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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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의 밤>으로 문학계를 뒤흔들었던 정유정이 2년 3개월 만에 <28>로 돌아왔다. <7년의 밤>이 세령호를 둘러싼 이야기라면 이번 <28>은 '불볕'이라는 뜻의 도시 '화양'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모두가 평범한 일상을 영유하던 겨울날, 인구 29만의 서울 근교 도시 화양에 '빨간 눈' 괴질이 돌기 시작했다. "바이러스인지, 세균인지, 전염방식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접촉한 지 하루면 눈이 빨갛게 되고, 빨간 눈이 나타난 지 이삼 일 내에 사망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이 전염병은 화양이라는 도시 안팎을 뒤흔든다. "자신이 죽음의 손아귀에 갇혔다는 사실에" 두려워하는 안쪽과 "자신에게 죽음의 손이 뻗어 올까 봐" 두려워하는 바깥쪽.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무게. <28>은 28일간 화양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본성 대한 뜨거운 이야기다.

 

  <7년의 밤>이 꽤 괜찮았기 때문에 <28> 어느 정도 기대감을 걸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7년의 밤>에 비해 <28>은 자극적이긴 하나 독보적이지는 않았다. 전염병, 폐쇄된 공간, 그곳에서 일어나는 공포와 무질서,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빨간 눈' 괴질의 시작점인 개를 죽이거나 생매장하는 모습은 수많은 소돼지를 살처분한 구제역 사태가 떠오르게 했고 폐쇄된 공간에서 국가 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가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연상케했다. 물론, 작가도 후기에서 밝혔듯이 "만약 소나 돼지가 아닌 반려동물, 이를테면 개와 인간 사이에 구제역보다 더 치명적인 인수공통전염병이 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이야기였으니 이런 연상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서 플러스 알파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소돼지를 개로 치환해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에 그쳐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28>을 읽으며 나 또한 작가처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인간이 서슴지 않고 '가족'처럼 여기는 반려동물의 목숨도 빼앗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반려동물뿐이겠는가. 화양 밖의 사람들의 모습처럼 다른 인간의 삶마저도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정유정은 '빨간 눈' 괴질이라는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를 통해 이런 인간의 가장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알 수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서슴 없이 타인의 삶을 딛고 서려는 모습을 보며 오싹해졌다.

 

  다섯 명의 사람과 한 마리 개의 관점에서 사건을 전개하다보니 다양하게 사건을 조망할 수 있었지만, 이야기는 다소 산만해졌다. 119 구조대원 기준의 이야기나 개썰매 레이스에 참가한 이력이 있으나 유기견 구조센터를 운영하는 재형의 이야기, 그리고 늑대개 링고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전개나 인물의 묘사 등이 적절히 배치된 느낌이었지만 간호사 수진과 기자 윤주 그리고 사이코패스 동해와 관련된 부분은 인물이 주체가 되어 이야기를 끌어가는 느낌보다는 관찰자(또는 구경꾼)에 그치는 것 같아 아쉬웠다. 특히 동해라는 캐릭터는 화양을 한층 광기의 도시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동해라는 인물이 전체 이야기의 본질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듯해서 꼭 들어가야 했을까 고개가 갸웃했다. (차라리 동해를 중심에 둔 사이코패스 소설이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싶지만 그랬다면 짜증나서 덮었을지도.)

 

  '빨간 눈' 괴질 자체가 원인도 해결책도 알 수 없는 병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가족들은 희생됐지만) 주인공들은 어떤 이유에서 원인균에 감수성이 약해 그 누구도 빨간 눈 괴질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나 화양 밖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지만 끝까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점도 좀 작위적이지 않나 하는 싶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걸고 넘어지면 피해갈 작품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이래저래 불평을 토로했지만 <28>은 흡입력 있는 소설이다. 500쪽에 가까운 이야기를 바쁜 와중에도 한 호흡에 읽은 것도 참 오랜만이니 이야기꾼으로 정유정의 능력은 높이 사고 싶다. <7년의 밤>을 읽을 때처럼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28>을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그려갔다. 장면 하나하나를 생동감 있게, 캐릭터 하나하나를 맘껏 뛰놀 수 있게 하는 것은 정유정이 가진 최대의 무기가 아닐까. <28>을 읽는 동안 화양에서 그랬듯이 소설 안팎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생명이 죽어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고, 살아가려 한다. 그렇게 삶은 지금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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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7-04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흡입력이 있어 읽어봐야 될듯 싶더군요^^

이매지 2013-07-05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스피님 말씀처럼 흡입력은 있어요. ㅎㅎ 이만큼 쓰기도 힘들죠.
 
