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에고에고...
무엇을 찾고 있는가? 무엇을 갈망하는가? 자유다. 그 외에 다른 무엇이겠는가. 돈을 갈망한다고 해도 결국 그가 갈망하는 것은 자유다. 돈이 어떤 자유를 부여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자유롭다는 말이 꼭히 부자들에게서 들리지도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사람들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이유는 소외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왜 사람들은 소외될까 두려워하는가? 그 자발성이 소외를 막아줄지는 모르나 그 두려움을 막아줄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소외되는 것이 두려운가? 그래서 자유로부터 달아나는가? 에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거짓 자아라고도 한다. 에고...이놈을 쳐다본다.
에고는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에고는 나와 에고를 동일시하게 한다. 에고가 상처받아도 나는 내가 상처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괴로워한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하지 않겠다. 나를 진아라고 부르든, 현존이라고 부르든,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부르든 나는 에고는 아니다. 지나가다가 누가 욕을 한다. 욕을 먹으면 기분이 나쁘다. 누가 기분이 나쁜가? 관계도 없던 누가 지나치며 하는 말에 상처를 받고 화를 내느라 나를 상하게 한다. 왜?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 욕이 나의 현존을 상처입힐 수 있는가? 없다. 그러면 누가 상처받았는가? 에고다. 에고는 뛰어들어 멱살을 잡고 싸움을 한다. 그리고나서 경찰서에 가서 말한다. 그땐 욱 해서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라고. 정말 그렇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에고의 정신이었다. 에고는 왜 그런 짓을 하는가? 두 번째 특성 때문이다. 날 무시하다니, 에고는 말한다.
에고의 두 번째 특성은 관심과 인정을 먹고 자란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롬이 발견한 것과 유사한 특성이다. 소외될까 두려워한다. 무시당할까 두려워한다. 에고는 성취하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나를 쳐다봐 달라고 소리친다. 그렇게 성취하고 인정받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상한 행동을 해서라도 자신을 쳐다봐 달라고 한다. 나는 아프다, 나는 환자다. 그러니 나를 돌봐달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쁜 사람이다. 불쌍한 에고, 혼자서는 견딜 수 없다. 시선을 먹고 자라는 에고. 그래서 혼자 있으면 에고는 불안하다. 내가 자각을 일으킬 수 있는 순간, 홀로 있는 순간...에고는 견딜 수 없다. 텔레비전을 틀어라, 인터넷을 열어라, 과거야 일어나라, 미래야 엄습해라...누군가 나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는 쓸모없어지는가? 그 누군가가 그렇게 대단한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소리를 들으면 기가 죽는다, 화가 나고, 죽고 싶어지기도 한다. 누가? 에고가.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안정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에고는 생각한다. 큰 차와 큰 집은 에고를 만족시킨다. 쇼핑을 할 때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준다. 에고는 만족한다. 그래, 더 열심히 일하자, 더 열심히 권력을 쌓자, 더 열심히 가지자, 그러면 사람들은 내게 고개를 숙인다, 적어도 무시당하진 않아, 에고는 말한다. 인간의 원죄는 에고다. 왜 벌거벗은 것이 부끄럽게 되었나? 누가 너를 쳐다본다는 말이냐? 시선에 묶여 사는 자, 에고에 묶여 있다. 에고는 더 큰 에고를 원한다. 끝이 없다. 내가 했어요! 내가 했어요! 에고는 소리친다. 금강경은 말한다.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보살이 아니기 때문에 보살이다. 무슨 소린가? 내가 보살이다, 내가 너를 열반에 들게 했다, 내가, 내가...라고 하는 순간, 현존은 사라진다. 현존을 가로막는, 끝없는 인과의 굴레에 매어 놓는 것,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아상이라고 부른다.
