 홀로 진실을 대할 용기도 잘못을 바로잡을 힘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가 소비형태로 전환되는 추세도 자극에 자극을 유도해온 것에 대한 부작용인 것 같다. 




철썩같이 믿었던 사고(思考)의 비체계는 불특정다수에게 찾아오는 어떤 불합리로 증명된다. 가까스로 나를 피해간 불운이나 재앙을 통해 삶이 모두에게 공평하지는 않다고 인지한 순간 불운하면 불운할수록 이야기는 나와 멀어진다. 이란이 닥친 문제라는 점에서 제 위치를 상정할 수 있을 <나의 몫>에서 모든 잔인은 바깥으로 밀려나온다. 수도 테헤란과 지방 도시의 대비는 두드러지고, 공동체 사회 내에서조차도 서로가 가진 관습과 문물의 격차를 좁히지 못한다. 체제를 타도하고 의식을 전환시켜야 하는 혁명이 옅지만 붉게 한복판을 관통한다. 과도기이긴 해도 여전히 여성탄압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반복으로 익숙해진 불행은 더이상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보수적 사회, 무슬림 가정 하에서 어머니와 딸에게만 묵살된 자유의 의미는 남성의 그림자라는 뜻이다. 짐승이나 노예의 것과 다를 게 없다. 히잡과 차도르는 여성을 굴복시키고 더러 남자를 절대자(神)로 통용시킨다. 적은 사람들의 바꾸기 위한 절박함과 여러 사람들이 지키려는 굳건함과 또다른 무엇.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리 쉽게 달라지지도 유지되지도, 옳지도 그르지도 않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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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인생의 대부분 동안 엄마가 아니었다. 그전에는 '다이너'에 불과했다. 임신하고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 신분이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규정되지 않고, 얼마나 별 것 아닌지 몰랐다. (대디 러브, p.45)


쇼핑몰에서 순간적으로 아이 손을 놓는다. 순식간에 아이는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엄마는 필사적으로 차 꽁무니에 매달렸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다. 하지만 아들을 잃어버린다. <대디 러브>는 여느 범죄문학처럼 고통과 복수, 범인찾기에는 관심이 없다. 유괴가 두려운 건 아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이미 죽었으리란 절망의 무한반복 때문이다. 기대와 절망은 교차되고 그때마다 부모는 세상이 끝나버리는 고통을 겪지만 누구도 그 심정을 다 알지 못한다. 소중한 것을 잃어본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애닳는 심정이 생생하고 압도적이다. 몇몇 문장은 놀랍도록 인간 본성의 핵심을 찌른다. 다섯 살 꼬마가 잔인하게 학대당하며 느꼈을 공포가 전해진다. 어떤 공포는 죽음과 맞먹기도 한다. 다섯 살 남자아이는 엄마 아빠는 네가 미워서 새아빠에게 입양보냈다는 말에 세뇌당한다. 열한 살로 커가는 동안 남아있는 기억은 거의 없다. 왜곡되고 뒤틀리고 새로 쓰여진다. 같은 장면이 반복되지만 미묘하게 달라지는 처음의 몇 챕터는 시나리오처럼 상황을 펼쳐놓는다. 과정에 비하면 결말은 덜 중요하다. 애초 범인을 잡고 범죄이유를 캐는 게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오직 이 순간 뿐. 주제의식의 강렬함이 의문과 논란을 불식시킨다. 우리 모두 제대로 겪지 않은 일에 대해 얼만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 말은 결국 허공을 맴돌 뿐인데.





*


같은 일을 겪어도 대처는 누구나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다. 타인이 내린 판단을 나의 기준으로 재단하거나 윽박질러서는 안된다. 프리모 레비에게서 여전히 아우슈비츠나 홀로코스트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건 이 독특하고도 대단한 영역을 구축한 작가를 전부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작품을 다 읽지 않았으면서 안다는 선입견을 가진 것도 사실상 그가 가진 이력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우슈비츠에서 나와 화학자로서 공장관리자로 일하며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만약 운명이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경이로운 순간들을 제외하면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은(불행히도 그건 소수의 특권이다) 지상의 행복에 구체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다가가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리이다. 그 무한한 영역, 직업의 영역, 간단히 말해 일상적인 일의 영역은 남극 대륙보다 덜 알려져 있다. 바로 그것에 가장 적게 가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더욱 많이 말하고 더욱 요란하게 말하는데, 슬프고도 신비로운 현상이다. 직업을 찬양하기 위해 공식적인 의례에서는 교활한 수사학이 동원되는데, 그것은 냉소적으로 칭찬이나 메달이 임금 이상보다 훨씬 비용이 적게 들고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고찰을 토대로 한다.  (멍키스패너, pp.120-121)



이렇게 소설이 되다니 놀랍다. 나는 장비에도 공구에도 무지하지만 제 몸을 움직여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에게는 일에 관한 한, 직업(돈벌이) 이상의 어떤 철학이 있음을 믿는다. 조립공 파우소네는 한곳에 머무르는 걸 싫어해 다양한 작업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국경 넘는 건 다반사인데다 항구, 철탑, 다리, 석유 시추 작업장 등 현장을 누비며 책상에 앉아 종이서류와 씨름하는 직업군에서는 알지 못하는 기쁨을 맛본다.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한낱 노동으로 하찮게 취급하는 시대를 잔잔한 슬픔이 섞인 대항으로 애통해한다. 일의 특성상 공사가 끝나면 헤어져야 하지만 그래서 매순간이 소중하다는 걸 아는 그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몽상가이자 모험가다. 


일에 대한 철학과 위트, 성실의 의미는 돈의 기계가 되어버린 일벌레들에게 매혹과 감동을 주며, 효율과 합리에 매몰된 편리와 속도에 반기를 든다. 당연하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일은 종요롭다. 노동자는 도구가 아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이 제일 아름답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은 그 다음에 놓인다.




