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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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이렇게 넓고, 어둠은 이렇게 깊고, 그 한없는 재미와 슬픔을, 나는 요즘 들어서야 비로소 내 이 손으로 이 눈으로 만지고 보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한쪽눈으로만 세상을 보아왔어, 라고 나는 생각한다.-16쪽

사랑을 하게 되면, 항상 전력으로 질주하는 나지만, 구름진 하늘 틈 사이로 보이는 별들처럼, 지금 같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조금씩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42쪽

뭐 다 그렇지. 하지만 인생이란 정말 한번은 절망해봐야 알아. 그래서 정말 버릴 수 없는 게 뭔지를 알지못하면, 재미라는 걸 모르고 어른이 돼버려. 난 그나마 다행이었지.-58쪽

내가 그녀보다 낫다느니 못하다느니, 누구에게 말할 수 있으리. 누구의 위치가 가장 좋은지 따위, 모두 합해보지 않는 한 아무도 모른다. 더구나 그 기준은 이 세상에 없고, 이렇게 추운 밤 속에서는 더욱이 모른다. 전혀 가늠할 수 없다.-106쪽

세상은 딱히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쁜 일이 생길 확률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나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다른 일에는 대범하게, 되는 대로 명랑하게 지내는 편이 좋다.-110쪽

길은 항상 정해져 있다, 그러나 결코 운명론적인 의미는 아니다. 나날의 호흡이, 눈길이,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자연히 정하는 것이다-131쪽

나는 안다. 즐거웠던 시간의 빛나는 결정이, 기억 속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지금 우리를 떠밀었다. 싱그럽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향기로웠던 그날의 공기가 내 마음에 되살아나 숨쉰다. -134쪽

그 때 운명은 한 단도 헛디딜 수 없는 사다리였다. 단 한 장면을 빼놓아도 끝까지 올라갈 수 없다. 그리고 오히려 헛디디는 편이 쉬웠다. 그럼에도 나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아마 죽어가는 마음 속의 빛이었으리라. 그런 건 없는 편이 차라리 편히 잠들 수 있다고 여겼던 어둠 속의 빛이었다. -165쪽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오랜 시간, 강바닥을 헤매는 고통보다는, 손에 쥔 한줌 사금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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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만 가지 죽는 방법 밀리언셀러 클럽 13
로렌스 블록 지음, 김미옥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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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공연히 딜레마에 빠질 때가 많아요. 세상에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A가 마땅찮으면 B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옳지 않아요. 아직 남은 알파벳이 얼마든지 있잖아요?-17쪽

우리가 여기 사는 건 문화든 일자리든 간에 이 도시가 주는 뭔가가 필요해서죠. 그리고 이 도시가 우리 친구나 이웃들을 죽일 때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보죠. 그런 기사를 읽으면 하루나 이틀쯤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곧 잊어버리는 거예요.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일에 대해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러지 않으려면 이 도시를 떠나야 하는데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250쪽

죽음에 이르는 800만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에는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는 방법도 있다. 지하철 자살이 썩 좋은 방법이 아님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지하철에 몸을 던진다. 뉴욕에는 끝없이 긴 다리들과 고층 빌딩의 창들이 있다. 또 면도날과 빨랫줄과 약을 파는 가게들이 하루 24시간 문을 연다. 내 방 서랍에는 32구경 권총이 있다. 호텔 방 창문에서 뛰어내리기만 해도 간단히 죽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종류의 일을 시도해 본 적은 없다.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으로 보인 적도 없다. 겁이 너무 많거나 불굴의 의지를 가졌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나의 지독한 절망이 생각만큼 절실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여하튼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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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만 가지 죽는 방법 밀리언셀러 클럽 13
로렌스 블록 지음, 김미옥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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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본다면 마치 무슨 자살방법 소개서같은 느낌을 풍기기도 하는 이 책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상하게 하드보일드 작품은 많이 접해보지도 못했었고, 그나마 접해본 작품이라면 챈들러의 <빅슬립>정도. 헌데, 이 책은 내가 이전에 읽었던 <빅슬립>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랄까.

 주인공인 매트 스커더. 그는 무면허 탐정인데다가 알코올 중독자이다. (그는 뭐 스스로 알콜 중독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그는 창녀 킴으로부터 매춘하는 생활로부터 벗어나고 싶으니 자기 대신 포주인 챈스를 만나서 얘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당췌 행방을 알 수 없는 챈스를 겨우겨우 찾아서 킴의 얘기를 전해주고, 챈스는 의외로 선선히 킴을 놓아줌으로써 매트의 역할은 끝이 나나 싶었는데, 그 다음 날 킴은 66번이나 정글도에 찔려 죽임을 당한다. 이에 챈스는 그녀를 죽인 범인을 알아봐달라고 매트에게 부탁을 하고, 그는 조사를 시작하는데...

