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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뿌리
조세희 지음 / 열화당 / 1985년 9월
평점 :
품절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우리는 날마다 죄 지으며 도시에 와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도시가 우리의 고향은 아니다.-p.80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눈, 만지면 까끌까끌할 터진 입술, 바람과 먼지에 찌든 머리칼과 때묻은 옷을 입은 짙은 쌍꺼풀의 소녀...그 소녀가 이 책의 표지에 붙어 있다. 침묵이라는 말이, 뿌리라는 말이 가져올 무게가 책을 펼치기도 전에 배경이 보이지 않는 이 소녀의 사진에 실려 있다. 책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아마 사진 때문에 선택했을-맨질맨질한 종이 위에 펼쳐진 글자들이 아이들의 일기에 가 닿았을 때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고등학교 때 읽고 하루 종일 울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렇게 울었던 걸까? 하고 묻자 오빠는 그런 책을 읽고도 울지 않는 사람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라고 했다. 아이들이 적은 글자 사이사이의 침묵이 무거웠다. 덮었다. 책을 덮어도 표지는 보인다. 공부하는 작은 상이 있다. 이 책을 그 상 위에 올려놓지 않고 상 아래에 두었다. 그 상 옆에서 기도를 하는 나는 책표지의 소녀가 매일 날 바라보고 있는 걸 봤다. 그런데도 우리는 눈이 마주쳐지지가 않았다. 이 죄 지으며 사는 도시를 떠나 고향에 가 닿으면 우리, 서로 눈 마주칠 수 있을까? 소녀의 얼굴에 먼지가 앉을 쯤에야 나는 책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한참 후에 가방에 넣어 두었다. 가방을 멜 때마다 그 소녀를 업고 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은 일요일. 일터에 나왔다. 일요일의 일터는 조용하다. 조금의 일을 하고, 비는 시간이 많아 가방을 여니 소녀가 있다. 다른 책도 없고, 나는 가볍게 소녀를 만나기로 했다. 글자를 다 읽었다. 사진을 본다. 그러다 나는 또 운다. 사진 때문인지, 아침에 받은 친구의 마음 아픈 소식 때문인지, 내 가슴의 돌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운다는 것처럼 쉽고 자연스러운 일은 또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제일 쉬운 방법으로 비극에 대처했던 셈이"(p.124)라고 하는 작자의 말처럼 나는 그렇게 제일 쉬운 방법으로 이 모든 이유에 대처했다.
사실, 얼마간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책 읽는 내내 꿈 이야기를 하는 듯 느껴졌다. 뒤섞여 있다. 아마 내가 책을 집중해서 읽지 못하는 탓일게다. 이렇게 꿈처럼 여길까봐 그는 두 번이나(내 기억에 그렇다. 더 많이 얘기했는지도 모른다) 같은 말을 했다. "우리땅 어느 곳의 역사가 20년밖에 안 된다는 것은 곧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p.41,p.138). 그가 내내 이야기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꿈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어떤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모르는 척 울기만 했다.
책표지의 그 소녀 이야기만 하고 그만두련다.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남의 집 이야기처럼 감상을 말하고 싶지가 않다. 아니면 내 안의 침묵의 뿌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입을 막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것에도 이렇게 입을 꼭 다물게 하는 내 침묵의 뿌리는 무엇일까? 이 모든 이야기에 내 책임이 있다고 하는 작자의 말에 겁을 먹은 것일까? 이게 그냥 70,80년대의 이야기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허튼 생각을 하다 책을 덮는다. 그 소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소녀...책을 덮는 순간, 소녀의 얼굴...그 얼굴은 이 책 자체이다. 하여 이 책은 덮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