*




 "난 그저 최고가 되려는 게 아니다. 가장 높이 올라가서 아무도 나에게 닿을 수 없게 만들고 싶다. 나는 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도달해야 할 곳에 가고 싶을 뿐이다. 당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면 당신의 모든 것은 곧 유일한 것이 된다." (세상을 버리기로 한 날 밤)


영화라면 잔잔하고 가슴 찡한 작품이 됐겠다. 짧지만 난데없이 쏟아지는 벼락같은 이야기는 또렷하게 손에 잡히지 않아도 감동이 차오르는 판타지다. 영원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영원하리라 믿는 것들에 대한 간절함으로 가득차 있다. 다른 사람의 전 생애를 파노라마처럼 보는 능력을 가진 남자는 공항, 기차역, 여행가방, 호텔, 공연 음악, 신뢰, 영혼, 열망, 긴장, 그리움, 호기심, 목욕물, 베이비 파우더에서 풍기는 엄마의 미소를 연상(聯想)시킨다. 누군가의 처음과 마지막을 볼 수 있는 묘한 불공평 앞에 불행과 행운이 번갈아 감지되고, 그 강렬한 가능성이 현실과 비현실, 꿈과 열망을 오가며 그를 지구라는 행성의 중심으로 옮겨놓기 위해 애쓴다. SF나 판타지 장르에 가두지 말고 바깥 행성으로 밀려난 남자를 다시 행성 안으로 들이기까지의 소동들을 기록한 일지로 읽으면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마침내 삶의 중심으로 되돌아온다. 그에게는 여전히 잃어버린 것보다 앞으로 잃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 다음 행성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 행성에서 태어난 이유가 반드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난다. 만나지 않아야 사람은 결코 만나지 않는다. 가장 소중한 것은 버린다고 버려지는 게 아니다. 긴 인생에서 단 한 번이면 괜찮을 소중한 하룻밤. 안녕.


그는 당신이 얼마나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 몇 개의 눈빛과 호흡, 몸짓, 혹은 미소를 지니고 있는지, 심지어 그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알아챌 수 있는 재주를 타고났다. 또 다른 능력 중 하나는 주변 사람들을 비롯해 좋아하는 사람들과 겸손, 행복, 성실, 사랑, 그리고 삶을 나눌 줄 안다는 것이다. 그는 매 순간 적절한 언어를 구사하고 알맞은 표정을 지을 줄 안다. 한마디로 매혹적이고 놀라운 사람이다. (세상을 버리기로 한 날 밤)




+

어린 강아지는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었다. 까만 어미의 새끼도 아닌데 아주 까맣고 보드라운 털과 반짝이는 눈을 가져서 오가는 사람들마다 감탄사를 숨기지 못한 채 쓰다듬었다. 잘 보이는 곳에 데려다놔도 자꾸 구석으로 숨어들던 수줍음 많고 어둠을 사랑하는 몽상가였다. 태어나자마자 형제들에게 밀려 젖을 먹지 못하자 몸집이 작고 약해서 어디로도 보내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어미곁에 남겨두었던 아가였다. 처음 어미를 따라 바깥구경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꼭 닫아도 하루종일 손님이 드나드는 곳이라 어쩔 수 없었다. 며칠간 동네를 훑었지만 아무데도 없었다. 사고를 당한 흔적도 소식도. 잃어버렸다. 시간이 훌쩍 지나고 뒷길을 지나다가 어떤 아주머니가 빨래를 널며 개를 쓰다듬고 있는 걸 보게 됐다. 집 마당을 들여다보니 까만 개가 캉캉 짖으며 애교를 떠는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 그토록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까만 강아지였다. 사랑받고 있었다. 마침 대문이 열려있고 오다가다 안면도 있는 편이라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개가 있네요. 우리도 키우거든요." 

"아, 어릴 때 길을 잃어버려서 여기까지 왔기에 주인도 못 찾고 해서 데려와서 키웠어요." 


그는 돌아섰다. 예전에 잃어버린 강아지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할 필요도 없었다. 개는 무척 사랑받으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어느 집 대문일까, 한 동네긴 해도 우리 집에서는 꽤 떨어진 곳이다. 한번 보고 싶었는데, 그 후로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 생의 절반은 살았을텐데. 물론 이것도, 아빠 얘기다. 세상에는 기적같은 일도 뿌듯한 일도 친절한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그 사실이 항상 위로가 되진 않더라도 아주 가끔은 바깥에서 기쁨을 찾을 수도 있는 게 인생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

한 달을 닷새로 자가축소시켜 사는 것 같다. 달이 바뀌기 전 마지막 이틀 바뀐 후 첫 이틀 그리고 앞뒤로 반나절씩. 나머지는 온데간데 없다. 11월은 하루 늘려 엿새 정도는 정신차리고 살아야겠다. 생각만 하지 말고 글도 좀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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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1-0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어느새 11월이지 뭐에요.
생각만 하지 말고 글도 좀 쓰면서,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윤대녕의 소설이 좋아보여 담아가요. 어제 한집에 사는 동반자에게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구냐고 물으니
윤대녕과 몇을 꼽네요. 이청준이 일순위구요. 살면서 대놓고 한번도 물어보지 않은 것이에요.^^

