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영혼 1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세진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8월
품절


케이트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에게 쇼핑은 늘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결국은 비슷비슷한 것들 중에서 하나를 고를 거면서, 그 짓을 하자고 넓디넓은 매대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녀야 하다니... -12쪽

컴퓨터 모니터에 검은 글씨로 씌어진 그녀의 대화명이 빛났다. 줄리에트는 이 연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인터넷을 이용하여 전혀 모르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세상이었다. 그런 곳에서 대화명은 자신을 나타내는 유일한 지표였다. 대화명은 인터넷상에서 그 사람을 보여주는 전부였다. -18~9쪽

스톡홀름 신드롬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중략)
첫 번째 단계는 나포(拿捕), 이때 인질이 느끼는 스트레스는 매우 커져서 대개 극심한 수준의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감금, 인질을 붙잡은 자들이 협박을 해오는 겁니다. 이 단계는 비인간화의 단계이기도 합니다. 인질의 존재가 상품으로 전락하는 거죠. 더욱이 바로 이 단계에서 인질과 범인의 동일시 현상이 나타납니다. 인질은 차츰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서 범인과 공감대를 느끼게 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후유(後遺)로, 이 단계에서는 스트레스나 우울증이 나타납니다.
-25~6쪽

더글러스는 프로파일러에게 가장 힘든 점이, 살인자의 심리에 완전히 녹아들어 행동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래서 범인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지를 예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긴 그 단계까지 이르려면 긴 호흡으로 일해야 했다. 프로파일러는 수사와 피해자들에 관해 모르는 게 없어야 했다. 밤이든 낮이든 살인자의 인간성이 손에 선명하게 '잡히는' 느낌이 올 때까지, 시체가 어떤 일을 당했을지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그 다음에 프로파일러는 살인자가 '되어야' 했다.
적어도 살인자의 행동, 특히 그가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된 범행 동기와 판타지, 욕구를 이해해야 했다. 그래야 비로소 범인의 프로필을 알 수가 있었다. 프로필을 알면 그의 욕구를 간파하고 앞으로 어떤 위험이 닥칠 것인지 예측이 가등했다. -37~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졸업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07년 10월
품절


사람은 어떨 때 죽음을 선택하는 것일까. 절망이든 슬픔이든, 채무든 식구의 불행이든 실연이든 뭐든 자살할 가치가 있는 조건이 갖춰졌을 때일까.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컵 속에 있는 물은 반드시 가득 차야만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아주 조금 있을 때도 컵이 기울어지면 쏟아져 버린다.
누구의 컵도, 결코 텅 비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컵은 흔들리고 있다. 틀림없이, 누구나 저마다의 진폭으로.
내 컵은 지금 어느 정도 각도로 기울어 있을까? 통근 전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컵은? 플랫폼에 잠시 멈춰 선 사람들 컵은? -78~9쪽

엄마가 그랬어요. 힘든 일이 아무리 많아도 마지막은 반드시 해피엔드로 끝내라고요. 할머니가 돼서 죽기 직전에라도, 꽤 해피엔드였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최고인 거래요. 내 인생이 해피엔드였다면, 그 사람 인생도 한 번 역전해서, 결국엔 해피엔드가 된대요. -90쪽

죽는다는 것을, 모른다. 부모가 죽는 것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자신이 나이 들어 가는 것도, 아들이 어른이 되어 가는 것도, 지금 중년이라고 말하는 나날을 살아가는 것조차도,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모든 게 처음 경험하는 것이고, 모든 것이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경험인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어른'이고 '어린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기 시작한다. -212~3쪽

아이와 가까이 지내는 건 어렵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어른이고, 훨씬 어리고, 훨씬 다정하고, 훨씬 잔혹하고, 걱정 때문에 가슴이 아플 때도 있고, 조금은 상식을 생각하라고 말해 주고 싶어질 때도 있고, 맥 빠질 정도로 무신경한가 싶으면, 금세 오싹할 정도로 어두운 모습으로 태도를 바꿀 때도 있다. 정답이 없다. 정체를 알 수 없아.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월급은 박해도 교사라는 직업을 좋아하고... 이렇게 생각하면 지나치게 잘난 척하는 것일까?-213~4쪽

