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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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지 않은 앞날을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앞날은 밀려오고 우리는 기억을 품고 새로운 시간 속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기억이란 제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속성까지 있다. 기억들이 불러일으킨 이미지가 우리 삶 속에 섞여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기억이나 나의 기억을 실제 있었던 일로 기필코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고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면 나는 그 사람의 희망이 뒤섞여 있는 발언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그렇게 불완전한 게 기억이라 할지라도 어떤 기억 앞에서는 가만히 얼굴을 쓸어내리게 된다. 그 무엇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던 의식들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기억일수록. 아침마다 눈을 뜨는 일이 왜 그렇게 힘겨웠는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은 왜 그리 또 두려웠는지, 그런데도 어떻게 그 벽들을 뚫고 우리가 만날 수 있었는지. -20~1쪽

-여러분은 각기 크리스토프들이네. 강 저편으로 아이를 실어나르는 자들이기도 하지. 거대하게 불어난 강물 속에 들어가 있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란 말이네. 강물이 불어났다고 해서 강 저편으로 아이를 실어나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되네.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법은 무엇이겠는가?
질문이었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윤교수의 목소리는 더욱 나직해지면서 힘이 가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는 것이네. 함께 아이를 강 저편으로 실어나르게. 뿐인가. 강을 건너는 사람과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네. 여러분은 불어난 강물을 삿대로 짚고 강을 건네주는 크리스토프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전체이며 창조자들이기도 해. 때로는 크리스토프였다가 때로는 아이이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실어나르는 존재들이네. 그러니 스스로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게. -53쪽

나는 갑자기 윤미루에 대해 격렬하게 솟구치는 나의 궁금증이 두려워졌다. 그렇게 알게 되는 것들은 그와 나 사이를 가깝게 할까, 멀어지게 할까?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가깝게 해준다고 여겼던 적이 있었다. 가까워지기 위해서 내키지 않는 비밀을 털어놓은 적도.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말로 꺼내기 어려웠던 소중했던 비밀이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 다른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의 상실감.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은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가난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은 오히려 침묵 속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111~2쪽

윤미루가 나는 사람이 가진 것 중에서 손이 가장 좋다, 라고 첫 문장을 쓴 적이 있었다. 내가 뒤를 이어 한시도 휴식이 없는 가엾고 고마운 손, 이라고 썼다. 그가 내가 쓴 문장에 이어서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일생을 알 수 있다, 고 썼다. 차곡차곡 손에 대한 문장이 쌓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콩나물콩 시루에 물을 주며 싹이 나오기를 기다릴 때처럼 성실해지는 느낌이었다. 윤미루가 그나 내가 써놓은 문장 뒤를 이어쓸 때면 우.리.는.숨.을.쉰.다 위에 왼손을 올려놓고 쓰곤 했다는 생각. -160쪽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들만 떠오른다. 진실과 선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올바름과 정의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폭력적이거나 부패한 사회는 상호간의 소통을 막는다. 소통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나중엔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아 더 폭력적으로 된다. -183쪽

평생 말을 다루고 말과 싸우는 것을 업으로 삼아온 시인인 나에게 지금 이 시대는 시련의 연속입니다. 말이 제 값어치를 잃어버린 시대, 그리하여 온갖 부황하고 폭력적인 말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나는 더이상 말에 대한 말을 하는 것에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말에 대한 이 절망이 인생에서 나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290쪽

우리는 지금 깊고 어두운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엄청난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강물이 목 위로 차올라 가라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無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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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궁의 노래>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별궁의 노래 - 잊혀진 여걸 강빈 이야기
김용상 지음 / 순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역사에 '만약에'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자꾸만 일어나지 않은 사실을 가정하게 된다. 조선왕조에 대해 가장 많이 하는 가정은 '만약 봉림대군이 아니라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더라면'이 아닐까 싶다. 병자호란의 굴욕과 소현세자라는 캐릭터 때문인지 이 시기가 부쩍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김인숙의 <소현>에 이어 이번에는 그의 아내인 강빈의 이야기를 만나게 됐다. (사실 이 책은 개정판이라 그 이전에 나온 책이지만.)

