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 기분이 째진다. 이런 기분에 관세음보살들 얘기나 좀 해야 겠다. 누가 보살 아니랴마는 생각나는 대로 우선 세 분만.

먼저 선방의 입승보살님. 연세가 86세 정도 되셨는데 선방을 열어 참선을 하신 지 3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선방엔 할머니들로 가득 차 있다. 5,60대면 젊은 보살이고, 나는 애기 보살이다. 재가자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선방 중에 제일 규율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오전에 가도 되고, 오후에 가도 되고, 하루 종일 해도 되고...자기가 정해 놓고 하면 된다. 대신 그 덕에 연세 드신 분들이 무리하지 않으시고 할 수 있고, 나 같은 약골도 참여할 수 있다. 저 보살님이 행여 세상을 떠나시면 이 선방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보살님은 그런 걱정 안 한다고 하신다. 또 누가 나타나서 잘 해 나갈 거라고. 화요일에 절에 가서 뵈었다. 오랜만이라고 반가워하시면 볼 좀 만져보자고 하시며 쓰다듬으신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항상 도반이라고 말을 높이셨는데 왠일인지 "아이고, 성정각 왔네. 오랜만이다. 얼굴 좋아졌네" 하신다. 손녀가 된 것 같다. 한 사람의 재가자가 크게 스님들의 도움 없이 이렇게 몇 십년을 선방을 꾸려 오신 공덕이 얼마나 큰 지 모른다. 지금도 결제 기간엔 3,40명의 보살님들이 수행하신다. 이 달 16일은 동안거 결제일이다. 거의 매일 만나 뵐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수녀님. 학원에 몇 달 다닐 일이 있을 때 만난 분인데 학원에서 늘 짝으로 앉아 공부하는 단짝 친구였다. 수녀님은 10년 정도를 중앙아프리카에서 봉사를 하셨는데 한국엔 잠시 들어오신 거다. 불교적 색채가 물씬 풍겨나는 이 수녀님의 어머니는 매일 천 배를 할 정도로 열심인 불자였는데, 수녀님께서 수녀가 되겠다고 했을 때 한 집안에 수행자 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지하셨다고. 수녀님을 만나는 내내 종교적 어려움은 없었다. 아마도 카톨릭이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태도를 누그러뜨릴 결과가 아닐까 싶다. 수녀님께 "수녀님처럼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분들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라고 했더니, 수녀님께선 "나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요즘은 성직자들도 너무 영성에 무관심한 경우가 많아요. 봉사 같은 것도 좋지만 자기 영성을 개발하는 것 역시 자신과 사람들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선방에서 공부하는 게 더 부러워요" 하신다. 수녀님이 때때로 얘기해 주시는 중앙아프리카는 좀 무섭다. 다행히 지금은 내전이 끝난 상태라고 하지만 전쟁의 위협과 배고픔은 여전하다. 수녀님은 이달 말에 중앙아프리카로 돌아가신다. 수녀님도 건강이 썩 좋은 편도 아닌데 들어가신다니 마음이 짠하다. 아마도 다음 주 화요일에 한번 뵐 것 같다. 수녀님은 내게 중앙아프리카라는 낯선 나라를 선물하셨다. 근데 그 나라, 좀 무겁다.

세 번째 보살님! 추나 선생님이다. 사실 난 방금 추나를 받고 왔다. 으흐, 하하, 음하하...마구 기분이 좋다. 받으러 가기 전부터 기분이 좋다. 새소리 들리고, 나무들 단풍 들었다. 오래 전부터 굽은 등과 어깨를 펴려고 애썼지만 성과가 없었는데 우연히 시댁 쪽 먼 친척분인 이 아지매에게 추나를 받았는데 아! 놀라워라 였다. 더 신기한 것은 마음이 밝아진다는 점이다. 마음이 부드러우면 몸이 부드러워지고, 몸이 부드러워지면 마음이 부드러워지듯 몸이 바르게 되니 마음이 바르게 되는 걸까? 모르겠다. 사실 어느 분보다 이 분에게 어울린다. 관세음보살이라는 호칭. 일일이 말할 순 없지만 그분의 인생은 덕을 베푸는 삶 그 자체였다. 지금도 그러시지만. 오늘 추나를 받으며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나요" 했더니 "자네가 기도하고 지냈다며? 다 자네 인연이고, 자네 복이지. 내가 하는 건 없어" 하신다. 그런 마음 때문일까? 추나를 받은 사람들은 기운이 솟는다. 얼굴이 밝아진다. 내게 어디 가서 기도할 것 없이 소박하고 작은 마음으로 덕을 베풀고, 바르게 살라고 하신다. 그러면 사람은 몰라도 하늘은 안다고 하시면서. 으흐, 당분간은 목요일과 금요일에 뵐 것이다.