아이리시스 2013-11-04 20:3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건강하게 잘 계신 거예요? 들어와서 책만 검색하거나 뭘 찾아보고 가거나 하면서 서재방문이 점차 줄고 있었어요. 저는 그래도 달이 비워질 때 들어찰 때는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아요. 시간운용을 잘 못하기도 하지만 한 달에 네 편(일주일에 한 번)은 써야 감이 안 떨어지겠다 생각은 들어요. 사실 자주 쓰면 쓰는 게 후딱 금방이더니 이젠 그것도 벅차요. 윤대녕을 읽은 게 아주 오래전이라 원래 소설의 느낌이 잘 생각 안나요. 이청준을 일순위로 꼽는 동반자라니 멋지네요. 요즘은 옛것, 옛글, 고풍스러운 느낌이 워낙 그리워요. 이제 종종 물어보셔요. 신기하네요, 자주 물어보셨을 듯한 질문이기도 한데 말예요.^^

생각만 하지 말고 글도 좀 쓰면서. 프레이야님도 자주 좀 써주세요. 제가 열심히 읽을게요^^

2013-11-03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4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3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4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3-11-05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은 정말이지, '글'이 아니지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자주 무엇인가를 적다가 지워버리나 봅니다. 가끔씩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마구 떠오르는데, 적지는 못해서 생각으로 그치고 말지요. ..

아이리시스 2013-11-05 12:30   좋아요 0 | URL
방금 한 생각도 잘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타이밍'도 중요해요. 생각을 돌이킬 '여유'도 필요하고요. 페이퍼를 한 개 쓰는 건 결과적으로, 열 개 쓰는 것보다 어려웠어요. 그러고보면 생각을 '잘'하고 살기에도 바쁜 세상이니까요..
 
오르세 미술관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5
시모나 바르탈레나 지음, 임동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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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빛과 비상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로트렉과 르누아르의 차이에 관한 이야기다. 태초에 내가 기억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비상(飛上)이 좋았다. 평범한 발음과 입모양도, 발음하고나면 거대하게 솟아나는 근거없는 용기도. 바즈 루어만 감독의 [물랑루즈]를 보기 위해 꽃처럼 예뻤던 열아홉의 두 소녀는 수능이 끝나자마자 시내 극장으로 달려간다. 의사를 꿈꾸던 짝꿍이자 단짝이었던 친구, 붉고 강렬하고 어둡고 쓸쓸한 무대, 눈과 귀를 자극하는 춤과 음악, 예나 지금이나 빼어난 외모로 혼을 빼놓는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화면 속 화려한 색채와 강렬함, 밝고 명랑하기만 한줄 알았던 파리의 어두운 이면, 극장을 오르내리던 에스컬레이터와 사먹었던 음료와 팝콘, 비스킷, 오징어까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놀랍도록 생생한 기억이다. 더 어두운 분위기로 재즈 선율 물씬한 [시카고], 꿈에 관해서라면 따라올 영화가 없을 [드림걸즈]나 [코요테 어글리]를 좀 더 좋아하지만 다시 보고싶은 작품은 단연 [물랑루즈]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도시에 있다. 묶어둘 수도 붙잡을 수도 없었던 어떤 물거품에 대해 말하려면 언제나 파리가 일순위다. 아무 것도 모른다. 오르세 미술관의 몇몇 화가 그리고 낭만과 사랑으로 가득찬 예술과 문화의 도시를 알 뿐이다. 


다들 알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 훗날 파리는 내게 그렇게 정의내려진다.



           



로트렉, 클림트, 베르메르, 고야, 고흐, 무하. 로트렉과 가장 먼저 만난 건 운명이라 불러도 좋다. 우디 앨런의 영화 이후, 바로 그 작품이 이 도시를 설명하는 핫한 근거가 되었고, 더이상 나만의 추억만으로는 거기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된 슬픈 사연을 들이밀어볼까. 아니면 파리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갔던 퐁네프 다리 그것도 아니면 베르사유, 시테 섬에 대해서. 아니다. 몽마르트르와 빨간 풍차에 대해 말해보자. 아, 벌써부터 불쑥 물러나기 시작하는 그리움의 향취라니. 약간의 쓸쓸함과 미각에 느껴지는 소금기가 따끔거린다. 침울하지만 슬프지는 않다. 여섯 명의 화가 중 클림트, 고야, 고흐, 베르메르를 먼저 만났다면, 처음이 로트렉이 아니었다면 나는 굳이 EBS의 특집 프로그램 6부작을 찾아보고 빈약한 책장을 뒤져 굳이 한번 더 회상에 잠기기 위해 이 책을 찾아내진 않았을 것이다. 열 권의 미술관 시리즈 중 하필이면 5번이어야 했던 이유, 로트렉의 일부 작품이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수많은 색깔의 빛이 세상의 모든 길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곳. 그곳은 전세계 예술애호가들의 정거장이자 정착지였다. 나는 오르세의 공간적 변천이나 기술적 번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릇에 담긴 내용물, 내용물이 숨긴 기호와 상징, 역사에 오롯이 집중할 뿐이다.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의 전용관이 있는 파리의 오르세는 문화예술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곰스크 같은 곳이다. 그는 19세기 말 혼란한 사회상 속에 기꺼이 녹아든 하층계급 매춘부와 거리의 여자들을 지상으로 불러냈고, 괄시와 차별에 신음하던 이들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은 인격을 부여하여 세상 밖으로 낚아올렸다. 로트렉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1889년 몽마르트르의 번화가 클리시 거리에 개장한 댄스홀(프랑스어로 '붉은 풍차'의 뜻) '물랑루즈(Moulin Rouge)'로, 담벼락, 풍차, 밤거리, 댄서, 창녀 같은 몇 개의 다른 단어로도 요약된다. 태양보다 화려하고 달보다 황홀한 시계(視界)가 펼쳐졌을 때 그의 눈에 비친 곳이 얼만큼 매력적인 향락의 장(場)이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부모의 근친결혼과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얻은 장애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평생 지팡이를 짚으며 뒤뚱거렸던 외로운 아웃사이더의 눈으로 누구도 볼 수 없는 역동과 자유를 포착하기까지 벌인 사투에서 절망의 추격은 또 얼마나 거세고 급했을까. 