  일단 역사소설은 사실 위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역사에 상상이 가미될 여지를 만들어준다. 바로 그런 점이 역사소설의 매력일 터. 이 책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그의 아내 소현세자빈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농사를 짓고 조선에서 들여온 물품으로 상거래를 하는가 하면 조선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여느 남자 못지 않은 담대함을 가졌던 소현세자빈. 하지만 그런 그녀의 인생은 너무나 꿋꿋했기에 더 꺾이기 쉬웠다. 시대를 앞서 간다는 것, 그리고 그 시대에서 결국 배제되어버린다는 것이 참 안타까웠다.

  이 작품은 얼마 전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확실히 오늘 날의 정서에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와 문화에 대한 부수적인 설명이 들어가는 부분이 이야기의 흐름을 끊을 때가 있어서 아쉬웠지만, 그런 부분에서 저자가 그만큼 사료 조사를 꼼꼼히 했다는 점이 느껴지기도 했다. 세련된 맛은 없었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소현>, <남한산성> 같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다른 소설과 함께 읽는 것도 재미를 더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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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이상순 베란다 프로젝트 - Day Off
베란다 프로젝트 노래 /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Stone Music Ent.)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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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위에 슬슬 녹다운되고 있던 차에 만난 베란다 프로젝트! 사실 카니발 앨범을 워낙 좋아했던 터라 언젠가 카니발 두번째 프로젝트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롤러코스터의 기타리스트 이상순과의 베란다 프로젝트가 나왔다.

  요새 워낙 전자음이 많이 섞인 음악을 듣다가 베란다 프로젝트의 음악을 듣자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이적과 김동률의 음색은 확연히 차이가 나서 뭔가 다른 색깔이 잘 어우러진 느낌이었다면, 이상순과 김동률의 음색은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 더 어깨에 힘을 빼고 들을 수 있었다. 뭔가 파격적인 변신을 한 건 아니라 오히려 좋았던, 어쩐지 뜨거운 햇살이 아닌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 때 따스한 햇살 아래서 음악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40자평으로 썼더라면 좋다, 만으로도 40자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앨범. 하기사 김동률, 이상순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요새 이 음반 듣는 낙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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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 2010-06-10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역시도! 아주 주구장창 듣고 있습니다-

이매지 2010-06-10 00:28   좋아요 0 | URL
다른 거 다 필요없습니다 ㅎㅎ
심지어 버스나 지하철에서 잘 때도 듣고 있는;;

하늘바람 2010-06-10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들어본 전 궁금하기만 하네요

이매지 2010-06-10 21:58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꼭 들어보세요! :)

도넛공주 2010-06-10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궁금하지만 뭐 여기선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흑.

2010-06-10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1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1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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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가 형사 시리즈 첫권인 <졸업>을 다소 시큰둥하게 봤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히가시노 게이고와 함께 하고 있는 가가 형사라는 캐릭터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연달아 시리즈 2권인 <잠자는 숲>을 읽기 시작했다. 여느 시리즈라면 캐릭터의 성장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지만, 독특하게도 가가 형사 시리즈는 장래를 고민하던 대학생 가가에서 훌쩍 뛰어넘어 전직 교사였던 형사 가가의 모습이 등장한다.