에..또..그리고...하하 오늘은 세 분만 하자. 째지는 이 기분을 몰아 몰아...밥 먹고, 할 일 하자!

 

*삶으로써 가르침을 주시는 이 세 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나도 이 분들처럼 삶과 기쁨을 나누는 사람 되기를 발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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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5-11-03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만 읽어도 마음이 환해집니다. 님의 기쁨이 전염되나봐요. 좋은 인연을 많이 가지신 것을 보니, 전생이든, 현생이든 많이 닦으신 분인것 만은 틀림없네요._()_

2005-11-03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1-03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5-11-03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닦기는요...오늘 방도 안 닦았는데^^ 님 역시 삼천배 수행 그 자체로 이미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12:56속삭이신 님, 반갑습니다. 저는 익히 님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어서 낯설지만은 않네요. 추나는 뼈를 제 자리에 밀어넣어 교정하는 건데 보통 목이나 허리디스크인 분들이 많이 받으세요. 중국에서는 추나라고 하고, 양방에서는 카이로프라틱이라고 해요. 저는 특별히 아픈 데는 없지만 천장 낮은 다락방에 산 사람처럼 등과 어깨가 구부정해요. 혼자서 교정해 보려고 애썼는데 잘 안 되어서 도움을 받고 있어요.
17:47속삭이신 님, 위에서 대답이 다 되었죠? 브리핑에서 님의 웃음소리만 봐도 님인 줄 알고 반가워요.^^

비로그인 2005-11-04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어제 술이 깨면서 두통으로 깽깽거렸지만 그래두 손가락에 힘 주어 여쭙고 싶었슴돠. 기분 좋은 일이라두 생기셨수? 페퍼가 아주 환해요..

이누아 2005-11-04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제게 기분 좋은 일은 오빠랑 공부하는 거예요. 수요일날 저녁에 했지요. 또 제게 기분 좋은 일은 저런 분들을 뵙는 거예요. 어제, 오늘 뵈었죠. 그래서 기분이 좋아요. 게다가 오늘은 누가 엽서도 보냈더라구요!! 기분 좋겠죠?

비로그인 2005-11-04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새롭게 다가오네요, 공부..아, 그 기분 알 것 같습니다. 세계에 관해 질문하고 대답하고 알아가는 과정, 즐겁죠. 오래전에 그런 친구가 한 명 있긴 했었는데..결혼한 후론, 연락이 끊겼어요. 으음..이누아님이 좋으셨다니, 저도 덩달아 좋은뎁쇼. 흐..^^

이누아 2005-11-04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잘못 눌러서 댓글 쓰다 날렸어요.--;; 짧게 해야죠. 대략 공부가 강의를 듣거나 남이 한 말을 되새기는 건데 오빠랑은 그냥 막 말해요. 황당해도 괜찮고, 엉뚱해도 괜찮고,,,그렇게 공부하면 무의미하게 느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흥미진진해요. 정말 재미있어요.

니르바나 2005-11-07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오늘 만난 관세음보살은 이누아님이십니다.
선방을 지키지는 입승보살님 다음으로 선방을 여실 분은 이누아님 아닐까요. ㅎㅎ

이누아 2005-11-07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에요. 자꾸만 편하고 싶어져요. 그래도 조금 불편하고 오래 행복한 선방에 나가는 걸 그만두지는 말아야지 하고 있어요.

2005-11-07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 길에는 고단함이 있다.

          얼만큼 왔는지 돌아보지 말고 사랑을 다해 걸어라.

                                                                                                            -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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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1-0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대문에 걸어둡니다! 괜챦죠?

이누아 2005-11-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로와 격려가 동시에 되는 말이에요. 제게. 계속 중얼거리게 돼요. 이 말...낡은 엽서에서 발견한 이 말이 아주 마음에 들어, 대문에 걸까 말까 고민중이었는데 님도 마음에 드셨군요. 님의 대문에 거세요. 제가 거의 매일 님의 서재에 가니 그때마다 볼 수 있게요. 흡족! 근데 저 말 정확한지 모르겠어요. 그 엽서 보냈거든요. 보내고 나서도 저 말이 계속 생각이 나서 적었는데...

