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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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 전 <동물농장>은 소비에트 체제를 비판하고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이 책 속에 등장하는 각 동물들의 역할이나 변화양상은 마르크스, 스탈린, 볼셰비키, 프로레탈리아트 등의 러시아 체제와 겹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단순히 소비에트 체제에 국한시켜서 바라보기 보다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고 있는 독재 일반에 대한 비판이라 보는게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동물농장>은 그 기본적인 스토리를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인간들의 지배에 대해 일깨줘주는 돼지가 한 마리 있다. 그 돼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가 들어 죽게 된다. 그의 뜻을 다른 돼지들이 계승하고 우연찮게 인간을 농장에서 몰아내게 되고 그들은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을 몰아내고 나서도 똑똑한 돼지들에게 지배를 받으며 여전히 피지배층으로 살아간다. 결국 인간을 몰아냈지만 이러나 저러나 그들이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더 열심히 한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라는 말로 동물들을 지배한 돼지 나폴레옹은 애초에 혁명을 성공리에 마치고 내건 일곱 계명을 임의대로 교묘하게 변경하면서 피지배층 동물들을 우롱한다. (예를 들어,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된다'라는 애초의 계명은 '어떤 동물도 이유없이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된다'로 교묘하게 바뀐다.) 나머지 동물들은 어떤 의혹을 갖지만 그런 의혹을 교묘한 말로 불식시켜주는 동물때문에 그들은 진상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나폴레옹이 시키는 대로 예전과 다름 없는 생활을 한다.

  애초에 선한 목적으로 시작된 혁명이 뒤틀려 결국은 혁명 이전과 별반 다른 것이 없는 사회가 유지될 뿐. 애써 농장의 동물들이 이루어낸 생산물과 성과는 돼지 나폴레옹과 그 외 돼지들, 나폴레옹을 지켜주는 개들에게 돌아갈 뿐이다. 나폴레옹과 인근에 사는 농장주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게임을 하며 싸우는 모습. 즉, '열 두개의 화난 목소리들이 서로 맞고함질을 치고 있었고, 그 목소리들은 서로 똑같았다. 그래, 맞아,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창 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라는 구절에서 탐욕에 물든 개체의 모습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비단 소비에트 체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에 <동물농장>을 대입시킬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우매한 민중이여. 세상에 눈을 뜰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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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2-1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거 넘넘 재밌게 봤어요. 제가 좋아하는 책 중에 하나에요.

이매지 2006-02-18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이 책 사면서 땡스투는 아프락사스님께 찔렀던 기억이^^
 

 

 

 

 

 

소설가 유미리는 여기에서 출발했다
무색무취한 언어로 그려낸 고통의 기록


재일한국인 2세이자 젊은 극작가 ‘양 히라카’는 자신의 연극 상연을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녀가 경험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이질감뿐이다. 한편 그녀는 동행한 친구의 소개로 ‘박리화’라는 여자와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박리화의 얼굴에 난 상처에 반사적인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에 점차 이끌리게 된다. 그녀는 일본에 돌아와서도 박리화와의 관계를 조금씩 이어나가지만, 그녀를 둘러싼 다른 관계들은 하나같이 위태롭다. 빠찡꼬 가게의 기술자로 일하면서 습관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집을 나가 호스테스로 일하는 어머니, 원조교제를 일삼는 여동생과 정신장애로 병원에 입원하는 남동생, 연극 연출가와의 불륜과 또다른 남자와의 위험한 만남, 그리고 낙태와 자살 미수……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사라져가는 듯한 생활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던 박리화와의 관계마저 그녀가 갑작스럽게 연락이 끊어짐으로써 위기에 처하자 히라카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다시 한번 한국을 찾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실과 배신감, 그리고 절대적인 고독뿐이다.
작가 유미리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녀의 첫 소설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부모의 불화와 그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가족, 정신적인 교감을 얻지 못하는 남자들과의 연애, 낙태와 자살 미수 경험 등 그녀의 이후 작품들의 모태가 되는 모티프들을 모두 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적인 상처를 공유하며 인간적인 유대를 바랐던 상대의 배신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와 슬픔이, 칼날 끝으로 그려낸 듯 날카로운 필체로, 또한 생의 의미만큼이나 둔탁한 무게로 표현되어 있다. “무엇이든 간에 보호를 바라는 것, 힘이 없는 것, 가엾어 보이는 것들을 나는 미워했고 용서하지 않았다”는 주인공의 입을 빌린 유미리 자신의 고백은, 그녀의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특유의 태도와 시각의 원점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우리들은 돌의 바다에 풀려난 물고기
영혼의 피를 흘리며 계속해서 헤엄친다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그 제목에서처럼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피를 흘리며 헤엄쳐야 했다. 박리화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에게 사생활 침해로 고소를 당해 팔 년이 넘는 재판 끝에 출판금지 조치를 당한 것이다. 재판 중 그녀는 문제가 된 일부분을 수정·삭제한 개정판을 법정에 제출하였고 이것이 후에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법이라는 절대권력의 틀 속에서, 개인의 인권와 표현의 자유라는 두 윤리 사이에서 문단과 언론의 일방적인 비판을 받아야 했던 유미리는, 이와 같은 거대한 권력과 맞서 싸우면서 작가의 역할과 문학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힌다.

