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영혼은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큰 혼란이 벌어져요. 영혼은 머리를 잃고, 사람은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거죠. 영혼들은 그래도 자기가 주인을 잃었다는 걸 알지만, 사람들은 보통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의사의 진단은 얀의 마음을 더 불안하게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그럼 제가 제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말씀입니까?"

현명한 의사가 대답했습니다.

"영혼이 움직이는 속도가 육체보다 아주 느리기 때문이에요. 영혼은 아주 먼 옛날, 우주 대폭발 직후에 생겨났어요.
당시엔 우주가 이렇게 빨리 돌아가지는 않았어요. 그땐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볼 수 있었죠. 환자분은 자기만의 어떤 장소를 찾아 편안히 앉아서 영혼을 기다려야 합니다. 분명히 환자분이 이삼 년 전쯤 갔던 곳에 환자분의 영혼이 있을 거예요. 기다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몰라요. 제가 드릴 다른 약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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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핫하다는 론 뮤익 전시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미술관 나들이.

대기 줄이 어마어마하다 하던데 평일 오전 10시 반 입장해서 그런지 관람에 방해가 될 정도로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도슨트는 11시에 있었긴 한데,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제공되는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했다.

김영하 작가의 차분한 음성이 듣기 좋았으나, 생각보다 짧았다.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Flag=1

1~3명 단위로 도슨트 하는 그룹이 있어 궁금했는데 까르띠에 VIP라는 얘길 들었다.

부럽네.


전시실 입장하면 한켠에 전시해설이 비치되어 있다.

관람 후 나중에 읽어봤는데 오디오 가이드 내용의 축약판이다.

MMCA 홈페이지에서 제공되는 리플릿을 한 장으로 편집한 것이다.


<마스크 II>

작가의 자화상이기도 한 이 작품의 제목이 얼굴이나 자화상이 아닌 마스크인 것은 작품을 뒤에서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볼 수 없는 나의 잠든 얼굴이 궁금해진다.


<나뭇가지를 든 여인>

으랏차차, 힘을 내!

무거운 저 나뭇가지는 삶의 무게이던가.

버티고 있는 모습이, 어쩌면 내 지난날과 닮아 있지 않은가.

그 순간, 마음 한켠이 뭉클해졌다.


<침대에서>

어? 이 작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을 한참 더듬어 사진첩을 뒤져 본 결과, 2017년 8월, 서울시립미술관 까르띠에전에서 봤었더라는.

그땐 작가의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확실하게 각인되었네.

이 작품 앞에서는 인증샷 시그니처 포즈가 있다는데 그건 못 찍었다.

난 저 이불 밑이 왜 그렇게 궁금하지? ^^;;

작가의 작품 제작 과정을 보면 보이지 않는 곳도 제대로 만들던데, 이 작품에 대한 내용은 없어 궁금했다.

이불의 주름마저도 작가가 의도한 것일 텐데 전시 때마다 저걸 어떻게 똑같이 표현할까 싶어 지난번 전시 때 찍어놓은 사진과 비교해 봤는데 같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정답은 아직 모름.


<치킨 맨>

뭔가 소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 긴장감이 느껴진다.

저들이 왜 저런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인지, 작가는 왜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었는지도 궁금하다.


<젊은 연인>

좀 어려 보이는 커플, 딱 아들이 생각났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커플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게 아니다.

슬프기까지 해 보이는 표정과 뒤에서 잡은 손목이 불편한 상황이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유령>

작품 설명에서 사춘기 소녀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어색함과 수줍음이라는 해설도 나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왜 다 슬프게만 보이지?


<쇼핑하는 여인>

슬프고 또 슬펐던 작품.

두 손 가득한 짐, 어쩌면 아기까지도 삶의 무게인 것 같고,

코트를 입었으니 날씨는 제법 쌀쌀할 텐데 발목을 드러낸 바지를 입혀서 추워 보였다.

그래서 또 슬퍼.

아이는 엄마의 시선을 갈망하는데 엄마는 퀭한 눈으로 다른 곳을 응시한다.

나도 아이들의 눈길을 피하고 있진 않았는지 돌아보았다.

작품 제작 과정에서 살짝 보여주는데 코트 안쪽 아기띠에 안긴 아기까지도 디테일이 살아있다.


<매스>

코너를 돌아 이 작품을 마주하자마자 작은 탄성이 나온다.

백 개의 두개골,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고 한다.

껍데기를 벗기면 인간은 다 똑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여기부터는 6전시실이다.

전시실 조도도 달라졌다.

<배를 탄 남자>

나체인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하고 있는 걸까?

조난을 당한 것 같은 고생한 흔적도 없고, 물 위에서의 뱃놀이를 즐기는 유유자적한 모습도 아니다.

이 상황이 있기 전 스토리도, 이후 어떻게 저기에서 나올지도 궁금하다.


<어두운 장소>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대기 줄이 있다.

어두운 곳에서 오롯이 나만 작품과 정면으로 마주하여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무섭기도 하고, 어둠 속에 얼굴만 둥둥 떠있는 것 같아 어지럽기도 하다.

나는 백설 공주에 나오는 요술거울이 생각났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바로...................... 너?


고티에 드블롱드는 론 뮤익의 작업을 유일하게 기록한 작가라고 한다.

사진과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틸 라이프>와 <치킨/맨> 두 다큐를 볼 수 있다.

음성은 거의 나오지 않는데도 꽤 시간 동안 집중하면서 보게 된다.

