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진화
데이비드 버스 지음, 전중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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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훨씬 전에 찰스 다윈이 짝짓기의 미스터리에 대한 혁신적인 설명을 제시했다. 그는 동물들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떨어뜨릴 것 같은 형질들을 종종 발달시킨다는 사실에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많은 동물들이 드러내는 화려한 깃털, 커다란 뿔, 그리고 다른 이채로운 특질들은 생존이라는 점만 놓고 보면 손해만 끼칠 것처럼 보인다. 공작의 눈부신 깃털은 스스로를 포식자들 눈에 더 잘 띄게 만들어 생존에 크게 해를 끼칠 것이 분명함에도 어떻게 진화를 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을까? 다윈이 내린 대답은 공작의 꼬리가 각 개체의 번식 성공도를 높여 주었다는 것이다. 즉 화려한 꼬리를 가진 공작 수컷들은 우수한 배우자를 얻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서 그러한 유전적 특질을 계속해서 전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진화하였다는 것이다. 생존상의 이득이 아니라 번식상의 이득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어떤 형질이 선택되어 진화하는 현상을 다윈은 성선택(sexual selection)이라 이름 붙였다. -20쪽

다윈의 성선택 이론은 진화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두 가지 핵심 과정인 배우자에 대한 선호와 배우자를 얻기 위한 경쟁을 밝혀 줌으로써 짝짓기 행동을 효과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성선택 이론은 1세기 이상 남성 과학자들로부터 강도 높은 비판을 받았다. 암컷들이 배우자를 능동적으로 선택한다는 이론이 그동안 짝짓기 과정에서 수동적인 역할만 담당한다고 알려졌던 암컷들에게 너무 큰 위상을 허락하는 것처럼 비춰진 까닭도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성선택 이론은 주류 사회 과학자들로부터도 격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이론이 인간의 본성은 주로 본능적인 행동에 따라 결정되며 인간의 특별함과 유연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화와 의식(意識) 덕분에 우리 인간은 진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믿음은 계속 유지되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이르러 내가 내 동료들과 함께 심리학과 인류한 분야에서 새로운 이론적 접근을 시작하면서, 성선택을 인간 연구에 응용하려는 시도가 획기적인 도약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는 진화의 산물인 근원적 심리 기제(psychological mechanism), 즉 남성과 -21~2쪽

여성이 열심히 추구하는 짝짓기 전략뿐만 아니라 인간 행동의 엄청난 유연성까지 설명할 수 있는 심리 기제를 밝혀내고자 했다. 이 새로운 학문 분야를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이라 한다. -22쪽

적합성 문제에 대한 해결책 하나는 나와 유사한 배우자를 찾는 것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각양각색의 특질들에 대해서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 결혼에 이르는 경향이 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짝을 짓는 경향은 가치 기준 또는 지능이 비슷하거나,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가장 잘 나타난다. 사람들은 낙태나 사형 제도에 대한 입장에서처럼 자기와 비슷한 정치적, 사회적 가치 기준을 가진 배우자를 선호하며, 실제 부부 사이의 가치 기준은 +0.50의 상관계수가 나타난다. 서로 가치 기준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갈등을 빚기 쉽다. 또한 사람들은 자기와 인종, 민족, 그리고 종교가 유사한 배우자를 바란다. 지능이 비슷한 배우자를 선호하는 경향도 있으며, 실제 부부 사이의 지능은 +0.40의 상관이 존재한다. 외향성, 호감성, 성실성처럼 인성에 관련된 특질에서도 유사성이 중요한데, 이런 특질들에 대해 부부 사이에는 +0.25의 상관이 존재한다. -85~6쪽

섹스는 여성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번식 자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는 섹스를 아무한테나 줘 버리지 않게끔 통제하는 진화된 심리 기제가 있다. 사랑, 진실성, 그리고 친절을 요구하는 것은 여성이 제공하는 섹스라는 자원의 가치에 상응하는 자원들을 남성이 헌신해줄 것을 요구하는 방편이다. 사랑과 친절을 요구함으로써 여성들은 아이들의 상존과 번식에 필요한 자원을 남성으로부터 꾸준히 제공받아야 한다는 적응적 문제를 해결한다. -102쪽

