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에 빠진 서구의 정신세계에 새로운 활력과 원대한 희망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사가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학문적 탐구의 체계성이나 현기증 나는 정합성을 보여주기보다 끊임없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의 종교사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 이미 국내에도 엘리아데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저작이 많이 출간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은 완전한 인간, 그 총체성의 신비를 꿈꾸었던 엘리아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저작이다. 또한 문학동네로서는 『대장장이와 연금술사』(1999)에 이은 엘리아데의 두 번째 저작인 셈이다.
『성과 속』『종교형태론』『세계종교사상사』 등의 저작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글들이지만 한 편 한 편이 인간 존재의 무한성과 사유의 신비를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밀도를 자랑한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에세이 중 앞의 네 편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아스코나에서 에라노스 연감을 위해 발표한 것이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인도, 이탈리아, 말년에는 현대사상의 용광로 미국에서 생을 마친 종교학의 오디세우스 엘리아데. 그는 성스러움과 비속함, 숨겨진 것의 드러남, 중심의 상징, 반대의 일치와 같은 기본 개념들을 이용해 샤머니즘, 요가, 신화, 의례 등의 종교적 주제를 살핀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 “이 작은 책에 모은 연구들은 몇몇 비유럽적인 종교적 행동양식과 정신적 가치관을 이해하기 쉽게 전하려고 근심하는 한 종교사학자의 행보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구태에 빠진 서구의 정신세계에 새로운 활력과 원대한 희망을 불어넣으려 했던 완숙기에 접어든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값진 선물은 동서양의 구분을 떠나 인간의 신화와 역사, 상징과 상상력의 광활함을 접한다는 데 있다.

완전한 인간, 안팎이 균형 잡힌 인간을 향한 종교적 탐색

이 책의 압권은 단연 표제작인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이지만 다른 에세이들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럼 간략하게나마 각 에세이의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신비한 빛의 경험」에서 엘리아데는 서양의 기독교적인 빛의 체험을 시작으로, 유대교와 에스키모 샤먼, 동양의 여러 종교적인 현상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빛의 체험을 바탕으로 초자연적인 빛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 속성과 강도가 어떠하든 간에 빛의 체험은 언제나 종교적인 체험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 경험들은 인간을 속된 세계나 역사적 상황에서 끌어내어 질적으로 다른 우주에 던져놓는데, 이는 신성하고 초월적이며 전혀 다른 세계다. 이 같은 빛과의 대면에 따라 발견되는 우주는 정신적인 본질을 가진 것, 즉 정신을 가진 자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속된 우주와 대립하거나 이를 초월한다. 빛과의 만남은 이처럼 주체의 실존에 단절을 야기하는데, 이 만남은 인간에게 신의 작품으로서의 실존 또는 신의 현존에 의해 신성화한 세계를 밝혀주거나 이전보다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인도나 페르시아, 아시아 여러 지역의 다양한 농경 축제는 결국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역사적으로 한정된 특정한 상황을 초월함으로써 초인간적이며 근원적인 상황을 되찾으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 농작물을 수확했을 때나 새해를 맞았을 때 통음난무가 벌어지는 이유는 첫번째의 경우 농사의 풍성함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며, 두번째 경우에는 천지 창조 이전에 존재했던 힘, 우주를 탄생시킨 그 무한한 힘을 얻어 창조 이전의 혼돈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상징한다. 새로 시작하는 한 해는 창조의 과정에 있는 세계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또는 총체성의 신비」에서는 샤머니즘의 일부 의례에서 나타나는 무성이나 양성의 최종 목적 또는 신화적 당위성은 바로 인간의 변화에 있다는 점을 말한다. 즉 양성적이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대립적인 요소들을 현실의 상호보완적인 다양한 측면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통일성을 다시 회복하려는 욕구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고대의 주제와 모티프들이 오늘날의 민속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총체성의 신비가 인간 드라마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신비주의적 신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인류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신화와 민속, 현대인의 꿈과 환상 그리고 예술적 창작물 등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우주의 갱신과 종말론」은 멜라네시아의 ‘화물 숭배’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적 천년주의 사고를 토대로, 우주의 종말론과 우주의 주기적인 탄생의 의미를 조명한다. 이른바 ‘원시종교’에서는 새해에 첫날이 시작되는 것은 우주의 탄생을 재현하는 것으로 여긴다. 즉 우주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가 재현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과거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종교적인 욕망과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그 근원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따라서 ‘처음으로’라는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하겠으니, 세상의 개혁을 추구하는 수많은 제의와 의식, 반복적인 우주 생성의 열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벌써 오래 전에 육체적 노동의 종교적인 의미와 그 유기적인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종교적인 의미가 아직 살아 있는 곳조차도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술과 유럽적인 이념들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전통적인 인간은 입문의 경험이 주었던 그 충격을 주기적으로 다시 느낄 필요성을 중시해야만 종교적인 의미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밧줄과 마술」에서도 엘리아데는 석가모니의 일화라든가 고대 인도, 이븐 바투타가 목격한 중국의 밧줄 묘기, 심지어 비동양(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밧줄 묘기에 관한 풍부한 사례를 근거로 그 의미를 밝혀나가고 있다. 여기서 줄이라든가 밧줄, 엮기, 짜기 따위의 이미지들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 이미지들은 선택받은 특별한 상황, 곧 신에게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든가 우주적인 근원과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속적이고 구속되어 있으며 미리 운명지어져 있는 불쌍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표현하기도 한다. 엘리아데는 이 두 경우에 공통적으로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전제하지만, 첫번째 경우 인간은 그의 조물주 또는 그의 우주적 근원과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을, 두번째 경우에는 반대로 ‘마술’에 의해 또는 자신의 과거에 속박당한 채 운명이라는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을 아울러 지적한다.

