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말할 것도 없고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구판절판


시차 증후군의 첫번째 증상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아일랜드 사람이 술에 취하거나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이 냉철하게 생각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중략)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시차 증후군의 증상을 기억하려 애를 썼다. 지나친 감상주의, 청각 장애, 피로. (중략) 다른 증상은 뭐였더라? 엉뚱한 말이나 행동, 굼뜬 대답, 침침한 시력. -23쪽

"거의 40년 전에 멸종한 생물을 보다니 놀라울 따름이네요. 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이 끝을 좀 잡아 봐." 돌로 만든 홈통의 끝을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모든 것'이 다 놀라워요. 사실 여기에 '있다'는 자체가 놀라움의 시작이죠."
"아니면 그 종말이거나." 나는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30쪽

"만약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더 빠르게 잘 돌아갈 거야." 공작 부인이 거친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루이스 캐럴 -35쪽

"그저께만 되었더라도 저는 행운이란 건 없다고 말했을 겁니다."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의 풀밭을 걸어가며 테렌스가 말했다. "하지만 어제 오후부터 저는 행운을 믿게 되었습니다. 무척이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지요. 페딕 교수님이 기차를 혼동하셨고 그 다음에는 당신이 여기에 계시고요.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이 강이 아닌 다른 곳에 가려고 했을 수도 있었고, 아니면 보트를 빌릴 만한 돈이 없을 수도 있었으며, 아예 역에 없을 수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 저와 시럴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운명은 실을 쥐고 인간은 운명의 조정하는 대로 움직일 뿐, 성공은 하늘이 주시는 것'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114쪽

"'운명아 마음대로 하려무나. 숙명이란 어쩔 수 없으니, 될 대로 되려무나.' 운명이여, 우리가 왔다." -114쪽

우리가 가려던 곳은 분기점 근처였고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도 그곳에서는 무척이나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증폭, 파급되며 사소한 일 하나, 예를 들어 잘못 걸려 온 전화 한 통이나 등화관제 아래에서 켜진 성냥불 하나, 서류 한 장, 또는 찰나의 순간이 전 세계를 뒤흔들어 버릴 만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의 운전사가 잘못해서 프란츠 요세프 가로 접어드는 바람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에이브러험 링컨의 경호원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고 그사이 평화가 파괴되었다. 편두통에 시달리던 히틀러는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때문에 연합군 측의 D-데이 공격에 대한 보고를 18시간이나 늦게 받았다. 중위가 전보에 '긴급'이라는 단어를 빼먹고 보냈기 때문에 킴멜 장군은 일본군의 공습이 임박했다는 경고를 제때 받지 못했다. '못 하나를 원하다가 신발을 잃고, 신발을 원하다가 말을 잃고, 말을 원하다가 기수를 잃은' 꼴이었다. -186쪽

오버포스 교수가 주장하는 맹목적인 힘, 즉 날씨, 질병, 기후의 변화, 지각의 변동 같은 사건들은 페딕 교수가 인정하든 안 하든 간에 역사를 이루는 요소였다.
문제는 물론, 수많은 전쟁에서 그러했듯이, 오버포스 교수와 페딕 교수의 이견 모두가 옳다는 점이었다. 이 둘은 단지 혼돈 이론이 알려지기 1세기 전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둘의 생각을 결합할 수 없을 뿐이었다. 역사는 개개인의 특성과 용기와 배신과 사랑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도 조종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고와 우연한 기회에 의해서도. 그리고 유탄(流彈)과 전보와 팁에 의해서도. 그리고 고양이도.-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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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2-02-27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이 책 재미있는 책이죠.

개인적으로는 둠즈데이 북이 더 좋았는데... 생각해보면 읽은지도 오래되었네요. 한번 다시 읽고 싶네요. 어떤 박스에 보관되어 있는지 모르지만.(이럴때는 그냥 도서관에서 빌려보는게 속편하죠...--;;)

이매지 2012-02-27 13:52   좋아요 0 | URL
어떤 박스에 보관되어 있는지 모르지만...이라는 말이 왜 남의 얘기 같지 않은 걸까요.
저도 사실 그래서 못 읽고 있는 책이 몇 권 있어요. ㅠㅠ
추천받아서 읽고 있는데 수면부족으로 시달릴 때 읽기 시작해서인지 시차 증후군에 심한 몰입을 하고 있는. ㅎㅎㅎㅎ
 

 

 

 

 

 

 

 

 

 

 

 

 

 

  흔히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 싸움구경이라고 하죠. 불구경이야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릴 때도 있으니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지만, 싸움구경은 불구경보다 물질적/인명적 피해가 덜해서인지 정말 하나의 구경거리가 되는 듯합니다. 하지만 가만 보면 그 싸움도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감정상의 다툼일 수도 있지만 무언가 이권을 놓고 다툴 때도 있고, 사회 구조상 다툴 수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으니 옛날 사람들도 싸우긴 싸웠을 텐데, 요즘 싸움이야 오가면서 또는 TV를 통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해도 과연 옛날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싸웠을까요? 그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는 책, 바로 <조선의 묘지 소송>입니다. 