하지만 유전적으로 덜 자란 키, 장애로 얻은 걸음걸이로 물랑루즈, 카바레 등의 댄스장과 서커스장까지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삶과 반비례하는 완벽한 역동성, 무방비한 자세로 쉬는 여자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고단함과 쓸쓸함. 대부분의 파리가 보여주는 화려함에 가려 더더욱 아프고 어두운 그림자. 어디에나 존재하는 양면의 칼날을 잊지 말라는 경고일까. 헝클어진 머리칼, 뼈가 툭 불거진 등, 살짝 벗어내린 상반신, 다소곳과는 거리가 먼 자세까지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갈 듯한 강인함마저 느껴진다. 어느 누가 화려한 파리의 밤거리에서 그들에게 눈길을 두겠는가. 로트렉은 자신의 삶마저 짧고 강렬한 빛으로 휘감았다. 비록 후기 빛의 화가 혹은 인상파, 라고 불리는 다른 수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에 가려져있긴 해도, 그가 보고 듣고 느낀 세상은 남달랐다고 써도 좋다. 서른 여섯에 생을 마친 그를 보고 있으니 또다시 결핍되지 않은 내 안의 수많은 가능성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로트렉의 자세한 설명을 기대한 채 열었던 책에서 이 그림을 만나고, 한 페이지에 간략히 요약된 그의 생애를 듣는다. 그외에도 모네, 드가, 마티스, 세잔, 고흐, 쿠르베, 밀레, 마네, 라투르, 휘슬러, 들라크루아, 카유보트, 시슬레, 르누아르, 피사로, 베르메르, 고갱, 쇠라, 뷔야르, 드니, 앙리 루소 등 수려한 화가들의 작품이 반기지만 간략하고 소박한 소개가 마치 독자와 화가의 결탁과 유착을 기반으로 하는 듯 정중하다. 감추고 싶은 것을 감추는 아첨, 온화로운 환심, 까다롭지도 엄격하지도 않은 서술이 오히려 오르세 미술관의 미로에 갇혀 길을 찾는 지도라도 된 듯 색채와 부피로서의 감정순환에 기여한다. 병약한 와중에 매독과 알코올 중독으로 생을 마친 로트렉이 가졌던 깊은 교감력과 도피, 자기파괴에까지 이르게 한 감수성을 우린 너무도 쉽게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시키며 대가없이 얻기를 바라지 않던가.



           



또다른 프랑스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1841-1919)는 들라크루아, 쿠르베, 모네의 기법에 영향을 받아 차츰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한다. 르누아르는 본래 인물화가였는데 점점 전통과 고전 회화의 양식에 눈뜨고, 인물의 심리를 세심하게 담기 위해 애쓴다. 독서, 피아노, 뜨개질, 오찬 등에서 보여지는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포착한 르누아르의 장기 역시 빛과 색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표현법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포근하고 따뜻한 마력에서 찾을 수 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색조.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뜨거운 감미로움. 무엇보다 색채의 풍부함이 오래 들여다봐도 질리지 않고,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준다. 흐릿하면서도 또렷한 질감에서 명랑함과 사랑스러움이 듬뿍 묻어나기도 한다. 르누아르가 그린 세상의 인물들은 로트렉과는 달리, 천진난만하고 싱그럽다. 왁자한 전원풍경과 행복 가득한 생기발랄함, 바로 그 낙천성에서 그의 매력을 찾는다. 



           



시슬레와 모네의 그림을 좋아한다. 빛과 어둠, 꿈과 환멸을 그림에서 찾던 어느 날, 고흐와 고갱의 색채 대비나 램브란트와 베르메르의 소박하면서 묵직한 환희에 간혹 흔들렸다. 고흐와 밀레의 낮은 곳을 향한 진지한 태도, 쿠르베의 고집스러움, 휘슬러의 화폭이 전달하는 흰 빛의 녹턴을 잊지 못한다. 사실 오르세는 놀이터 같은 곳이다. 놀이터에서는 그네도 시소도 미끄럼틀도 포기할 수 없다. 매번 새롭다.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화가의 또 다른 작품에 자주 눈길이 멎는다. 터너의 환상적 연금술에 마음을 빼앗기고, 쇠라의 원색질주와 질서정연함에 심장이 뛴다. 이상하다. 눈을 감고 차분히 마음을 달래면 이 미술관(책이 아님)은 매번 새로운 세계로 나를 데려간다. 완벽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책이라서가 아니라 내게 특별한 시작을 선사한 책이기 때문이다. 



사실 거의 모든 분야에 있지만 돈 많은 남자의 숨겨진 정부처럼 무의식중에 잊혀지는 것들은 많다. 나는 십 년도 훨씬 더 지난 날에 자칫하면 헤어질 뻔했던 엄마가 다음날 사다준 핑크색 테두리가 있는 흰색 긴팔 티셔츠를 생각한다. 소매가 늘어나 몇 년 전 별 고민도 없이 헌옷수거함에 넣었는데, 불현듯 당시의 모든 비극적 상황과 더불어 엄마의 표정과 말투, 티셔츠의 촉감과 디자인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시간이 멈춰버렸다. 갇힌 추억 만큼 애처로운 것도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관용어의 적확함에 덧붙인다. 기억하는 만큼 체화한다. 잊혔던 날들의 기억은 서늘하게 다가와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흩어지는 만큼 멀리가고 내려앉는 만큼 은밀하다. 더없이 반가운 가을바람과 아득히 먼 시간들 속에 내가 막 펼친 이 꼬깃함은 누가 접어놓은 페이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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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 1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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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2 15: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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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 2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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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2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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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1 14: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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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1 2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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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 동생은 미술관이 좋아서 한 번 더 가고싶다더군요. 제 입장에선 왠지 지구 반대편에 근사한 꿀단지를 하나 '킵'해둔 느낌. 언젠가 갈 거고, 미술관 소장품들은 분명 환상으로 좋을 테니까요. (아, 왠지 흡족하다..ㅎㅎ)
-로트렉은 왠지 좋지만 아직은 미지의 사람. 르느와르는 왠지 따분하지만 역시나 미지의 사람.. 물랑루즈는 '아름답고, 좋았고, 슬펐'단 기억이 강하네요.