「종교적 상징주의에 대한 언급들」은 앞의 네 편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이 글에서 엘리아데는 종교적 상징을 대하는 기본 관점과 함께 종교사학자들의 의무까지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종교를 연구하는 학자뿐만 아니라 아직도 편협하고 폐쇄적인 종교관이 널리 퍼져 있는 우리 종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엘리아데는 문헌학, 역사학, 고고학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인 동료들의 연구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연구 결과를 이해하거나 반박하고, 그리하여 그러한 자료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것들을 종합해야 하는 것을 종교사학자의 의무라고 말한다.

또한 엘리아데는 종교적 주제에 대한 모든 연구는 종교적 상징주의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며, 종교적 상징의 존재론적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종교적 상징은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을 우주적인 어휘로 해석하지만, 반대로 우주적인 상황을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기도 한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상징은 인간 존재의 구조와 우주적인 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분의 관계를 드러낸다. 인간은 상징으로 인하여 ‘친근하게’ 느껴지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상징성의 우주적 가치는 인간으로 하여금 주관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객관적인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상징을 이해하는 인간은 객관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개별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이해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를 바라보는 눈, 그리고 나 자신을 보는 새로운 눈
서글프게도 서양인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발견한 우리에게, 비서양인이면서 어설프게나마 합리성의 세례를 받은 현대의 우리에게 이 책은 동양적이며 친숙하다고 믿었던 불교와 샤머니즘의 변화무쌍하고 낯선 면면을 보여준다. 또한 합리성의 고향인 그리스나 선악의 종교인 기독교의 세계도 마치 인도의 신화만큼이나 다채로운 모순과 ‘대립의 합일’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냉전이 종식되고 전쟁은 국지화되며, 종교가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21세기 초엽에 “문화들간의 만남 또는 충돌은 결국 정신성의, 그리고 종교들간의 만남”이라는 엘리아데의 명제는 마치 고대의 신탁이나 선지자들의 예언처럼 다가온다. 그의 말대로 ‘이방 세계’를 잘 분석하기 위해 종교적 행위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면, 종교학은 경제학자와 정치학자들에게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엘리아데가 추구하는 것은 이처럼 눈에 쉽게 드러나는 실용성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의식과 이방과 고대의 세계까지 탐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현대인들에게 이미 낯설 만큼 동떨어진 것이지만 인간이 자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인간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문화도 배제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에스키모의 샤머니즘도 불교나 기독교 못지않게 존중되어야 하며, 성적 소수자를 포함한 고정관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낯선 이들도 진지한 이해와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서론을 제외한 책의 본문은 따로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쉽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시론마다 잘 정리된 결론이 첨부되어 있다.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엘리아데가 보여주는 황홀한 정신의 빛을 따라 초월의 세계를 맛보거나 ‘완전히 다른 것’과의 만남을 통해 ‘막연한 종교적 경험들’에 빠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노장철학에서나 만날 법한 ‘대립의 합일’이라는 개념이 세계의 문화 풍경을 관통하며 다채로운 파노라마를 그려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1907∼1986)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종교사가인 엘리아데는 1907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이탈리아 철학 연구로 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인도 캘커타 대학에서 3년간 산스크리트와 인도 철학을 공부했으며, 1933년 부쿠레슈티 대학으로 돌아와 요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부쿠레슈티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5년 파리 소르본 대학 종교학 객원교수가 되었고, 1956년 시카고 대학 종교사 교수로 부임하여 1986년 타계할 때까지 그곳에서 30년 이상을 가르쳤다. 주요 저서로『세계종교사상사』『영원한 회귀의 신화』『샤머니즘』『우주와 역사』『이미지와 상징』『종교형태론』『성과 속』 『요가』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등이 있다.