  에헴, 하고 잰체할 것만 같은, 평소에는 직접 나서서 싸우지 않았던 양반 사대부들이 죽기살기로 싸운 소송이 있었습니다. 바로 묘지 소송인 산송(山訟)입니다. 조선시대의 3대 민사 소송 중 하나인 '묘지 소송(산송)'은 말 그래도 '묘지'를 놓고 다툰 소송입니다. 요즘에도 명당 자리를 놓고 다툰다거나 일이 잘 안 풀리면 조상 묘자리가 안 좋아서 그렇다고 이장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조선시대의 묘지 소송은 그와는 조금 다른 이유에서 시작됩니다. 단순히 풍수지리상의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유교 이념이 확립되면서 조상의 분묘를 단장하고 묘역을 조성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툼이 시작됩니다. 묏자리는 단순한 땅이 아니라 종법질서의 확립과 부계의식 강화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런 유교 의식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평소 토지나 노비 매매시에는 대리인을 내세워 진행했던 양반 사대부들이 패싸움까지 벌이면서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산송에 매달렸습니다. 단순한 땅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유교'를 지키는 길이자 가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으니까요.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에도,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선 후기 사회만의 특징적인 역사 현상인 산송. 사실 처음에 <조선의 묘지 소송> 원고를 받아들었을 때는 고문서 자료가 많아서 어렵게 느껴졌는데, 원고를 찬찬히 읽어가다보니 그 속에서 생동감 있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져 점점 빠져들었습니다. 무려 250년 동안이나 징하게 다툰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의 이야기도 그렇고, 시집간 누이의 묘를 파내려고 하면서 "저희는 차라리 누님의 죄인이 될지언정 조상의 죄인은 될 수 없"다고 호소하는 형제들의 이야기의 흥미진진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관에서 묘를 파내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어떻게든 파내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불법적으로 투장한 무덤이라도 남의 무덤은 함부로 파낼 수 없어서(조선시대에 남의 묘를 파내는 것은 살인죄와 똑같이 처벌했다고 합니다) 본인이 직접 파내야 했는데, 이를 이용해 날이 추우니까 땅이 얼어서 못 파겠다, 농번기라 바빠서 못 파겠다, 풍수상 3월과 9월에는 묘를 옮기지 않으니까 못 파겠다 등 갖가지 꼼수를 부리며 차일피일 기한을 미루고 끈질기게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하는 사람이야 속이 터질 일이지만 제3자 입장에서 재미있는 싸움구경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2010년 론칭한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가 어느덧 열 권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는 작업" "같은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어 자연스레 책을 펼쳐볼 수 있게" 하고자 한 시리즈의 목적에 <조선의 묘지 소송>만큼 잘 어울리는 책이 있을까 합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이 반영된 싸움구경. 점잖은 양반들이 계급장 떼고 제대로 한판 붙는 모습을 함께 구경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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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2-02-24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죄를 고하여라에서 산송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여튼 대단하네요..ㅡㅡ;

이매지 2012-02-25 00:37   좋아요 0 | URL
<네 죄를 고하여라>도 참고차 읽었는데 재미있더라구요. ㅎㅎ
이러나 저러나 대단한 사람들.

BRINY 2012-02-25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산송이군요. 교과서에 딱 한줄 나오는데, 읽어두면 수업시간에 재미난 얘기거리가 되겠네요.

이매지 2012-02-27 09:12   좋아요 0 | URL
엇. 교과서에도 산송이 나오는군요. ㅎㅎ
타깃층을 고등학생부터 잡고 있는 책이라 학생들이 읽기에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재미난 얘깃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ㅎㅎ
 
셜록 홈즈 : 실크 하우스의 비밀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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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날까지도 그를 그리워하며 가끔 "사냥이 시작되었네, 왓슨!"이라고 하는 그 낯익은 대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시달린다. 그 소리를 듣고 나면 믿음직한 리볼버를 손에 쥐고 어두컴컴한 베이커 가를 휘감은 안개 속으로 뛰어들 일이 두 번 다시 찾아올 리 없는 현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따름이다. 모든 인간의 운명이라 할 수 있는 그 거대한 어둠 너머에서 홈즈가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 때면 솔직히 나도 그의 곁으로 건너가고 싶다. 해묵은 상처가 나를 끝까지 괴롭히는 가운데 끔찍하고 무의미한 전쟁이 이 나라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으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제는 더 이상 납득하지 못하겠다. -15쪽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난이 아이들에게서 앗아 가는 첫 번째 값진 보물은 어린 시절이다. -78~9쪽

