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의 죽음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1
막스 갈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예담 / 2007년 5월
품절


모든 것을 버려야 하네. 가진 재산이라고는 오직 자신의 생각뿐이며 가진 권력이라곤 오직 자기 신체에 행사할 수 있는 힘뿐,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자유롭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것은 신들의 노예가 된 인간들처럼 자신의 육체를 훼손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네. 정신이 스스로를 새처럼 자유롭다고 느끼고 높이높이 날아올라 신의 생각에 가까워질 수 있을 만큼 한없이 가벼워지고 그 육체를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지. -56~7쪽

만일 자네가 긴 여행을 하지 않는다면 말일세... 정의의 지배자께서 유일신에 대해 말씀하셨던 유대의 동굴로 가는 길을 자네에게 알려주겠네. 함께 길을 떠나세. 어쩌면 영영 도착하지 못할지도 몰라. 로마인과 망상에 빠진 인간들이 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까. 하지만 자네는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자네 자신이 더 가벼워지고 더 정결해지는 것을 느끼게 될 걸세. 하나뿐인 참된 자유에 점점 가까워지는 거지. 자네는 더 이상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게 될 걸세. 그렇지만 자신이 더 강해졌음을 느끼게 될 거야. 왜냐하면 자네는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자네의 무궁무진한 재산이 될 테니까 말일세. -57쪽

노예도, 주인도 존재하지 않네. 한 사람은 복종하고 한 사람은 명령하며, 한 사람은 고통받고 한 사람은 즐겁게 산다고 믿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죽지. 신이 심판을 내리실 때는 주인과 노예가 동등해지는 거야. 그 때가 되면 주인이었던 사람이라고 해서 노예보다 나은 취급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닐세. 인간은 평등하니까 말일세. 주인도 노예가 될 수 있고, 노예도 주인이 될 수 있다네. 사슬이나 달군 쇠로 찍은 낙인이 노예를 만드는 것이 아닐세. 노예를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이라네!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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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죽음의 가면 기담문학 고딕총서 2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정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품절


고통의 종류는 다양하다. 지상의 고통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고통은 광활한 지평선에 무지개처럼 걸려 있다. 고통의 빛깔은 무지갯빛만큼 다채롭고, 무지개가 그렇듯 선명하게 구분되는 동시에 함께 어우러져 있다. 고통을 광활한 지평선에 걸려 있는 무지개에 비유하다니! 내가 아름다움에서 일종의 추함을 보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평화의 계약에서 슬픔의 비유를 보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윤리학에서 악이 선의 결과이듯, 슬픔은 기쁨에서 태어난다. 지나간 행복의 기억은 오늘의 고통이며, '현실'속의 번민은 '상상'속의 환희에서 기인한다. -27~8쪽

어른이 되면서 동물들은 내게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 되었다. 충실하고 영리한 개에게 애정을 느껴본 사람은 여기서 얻는 희열이 어떤 것이고 또 얼마나 강한 것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한갓 인간이라는 존재의 우정과 의리가 얼마나 하찮고 얄팍한 것인가를 시험해볼 기회가 있었던 사람은, 사심 없고 희생적인 짐승의 사랑 속에서 마음에 직접 와닿는 뭉클한 뭔가를 느끼게 마련이다. -48~9쪽

가장 깊은 잠 속에서도, 아니 광기 속에서도, 혹은 정신을 잃고 기절했을 때라 해도, 죽음 속에서, 무덤 속에서도 모든 것을 전부 다 잃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에게 불멸이란 없다. 아주 깊이 잠들었다 깨어날 때, 우리는 거미줄을 걷어내듯 꿈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꿈이라는 거미줄은 너무나도 가늘기에) 우리는 꿈을 꾼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리는 데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는 정신 혹은 마음이 돌아오는 단계이고, 둘째는 육체가 돌아오는 단계다. 둘째 단계에 도달한 순간에 첫 단계의 인상을 기억할 수 있다면, 이런 인상은 심연 저편의 기억에 대해 많은 말을 해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69~70쪽

아, 말이란 얼마나 공허한지! 우리는 한갓 단어의 온갖 소리 뒤에 영적인 것에 대한 엄청난 무지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191쪽

이런 느낌이 드는 글들 중에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조지프 그랜빌의 책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그것이 그저 기묘한 글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글쎄, 이유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의지는 존재하며, 사라지지 않도다. 신의 본성은 열심이며, 따라서 신이란 만물에 스며 있는 위대한 의지일 따름이로다. 인간이 천사에게 굴복하는 것과 죽음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은 인간의 나약한 의지의 박약함 때문일 뿐 다른 것이 아니로다.-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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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문학, 정신분석 프로이트 전집 14
프로이트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구판절판