에고의 세 번째 특징은 지금, 이 순간에는 없다는 것이다. 에고는 과거와 미래에 산다. 도가류의 어떤 서적에서 "마음 맑히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마음이 맑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현재를 깊이 근심하지 않으며,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에고는 흐리게 한다. 일어난 일 때문이 아니라 일어난 일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롭다. 괴로운 순간은 괴로운 그때여야 하지만 괴로운 그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떻게 잊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최면에 관한 사이트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무척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지울 수 있느냐는 문의를 하고 있었다. 1년 전 브랜든의 감정치유와 신체치유를 했을 때, 과거가 내 몸을 앓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과거는 지금이 아니다. 그런데도 왜? 생각을 살펴보면 대개가 과거나 미래에 가 있다. 오쇼가 "노력해라, 그러나 그 노력이 깨달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말은 에고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에고는 기다린다. 이 순간에 절대 깨달음이 올 수 없다고 한다. 선수행의 병통 중 하나로 깨달음을 기다리는 병이 있다. 내가 이 만큼 했으니 깨달음이 오겠지. 에고는 일종의 중독상태다. 텔레비전을 켜지 말아야지, 하지만 혼자 있으면 켠다. 텔레비전 위에 텔레비전은 뇌에 좋지 않아요, 라고 적어 두어도 쉽사리 리모콘이 놓아지지가 않는다. 놓더라도 얼른 다른 걸 켠다. 책이나 라디오나. 이 중독을 벗어나 지금, 이 순간에 살 수 있다면 별다른 깨달음이 필요할까? 깨달음이 현존이라면 우리도 간혹 깨닫는다. 그리고는 과거나 미래로 그 깨달음을 밀어 넣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난다. 모모에서 나오는 시간도둑인 회색도당 같은 에고의 특성에 대해 전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으로는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가 있다. 사실, 제목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저께 내 몸이 좀 아팠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아프다"라고 여긴다. 내 몸이 아픈데, 몸을 나라고 한다. 에고의 첫 번째 특성이다. "내가 아프니 너는 나를 잘 돌보아라"하는 마음이 든다. 아픈데 누군가의 관심이 적다고 여기면 에고는 섭섭해하거나 화를 낸다. 에고의 두 번째 특성이다. 그리고 "예전에 이렇게 아플 때 몇 일이나 갔었는데 내일도 이렇게 아프면 어떻게 하지?" 생각한다. 에고의 세 번째 특성이다. 순식간에 에고가 차지한다. 사실 참을 수 없이 계속 아픈 것은 아니다. 잠시 아프다가 잠시 괜찮기도 하다. 그런데 에고는 순간을 무시한다. 선을 긋는다. 아픈 점들을 연결해서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라고 한다. 아픈 것이 거짓말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아프다거나 내가 아프다거나 하는 것은 거짓이다.
에고에서 벗어나는 일이 왜 힘들까? 앞서 중독상태라는 표현까지 썼다. 좌선을 할 때 무언가 이상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왜 이러지? 순간 화두가 깨어진다. 에고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에고는 순간 속에서는 살 수 없다. 왜 이러지, 를 따라가면 에고가 숨을 쉰다. 그러나 화두를 잡는 순간, 나는 순간 속에 있다. 그러면 에고는 생각도 일으키지 못한다. 선지식들이 말씀하시길, 생각이 일면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바로 화두를 잡으라고 하신다. 그 까닭을 알겠다. 에고는 시간을 먹고 자라고, 생각을 먹고 자라고, 관심을 먹고 자란다. 그것들을 벗어나면 에고는 숨쉬기가 어렵다. 게다가 가만히 에고를 쳐다보면 아기처럼 귀엽게 생겼다. 욕을 해대기 전까지 에고는 얼마나 순진하게 보이는가. 니체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 받으려고 하는 자, 그를 기생충이라고 불렀다. 에고는 기생충이다. 자신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 받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괴로워한다. 에고, 에고, 에고...끝이 없다. 에고와 함께 살아온 삶. 그게 내가 살았다고 여겼던 삶. 에고가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에고와 함께 살아온 삶이 익숙하고, 에고는 오히려 가엾고 여린 아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벗어나기 힘들다. 에고가 그러는지 내가 그러는지 내가 있는지 내가 없는지...에고에고에고...원인도 모를 오랜 병에 이 약, 저 약 다 쓰다가 아픈 이유를 발견해도 고치기가 쉽지 않다. 담배를 끊으세요, 운동을 하세요, 조금만 더 걸으세요, 라면을 드시지 마세요, 밤에 아무 것도 드시지 마시구요...평범한 주문이다. 약을 먹으라는 것도 아니다. 습관만 바꾸면 된다고 의사가 말하지만 수술대에 올라서기 전에 자각이 일어나 이 모든 말에 순종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도 에고에고에고...텔레비전에서 본 괴물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내 삶을 유령처럼 지배하도록 언제까지 둘 수는 없지 않은가.
변화무쌍한 에고 이야기가 이렇게 짧을 수는 없다. 이 정도로 에고는 위협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얼거림은 에고의 영역. 누가 듣는가? 누가 듣는다고 여기는 순간, 에고가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