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처럼 기도하라
제임스 멀홀랜드 지음, 강주헌 옮김 / 엔크리스토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한 목사님이 달러에는 "We trust God"라는 말이 적혀 있어서 세계적으로 힘 있는 화폐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의 10원 짜리에는 다보탑이 있어서 떨어뜨려도 줍지 않는 돈이 되었다고 하시는 말을 들었다. 목사님은 우리 나라 돈에도 저런 구절을 넣어야 한다고도 하셨다. 농담이시겠지, 그러나 방송될 줄 알고 있는 연설에서 하시기엔 좀...이라고 생각했다. 그 목사님은 내 몸이 좋지 않을 때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라 고 하신 분이셨다. 그 때문에 금강경을 읽기 시작했으므로 그 목사님의 말씀을 유심히 듣게 되었다. 듣다 보니 정말 그랬다.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기도하라고 하신다. 심지어 목사님의 머리가 자꾸 빠지는 듯해서 하나님께 머리 좀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도 기도하셨다고 한다. 친구가 아는 할머니는 손자 키가 180을 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신다고 하더니... 닮았다.

 

빚에 시달리는 가난한 여인이 우리 나라 초대형 교회에 질문을 했다. 제가 이 지경인데 십일조를 해야만 합니까? 빚만이라도 좀 청산되고나서 하면 안 될까요? 교회의 대답은 대충 이랬다. 환난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 사는 것이 더 복되다, 어려운 가운데 십일조를 내서 성공한 사람의 책이 있다, 그 책 제목은 이러하니 읽어봐라, 하는 것이었다. 똑같은 질문에 한 신부님이 하느님은 물질만을 보시지 않습니다. 성의껏 하시고 오히려 마음을 다해 주님과 교통하십시오, 하는 대답을 들은 적도 있다. 어떤 대답이 옳은 것인지 모르지만 주님과 교통하면서 스스로 응답받으라는 그 대답이 진실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복에 복을 더해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를 비판하면서 예수가 직접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어떤 복을 말하는가? 기독교 방송을 보고 있으면 그 복이 무슨 복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믿음 좋은 사람의 끝은 물질적인 부와 세상의 명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기독교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왜 물질적으로 봤을 때 세상에서 가난한 삶을 살았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큰 교회와 많은 축복을 손을 내밀어 바라게 되었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축복의 근거는 거의 모두 구약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전에 성경을 읽은 적이 있는데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예수님이 무척 다르게 느껴졌다. 구약의 하느님이 약속하신 축복은 더 많은 부와 자손들, 물리적인 땅, 전쟁에서의 승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의 축복은 그저 내 기쁨이 넘쳐 너희에게 주거나 서로 사랑하라거나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네가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 나를 따르라고까지 했다. 내 이해가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 역시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야베스처럼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기도하라고 한다.

 

그런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결국 기도의 핵심은 나와 탐욕을 버리라는 것에 귀결된다. 에고는 기도할 때조차 내가 기도한다,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았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한다, 내가 이렇게 많이 헌금한다, 내가, 내가...라고 소리친다. 그러니 더 내놓아라, 이런 기도는 귀먹은 기도다. 소리칠 뿐이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기도는 인과응보가 아니다. 은총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 17:20-21)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는 것이다.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에 가득찬 샘솟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먼저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뜻을 나눔으로 보고 있다. 평등으로 보고 있다. 탐욕을 버리고 나누어라,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용서하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예수의 기도를 마쳤을 때 하는 아멘 이라는 말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누겠습니다, 용서하겠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말고요, 하는 다짐이라고 한다. 기도는 얼마나 간편한가, 방에 가만히 앉아 중얼거린다. 그러나 아멘 이라고 하는 순간 방문이 열린다. 나가서 주님의 뜻대로 행할 때 기도가 성취된다.