표면적인 꿈속에 나타난 눈에 보이는 전체에 연연해 하지 말고 내용의 모든 부분을 분리해서 고려하고 각 부분이 어떻게 해서 꿈꾸는 자의 인상들과 기억들과 자유 연상들에서 연유하는지를 찾는 것, 이것이 꿈의 해석이 일러주는 해석의 기술이다. -92쪽

만일 환자가 자신의 환상을 확고부동하게 믿는다면 그것은 그의 판단력이 붕괴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 믿음이 또 망상 속에 있는 비논리적인 것들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모든 망상은 어느 것이든지 한 줌의 진실을 갖고 있다. 망상 속에는 정말로 무엇인가 믿을 만한 것이 있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환자의 확신을 나름대로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근원인 것이다. 그러나 이 한 줌의 진실은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었다. 이 진실이 마침내 왜곡된 형태로 의식에 다다를 때 그에 연결되어 있던 확신의 감정은 보상 작용을 통해 엄청난 강도를 갖게 된다. 이제 확신의 감정은 억압된 진실을 대체하고 있는 왜곡된 대리물에 집착하게 되고 모든 비판에 맞서 이 왜곡된 대리물을 옹호하게 된다. 확신은 말하자면 무의식의 진실에서 그 진실과 연결되어 있는 의식의 오류 쪽으로 이동한 것이고 바로 이 이동으로 인해 그곳에서 고정된 채 머무르고 만다-100~1쪽

표현의 이중성은 증후의 이중성이다. 말 그 자체도 증후인 것이다. 따라서 말은 증후들처럼 의식과 무의식의 타협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이점은 제외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말의 이중적 기원을 행동의 이중적 기원보다 훨씬 쉽게 판별해 낼수 있는데 하나의 동일한 언어 배열 속에서 말이 갖고 있는 두 개의 의미 하나하나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유연한 언어적 장치의 속성으로 인해 이런 경우는 자주 있다-우리는 흔히 <모호함> 속에 있게 된다.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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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쉬 스토리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구판절판


"탐정이란 건 말이야. 먼저 선언부터 해놓고 이론을 만들어가는 법이야. 요리사도 그렇잖아?"
"요리사?"
"메뉴부터 정해놓은 다음 재료를 사 모으는 것과 뭐가 달라."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26쪽

뜻을 찾아 헤매는 것도 인간뿐일지도 모르지-27쪽

"풍습이란 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무엇을 숨기려고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이는 거지."
"무엇이라는 건 뭐죠?"
"공포나 죄책감 같은 거 말이야, 그리고 욕망 같은 거. 그런거야. 그런 것들을 어영부영 얼버무리려고 풍습이라는든가 설화라든가, 그런 게 생기는 거 아닐까."-74쪽

구로사와는 얼토당토않은 추측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곤란한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적당히 다른 것으로 위장하는 수법은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것이 성에 대한 것이거나 죽음에 대한 것, 공공연히 밝히기 힘든 것일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은폐할 가능성이 높다. -75쪽

공동체를 이끌어가려면 권위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통치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고 두려움의 대상도 되면서, 사람들을 견인해나가야만 해. 그 대신 개개인의 공포나 불안, 불만을 받아줄 사람도 필요하지. 내 아버지는 엄격했어. 할아버지는 사람이 좋고 너그러웠지. 두 분 다 마을 사람들의 불만을 샀어. 엄격하면 굴욕이, 만만하면 경멸이 생겨나지. 제대로 거느리려면 그 양쪽의 균형이 필요해. -128쪽

내 고독이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맹렬함 앞에 고래마저도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139쪽

애초에 말이야, 정의라는 건 주관적인 거잖아. 사람들이 그런 걸 내세우면 무서워. -141쪽

내 용기가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젊음으로 햇빛을 반사하는 수면을 한층 빛나게 할 것이다. -152쪽

큰 문제가 있다. 사악한 것은 번창하고 올바른 것은 짓밟힌다는 흔해빠진 사실이다. 악은 응징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언젠가는 파멸한다는 일반적인 경우의 일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선한 자가 승리를 얻었다는 예는 최근 듣기 힘들지 않은가. -157쪽

정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악에 필적하지 못했던거예요. 이 사실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고 분통 터져요. -158쪽

