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 석가모니 - 그 생애와 가르침
와타나베 쇼코 지음, 법정(法頂) 옮김 / 동쪽나라(=한민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고타마 싯탈타가 태어났다. 출가하여 수행하였다.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었다. 깨달음을 펼쳤다. 열반에 드셨다. 싯탈타가 어느 도시,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는가? 그의 부인은 몇 명이며, 어떻게 결혼하였나? 그의 스승은 누구이며,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가? 그 스승들을 왜 떠났는가? 그 스승들의 영향은 없었는가? 어떻게 고행했는가? 고행을 왜 끝냈는가? 왜 어떤 제자는 부처님을 만나자마자 깨닫고, 어떤 제자는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깨달음을 얻었는가? 데바닷타는 정말 지옥에 떨어질 제자인가? 부처님의 수행을 방해했던 마왕 마라는 어째서 천상계의 왕이 되어 있었는가? 깨달음 직전에 마신 음료는 무엇이었고, 열반에 이르게 한 마지막 음식은 무엇이었는가?......

이 책은 여러 경전의 내용을 가려 이성적인 내용만을 적은 책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시던 그 시대적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그분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간혹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마귀의 유혹이나 죽기 전 제자들의 모습, 유다의 고발 등을 부처님의 생애와 비교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의미를 부여할 정도는 아니고, 저자의 단상인 것 같다. 사실, 공정하고 객관적이라는 내 평가가 올바른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저자만큼 경전을 통달한 것도 아니며,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정견이 서 있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졌던 그렇지 못했던 저자가 가지려고 했던 태도는 그런 태도로 보인다. 

누군가의 전기를 읽을 때 안으로부터 그를 보거나, 가까이서 그를 보거나, 멀리서 그를 보거나 하는 시선들이 있다. 이 책은 멀리서 본다. 그 시대가 배경이 되고, 한 인물이 움직인다. 한번씩 확대해서 보여주는 장면 역시 부처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채우지는 않는다. 거기엔 마왕이 함께 있고, 제자가 함께 있다. 하다못해 나무나 음식이 있다. 덕분에 내가 알지 못하던 사실들도 눈에 띄었고, 그런 사실들은 부처님의 아내가 아쇼다라 한 분이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부터, 마왕 마라가 타화자재천의 왕이었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측면까지 다양하다. 담담하게 적혀 있는데도 읽으면서 생로병사 등과 같은 갖가지 고통과 번거로움이-그분이 그것들에 부정적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한 인간의 생에서 있는 만큼 그분에게도 주어졌다는 느낌과 동시에 그 안에서도 영적으로 빛나는 그분의 모습이 느껴졌다.

나를 떨리게 했던 한 구절,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과 인간들의 온갖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대들도 신과 인간들의 온갖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런 구절을 읽으면 전율이 인다. 나는 묶여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이런 구절이 커다랗게 보이는 것일까? 정말 신과 인간들이 나를 속박할까? 아무 것도 날 속박하지 않는다는 선언일까? 속박하는 것이 없지만 나는 신과 인간들을 통해 속박받는다. 왜? 나는 없는 나를 일으켜 그들과 대적한다. 그 때문이다. 그 때문이라고 해도 나도 신도 인간도 속박도 사라지지 않는다. 왜? 어리석음 때문이다. 에고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탐진치가 바른 견해를 어둡게 한다. 탐욕은 계율로, 분노는 선정으로, 어리석음은 지혜로 맑혀질 수 있다. 계정혜의 실천이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쉬운 일인지, 그렇지 않은 일인지는 두고서라도 그럴 수 있다니, 그럴 수 있다고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 있다니 참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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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7-18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가모니의 전기를 '카필라의 아침'이 한 편의 시적으로 서술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많은 사료들의 해석을 거쳐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던데요..
알라딘서 주문하려했더니 절판되어서 책방에서 직접 구입했는데요..
저도 곧 읽어보고 리뷰 올리겠습니다.

2006-07-18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6-07-1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기대할께요. 빌린 책이라 아무 때나 다시 읽기는 어려울텐데 님의 리뷰로 다시 목을 축일 수 있겠군요.
속삭이신 님, 천천히 얘기 나눠요. 말은 부질없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옛어른께서는 "말은 마음의 소리요, 행실은 마음의 자취"라고도 하시더군요. 제가 행실로서 예를 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천상병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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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7-11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항상 마음에 담고 있는 말입니다.