이런 것도 조각이라고 하는 건가?

궁금했던 작업과정을 보니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영상 관람에 있지 싶었다.

전시실 밖의 교육 프로그램을 보기 전까지는.


전시실을 나오면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따로 "교육"이 있는 게 아니고 전시를 본 후 연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는데

이게 진짜이지 싶다.

자신에게 질문해 보는 시간, 이 기획 너무 좋잖아!

나미애 교수의 추천작품이다.

5,6월 순차적으로 소개된다고 하니 다음 달에는 다른 작품일 수도 있겠고, 그것도 궁금하다.


추천 목록과 함께 그림책도 준비되어 있어 더 좋았다.

특히 아주 오래전 너무너무 좋았던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의 최혜진 작가가 각 키워드별로 그림책을 추천했다.

안 봐도 벌써 좋을 것 같은 예감.


<인생서점> 그림책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연약함과 취약함


>> 고독


>> 현실과 비현실


>> 일상의 깊이


>> 친숙한 낯섦


>> 삶의 무게


>> 응시: 바라보는 방식


>> 삶과 죽음


이 중에서 <바위와 소녀> 한 권을 읽었다.

론 뮤익의 <나뭇가지를 든 여인>과 표지 그림이 닮았다.

호기심에 들춰봤다가 아... 너무 슬퍼.


물론 나는 이 작품에서 슬픔보다는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의 씩씩함을 생각했지만.


좀 더 시간이 허락했다면,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더 오래 곱씹어 읽고 싶었다.

삶의 무게보다는 본능에 충실해져야 해서 목록만 참고하고 도서관 찬스를 이용하기로.


<인생극장>에 손바닥시 써보기 양식도 제공되었는데

이 또한 긴 시간이 필요하지 싶어 일단 가져만 왔다.

나태주 시인과 나민애 교수의 친필을 확인하니 떨렸다.

나도 꼭 써봐야지.


https://youtu.be/crH3uwTDE7M?si=6fhEKwG_E7g0aHcZ

도록은 구입하지 않았다.

MMCA 유튜브 채널에 있는 전시해설은 볼만하다.


론 뮤익의 작품을 보면 볼수록 다 어둡고 슬프다.

보면 볼수록 힘들기도 하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비극의 보편성"을 느낄 수 있다.

거기에서 얻는 위로, 그래서 이 전시가 인기가 있나 보다.


+



https://still-life.kr/#

<인생극장> 안내문에 있던 QR코드를 찍어봤더니 심오한 질문들이 쏟아진다.

나와 인생, 삶과 죽음, 고독 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된다.

한번 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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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5-06-14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사실적이라 무서워요😭 직접 보면 강렬할거 같아요

딸기홀릭 2025-06-14 22:50   좋아요 1 | URL
직접 보면 신기해요 정말 사실적이거든요
작가가 특수분장을 했었다네요
 

행동경제학에는 현상유지 편향이라는 이론이 있다. 진보와 보수의 길이 눈앞에 놓여 있을 때 인간은 대체적으로 보수의 길을 선택한다는 이론이다.
(...) 위험과 기회가 공존할 때 인류의 상당수는 위험을 피하는 선택을 한다. 그래야 연약한 동물인 인류가 생존 확률을 더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진보는 늘 어려웠다. 자기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찾아 도전하려는 사람이 충돌하면 대부분 전자가 이긴다.
(...)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현상유지 편향이 만연한 속에서도 인류는 끝내 진보를 이뤄냈다는 점이다. (...)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두려워함에도 그 속에서 진보를 누구보다 절박하게 여기는 송곳 같은 돌연변이들이 꼭 존재하기 때문이다.
- 서문 - P8

미국 NFL에서 감독을 지낸 배리 스위처 BarmySwitzer가 금수저들을 향해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는데 그(정용진)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기가 3루타를 친 줄 알고 살아간다. 그리고 홈에 들어오면 자기가 대단한 능력이 있는 줄 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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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지,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런데 모를 리 없는 저열함 같은 게.
- P140

문득 네 어릴 때 생각이 난다. 네가 막 걷기 시작했을 무렵 뽕뽕 소리 나는 샌들을 신고 아장아장 동네 골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그럴 때면 나는 뿌듯한 감정이 들면서도 왠지 네가 그대로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가슴이 저렸지.
부모들은 한 번쯤 다 겪는 감정이고.
그런데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 채운아. 나도 그럴게. 그게 지금 내 간절한 소망이야.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
채운아. 한 번은 네가 또 한번은 내가 서로를 번갈아 구해준 것뿐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렴.

미안하다.
- P182

삶은 가차없고 우리에게 계속 상처를 입힐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 마지막에 좋은 이야기를 남기고, 의미 있는 이야기 속에 머물다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 작가의 말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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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리고 대답은 짧게, 얼버무리지 말고.
그는 알지 못한다. 그녀가 입을 열면, 소리를 내면...... 입 속에서 너울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을 해금해버리면. 그가 알아서는 안 되고 알 필요 없는, 그러나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음이 불현듯 튀어나올까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건 아마 흘러나오거나 새어 나오는 고요하고 점잖은 방식이 아니라, 얼기설기 서툴게 꿰맨 자리가 잡아채어 뜯기면서 비집고 나오는 모습일 것이다. 그 자리엔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 찢긴 나비의 날개처럼 흩어져 있을 것이다.
- P67

생각을 매 순간 하되 생각에 빠지면 죽어.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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