 

더 갖고 싶다, 더 좋은 평판을 얻고 싶다, 시험에 합격하고 싶다, 건강해지고 싶다...이런 것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하고 있는 것들이다. 아플 때, 굶주릴 때 그냥 나온다. 그런데 아프지도 않고 굶주리지 않아도 자꾸만 하는 기도들..오히려 찰싹 달라붙은 이런 것들을 좀 떼놓고 싶지 않은가. 마음대로 안 되어서 그렇지. 마음대로 안 되니 기도하고 수행하는 게 아닐까. 암벽등반을 한 적이 있다. 바위 틈의 홈을 보면 저기에 발을 넣으면 안전할거야 하는 생각이 들어 발을 깊숙이 넣으면 이상하게 온 몸이 그 틈 속으로 들어가서 곤란한 지경을 맞게 된다. 암벽과 몸은 밀착되면 안 된다. 손과 발만 닿으면 된다. 험난한 세상, 탐욕 없이 어찌 살겠나 싶지만 그 욕심에 밀착하면 밀착할수록 어쩔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온몸을 암벽에 착 달라붙게 해봐야 한발자국도 옮기지 못하고 절벽에 매달려만 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되듯. 암벽등반은 위험하다. 그래서 익힌다. 몸에 익힌다. 마음에 익혀야 할 것이 무엇인지 탐욕을 향한 기도를 통해 본다.  

감명 깊게 읽지는 않았다. 평범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평범한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고, 여기에 대해 이렇게 할 말이 많다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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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8-30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종교의 기도가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외부의 신이나 복에 의지하는 것은 그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오직 기도 뿐이어야 하고...
밥먹을 때는 오직 먹을 뿐이어야 하고...
시련에 대해서는 오직 그 시련이 나에게 어떻게 와서 가는지를 지켜보아야 할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했는가?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으로 온통 자신을 비워냈을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가 나를 우주의 지휘자와 연결해줄 것이겠지요..

이누아 2006-08-30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우주의 지휘자와 연결되는 날, 그 지휘를 따라 연주나 노래를 하시겠지요. 잊지 말고 제게도 노래를 불러 주세요. 히,

글샘 2007-01-27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는 기도할 때조차 내가 기도한다,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았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한다, 내가 이렇게 많이 헌금한다, 내가, 내가...라고 소리친다. 그러니 더 내놓아라, 이런 기도는 귀먹은 기도다. 소리칠 뿐이다.
기복은 수행은 안 될 거란 생각을 합니다. 귀먹은 기도가 아닌, 혜안을 가진 기도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해야겠지요. 성경이든, 금강경이든 뗏목을 부여안고...
잘 읽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노혜숙 외 옮김 / 양문 / 2002년 12월
구판절판


당신은 침묵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대화를 하면서도 단어 사이의 공백, 문장 사이의 무언의 틈새를 의식하십시오. 그러는 동안 당신의 내면은 점차 고요해질 것입니다. 내면이 고요하지 않으면 침묵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습니다. 밖에는 침묵이 흐르고 안에는 고요함이 자리잡으면 당신은 현시되지 않은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212쪽

당신은 자신이 고통에 애착을 갖고 있으며 지금껏 그래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랄지도 모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고통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256쪽

당신이 혼자 있을 때 편안하지 못하다면, 그러한 불안을 감싸줄 수 있는 어떤 관계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관계 속에서 불안이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날 것이 분명하며, 이제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할 것입니다.
당신이 할 일은 이 순간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가 편안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264쪽

기쁨이란 아무런 원인 없이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기쁨은 내적 평화의 정수로써, 신의 평화라고 불려왔습니다. 기쁨이야말로 당신 본연의 상태이며, 당신이 애써 수고하거나 고투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281쪽

평화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상태가 아닌 다른 상태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291쪽

반응을 하지 말라는 것은, '나는 이 모든 유치한 무의식을 초월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말로만 "좋아요, 당신이 옳아요"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저항의 자리에 에고의 우월감을 대신 앉힌 것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갑작스럽게 매우 밝고 선명하고 깊은 평화를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내맡김의 상태에 있다는 명백한 신호입니다. -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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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8-2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람의 '고요함의 지혜'도 참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오랫만에 이누아님의 댓글을 접하니 이 밤 마음이 환해집니다.
_()_

이누아 2006-08-29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님에게 졸라서 추천받은 "예수님처럼 기도해라"가 책상에 놓여 있습니다. 보물을 손에 넣은 것처럼 뿌듯해서 책을 쓰다듬어 봅니다. 이제 막 책을 펼쳤습니다. "고요함의 지혜"도 만날 친구 명단에 올려야 겠어요. 고맙습니다.