부모 자식 사이란 게, 꺼끌꺼끌하단 생각이 들거든요. 사포나 양면테이프 같구나 싶어요. 마찰력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러니까 딱 들러붙은 듯이 서로 알 수 있는 때도 있고, 반대로 조금만 어긋나도 서로 상처 받고...-32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품절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스물일곱의 그 저녁에, 남들은 눈부신 청춘이라며 부러워하는 스물일곱의 그 밤에, 나는 내 생이 어쩌면 이렇게 하찮게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계시와도 같은 예감에 직면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삶, 여자친구의 대학원 숙제는 도맡아 해주면서도 정작 필요할 때는 버려지는 이런 삶은 앞으로 찾아올 찬란한 인생의 전주곡, 그러니까 고진감래라고 말할 때의 그 '달콤한' 고(苦)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삶의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아, 그러나 나는 결코 내 인생이, 예고편이 전부인 뻔한 영화가 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20쪽

그녀의 애교에는 자연스러움이 결여돼 있었는데, 그건 연기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애교를 떨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까지 온전히 내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필사적이 되는 순간 애교는 더이상 애교가 아니라 공포가 된다. -23쪽

여자를 달래는 것은 권투에서 잽을 먹이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해서 언제 상대방을 다운시키나 싶지만 계속 하다보면 꽤 효과가 있다. 잽이 안 통한다고 갑자기 강력한 펀치를 날려서는 안 된다. 그럼 모든 게 파장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25쪽

"자네도 요즘 젊은이 같구만. 생각도 하기 전에 질문부터 하고 있잖아."
"그게 어때서요?"
"우선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하거든. 그리고 틀리더라도 일단 자기 답을 준비해둬야 하는 거야."
"왜요?"
그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세상이 그런 젊은이를 좋아하니까. 세상은 질문하는 젊은이를 좋아하지 않아. 자기 대답을 갖고 있는 젊은이를 원하지."
"질문을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배웠는데요."
"그럼 그렇게 생각하고 살게."-46~7쪽

기회는 신선한 음식 같은 거야. 쟁장고에 넣어두면 맛이 떨어져. 젊은이에게 제일 나쁜 건 아예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거야. 차라리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게 더 나아.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 이게 제일 나빠.-54~5쪽

인터넷은 미로와도 같다. 처음에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들어오지만 포털의 뉴스에 한번 낚이면 그 목적도 잊어버리고 허접스러운 뉴스의 미로를 헤매게 된다. -64쪽

사랑이 운명이라고 믿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운명이란 맞힐 수밖에 없는 답을 결국 맞히는 것이다. 사랑해야 할 연인들에게는 맞힐 수밖에 없는 답이 즐비하다. 신화 속에는 깨진 거울이 서로 만나 온전한 거울이 되는 얘기들이 나온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주몽은 끝내 고구려의 왕이 된다. 운명은 누구 말마따나 과녁에 명중하도록 쏘아진 화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백 퍼센트 명중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 이미 만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들의 만남을 운명이라 믿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다. 단 한 개의 단서도 치명적이며, 단 한 조각의 유류품도 무서운 확신이 된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무능력한 탐정, 서툰 수사관이다. 그들은 법정에서는 채택도 하지 않을 어수룩한 증거 하나만으로도 놀라운 신념에 도달한다. 누구도 그 신념을 철회시킬 수 없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신념, 그것은 운명에 대한 확신이다. 이 서툰 탐정의 눈에, 운명적 사랑이라는 사건의 전모는 이미 명백하며 범인의 검거는 식은 죽 먹기다. 화살은 이미 표적에 꽂혀 있고 표적으로 걸어가 십 점 만점의 정중앙에서 그것을 확인하고 뽑아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82~3쪽