옮긴이 최건원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불문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파리 8대학 불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SBS, MBC, EBS, Q채널 번역작가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말라르메와 노장」 등이 있다.


옮긴이 임왕준
연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했다. 파리 4대학에서 「앙드레 말로에 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8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옮긴 책으로 『로라, 내 아름다운 파출부』 『사랑』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의 삶과 죽음의 명장면』 『이별의 기술』 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에서 가장 많은 번역 책을 출간한 국가는 독일(21만8277회)이며, 일본은 5위(9만194회) , 미국 13위(3만9580회), 한국은 19위(2만1489회)인 것으로 나타났다. 언어별로는 영어가 총 86만회로 1위를 차지해 2위인 프랑스(약 16만회)보다 무려 약 5배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일보》 2006년 1월 9일자 기사에서

이 책은...
/ 서양사 교수이자 인문학술 분야 번역가인 저자가 수 년 동안 번역 작업을 해오면서 몸소 체험한 한국 번역 문화의 현주소를 냉철하게 진단한 책. 저자는 일반적으로 번역의 불완전성,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담론을 부정하고, 오히려 우리 문화의 질적․양적 확장을 꾀할 수 있는 번역 작업을 기피하고 대학원생들에게 떠넘기는 저질 교수의 행태야말로 반역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논문 쓰기만이 교수의 주요 업적으로 인정하는 대학 연구 풍토, 저자에 비해 번역가를 대우해주지 않는 출판 시장 구조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번역 문화의 부실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서유럽, 이슬람, 일본, 중국의 역사를 번역을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번역의 중요성을 역설한 점은 색다른 시도라고 평가할 만하다. 저자에 따르면 그들이 선진 문화의 꽃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번역 작업을 주도했기 때문이라는 것. 반면 우리 사회는 모국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최근에 와서야 번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여전히 번역 사업에 대한 국가적․사회적 지원은 미비하다고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번역가로서 현장에서 체험한 경험을 토대로 실제 번역 작업을 할 때에 부닥치는 현실적 문제들과 한계,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대안, 미래의 번역가들을 위한 실무적 조언 등을 모두 털어놓는다. /




번역이 반역이라고?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번역으로 인해 작품의 흠은 늘어나고 아름다움은 훼손된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모든 독서는 오독이고, 모든 번역은 오역이다”라고까지 말한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그만큼 번역의 어려움, 더 나아가 불가능성을 언급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에게 번역은 오히려 눈에 거슬린다. 저자와 일대일로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번역가가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번역은 반역이다’라고 외친다. 설마 그래서 그런 것일까? 한국 사회에 번역서가 부족하다. ‘번역은 반역’이기에 우리네 지식인들은 번역 작업에 뛰어들지 않는 것일까. 더 심각한 현상은 오역 시비에 휘말리는 번역서는 많아도 잘된 번역서를 만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근원적 차원에서 ‘번역은 오역이다’가 아니라 번역자가 제대로 번역하지 못해 ‘오역’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볼테르나 해럴드 블룸의 말처럼 번역은 반역이 될 수도 있다. 번역을 둘러싼 논의는 이렇게 번역의 근본적 문제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번역 수준, 환경, 문화가 튼실하지 않는 우리네 출판 구조 속에서 번역의 근원적 문제를 먼저 논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지금까지 번역한 책의 양이 세계 19위(21,489회)에 불과한 국내 번역 상황을 놓고 보면 우리에게 더 시급한 문제는 번역의 중요성, 필요성을 깨닫는 게 아닐까. 더군다나 엉터리로 번역된 책이 서점에 버젓이 얼굴을 내미는 상황이라면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그저 뜬구름 잡는 얘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번역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더디지만 꾸준히 그리고 정확히 번역을 하고자 노력해온 저자 박상익은 ‘번역은 반역이 아닐 뿐더러, 우리는 그들처럼 번역의 근원적 문제를 따지고 있을 팔자가 아니다’고 꼬집는다.


