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옛집에서

                                                                  -윤중호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은 아닐까?

 

더 추운 곳으로, 기러기 진즉 떠난 윗말 강어귀에

도리어, 강바람 싸늘하고 봄비 서러워

이미 닫힌 사립문 앞에서 서성대다, 비에 젖어

멍하니 저무는 하늘만 바라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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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5-09-07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은 아닐까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비로그인 2005-09-07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누아님도 이 시를 골라주셨군요. 으흠..시어가 싸르락거리면서 머릿속을 막 돌아댕겨요. 계절 탓인가..

이누아 2005-09-0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저도 제일 먼저 첫 구절이 눈에 띄었어요. 첫 구절이 이상하게 익숙하다 했는데 아마 기형도의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에서의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이라는 싯귀와 겹쳐 느껴졌던 모양이에요. 기형도의 저 시를 좋아하거든요.
복돌님, 고향, 옛 집에 홀로 서 있는 그런 느낌을 줘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할머니집처럼. 고향에 왔지만 이미 너무 늦은 걸까요? 하늘조차 저물고 있네요.

2005-09-08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목에서 

                                                                      -윤중호

어릴 때는 차라리, 집도 절로 피붙이도 없는 처량한 신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뜬구름처럼 아무 걸림 없이 떠돌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칼날 같은 세상의 경계에 서고 싶은 적이 있었다. 자유라는 말, 정의라는 말, 노동이라는 말, 그리고 살 만한 세상이라는 말, 그 날 위에 서서 스스로 채찍질하며 고개 숙여 몸을 던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시를 쓰고 싶었다. 천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듯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시.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 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

대천 뱃길 끊긴 영목에서 보면, 서해 바다 통째로 하늘을 보듬고 서서 토해내는 그리운 노을을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

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

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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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9-07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
이 시인의 시집 사봐야겠습니다.
너무 좋은데요?^^

비로그인 2005-09-07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두 노파님 통해 알게되었는데, 좋더라구요.

이누아 2005-09-07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연은 "아무것도~또렷해"입니다. 한 연인데 줄 바꿀 때 붙이질 못했어요. 저도 이 시가 마음에 들어요. 그중에서도 "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가요.

저도 서재지인께 받은 선물입니다. 모두들 고맙습니다.^^
 

당신이 무상함에 함축된 진리를 정말 이해해서 알아차렸습니까?

그것을 당신의 모든 생각, 호흡, 움직임과 합치시켜 당신의 삶이 바뀌었습니까?

당신 자신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져 보시오.

자신과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순간마다 기억하고 있으며 그래서 모든 존재를 언제든지 자비심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죽음과 무상함을 통렬하고도 절박하게 이해해서 매 순간마다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두 질문에 대해 당신이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덧없음을 제대로 이해한 거요.

                                              -소걀 린포체 저, 오진탁 역, [티베트의 지혜], 민음사,p.57

 ==========================================================================

이 책을 읽고 있다. 나는 한꺼번에 여러 책을 읽는다. 자기 전에 읽는 책, 일어나서 읽는 책, 다니면서 읽는 책, 집중해서 읽는 책이 모두 다르다. 잠들기 전에 [달라이라마, 죽음을 이야기하다]를 반복해서 읽다가 이 책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잠들기 전에 읽는 책으로 하기엔 너무 흡인력이 있다. 읽을 때마다 눈이 번쩍 열린다. 잠들기 힘들게 하는 책이다. 결국 오늘 낮에도 읽는다.

이 책에는 혼자 읽기 아까운 구절들이 가득 차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간혹 그 구절들을 공유하려 한다. 그 첫 번째 구절이다. 이 구절은 생이 무상하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게 한다. 그리고 그 말은 애초에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소걀 린포체의 이 두 가지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뒤에야 무상함을 말할 수 있겠구나...무상함이 체득되었다고 할 수 있겠구나...불교의 진리가 나와 함께 있다고 할 수 있겠구나...그제야 나는 불자라고 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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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5-09-06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으니 다시 이 책을 읽고 싶습니다. 읽는 내내 감동과 공감의 한숨을 내뱉게 하던 책입니다. 요즘은 자꾸 새책 보다는 읽었던 책에 더 손길이 갑니다. 죽음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행복한 일상 속에서도 무상함의 슬픔을 느끼던 제 자신에게 아주 맞는 책이었어요.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책입니다.

