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잠들기 전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6-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6
S. J. 왓슨 지음, 김하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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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 뒷걸음질 친다. 차가운 타일이 등에 느껴질 때까지. 문득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른다. 흐릿한 기억, 잡히지 않는 기억이다. 잡으려고 하면 미풍에 날아가는 재처럼 날아가버린다. 내 인생에도 뭐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시절, 과거가 있었구나. 그리고 지금 현재가 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나를 이곳에, 그 사람에게, 이 집에 데리고 온 기나긴 침묵의 공허밖에 없다. -16쪽

나는 그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도서관에서 고리타분한 논문에 둘러싸인 채 웃고 있는 젊은 시절의 우리 두 사람을 기억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무리 해도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찌르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나는 연인들이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얘기하기를 좋아한다고, 누가 먼저 말을 걸었고 무슨 말을 했는지 얘기하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은 없다. 바람이 어린 소년의 연 꼬리를 채찍질해댔다. 죽어가는 사람의 목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65쪽

나는 소설, 허구를 썼다. 따라서 내가 소설가였다는 주장은 허구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111쪽

나는 죽은 것 같다고 썼어요. 하지만 이건 뭐예요? 더 나쁘잖아요. 이건 죽어가는 거예요. 매일매일 죽는 거예요. 더 나아졌어야 하는데도 말이에요. 이런 꼴이 계속되는 건 상상할 수 없어요. 오늘 밤에도 자러 갈 테고, 내일 아침 눈뜨면 또 아무것도 알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어요. 모레도, 글피도 그럴 거고 영원히 그럴 거예요. 그런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난 그런 꼴 못 봐요. 이건 사는 게 아니예요. 그저 목숨만 붙어 있는 거지. 과거도 기억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짐승과 다를 바 없어요. 가장 나쁜 것은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거예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고통이 적지 않을 거예요. 내가 아직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들 말이에요. -228~9쪽

미칠 것만 같다. 세상에 흐르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한순간 후에는 그와 반대되는 생각을 한다. 남편의 말을 죄다 믿는가 하면 금방 믿지 않는다. 그를 신뢰하는가 하면 금방 신뢰하지 않는다. 진짜처럼 여겨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꾸며낸 것이다. 나 자신조차도.
하나라도 확실히 알고 싶다. 남에게 전해 듣지 않고, 기억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게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239쪽

내 삶은 유사 위에 세워진 것 같아, 그것은 어느 한 날에서 다음 날로 이동한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틀린 것이다.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들, 내 인생과 나 자신에 대한 사실들은 오래전 일이다. 내 이야기는 소설 같다. 닥터 내시도, 벤도, 애덤도. 이제는 클레어까지도. 이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어둠 속의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낯선 사람으로서 내 인생에 열십자 모양으로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한다. 붙잡기 어려운 공기 같고 유령 같다.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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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잇태리
박찬일 지음 / 난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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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탈리아를 관광하는 방법은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 같다. 로마, 소렌토, 피렌체, 베네치아 노선이 그것이다. 노선이 간혹 밀라노를 들르기도 하는데, 이건 대개 쇼핑을 위한 것이니 밀라노를 봤다고 하기에도 면구스러운 일이다. 한국으로 치면 경주나 강진, 통영 같은 멋진 동네가 이탈리아 안에는 물론 수없이 많다. 그런 동네를 왜 가지 않느냐고 한국인 관광객에게 물으면 다양한 대답이 쏟아지는데, 앞서의 소매치기 문제부터 영어가 안 될 테니까 불편해서, 교통편을 몰라서, 심지어 한국인 민박집이 없어서까지 나온다. -14~5쪽

그래서 이탈리아는 가볼 만한 나라다. 혹시 이탈리아에 나쁜 감정이 있어서 "절대 가볼 만한 나라가 아니야"라고 반박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적어도 당신은 지옥 같은 한국을 떠나온 것이잖아"라고 말하겠다. 이곳에는 무선 인터넷은 안 되지만 버스 기사의 신경질도, 지하철의 성추행도, 아무 데서나 툭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도, 내 자리에 잽싸게 먼저 앉아버리는 아줌마도, 무표정한 구멍가게 아저씨도, 마이너스 연말정산도, 비싸게 부르는 치과 의사도, 인터넷 악플도, 여름 휴가 후 어느 날 나보다 훨씬 예뻐져서 나타나는 친구도 없기 때문이다. -29~30쪽