"여느 사람들 같았으면 정의의 사도라고 하면 변호사나 경찰, 소방관 같은 직업을 떠올리겠지만 아버지는 달랐어요." 그는 지친 목소리로 자조하듯 말한다. "아버지 말씀이, 중요한 것은 직업이나 직함이 아니라 준비라는 거예요."
"준비?"
"강한 육체와 흔들림 없는 마음. 그것들을 익히는 준비야말로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요."-158쪽

"남자란 좌우지간 잘난 체를 해서 자신을 포장하는 걸 좋아하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죠." 나는 대뜸 대답했다. 남성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지 않은 나에게도 몇 명쯤 남자들이 꼬인 적이 있다. 노부인의 말처럼 "난 고급차를 몰고 다녀" "고교 축구로 국립대에 갔지" "난 치한은 결코 용서 못 해"하며 자신의 장점을 큰소리로 내세우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사실과 전혀 다른 경우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은 그 차는 사업을 위해 팔았다는 둥, 우리 고등학교는 축구 명문이었기 때문에 벤치에 앉아만 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는 둥, 그 치한한테 대들었다가 우리에게 불똥이 튀다니 그보다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냐는 둥 횡설수설 핑계를 둘러대어 나를 놀라게 했다. -163쪽

내 좌절이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비통과 우스꽝스러움에 강에도 바다에도 살 곳이 없어질 것이다.-177쪽

내 하루는 이런 식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그 하루가 쌓인 1년도 결국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겠지-267~8쪽

"난 타인을 무시해"하며 냉정하게 말했다. "이모저모 신경은 쓰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래서?'라는 느낌밖에 못 가져. 그래서 어쩌라고? 타인을 향한 내 관심은 그 정도 선이야."-269쪽

이 세상엔 무리한 일투성이야.-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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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6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재밌을 것 같아서 리스트에 담았습니다. ^^

이매지 2007-06-16 14:46   좋아요 0 | URL
이사카 고타로의 장편과는 다른 맛이 있지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중에 혹 엘신님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넘겨드리지요 ㅎ

비로그인 2007-06-17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그럼, 이매지님 만날 때까지 기다릴까요? (웃음)

이매지 2007-06-17 15:45   좋아요 0 | URL
그렇지만 어느 세월에 만나게 될런지. ㅎㅎ

비로그인 2007-06-19 10:39   좋아요 0 | URL
푸하하핫. 지구에 빙하기가 오기 전에는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웃음)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존 반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품절


주전자는 물이 끓자 저절로 전원이 꺼졌다. 안에서 끓어오르는 물이 언짢은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일반적인 사물들의 잔인한 자기만족에 놀랐다. 아니, 잔인한 것은 아니고, 자기 만족도 아니고, 그냥 무심할 뿐이었다. 하긴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부터는 내가 상상한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물을 대해야 할 터였다.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28쪽

하긴, 우리의 모든 순간들 가운데, 삶이 완전히, 완전히 바뀌지 않는 순간이 어디 있을까? 그 모든 변화 가운데 마지막, 가장 중대한 변화가 오기 전까지는. -40쪽

"과거 속에서 사시네요." 클레어가 말했다.
나는 신랄하게 대꾸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사실 그 애 말이 옳았다. 삶,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안, 또 그래, 솔직히 인정하거니와, 그것, 아늑함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 들어가 버렸다. 이것은 충격까지는 아니라 해도 놀랄 만한 깨달음이었다. 전에는 나 자신을 단검을 입에 물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에 맞서는 해적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고 있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나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 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이, 과거가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을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그래도. -66~7쪽

병은 지금 내가 있다고 느끼는 곳과 비슷하다. 어디로부터도, 누구로부터도 멀리 떨어진 곳이다. -77쪽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의 작디작은 배들이 아닌가. 어두운 가을을 헤치며 이 먹먹한 정적을 떠돌아다니는 작은 배. -78쪽

어쩌면 삶의 모든 것이 삶을 떠나기 위한 긴 준비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103쪽