내가 마이크로프트 홈즈를 처믕 만난 것은 그가 사악한 범죄자 부부와 얽혀 버린 이웃의 희랍어 통역관과 관련해서 도움을 청했을 때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홈즈에게 일곱 살 많은 형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라 할 수 있건만 나와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어린 시절이나 부모님, 고향 혹은 베이커 가 이전의 생활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으니 생각해 보면 희한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천성이 그랬다. 자기 생일을 기념한 적도 없어서 나도 부고를 보고 태어난 날이 언제인지 알았을 정도다. 선대가 지방의 대지주였고 친척 하나가 상당히 유명한 화가라는 이야기를 한 번 한 적 있었지만, 보통은 식구가 아예 없는 사람처럼 지내는 쪽을 더 좋아했다. 자기 같은 천재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세계 무대에 등장한다는 걸까. -165~6쪽

그는 걱정스러워하는 나를 남겨 둔 채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러고는 점심 무렵에 돌아왔지만 끼니를 걸렀다. 짜릿한 수사에 돌입했다는 확실한 신호였다. 전에도 자주 접했던 모습이다. 그를 보면 가슴 높이에서 풍기는 냄새를 쫓아 달리는 사냥개가 생각났다. 사냥개가 한 가지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듯 그도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인 먹을거리, 물, 수면조차 생략할 수 있을 만큼 사건에 몰입하기 때문이었다. -176~7쪽

작가로서의 인생이 막바지에 이른 이제 와 돌이켜보면 신기한 것이, 나는 악당의 정체가 드러나거나 체포되는 것으로 모든 연대기의 끝을 장식했고, 궁금해하는 독자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그 이후 그들의 운명에 지면을 할애한 적이 거의 없었다. 마치 범죄가 그들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사건이 해결되면 그들이 더 이상 살아 숨쉬는 심장과 낙심한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이 회전문을 지나 이 음침한 복도를 걸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두렵고 괴로웠을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거나 구원의 기도를 드린 사람이 있었을지, 끝까지 싸운 사람이 있었을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것은 내이야기와 별개의 문제였다. (중략) 나는 요즘 사람들이 탐정 소설이라고 부르는 작품을 썼다. 어쩌다 보니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 가장 위대한 탐정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와 대결을 펼친 상대 덕분에 위대한 탐정이 될 수 있었을 것일 텐데, 내가 그들을 너무 홀대했던 것이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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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길 - 상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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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도 기회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렇게 될 수 있어.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맞이했을 때의 마음가짐일세. 그만한 기회에 올라탈 수 있는지 어떤지는, 본인의 평소 준비에 달려 있거든." -63쪽

이렇게 불합리한 일도 없지만, 타인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는 지극히 공평한 입장에 선다. 그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0쪽

"어째서 제게 흥미를 가지시는 건가요?" (중략)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입니다."
"어머나, 꼭 소설 대사 같네요."
"그렇군요……. 연애로 받아들이면 묘하게 들리네요. 보통 사람이 보통의 심리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뜻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고타키 씨와 저는 지금까지 전혀 모르는 사이였는걸요."
"중요한 것은 상대를 알게 된 기간의 장단長短이 아니라 깊이의 정도입니다. 다미코 씨, 말해 두겠는데 저는 당신의 몸에 아무런 흑심도 갖고 있지 않아요. 그것만은 안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88~9쪽

증언자의 말은 같은 뜻이라도 기교나 말투에 따라 여러 가지 뉘앙스를 갖는다. 이를 이용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기란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예를 들면 다미코가 남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는 증언 하나만 보아도, '친절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차가웠다'는 말로 바뀌고, 종래에는 '매몰찼다', '학대했다'는 뜻으로 왜곡되어 간다.
하나의 증언을 좌우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게 할 수 있다. 증언자는 청취자가 정리한 내용을 읽고 자신이 이야기한 뉘앙스와 다르다는 점을 눈치채더라도 큰 줄기가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결국 날인을 하는 법이다.
어떤 주관에 의해 증언을 '편집'하려고 하면 불리한 부분도 얼마든지 생략할 수 있다. 즉 용어를 바꾸고 강조, 생략, 함축 등을 이용함으로써, 의미를 애매하게 만들어 무엇이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변형할 수 있다-.-24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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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연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7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품절