혜덕화 2006-08-3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처님께서 목이 마르다고 하셔서 아난이 시냇가에 물을 떠오려고 갔다. 하지만 방금 마차가 지나가서 흙탕물이었다. 아난은 그냥 돌아와서 물이 너무 더러워 먹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시 가보라고 하셨다. 아난은 "제가 물을 좀 맑게 해서 떠오려고 손으로 찌꺼기와 흙을 가라앉히려 하는데도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다시 가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라고 했지만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다시 가서 그 물을 떠오라고 하셨다. 아난이 다시 가 보니 시간이 지나서인지 물이 다시 맑아져서 물을 떠 왔다.

가끔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이렇게 흙탕물처럼 그냥 두면 저절로 맑아지고 가라앉을 일을 가지고 물을 맑게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오히려 물을 더 흐려놓는 일을. 꼭 큰 일, 사회적인 이슈를 가진 일이 아닐지라도 일상 생활에서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마치 물을 맑히려고 손을 넣어 휘 젓는 아난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쁨도 그렇겠지요. 어느 한 상태에 집착하거나 휘둘리지 않으면, 그 속에 기쁨과 고요함은 항상 있는 것을, 우리는 아난처럼 성급한 조바심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을 휘저어 놓은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_()_


이누아 2006-08-3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즐겁습니다. 새겨 들을께요. 고맙습니다, 혜덕화님.

낯선바람 2006-11-1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쁨이야말로 우리 본연의 상태'라는 제목이 끌려서 읽어봤습니다. 덕분에 좋은 말 보고 갑니다^^ 아! 기쁘다 ㅎㅎ

이누아 2006-11-1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노혜숙 외 옮김 / 양문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라. 그러나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과거와 미래, 심지어 현재라고 믿는 시간의 개입마저 배제한다면 찰나 혹은 순간, 감각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은 덜 굴곡된다.

에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더니 오빠가 이 책을 권해준다. 아마존 베스트셀레 5위, 많은 사람들이 읽었구나. 그러나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간간이 읽기를 멈추라는 표시가 나온다. 생각하지 말라면서 멈추란다. 멈춰서 생각하지 말고, 몸 안으로, 내면의 몸으로 들어가란다. 그렇게 멈추어진 순간들로 책은 더디더디 읽힌다. 더디 읽힌 탓일까. 과거를 생각하지 말라지만 이 책을 읽다 문득 호흡하는 사이, 죽음과 고통, 후회와 염려, 병과 자책...이런 날들의 어리석음이 비에 씻기듯 씻긴다. 저항도 없이 읽혀진다.  

누군들 깨달음에 관한 책을 쓰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이 책의 내용은 내 삶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는다. 질문들은 내 질문들이다. 내 질문에 오는 대답들은 온통 참선 이야기로 변화된다. 그래도 걸림이 없다. 아, 이것이었구나 하는 탄성이 매번 튀어나온다. 에고에 관한 책이다. 에고의 특성은 과거와 미래에 가 있다고, 순간에 살면 에고도 사라진다고. 어떻게 하면 순간에 머무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일종의 명상법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저 일상이다. 일상을 벗어난 그 무슨 특별한 일이 있겠는가. 과거와 미래에 가 사는 낡은 습관을 순간에 현존하는 습관으로 바꾸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과거의 고통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미래의 염려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앓고 있는 병..특별한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 순간을 살아라. 평화롭게 사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다. 그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순간을 삶으로써 얻는 것, 그것은 존재로서 살아가는 삶이며, 평화롭게 사는 삶이다.