여성이 장기적인 배우자로부터 자원을 얻는다는 사실이 너무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이 항상 명약관화하게 남성이 갖고 있는 자원을 판별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여성의 짝짓기 선호는 자원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거나 앞으로 자원을 얻을 것임을 알려 주는 자질들에 정교하게 맞추어 다듬어졌다. 실제로 여성들은 돈 그 자체보다는 야망이나 지위, 지능, 혹은 나이처럼 자원을 모으게 해 주는 자질들에 더 영향을 받는 듯하다. 이러한 자질들로부터 남성의 잠재 능력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이들을 세세하게 따지고 살핀다.
그러나 잠재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원을 많이 획득할 잠재력을 가진 남성들은 자신들 또한 여성을 까다롭게 고르기 마련이고 종종 일시적 섹스에 탐닉할 것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에게 헌신할 상대를 골라야 한다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사랑과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헌신의 문제에 대한 두 가지 해결책이다. 진실성은 남자가 헌신할 의향이 있음을 알려 준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나에게 헌신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106쪽

우리의 조상들은 여성의 건강과 젊음을 입증해 주는 가시적인 증거로서 두 가지에 기댈 수 있었다. 우선 도톰한 입술, 깨끗한 피부, 부드러운 살결, 맑은 눈,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 탄력 있는 근육 등과 같은 신체적인 외양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증거로서 밝고 경쾌한 걸음걸이, 생기 넘치는 얼굴 표정, 충만한 에너지 같은 행동적 특질이 있다. 젊음과 건강, 곧 번식 능력에 대한 이러한 신체적 단서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남성의 판단 기준을 이룬다. -117쪽

성적 판타지, 쿨리지 효과, 욕정, 사귀는 사람과 빨리 성 관계까지 나아가려는 경향, 상대의 기준을 낮추는 것, 매력을 지각하는 양상의 변화, 동성애 성향, 매매춘, 그리고 근친상간 성향 등은 모두 찰나적인 성 관계를 추구하는 남성의 전략을 밝혀주는 심리적인 단서들이다. 이들로부터 성 전략 레퍼토리에 단기적 짝짓기도 수록한 남성들이 진화적으로 선택되었을 인간 진화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애 남성들이 찰나적인 성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여성의 동의가 필요했다. -177쪽

요컨대 여성의 질투는 배우자의 투자가 다른 여성에게로 새어 나갈지도 모른다는 단서에 의해 촉발되는 반면, 남성의 질투는 배우자가 다른 남성에게 성적 혜택을 제공할지 모른다는 단서에 의해 주로 촉발된다.
이러한 성차는 심리적으로, 생리적으로 모두 나타난다. 질투의 성차를 조사한 한 연구에서 동료들과 나는 511명의 남녀 대학생들에게 두 가지 괴로운 상황, 즉 애인이 다른 누군가와 성 관계를 맺는 상황과 애인이 다른 누군가와 깊은 정서적 애착을 나누는 상황을 비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무려 83퍼센트에 달하는 여성이 애인의 정서적 부정을 더 불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에는 겨우 40퍼센트가 그와 같이 생각한다고 답했다. 대조적으로 남성의 60퍼센트가 애인의 성적 부정을 더 불쾌하게 여긴 반면, 여성은 겨우 17퍼센트가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260쪽

유전자를 전혀 공유하지 않는 남녀가 몇 년, 몇십 년, 혹은 평생을 견고한 연합을 이루어 함께 산다는 것은 인간이 이룩해 낸 참으로 대단한 성취이다. 하지만 부부 사이를 갈라놓는 많은 외압들 때문에 계속해서 함께 산다는 것은 독특한 일련의 적응적 문제들을 낳는 위태위태한 과제가 된다. 성공적인 해결책은 대개 다음과 같은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첫째, 배우자의 탈선을 예방하게끔 배우자에게 진화적으로 중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둘째, 배우자를 소유했다고 공개적으로 신호를 보내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자를 숨김으로써 경쟁자가 감히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 셋째, 자신의 배우자 가치가 타인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음을 알려서 배우자의 질투심을 이끌어 내거나, 배우자 앞에서 자신을 비하 내지 순종하거나, 자신 외에 배우자가 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들 따위는 없다고 배우자를 설득시키는 등의 감정적 조작을 구사한다. 넷째, 희생자에게는 안됐지만, 배신할 낌새를 보이는 배우자를 단죄하거나 경쟁자를 폭행하는 등의 파괴적인 조치를 쓸 수 있다. -282~3쪽