-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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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 거기가 싸움의 시작이야. 사람들은 독기나 오기를 품으라고 말하지. 마치 싸움을 할 때 독기를 품으면 훨씬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말하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뜨거운 것들은 결코 힘이 되지 않아. 그렇게 뜨거운 것들을 들고 싸우면 다치는 건 너밖에 없어. 정작 투지는 아주 차갑고 조용한 거지. 상대방은 화가 나 있어. 네가 자기 땅에 함부로 들어왔으니까. 네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으니까. 상대방은 아주 뜨거워졌지. 하지만 너는 차가워. 너는 그저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가져오고 있는 중이니까. 툭툭, 방울토마토 하나. 툭툭, 방울토마토 두 개. 툭툭, 방울토마토 세 개. 상대방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여전히 방울토마토를 가볍게 가져올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거지. 싸움은 그렇게 잔인한 거야. 어때? 너는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25~6쪽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못 되면요?"
"홀딩이라는 좋은 기술도 있지. 좋든 싫든 무작정 상대를 끌어안는 거야. 끌어안으면 아무리 미워도 못 때리니까. 너도 못 때리고 그놈도 못 때리고 아무도 못 때리지."-26쪽

금고 속의 정적이, 기묘하다. 천장의 할로겐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는 수십억 혹은 수백억 원이 넘는 보석과 골동품이, 금세 무감각하다. 저것들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면 마냥 행복해질 거라고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솔직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저 반짝반짝하는 것들을 가지려고 훔치고, 사기치고, 속이고, 거짓말하면서 살았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고 당장 손에 쥘 수 있어도 결국 금고 밖으로 못 가지고 나간다. 내 인생은 늘 그랬다. 다른 놈들 인생도 비슷할 것이다. 사실 아무도 금고 밖으로 저 반짝이는 것들을 손에 쥐고 나가지 못한다. 그것은 저 보석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금고 밖에 놔두면 불안하니까. 불안하니까. -42~3쪽

사람들은 사기꾼이 거짓을 파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사기꾼은 환상을 파는 직업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거짓보다 진실에 훨씬 가깝다. 진실에 가까운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에 가려 하고, 자신이 움켜쥘 수 없는 것들을 움켜쥐려고 한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사기꾼과 손을 잡는다. (중략) 환상은 욕망이 되고 욕망은 금세 진실이 된다. -47쪽

장지구는 벽시계를 봤다. 오후 5시였다. 벌써 5시다. 오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은 일곱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장지구가 반드시 자정까지 섹스를 끝내고 호박 마차 같은 것을 타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꼭 일곱 시간이 남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섹스는 새벽 1시에 해도 되고 2시에 해도 된다. 33년이나 묵은 동정을 걷어차버리고 훨씬 홀가분해지고 긍정적인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밤을 새워 발제문을 완성하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건 섹스가 러닝머신이나 벤치 프레스처럼 혼자 우쌰우쌰 땀 흘리며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섹스는 반드시 둘이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랑 한단 말인가? 장지구는 '누구?'라는 질문에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혀옴을 느꼈다. 그러자 절로 '인생의 쇠털처럼 많은 나날들 동안 나는 대체 뭘 하고 산 건가? 남들은 그렇게 쉽게도 하더니만, 나에게는 왜 단 한 명의 그 '누구'도 없는 것일까?' 따위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154쪽

"나 같으면 지금 당장 아프리카로 날아가겠다. 복잡하고, 땅값 비싸고, 사람 많고, 이 콧구멍만한 명동에서 복닥거리며 사는 거 이제 지겹지도 않냐?"
"지겹지. 터무니없이 지겹지. 매번 같은 사람들에, 같은 일에, 같은 농담에, 같은 술자리에, 정말 지겨워. 가끔은 섹스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지겨워서 하품이 다 나온다니까" 하며 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지겨우면 그만해도 되잖아?" 내가 물었다.
"외로우니까. 그런 짓이라도 안 하면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거든." 안이 말했다. -199~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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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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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밥상 뒤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183쪽

빨간 눈은 원인 균이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바이러스인지, 세균인지, 전염 방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의료팀이 할 수 있는 조처는 거의 없었다. 해열제, 항생제, 수액이나 산소 공급 등 효과가 거의 없는 몇 가지 처방이 전부였다. 박남철 과장은 치료자 자신에 대한 보호를 강조했다. '접촉'이라는 같은 조건에서 발현하지 않은 사람들은 병원체에 감수성이 없는 행운아일 테지만, 무감수성의 조건이 무엇인지 현재로써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그 행운아이기를 바라지는 말자고 했다. 수진은 자신이 혹시 그 행운아가 아닐까, 생각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러기를 바랐다. 은지는 그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은지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다 죽어도 나는 죽고 싶지 않아. -190쪽