물만두 2005-11-02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Laika 2005-11-03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보기 좋은 글이네요..^^

이누아 2005-11-0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저도 읽고나서 혼자 예 하고 대답하는데...
라이카님, 낮에도 읽기 좋은 글이에요.^^
 

종이가 가볍다. 당연히 책도 가볍다. 책표지는 파랗다. 내용도 좀 파랗다. 강요된 침묵에서 벗어난 탓일까, 아니 단편이라 그런가, 좀더 희망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그런가, 생각보다 가볍다. 볼매를 맞을 뻔하고 부모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오긴 하지만 대부분 완고하던 아빠도, 울던 동생도 그들을 이해한다. 이해! 

강요된 침묵의 고통--내내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기사를 싣는다.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어떤가 하고.

==============

오마이뉴스 2003년 5월7일 오전 9:15  

윤씨의 죽음을 애도한다 
지난 26일 스무 살의 한 청년이 자살했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자신이 함께 해온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그는 유서에서 “수많은 성적 소수자들을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성경적이고 반인류적인지...”라며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해 분노했다. 그는 이어

죽은 뒤엔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윤○○는 동성애자다라구요

라며 스스로 아까운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털어놨다.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고달픔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한번쯤은 자살을 생각하거나 시도한다고 한다.  동성애자인권연대(대표 정욜・동인련)에서 활동하는 고승우씨는

동성애자로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점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다는 점

이라고 말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게 숨통이 막히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왜 어려울까.
한국 여성 성적소수자 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에서 활동하는 박수진씨는 “상담사례들을 보면 동성애자들은 성 정체성이 드러났을 때 실제로 갖은 고초를 당한다”고 밝힌다. 학내 왕따, 직장 해고, 구타, 아웃팅(outing, 타의에 의해 동성애자임이 폭로되는 것)하겠다는 협박으로 금품을 갈취하거나 성폭행을 당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가족과 친구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편을 택한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박씨는 이를 “이성애만이 정상이고 동성애는 비정상이라고 암암리에 교육받고 길러져온 사회환경 탓”이라고 지적한다...(중략)...<성적 소수자의 인권>(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 펴냄)에서 양현아 교수는 이 차별의 근간에는 ‘남녀가 결혼해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가족이다’라고 하는 이성애를 기본으로 한 가족제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해소되려면 근본적으로 기존의 가족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들은 성 정체성을 드러내도 결혼과 입양을 통해 가족을 구성할 법적 권리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또다시 소외되고 만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박수진씨는 “우리나라에선 아직은 꿈같은 얘기지만 동성애 가족 뿐 아니라 다양한 대안 가족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략)

지금 내 가족 혹은 친구의 하나가 동성애에 덧씌워진 편견과 차별로 고통의 늪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말로써만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보장됐을 때 인권은 실질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될 것이다. 동성애자 윤씨의 죽음을 애도한다.  /김보리 기자 (ttoruru@hotmail.com)

===========

그의 이름은 윤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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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1-01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현석 씨, 그가 살아서 이 책을 읽었으면 기뻐했을 텐데......

혜덕화 2005-11-0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때 남자 후배가 유난히 여자 선배를 따랐습니다. 우리는 그냥 봍임성 많은 후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그가 자살했다더군요. 죽고 나서야 그가 동성애자라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의 약혼녀까지 본적이 있는데..... 그도 불쌍하고, 남은 그녀도 너무 가슴아파서 한동안 말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윤현석님의 명복을 빕니다._()_
.

비로그인 2005-11-01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좀 내비두었으면 좋겠어요. 대체 왜 그런데요, 왜! 왜 그렇게 못 잡아 먹어 안달이데요..

이누아 2005-11-01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아마 그랬을 거예요. 제 생각엔 이 책이 청소년들이 숨기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책인 듯해서 맘에 들어요.

혜덕화님, 그렇게 말 못할 가슴들이 죽어가요. 하지만 제가 윤현석 씨나 그 남자 후배분이었다 해도 숨막히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를 택했을 거예요. 용기 있게 행동하고, 어려움을 견디는 분들을 보면 좋아 보이기도 하고, 그들이 겪는, 겪을 상황들이 안타깝기도 해요.