달팽이 2006-07-11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이 길 위로 부는 것인가
길이 바람을 불러들이는 것인가
길과 바람이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하지만 다시 떨어진 길과 바람
바람부는 길 위에 꽃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혜덕화 2006-07-12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_여여 하시죠?

2006-07-13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6-07-13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마음에 담아둘 만해요. 사진이 정말 만두군요. 귀여워요. 전 물만두 좋아해요. 먹고 싶다고 하면 제가 두려우시려나?^^
달팽이님, 혜덕화님, 금강경의 여여부동이라는 말이 떠오르는군요. 때론 여여하지 못하고, 꽃잎처럼 흔들리고, 흔들립니다. 두분 다 조금 있으면 방학이시죠? 흐뭇한 계획이라도 있으신지?
속삭이신 님, 님의 부재로 생긴 허전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다가 제가 양심선언할지도 모릅니다.-내부고발자, 이누아^^ 오늘도 무척 더울 거라고 하네요. 힘내요.


 
마이클 K -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띄는 건 질문들이었다. 끊임없는 질문들. 어디로 가고 있냐? 너는 누구냐? 왜 혼자지? 여기서 무슨 일을 해야 하죠? 왜 먹지 않나요? 타인이든 자신이든 질문들이 넘친다. 넌 누구냐? 어디로 가는 길이냐? 마이클인가, 마이클 피사기인가, 마이클즈인가...

그의 얼굴 때문에 K는 여자친구들이 없었다. 그는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편했다. -p.11

즉 나는 왜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이었다. -p.14

그는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했고, 어머니와 함께 있는 공간도 얼마간 부담스러워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를 돌보는 게 삶의 이유라고 쉽게 받아 들인다. 혼자 있는 게 편한데 어머니의 고향을 향해 가고, 어머니가 뼈가 되었는데도 어머니를 안고 어머니의 땅으로 향해 간다.  

전 지체하고 싶지 않아요. 시간이 없어요. -p.57
나는 지체하고 싶지 않아요.-p.66

왜 그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걸까? 어디로 가기에? 

나의 어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실 때, 자신의 인생이 끝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가 의지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그녀의 어머니 또는 그녀의 어머니의 혼이었다. 나에게 그녀는 성인 여자였지만, 그녀는 마음 속으로는 아직도 자기 손을 잡아주고 도와달라며 엄마를 찾는 어린 아이였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삶을 알 수는 없지만, 그녀 자신의 어머니도 어린아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끝이 없는 아이들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p.154

지체하지 않고 가고 싶던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고, 어머니의 고향은 아이들의 집이며, 자신은 그 집안의 아이다. 그가 찾아가고자 했던 곳은 자신의 근원이었고, 그는 그것을 "나는 정원사다"(p.238)라는 외침에 담아 버린다. 그러나 그 무모한 외침은 정원사든 지렁이든 아무 상관도 없다. 그가 지체하지 않고 벗어나고자 했던 도시는 허가증이 없으면 벗어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벗어난다. 수용소는 일종의 거주지다. 그곳을 벗어나면 거주지를 잃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벗어난다. 의사의 친절과 보호가 없으면 그는 죽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벗어난다. 왜?

어쩌면 사실 수용소 밖에 있는 것만으로, 동시에 모든 수용소 밖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지 모른다. 어쩌면 당분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성취인지 모른다. 감금당하지 않거나, 문에 보초가 서 있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수용소를 탈출했다. 어쩌면 내가 몸을 낮춘다면, 나는 동정심으로부터도 탈출하게 될 것이다. -p.239
 
그가 지체하고 싶지 않은 곳은 갇힌 곳이다. 마이클이든 정원사이든 지렁이든 자신이고 싶다. 침대와 먹을 것을 주고, 자신을 규제한다면 거부하겠다. 굶어죽어도. 그러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글쎄다. 그저 지금은 수용소 밖에 있는 것만으로, 누구의 제재 없이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 기뻐한다. 몸을 더 낮춘다면 동정심으로부터도 탈출할 수 있다. 몸을 더 낮추자....펌프에 물이 없다면 찻숟가락으로 물을 퍼올린다 할지라도 자신의 정원을 가꾸겠다고(p.241). 그래서 탈출한 그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전쟁 속에 있는 게 아닙니다."-p.183

그는 밤새도록 걸었다.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때로는 자유로워졌다는 생각에 전율감마저 느껴졌다. -p.129