남성은 여성이 그냥 짓는 웃음이나 으레 베푸는 친절을 자신에게 어느 정도 성적인 관심을 표명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심지어 여성은 그런 성적인 관심이 전혀 없을 때조차 말이다. -290~1쪽

감정적 헌신뿐만 아니라 시간, 에너지, 자원의 투자를 놓고도 부부는 서로 직접적으로 갈등을 빚는다. 투자에 대한 갈등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나 신뢰할 수 없는 언행으로 표출된다. 데이트 중이거나 이미 결혼한 여성 가운데 3분의 1이상이 배우자가 자신을 무시하거나, 거부하거나, 신뢰감을 주지 않는 언행을 한다고 불평을 토로한다. 흔한 불평거리 중에는 남성이 그들과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기, 전화한다고 해놓고서 전화하지 않기, 약속 장소에 늦게 나타나기, 데이트나 기타 다른 일을 막바지에 이르러 갑자기 취소하기 등이 있다. 남성들보다 대략 2배 이상의 여성들이 이러한 일들에 대해 불평하며 결국 이러한 일들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손실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데이트 중인 여성의 약 38퍼센트가, 그러나 데이트 중인 남성에서는 겨우 12퍼센트만이 애인이 전화한다고 해 놓고 종종 전화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300쪽

요약하면 장기적인 배우자를 버리게 만드는 세 가지 주요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첫째, 현재의 배우자가 자원이나 능력이 감소하거나 번식에 관련된 자원을 제때 제공해 주지 않기 시작하여 그의 배우자 가치가 떨어졌을 때, 둘째, 나 자신의 자원이나 평판이 증가해서 이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짝짓기 가능성이 열렸을 때, 셋째, 강력한 대안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등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들 세 가지 상황을 반복적으로 접했을 것이므로, 인간은 기존 부부 관계의 이득과 손실을 다른 가능한 대안과 비교하여 따져 보는 심리 기제를 진화시켰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 기제는 현재 배우자의 가치 변화를 민감하게 살피고, 다른 짝짓기 대안을 판별하여 계속 주의를 기울이고, 대체 배우자에게 구애 행위를 하게끔 우리 조상들을 이끌었을 것이다. -338쪽

인간 성 전략의 핵심 메시지는 짝짓기 행동은 엄청나게 유연하며 사회적 맥락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이다. 진화의 오랜 역사를 거쳐 설계된 우리의 복잡한 심리 기제 덕분에 우리는 짝짓기의 적응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융통성 있는 일련의 행동 레퍼토리를 장착하고 있다. 이들 레퍼토리를 사용하여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 우리의 짝짓기 결정을 변형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이라는 문제에서 어떤 행동도 불가피하거나 유전적으로 예정되어 있지 않다. 외도도 일부일처제도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며, 성적 폭력이나 성적 평정도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며, 질투심에 따른 배우자 호위도 성적 무관심도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남성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성적 다양성에 대한 욕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도를 할 숙명을 타고나지 않았다. 여성은 헌신을 하려 하지 않는 남성을 조롱할 숙명을 타고나지 않았다. 우리는 진화가 명한 성 역할에 속박된 노예가 아니다. 각각의 짝짓기 전략을 초래하는 조건들을 잘 이해함으로써 어떤 전략을 작동시키고 어떤 전략을 휴지 상태로 둘지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405~6쪽

진화심리학은 짝짓기 전략의 변이를 설명하기 위해 생애 초기의 경험, 양육 태도, 기타 환경적 요인들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심리학자 벨스키와 그의 동료들은 가혹하고 소원하고 변덕스러운 자녀 양육 태도, 불규칙적으로 제공되는 자원, 부부 간의 분화 등이 자식들로 하여금 일찍 번식하고 여러 상대를 즉시 갈아 치우는 짝짓기 전략을 채택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와 반대로 섬세하고 따뜻하고 이해심 있는 양육 태도, 꾸준히 제공되는 자원, 부부의 화합 등은 자식들로 하여금 천천히 번식하고 안정적인 결혼 유대를 맺는 등의 장기적이고 헌신적인 짝짓기 전략을 택하게 한다. 요컨대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한 명의 배우자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따라서 그들은 빨리 성생활을 시작하고 여러 명의 일시적인 상대로부터 즉각적인 자원을 얻는 단기적인 짝짓기 전략을 택한다. 반면에 예측 가능하게 투자해 주는 부모가 꾸리는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자신이 안정적이고 투자를 아끼지 않는 배우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므로 영속적인 짝짓기 전략을 택한다. -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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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7-10-12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에 대한 탐구는 끝이 없는 것 같아요. ^*^

