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언제나 그가 성취했으며 잘한 것들을 상기하게 하자.

자신의 삶이 건설적이었고 행복했다고 느끼도록 돕자.

그의 좋은 품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그가 잘못한 것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흔히 죄책감, 유감, 의기소침 등으로 상처받기 쉽다.

이런 감정을 그가 자유롭게 드러내도록 하고 그에게 귀기울여 그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그와 동시에 적당한 시기에 그에게 자신의 불성을 반드시 상기시키고, 명상 수행을 통해 마음의 본성에서 쉬도록 고취하자.

특히 괴로움과 고통은 그가 본래 지닌 것이 아님을 그에게 분명히 밝혀둔다.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희망을 발견하게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민감한 방식을 발견해야 한다.

그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머물지 않아야 한층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티베트의 지혜], pp.349-350

=============

아래에서 둘째 줄에 있는 희망은 삶에 대한, 혹은 생존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간호하는 사람은 "힘내세요", "몸이 좋아질거예요" 같은 말을 하지 못하도록 교육을 받는다. 그들이 죽음을 부정하고, 그것에 분노하는 긴 과정을 거쳐서 겨우 그것을 수용하게 되었는데, 그런 부질없는 희망을 다시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희망은 아마도 죽음과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일 것이다. 죽음이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닐 것이라거나 그의 잘못이 모두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거나  죽음의 순간 신이나 조상이나 성인들이 그를 보호해 주실 거라는 그런 희망일 듯하다.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라...사실, 우리도 모두 죽어가는 사람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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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0-11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권총자살한 친구와 즐겁게 이별하기 위해 흥겹게 악기를 연주하던 친구들이 생각나네요.
전 개인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 가까이 지내는 누군가가 손을 좀 잡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이누아 2005-10-1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은 시인의 사회, 자살...이런 단어를 보자마자 오늘 뉴스가 떠오르네요. 자살한 아이와 교실에서 맞아 죽은 아이 생각...마음이 무거워요...

혹시라도 이웃에 살게 되면(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혹시라도 친하게 지내게 되면, 혹시라도 제가 좀더 살아 있을 만하면...손 잡아 드릴께요. 멀리 있어도 손 잡아 드리러 갈께요. 저 말고도 복교 신도들이 많겠지만...지금 제 맘이 그래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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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뒷 표지에는 작가가 왜 이 글을 썼는지에 대해 쓴 말이 적혀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무시하기로 한다. 그의 의도 역시 섬을 지배하려 했던 초기의 로빈슨처럼 인위적이며, 이 책의 자유로움을 앗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를 쓴다. 또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책 뒤편에 놓인 작품해설도 읽지 않는다. 내 마음대로, 나오는 대로 하겠다. 나는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겠다. 모든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므로, 또한 우주이므로. 로빈슨이 자신이 스페란차와 합일되는 듯이 느끼듯이 나는 이 이야기와 한 덩어리가 되어 간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대구 외곽에 있는 광덕사라는 절에 간 적이 있다. 그날은 무슨 행사가 있어서 공부도 하고, 거문고 연주도 듣고, 초를 들고 탑돌이도 하고, 캠프파이어도 했다.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흥분되고 기뻤다. 캠프파이어라는 것도 처음 해 봤다. 그 불가에서 스님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불었다. 어떤 작은 틈이 있어서 서늘한 바람이 내 따뜻한 행복 언저리로 불어 오고 있었다. 뜨거운 불가에서 느낀 그 서늘함을 나는 곧 잊어 버렸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 때가 되어 내 내부에 있는 틈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 틈은 어둡고 서늘해서 모든 의미들을 삼켜 버렸고, 나는 "무의미"에 갇힌 듯한 답답함과 그 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을 술로 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틈은 점점 커져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커다란 틈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틈 앞에서 이제 그 틈 속으로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 이야기를 나는 단편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그려 내려고 시도까지 했었다.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이 틈은 로빈슨이 그의 배에서 스페란차로 이동하는 그 순간이기도 하며, 그가 점차 한 인격체로서 스페란차를 받아 들이기 시작할 무렵 어둠 속에서 걸어 들어가는 동굴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게다가 그가 진흙 속에서 발가벗고 누워 한없이 늘어질 때, 그리고 그 진흙 속에서 나왔을 때의 후회감 역시 비슷하다. 무의미가 엄습하는 때에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계획적인 삶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용솟음친다. 그래서 나는 로빈슨이 진흙에서 일어나 성서를 꺼내 읽고, 농사를 짓고, 법률을 정하고 하는 계획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 까닭을 알 수 있다. 그런 회의와 불신은 축 늘어진 어깨와 막막함을 가져다 줄 뿐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기억할 수 있는 과거와 그 유물들로, 누구나 살아왔다고 여겨지는 그 삶으로 얼른 돌아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가 필요했다. 첫번째 타인은 하느님이자 성서였다. 그는 권위 그 자체인 하느님의 말씀의 찌거기를 따라 살기로 한다. 거기에서 부여되는 권위의 한 자락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물시계를 통해 삶을 통제하려 한다. 두 번째 타인은 항해일지였다. 그의 항해는 끝난 지 오래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일기라고 하지 않고 항해일지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유지시킨 채 글을 쓴다. 어느 수필가의 말처럼 "모든 쓰여지는 것은 보여지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일지는 나중에 그 글을 읽게 될 타자(그것이 시간이 지난 후의 자기 자신이 된다 할지라도)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것이다. 그 세 번째는 바로 스페란차였다. 그는 그녀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다가 어머니로, 연인으로 변신시킨다. 왜냐하면 그녀만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생명을 탄생시키고 있었으므로 그도 그의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하느님이나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타자보다는 그녀가 필요했다. 살아 있는 가축이나 그 개 텐과 같은 움직이는 생명체가 있었으나 그들을 타자로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위나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하며, 끝없이 착하고 다정하신 하느님과 언젠가 만나게 될 인간과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는 여인, 그리고 생명의 바탕을 이루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물시계까지 갖춘 그는 완벽했다. 그런 그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야 했지만 스스로 진흙으로 돌아갈까봐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까 두려웠던 것이며, 이 완벽함 속의 틈을 불쑥불쑥 느꼈을 것이다. 틈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릴 용기가, 아닌 그런 생각조차 불경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그것을 무너뜨릴 존재가 필요했다.

