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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처음 만났을 때에는 나름 충격적으로 다가왔는데 읽다보니 점점 질리는 느낌을 주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한 작품 한 작품 읽어가면서도 질리거나 식상해지지 않는 작가가 있다. 전자가 아멜리 노통브라면 후자는 폴 오스터인 것 같다.(그래도 아직까지도 아멜리 노통브에 대한 약간의 애정은 가지고 있다.) 폴 오스터의 작품들 가운데 네번째로 접한 이 책은 정말 동화같은 이야기,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한국 제목으로는 공중 곡예사로 되어 있어 마치 공중 그네 묘기를 보이는 서커스 단원의 이야기같다. 원제인 미스터 버티고(고소공포증)만 봐서는 이번에는 또 고소공포증에 걸린 사람의 이야기같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어느쪽도 아닌 혹독한 훈련 끝에 공중 부양을 하게 된 한 소년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물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세인트루이스의 길거리에서 푼돈을 구걸하고 있던 한 소년 월트의 이야기이다. 그는 예후디 사부라는 인물의 눈에 띄게 되어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그의 밑에 들어가 공중 부양을 하기 위한 서른 세단계의 과정을 거친다.(말똥먹기, 새끼손가락 잘라내기, 소 오줌 마시기, 예섯시간동안 계속해서 식초가 가득찬 욕조에 거듭 빠지기, 벼락맞기, 사흘밤낮 서까래에 매달려있기 등등) 그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공중 부양을 하게 되고, 원더보이 월트로 유명인사가 된다. 하지만, 그런 행복한 시간도 잠시. 그는 공연을 마치고 난 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은퇴한다. 새로운 계획은 실행하기 위해 예후디 사부와 헐리우드로 떠나지만, 그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 예후디 사부를 잃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삼촌을 죽이기 위해 몇 년이나 그를 추적한다. 그리고 이윽고 복수를 실행하고, 우연찮게 마피아의 세계에 발을 넣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그의 롤러코스터 같은 삶.
이야기는 단순히 몽상적이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차마 말도 안 된다고 소설로만 치부해버리기엔 시대적인 긴밀성이 걸린다. KKK단의 만행으로 사랑하는 흑인 형과 인디언 엄마를 잃는 슬픔을 겪는 월트의 모습. 감옥과 군대 가운데 택일을 하라는 판결을 받는 모습, 메이저 리그 등의 모습들은 마치 이 이야기가 정말 있을 법한 이야기로 만들어준다. 적당한 허구와 사실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춘 이 소설은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소설이지만 시각적인 재미도 보장한다. 상상하는 즐거움을 마음껏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다. 앞으로도 폴 오스터의 필담에 기대를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