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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월
평점 :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외면의 의미에 대해서 처음에는 어떤 사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다는 식의 외면인가? 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양인 외면을 일기로 쓴다는 것은 뭔가 이상해보였고,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난 이 책이 작가가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서 쓰고 있는 것이라고 혼자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넘겨보니 이 책은 그런 이야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가 설마 그거겠어?라고 생각했던 내면의 반대인 외면의 일기를 해주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건을 직접 겪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한다. 그러한 일련의 외면적인 일들을 일기처럼 쓰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 <외면일기>다.
사실 미셸 투르니에가 프랑스 문학의 거장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은 전혀 읽어본 적이 없길래 그가 문학적으로 어떤 역량을 지닌 작가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짤막한 일기들 속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움이나 유머가 제법이네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하기사 이 책을 지은 그의 나이는 나보다 몇 배는 많으니 그동안의 경험의 축적이나 사상의 깊이, 혹은 확실하게 세워진 그 자신의 세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죽음에 대해서 '이제 80에서 멀어지고 있구먼.'이라며 기뻐하는 모습이라던지,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노력, 그러면서도 끝에 실린 역자와의 인터뷰에서는 다리가 아파서 직접 현장에 가보지 못해서 소설을 못 쓰고 있다는 푸념들은 아마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세상을 초월한 듯한 느낌. 하지만 그러면서도 세상과 맞닿아 있는 느낌이었다.
사실 거장의 이야기를 접할 때는 조금 겁이 나기도 한다. 혹, 내가 그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까봐. 혹은 너무 어려운 말들로 나를 힘들게 할까봐.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짧은 글을 통해서 키득거리기도 하고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하고, 그냥 신문을 보듯이 사건에 대해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읽고 넘어가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책을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잡아서 술술 넘기는 것이 미덕은 아닌 책이었다. 1월부터 12월까지 나눠진 챕터에 실린 짧은 이야기들을 조금씩 맛보면서 즐기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그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심지어 다른 책들과 바람을 피우기까지 했다. (혹, 그가 기분을 나빠할지라도 난 이 책을 아끼면서 보고 싶었을 뿐이다.)
책의 제목과 관련된 외적일기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는 각자의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같은 외적인 세계 쪽으로 눈을 돌린 일기를 써보라고, 그러면 날이 갈수록 글을 더 잘, 그리고 쉽게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 나도 그럼 외면일기를 좀 써봐?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문득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수업시간의 풍경을 그대로 글로 옮겨보라고 한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했다.
짧지만 흥미로운 일상의 기록. 나도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의 세계 속으로 빠져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