아이리시스 2013-10-18 01:50   좋아요 0 | URL
같은 그림이라도 이국적 분위기에서 그림을 보면 한국과는 느낌이 달라서 좋아요. 사람구경도 재밌고요. 광장도 좋고요. 저도 근사한 꿀단지 만나러 얼른 가보고 싶어요. 비행기 타는 건 지긋지긋하지만.. 속수무책으로 하늘에 떠있는 기분이 너무 답답해요. 예전에는 센티멘탈해지면 화집이나 그림검색을 했는데 요새는 그냥 옛날 영화봐요. 근데 물랑루즈를 쓸쓸한 기분일 때 다시 한번 보려고 했는데 아직이에요 :)

2013-10-20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년 겨울에서 올해 봄까지 이 불온해 보이는 소설들을 사랑했었다. 꿈은 자본주의 사회의 훌륭한 부품인데, 꿈이 곧 혁명으로 치부되는 사회라니. 나는 사랑과 혁명 사이를, 삶과 죽음 사이를 유랑하다 흔들리던 추가 멈춘 듯 갑자기 정지했다. 계절이 두 번 지났다. 어느새 어떤 계절이 가장 좋으냐는 물음에 명확히 답을 할 수 없는 애매한 나이가 되었다. 나이 탓이다. 봄이면 봄이, 여름이면 여름이, 가을이면 가을이, 겨울이면 겨울이 좋은 건 모든 계절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계절마다 추억할거리가 적지 않은, 적지도 많지도 않은 다소 오만한 나이 탓이다. 이미 많은 가능성을 잃었지만 또 수 개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모호함에 갈팡질팡하는 때. 과거에 심취한 책등을 쓸어내리면 최초의 계절에 내려앉은 의지가 만져진다. 꿈으로 써내려간 현실은 절망과 의지의 경계를 넘나든다. 더없이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로 그려졌지만 현실의 황홀을 말하지는 못한다. 어느 날 비로소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그들은 털어놓을 것이다. 고백은 가닿지 않고 시간은 정처없이 흘러간다. 미처 꺼내지도 못한 마음은 실패한다. 다시는 그날이 오지 않는다. 한 번 뿐이고 각자 다르다.


그럼에도 시대와 제도의 틀에서 결코 벗어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나라는 사랑과 혁명을 동의어로 여긴다. 사랑은 조용히 혁명하고, 진실은 추억에 갇혀 경련한다. 아무도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사실에 다가갈수록 진실을 알게 될수록 더욱 선명하고 견고해지는 붉은 덩어리. 성애는 끈적대지만 애착은 역동적이다. 탐함의 미학 앞에 부드럽게 녹아드는 환상적 리얼리즘. 감출 것 없는 비밀들 틈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서러운 욕망도 있다. [물처럼 단단하게]의 두 주인공은 경계, 가치, 금기를 뛰어넘어 몸을 섞는다. 시도때도 없이 어떤 환영 속에서 뒤엉키는 몸과 몸, 영혼과 영혼이 애닳토록 강렬하고 숨가쁘게. 운명에 지배된 자들의 외침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쿠코츠키의 경우]를 혁명의 축소판, 가족이라는 이름의 진혼곡으로 읽는다. 억압과 불통이 소비에트 체제 하의 쿠코츠키 가족에게 미친 영향과 소박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가치를 탄생과 소멸, 세대교체와 연대책임의 뜨거움으로 그려내고 있다.





 














[열세 걸음]에서 국가는 절대적이다. 국가가 가난과 존엄을 해결하지 못하자 좀비같은 인민들이 새장 안에서 목숨을 다한다. 교사 팡푸구이는 턱도 없이 적은 봉급과 시도때도 없는 야근에 의한 피로누적으로 교단에서 쓰러진다. 팡푸구이의 불행은 정부가 지배를 견고히 할 재도약의 기회로 이용된다. 매일 밤 옆집에서 들려오는 아내 투샤오잉의 절규는 기절했다 깨어났을 뿐인 팡푸구이를 진짜 죽은 사람으로 내몬다. 살기 위해 죽음, 그 역설의 아이러니. 산 자를 죽이고 죽은 자를 살리는 부정(不正). 욕망은 더욱 강해진다. 미친 욕망이 비열할수록, 고독이 짙을수록 문장은 황홀하고 매혹적이다. 


미덕과 악덕, 아름다움과 추악함의 경계를 뒤흔드는 모호함. 세련된 성적 환희로 표현된 처절함. 영웅을 원하는 사회의 대참사.



산아제한정책으로 인한 폐해는 혐오스럽다못해 부당하고 허황하다. 원제 蛙, [개구리]는 실제 산부인과 의사였던 고모를 모델로 1971년부터 실시해온 산아제한정책의 실상과 울분을 1인칭 화자의 시선으로 해부하는 작품이다. 개구리는 강한 생식력의 상징으로, 모옌의 고향인 중국 가오미 둥베이 향의 토템이라고 한다. 인구수와 경제력의 극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수술대 위에서 치욕과 울분을 견디며 죽어간 여자들과 빛을 보지 못한 채 색종이 잘리듯 잘려나간 티끌만한 생명. 침묵할 수 없던 소설가는 이 희생과 폭력의 시대를 편지글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생명과 목숨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시계(視界)로 삼는다. 