 

그 존재는 방드르디였다. 저자는 방드르디가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한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다. 여전히 이 책의 주인공은 로빈슨이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틈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이다. 로빈슨이 스페란차에 온 초기에 발견한 그 환상의 배와 같은 것이다. 그 배 위에 서 있는 여인이 죽은 자신의 누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본 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던 바로 그 장면말이다. 하느님의 권위 아래 질서를 창조했으나, 그의 딸까지 피어나게 했으나 오래도록 홀로 있었던 그는 환상의 방드르디를 만나게 된다. 로빈슨이 총을 들고 죽이려고 했던 바로 그 존재, 권위로부터, 과거로부터 벗어난 그 존재는 로빈슨 자신이었다. 기막힌 우연-그러나 나는 그것을 로빈슨의 속마음, 혹은 무의식이라고 생각한다-으로 살아남은 그 존재는 금요일이다. 예수가 죽은 그 금요일. 그러므로 로빈슨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과거와 권위를 죽이러 온 존재였다. "쌍둥이가 달 속에서 태어난다. 서로 마주 붙은 그들은 마치 수백 년 동안의 잠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움직인다"(p.287)라는 구절에서 보듯 그들은 애초부터 하나였던 것이다.

 

애초부터 하나였던 그를 만나는 순간, 그는 틈에서 부는 바람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익혀간다. 계획된 삶 바깥의 틈 쪽으로 얼굴만 돌리면 바로 진흙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는 오류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것이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항상 우위에 서 있어야 할 것 같았던 자신을 버려야  했으므로. 스페란차와 그 안의 모든 것은 그의 소유였고, 그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그것들과 교감하고, 히히덕대고 있었다. 아무 노력도 없는 듯 보였다. 그것이 로빈슨에게 불타는 질투심을 가져다 주었고, 방드르디에게는 매질을 당하게 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는 태어나서 모든 사회적 활동을 익히지만 죽음을 익히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갑작스런 것이기도 하다. 마치 그가 일궈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듯이. 방드르디는 죽음이다. 애써 외면해 왔던 죽음, 동시에 갈망해 왔던 그것. 그것의 자연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어서 어떤 상황과 마주쳐도 놀라지 않는다. 심지어 화이트버드호에 들어갔을 때조차 그는 히히덕거리며 그곳에 원래 있었던 존재처럼 행동한다.