한국의 번역 문화, 무엇이 문제인가
대체 한국의 번역 문화와 수준이 어떻기에 저자는 번역의 원론적 이야기에 손사래를 치는 것일까. 물론 저자는 번역은 가능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그동안 여러 언론 지상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한국 번역 문화를 직접 체험한 경험을 총동원해 이 책을 사뭇 ‘조심스럽게’ 내놓은 것이다. 본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그동안 관행처럼 여겨온 우리 사회의 번역 실태를 미천한 번역자가 건드리는 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독자(네티즌)들의 뜨거운 반응 덕에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그리고 이런 문제 제기가 우리 번역 문화를 개선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날카로운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먼저 대학 교수직이라는 거미줄에 안주하며 대학원생을 시켜 수준 이하의 번역서를 자랑스럽게 출간해온 이른바 ‘매춘교수’를 겨냥한다. 교수 신분인 저자가 교수를 상대로 신랄한 비판적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교수 문화의 경직성을 생각한다면 자못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지식인의 침묵이야말로 반역이다.
황우석 사건에서도 여러 차례 문제화된 교수와 대학원생 간의 종속적 관계가 번역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교수가 대학원생들에게 번역거리를 던져주면 학생들은 그걸 거절하지 못하고 밤을 새워 번역 작업에 매달린다. 교수는 그렇게 어설프게 번역된 결과물을 가져다가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떡하니 번역서를 출판한다. 그러니 아무리 출판사에서 원고를 가다듬는다 해도 원서보다 더 어려운 번역서가 탄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행이 그동안 번역서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범이 되어 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물론 여기에는 더 구조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번역을 연구 업적으로 전혀 인정하지 않는 대학의 연구 풍토 탓에 교수들은 번역을 그저 소일거리로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번역을 중요한 연구 과제의 하나로 삼고, 각종 고전을 충실히 번역하는 것도 논문의 일종으로 여기는 일본․미국․독일 대학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른바 잘 팔리는 책만 골라 단기간에 번역․출판하는 능력은 비범해도 십 년, 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꾸준히 읽힐 고전을 번역하는 데는 인색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이미 1백 년 전에 번역된 버크와 몽테스키외의 저작 등은 아직도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고 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말 할 것도 없다.
인기 있는 외국 책이라도 제대로 번역해서 출간하면 그나마 낫다고 말한다. 상당한 자본력과 인력을 갖추고 있는 국내 굴지의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백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번역서에서도 숱한 오역, 비문 등이 지적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저자는 그 사례를 조목조목 들어가며 지적한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왜 우리 사회는 지금도 번역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고, 번역 작업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는 것일까. 그래서 저자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의 주요 문명권에서 일찍부터 행해져온 번역의 역사를 살펴보고 우리의 그것과 어떻게 달랐는지 따져본다.