이매지 2007-10-12 21:12   좋아요 0 | URL
100여장쯤 읽었는데 초반에는 뭐 그냥 안 봐도 알 만한 내용이라
살짝 재미가 식으려고 해요. 쩝.
그래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라도
이렇게 책으로 만나면 뭔가 좀 정리되는 것 같긴 하지만 :)
전호인님 말씀처럼 성에 대한 탐구는 끝이 없는 것 같아요 :)
 
펭귄뉴스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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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뒤에 남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덩어리로 뭉쳐진 기억이다. 몇 년 전의 12월과 1월을 도대체 어떻게 구별해 낼 수 있겠는가. 12월 겨울과 1월 겨울의 차이점은 거의 없다. 12월과 1월은 나의 손바닥과 같다. 두 개의 손바닥은 분명 다르게 생겼지만 손을 맞대어보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왼손에는 흉터가 있고 오른 손에는 없고, 12월에는 크리스마스가 있고 1월에는 없고... 그 차이다. -12쪽

살다보면 기억의 줄기 한가운데 검은 테이프를 붙여놓은 것처럼 깜깜한 시기가 있는데 내게는 그때가 그랬다. 무너져버린 제방을 밟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모든 것이 너무나 빨라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인간의 삶 역시 가속도가 붙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스무 살 무렵은 더디고 더디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기 시작하면 도무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언덕 아래로 사정없이 미끄러지다가 쾅, 하고 박살나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선 어쨌거나 조금은 가벼워야 할 필요가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36~7쪽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았던 어머니의 실체가 갑자기 생생해졌다. 어머니의 살가죽을 닮은 표면을 만지고서야 어머니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 한심했다. 어째서 기억이라는 것은 매개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온전하게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무 조각이 없었더라면 나는 어머니 손득의 감촉조차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78쪽

오차와 오류는 어디에나 있다. 지도에도 있고, 자동차에도 있고, 사전에도 있고, 전화기에도 있고, 우리에게도 있다. 없다면 그건, 뭐랄까,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다. -80쪽

인간들의 믿음이란 정보를 기반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가 믿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의사는 돈이 많을 것이라는 이미지, 변호사는 말을 잘할 것이라는 이미지, 소설가는 담배를 많이 피울 것이라는 이미지, 해커는 지저분할 것이라는 이미지. 인간들은 그런 이미지를 자신의 머리 속에 차곡차곡 저장해 놓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실이 모여 정보가 된다. 나는 그런 잘못을 정정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그 이미지를 이용할 뿐이다. -116쪽

의사는 언제나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의학 공부를 해보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의과대학 1학년 첫 시간의 교재 첫 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을 것 같다. '언제나 얼버무려라. 만약 계속 질문을 던지는 환자가 있다면 마취시켜라'-181쪽

자전거란 인생을 닮아있었다. 뒤로 갈 수 없는, 뭐랄까 전진할 수밖에 없는 삶의 비애랄까. 뭐 그런 게 닮지 않았나싶다. 물론 이런 얘기를 B에게 했더라면 "웃기지마. 그냥 뒤로 가지 못하는 게 좋을 뿐이야. 인생이나 뭐 그런 것과 비교하진 말라고"라며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하긴, 인생이나 뭐 그런 구차한 것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한쪽 방향으로밖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긴 한다. 페달을 뒤로 밟는다고 해서 자전거가 뒤로 가는 것은 아니다. 뒤로 갈 필요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다. 그런데 정말 그런게 인생이 아닌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는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전진했다. -20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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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전화
일디코 폰 퀴르티 지음, 박의춘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3월
절판


한 여성이 남성들의 전화를 기다리는 일에 평생 동안 몇 년을 허비하는지 알아내는 일에 누군가가 한번쯤은, 수고해볼 만하다. 분명히 오 년은 될 거다. 혹은 십 년. 그러면서 여자들은 점점 늙어간다. 인상을 쓰게 되고, 그러면 양미간에 보기 싫은 주름이 생기게 된다. -7~8쪽