 

이 책에서 그런 자연스러움에 대한 질투는 부러움으로 변해가고, 결국 문명과 계획된 삶을 암시하는 하얀 새-화이트버드호- 대신 검은 독수리가 사는 곳에 머물기로 한다. 이제 그는 겨우 죽음, 혹은 틈에 익숙해지고 있었으므로 삶이 만들어낸 익힌 음식을 토해냄으로써 완전히 스페란차에 정착한다. 그러나 방드르드는 떠난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인 그를 자신 속에서 살려냈기에 분리된 그가 이제는 필요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떠나도 된다. 그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고, 누구도 곁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이므로 어디에 가도 그의 존재방식은 자연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니 그를 염려하지 마라. 이제 남겨진 로빈슨을 보자. 그에게 또 하나의 존재가 생성되었다. 그것은 화이트버드로부터 버려진 어린 로빈슨이었다.

 

이전에 그는 삶 쪽에 서 있었다. 그가 갈망한 죽음은 그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과 하나되기 위해 그의 성기로 파종하며 "대지와 혼인한 자가 죽어 잠들다"(p.155)는 표현처럼 은밀한 자신만의 성, 혹은 죽음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죽음 혹은 방드르디는 이제 한 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새로운 생명, 어린 로빈슨이 그의 곁에 남았다. 그는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의 조화로 존재하면서 어린 로빈슨을 보살피지 않고 던져 둘 것이다. 어린 로빈슨의 이름은 목요일이다. 어린아이들의 일요일, 그는 로빈슨이 자신이 노인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아니 노인이 되지 않았던 것처럼 언제나 어린 아이인 채로 존재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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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0-05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 근사한 서평입니다.
inua10님!^^

비로그인 2005-10-05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다른 동료들이 듣거나 말거나,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우오우오우오, 쫙쫙쫙!
전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은 것이 아니었군요. 이렇게 다양하고 멋진 해석이 가능할 줄 몰랐어요. 아니, 해석하고 싶었는데 제 무지와 게으름, 닿을 수 없는 능력이 완강히 버티고 있었던 거에요. 부끄럽습니다!! 이 주의 마이 리뷰감이구만요!!

2005-10-05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5-10-0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냥 이누아라고 부르세요. 영문과 숫자를 쓰려면 불편하잖아요. 님이 근사하다고 하시니 우쭐해집니다.^^;;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건 전적으로 복돌님 때문이에요. 님의 리뷰를 읽고 읽게 된 책인데 이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는 표현을 하시다뇨? 전 책 읽는 내내 복돌님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직도 할 말이 많아요...이를테면 스체란차의 성적 이미지로 본 로와 방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는데 몸도 지치고, 불쑥 튀어나오는 생각들을 진정시키기도 어렵고...어쨌든 재미있었어요. 다 님 덕분이에요.

숨어 말씀하시는 분, 제가 오히려 님을 알게 되어 기쁘고 고맙습니다.

2005-10-12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5-10-13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리뷰 기다릴께요^^
 

왈로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댓글에 남긴 걸 보니 아버지 이야기가 하고 싶어진다.

 어릴 적 아버지는 무서웠다. 목소리도 굵고, 크고, 남매 넷이 나란히 줄을 서서 인사를 하지 않으면 그날 저녁은 다 먹었다.

가끔씩 리더쉽 테스트 겸 상식 테스트가 있었다. 아버지는 주로 국사문제를 내시면 답을 아는 사람이 손을 들어 대답하는 식이었다. 정답이 많은 사람은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고, 손을 많이, 빨리 든 사람은 리더쉽이 있다고 인정되었다. 주로 손을 많이 들어야 했다. 아니면 심하게 실망하시니까...

아버지는 술을 조금 드시면 기분이 좋으시다. 노랫소리가 저 멀리서 들린다. 조금 더 드시면 연설을 하신다. 주로 주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이다. 말씀의 요지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지, 부모나 타인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니 열심히 하라는 것인데, 비슷한 내용을 매번 몇 시간씩 이야기하신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심하게 드셔서 인사불성 상태가 되면 "우리가 왜 사냐, 사는 게 뭐냐"하는 이야기를 아무도 안 붙잡고 혼자서 하신다.