번역은 왜 중요한가
십자군 원정을 통해 ‘야만족’ 이슬람을 정복한 서유럽은 오히려 자신들이 ‘야만족’이었음을 이슬람 문명의 심장부에서 절감해야 했다. 자신들이 계승하지 못한 그리스․로마 철학을 이슬람 사회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역의 힘이었다. 아랍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모든 저술을 아랍어로 완벽히 번역했고, 그것을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기까지 했다. 자극을 받은 서유럽도 번역에 빠져 들었다. 아랍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이른바 ‘12세기의 르네상스’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 기간이 ‘번역의 시대Age of Translation’라고 불리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결국 번역이 있었기에 그리스․로마 문명이 이슬람 문명으로 전해졌고, 그것이 다시 서유럽 문명으로 이식될 수 있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번역국이라는 정부 기구를 설치해 외국 서적을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 대대적으로 번역했다. 수많은 번역서의 홍수 속에서 번역서를 안내하는 책이 출간되어야만 할 정도였다. 오늘의 일본은 메이지 시대 번역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학술 용어들(사회, 자유, 평등, 권리, 인권, 정의, 시간, 공간……)은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 문화를 수용․번역하면서 탄생시킨 단어들이다. 부인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일본의 이러한 번역 노력에 많은 빚을 진 셈이다.
우리의 번역사는 어떠한가.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칭송 받는 한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글로 된 텍스트, 콘텐츠 축적을 외면한 게 사실이다. 조선 시대 지식인들이 한글을 천시하고 한자 공부에만 매달렸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모국어는 더 심한 천대를 받아야 했다. ‘국어’는 일본어가 되었다. 일본어에 능통한 당시 지식인은 한글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기나 했을까. 해방 후 한글세대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번역의 필요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부터라도 번역이 제대로 되었을까. 일본책을 중역한 책이 쏟아지면서 왜색이 그대로 드러난 출판물이 서점가를 점령한 사태는 먼 나라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화의 바람은 번역 문화에도 들이쳤다. 영어공용화론이 고개를 들었고, 심지어 한국어는 국제 경쟁력이 없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다고 단언하는 주장이 솔솔 풍기기까지 했다. 한글보다 영어를 먼저 깨치는 세대가 도래하면 번역은 자연스레 도태할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모국어의 이런 처지를 두고 ‘슬픈 모국어’라 했다.
그러나 모국어는 영혼과 맞닿아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이슬람이 아랍어를 버리고 로마․그리스어를 받아들였다면, 서유럽이 라틴어를 버리고 아랍어를 수용했다면, 그들의 문명이 그토록 발전할 수 있었을까. 철저히 서구를 배우고자 했던 일본이 일본어를 버리기는커녕 모든 문화를 일본화하려 했다는 점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요컨대 번역은 단순히 한 문자가 다른 문자로 일대일 대치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민족의 사상이, 한 나라의 문화가, 한 시대의 철학이 다른 민족, 다른 나라, 다른 시대로 전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 고로 문화의 확장은 바로 번역에서부터 시작한다.


지식인의 반역과 대중의 반란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번역은 반역’이라고 주장하는 지식인들이야말로 반역이다. 논문 쓰기에만 매진하면서 번역은 학자가 할 일이 아니라며 고상함을 떠는, 그래서 대학원생들에게 번역을 떠넘기는 일부 교수들이야말로 반역이다. 잘못된 번역 문화가 반역인 것인지 번역 그 자체가 반역은 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번역 문화가 잘못되어 있다고, 그래서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쪽은 오히려 독자다. 권위와 자존심으로 무장한 대학 교수를 포함한 지식인층을 질타하는 것은 종속적인 학제관계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대학 밖으로 뛰쳐나온 이른바 독립연구학자들이다. 비도덕적 출판사를 감시하고, 번역서를 꼼꼼히 살펴보면서 잘못된 부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같은 문제의식을 지닌 개개인이 모여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집단은 다름 아닌 네티즌이다. 독자와 네티즌의 눈이 높아가면서, 학연에 연연하지 않는 실력파 연구자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의 고질적인 번역 문화가 개선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 한 가지
번역가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출판사가 번역서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해도 독서 문화의 근본적인 개선이 없다면, 그것을 위한 사회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는다면, 번역을 통한 문화 확장은 외연에 그칠 수밖에 없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 분위기, 도서관다운 도서관이 없는 사회 구조 속에서는 번역서뿐만 아니라 그 어떤 좋은 책도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다. 출판 시장이 건강하지 않으면 출판사가 허덕이고, 책은 당연히 병에 걸린 채 나올 수밖에 없다. 번역가와 편집자에 대한 대우도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돈 되는 책은 쏟아져 나오지만, 정신과 문화를 살찌우는 책은 빛을 보기 어렵다. 메이지 시대 일본, 중세 이슬람, 서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고전 번역 사업에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밖에 되지 않는 예산을 책정하는 우리 정부의 쫀쫀함으로는 그들이 누린 찬란한 문명을 쉽게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 http://www.bluehistory.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괴짜 경제학>처럼 생활 속의 문제를 갖고 경제학에 다가설 수 있게 해주는 책.
let's look을 통해서 스타벅스 커피는 왜 비싼 가격에도 잘 팔리는 것인가에 대해서
잠깐 엿보니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통해서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이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는지 보여주는 것도
아무래도 이해하는 데 좀 더 쉽게 다가오기도 하고.
스타벅스, 슈퍼마켓, 출퇴근과 같은 생활과 관련된 요소들을 통해서 본 경제학.
재미있을 것 같다.