빨간 눈의 원흉이 개라는 말로 들렸다. 그렇게 들리도록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개에게'라는 부분을 생략하고 '개 한 마리가 수백 명의 사람에게'를 부각시킨 탓이었다. '살 처분'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생략이요, 과장이었다. 이 교묘한 말장난이 사람들 사이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두 번 생각해볼 필요조차 없었다. 재형은 망연한 심정으로 구급차 뒤 칸에 실린 개들을 돌아봤다. 모처럼 드라이브를 하게 됐다고 즐거워하는 개들 사이에서 대장 츄이의 푸른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고 차분한 눈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던, 우리만큼은 안전하게 보호받으리라 믿는 것처럼. -213쪽

여론은 화양 봉쇄의 당위성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접촉한 지 하루면 눈이 빨갛게 되고, 빨간 눈이 나타난 지 이삼 일 내에 사망에 이른다는 이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전 국민을 종교적 수준의 공포와 공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각 언론사와 방송의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90퍼센트가 대통령의 결단을 지지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군을 동원해서라도 빨간 눈의 서울 상륙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화양시민 29만의 문제가 아니라 5천만의 생명이 걸린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국민들에겐 화양과 빨간 눈이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230쪽

언론은 여론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임무를 수행했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임기 2년 차에 돌입한 대통령의 정치력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될 것이라고 논평하고, 화양시민은 원인 균이 규명돼 진단 시약이나 치료제 및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돌출 행동을 자제하며 정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발병에서 치사에 이르는 기간이 짧아 화양을 철저하게 격리한다면 대유행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 사스처럼 자연 소멸될 수도 있다는 낙관론을 폈다. -231쪽

인터넷과 SNS에선 수십만 개의 손가락들이 수십만 개의 훈수를 뒀다. 세계보건기구와 손잡고 빠른 시일 내에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둥, 이 전염병에 '빨간 눈' 괴질이 아닌 보다 적절한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는 둥, 정체 모를 병의 유행으로 대중이 막연한 공포를 느낄 때 정부와 언론은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고 공중과는 어떤 내용으로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매뉴얼을 만들어 실행하라는 둥. 더하여 희한한 풍문들이 'RT'를 통해 무한 확산됐다. 빨간 눈은 개와 사람의 바이러스가 합방해 낳은 이종 변이 바이러스라느니, 화양에 내린 이 새빨간 저주는 사악한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해 신이 보낸 최후의 불벼락이라느니, 생마늘과 홍삼을 많이 먹으면 빨간 눈에 걸리지 않는다느니……. -231쪽

고글과 마스크 같은 방역 물품, 기본 생필품이 순식간에 동나버렸다. 카드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됐고, 화양시내의 현금인출기는 모조리 빈 깡통이 됐다. 도로에선 차들이 폭주하고, 사람들은 라면 한 상자를 놓고 주먹다짐을 벌이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쇠 파이프로 상점 유리창을 깨고 들어갔다. 동네 골목길과 도로에는 하룻밤 새 버림받은 개들이 떼를 지어 나돌아 다녔다. (중략) 화양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불이었으나 불을 대하는 안팎의 태도는 이렇듯 확연하게 달랐다. 두려움으로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만 똑같았다. 안쪽은 자신이 죽음의 손아귀에 갇혔다는 사실에, 바깥쪽은 자신에게 죽음의 손이 뻗어 올까 봐. -232~3쪽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345~6쪽

윤주는 종종 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가만있지 않는지. 안전한 자기 집을 두고 감염의 위험과 무장 군인, 추위와 허기가 기다리는 광장에 모이는 진짜 이유가 뭔지. 이 방에 홀로 남은 지금에야 그녀는 답을 알 것도 같았다. 그들은 '누군가'를 향해 모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줄 누군가, 시선을 맞대고 앉아 함께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뭔가를 나눠 먹을 수 있는 누군가, 시시각각 조여드는 죽음의 손을 잊게 해줄 누군가를 만나고자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404쪽

대원들 대부분이 기준처럼 혼자가 됐거나 돼가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소방차를 타는 건 도망치기 위함일 거라고, 기준은 생각했다. 현재에 이르게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한 분노로부터, 매일 매 순간 밀려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홀로 남았다는 외로움으로부터, 다시는 일상을 되찾을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으로부터. 저 많은 사람들이 이 광장에 모여 앉아 울분을 토하고, 박수를 치고, 내일을 희망하며 삶을 확인하듯. -409~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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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책 이야기에 앞서 오래전 친구가 적어준 ‘이런 남자 만나라’를 먼저 소개하려 합니다.