 이 책의 두께는 제법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갈 수 있는 책이다. 그저 두께에 압도당할 뿐, 그 압박만 이겨낸다면 좋은 책 한 권 만났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란 말이다. 그리고 여타의 추리소설처럼 대체 범인이 누구일까하고 머리를 굴리기보단, 한발짝 물러서서 매트라는 인물을 지켜보는 일도 흥미롭다. 책을 읽다보면 이게 추리소설인지, 매트의 금주 일기쯤 되는지, 영 헷갈린다. 어쨋든 매트는 범인을 알아내지만, 그보다는 주인공인 매트의 인물상이 더 기억에 남는다. 인간적인 냄새가 폴폴 풍기는 매트의 모습은 탐정이라기보단 매일 스치는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 그런 매트의 느낌이 참 좋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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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6-0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매트 아자~

이매지 2005-06-02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트가 나오는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ㅋㅋ
 
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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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책이라면 딱딱하고, 재미없고, 뭔지 알 수 없는 느낌만 풍길 뿐이라는 인식을 없지 않아 가지고 있다. 나도 그런 편견때문에 이 책을 빌려놓고 선뜻 잡지를 못했는데, 이는 이 책을 지은 작가인 나이폴이 2001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해서 결국 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빠르게 나이폴이 그려주는 미겔 스트리트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겔 스트리트는 외부의 사람이 본다면 '빈민굴'이라고 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곳이다. 이 책은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주인공으로 삼아 연작 소설의 형식으로 총 17개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의 배경은 1930년대, 트리니다드 섬의 수도인 포트 오브 스페인.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우리의 과거가 떠오르기도 했다. 미국군에게 츄잉껌을 얻으려고 하는 모습에서는 특히나 더.

 여튼, 이러한 암담한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미겔 스트리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유쾌하다. 어찌보면 작가는 그들을 희화화함으로써 그들의 절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보여주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어쨋든 표면적으로 그들은 볼 때 그들은 유쾌하고, 그와 동시에 권태, 무위, 그리고 도덕적인 타락, 막무가내적 고집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결국 미겔 스트리트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준 화자가 단지 그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장학금을 받아 떠나는 장면은 왠지 모를 씁쓸함을 안겨줬다. 그 곳에 살고 있는 것만으로 점차 난폭해져갔던 그. 그런 그가 그 곳을 떠난다고 해서 그 곳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술술 읽혀가는 책이지만, 왠지 모를 슬픔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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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1-05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한테 책 보내려고 땡스투합니다^^

이매지 2006-11-0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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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안에 민음사에서 나오는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하고말겠다는 나름의 계획아래, 전집 순서대로 볼까하다가 평점이 좋은 작품부터 접하는 게 좋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단순히 평점만 보고 접한 책이다. 작가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고, 이 책이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채. 마치 책 속의 주인공이 모래 구덩이 속에 갇혀버리듯이 그렇게 나는 이 책 속에 갇혀버렸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곤충채집을 위해 휴가를 얻어 모래로 뒤덮인 곳으로 가게 되고, 그 곳에서 마치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이유를 알지 못하고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면서 갇혀버리듯이, 이유도 모른 채, 잡혀버리고 만다. 한 시라도 모래를 파내지 않으면 생활할 수 없는 모래로 뒤덮인 마을. 그는 그가 묵고 있는 모래때문에 나무가 썩어가는 집을, 그리고 그 집의 주인인 묘한 느낌의 여자를, 모래의 껄끄러움만 가득한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모래 산을 올라갈 때, 자꾸 미끌어지는 것처럼, 그는 점차 점차, 그는 도망가지 못하고, 결국은 마음 한 구석에 언젠가 탈출하겠다는 <희망>의 조각만을 남겨놓은 채, 그렇게 적응해간다.

 마치 이 책 속에서 주인공이 당하게 되는 일은 시지푸스가 끊임없이 바위를 움직여야 하는 일과도 같다. 그는 끊임없이 모래를 파내야 하는 것이다. 파내고, 또 파내고, 하지만 모래는 줄어들지 않고, 늘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모래 특유의 껄끄러운 느낌이 머리 속에 남아서 어느새 책을 놓는 그 순간에 목이 말라왔다. 그래서 마신 물에서 나는 개운함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내 목에 모래가 걸린 것처럼 그렇게 그렇게 계속 껄끄러움이 남아 있었다.

 이 책은 결국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매혹적으로.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이 책에 대해 알지 못하고 접해도 좋다. 읽다보면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테니까. 벗어날 수 없는 모래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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