언제나 민주주의식으로 가족회의를 하셨다. 그러나 의견을 말하는 데까지만 민주주의고, 결론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집을 새로 지을 때 집짓는 아저씨가 "이 집 주인아저씨는 왕이야, 왕. 아직도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네"라고 할 정도로 독재가 심하셨다.

술도 자주 드시고, 나한테는 공부도 못하게 하시고 해서 사춘기 때는 아버지께 많이도 대들었다. 대학에 가서 아주 잠시 생활야학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노동자를 위한 연극 공연이 학교에서 있어서 보러 갔다. 현대노동자들의 삶을 이야기로 꾸민 것이었는데 난 깜짝 놀랐다. 거기 우리 아버지가 서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와서 큰 소리를 치면서 발 씻을 물을 떠오라고 소리치는 저 아저씨,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대문을 여는 저 아저씨...아버지의 삶은 그냥 노동자의 삶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배운 것 없이 할 수 있는 것을 근근이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객관적으로 무대에 선 아버지는 약하고, 위로받아야 할 모습이었다. 아버지...

사실, 아버지가 아닌 한 사람으로 보면 우리 아버지는 키도 크고, 잘 생기시고, 노래도 잘 하셨다. 특히나 독립심도 강해서 할아버지집을 나와서 고향 마을에서 처음으로 쌀 한 가마니를 주고 전세를 사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손엔 늘 책이 있었다. 그것이 족보책이든, 명심보감이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의 일기장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사촌 동생이 우리 아버지를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표현하는 걸 들었다. 군대 가기 전엔 몰랐는데 군대 가서 우리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었다고. 언니들에게 초록색 동화책을 사 주셨고, 아이들이 이해하기 좀 어려운 것이긴 했지만 영화관도 자주 함께 데리고 다니셨다.

그렇게 강하시던 분이 큰언니가 결혼했을 때 집에 와서 방문을 닫고 우셨다. 나중에 아버지께서 해주신 이야기지만 아버지는 평생 세 번 우셨다고 한다. 큰아버지가 월남 가셨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큰 언니가 시집갈 때...

어쨌든 이렇게 얘기하니 아버지가 멋있는 사람 같다. 사실 아버지는 책임감 있고, 멋진 사람이었는데 그걸 아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와 부딪혔던 시간만 생각하곤 했었다. 그 공연을 보고,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내게 아버지는 항상 강한 존재였다. 강해서 내가 아무렇게나 해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죄송한 일이 참 많았다. 

요즘은 이런 연습을 자주 한다. 엄마나 어머님을 볼 때 엄마나 어머님이 아닌 그 분들 자체로, 한 인간의 삶으로 좀 멀리서 쳐다보기를 해본다. 어떨 땐 내가 이대로 늙어 그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그분들께 바라는 것이 없어진다. 한 인간이 나에게 이토록 헌신적으로 무언가를 주기만 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보면 고개가 수그러진다. 남은 생을 한 인간의 삶으로서 행복한 삶을 사시길 마음으로 빌고, 또 그렇게 하실 수 있게 도와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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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2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버님 이야기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호탕하고 매력적인 분이시네요. 특히 국사문제, 크하하하..이누아님은 괴로우셨을지 모르지만, 듣는 저로서는 무척 흥미로운 광경이네요. 저희 아바이는 늘 술에 젖어 계셔서 지금도 들큰한 술냄새가 풍기는 듯 해요. 한평생 막노동자로 사셨는데 돌아가시고 난 후, 생각해보니 동네 개그맨이셨어요. 항상 유머를 잃지 않으셨고 맘이 따뜻하셨던 점이 장점이라면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가족들에게 신뢰를 잃었던 점이 참..안타깝네요.

이누아님 부모님의 건강을 빕니다.

왈로 2005-09-29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난다. 그 연극 보고 한참을 얘기했었는데. 아마 심지하고 보고 왔었드랬지?
시간이 지나면 난도 너처럼 얘기할 수 있을까... 아버지에 대해... 애가 둘씩이나 있는데도 아직까지도 이러고 있구나.