남자와 여자의 중요한 차이는, '남자들은 여자들의 전화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남자들은 기다리는 대신에 다른 어떤 일인가를 한다. <란>(ran, 축구 전문 프로그램)을 보고, 에이즈 퇴치제를 개발하고, 금발 여자와 약속을 하고 <파츠>(Faz, 신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짜이퉁의 약자)에 난 주식 시세를 읽고, 근육 트레이닝을 한다. 아니면 그 비슷한 일들을 한다. 그런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그런 일을 기다림으로부터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런 일을 그냥 하고 싶어서 한다. 그러면서 실제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그래서 남자들은 절대로 첫번째 벨이 울릴 때 전화를 받지 않으며, 목소리는 항상 마치 어떤 일을 하고 있는 데 방해를 받은 것처럼 들린다. -8~9쪽

나는 집이란 그곳에 사는 사람에 대해서 대단히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기를 읽는 것처럼 집을 살펴본다. -30쪽

남자들은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여성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 말에 귀기울이는 여성은 모두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지속적으로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는 처음 만났을 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음과 같은 두 문장만을 말하면 된다.
1) 그 점에 대해서 계속 설명해봐요. 아주 재미있거든요.
2) 아, 그건 모르고 있었어요. -34쪽

누군가를 사랑해서 그에게 매혹적으로 보여야 하는 일은, 일종의 마케팅이다. 당신이 앞으로 언젠가 사랑을 받게 된다면, 그때는 실제의 당신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일정한 게임 규칙을 준수해서 2회전을 위한 자격을 얻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게임 규칙 중 하나는 아주 분명하다. 첫번째 섹스 후에 그에게 전화를 하지 않는다. 절대로 전화를 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안 된다. 이 규칙에는 예외가 없다. -76쪽

빅 짐과 나는 독특한 관계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그걸 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혼자 남게 되는 걸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싱글로 지내는 일은, 함께 독신생활에 관한 전문적인 지리한 수다를 떨고 함께 한탄하고 환호할 수 있는 싱글 친구들이 있는 한, 절대로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싱글을 떠나는 모든 사람들은 남겨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어쩌면 언젠가는 혼자만 남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진짜 더 이상 재미가 없다. -79~80쪽

나는 아이들을 어쨌든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너무 직설적이다. 그들은 몹시 뻔뻔스럽게 말을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제대로 대처를 할 수가 없다. -121쪽

만약 사람들에게 서른 살이 넘은 여자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마치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막 고백한 사람을 쳐다보기라도 하듯이 짠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곤 "아, 맞는 사람을 또 다시 찾을 거야"라고 말한다. 아니면 "세상에 널린 게 남자지!"라고 하거나, "너 같은 여자라면 그렇게 오래 혼자 있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생각은 약간 다르게 한다. -122~3쪽

한 여성의 삶에서 가장 흥분된 시간들을 잠정적인 은밀한 마무리에 대한 기대를 동반하고 있는 데이트를 준비하는 시간들이다. 섹스 자체에는 정말로 그와 반대로 종종 긴장이 사라져 있다. -130쪽

나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 이미 며칠 전에 요한나와 함께 여러 번 옷 문제에 대해서 상의를 한 후 마침내 해결을 해놓은 상태다. 섹시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부담스러워서는 안 된다. 우아해야 하지만 과도한 치장은 안 된다. 몇 번의 손놀림으로 벗을 수 있어야 하지만 너무 달라붙어서는 안 된다. 최고로 고조된 황홀한 순간에 청바지가 벗겨지지 않거나, 아니면 옷을 벗었을 때 마치 며칠 전에 상대방 첩보원에게 고문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 더 고약한 경우는 없다. 꽉 조이는 옷, 너무 붙는 속옷은 몸 전체에 흉하게 피멍 든 줄무늬 자국을 남긴다. 바지 단추가 배꼽 아래에 뚜렷한 눌림 자국을 남겨도 분위기가 역시 식는다. -132쪽

내 경험에 따르면, 고정 장치가 없는 스타킹은 역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거처가 불안하게 움직인다. 가자기 발목으로 흘러내리든지, 아니면 혈액 순환을 막을 정도로, 그렇지 않아도 문제 영역인 허벅지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곤 한다. -133쪽