우리는 지금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나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느낄 때, 당신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평화롭게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슬프고 눈물이 나겠지만 저항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그 슬픔 아래서 깊은 평화와 고요, 그리고 신성한 현존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의 발산이고 내면의 평화이며 대립이 없는 선입니다.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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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나를 이해하고 믿어줄 수 있겠니?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나는 뭔가 비난 받을 일을 하려고 했으리라. 나는 네게 물었다. 너는, 몰라, 그 무슨 일을 하는 거 보면 이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알겠지만 지금은 모르겠어. 그날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네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 주눅이 들었던 것이. 아마 그날 에고가 많이 상처를 입었었나 보다. 이렇게 오랜 시간 뒤에도 찻집에서의 그 대화를 기억하는 걸 보면. 껌처럼 붙어 다니고,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눈 뒤에 오간 대화치곤 밋밋하다. 내가 너무 무거운 탓이었다. 내가 조금만 가벼웠더라면 네게 그렇게 기대하지도, 기대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믿음은 불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걸 그땐 나도 몰랐다. 관계를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란 걸 몰랐다. 꿈에 자꾸만 나와서 생각나는 것일까, 그리워해서 꿈에 나타나는 것일까, 궁금했다. 이사온 후 꿈에서 너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문득 너를 떠올려도 더이상 주눅이나 자책이 들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꿈에서 혹은 멀리서, 너를 더이상 엿보지 않아도 되겠다. 이제 좀 가벼워지나 보다. 편안하다. 안녕, 꿈 속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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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8-29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 속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우주의 오케스트라 연주 앞에서 우리들은 제각각의 불협화음을 냅니다.
우주의 지휘자를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주 전체의 선율에 맞추어서
개개인을 연주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 속에 존재하는 우주의 지휘자를 향한 마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잉크냄새 2006-08-30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김경미 시인의 "비망록"의 마지막 구절을 한동안 메신저로 사용했습니다. 제가 너무 무거운 탓이었을까요. 잘 모르겠네요. 왜 그 시절 이 싯구가 그리도 가슴저몄는지는....

이누아 2006-08-30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제 자신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머리와 몸과 마음과 또 무엇이 불협화음을 낸 것만 같아요. 안 그래도 실제로도 음친데 이래서야 되겠나 싶네요. 지휘봉이 어디 있죠?^^
잉크냄새님, 이젠 좀 가벼워지셨나요?

2006-09-05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고에고에고...

무엇을 찾고 있는가? 무엇을 갈망하는가? 자유다. 그 외에 다른 무엇이겠는가. 돈을 갈망한다고 해도 결국 그가 갈망하는 것은 자유다. 돈이 어떤 자유를 부여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자유롭다는 말이 꼭히 부자들에게서 들리지도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사람들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이유는 소외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왜 사람들은 소외될까 두려워하는가? 그 자발성이 소외를 막아줄지는 모르나 그 두려움을 막아줄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소외되는 것이 두려운가? 그래서 자유로부터 달아나는가? 에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거짓 자아라고도 한다. 에고...이놈을 쳐다본다.

에고는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에고는 나와 에고를 동일시하게 한다. 에고가 상처받아도 나는 내가 상처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괴로워한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하지 않겠다. 나를 진아라고 부르든, 현존이라고 부르든,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부르든 나는 에고는 아니다. 지나가다가 누가 욕을 한다. 욕을 먹으면 기분이 나쁘다. 누가 기분이 나쁜가? 관계도 없던 누가 지나치며 하는 말에 상처를 받고 화를 내느라 나를 상하게 한다. 왜?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 욕이 나의 현존을 상처입힐 수 있는가? 없다. 그러면 누가 상처받았는가? 에고다. 에고는 뛰어들어 멱살을 잡고 싸움을 한다. 그리고나서 경찰서에 가서 말한다. 그땐 욱 해서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라고. 정말 그렇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에고의 정신이었다. 에고는 왜 그런 짓을 하는가? 두 번째 특성 때문이다. 날 무시하다니, 에고는 말한다.