이누아 2005-09-0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모르셨군요. 님의 리뷰를 읽고 이 책의 대강의 내용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관심도 갖게 되었고. [티벳사자의 서]와 이 책 중에 무슨 책을 먼저 읽을까 하다가 이 책이 더 편한 것 같아 이 책을 먼저 샀어요. 동네 서점에서 충동구매한 거지만요. 님 덕에 읽게 된 책인데 인사가 늦었네요. 고맙습니다. ()()()

비로그인 2005-09-06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는 아니다, 후자도 아니다..입니다. 전자는 그런대로 인정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후자는 아무래도 내공을 쌓아야겠죠. 죽음에 관해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후련해지고 다시 버거워지곤 개운해집니다. 평온함은 제 일상과는 먼 이야기일까요..슬퍼요, 많이..

이누아 2005-09-06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일이 있나요? 어머님이 많이 편찮으신가요? 아니면 그저 마음이 힘든가요? 슬프시다니 염려가 되네요. 요즘 아침 기도 때 복돌님을 위해 기도해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밖에 없으니...그저 님의 평온을 기원하고, 함께 슬퍼합니다.

로드무비 2005-09-07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 책이 또 한 권 느는군요.

이누아 2005-09-07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전 아직 다 읽지도 않았는데...님께 추천해드린 셈이 되었네요. 읽으시면 리뷰 남겨 주세요.
 
참선일기 - 잠든 나를 깨우는 100일간의 마음 공부
김홍근 지음 / 교양인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알라딘에 적힌 리뷰의 찬사를 보고 선뜻 읽어보고 싶었다. 고맙게도 알라딘에서 알게 된 벗이 이 책을 선물해 주셨다. 감사드린다.

저자는 100일만 참선수행을 한 사람이 아니고, 그 전에도 계속 해오던 사람이다. 그러다 현웅 스님이라는 선지식을 만나고부터 자신의 공부에 어떤 변화를 느낀 것 같다. 그렇게 가까이, 매일 점검을 받을 수 있는 선지식이 있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복이다. 그 변화의 기쁨으로 이 글이 시작된 것 같다.  

저자가 한 선체험이나 선체험 이후 저자가 가진 태도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도 이런 상태로 며칠만 가면 펑 하고 뭔가 터질 것 같은 적이 있었다. 죽비소리가 귀찮게 여겨졌다. 나를 앉은 채로 두라! 그리고 집에 돌아갔는데도 그런 상태가 계속 되었다.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속해 있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자고 난 후, 사라졌다! 그래서 용맹정진이나 오매불여 같은 상태가 요구되는가 보다 생각했다. 자꾸 그 상태로 가고 싶었다. 그 상태가 좋았다. 당시는 무여 스님을 뵌 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라 스님의 법문 테잎을 늘 듣고 있었는데, 스님께서 어떤 체험을 하더라도 거기에 매이거나, 다시 그 상태를 기다리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체험을 도반 보살님께 했더니, 그런 체험은 누구나 다 하지만 그 체험에 묶이지 말고, 그 체험을 흘려 보내라고 하셨다. 그런 스님과 도반 보살님들 덕에 삼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체험은 너무 강렬해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저자 역시 자신의 선체험 상태로 "되돌아가거"나 그 상태를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저자의 대단한 점은 참선수행을 하면서 글을 쓴 것이다. 화두가 순일할 때(그런 일은 잘 흔하지 않았지만)는 글이 잘 써지지가 않는다. 자신이 충만해서 다른 것을 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분은 글자로 적어서 다른 수행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역시 이 분도 충만할 때는 쓸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승의 말이 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 책은 [선방일기]가 아니라 [참선일기]라 그런지 참선에 대한 그의 열정이나 생각에 집중되어 있다. 간간이 수행이 생활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또 참선이 생활이 되는 그런 수행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별로 없다. 참선으로 인해 마음이 변하고, 생활이 변화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핵심이지만 그것은 이야기는 아니다. 이야기는 구체적인 어떤 것을 요한다. 그런 것들은 아주 간간이 드러난다. 전시회를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자연을 보거나, 무엇을 하거나 참선일기 안에는 그 모든 것이 선수행과 관련하여 적혀 있다. 모든 것이 비유인 듯. 아직 그 자체가 선은 아니고, 선수행의 방법으로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 점이 아직 생활이 되지 못하고, 생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게다가 참선일기가 되어서 그런지 수행과 여행과 법문이 있지만 홀로 있는  것만 같다. 우리가 모두 상호의존 속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이 덜 든다. 그가 그것을 이야기로는 강조하고 있다 하더라도. 또 매일의 느낌과 수행이 적혀 있었지만 이 글이 아주 솔직하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해지려고 애쓴 것은 같은데...그냥 내 느낌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행의 과정을 글로 써서 객관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독특한 경험을 했거나 변화가 왔을 때, 아니면 수행이 처절했을 때는 적기가 쉬울지 모르지만 일상에서의 수행은 반복이다. 잠이 왔고, 망상이 일었고, 다리가 저렸고, 관계 속에서의 반성을 했고...저자는 자신의 수행을 통해 몇 가지를 말해 주고 있다. 지금 참선수행을 하는 이들과 체험을 공유한다는 점, 선지식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 수행이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 수행의 근간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그런 근거들을 가지고 우리를 참선수행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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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6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9-06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리가 저리다, 잠이 왔고, 망상이 일고..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다는 점..참선의 리얼리티가 살아있네요.^^