대부분의 커플들은 더 나은 사람에 대한 발견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냥 같이 있는거야. 아니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더 나은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의 시간을 둘이서 메우고 있거나. -19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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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 2007년 6월
구판절판


앎은 아름답다. 한편 좀 알게 되었는가 싶으면 저만큼 달아나 애를 태우게 하는 앎의 신비한 매력은 미의 여신 비너스를 방불케 한다. 둔한 지력을 총동원하여 더딘 걸음으로 따라가며 나날이 새로 태어나는 앎을 바라보는 일은 고통스럽고도 행복하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그림 <프리마베라>에 나오듯 비너스의 왕국을 수호하는 신의 전령사 머큐리처럼, 비너스의 벗인 사랑의 여신처럼 나의 운명 역시 앎의 아름다움을 좇고 숭모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 같다. -7쪽

이빨은 '깐다'는 동사와 결합되는데 '(까서) 드러내 보인다'는 의미가 있는 듯하다. 전문가를 뜻하는 '꾼'과 결합하면 '말 잘하는 사람'이 된다. 썰은 풀고 쌩은 깐다. 뻥과 구라는 치기도 하고 까기도 하지만 대개는 치는 쪽이다. 지금은 보기 힘든 직업과 관련된 '약장수', '라지오(라디오)'도 말 잘하는 사람의 비유였다. '말 잘하면 공산당'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공산당원들이 토론에 능한 것을 빗댄 것으로 "그 친구 정말 공산당이네"하는 식으로 쓰였다. 레드 콤플렉스가 있던 시절에는 쓰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96쪽

"한 사람이 먹는 것이 그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인스턴트 식품처럼 값싸고 급한가. 조미료와 향료로 스스로를 분칠해서 남을 현혹하는 가짜인가. -181쪽

로또에서 1등에 당첨될 수 있는 확률은 1/8,145,060이라고 한다. 내가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위대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내 아버지의 정자이자 나의 한 부분이 언젠가는 한 번은 일등을 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평생 한 번도 일등을 못해봤다는 못난 생각은 하지 말자. 내 옆 사람이 그렇고 그 옆의 옆 사람, 옆의 옆 사람 모두 마찬가지다. 평생 한 번도 일등을 못해봤을 거라고 무시하지 말자. 그들은 우주의 별보다 많은 숫자의 분모를 거느린 확률을 뚫고 태어난 위대한 존재들이다. -195~6쪽

풋고추로 먹기에 일반 고추는 맵지 않고 청양고추는 너무 맵다. 중간쯤 가는 게 없을까, 하는 게 풋고추를 쌈장에 찍어먹을 때마다 나오는 말이다. 어쩌면 사는 것도 그렇다. 너무 심한 고초(苦楚)를 겪는 것은 싫고 모양만 그럴듯한 것이 밍밍하게 사는 것도 그렇고.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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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7-09-18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 책 재미있어보이네요. 성석제의 소풍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냉큼 보관함으로 ^^

프레이야 2007-09-18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사두고 아직 안 읽었어요. ㅎㅎ
'깐다' 재미있네요.

이매지 2007-09-18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티님 / 성석제의 소풍처럼 여기도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ㅎㅎ 군침넘어가요
혜경님 / 한 번에 읽는 거보다 쬐금씩 읽는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ㅎㅎ
 
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절판


샘,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냥 다른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명심해라, 네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네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34쪽

서로 다른 지도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른 길로 인도하는지 생각해보자. "인생이란 어렵기만 한 문제집이야. 푸는 즐거움이라곤 없고 넘기면 넘길수록 팍팍하기만 해"라고 말하는 지도가 있고 "인생이란 놀라운 선물이 켜켜이 쌓인 보물 상자야. 열면 열수록 감사할 일이 가득해"라고 말하는 지도가 있다고 해보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이렇게 상반될 경우, 서로 다른 지도를 가진 두 사람이 설령 서로 비슷한 삶을 산다 해도, 두 사람은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순간 순간을 전혀 다르게 경험할 것이다. -75쪽

샘, 너는 비록 연약하지만 네가 가진 환한 미소는 친절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다. 다른 사람을 기꺼이 도우려는 따뜻하고 착한 사람들이 네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샘, 너는 어떤 사람일까? 네가 자신의 연약한 면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일지 궁금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연약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수많은 가면을 쓴다. 하지만 우리가 강한 척, 용감한 척하지 않아야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 기회를 준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85쪽