"이상과 정상은 간단히 구분 지을 수 없어. 저야말로 정상의 표본입니다, 하고 말하는 녀석이 있다면 꼭 좀 보고 싶군." -17쪽

나는 히무라의 필드워크에 함께하고 싶었다. 예리한 두뇌와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이 친구는 나 같은 사람보다 훨씬 꿋꿋이 서 있을 터인데, 때때로 몹시 불안정한 일면을 드러낸다. 피비린내 나는 범죄의 바다에 연구자로서 출항한 이유에 대해, '나도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니까.'라고 말한 그를 내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범죄라는 필드에 나섰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자발적으로 지옥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뜻 같기도 했다. 주제넘은 생각이겠지만 그가 끝자락에서 발을 헛디뎌 저편으로 굴러떨어지는 순간, 나는 그 팔을 붙잡아 끌어내주고 싶다. 그런 마음인지도 모른다. -88~9쪽

내 뇌리에도 다양한 정경이 떠올랐다. 마치 방금 전 영화에서 본 장면처럼 선명하게.
주홍색으로 물든 바다. 파도. 하늘.
주홍색으로 물든 해변. 시체. 수사관.
주홍색을 담아내려는 나카무라 미쓰루.
주홍색을 두려워하며 떠는 기지마 아케미.
끔찍할 정도로, 질척하고 진한 주홍색. -162쪽

프로이트에 니체, 푸코,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 제대로 이해 못해도 상관없었어요. 도서관에서 빌려서 정신없이 읽었죠. 정말 즐거웠어요. 고독과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도 책만은 저와 차분히 대화를 나누어준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몰라요. -207쪽

"살인사건이야말로 최대의 중죄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에 둠으로써 진상을 해명하고 싶다는 독자의 절실한 욕구를 환기할 수 있다고 소박하게 설명한 작가가 있지만, 독자들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살인의 진상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제 생각에…… 살인사건이 테마라면 시체가 등장하잖아요. 시체란 '당신을 살해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어도 그 질문에 대답할 능력을 잃은 존재입니다. 절도사건이나 사기 피해자라면 어떠한 정보를 스스로 제공해주겠지만 살인사건의 경우 그건 기대할 수 없어요. 시체, 죽은 자는 우리가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절대로 대답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 불가능성이 열쇠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불가능성이 강한 만큼 이야기가 긴장감을 띠고 재미있어진다는 말씀이군요?"-210~1쪽

"네. 그렇긴 하지만, 추리소설이 갖는 특유의 애달픈 흥취가 있는데 그 매력을 설명하는 단어로는 충분하지 않겠지요. 아니, 이건 주관적으로 떠드는 소리니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살인사건을 다루는 추리소설의 불가능성이란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자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아닐까 싶어요.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상대에게, 대답해주지 않을 줄 확신하면서도 거듭 묻는다는 건 안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211쪽

"그래서 추리소설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건가요? 말씀을 듣기 전까지 추리소설이 그런 건 줄 몰랐어요. 탐정은 무녀가 되어 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상징적으로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로군요." -212쪽

"사념의 잔재라. 향수의 잔향처럼 인간의 상념이 실제처럼 남는 일은 없겠지. 사념이나 감정이란 뇌내의 전기신호니까. 내가 범인의 속삭임을 듣는다고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야. 꿈이 없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범인은 종종 현장에서 실수를 해서 자기 소행이라고 자백하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나 흔적을 남긴다는 뜻이야."
"……지금 본 곶에도 그런 게 있었나요?"
"물론 있었지. 모두들 거기에서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지? 이해가 가지 않는 그 점이 범인의 속삭임이야. 범죄의 목소리라고 바꿔 말해도 좋아. 그 녀석은 떠들고 싶어 좀이 쑤시지." -230~1쪽

"그래서 유우코 씨한테 '선생님처럼 인기 많은 분이 남자 복이 없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하고 불평했더니, '난 누가 치켜세워주면 싫지는 않지만, 여자에게 아양을 떠는 남자한테는 경의를 표할 수 없어. 경의를 표할 수 없는 남자는 절대 사랑할 수 없잖아?'라고 했어요. '그건 그렇죠.' 하고 크게 공감하긴 했지만." -302쪽

"어째서 다들 석양이 아름답다고 하는 걸까요? 어두운 밤이 다가오는 전조인데."
아케미는 빛이 강해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석양은 몰락의 상징이기도 하고, 분명 어둠의 전조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히무라가 말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저무는 거니까." -3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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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2-02-04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홈즈의 주홍색 연구인 줄알았네요.;;; 이매지님이 그걸 안 읽으셨을리는 없는데.ㅎㅎ

이매지 2012-02-04 23:17   좋아요 0 | URL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홈스에게 바치는 오마주라고 할까요. ㅎㅎㅎ
주홍색 연구 하면 사실 홈스가 맨 먼저 떠오르니까요^^

재는재로 2012-02-09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홈즈에 대한 오마주라기 보다 도전 같은데 솔직히 실망한 겹치는것은 과거의 범죄때문에 그리고 여자
마지막 반전이라는것도 동기또한 확실하지 않는 히무라의 추리뿐 증거도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