(특정 남성 비하가 아님을 밝혀둡니다. 소심소심.)

 

잔잔하고 감성적인 노래+클래식+재즈 좋아하는 남자 안 됨.

그냥 아이유나 소시 좋아하는 단순한 남자!

맛집 꿰고 있고 분위기 좋은 데 잘 알고 식성 까탈스런 남자 안 됨!

김밥천국이든 나발이든 아무거나 우걱우걱 소처럼 잘 먹는 단순한 남자!

책 좋아하고 독립영화, 상 받은 영화 잘 보는 진지병 걸린 남자 안 됨.

<엽기적인 그녀> 같은 거나 때려부수는 블록버스터나 시시한 할리우드 무비도 군말없이 재밌다고 껄껄대면서 보는 남자여야 됨.

 

이런 이야기와 함께 그 친구는 '문과생 남자는 안 된다' '예술하는 남자도 안 된다'며 '남자라면 공대생'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경이의 시대』를 편집하면서 저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탄식했습니다.

 

'아, 과학하는 남자도 안 되겠어……'

 

뜬금없이 왜 남자 이야기냐구요? 『경이의 시대』가 '과학자(특히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잠을 잊는 것은 기본이고, 밥때도 놓쳐서 옆에서 떠먹여줘야 할 판에, 무모할 정도로 자기 삶을 바쳐(심지어는 목숨까지 걸고) 과학에 매진해 과학 연구에 새로운 상상력과 흥분을 불어넣은 과학자들. 이들의 이야기가 『경이의 시대』에 담겨 있습니다.

 

흔히 낭만주의 시대 하면 문학이나 미술, 음악 같은 예술적 성취를 떠올리지만, 이 시기 과학사적으로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경이의 시대』의 저자 리처드 홈스는, 직접 제작한 망원경을 통해 태양계의 대중적인 개념을 완전히 바꾼 윌리엄 허셜과 그의 여동생 캐럴라인 허셜, 자신의 목숨을 건 실험으로 화학 마취의 시작을 연 험프리 데이비를 비롯해서 조지프 뱅크스, 토머스 베도스, 마이클 패러데이 같은 '과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그리고 이들의 발견과 발명을 돌파구 삼아 영감을 얻었던 메리 셸리(『프랑켄슈타인』), 콜리지, 키츠 같은 낭만주의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채롭고 흡입력 있는 내러티브로 낭만주의 시대를 채워갑니다.

 

800쪽이 넘는(본문 796쪽+화보 24쪽) 책이라 선뜻 다가가기 힘들어 보이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경이의 시대』는 술술 읽힙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읽어봤을 위인전처럼 전기(傳記) 형식을 취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달걀을 품은 에디슨의 에피소드에 웃음 지은 적이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경이의 시대』는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조금 더 살이 붙은 과학위인전입니다. 평전처럼 한 인물의 삶을 세밀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중요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과학적 발견, 과학자 간의 교류 등에 대해서 생동감 있게 소개하기 때문에 낭만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한 편의 잘 짜여진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경이의 시대』의 중심에 있는 조지프 뱅크스, 윌리엄 허셜, 험프리 데이비, 이 세 사람이 모두 매력적이지만, 제가 읽을 때마다 가장 빠져 읽은 부분은 윌리엄 허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쭉 음악가의 길을 걷다가 스물일곱 살 때부터 천문 관측 일지를 쓰기 시작해 점점 천문 관측에 빠져들어 심지어 직접 금속거울을 주조하고 반사망원경을 제작한 윌리엄 허셜. 천왕성 발견을 비롯해 우주를 실험실 삼아 날씨가 좋으면 하루에 예닐곱 시간씩 천문관측에 몰입해 가늠할 수 없이 큰 우주를 서서히 개척해간 윌리엄 허셜. 그의 곁에는 낮에는 안주인으로, 밤에는 천문학 조수로 묵묵히 오빠의 손발이 되어준 여동생 캐럴라인 허셜이 있었습니다. 