  표지의 그림처럼 이 책은 발레와 관련이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발레가 주된 아이템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되지도 않는 몸으로 체육 시간에 발레를 배웠던 악몽은 떠오르다가 슬며시 사라졌다. 유명 발레단에서 우연히 침입한 사람의 머리를 병으로 내려쳐 침입자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당방위로 보이지만 제대로 된 조사를 위해 사건을 저지른 단원이 경찰에 잡혀간 사이, 잇달아 발레단의 연출가가 독극물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렇게 뒤이어 발레단 내에서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발레단이라는 작은 규모의 사회. 범인은 그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하나, 사건의 진상은 흐릿하기만하다. 과연 발레단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발레단같이 비교적 폐쇄적인 집단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추리소설에서 익숙한 구성이다. 잇달아 사건이 벌어진다는 설정도 딱히 매력적인 것은 아니라 <잠자는 숲> 딱히 추리소설로서는 큰 재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추리소설적인 면을 벗어나서 가가 형사 '시리즈'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어느 정도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졸업>에서 저돌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던 가가는 또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이번 경우 또한 꽤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가가. 형사와 참고인이라는 관계에서 시작되지만, 가가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발레를 열정적으로 대하는 미오에게 조금씩 사랑을 느끼게 되고 이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과연 이번엔 가가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을런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는 편이고, 소재도 나름 다양한 편이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는 고만고만한 경우가 많다. 가가 형사 시리즈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는데, 그동안 내가 읽어온 시리즈와는 달리 가가 형사는 메인으로 등장하지만 어딘가 겉도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다. 물론, 대체로 시리즈물이 사건 자체보다는 인물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이 있기도 하지만 이 책은 너무 캐릭터 쪽으로 치우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자는 숲>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비밀 등 내면에 잠자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가가 형사의 캐릭터 구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작품. 가가 형사의 애정 전선과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첫사랑에 대한 뒷이야기 등 사적인 면이 더 많이 부각된 듯하다. 가벼운 킬링 타임용으로는 가가 형사 시리즈가 제격이 아닐까 싶다. 뭐 그것도 미덕이라면 미덕이겠지만. 시리즈 덕후인 나는 그저 다음 권인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도 슬쩍 대기시켜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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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여름이 되니 추리소설들이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 듯. 추리소설 팬으로는 이걸 언제 다 읽나 한숨이 나올 정도로 팍팍 나오는 책들. 아직 작년 여름에 나온 추리소설도 다 못 읽었는데, 또 이렇게 쌓이는구나. 흙흙.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이 꾸준히 번역되고 있다. 이번에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한 권인 <쌍두의 악마>. 산 속 예술가가 사는 마을과 그 옆 마을 두 곳에서 동시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두 마을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가 큰 비로 떠내려가 고립된다는 설정인 듯한데,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은 정통 추리물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아쉬운 면이 있었는데, 이 작품은 어떨지.



 

 




 



제프리 디버의 소설도 요즘 부쩍 자주 출간되고 있는 듯. <잠자는 인형>은 서점에서 실물로 봤는데 파란 책등이 인상적. 검정과 파란의 보색도 나름 세련되게 괜찮은 듯. <잠자는 인형>은 링컨 라임 시리즈 중 한 권인 <콜드 문>에서 조연으로 등장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일종의 스핀오프인 셈인가)이고, <브로큰 윈도>는 링컨 라임 시리즈의 여덟번째 이야기. 둘다 링컨 라임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좋은 소식일 듯.







올 초에 론칭한 키워드 한국문화의 여섯번째. 꽤 오랜 텀을 두고 나왔는데, 여름 시즌을 맞이하야 이번 키워드는 '처녀귀신'이다. 지금까지 꾸준히 변용되어 등장하고 있는 처녀귀신이라는 키워드가 어떻게 문학 작품 속에 녹아들어갔는지 볼 수 있을 듯. 




그 외 관심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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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0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 정말 웃기네요. '처녀귀신'~ㅎㅎ

이매지 2010-06-08 22:28   좋아요 0 | URL
제목만큼 웃긴 책은 아니고, 옛 이야기 속의 처녀귀신을 만날 수 있는 책이예요 ㅎㅎ

lazydevil 2010-06-08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녀구신~~ 거 호기심 당기는군요ㅡ.ㅡ+

이매지 2010-06-08 22:29   좋아요 0 | URL
끊임없이 공포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사용되면서 마땅히 처녀귀신에 대한 책은 없더라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