이누아 2005-09-06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 리얼리티가 바로 이 책의 최대 장점이에요.

니르바나 2005-09-08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날개에 있는 저자의 약력을 보고 한 권 구입했습니다.
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다석선생님으로, 도반이 지었다면 틀림없겠지 하고요.
아껴 읽는다고 앞부분만 보고 책더미속으로 쌓여 들어갔는데
이누아님의 리뷰를 보니 다시 꺼내 읽어야 겠군요.

이누아 2005-09-1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재가자의 수행인지라 그런지 자극이 많이 되는 책입니다.

반조 2005-10-23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서평 잘 읽었습니다. 책상물림의 저와 일상 속에서 수행하시는 이누아님의 차이가 서평의 차이를 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이누아 2005-10-2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녀 가신 줄 몰랐어요. 님이 소개하신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를 주문했어요. 그 책에서 저도 님처럼 보석을 발견하기를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반조 2006-08-27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 님, 이제 이누아 님의 서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아요. 언제나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달라이 라마 죽음을 이야기하다
달라이 라마 지음, 제프리 홉킨스 편저, 이종복 옮김 / 북로드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모든 것을 남겨놓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친구를 위해, 적을 향해 온갖 나쁜 짓을 했었다        - -붓다

이 말씀은 반대로도 여전히 적용된다. 내 친구와 적이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남겨놓고 떠날 것임을 알지 못한 채 나는 그들에게 온갖 나쁜 짓을 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죽고 싶었다". 그러나 죽을 수 없는 이유를 3장이나 써서  친구에게 보냈다. 친구의 답장은 "그래도 오죽하면"이라는 한 구절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스스로 죽은 어떤 사람을 비난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죽고 싶었으나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바로 다음 해, 나는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한 선생님을 찾아가 "죽음이 두렵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은 "죽음은 네 그림자와 같다. 네 손을 보렴, 죽음과 이미 손을 잡고 있단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렇게 내게 죽음은 갈망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후 나는 나 스스로가 사고로 두 번이나 죽을 뻔했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봤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으나 죽음이 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내 손을 쳐다본다. 그러면 죽음이 정말 손을 잡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하다. 여전히 가족과 이웃의 죽음 앞에서 그것은 멀리 보내버리고 싶은, 혹은 잊어버리고 싶은 무엇이다. 그래도 그것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모든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내게 죽음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던 선생님은 늘 학교에서 "죽음학" 같은 과목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셨다. 누구나 알아야 하고, 누구나 겪게 될 그런 일인데 말이다. 이 책은 죽음학 과목에 교재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판첸라마의 시를 달라이라마께서 설명해 주시는 형태로 씌어진 이 책은 죽음 바로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수행에 관한 책이다. 죽음의 순간에 혼란과 공포 때문에 가장 중요한 시간을 우왕좌왕하며 보내지 않도록 돕는 책이다. 실제로 나는 여러 스님들께 죽음의 순간이나 죽음 후 일정 시간 동안 영가들이 아주 예민하고, 맑은 정신상태를 가질 수 있어서 그 시기에 어려운 법문이나 경전을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천도재 때 법문이나 독경을 한다. 어쨌든 이런 중요한 시기에 수행할 수 있으며, 그것이 환생이든, 윤회든, 극락왕생이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시한 죽음의 명상은 내게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명상이 뭐 재미있는 것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내게 명상은 재미있는 것이다. 이 명상은 빨리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자기 전에 판첸라마의 시를 읽는 것으로 명상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이 책은 죽음 전반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죽음, 그 순간에 관한 것이다. 사실, 죽음은 순간이지만,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은 순간이지만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햇살과 물과 토양에 의존해서 잎이 자라고 열매가 맺은 뒤에 떨어지고, 누군가의 입에 들어가거나 다시 흙에 묻혀 태어난다. 이 책은 전 과정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극을 주지만 그것들을 자세히 보여주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 때문에 죽음의 "순간"이 익숙하지 않은 내게 이 명상이 확 끌리는 무엇이 아니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음의 순간은 너무나 중요해서 달라이라마는 그 순간에 이 명상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을 갖지는 못하지만 그 순간을 그냥 놓쳐버릴까 지금도 매일 수행하신다고 하셨다. 나나 내 이웃 역시 그분처럼 그 순간, 수행의 가장 좋은 시기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런 명상이나 시에 관심을 놓치 않게 된다.