그는 자유로움 속에 있다. 군의관의 말처럼 "단순한 환자 또는 전쟁의 희생자 또는 희생의 피라미드를 구축하는 단순한 벽돌 이상의 존재"(p.217)다. 그런 존재라고 누가 규정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를 내버려두세요. 그를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은 그의 허약함, 그의 병, 그의 고통, 닥칠지 모르는 그의 죽음...그가 그의 고통보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더 두려워했다는 걸 군의관이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의관도 갇혀 있다. 수용소, 환자, 전쟁 속에. 갇혀 있는 것을 자각하기만 하면 보인다. 자각한 후 군의관이 한 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당신의 정원에 관한 얘기를 할게요. 사막의 한복판에서 꽃을 피우고 생명의 음식을 생산하는 신성하고 매혹적인 정원의 의미에 대해서 당신에게 얘기해줄게요. 당신이 지금 향하고 있는 정원은 어느 곳에도 없고, 수용소 안을 제외한 어디에나 있어요. 마이클즈, 그것은 당신이 속해 있고, 집이 없다고 느끼지 않을 유일한 장소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에요. 그것은 지도에 나와 있지 않아요. 단순한 길로는 그곳에 갈 수도 없어요. 당신만이 그 길을 알 뿐이에요."-p.220
 
군의관의 말은 군의관의 말일 뿐.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잠을 자고 있었는데, 당신들이 깨웠던 거요. 그게 전부요."-p.162

그게 전부다.

읽는 내내 그가 흑인이고, 입술이 기형이며, 35kg의 약골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 버렸다. 그저 잠이 많구나. 삶과 죽음에서조차 갇혀 있지 않으려는 걸까? 그저 잠이 많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는 동정심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니까. 내가 그를 어떻게 말하든 그는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문득 궁금해진다. 마이클,

당신이 그처럼 눈을 크게 뜰 때, 당신이 보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요.-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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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6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한 나무               -유치환

 내 언제고 지나치는 길가에 한 그루 남아 선 노송(老松) 있어, 바람 있음을 조금도 깨달을 수 없는 날씨에도, 아무렇게나 뻗어 높이 치어든 그 검은 가지는 추추히 탄식하듯 울고 있어, 내 항상 그 아래 한때를 머물러 아득히 생각을 그 소리 따라 천애(天涯)에 노닐기를 즐겨하였거니, 하룻날 다시 와서 그 나무 무참히도 베어 넘겨졌음을 보았나니.

진실로 현실은 이 한 그루 나무 그늘을 길가에 세워 바람에 울리느니보다는 빠개어 육산의 더움을 취함에 미치지 못하겠거늘, 내 애석하여 그가 섰던 자리에 서서 팔을 높이 허공에 올려 보았으나 그러나 어찌 나의 손바닥에 그 유현(幽玄)한 솔바람소리 생길 리 있으랴.

그러나 나의 머리 위, 저 묘막(渺漠)한 천공(天空)에 시방도 오고가는 신운(神韻)이 없음이 아닐지니 오직 그를 증거할 선(善)한 나무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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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6-06-14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너무 좋군요. 어제밤에 축구 보다가 잠시 이누아님 생각을 했어요.전반전이 끝나고 쑥차를 마시면서 '참선 잘 하고 계실까?', 이사는 했을까'하는 생각.
저는 요즘 마음이 무기력증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요. 왜 그런지 나름대로 분석해서 이유를 잘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네요. 이 시를 보고, 마음을 추스려 움직이지 않으려는 몸을 움직여봐야겠어요._()_

잉크냄새 2006-06-14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라는 시어를 보니, 문득 나무처럼 속으로 나이 먹어야겠다는 어느 시인의 글귀가 생각나네요. 잘 지내시죠?

2006-06-14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14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6-06-14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여기 비 와요. 시원해요. 동문서답^^
잉크냄새님, 예, 잘 지냅니다. 님도 잘 지내시죠? 미국에 있는 친구 둘이나 방학이라고 귀국했어요. 친구들을 만나니 흥겨워요.
14:45분 속삭이신 님, 경험해 보지 못한 거예요. 기쁘게 메모 남기겠습니다. 너무 염치 없나요?
19:28분 속삭이신 님, 나무가 주는 그 사랑스러움...