에고의 두 번째 특성은 관심과 인정을 먹고 자란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롬이 발견한 것과 유사한 특성이다. 소외될까 두려워한다. 무시당할까 두려워한다. 에고는 성취하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나를 쳐다봐 달라고 소리친다. 그렇게 성취하고 인정받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상한 행동을 해서라도 자신을 쳐다봐 달라고 한다. 나는 아프다, 나는 환자다. 그러니 나를 돌봐달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쁜 사람이다. 불쌍한 에고, 혼자서는 견딜 수 없다. 시선을 먹고 자라는 에고. 그래서 혼자 있으면 에고는 불안하다. 내가 자각을 일으킬 수 있는 순간, 홀로 있는 순간...에고는 견딜 수 없다. 텔레비전을 틀어라, 인터넷을 열어라, 과거야 일어나라, 미래야 엄습해라...누군가 나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는 쓸모없어지는가? 그 누군가가 그렇게 대단한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소리를 들으면 기가 죽는다, 화가 나고, 죽고 싶어지기도 한다. 누가? 에고가.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안정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에고는 생각한다. 큰 차와 큰 집은 에고를 만족시킨다. 쇼핑을 할 때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준다. 에고는 만족한다. 그래, 더 열심히 일하자, 더 열심히 권력을 쌓자, 더 열심히 가지자, 그러면 사람들은 내게 고개를 숙인다, 적어도 무시당하진 않아, 에고는 말한다. 인간의 원죄는 에고다. 왜 벌거벗은 것이 부끄럽게 되었나? 누가 너를 쳐다본다는 말이냐? 시선에 묶여 사는 자, 에고에 묶여 있다. 에고는 더 큰 에고를 원한다. 끝이 없다. 내가 했어요! 내가 했어요! 에고는 소리친다. 금강경은 말한다.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보살이 아니기 때문에 보살이다. 무슨 소린가? 내가 보살이다, 내가 너를 열반에 들게 했다, 내가, 내가...라고 하는 순간, 현존은 사라진다. 현존을 가로막는, 끝없는 인과의 굴레에 매어 놓는 것,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아상이라고 부른다.

에고의 세 번째 특징은 지금, 이 순간에는 없다는 것이다. 에고는 과거와 미래에 산다. 도가류의 어떤 서적에서 "마음 맑히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마음이 맑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현재를 깊이 근심하지 않으며,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에고는 흐리게 한다. 일어난 일 때문이 아니라 일어난 일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롭다. 괴로운 순간은 괴로운 그때여야 하지만 괴로운 그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떻게 잊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최면에 관한 사이트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무척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지울 수 있느냐는 문의를 하고 있었다. 1년 전 브랜든의 감정치유와 신체치유를 했을 때, 과거가 내 몸을 앓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과거는 지금이 아니다. 그런데도 왜? 생각을 살펴보면 대개가 과거나 미래에 가 있다. 오쇼가 "노력해라, 그러나 그 노력이 깨달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말은 에고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에고는 기다린다. 이 순간에 절대 깨달음이 올 수 없다고 한다. 선수행의 병통 중 하나로 깨달음을 기다리는 병이 있다. 내가 이 만큼 했으니 깨달음이 오겠지. 에고는 일종의 중독상태다. 텔레비전을 켜지 말아야지, 하지만 혼자 있으면 켠다. 텔레비전 위에 텔레비전은 뇌에 좋지 않아요, 라고 적어 두어도 쉽사리 리모콘이 놓아지지가 않는다. 놓더라도 얼른 다른 걸 켠다. 책이나 라디오나. 이 중독을 벗어나 지금, 이 순간에 살 수 있다면 별다른 깨달음이 필요할까? 깨달음이 현존이라면 우리도 간혹 깨닫는다. 그리고는 과거나 미래로 그 깨달음을 밀어 넣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난다. 모모에서 나오는 시간도둑인 회색도당 같은 에고의 특성에 대해 전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으로는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가 있다. 사실, 제목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저께 내 몸이 좀 아팠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아프다"라고 여긴다. 내 몸이 아픈데, 몸을 나라고 한다. 에고의 첫 번째 특성이다. "내가 아프니 너는 나를 잘 돌보아라"하는 마음이 든다. 아픈데 누군가의 관심이 적다고 여기면 에고는 섭섭해하거나 화를 낸다. 에고의 두 번째 특성이다. 그리고 "예전에 이렇게 아플 때 몇 일이나 갔었는데 내일도 이렇게 아프면 어떻게 하지?" 생각한다. 에고의 세 번째 특성이다. 순식간에 에고가 차지한다. 사실 참을 수 없이 계속 아픈 것은 아니다. 잠시 아프다가 잠시 괜찮기도 하다. 그런데 에고는 순간을 무시한다. 선을 긋는다. 아픈 점들을 연결해서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라고 한다. 아픈 것이 거짓말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아프다거나 내가 아프다거나 하는 것은 거짓이다.