그런데 이탈리아의 맛도 잘못 먹으면 이게 사람을 심하게 실망시킨다. 원래 음식이란 게 그런 면이 있다. 10만원짜리 핸드백이나 옷 잘못 산 후회는 10분이면 잊는다. 그런데 1만원짜리 음식이 제 맘에 안 들면 잠들 때까지 분하고 억울하다. 옷이 맘에 안 든다고 매장에 가서 항의하는 사람들 태도가 어떤가. 매우 점잖다. 이거, 바꿔줄 수 있냐고 주섬주섬 말한다. 그런데 5천원짜리 백반이 맘에 안 들면 주인을 잡을 듯이 눈을 부라리는 게 사람의 속성이다. 제 입에 들어가는 건 보통 심각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도 분한 것이다. 이건 한국이나 서양이나 다 마찬가지다. -34~35쪽

이탈리아를 여행한다는 건 순전히 먹는 여행일 수도 있다. 이탈리아 식당의 메뉴는 계절별로 변해서 식도락가들을 즐겁게 한다. 지방별로 요리가 다 색다르고(돈 많은 서울내기들의 입맛에 맞추기 바쁜 한국 지방 음식을 생각해보라) 식당의 개성이 뚜렷하다.-45쪽

여행의 즐거움은 먹는 데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3박 4일짜리 여행에 종갓집 여행용 김치 세트와 볶은 고추장(그것도 모자라 비행기에서 승무원에서 부탁해서 몇 개쯤 더 챙겨두기도 하지), 양반김과 햇반, 컵라면까지 챙겨가는 사람들은 제외하고서 말이다. 다 좋은데 제발 호텔 방에서 카펫에 김칫국물은 쏟지 말자. 내가 아는 한 이탈리아 여관 주인은 한국인 손님은 받지 않는다. 카펫 세탁비로 수백 유로를 더이상 지불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62쪽

"ㅇㅇ가 아름다운 건 그것이 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ㅇㅇ에 무엇이든 대입해보시길 바란다. 꽤 그럴듯한 금언이 될 테니까. 김치도 식탁에 있을 때 먹음직스럽다. -93쪽

한국에서 양식당 일을 하다보면, 묘한 한국인의 선입견에 상당히 고전할 각오를 해야 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식당이라면 푸아그라 요리 정도는 당연히 팔고 있을 거라고 믿는 손님들 때문이다. '푸아그라=고급 식당'의 등식이 언제 생겼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요리사란 결국 재료를 다루는 사람이고, 자신이 만드는 요리 재료가 산지에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고기라면 어떤 나라에서 뭘 먹고 자라는지, 항생제 주사 따위는 맞지 않는지 그런 시시콜콜한 걸 사람들은 알고 싶어하고 알 의무가 있다.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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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3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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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사내 장르문학 도서관에서 <산마처럼 비웃는 것>을 빌렸을 때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은 읽으셨냐는 질문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었다. 내 대답에 질문하신 분께서는 고개를 갸웃하시며 "그렇게 임팩트 없는 작품이 아닌데…"라고 하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와 착각한 탓이었다.(잘린 머리가 제목에 그렇게 자주 쓰이는 건 아니고, 게다가 둘다 비채에서 나왔다고 위안을.) 순서는 다소 뒤바뀌긴 했지만 <산마처럼 불길한 것>을 읽은 뒤 부랴부랴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읽었다. 민속학과 호러를 적절히 결합한 임팩트 있는 서사, 그리고 독특한 반전은 이번에도 여전했다. 

  전후 일본의 오쿠다마 깊은 곳에 히메카미 촌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오래전부터 당주의 적자가 가문을 이어받아왔으나, 대대로 아들은 좀체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한다. 아들이 무사히 성장하기를 기원하며 3일째, 13년째, 23년째 밤에 의식을 치른다. 그리고 이곳의 장손 조주로가 십삼야 참배를 지내는 날, 그의 쌍둥이 남매인 히메코가 우물에 빠져 죽은 채 발견된다. 사고인지 사건인지 여부를 명확히 밝히기도 전에 히메코의 장례는 치러진다. 또 다시 조상의 벌이 내려졌다는 소문이 마을에는 퍼져가지만, 다행히도 조주로는 무사히 성장해 이십삼야를 마치고 혼사를 준비할 나이가 된다. 그리고 조주로는 세 아가씨와 맞선을 보는 날, 조주로와 신부 후보 중 한 명이 또 다시 목 없는 시체로 발견된다. 연속되는 밀실살인. 그리고 목 없는 시체. 이것은 정말 저주인 것일까.