복돌님, 제 친구 중에 양손잡이가 있어요. 사실, 왼손잡이이지만 강요에 의해 글씨는 오른손 쓰거든요. 배드민턴을 그렇게 못 쳤다고. 근데 어느날 우연히 왼손으로 쳤더니 잘 치더라고. 왼손 좀 쓰면 어때요? 근데도 저 어렸을 때 왼손 쓴다고 야단 맞는 친구들을 많이 봤어요. 어떻게 해요? 왼손잡이인 걸, 왼손잡이로 태어난 걸. 그쵸?

비로그인 2005-11-02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고보니, 이 책에 쓴 리뷰나 페퍼엔 제가 다 똑같은 답글을 달았네요. 앗. 같은 의미라도 다른 표현을 썼었어야 하는뒝..크흣^^

이누아 2005-11-02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같은 생각이니 같은 표현을 쓰는 거지요. 괜찮아유~
 
 전출처 : 왈로 > 편지통에서 꺼낸 페이퍼들 3

미연아

방금 너와 통화했다. 엽서 버린 거 얘기하고 나니까 쓰고 싶다.

덕분에 시골밤이란 낙서가 새끼를 쳤는데 여기 적을 수 있겠다.


= 시골밤 1 (시골 온 첫째 날 밤) =

폭풍을 기다리는 하늘이 별을 감추고

눈을 뜬 것인지 모를

어둠 속에 앉은

풀벌레 소리


= 시골밤 2 (두번째 날 밤) =

어둠을 한 국자씩 떠낸 자리에

가만히 앉은 빛

땅의 별, 하늘의 별

어둠을 제외하곤 온통 별


나무마냥

팔을 환히 벌렸더니

확 안겨드는

바람


짙은 고요가 풀벌레를 깨운다.


=시골밤 3 (역시 두 번째 날) =

이 낡은 다리에서 그와 손잡고

듣고픈

황토빛 강물소리



= 아기와의 대화 - 바람 =

바람이 세게도 분다. 그치?

말똥말똥, 두리번 두리번

아니, 바람은 안보여

저 감나무 봐

막 흔들리고 감이 떨어지구 그러지.

바람이 그러는거야

말똥말똥, 두리번 두리번

아이, 참.

바람은 안보인데니까.


미연아, 편지란 때론 참 편한 것 같다.

만약에 이런 낙서들을 너한테 들려주겠다고 하면 아마도 네가 싫다고 했겠지?

시골에선 시간이 없는 것 같다.

해가 뜨면 사람도 눈을 뜬다. 난 6시면 일어나는데 그땐 이미 외삼촌은 밭에 가고 안 계신다.

저녁 7시 까지 냇가에서 놀다가 8시가 되어서야 저녁을 먹지. 그때가 어두워지는 때니까.

동례리 외갓집엔 늦게까지 구판장을 여는데 (구판장 알지? 마을 공동 가게로 개인 소유가 아니지) 병산에선 가게 있는 사람 식사하러 가면 문을 닫는다. 일정한 시간도 없이 그 사람이 배고프면 구판장 문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왜 얘기 하냐 하면 방금 모기향 사러 구판장 갔다가 허탕치고 왔거든.

여기저기의 벌레와 모기들에게 내 몸을 공양한 덕택에 가렵다.

그 공양한 부분을 바꿀 생각은 없는데 내 배는 거의 지속적으로 포화상태다. 아마 올 여름들어 제일 많이 먹어 대고 있는 때일 거다. 밥, 수박, 옥수수, 밥, 토마토, 옥수수...

으아, 배 부르다. 지금도 그득한 배를 하늘로 향하게 비스듬이 누워 끄적거리고 있다.

너무 열심히 논 조카 둘이 내 옆에서 자고 있고 마루에선 아버지와 형부, 언니, 사촌이 수박을 먹으며 (또 먹는다. 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넌 지금 뭐하고 있는지 통화할 때 물어 볼 걸 그랬다. 궁금하군 피곤해서 졸고 있었을까?

내일 ‘사람들’에 갈게. 동례리 친구집에서 따온 꽃사과 갖다 줄게. 참 귀여운 과일인데 난 시큼해서 못 먹겠더라. 예뻐서 갖구 왔는데 비닐에 넣어 둬서 좀 시들었을거다.