솔직히 가격은 비싸다.
31500원이란 가격은 학생에게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이전에 두 권으로 출간된 것을 한 권으로 묶어서 낸 개정판인데.
700페이지가 넘는 두께이긴 하지만 가격은 확실히 부담.
삼국유사의 무대를 HD 동영상으로 재현한 DVD를 준다는데.
그거때문에 가격이 꽤 쎄진 건가.
표지디자인도 참 맘에 드는데. 고민 좀 해봐야겠다.



며칠 전 읽은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라는 책에서
유독 이덕무의 <사소절>에서 인용한 부분이 많아서 관심이 갔는데.
마침 그와 관련된 책이 새로 나왔다.
사소절. 즉 선비의 작은 예절.
어떤 것들이 있는지 현대 생활에 비추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이 두 권이나 새로 나왔다.
정확한 책 정보가 없어서 열린책들 홈페이지에 가봤는데.
거기에도 아직 업데이트가 안 되어 있다.
하기사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면 믿고 살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좀 있다가 정확한 정보가 올라오면 사야겠다.
그나저나, 사랑을 생각하다의 노란표지 참 맘에 든다.



예전에 열림원에서 나왔던 <렉싱턴의 유령>이
문학사상사에서 새로 나왔다.
기왕에 새로 출간할꺼였으면,
얼마 전에 토니 타키타니가 개봉했을 때 나오면 좋지 않았겠나라는 생각이. 
표지도 예전에 하루키 사진으로 된 표지가 더 마음에 들고..
괜히 불만만 많다.
난 그냥 헌책방 뒤져서라도 예전판으로 살꺼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owup 2006-02-08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는 사랑의 축구와 발견, 이라고 읽으면서, 책 제목 진짜 특이하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민망.

Kitty 2006-02-08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짜경제학은 지금 읽고있는데 꽤 재미있네요
저 책도 잼있으려나..

짱구아빠 2006-02-08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학 콘서트는 저도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박노자 선생의 최근 신작<당신들의 대한민국2>를 읽고 있습니다.

이매지 2006-02-08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 아하하.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또 그렇게 보이는 ^-^;
키티님 / 괴짜경제학. 좀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부분도 있었지만 쉽고 재미있어서 좋았는데. 저 책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짱구아빠님 / 당신들의 대한민국 2 저도 읽어야 할텐데. 개강하거들랑 ㅠ_ㅠ

stella.K 2006-02-0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쥐스킨트가 시나리오 작법에 관한 책도 썼구만요. 괜찮을 것같은데요?^^

이매지 2006-02-0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이 시나리오 작법에 관한 책이었군요. 앗. 그냥 시나리오 같기도. 유일하게 쥐스킨트 책 중에서 로시니 혹은.. 만 안 읽어봐서 그거부터 읽어야겠어요.

사자는살아있다 2006-02-09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님의 책고르기는 명쾌해요~

사자는살아있다 2006-02-09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님의 책고르기는 명쾌해요~

이매지 2006-02-0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자는 살아있다 / 앗. 처음뵙는군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__)

가넷 2006-02-1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년만인가요... 쥐스킨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콘트라베이스를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그나저나 풍문에 폐암으로 죽은 줄 알아서 슬퍼 했는데 아닌 모양이군요...-.-
역시 지식in은 믿을께 못되나 봐요..

이매지 2006-02-10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쥐스킨트 요새도 은둔자의 생활을 하고 있나보군요 ㅋㅋ 폐암으로 죽었다는 소문도 돌고 ㅋ

2006-02-20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매지 2006-02-20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엔 무슨 책을 주문하시나요~?
 



여자도 몰랐던 여자의 마음, 남자도 몰랐던 남자의 마음

《비밀규칙》은 아홉 살 소년 루이 드랙과 루이의 담당의 파스칼의 독백으로 이루어졌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세계에서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하지만, 결국 둘은 여자 안에 있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왜곡된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남자 안에 있는 ‘구세주 콤플렉스’의 비극적인 결말을 지켜보게 된다.

신데렐라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잘 알려진 대로, 재투성이 낡은 가죽신을 버리고 멋진 유리구두로 갈아 신고 싶은 여자의 욕망을 말한다. 비록 그것이 깨지기 쉬운 유리로 만들어졌다 해도 한번쯤은 신어보고 싶은, 억지로 발이라도 넣어보고 싶은 여자의 욕망을 대변한다.