에고에서 벗어나는 일이 왜 힘들까? 앞서 중독상태라는 표현까지 썼다. 좌선을 할 때 무언가 이상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왜 이러지? 순간 화두가 깨어진다. 에고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에고는 순간 속에서는 살 수 없다. 왜 이러지, 를 따라가면 에고가 숨을 쉰다. 그러나 화두를 잡는 순간, 나는 순간 속에 있다. 그러면 에고는 생각도 일으키지 못한다. 선지식들이 말씀하시길, 생각이 일면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바로 화두를 잡으라고 하신다. 그 까닭을 알겠다. 에고는 시간을 먹고 자라고, 생각을 먹고 자라고, 관심을 먹고 자란다. 그것들을 벗어나면 에고는 숨쉬기가 어렵다. 게다가 가만히 에고를 쳐다보면 아기처럼 귀엽게 생겼다. 욕을 해대기 전까지 에고는 얼마나 순진하게 보이는가. 니체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 받으려고 하는 자, 그를 기생충이라고 불렀다. 에고는 기생충이다. 자신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 받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괴로워한다. 에고, 에고, 에고...끝이 없다. 에고와 함께 살아온 삶. 그게 내가 살았다고 여겼던 삶. 에고가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에고와 함께 살아온 삶이 익숙하고, 에고는 오히려 가엾고 여린 아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벗어나기 힘들다. 에고가 그러는지 내가 그러는지 내가 있는지 내가 없는지...에고에고에고...원인도 모를 오랜 병에 이 약, 저 약 다 쓰다가 아픈 이유를 발견해도 고치기가 쉽지 않다. 담배를 끊으세요, 운동을 하세요, 조금만 더 걸으세요, 라면을 드시지 마세요, 밤에 아무 것도 드시지 마시구요...평범한 주문이다. 약을 먹으라는 것도 아니다. 습관만 바꾸면 된다고 의사가 말하지만 수술대에 올라서기 전에 자각이 일어나 이 모든 말에 순종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도 에고에고에고...텔레비전에서 본 괴물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내 삶을 유령처럼 지배하도록 언제까지 둘 수는 없지 않은가. 

변화무쌍한 에고 이야기가 이렇게 짧을 수는 없다. 이 정도로 에고는 위협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얼거림은 에고의 영역. 누가 듣는가? 누가 듣는다고 여기는 순간, 에고가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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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6-08-26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빠야, 누가 듣고 있는가 묻고 나니 오빠 생각이 나네. 수요일에 이야기한 걸 정리해본다고 적었는데 정리가 되기는 커녕 점점 불어난다. 에고에 관해 책을 쓰라고 해도 쓰겠다. 에고가 에고 이야기로 한탕 하려나 보다. 수요일에 감기 들었는데 오빠는 괜찮나?

파란여우 2006-08-26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 들었어요. 이누아님의 법문을 듣는 게 너무 좋아요.
아프신거 어찌 괜찮은가요?
이 가을 정말정말 아프시면 안되어요.

혜덕화 2006-08-27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를 하셨네요. 집들이 몸살인가요? 아픈 것 빨리 나으시기를......
이 몸이 나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 몸 받아 나 아닌 나가 있으니 잘 돌보아야겠죠.
오늘은 비 오고 바람도 시원합니다. 요즘 금강경 독송하고 있습니다. 내게 기쁨을 주던 일이 고통으로 변하는 것은, 그 기쁨에 대한 집착이었음을 저의 에고에서 보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서 말이 사라진 여름이었습니다. 밖으로 내 뱉는 말 대신에 끝없이 속으로 나의 에고와 대화한, 지치도록 더운 여름이 서서히 가고 있네요.
빨리 나으세요._()_

이누아 2006-08-27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그저 감기입니다. 염려마세요.^^
혜덕화님, 그럼요, 건강해야죠. 침묵이 길어져서 바쁜 일이 있으신가 했어요. 시원하고 즐거운, 약간은 가벼운 그런 가울바람이 님에게 불었으면 합니다. 이제 개학하셨나요?

봉준이 2006-08-2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감기 걸렸구나. 조리 잘하고 너무 아프면 연락해라.
그래 속지 말아야지 하지만 아차!!

이누아 2006-08-28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빠야, 이번 주 수요일, 불확실. 집이 멀어져서 오라고도 못하겠다. 내일 통화!

왈로 2006-08-28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 아팠재? 호~ 불어 줄께. 큰일 치르느라 고생 많았어. 우리 친구, 아프지 마~

이누아 2006-08-29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불어주니 좋네. 안 아플께.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