내일 보자. 차 한 잔 사줘.

카마 내일 보재이.


1994.8.2.화. 거창 가조 병산서

tjsgml (,,,꽃잎 다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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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5-10-3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왈로에게 쓴 편지란다. 94년 여름에 시골에 간 기억도 없다. 이 편지를 봐도 기억이 안 난다. 깜깜하다. 이렇게 친구와 이야기 나누었구나. 읽는 내내 즐겁다.

비로그인 2005-10-3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흠..살짝 끼어들겠숨돠. 음하하하..시골 생활..으흠..빨강머리 앤, 이 되셨군요. 아, 정겨운 묘사들...오늘은 정확하게 셈을 했습니다. 9년전의 일이군요..^^*

이누아 2005-10-31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꽃잎 다섯의 의미를 알고 계시죠?^^ 님과 며칠 전 나누었던 그 어둠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라요. 시골의 어둠...이 편지에서도 그게 보이네요. 저도 남이 쓴 거 구경하는 거 같아요. 정겨워요(내가 쓰고 이런 표현 쓰면 안 되나?).

니르바나 2005-11-01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고요하고 환한 날이시기를...

이누아님께 합장인사 드립니다.


이누아 2005-11-0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제 대문에 걸어야 겠어요. 보기 좋아요.
님의 오늘도 고요하고 환한 날이시기를..._()()()_
 

 
본 척도 하지 말라지만, 나도 참 쑥스럽지만 니 말대로 웃고 있다. 그때 웃었듯이 지금도 웃고 있다. 이런 글은 가슴에 간직하고, 웃고 싶을 때 꺼내 봐야 겠다. 나도 나이가 들어 뻔뻔해졌는지 낯간지럽지도 않고, 부담이 되지도 않는다.  나는 니 친구니 니가 한 번쯤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다. 흐뭇한 일이다.  
 
 
========큰나무의 블러그에서--------웃고 있어/ 이누아--------==============================
 
 


 
 


99년, 네가 서울살이 할 때지?

 

선풍기도 없는 봉천동 네 자취집에서 일주일을 지냈어.

 

하루 종일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너 오기만 기다렸지.

 

그 해 여름, 서울은 유난히도 더웠다.

 

담날 회사 가야 되는 널 붙잡고 떼굴거리며 새벽까지 수다.

(수다라고 하니까 웬지 젊은 여자 깰깰거리는 소리가 연상되지만...)

 

눈이 벌개가지고 출근해선 저녁에 또 노력봉사(?)

 

그래도 너 환하게 웃고 있다. 나도 웃고 있다.

 

이제와서 고백이다만 (나이를 먹으니 뻔뻔도 해지는 구나)

 

함석헌님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를 보고 

 

나는 네 생각을 했다.

 

불의의 사형장에서 죽을 만큼 훌륭한 사람도 아니면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주고 싶고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으며 눈 감을 수 있을것 같아.

 

이 편지는 쑥스러우니 본 척도 하지 말기다.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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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9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5-10-2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그렇죠? 제게는 하나도 안 깨져서 보이는데...사진을 지워야 하나?

비로그인 2005-10-29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보임돠! 크하하하...두 분, 웃음이 넘 맑쟎아요. 근데 이누아님두 샌들 속에 양말을 신으시는군요. 크흣..

이누아 2005-10-2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댓글 쓰셨다가 지우니까 저 혼자 뭘 보고 아니라고 하는지...코메디가 따로 없네요. 양말만 그렇나요? 안경도 그렇고, 윗옷도 그렇고...뭐, 서울에서 촌스러움의 상징이죠. 지금도 여전합니다.

왈로 2005-10-29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이누아는 만약 샌들 속 양말에 빵구 나 있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요. 그런 걸로 걸고 넘어지면 안 넘어가요. 참고로 하늘에 빵구난 건 디~게 부끄러워한답니다 ^.^
근데 이누아 친구에게 강한 질투가 느껴져. (참자, 참아!)

글샘 2005-10-29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롯데월드 분수대같군요. ㅎㅎㅎ

이누아 2005-10-30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왈로야, 그 이누아 친구 너랑 만난 적이 있다. 딱 한번, 북문 앞에서. 그 친군 너 기억하던데...우리는 더한 사진도 있잖아. 해운대!
글샘님,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