“나는 이 소설에 사실 그대로를 쓴 부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작가인 ‘나’의 눈을 거친 픽션일 뿐이다. 판결문에서는 ‘이것은 허구이고 이것은 사실이다’라며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 단정하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소설을 읽는다는 것 자체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자세들이 일본에서 오랫동안 이어져내려온 사소설이라는 장르에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모든 소설가들에게 있어서도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소송과 관련해 유미리는 『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문학동네, 2002) 등의 에세이에서 사건의 상세한 전말과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유미리 소설 속의 주인공이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절망을 끊임없이 표출하고 있는 것은 이런 작가 자신의 모습과도 겹친다. 스스로의 살점을 도려내는 가위질을 통해 다시 세상에 탄생한 이 처녀작은 그녀에게 ‘쓴다는 것은 곧 싸운다는 것’이라는 의미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어주었고, 그 자체로 이미 그녀의 ‘싸움’의 기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현대에 자살할 의미가 있는 작가는 유미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지는 않지만 이 소설은 자살자들의 책이다.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종말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의 분격과 격투이다.
_후쿠다 가즈야 (문학평론가)

유미리의 소설을 읽으면 목에 비수가 들이대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소설을 사소설이라는 말로 폄하하는 치들도 있지만,
그런 명칭이나 비평 따위와는 상관없이, ‘쓴다’라는 행위의 무게와
그 ‘윤리’에 감동을 받기 위해 읽어야 할 소설이다.
_주간 포스트

마지막에 마음에 남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누구나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격렬하게 연소되는
그녀의 한결같은 생의 에너지이다.
_스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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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여자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3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석환 옮김 / 해문출판사 / 198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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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포와로에게 마치 오필리아같은 이미지를 가진 한 여자가 찾아온다. 그녀는 자신이 저질렀을지도 모를 살인사건에 관해 의논하고 싶다며 찾아왔지만 포와로를 보고는 '너무 늙었다'며 무례하게 떠나버린다. 그 말에 기분이 상한 포와로는 마침 걸려온 추리작가 올리버 부인의 전화를 받고 그녀와 얘기를 하던 중 자신을 찾아온 여자가 올리버 부인이 만났던 사람임을 알게 되고, 호기심에 이끌려 수사를 시작한다.

  난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은 참 좋아하지만, 포와로가 잘난체하며 뽐내는 건 또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중에 하나다. 올리버부인이 "그녀는 누군가에게 당신의 얘기를 듣고 왔을텐데.."라고 얘기하자 포와로는 "세상에 나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라는 반응으로 나온다. 포와로 특유의 자신감이란. 흥. 하지만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는 왠일로 평소의 그와는 다른 모습을 많이 보인다.(자신이 모아 놓은 조각이 맞지 않음에 대한 불만이 대다수이지만.) 가해자는 분명한 것처럼 보이는데 피해자와 사건은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이 사건.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세번째 여자는 일종의 룸메이트 개념이다. 방이 여러개인 하나의 집을 구하고, 그 방마다 각각의 사람이 사는 것이다. 방의 크기나 상태에 따라 방값은 달라지고, 돌아가면서 집 전체를 사용할 수 있는 날도 정해놓는 식이다. 한 집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별로 친밀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저 사정에 맞게 같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을 뿐이다. 책은 그 책이 쓰여진 시기를 반영하기 마련인데, 고전적인 모습에서 변해가는 모습이 드러난다. 히피족이나 여자처럼 생긴 남자 등등. 한마디로 구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요즘 사람들이란. 쯧쯧"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시대상이랄까. 마지막 대화는 약간 생뚱맞아 보였고, 아무리 번역이라지만 '쌍화차' 앞에서는 심하게 키득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애거사 크리스티의 어떤 작품을 읽던지 중간 이상은 가니까 읽어서 나쁘지는 않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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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2-1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를 생각하고 보면 대단하죠^^