화살을 뽑아든 우리의 영웅은 이렇게 외치기만 하면 된다. 이게 바로 운명적 사랑이라고. -83쪽

사람들은 책 한 권을 들고 나갈 때도 많은 생각을 한다.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대노고 홍보하는 셈이니까. 데이트라면 더할 것이다. 우선은 들고 다닐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하겠지. 철면피가 아니라면 <소녀경>이나 <아무도 몰랐던 성(性)의 비밀>같은 책은 좀 곤란할 것이다. 고전은 고루해 보일 수 있으니 패스. <돈키호테>같은 책은 실제 내용은 전혀 고루하지 않으나 늘 세계명작전집 첫머리에 있으니 문제가 된다. 한편 너무 실용적인 책은 신비감을 주지 못한다. <협상의 기술>같은 책을 데이트할 때 들고 나간다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괜한 경계심만 불러일으킬 것이다. <바둑의 정석>이나 <월간낚시>같은 유로 대략 난감하고 <반지의 제왕>같은 판타지는 아무리 고전이라도 사람을 좀 어려 뵈게 만들고 약간 현실에서 동떨어진 몽상가처럼 보이게 한다. 영화잡지를 말아쥐고 다니면 좀 난 체하는 사람 같고 시사주간지를 들고 다니면 아저씨 같다. 그런가 하면, 교과서에 실린 작가의 책도 문제. 그런 소설을 들고 다니며 젊은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란 전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155쪽

세상에 그토록 많은 책이 있건만 데이트할 때 들고 나가기 적당한 책은 별로 없다니, 옷은 많은데 입고 나갈 옷은 없다는 여자들의 한탄이 아마 이와 비슷할 것이다. -156쪽

우리는 다시 한 번 운명이라는 도료로 우리의 만남을 멋지게 치장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우연이란 말인가. 내가 정은영에게 조금만 빨리 혹은 늦게 말을 붙였더라도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궤도를 이탈한 우주선처럼 영원히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버렸을지도 모른다. 또한 내가 그 주가 아니라 그 전주 혹은 그 다음주에 출연했다면 역시 우리는 서로를 코앞에 두고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밖에도 무수한 '....하지 않았다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만남을 운명이라 믿고 싶어하는 연인들의 소중한 재산이었고 언제 꺼내봐도 질리지 않는 메뉴였다. -162~3쪽

"나가자."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꺼냈다. "내가 낼게."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좀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더 가난해진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그 '남들 다 하는 것'때문에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으라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163쪽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맞아, 너도 피아노 치지 않아? 독서량도 우리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세대는 그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193쪽

사실 어른들은 우리 세대가 책도 안 읽고 무능하며 컴퓨터 게임만 한다는 식의 이미지를 갖고 있짐나 그건 완전히 착각이다. 정작 책도 안 읽고 무능하고 외국어도 못하면서 이렇다 할 취미도 없는 사람들은 그날 면접장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던 면접관들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80년대에 태어나 컬러TV와 프로야구를 벗삼아 자랐고 풍요의 9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 대학생 때는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2002년 월드컵에 우리나라가 4강까지 올라가는 걸 목격했다. 우리는 외국인에게 주눅들어보지 않은, 다른 나라 광고판에서 우리나라 배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첫 세대다. 역사상 그 어느 세대보다도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되었고 타코난 코스모폴리탄으로 자라났다.
도스가 윈도가 되고 보석글이 아래한글이 되고 유닉스 기반의 PC통신이 인터넷으로 발전해가는 것을 몸으로 겪었고 그 모든 운영체제 프로그램을 대부분 능숙하게 다룰 수가 있다. 예전이라면 전문 사진사나 찍을 법한 사진도 우리는 몇십만원짜리 카메라로 척척 찍고 과거엔 방송국에서나 하던 동영상의 촬영과 편집도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다. -193~4쪽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 윗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서 자라났고 이전 세대에 비하자면 거의 슈퍼맨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직업이 없다. 이게 말이 돼?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했는데, 부모나 선생이 하라는 거는 얌전히 다 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야? 세상은 죽이는 스터프들,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가득 차 있는데 왜 우리 주머니에는 그걸 살 돈이 없는거야? 일 인당 국민소득 이만 달러라더니, 다 어디로 간 거야?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는지 알아? 내 생각엔 우리가 너무 얌전해서 그래. 노땅들이 무서워하질 않잖아. 생각해봐. 386들은 손에 화염병을 들고 있었다구. 겁 많은 노땅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어. 우리를 무서워해야 일자리도 주고 월급도 올려주고 그러는 건데, 이 놈의 대기업들은 채용은 안 하고 대학에 건물만 지어주고 앉아 있잖아. 누가 건물 필요하대?-194쪽