 

1783년 12월 31일, 눈이 30센티미터 넘게 내렸고 하늘은 잔뜩 흐렸다. 그러나 허셜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행사를 제쳐놓고 마지막으로 하늘을 훑어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캐럴라인의 회고록을 보면, 허셜은 그날따라 조바심을 내면서 그녀에게 평소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10시쯤 별 몇 개가 구름 사이로 나왔고, 우리는 최대한 서둘러 관측 준비를 했다. 오빠는 망원경의 앞머리에서 나에게 망원경을 수평 방향으로 돌리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서둘러 망원경의 기단을 돌리느라고 "녹아가는 눈이 30센티미터나 쌓인 캄캄한 바닥에서 달려야 했다". 그러다 미끄러졌고 눈에 덮여 보이지 않던 나무 말뚝에 걸려 넘어졌다. 그 말뚝은 망원경의 틀을 밧줄로 고정하는 데 쓰이는 것으로, 수직으로 솟은 철제 갈고리가 "푸줏간에서 고기를 매달 때 쓰는 갈고리처럼" 달려 있었다. 

캐럴라인은 그다음 일을 고통스럽게 회고했다. "나는 그 갈고리에 오른 무릎 위 15센티미터쯤 되는 부위를 찔렸다. 오빠가 부르는 소리에―'빨리, 빨리!'―나는 비참한 외침으로―'나 찔렸어요!'―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허셜은 여전히 높은 단 위의 캄캄한 더움 속에 있었으므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즉각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어둠 너머에서 계속 "빨리, 빨리!"라고 외치고, 캐럴라인은 고통에 헐떡거리면서 "나 찔렸어요!"라는 대답을 반복했던 듯 보인다. 

결국 허셜은 사태를 파악하고 과거에 망원경의 틀을 조정했던 조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빠와 그 기술자가 곧바로 와서 나를 들어올렸지만, 그러느라 내 살점이 거의 60그램이나 떨어져 나갔다. 기술자의 아내도 부름을 받고 왔지만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캐럴라인은 집으로 옮겨졌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상처를 붕대로 감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2주 이내에 관측 작업에 복귀했다고 자랑스럽게 적었다. (189쪽)

 

그전부터 여동생을 막 부려먹는 허셜의 모습에 몇 번이나 욱했지만 특히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살짝 뒷목을 잡았습니다. 여동생을 병원도 안 데려가는 오빠나 혼자 털고 일어나서 다시 천문관측을 하는 동생이나 해도해도 너무한 이 오누이를 어쩌나 싶다가 결국 과학하는 남자도 못 쓰겠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의 우주관과 세계관은 허셜 오누이의 덕심(?)에 빚진 것이 많지만 말입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책이라고 마구 자랑하고 싶어서 책의 두께만큼 편집자의 책소개도 길어져버렸습니다. 과학 이야기가 이어져 더 큰 역사 이야기로 이어지는 『경이의 시대』. '발견'의 객관적 대리인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과학자'의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에게, 교양 있는 읽을거리를 원하는 분들께 강력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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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3-06-28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주문에 넣었을텐데~~~~~~ㅠㅠ
하루만 일찍 추천해주시징~~~~~.ㅠㅠ

이매지 2013-06-28 09:00   좋아요 0 | URL
우어어어어어어어어. 비싼 책이니까 금방 5만원 채우실 수 있어요. ㅠㅠ

라로 2013-07-04 13:10   좋아요 0 | URL
ㅎㅎㅎ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가져가는 게 문제가 그냥 포기합니다. 하지만 이매지님이 편집하신 책이라고 하니 나중에 꼭 읽어 볼게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2 - 시오리코 씨와 미스터리한 일상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2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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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카와 씨에게는 책에 대한 막대한 지식 말고도 또 하나의 특기가 있다. 오래된 책에 얽힌 수수께끼라면 아무리 실마리가 사소하든, 누군가에게 곁가지로 들은 이야기든 개의치 않고 멋지게 해결하는 것이다. -31쪽

"고인은 책의 구입과 보관 방법에 독특한 자신만의 규칙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아요."
(중략)
"이쪽에 있는 책들은 매입하지 않을 책인데, 이런 책을 굳이 보관하는 분들은 거의 없죠. 그렇다고 여러 번 읽은 것 같지도 않고요. 아마도 책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셨던 모양이에요.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분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책을 통해 책 주인의 성격까지 알 수 있는 겁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취미는 물론, 직업이나 나이까지……. 책장만 보고도 그런 걸 알아맞히는 사람도 있거든요."-145~6쪽

어떤 감정이든 그대로 놓아두면 서서히 멀어지다 언젠가는 어딘가로 사라진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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