로드무비 2005-09-3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의견을 말하는 데까지만 민주주의고 결론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무지 웃었습니다.
부모님도 한 인간으로. 객관적으로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복돌이님, 아유, 님의 아버지 얘기도 잘 들었어요.
너무 멋진 분이셨네요.
이문구 소설 주인공 같아요.^^

이누아 2005-09-30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그러니까 복돌님의 개그는 아버님께로부터 온 것이군요. 님의 아버님은 우리 아버지랑 비슷한 느낌을 주는군요.저도 님의 어머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왈로야, 기억하는구나. 너는 안 봤구나. 그때 안*학이가 있어서 너도 함께 본 줄 알았는데...기억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다. 요즘도 반야심경 읽니? 이유도 없이, 무조건 읽기 전에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봐. 그냥 아버지가 건강하도록, 아버지가 사람들과 잘 지내도록, 아버지가 즐겁도록, 아버지가 사랑받기를 기원해봐. 이루어지든 말든, 마음이 내키든 안 내키든 그냥 쭉 해보라고 권하고 싶네. 사실,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고, 병든 부모를 위해 기도하는 건 절반 정도가 할 수 있고, 건강하지만 나와 부담스러운 관계에 있는 부모를 위해 기도하는 건 잊어버리기 쉽거든. 한번 해봐. 한 석달 열흘만. 이유없이. 접수했나?

로드무비님, 이야기로 하자면 우리 가족들 이야기는 아직 한 꾸러미입니다. 요즘은 괜스레 아버지가 보고 싶고, 아버지 묘에도 다녀오고 싶어져요. 어쨌든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좋습니다.

니르바나 2005-10-0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살아계신 분처럼 아버님를 그리셨군요. 이누아님
하긴 육신의 끈만 놓으신 것이니 "나 여기있다"고 말씀하시는 아버님 목소리가
마음속에 살아남아 있는 이상 생의 이편 저편의 구분이 쓸모없는 셈이지요.
야반 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 말씀하신 경봉큰스님의 유언이 생각납니다.

이누아 2005-10-0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알라딘의 다른 분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우리 가족은 여섯 명입니다. 이제 네 명이 되었지요. 배우자들도 생기고, 자식 있는 형제도 생겨 그 숫자를 넘기고도 남지만, 각자의 가족이 생겼지만 제 마음 속의 우리 가족은 여전히 여섯 명입니다. 그런 건 변하지 않더라구요.

icaru 2005-10-0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버지 생각도 나네요... 이누아 님의 아버지와 겹치는 실루엣도 있고요... 찡긋...

이누아 2005-10-0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모습이 아마도 겹치는 부분이 조금씩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복돌님의 "서울 이미지"(http://www.aladin.co.kr/blog/mypaper/744125)를 보면서 예전에 쓴 일기가 생각이 나서 꺼내 읽었다. 그 노트 앞에는 서울일기라는 이름도 붙어 있다. 거기에 있는 글을 보고 웃는다. 지금 읽어보면 좀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고치지 않는다. 몇 개 중에 97년 3월 22일 토요일에 쓴 것을 옮겨본다. 재미로.

==============

이제는 알 듯

 

사람들, 사람들, 이 밤에도 마로니에 공원엔

아, 사람들. 들. 들, 사람의 들.

소주 반병을 만두 라면과 함께 마시고

혜화역에서 4호선을 타고

사당역에서 호흡을 삼킬 듯한 뜀박질로

마지막 2호선 전철, 밤 11시 45분 차

사람들 틈에서 탔지.

아, 그 틈. 틈, 들의 틈에서.

봉천(奉天)6동, 말끔히 씻고 방에 앉으니

죽은 내 아버지가 전화기를 쳐다 본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늦은 시간에도 전화를 하곤 했지

고향으로, 친구에게로

나 살아있다, 나 살아있다, 전하려는 듯

이제는 조금은 알 듯

알 듯

내 아버지의 늦은 통화

=============

목련꽃을 든 여자

 

목련꽃을 든 여자가 남자와 함께 낙성대역쪽으로 걸어간다

여자는 목련꽃의 향을 맡으려는 듯 코를 갖다 대고 있다

지금은 전철이 다 끊어진 시간

저들도 그것을 아는지 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비켜간다

저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꺾어진 목련은 어디에 향을 남길까

저 꽃잎은 내일도 저리 하얄까

저 여자는 내일도 꽃을 들고 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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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27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누아님! 정녕 이 시가! 이 아름다운 시가, 오롯이 이누아님의 시란 말입니꽈? 오..'이제는 알 듯'이란 시, 넘 좋아요.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또 한편으론 현실적이고 때론 몽환적인..우오우오우오, 쫙쫙쫙!!