지상                  

                 

       -황학주


여기는 이상하다 이상하게

한 사람씩 온다

다시 올 일 있을까 싶다

나란히 신발 벗을 때는

모르지만

이상하다 이상하게

한 사람씩 나간다

모텔 같다

여기는 물감냄새가 난다는 게 문제지

사랑만 필요했던 

연인들이

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

시간의 종업원이 똑똑똑 노크를 하거나

전화벨을 울려주기까지 하는 곳

슬픈 것은 사랑을 보는 모텔 주인의 생각이며

거기서 나온 인테리어 솜씨일 뿐

이상하고 또 이상해도

여기서 서화를 그릴 수밖에 없다

어느 날 나는 가고

당신은 오는 것을 잊는다 해도





이 쓸쓸한 기운. 못미더운 계절. 스며드는 불안. 잔잔한 고독. 무서움과 두려움. 형체없는 모든 것이 미세하게 감지된다. 단연 무채색의 소설. 모든 것들에 심드렁해진 한 사람을 전율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누구인가. 한시가 아깝던 파리 유학시절에조차 허름한 아파트에서 그녀와 나누던 사랑 외에는 그 무엇도 그의 심연에 파문을 던지지 못한다. 이웃집 노파의 숨겨진 비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서 비로소 중심을 세우고 다시 붓을 들 수 있게 된 그에게서 돌림하듯 특징없는 마을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듣는 시간.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는 진짜 욕망을 본다. 별이 붉고 달이 울었다. 모든 게 그의 환상에 불과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빈방을 떠올리면 한적한 터 금방 허물어질 듯한 집 한 칸이 생각난다. 안락하고 따뜻해서 기어이 매몰되고야 말 그런 집. 마을로부터 30분 떨어진 풍성한 초록의 숲 속에서 세상과 등을 맞댄 채 개울을 틔우고 물고기와 박을 기르며 사는 남자를 보았다. 이십 오 년 전의 연인을 그리며 눈시울을 붉히는 이제는 하얗게 센 머리색의 남자를 보았을 때, 어서 그 남자를 저 세상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운명에게 말을 걸었다. 많은 날들을 나는 아파했다. 그의 한평생이 저릿하고, 처연하고, 애잔했다. 


아무 것 아닌 찰나. 무(無)의 세계로 흩어지는 공허. 확언하되, 이 막연함도 곧 지나갈 것이다.




















신작이 아니었다. 1991년 作. 많은 말을 하기에 너무 짧고 정적이고 부질없다. 고집스럽고 청아한, 실존했던 한 음악가의 삶을 묵직하게 그린다. 절반도 살지 못한 내가 이해할 리 없는 어떤 생애.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에 얹힌 진부함이라니. 세상의 모든 저녁도, 세상의 모든 사랑도, 세상의 모든 이별도, 세상의 모든 황홀도 절망도 같은 형태로 두 번 다시는 오지 않는다. 하물며 아침이라니. 미세하게 달라지는 우주에 균열을 내보고 싶은 자의 목소리. 제 길을 꿋꿋이 걷는 예술가의 찬란한 이름. 감촉과 내음이 따사로워서 잔잔한 호숫가 옆 푸릇한 들판으로 달려나가고 싶다.


17세기 프랑스 출신 비올라 다 감바의 거장 생트 콜롱브. 그는 음악으로 세속적 욕망을 이루고자 찾아온 제자 마랭 마레와는 상반되게, 아내를 잃고 두 딸을 홀로 키우며 영광을 선사해줄 왕실의 부름도 거절한 채 오로지 자신의 음악세계를 지키는 단호함을 보여준다. 소설적 흥미가 툭 불거진 상황설정이나 진한 감동에 있다면 이 소설은 정반대에 위치한다. 내면이 발하는 은은한 빛을 따라 걷는 자는 마침내 황홀경에 도달한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격렬하게 대립하지만 작가는 몸을 낮춰 말한다. 삶이 대체로 그러하며 순간의 선택이 생을 이루게 한다고.






편혜영은 처음이다. 나는 습작을 때때로 지겨워했다. 그때 나는 반드시 무엇이 되고 싶었다. 이 소설집을 읽게 된 건 오로지 그런 생각으로 가득했던 밤들 때문이다. 


영어단어에도 진행형을 쓸 수 없는 동사라는 게 있지. '소유하다(have, possess, owe), 원하다,바라다(want, wish)' 같은 단어. 


현재진행형과 친하지 않은 나는 밤의 현재진행형 앞에 긴장한다. 지나간 것과 지나가는 것, 분노하는 것과 분노하고 있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있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지금 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밤이 원치않는 비밀을 엿보는 중이라고. 애틋하고도 그윽한 시선이 가장 나답지 않은 순간마저 나를 또렷하게 한다고.