사랑의 기쁨은 그 예기치 않음에서 오는데, 정작 그 예기치 않음 때문에 인간은 불안에 떨며 그것이 제 손아귀를 빠져나갈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상대방을 만나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함께 최고의 기쁨을 누린다 해도 그것은 사업의 성공이나 고시 합격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두 연인이 쟁취한 사랑의 승리는 오직 그들만의 것이므로 그야말로 배타적인 것이며 그 때문에 언제나 위태로워진다. 증명서도 공인된 형식도 없다. 그날 코엑스에서 우리를 스쳐 지나간 수만 명의 사람들 중 누구도 우리 기쁨의 증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마치 날달걀을 던지며 노는 어린아이들처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주 작은 일에도 그들의 기쁨은 휘발되고 날카로운 고통이 그들을 지배하게 된다. -211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07-10-26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라 나왔어요? 어때요?

이매지 2007-10-26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에 맛만 보고 자려다가 1장 다 보고 잤다는 정도로 ㅎㅎ
아마 오늘 다 읽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ㅎ
가독성은 좋은 것 같아요. ㅎ

홍수맘 2007-10-26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님 얘기 기다릴래요.
확실히 김영하님의 소설은 중독성이 있는지라......

이매지 2007-10-26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이따가 리뷰 올릴께요 :)
한 30페이지 남았나 그래요 ㅎ
 
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구판절판


새로운 계절은 늘 비가 데리고 온다.
아니, 아니네요. 새롭다는 말은 딱 들어맞지 않는 것 같아요.
다음 계절, 다음 계절은 늘 비가 데리고 와요. 이 도시에서는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결코 극적인 변화가 아니거든요. 변덕스러운 비가 내릴 때마다 경계선을 차츰차츰 침식하듯 계절이 바뀌어가죠. 애매하게, 미련이 남는 듯, 꾸물꾸물 계절이 움직여요. -13쪽

돌이켜 생각해보면, 특별히 불쾌한 감정은 아니었어요. 난 직접적인 관계자도 아니고요. 하지만 자라면서 어떤 부조리한 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몸속 깊은 곳을 누가 슬그머니 휘젓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가라앉은 앙금 속에서 뭔가가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죠. 그때 느끼는 그 불편한 기분이 조금씩 조금씩 몸속에 축적됐어요. -20쪽

공포는 신빙성을 높여주는 양념, 적당히 치면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만들어줘요. -21쪽

벚나무는 참 이상해요. 다른 나무는 일년 중 어느 때나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있잖아요? 은행나무, 동백나무, 단풍나무나 버드나무도 그렇죠. 그런데 벚나무만은 평소에는 그 존재가 잊혀져요. 벚꽃이 안 피어 있을 때는 그냥 이름 없는 나무. 하지만 꽃이 피는 계절에만은 거기 벚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들 기억해내요. 평소에는 잊혀져 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23쪽