이매지 2006-02-16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긴 하죠^^ 한 두권도 아니고 꽤 많은 작품을 냈는데도 보통 이상 된다는건 그만큼 필력이 있는거겠죠^-^
 

뭐 길게 말할 것도 없다.
워낙에 좋아하는 가네시로 카즈키의 신간인데 무슨 긴 말이 필요할까.

오랜만에 만나는 좀비스 시리즈 기대된다.
더불어 새로운 여자아이의 모습도!

일러스트 가방을 상품으로 준다는데 알고보니 비닐 주머니 같은거 아닌가 몰라.



요리관련해서 자주 가는 블로그 중에 한 군데이다.
요새 웹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요리관련 블로거들의 출판이 대세인가.
얼마 전에 나왔던 <야옹양의 두근두근 연애요리>와 표지가 비슷하다.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폰트도 비슷한 것 같고.
따라한건가. 싶어서 봤더니 출판사가 같은 곳이긴 하다만.
그래도 참 왠지 떨떠름하긴 하다. (내가 왜 -_ -)
연애요리보다는 요리비책쪽이 좀 더 일상생활과 맞닿아있을 듯.


삼국지를 읽으면서 궁금해할 법한 것들에 대해 정리된 책.
워낙 분량이 많기도 하고, 그에 맞게 등장인물들도 많아서 읽다보면 영 헷갈린다.
차례를 보니 더 흥미롭다.
도원결의는 진실인가 허구인가? , 관우의 진짜 무기는 무엇이었을까? , 절대미인 초선이 연환계를 펼쳤는가? 유비는 과연 황숙이었는가? 등등등.
제법 두꺼운 분량이지만 그래도 읽어봐야겠다.


 


줄리앙 그라크. 솔직히 처음 들어보는 작가이긴 하다.
문학상 제도를 비판한 사람이라 공쿠르 상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는데.
그렇다면 공쿠르 상 수상이라면 실력은 있는 작가일텐데...
새로운 작가와의 만남에 기대된다.


 

아직도 <눈먼자들의 도시>를 읽었을 때의 그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베리아 반도의 분리라는 환상적인 장치를 사용한 이야기라니.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게 그의 힘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도 그런 느낌을 느낄 수 있을 듯 싶다.





서울에서 촬영한 영화들을 통해서
서울의 명소(?)들을 알려주는 책.
각 장소의 위치와 교통편, 입장료, 영업시간, 연락처 등의 정보와 함께
감독들이 그 장소를 선택한 이유도 들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도 부록으로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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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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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권이 나온지도 어언 1년이 다 된 시점에 14권이 나왔다. 매번 약 1년의 주기로 다시 찾아오는 <로마인 이야기>의 리듬을 뻔히 알면서도 귀찮고, 시간도 없고라는 이유로 13권까지의 흐름을 대충 연보로 파악하고 14권을 잡았다. 13권까지의 표지가 그 시기를 이끄는 지도자의 모습을 싣고 있다면, 이번에는 좀 다르게 성 암브로시우스의 모습을 표지에 싣고 있다는 점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독자들에게'를 빌려 시오노 나나미 스스로도 이전의 지도자들과 성 암브로시우스의 모습이 왜 다른지에 대해서 약간의 암시를 주고 있다. 13권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14권에서는 당연히 그의 뒤를 잇는 이들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전의 책에서는 한 황제의 성장과정을 통해 그가 어떤 성격을 띄고 있으며, 어떻게 로마를 이끌어갈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과 반비례하여 인간에 대한 관심은 낮아진 것이 제국 말기의 특색인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뒤를 이은 세 아들(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의 성장에 대한 정보는 부재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세 아들은 제국을 삼분하여 다스린다. 하지만, 한 사람이 퇴장하고, 또 한 사람이 퇴장하여 콘스탄티우스 혼자 남게 된다. 콘스탄티우스의 행보는 씁쓸함만 남긴다. 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행보를 밟으면서 그 자신의 계략(?)에 스스로 얽매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나 유일한 친족이라 어쩔 수 없이 부제로 율리아누스를 앉히는 모습에서 특히나 씁쓸함이 크게 남았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바톤을 이어받아 기독교 우대정책에 있어 '확신을 가지고 걸음을 옮긴다'. 그는 특히 다른 종교 중에서 로마의 전래 종교를 배척하는 방침을 명확히 하여 우상 숭배 금지, 희생의식 금지, 심지어 신전 폐쇄 명령까지 내린다.(신전폐쇄명령은 그리스, 로마교 뿐만 아니라 시리아의 태양신전과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까지 폐쇄하여 폭동을 낳기도 했다.) 이렇게 기독교를 로마의 정신적 기둥으로 삼으려고 하나 기독교는 이미 내부적으로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나는 아타나시오스파와 아버지와 아들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로 나뉘어져 대립하고 있다. 이런 기독교 내부의 갈등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와의 대립, 야만족과의 대립으로 이래저래 로마는 심란한 모습을 보인다. 기껏 율리아누스 황제에 이르러 일신교을 버리고, 개혁을 해보려고 하나 시대를 거스르려는 그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흘러가고, 대세는 어쨌거나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가 되버린다.