기어이 어떠한 조건을 붙이고서야 읽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장편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나는 단편을 그 자체로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단편 밖에 읽지 않았던 때도 그랬고, 습작에 써먹기 위해 줄기차게 읽어야만 할 때도 그랬다. 베끼고 싶은 문장을 종종 발견하지만 읽는 게 서늘해지거나 흥미롭다는 느낌이 없다. 좋다고 느낀 찰나가 가끔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삶의 단면들을 요리조리 쪼개보는 과정을 싫어한다. 부분과 단절을 어려워한다. 흐름이 없어 싫고, 묻혀버려서 싫다. 처음과 끝을 동시에 소유하고 싶고, 오랫동안 여러 번 만나 다정해진 주인공에게 애정을 느낀다. 흥미로이 여기지 못함에도 여덟 개의 어둡고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삶을 직시하고 있어 때론 고마웠다. 밤(夜). 자체로 황홀하고 그 질감마저 투명한 것. 시시콜콜한 밤들이 지나간다. 시공간의 단절이 도무지 있을 줄 모르는, 여기는, 지상이다. 황학주 시인의 말처럼, 나는 가고 당신은 오는 것을 잊는다 해도 별로 달라질 게 없는. 세상 무엇으로도 채우기 힘든, 지상의 어떤 순간과도 바꾸기 어려운, 마침내 괜찮은 계절이 왔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여름의 끝에 간신히 매달린 이 소설이 물었다. 단단하지만 허물어지는 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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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7 17: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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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7 2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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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3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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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9 0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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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고양이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임미경 옮김 / 창비 / 2013년 1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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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박공의 집
너대니얼 호손 지음, 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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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 봐, 피비! 그리고 손가락으로 세게 꼬집어 봐라! 장미 한 송이를 줘 봐. 가시에 손을 찔러서 그 날카로운 고통으로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니란 걸 확인하게.˝] 노력은 처음의 간절함을 잊기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낀다면, 그건 헵지바와 클리퍼드와 피비가 우리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난 과거는 그의 기억을 말살한 알 수 없고 끔찍한 것이고 미래는 백지와도 같아서 그는 오직 손에 잡을 수 없고 환영과 같은 지금만을 가졌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불안한 남자
헨닝 망켈 지음, 신견식 옮김 / 곰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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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이 랑베르 (양장)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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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죽음은 한끗 차이. 랑베르가 전무한 세상에서 그가 하는 모든 사유는 거의 절대적이다. 지식과 사유로 통하는 우아한 비상(飛上)이 좌절되는 걸 보는 건 부조리하다. 형이상학, 친근감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사람들은 항시 오만하다. 랑베르는 주위현상을 한눈에 파악하는 깊은 통찰력과 단어와 단어에 얽힌 이야기만으로 세상을 다시 써내려가는 집요함을 가졌으며, 영혼과 육체 그리고 움직임이 위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행동과 반응, 욕망과 환상, 작용과 반작용 사이를 유랑하며 열정이 사라진 세상에 물음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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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8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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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의 운명만 봐도 알 수 있듯, 운명이란 참 덧없다. A에 의해 B의 삶이 그리도 쉽게 변하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이. A와 B는 가족, 친구, 연인을 비롯해 사실상 관계의 양상 거의 모두에 해당하는데 가까운 사이일수록, 친밀도가 높을수록 해당 비극의 강도가 세어지는 특성을 보여준다. 혼자 왔다 가는 세상 아니다. 독불장군처럼 있다간 세상이 코 베어가도 모를 세상. 그래서 인간은 절충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우며 자라난다. 선과 악, 능력과 신분, 성직자와 군인, 윤리와 세속 사이에서 갈등하는 건 주인공 쥘리앵 뿐만이 아니다. 



독실하고 순결한 성직자()를 꿈꾸지만 남보다 특출난 지능 뿐인데다 가난하고 시간이 없으니 먼 길을 돌아가야 할 타당한 이유를 굳이 찾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 속의 기준이 무너진 사람을 보고 있는 일은 어찌나 아슬아슬한지. 노력이나 열정으로 되지 않으면 가능한 타인을 발판으로 삼아 올라서려 한다(). 쥘리앵의 경우 은근하다는 것과 본인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여자, 사교계,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은 쥘리앵의 목표에 희생되기 좋은 촉매제다. 대가를 챙긴 아버지가 억지로 떠민 집으로 들어가 레날 시장의 아이들을 돌보는 입주 가정교사가 되지만 상층사회의 배움은 도덕이 아니라 불법을 무릅써서라도 쟁취하는 법이다. 손쉽게 시장의 아내를 유혹해 원하는 것을 얻다가 들킬 위험에 처하자 평소 신부의 신임이 두터운 덕에 쉽게 추천장을 받아 드넓은 도시 브장송의 신학교에 들어간다.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과신하는 유형의 전형적 캐릭터. 쥘리앵의 갈등과 변화를 내세워 능력과 노력이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암울한 왕정복고 체제를 비판하는 동시에 노력과 열정이 통했던 나폴레옹 시대를 동경한다. 마음이 찬란해질 정도로 그리운 시대가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 



프랑스 문학은 희한하게도 최후에 돌아가야 할 보금자리처럼 여겨진다. 만족과 찬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이유에서 지성과 감성의 기로에 서서 흔들고 쓰다듬게 된다. 스탕달 보다는 발자크와 플로베르가 좋지만 어디까지나 세 사람은 프랑스 문학이라는 갱도 안에서 하나이다. 상징성 짙은 사회소설이 부담되면서도 정작 '레 미제라블'을 읽으면서는 할 수 없던 프랑스 왕정 역사를 살펴보는 계기가 된다. 한 청년의 수난사에 나를 대입해보는 감각, 프랑스 문학사의 획을 긋는 작품인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완연하게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라면 묵과할 수도 없고 간과해서도 안되는 지점에서의 촌철살인적 멘트. 읽어내는 자에게만 허락된 어떤 뿌듯한 벅참 같은 것. 프랑스 혁명 이후의 왕정 복고(부르봉 왕가), 나폴레옹 집권과 실각, 루이 필리프(오를레앙 왕가) 등장 직전까지가 스탕달이 마흔 여덟, 죽기 12년 전에 발표한 작품의 배경이다. 이후 나폴레옹 정권 역시 유럽을 전란으로 밀어넣었다는 명분을 쓰고 워털루 전쟁으로 명을 다한다. 신체제가 구체제를 전복할 수 없는 현대 시각으로 보면 한없이 무력하게만 보이는 이들의 부침이 약간은 멀뚱하게 느껴지는 건 너무나도 상식적인 돌담을 부수지 못한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일까.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부제: 1830년 7월 28일), 1830, 루브르 박물관 소장




