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 줄 꽂아놓고 - 옛사람의 사귐
이승수 지음 / 돌베개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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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자동차를 타고 고향에 가는 길에 경운기를 몰고 가는 친구를 만나면 차에서 내려 흙 묻은 손을 만지며 인사하겠다는 이 설정은 소박하고 간명해서 좋다. 우정이란 이런 게 아닐까? 하지만 이런 우정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세상맛을 조금이라도 본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우정이란 저 강 건너에 있는 것, 조금씩 어긋나는 것, 아름답지만 깨지기 쉬워 조심스러운 것, 그리고 때로는 상처투성이의 그 무엇이다.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지면서 사람은 차츰 혼자 남게 된다. 이렇게 철저하게 혼자, 즉 고독한 개인이 되었을 때의 벗이 진짜 벗이고, 그들의 사귐이 바로 우정이다. 이때 벗은 나를 발견하는 거울이고, 내 고독을 감싸주는 울타리며, 내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는 보루이다. -10~11쪽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한 사람들은 불안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종교 사원에 모이고, 동창회에 모이고, 친목회에 모이고, 향우회에 모인다. 이 사회에서는 어딘가에 속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은 편안한가? 그들도 불안하다. 그래서 늘 일체성과 연대감을 확인하고, 규칙과 의리에 집착한다. 자신의 판단보다는 관습을 더 믿게 되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 소문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필요하고 원해서 결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분위기가 그러하니 뒤처지거나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모일 뿐이다. 그러니 이 사회엔 손님밖에 없고, 피해자 아닌 사람이 없다. 패거리 문화의 병폐이다. -21쪽

우정은 이처럼 다른 존재들을 집단 속에 가두거나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면서 서로를 신뢰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우정의 첫째 조건은 일치나 연대가 아니라 바로 신뢰이고, 이 신뢰는 성숙한 인격에서 나온다. -24쪽

사람의 마음에는 묘한 관성 같은 게 있어서 번화함을 쫓다 보면 더욱더 번화한 곳을 찾고, 적막함에 길들여지면 더 깊고 그윽한 곳을 그리워하게 된다.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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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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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다수결이다. 에어컨을 만든 것도, 말하자면 자동차를 만든 것도, 석유를 캐는 것도, 산업혁명과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도, 인류가 달에 간 것도, 걸어가는 로봇을 만든 것도, 우주왕복선이 도킹에 성공한 것도, 휘 휘 지나가는, 저 규격 저 위치에 저 품종의 가로수를 일렬로 심은 것도, 모두 다수가 원하고 정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인기의 정상에 서는 것도, 누군가가 투신자살을 하는 것도, 누군가가 산출되고 기여를 하는 것도, 실은 다수결이다. 알고 보면 그렇다. -28쪽

서늘한 창에 이마를 맞대고서 나는 빨리 고등학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빨리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빨리 핼리가 와주기를 바랐다. 다행할수록, 삶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그래서 짧게, 나는 가혹해지고 싶었다. -95쪽

얘야,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란다. 이 세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을 지켜봤단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은 나지 않았단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는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 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117~8쪽

인간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하려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만 볼트의 파괴자가 남아 있을까? 학살을 자행한 것은 수천 볼트의 괴물들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전쟁이 끝난 후에 남는 건 모두 미미한 인간들이야. 독재자도 전범도, 모두가 실은 9볼트 정도의 인간들이란 거지. 요는 인간에게 그 배치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이기가 있다는거야. 인간은 그래서 위험해. 고작 마흔한명이 직렬해도 우리 정도는 감전사할 수 있는거니까. 그래서 생존해야 해. 우리가 죽는다 해서 우릴 죽인 수천 볼트의 괴물은 발견되지 않아. 직렬의 전류를 피해가며, 모두가 미미하고 모두가 위험한 이 세계에서- 그래서 생존해야 해. 자신의 9볼트가 직렬로 이용되지 않게 경계하며, 건강하게, 탁구를 치면서 말이야. -18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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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우울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이나미.이영준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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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조문弔文을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다. 과거를 탐색하는 계절, 시들어가는 슬픔의 시간이다. -20쪽

세상일이란 게 다 값을 치르기 마련입니다... 원래 생선은 가시가 많을수록 더 맛있는 법이죠. 예전에 고래 고기를 한번 먹어본 적이 있는데, 물론 물고기는 물고기죠! 가시가 없었지만 맛은 전혀 없더군요...-44쪽

과거는 날짜에 기초에 믿게 마련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바로 이 날짜로 이뤄져 있으며 날짜를 통해 삶에 리듬이 부여되고 한 계단 올라가는 느낌을 받고 마치 잇달아 쌓인 날짜의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게 되며,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것 같다. 명백하게 이해가 가능한 과거는, 사건이라는 사각의 공간과 선이라는 길로 나뉘어져 있다.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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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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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45~6쪽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돋보기가 틀니 다음으로 아끼는 물건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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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심 - 하 - 파리의 조선 궁녀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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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만 년 흘러도 결코 잊지 못할 하루가 있다지만, 따지고 보면 무척 기쁜 하루도 있고 매우 슬픈 하루도 있으며 쓰라리게 아픈 하루도 있고 너무 달콤해서 녹아 버릴 듯 행복한 하루도 있지요. 사람들은 이 하루'들' 가운데서 자신들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이야말로 내 인생의 단 하루라고 강조하곤 합니다.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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