이누아 2005-09-27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래 전에 쓴 거죠? 시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냥 일기죠. 3월 22일 일기를 택한 이유는 그날 한 네 가지 이야기를 한꺼번에 썼는데 그때 써놓고 오빠에게 읽어줬더니 전 "이제는 알 듯"이 좋은데 오빠는 "목련꽃을 든 여자"가 좋다고 했던 기억이 나서 이 두 개를 골랐어요. 꿈보다 해몽이라고...님의 박수, 고맙습니다.

big_tree73 2005-09-27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일기장에다 베껴 놔야지~~~~ 히히~ 안녕~ 이누아~

이누아 2005-09-27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나무야.

니르바나 2005-09-28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로 꺼내 읽은 이누아님 일기의 내용에 감동의 울림이 온몸으로 잔잔히 퍼져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왈로 2005-09-28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목련꽃에 한 표!
아직 내겐... 넘기 힘든 아버지라는 벽 때문에....
또... 아직도 난 불안한 젊음인것 같아서...

이누아 2005-09-29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올렸는데 올려놓고 보니 97년이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년도 안 된 때네요. 제가 뭘 하기 전에 늘 먼저 와 앉아 계신 듯했지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제 10년이 다 되어 가네요.

왈로야, 학교 때 사형제도에 대해 위의 글처럼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너는 그게 내가 쓴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었다. 기억 안 나지? 기억나게 짜잔하고 그 글을 보여 주고 싶다만 아쉽게도 대학 때 썼던 글들은 다 사라지고 없다. 어쨌든 그게 내가 쓴 글 중에 유일하게 뭘 주장하는 글이었는데...아마 그때 너는 의견이 분명한 걸 좋아했나봐. 오, 지금은?
 

어느 연로한 남자가 병원 침대에 누워서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혼자였다.

그를 방문하는 가족이나 친구도 없었다.

그는 항상 얘기할 사람을 필사적으로 갈망했다.

그녀가 그를 진찰했다.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찼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듣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신이 내 죄를 용서하리라 생각합니까?"

내 친구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할말이 없었다.

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그녀는 감추고 싶었다............

고통과 당혹감에 빠진 그녀가 내게 물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답했다.

그의 곁에 앉아 그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겠다. 

만일 우리가 충분한 관심과 자비를 보이면서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눈다면,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이 아무런 영적인 믿음이 없을지라도 깜짝 놀라울 정도의 영적인 깊이를 보여주는 것에 대해 나는 몇 번이나 깜짝 놀라곤 했다.

누구나 삶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삶의 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그가 자신의 진리, 즉 그가 이전에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던 진리의 풍요로움, 부드러움, 심원함을 발견하도록 도움으로써, 우리가 죽어가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돕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곤 했다.

치유와 자각의 근원은 우리 각자 내부 깊은 곳에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고 그가 자기 자신 안에서 스스로 그것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티베트의 지혜], pp.346-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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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죽어가는 사람인가? 의사가 가망 없다고 하는 사람들...호스피스 병동이라면 침대에 누운 그의 손을 잡고 다정히 얘기해 주고, 그의 분노를 가엾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가 죽을 병이라면 아마도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어서 살아 있는 그를 보러 갈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난하는 저 사람은 숨을 쉬고 있고,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확실히 살아 있다. 그래서 그의 분노에 함께 분노했는데 다음날 그가 사라졌다면? 그의 손을 잡을 시간도 없었고, 그를 돕는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면? 죽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시간과 용서 받을 시간이 주어진다. 왜 죽기 전이어야 할까? 왜 이렇게 건강하고 살아 있을 때는 잘 안 될까?

 

이 책에서 말하듯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사랑 가운데, 죽음을 잘 맞이하도록 돕는 것보다 더 거룩한 재능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우리도 관대해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이도 내면을 바라보려고 하기에 각자의 내부를 자각하기에 더할 수 없이 좋은 때이기에. 