비록 명상에 익숙해지지는 못했지만 이 책 덕에 죽음이 철학이나 사고의 대상이 아닌 체험이며, 수행의 대상임을 더 가까이 느끼게 되었다. 더 가까이, 더 전체적으로, 더 내 삶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소걀 린포체의 "티베트의 지혜"를 읽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삶을 회피하거나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죽음에 대해 담담할 때 삶에 담대해진다. 그런 면에서 이런 책은 삶을 도와주는 책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이런 "觀" 혹은 명상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것이 참선수행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삶에서의 모든 수행은 죽음의 수행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가족과 이웃의 죽음 앞에 울부짖음으로 대응하는 전도된 나의 행위가 나와 그들 모두를 바른 견해와 바른 체험으로 이끌 수 있는 행위로 변화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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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9-05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대한 생각이 일단 정리되고 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살면서 중요한 문제는 밀쳐두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어리석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장단에서 못 벗어나지요.
가끔 이렇게 자세를 가다듬을 뿐......

비로그인 2005-09-0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일이지만 죽음을 앞두고 편안히 생을 마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어요.
제가 늘 이누아님께 감사드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누아님 만나뵙기 전에는 죽음이 마냥 두렵고 허무했거든요. 그런데, 삶과 죽음이 하나, 라는 사실을 님께 가르침받곤 현재에 보다 충실하고 더욱 즐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 물론 충실한다고 해서 담박에 개과천선한 건 아니지만요. 그냥 걸러 들으시압! 헤.^^
이런 리뷰는 신문지면 같은 곳에 실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어요.

이누아 2005-09-05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관해 생각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했지만 지금처럼 죽음이 "현실적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습니다. 가족의 죽음이 처음이 아닌데도 이런 걸 보면, 끝까지 수행자로서 살고 싶어했던 언니가 준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로드무비님, 우리 모두 아직은 잘 안 되지만 끊임없는 관심으로 사소하고, 불필요한 근심과 염려를 밀쳐 내고, 중요한 것들을 우선 순위로 끌어 당겨요!
복돌님, 님에게 그런 여유가 분명 생기실 거라는 믿음이 일어요. 그리고 가르침이라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저 스승들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지요. 저야말로 님에게서 어떤 따뜻함을 느낍니다.

혜덕화 2005-09-05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변에서 거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글을 읽어도 그것은 내게 <관념>이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끔, 내가 죽을때는 거추장스런 옷을 벗듯이 내 몸을 벗어나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이유가 옷을 벗듯 내 몸을 벗는 것, 나뿐 아니라 내가 아는 모든이가 그렇게 되는 것이 내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누아 2005-09-0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님의 댓글에 대해 잔뜩 대답을 했는데 어쩌다 갑자기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저도 님처럼 제 자신과 제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이웃과 세계가 피하고 싶어하는 고통과 죽음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알아차리게 되기를 발원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무도 안 읽었지만 했던 말 또 하는 게 민망하군요. ^^

2005-10-12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