미어터지는 겨울날 루브르에서 좋은 자리에 크게 걸려있기도 했지만, 유독 시선을 사로잡던 이 작품을 기억한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라곤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밖에 모를 때였다. 당시 들라크루아 그림에 심취한 적이 있어 중심에 선 여인이 잔 다르크를 상징한다는 것도 아는 상태에서 본 그림이라 모나리자 다음으로 기억에 남았다. 좋아한다기 보다 그저 기억에 남은 것이다. <적과 흑>이 발표된 1830년, 비로소 7월 혁명으로 복고왕정이 무너진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성공으로부터 겨우 15년 만에 다시 황제를 맞아들인 후였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혜성처럼 등장한 루이 필리프는 국민 모두의 열망을 안았지만 사실상 착각임이 밝혀진다. 그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수명을 다할 때까지 프랑스 시민의 왕으로 군림하지만 그의 집권은 왕정 복고 체제로 돌아간 것과 다름 없었다. 군주제는 자취를 감춘 게 아니었고 루이 필리프는 즉위 후에도 자본가측의 이익만을 대변했다. 급분한 시민들이 벌인 2월 혁명의 결과로 공화정이 성립되지만 이후 등장한 나폴레옹 3세 역시 황제를 선언하면서 공화정도 민주정도 너무나 멀게만 보인다. 이러한 상황. 다소 용맹스럽지만 강인하고 유연한 정책을 폈던 나폴레옹에게는 넘치는 추종자들이 있었고, 실각 후에도 그를 그리는 이들이 많았다. 



이전 나폴레옹의 인기와 명성을 입고 당선된 나폴레옹 3세는 곧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이로서 보나파르트 왕조의 막이 열린다. 1842년에 세상을 떠난 스탕달은 이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거나 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쿠데타를 반대하다 국외추방을 당한 이가 위고다. 그는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을 전전하면서 19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한 걸로 알려졌다. <노트르담 드 파리>가 1831년, <적과 흑>이 1830년에 발표되었다. 위고의 문학인생은 추방 전과 후로 나뉜다. 1862년에 나온 <레 미제라블>과는 다른 정치상황에서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쓰여진 것이다. 이 시기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 세계를 통틀어 가장 최초의 근대적 혁명으로 불려왔다. 


요약하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 처형 이후 나폴레옹의 쿠데타 성공, 자유,평등,소유권을 인정한 1793년 헌법 제정, 안팎의 흉흉한 전쟁이 거듭된 시기를 거쳐 워털루 전쟁(1815)에 의한 나폴레옹의 실각까지가 스탕달이 사회주의 소설로도, 애틋한 사랑의 심리주의 소설로도 읽히는 이 작품을 내놓은 배경이다. 정확히 루이 필리프가 취임한 해에 나왔고, 주인공 쥘리앵을 작가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같도록 설정한다. 부정으로 얼룩진 혼란한 시대에 남몰래 침대 아래 숨겨둔 나폴레옹 초상화가 발각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쥘리앵들이 이 사회에도 얼마나 많은가. 이 목표지향적 보나파르티스트는 신학교 교장의 신임과 영리한 두뇌로 라몰 후작의 비서로 들어가 사교계의 꽃으로 부상한다. 후작의 딸 마틸드와의 사랑이나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기병연대의 중대자리는 쥘리앵의 신분을 고속승진시키지만 이후 찾아온 비극에 비하면 영광의 축에도 못 끼는 불꽃같은 순간이기도 했다.



여느 고전이 그렇듯 스토리상의 속력전이나 짜릿한 쾌감은 덜하다. 대신 반종교, 반체제, 혁명적, 저항적인 작가의 사상이 잘 반영되어 세상을 향해 돌진한 꽃다운 젊은 청년의 말할 수 없는 비극을 체화시킨다.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고결한 저울질은 바닥과 하늘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다. 운명순응자들의 끝을 알 수 없는 몰감각이 쓸쓸하다. 정확히는 피곤하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막연한 세상에서 저마다의 숫자만큼이나 존재하는 기준, 잣대, 경계, 원칙이란 숫자 0에 0을 곱한 듯한 모양새 또는 시그마나 인테그랄처럼 정답이 떨어지는 투명하고 신속한 기제가 아니다. 첫 장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의 고독해질 마지막을 짐작하고 있었다. 슬프고 애처로운 비상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가 우리의 정답이라 확신할 순 없어도 그가 우리의 대안 중 하나이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쥘리앵은 우리들을 닮았고, 저녁 시간의 유쾌함을 지켜주는 드라마 속 갈등유발자들과도 닮았다. 어쩌면 나를 그리고 당신을 너나할 것 없는 모두를 닮았다. 두려워해야 할 것, 궁금해 어쩔 줄 몰라야 할 것은 결말이 아니라 바로 나쁜 줄 알면서 품은 마음이다. 뭉개버린 원칙, 깨버린 금기, 등한시해야 했던 욕망이다.

 




이쯤에서 꼬꼬마 때 좋아한 Wellington's Victory을 다시 듣는 건 나폴레옹에게나 프랑스에나 스탕달에게나 적과흑에 조금은 미안한 일이지만 먼지 쌓인 피아노 뚜껑을 열고 결혼 축하곡집, 체르니, 하농, 소곡집, 명곡집,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의 연주집을 뒤적이는 대신에, 누가 연주했는지 올렸는지도 모르는 Wellington's Victory을 연달아 재생시킨다. 승리의 포만감과 환희가 넘실대는 경쾌하고 가벼운 멜로디가 난데없이 땅에 닿지도 않는 다리로 피아노 학원 의자에 앉아 몇 번이고 건반을 두드리던 작은 여자아이를 눈앞에 데려다준다. 이게 봄과 여름 사이 적과 흑의 유일한 결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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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2 0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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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2 02: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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