 

하지만 회사 다닐 때 내가 좋아했던 주임님은 안락사를 주장했었다. 그분의 아버지가  죽을 병에 걸렸고, 그래서 곧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6년을 사셨다. 건강하게가 아니고 곧 죽을 것처럼 아프면서 6년을 사셨다. 그 6년 동안 결혼 적령기였던 그분의 언니와 오빠들은 아무도 결혼을 하지 못했고, 집에는 빚만 남았다고. 그리고 그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끔찍한 기억이었던가 보다. 고통 속에 있는 아버지와 다른 방식으로 그 고통을 나누는 가족들...너무 힘들어서 자신은 그런 병에 걸리면 안락사를 시켜 달라고 자신의 남편에게 이야기 해 두었다고 한다. 긴 병에 효자가 없다고 했던가...간혹 텔레비전에 나오는 효자와 효녀가 있지만...

 

그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와 이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결국 죽을 운명에 처해 있으면서도 아직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한 사람이 사라져 있다. 내가 손을 잡고 위로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 사라졌다. 그날 그렇게 사라질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더 살아 있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라질 줄 알았는데도 내가 언니에게 화를 낼 수 있었을까? 언니에게 충분한 관심과 자비를 가지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사라지기 전에 그런 것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언니가 좀더 살아갈 수 있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가슴이 아프다. 살아 있는 것은 얼마나 중하냐? 그런데도 죽을 때가 되어서야, 심지어 죽어서야 관심과 자비를 가지는가? 만약 언니가 살아있고, 주임님의 아버지처럼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곧 죽을 것처럼 6년을 더 살았다면 언니는, 나는 어땠을까? 이런 가정을 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덜 아플 때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것이 가슴이 아프다. 난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언니는 몰랐을 것이다. 내가 언니를 위해 기도하고, 언니를 위해 울었던 시간에 대해 언니에게 한 번도 말하지 못했는데...손을 잡고 얘기해 줄 걸 그랬다.

 

아무래도 이 책을 읽으니 언니 생각이 많이 난다. 글을 쓰기 전까진 괜찮았는데 이제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작할 때 할말이 따로 있었는데.. 이게 아니었는데...휴...다른 말을 하려고 해도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러니 가만히 두자. 이렇게 말하고 싶은 나를...

 

아침과 저녁에, 또 밥을 먹기 전마다 언니를 위해 기도한다. 불보살들께서 지혜와 자비로 올바른 곳으로 이끌어주시고, 보살펴 달라고.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그리고 약간의 수행의 공덕이라도 있다면 불보살님들과 같은 단계를 증득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나도 그들처럼 지혜와 자비로 나 자신과 이웃을 이끌고 보살필 수 있도록 말이다. 항상 혼자 벽을 응시하는 저 남자처럼 우리는 가끔 그렇게 누워 있다. 나는 저 의사처럼 아무 말도 않고 지나치고 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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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9-24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언니분은 다 아실꺼예요... 말 안해도 언니들은 다 안답니다. 그러니 언니를 위해 더 행복한 모습 보여주세요...

big_tree73 2005-09-24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웠는데 그래도 무언가를 쓰고 싶어서,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아서 지금 쓴 건 지우지 않을란다.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말을 하지 않아도 좋을텐데...

비로그인 2005-09-25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더 잘 할게요..ㅠ,,ㅠ

혜덕화 2005-09-26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동생이 아프고 난뒤 더 동생을 생각하는 것, 그 아이의 아픔을 진정으로 아파하기보다는, 나 같으면 이런 정신력으로 이겨낼텐데 했던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이드신 부모님께도, 건강하실때 자주 사랑을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고맙습니다.

2005-09-26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5-09-26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예, 우리 모두 행복해야죠.

나무야, 내 손은 아직 안 잡아도 돼. 길을 걷다 울고, 이야기를 하다 목이 메이는 걸 난 당연하게 생각해. 특별한 일이 아니야. 너라도 마찬가지일거야. 몇 년이 흐르면 울지 않고 언니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거야. 우리 아버지 이야기처럼.

복돌님, 혜덕화님, 손을 잡아야 한다면, 잡고 싶으시다면, 잡아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잡으시길 바래요. 곁에 앉아서 나지막하게 이야기 하시길...이제 저도 두 어머님께 그렇게 해야 겠지요.

속삭이신 님, 정식으로 문화나 시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어서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이런 단어는 제게서 좀 멀어요. 어쨌든 꿈보다 해몽이라고 해석이 멋집니다. 그리고 님이 보내신 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