어떤 우연한 계기에 눈덩이가 비탈을 구르기 시작해요. 점점 속도가 붙으면서 눈 깜짝할 새에 커져서 산기슭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리거든요. 물론 눈덩이의 중심에는 인위적인 조작도 있고, 억눌려 있던 감정도 있겠죠. 하지만 난 어떤 계기에 우연의 연속이 맞물리면서 인위적인 걸 능가하는 무서운 일을 일으킬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하찮은 속셈을 비웃기라도 하듯 크나큰 재앙으로 답하는 거예요.
그 사건도 그런 거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40쪽

가끔 생각해보곤 합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죄인가.
부모든, 자식이든, 형제든, 이해할 수 없는 건 이해할 수 없어요. 그게 나쁜 일인가? 이해할 수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체념하는 것도 일종의 이해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용서하지 않거든요. 모르겠다고 괴롭히고, 정체를 알 수 없다, 설득이 안 먹힌다고 공격합니다. 뭐든지 간략화, 메뉴얼화됩니다. 화를 내는 이유가 '이해할 수 없다'일 때가 많아요.
사실은 이해할 수 있는 쪽이 훨씬 적지 않나요? 이해했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죠. 그러니까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는 ㅍ녀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잘못된 생각일까요.-204~5쪽

어른들은 애들한테 쓰는 시간에 인색하잖아요.
자기가 쓸 수 있는 시간을 100이라고 치면, 애한테 쓰는 건 10정도라고 정해놓죠. 동네 어른이라면 다른 집 애한테 쓰는 건 2나 3쯤 될까? 말을 시킬 때도 여기서 1쯤 써줄까 하고 계산하는 게 빤히 보여요. 그러니까 뭐라고 말을 시켰다가 애가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1만 쓸 생각이었는데 3 쓰게 생겼다 싶으면 다들 허겁지겁 애를 밀쳐내는 거죠.
애들은 어른이 자기한테 시간을 아끼는 데 민감해요. 저쪽에서 아끼면 괜히 더 욕심이 나니까, 필사적으로 어른한테 시간을 빼앗으려고 들어요. 대개의 경우엔 역효과가 나서 실패하지만요. 그렇게 해서 어른에 대해 불신감을 갖게 되고 체념하게 되는 거죠.
부모나 교사나 평소에는 자기 시간에 인색하면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만은 '자, 숨기지 말고 다 이야기해봐라'라고 하죠.
자기 시간은 안 주면서 네 시간을 통째로 내놔라, 그러면 어떻겠어요? 애들이 저항하는 것도 당연한거죠. -255~6쪽

그런 건 완성하기 전에 남한테 보여주거나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야심은 가슴속에 묻어둬야죠. 입 밖에 내면 마법이 풀려버려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천천히 키워나가야 합니다. -307쪽

사람마다 문득 돌이켜보게 되는 인생의 한 시기라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한테 빛나는 시기라고 할까요, 잊을 수 없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꼭 좋은 때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울적하던 때라든지, 껍데기 안에 틀어박혀 있던 시기일지도 몰라요. 좋고 나쁜 걸 떠나서, 좌우지간 그 사람의 핵이 되는 시기라는 게 있거든요.
어렸을 때라는 사람도 있겠죠. 학교 다닐 때라는 사람도 있을테고, 성공해서 유명해졌을 때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시기는 저마다 다양하지만, 가끔씩 어떤 스위치가 켜지면 저도 모르게 그 무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문득 정신이 들어보면 그 무렵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 시기가 없으신가요?-32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서실의 바다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9월
절판


병사는 기다리는 것이 일이라고 한다.
싸우는 것이 일이 아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계속해서 기다린다. 그 전쟁에서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다. 하긴 그것은 병사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거의 대부분이 기다림이다.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버스를 기다리고,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성실하지 못한 애인의 전화를 기다리고, 따분한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고객이 잊어주기를 기다린다. 남편과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고개를 움츠리고 경기가 호전되기를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그 앞의 순간의 섬광이 있는 것이다. -5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