2006-06-17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28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통의 크기([삶이 보이는 창]제46호)                                 

                                                                                      -이설야


 

내 동생 부부는 신용불량자이다. 2002년 미국에 가서 성공하여 돌아오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떠났던 동생 부부는 1년 반 만에 비행기 값만 겨우 마련하여 한국으로 돌아왔다.
꿈을 안고 떠나 미국 땅을 밟았던 동생은 한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매번 전화선 너머로 울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제부는 미국에 오면 나중에 호텔 지배인으로 앉혀 주겠다는 선배의 말만 듣고 사전 지식이나 충분한 고민 없이 도망치듯 떠났다. 미국 가면 처음에는 무지 고생하지만 나중에 성공하면 큰 부자가 된다고 했었다. 나는 제발 미국이고 뭐고 동생 고생이나 그만 시켰으면 했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부는 호텔이 아니라 세탁소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 가량을 일했다. 동생의 표현을 빌자면, 작업복에서 소금이 한 됫박씩 나올 정도로 노동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으로 자신들을 불러들였던 선배는 자신들이 외롭고 일할 사람도 구하기 힘들고 돈도 필요해서 동생 부부를 속여 머나먼 미국땅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지금도 그 선배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한다.

여행비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불법 체류자 신세에다가 돈도 거의 떨어지자 이러다간 미국에서 굶어 죽겠다 싶어서 부랴부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시댁에 얹혀살더니 한두 달 있다가는 집을 얻어 달라고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돈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러던 어느 날은 술에 취해서 전화를 했다. 지금 지하철인데 뛰어내릴지도 모른다고,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솔직히 난 동생의 무능력과 무지를 늘 한심하게 생각했다. 왜 노력을 안 할까?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 나 같으면 당장 나가서 일할 텐데,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할까, 별 일 아닌데, 나 같으면 그렇게 살지는 않을 텐데, 나 같으면 이렇게 했을 텐데…. 이렇게 ‘나 같으면 어떻게 할 텐데 왜 그럴까,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운 일일까’ 등등 내 중심적인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너무나 나중에 깨달았다.

나는 늘 나에게 받으려고만 하는 동생이 짐스러울 때가 많았다. 내 몸 하나도 힘겨울 때는 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고통의 크기’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10% 밖에 안 되는 고통이 동생에게는 90% 이상의 고통일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내 기준으로만 동생의 고통의 크기를 재단하고 지나쳐 버린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고 작은 생각인가?

우리는 종종 자기라는 아상(我相)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른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늘 그런 잘못을 범하고도 뒤늦게 깨우친다. 그러나 문제는 수많은 갈등 과정 속에서 잘못을 깨닫고 실천하기까지는 불필요한 감정소모와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에 있다. 최악의 경우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다. 그래서 나는 가끔 평상심을 찾으려고 산사나 명상수련장, 여행지로 떠돌지만, 현실로 되돌아왔을 때는 한 달도 못 가서 본색(?)을 드러낸다. 그러니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내 나름의 결론은 나를 인정하고 타인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나의 거울이기도 한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이해하는 마음은 절로 생기는 것이다. 이해하는 마음이 서로 앞선다면, 고통 또한 작아지기 때문이다.

지금 내 동생은 두 칸짜리 사글셋방에서도 귀여운 조카들이랑 잘산다. 제부는 미국에서 돌아와서는 딴 사람이 되었다. 멋쟁이 양복도 다 버리고, 중요하게 생각하던 체면이나 겉치레도 다 버리고 고물상을 한다. 비록 지인의 도움으로 컨테이너 박스에서 일을 하지만, 힘들어도 요행이나 행운을 바라지 않고 남이야 어떻게 보든지 의식하지 않고 묵묵히 힘든 길을 간다. 난 요즘처럼 제부가 예뻐 보인 적이 없다.




글쓴이 『창』 편집위원

삶이 보이는 창: http://www.samcha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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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6-05-2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들이 하게 되는 가장 큰 착각 중의 하나가 "나라면 저러지 않을텐데......"하는 터무니 없는 자신감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조차 아상인 줄 알면서도 쉽게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나를 보게 됩니다. 저를 돌아보게 하는 글이네요. _()_

2006-05-21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5-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광반조, _()_

이누아 2006-05-23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들과 같은 마음으로 저 글을 읽고 이곳에 옮겨 놓았습니다. _()_

2006-05-24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6-05-27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참 감동적이네요. 이누아님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 때문에 기대가 되는 존재입니다.
_()_

2006-05-27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5-30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