구세주 콤플렉스
‘구세주 콤플렉스’는 강한 여자보다 약한 여자에게 더 끌리는 남자의 심리를 말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피에르는 구세주 콤플렉스를 이렇게 비유한다. 옛날 옛적에 남자박쥐 한 마리와 여자박쥐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여자박쥐 중 한 마리는 언제나 웃는 미소박쥐였고, 다른 한 마리는 매일 울기만 하는 울보박쥐였다. 남자는 두 여자박쥐를 다 사랑했지만 미소박쥐는 자기가 없어도 웃으며 잘 살 것 같았고, 울보박쥐는 자기가 없으면 너무 불행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남자박쥐는 미소박쥐를 버리고 울보박쥐를 눈물바다에서 구해주기로 했다.

미소박쥐를 버리고 울보박쥐를 선택한 남자박쥐는 행복했을까
이것이 바로 남자 안에 있는 구세주 콤플렉스다. 그런데 과연 남자박쥐와 울보박쥐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을까? 《비밀규칙》은 이 수수께끼의 한 가지 답이 될 수 있는 전형을 보여주며, 여자도 몰랐던 여자의 마음, 남자도 몰랐던 남자의 마음을 극한으로 끌고 가 독자의 가슴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죽음의 문턱에서 루이는 무엇을 보았는가

태어난 후로 사고가 끊이지 않아 언제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오는 루이, 루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자기가 겪은 일을 말하지 않고, 끊임없이 ‘말하지 마, 말하지 마’ 하고 속으로 되뇐다. 그런 루이를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루이의 어머니, 그리고 아들 루이와 아내를 지켜주려 애쓰지만 늘 어긋나고 겉돌기만 하는 아버지, 이들은 껄끄러운 가족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피크닉을 간다. 그런데 피크닉은 끔찍한 사고로 이어진다.
루이는 벼랑에서 떨어져 사망판정을 받고, 아버지는 사라지고, 어머니는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러다 루이는 극적으로 살아나 식물인간 상태로 목숨을 이어간다. 어머니는 루이의 살인자로 아버지를 지목하고, 아버지는 광범위한 수사망을 피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알 길은 오로지 루이의 진술뿐. 하지만 루이는 자기 세계에 갇혀 있다. 루이는 무엇을 보았기에 스스로 꿈속에 갇히길 선택했는가?
이 가족의 수수께끼는 곧 우리 가족의 수수께끼일 수 있고, 이 소설 속의 남녀는 곧 우리의 자화상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란게 서로 마음이 통해서 쿵짝이 맞는다면 더할나위없이 좋겠지만, 대개는 어느 한 쪽의 짝사랑으로 시작되어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 사랑하게 되지만 어느 한 쪽의 이별 통보로 이어지는 수순을 밟게 된다. 여기 맨날 출발선에만 서서 짝사랑만 몇 년째 하고 있는 소심한 남자 광식과 마음은 왼쪽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육체적 사랑에 급급한 광태. 이 형제들이 있다.

  이야기는 두 형제의 각기 다른 연애 방식, 그리고 그들의 상대역인 두 여자의 연애에 대한 담론이 등장하며 그럭저럭 괜찮은 영화가 됐다. 이 형제 비록 남의 일을 망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형제지만(결혼식 축가로 그런 노래를 부르다니. 맙소사!) 나름대로 그들의 솔직함은 매력으로 느껴졌다. 캐스팅도 적절하게 잘 됐고(특히 그 광식이는 김주혁이 아니면 누가 했을까 싶기도 하더라, 광태는 류승범이 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하지만 봉태규도 만족.), 구성도 참 좋았는데. 몇몇 말도 안 되는 설정이 좀 깨는 느낌을 줬다랄까. 예를 들어, 커피숍에서 도장을 찍는 부분에서는 좀 기분이 나빴었고, 광식이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마지막 부분은 좀 황당했었다. 그리고 그동안 가볍게 여자를 만나왔던 광태가 변했는지에 대한 개연성은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괜찮은 대사. 괜찮은 구성. 적절한 캐스팅이 잘 어울려 볼만한 연애 이야기가 한 편 만들어진 것 같다. 다만, 어떤 무거운 주제의식을 안겨준다거나, 연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안겨주는 것은 아니라 그저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본디 어렵고 복잡하고 다양하기에 뭐라 딱히 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광식과 광태.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남자들 아니겠는가. 그냥 그들의 연애담을 즐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