  이번 책에서는 이전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두 계급이 돋보인다. 하나는 콘스탄티우스 황제 때 활발히 활동한 '에우누코스'라는 환관계급이다. 그들은 왕과 자신의 관계를 중요시여겨(달리 자신의 자식이 없으므로) 국가의 행정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이끌어간다. 어느 지역을 불문하고 그들의 지역망은 촘촘히 있었고, 그 때문에 실제로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환관의 입놀림에 많은 인재들을 처형하기도 한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이들을 몰아낸 뒤에는 '대제'가 힘을 발휘한다. 보통 이전의 황제들은 죽기 바로 전에 세례를 받았던 반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병때문에 일찍 세례를 받는다. 때문에 그는 다른 황제들과 달리 일찍 주님의 '양'이 되버렸고, 그를 인도하는 '양치기'인 대제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게 되버렸다. 황제인 테오도시우스를 좌지우지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바로 책의 표지에 나온 성 암브로시우스였다.

  사실 14권은 '어떻게 기독교는 로마국교가 되었는가'에 대한 답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인 이야기>는 시오노 나나미에 의해서 쓰여지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 그녀의 사적인 감정이 실리는데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기독교도가 아니다. 때문에 어느 정도 공정한 시선에서 로마 안에서 기독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됐다(만약 독실한 기독교도에 의해서 책이 쓰여졌다면 율리아누스는 배교자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기독교라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속에 로마인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한 이해, 그리고 제국의 영광을 다시 돌릴 수 없게되는 흐름에 대한 안타까움 등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이미 관용과 같은 로마다움을 상실해버린 로마의 모습. 지는 해는 아름답지만 로마가 지는 모습은 참 껄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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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6-02-13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명쾌하게 잘 쓰셨네요~~ 헛. 전 1권도 안읽었어요~~~

이매지 2006-02-13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쾌라니요 ㅠ_ㅠ 소설책보다 리뷰쓰기 더 어려웠어요 ㅠ_ㅠ
내년에 15권 나오면 완결될텐데 완결되시걸랑 읽어보셔요.
전 띄엄띄엄 읽으니 영 기억도 가물한게 아쉽네요 ^^;

마늘빵 2006-02-13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권도 안읽었는데. 이거 길어서 엄두도 안나요. 저 복잡한 이름들 틈에서 내용을 파악할까 싶기도 하고.

이매지 2006-02-13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각 편을 따로보면 나오는 인물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서 별로 껄끄럽지 않아요 ^^;; 전 개인적으로 6권까지가 젤 좋았어요.

이리스 2006-02-1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매지님.. 건조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단단하고 또 명쾌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이매지님 리뷰 중에서 이 리뷰에 가장 후한점수를 주겠어요. ㅋㅋ (내가 뭔데 점수를 .. --;) 추천 누르고 갑니다.

이매지 2006-02-13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써놓고 너무 책 요약을 해놓은 거 같아서 떨떠름했는데 좋게 봐주시니. 몸둘바를. (이거 무슨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 소감같잖아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