"모든 감정은 왔다가 가는 거야. 그러니까 버스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감정이 지나가길 기다려. 좌절감과 분노, 피해의식을 안고 기다린다고 해서 버스가 더 빨리 오는 것은 아니지. 인내심을 갖고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린다고 해서 더 빨리 오는 것도 아니고. 다만 때가 되면 오는 거야. 올 것은 온다고 믿고 기다려."-146쪽

샘, 네 마음은 활기차면서도 위험한 동네와 같다. 대부분은 즐거움이 넘치는 동네지만, 자칫 방심했다간 위험에 빠지는 곳이기도 하다. 때로 죄책감, 수치심, 불안감, 외로움 같은 감정이 너를 옭아매고 놔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부당함, 불행, 죽음, 배신, 거짓말, 모욕감, 당혹스러움이 잊혀질만 하면 떠오르기도 할 것이고. 그러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머, 놀라움, 기쁨, 경탄의 순간들이 불쑥불쑥 솟아올라 너를 즐겁게 만들기도 하고 말이다. -177쪽

마음에 대해 삼십여 년 동안 공부한 끝에,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사람의 마음은 '고장난 콩팥'이다! 이렇게 말하면 할아버지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하고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들어보아라.
콩팥(신장)은 매일 백구십 리터 정도의 혈액을 여과해서 필수영양소를 걸러내고 나머지 액체는 몸 밖으로 배출한다. 우리의 마음은 매일 수입 억 개가 족히 넘는 메시지를 받아들인다. 단순한 감각을 자극하는 메시지에서부터 과거 회상, 미래 예측, 감정 반응에 이르기까지 생각할 거리도 많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마음은 영양가 있는 생각과 노폐물로 처리해야 할 생각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콩팥은 혈액 중에서 영양분을 많이 걸러내고 극히 일부분만 노폐물로 배출하는 반면, 우리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의 생각 중에서 적어도 구십 퍼센트는 마음 밖으로 배출해야 할 영양가 없는 것들이다. -178~9쪽

샘, 살아가면서 규율, 자제, 목표, 계획, 그리고 포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자제해야 하는 충동, 해서는 안 되는 생각, 억제해야 할 망상에 대해서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지켜봐서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네 마음 속 풍경은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격하게 흔들리다가 어느새 차분해져 있고, 정신없게 날아가다가 일순 느릿느릿 기어가고, 막무가내로 떼쓰다가 온순해진다.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가 동굴처럼 텅 비어 있을 때도 있다. 밝은 빛과 잔잔한 물이 모두 네 마음속에 있다. 다만 그것이 언제 자리바꿈을 할지 모를 뿐이다. 그게 마음이다. 네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185쪽

샘, 너와 나는 살아가는 동안 줄곧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관심을 가지면 남을 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분이 좋아지고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고. 또한 세상을 보다 친절하고 안전한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관심을 보이고 또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생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나설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199~200쪽

샘, 개인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 싸우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난 네가 너 자신을 위해서도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네 분노를 잘 다스려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분노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에너지로 승화시켰으면 더욱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훗날 네가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네 손자 손녀들이 훨씬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자라날 수 있을 테니까. -206~7쪽

도대체 우리는 무엇에 굶주려 있는 것일까. 안정감과 행복? 그래, 맞다. 하지만 우리가 갈망하는 안정감이란 무언가를 손에 넣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큰 저택과 멋진 차를 갖게 되면 안정된 삶을 획득했다는 환상은 얻을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환상일 뿐이다. 학교나 직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성취감을 느끼겠지만, 언제나 성취해야 할 또다른 것들이 계속 나타나기 마련이다. 행복은 항상 다음 길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법이니까.
진정한 안정감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만 찾아오고, 서로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내 삶을 충실히 살았다고 느낄 때 얻을 수 있는 보너스와 같은 것이다. -222쪽

너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과거로 돌아가 잃어버린 것을 떠올릴 때면 가슴은 고통으로 가득해진다. 또 내 마음이 미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갈망할 때도 역시 고통스럽다.
그토록 많은 어른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 번 살았던 삶을 다시 살려고 하거나, 이룰 수 없는 삶을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날 네가 나에게 일깨워주었다. 우리가 가진 현재의 삶을 살 때, 지금 여기를 살 때 인생이 훨씬 행복해진다는 것을.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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