그러나 나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 빛을 발하는 것은 신성한 그녀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그녀다. 이미 사라진 것들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그 빛이 아무리 퇴색했다 해도, 그녀는 내 기억 속에 그녀 자신의 화신으로 존재한다. 내 기억 속 풀이 덮인 둑에 누워 있는 여자와 땅이 이제 그녀의 것으로 간직하고 있는 흩어진 먼지와 마른 골수,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인가? 다른 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녀는 살아남아 있을 것이 틀림없다. 기억의 납 인형 진열관 속에서 움직이는 인형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녀는 나의 그녀와, 또 서로의 그녀와 다를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람은 가지를 치고 흩어진다. 그것은 지속되지 않는다. 지속될 수가 없다. 그것은 불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죽은 자를 우리와 함께 이고 갈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누군가가 우리를 잠시 이고 간다. 그런 다음에는 또 누군가가 우리를 이고 갔던 자들을 이고 가고,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세대들로 이어져 간다. 나는 애너를 기억한다. 우리 딸 클레어는 애너를 기억하고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 다음 클레어도 사라질 것이고, 클레어는 기억하지만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물론 우리 가운데 어떤 것은 남을 것이다. 바랜 사진, 머리카락 한 타래, 지문 몇 개, 우리가 마지막 숨을 쉰 방의 공기에 들어 있던 원자 몇 개.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 지금 우리이고 전에 우리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죽은 자의 먼지일 뿐이다. -122~3쪽

어린 시절에는 행복이 달랐다. 그때는 그냥 축적하는 것, 뭔가를-새로운 경험을, 새로운 감정을- 가지는 것, 그리고 기것이 마치 광택이 나는 기와인 양 언젠가 놀랍게 마무리될 '자아'라는 누각에 올려놓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쉽사리 믿지 않는 것, 그것 역시 행복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자신의 단순한 행운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그 행복한 상태 말이다. -148쪽

모든 것이 약간씩 균형을 잃었고, 모든 각도가 약간씩 어긋나 있었다. 계단은 더 가팔랐고, 층계참은 더 비좁았고, 화장실 창문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도로가 아니라 뒤쪽의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현실, 지독하게도 자족적인 현실이 내가 기억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휘어잡은 뒤 마구 흔들어 자신의 입맛에 맞는 형태로 맞추자 나는 거의 공황 상태에 이를 뻔 했다. 뭔가 귀중한 것이 해체되면서 내 손가락들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빠져나가도록 방기해 버렸다. 과거, 그러니까 진짜 과거보다는 우리가 내세우는 과거가 더 중요하다. -159~60쪽

정말이지 기억을 위한 노력만 충분히 기울이면 사람은 인생을 거의 다시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163쪽

나는 애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그녀 생각을 한다. 하나의 훈련이다. 그녀는 칼처럼 내게 박혀 있는데도 나는 그녀를 잊기 시작한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그녀의 영상은 이미 가장자리가 닳고, 염료 조각, 금박 조각이 떨어져나가고 있다. 언젠가는 캔버스 전체가 텅 빌까? 내가 그녀를 얼마나 모르는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아주 천박하게, 부적당하게 그녀를 알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게을렀던가? 너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너무 나 자신에게만 열중했던가? 그래, 다 맞다. 하지만 그것을, 이런 잊음을, 이런 몰랐음을 꼭 탓할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안다는 면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요것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216~7쪽

기억은 움직임을 싫어한다. 사물을 정지된 상태로 유지하는 쪽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다른 많은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 장면도 하나의 그림으로 본다.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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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2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직접 손으로 세차를 합니다. 무섭게 돌아가는 자동세차 기계 안으로 -
밀어넣고 싶지 않거든요.
매일 열심히 달리면서도 어디 아퍼도, 추운 겨울에 몸이 꽁꽁 얼어도, 더운 여름에
혼자 숨이 막혀도 말없이 나를 위해 노동을 하는 자동차에 대한 작은 감사의 표시로 -
나는 직접 손 세차를 해줍니다. 그러면 그 다음 날 가볍게 달리는 자동차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거든요. (웃음)
모든 사물도 정령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존중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바다, 물에 대한 글인 것 같기는 하나.
저는 이 멋진 밑줄긋기란에서 세상 모든 사물에 대한 시선을 느꼈습니다.

이매지 2007-06-12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빠도 아침마다 꼭 직접 세차를 하고 나가세요. (택시기사하셔요^^) 차를 깨끗하게 하고 나가면 차도 좋고, 운전하는 아빠도 좋고, 타는 손님도 좋다는 마음에서요^^; 그때문인지 차가 아직 별 고장없이 잘 달려주네요^^

비로그인 2007-06-14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핫. 거대한 팥 아이스크림. 맛있어 보이긴 한데...혼자 먹기엔..(웃음)
(- 사실, 이 댓글을 그 페이퍼에 달고 싶었는데..에러가 나서 말입니다.=_=)
이매지님 서재가 참 깔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