  한 시골 지방의 가족 간의 암투와 뭔가 알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 분명 미쓰다 신조의 작품이지만 몇 번이나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을 읽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도조 겐야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인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은 제목만 보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핏빛으로 물든 머리가 그려진 표지 역시 선뜻 고르기엔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편견을 떨치고 읽으면 의외의 매력과 마주하게 된다. 우선 독특한 전개방식에 눈이 간다. 동네 주민이자 추리소설가인 히메노모리 묘겐이 이 사건에 대해 잡지에 연재하는 식으로 진행되고, 다양한 인물의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점은 사건의 다양한 관점이나 밑밥을 많이 얻을 수 있게 했다. '목 없는 시체'라는 추리소설의 오래된 트릭도 이 책에서는 불길함을 더해주는 요소로 쏠쏠하다. 전통적으로 시체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 목 없는 시체가 과연 이 책에서는 어떻게 이용될까를 관전(?)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였다.

  이런 소재, 문체상의 요건뿐만 아니라, 수수께끼에 수수께끼를 더하는 사건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반전 또한 독자를 움찔하게 한다. 어떻게 보면 그냥 작가의 입맛에 맞게 잘 끼워 맞춘 듯한 이야기 같다, 이건 좀 반칙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다. 하지만 능력 있는 탐정이 "자, 진상은 이렇습니다!" 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마저도 아무렴 어때 하고 용납이 됐다. 어차피 본격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읽었던 것도 아니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실망도 없었다. 호러에 가까울 정도로 기괴한 분위기, 마지막 장까지 독자를 놀래키는 능력. 이제 국내에 겨우 두 작품이 출간됐을 뿐이지만 미쓰다 신조의 앞으로의 이야기가 더 기대된다. 긴다이치 코스케와 여러모로 비교되는 도조 겐야. 그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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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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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사실이 아니지요?"
나는 아저씨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절망적인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러니까 전부 다 사실은 아니지요?"
한참 만에 대답을 들었다.
"사실이 전부는 아니야."
"그러니까 사실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침묵이 가장 정확한 답변을 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 사이에 흐르던 침묵이 바로 그랬다. 나는 흉벽 안에서 울리는 진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눈자위가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아저씨의 눈자위가 붉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24~5쪽

당신 어디서 마시는 거야?
은주가 좋아하는 질문 중 하나였다. 두번째로 좋아하는 질문은 "왜 마셨느냐"였다. 현수는 두 질문에 대답한 적이 없었다. 술꾼에게 '어디서, 왜 마셨느냐'고 묻는 건, 공동묘지에 가서 당신들은 왜 죽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세상의 술집은 상시영업중이고 술 마실 이유는 술집만큼이나 많으니까. -77쪽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에는, 안개가 짙고 비가 내리는 금요일 밤에는, 인적이 없고 어두운 호숫가에서는,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눈을 뜨고 "아빠"라고 속삭여 올 때에는, 자기를 찾는 전화벨이 심장을 두들기는 순간에는, 흔히들 무의식이라 부르는 '혼돈' 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 좀 보여줄까? -122쪽

만약, 확인하러 내려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예정된 시간에 일을 마치고 선착장으로 나왔다면? 만약 오늘밤 호수에 오지 않았다면…… '만약'이 불러온 건 후회뿐이었다.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일이었다. 보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적어도 당사자에게는.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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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1-10-22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7년의 밤, 정말 후덜거리며 조이는 가슴 부여잡고 읽었어요.
이매지님의 밑줄은 좀 특별한데요.^^

이매지 2011-10-23 22:5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도 읽으셨군요.
정말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라 페이지 넘어가는 줄 모르고 읽었어요^^
 
파일로 밴스의 정의 - 스카라베 살인 사건 / 겨울 살인 사건
S. S. 밴 다인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추리소설에 갓 맛을 들이기 시작했을 무렵, 대체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지만 <벤슨 살인사건>이 집에서 굴러다녔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애거사 크리스티의 포와로, 미스 마플에 익숙했던 내게 파일로 밴스는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였다. 하지만 입만 열면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벤슨 살인사건>을 읽고는 파일로 밴스라면 질색팔색하게 됐다. 하지만 파일로 밴스 없이는 고전 추리소설을 제대로 맛봤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파일로 밴스를 마냥 무시하고 살기는 영 찝찝했다. 게다가 쿄고쿠도 시리즈로 말 많고 아는 척 많이 하는 탐정에게 단련(?)됐기에 다시 한 번 파일로 밴스에 도전해볼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마음 한 켠에 다시 밴 다인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놓던 중에 <위대한 탐정 소설>을 통해 "현재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나만큼 미스터리를 많이 읽고 나만큼 주의 깊게 연구한 사람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라는 말을 접하고, 대체 이런 말을 하는 작가는 얼마나 대단한 작품을 썼는지 어디 한번 보자 하는 마음에 파일로 밴스를 다시 만났다. 

  동서, 해문 등 다른 출판사에서도 밴 다인의 작품이 출간된 바 있지만 북스피어판을 고른 것은 번역 때문도 있겠지만 역시 멋진 외양 때문이었다. 잘난 척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파일로 밴스의 자부심을 채워줄 것 같은 디자인, 게다가 시리즈로 나오다니 밴스뿐만 아니라 나의 소장욕도 자극하는 구성에 북스피어판을 선택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시대순으로 보는 것을 좋아해서 이왕이면 시대순으로 읽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북스피어판의 출간 순서는 출간순이 아니었다. 하지만 밴 다인 중기 걸작인 <스카라베 살인사건>과 마지막 작품인 <겨울 살인사건> 두 작품만으로도 밴 다인의 작품 양상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추측하는 재미가 있어서 그 점은 좋았다.

  앞선 작품인 <스카라베 살인사건>(기존에 <딱정벌레 살인사건>으로 출간된 바 있다)은 이집트 학자의 죽음이라는 소재, 어떻게 보면 '저주'라고 볼 수 있는 소재도 흥미로웠고 등장 캐릭터도 개성 있어서 좋았다. 특히나 어릴 때 질색팔색 했던 것이 조금은 미안할 정도로 파일로 밴스라는 캐릭터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애정이 솟았다. 처음에는 밴스가 사건에 대해 얘기하다가 삼천포로 빠질 때는 "하던 얘기나 계속 하라고!"라고 버럭하고 싶었지만 나중에 가니 그마저도 그러려니 하면서 그의 장광설을 즐기게 되었다. 모든 증거가 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밴스는 쉬운 길을 걷지 않는다. 당장 범인을 지목하기보다는 사건을 찬찬히 되짚고 분석해 범인의 체포는 물론이고 범행의 이면에 감춰진 음모까지도 간파해낸다.

  뒤이은 <겨울 살인사건>은 밴 다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장편으로까지 살이 붙지 않은 작품이라 아쉽기는 하지만 밴 다인 식의 러브스토리라는 점에서 나름의 매력이 있지 않나 싶다.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이나 반전 같은 플롯상의 재미보다는 분위기가 돋보인 작품이랄까. 실제 스케이팅 선수를 모델로 해서 쓴 작품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독자라면 김연아를 모델인 것처럼 보는 것도 재미있는 독법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거의 15년 만에 다시 만난 파일로 밴스. 여전히 마지막에 마지막이 될 때까지 속을 드러내지 않아 때로는 피해를 더 키우기도 하고, 자신이 아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뽐내야 성질이 풀리는, 어떻게 보면 그냥 거들먹거리기 좋아하고 막말하는 밉상이지만 그럼에도 파일로 밴스는 어쩐지 매력적이다. 추리소설에 갓 빠졌을 때 파일로 밴스를 만났더라면 후대 작가들이 만들어낸 파일로 밴스의 아류(?)를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지만, 어지간한 캐릭터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지금이 내가 밴스를 만나기 최적의 타이밍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때로는 독설을 날리고, 때로는 하이개그를 하는 밴스.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나같이 밴스를 꺼려해온 독자에게도, 밴스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독자에게도 모두 만족적인 만남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북스피어에서는 총 6권으로 파일로 밴스 시리즈를 계획하고 있고, 현재 2권까지 출간되었다. 모쪼록 무사히 완간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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